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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천지팔양경에 등장하는 무애보살과 무변신보살이란...?

by 예경 2017. 2. 1.

천지팔양경을 연구하시는 분치고, 무애보살과 무변신보살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간략하게나마 소개해봅니다.

 

 

 

 

 

 

무애보살은, 오백나한중 425존에 해당하는 무애행존자를 의미하며...

대반야바라밀다경 제581권에 등장하시고 동쪽의 백세계 저편의 대온여래응공정등각께서 계신 세계에 있는 보살님입니다.

이제 무애보살께서 등장하시는 대반야바라밀다경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사리자와 대중들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자옵고 동쪽을 보니, 백 세계 저편에 대온(大蘊) 여래·응공·정등각께서 성문과 보살들 대중에게 둘러싸여 보시바라밀다에는 수승한 공덕이 있으므로 큰 과위를 얻는다고 설법하고 계셨다. 거기에 무애(無礙)라는 보살이 있는데 비록 집에 있으나 집착함이 없이 모든 것을 버리어 온갖 유정에게 보시하되 진기한 보배를 산같이 쌓아 두고 유정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두 보시해 주고, 유정들에게 권하되 스스로가 수용한 뒤엔 다시 다른 이에게 보시하기를 걸림없이 하며, 이와 같이 보시하되 물듦이 없이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않으며, 이렇듯이 의복·침구·음식 따위 물건을 모두 산같이 쌓아 놓고 유정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두 보시하되 유정들에게 권하여 스스로가 수용한 뒤에는 다시 다른 이에게 보시하게 하되 마음에 걸림이 없이 하며, 이와 같이 보시하되 유정들에게 권하여 스스로가 수용한 뒤에는 다시 다른 이에게 보시하게 하되 마음에 걸림이 없이 하며, 이와 같이 보시하되 물듦이 없이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그 때에 사리자와 대중들이 모두 다시 보니, 무애보살이 7보로 백천 대의 황금 수레를 장식하고, 낱낱 수레에는 하나씩의 여자를 실었는데 얼굴이 단정하였고 갖가지로 장엄하게 하였으며, 그 낱낱 여자들이 백 사람의 시종을 거느렸는데 시녀마다 작은 수레에 타고 뭇 보배로 장식하였으며, 낱낱 수레 위엔 백천 냥의 황금과 온갖 도구를 모자람이 없이 실어다가 거리에 놓고 큰 소리로 외치되 '누구든지 필요하신 분은 마음대로 가져가시오' 하여 이렇듯이 보시하되 집착함이 없이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동쪽의 무애보살이 집착하는 마음이 없이 보시하는 것을 보았느냐?"

 

사리자가 대답했다.

"보았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았습니다, 선서시여."

 

부처님께서 분부하셨다.

"보살이 큰 보리를 구하려면 모두가 이와 같이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네 뜻에 어떠하냐? 무애보살의 보시가 광대하지 않으냐?"

 

사리자가 대답했다.

"광대하옵니다, 세존이시여. 광대하옵니다, 선서시여. 무애보살이 보시한 선근은 한량이 없고 끝이 없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다, 네 말이 옳다. 만일 보살이 모든 법이 공한 것으로 관찰하고, 일체지의 지혜에 수승한 공덕이 있는 것을 반연하고 유정들을 가엾이 여기어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시하면 동쪽의 무애보살이 얻은 보시의 복덕보다 백배 천배 내지 오파니살담 배나 더 훌륭하리라."

 

 

 

 

 

 

 

 

이번에는 무변신보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백나한중 207존과 422존이 무변신존자으로 다른 오백나한과 달리 2분이 계십니다.

두분 모두 같은 분이라고 보시면 되는데, 그 이유는 무변신보살은 무변신여래의 화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세계의 25보살중 한분이기도 하며 십왕생경, 대반열반경, 완릉록 등에 등장하십니다.

 

아래의 내용은 대반열반경의 내용입니다.

 

 

이 때 대중은 모두 저 무변신보살과 그 권속들을 보았다. 그 보살의 몸에는 털구멍마다 큰 연꽃이 솟아나고, 연꽃마다 7만 8천 고을[城邑]들이 있는데 길이와 너비가 비사리성과 같고, 담벼락과 해자들은 7보로 섞어 쌓았고 보배로 된 다라나무가 일곱 겹으로 줄지어 섰으며, 백성들이 번성하여 편안하고 즐거우며, 염부단금으로 망루가 되었는데 망루마다 7보로 된 숲이 있어 꽃과 열매가 무성하고, 실바람이 불 때마다 아름다운 음성을 내니 그 소리가 화평하여 마치 하늘 음악을 잡히는 듯 성안에 사는 백성들이 이 음성을 듣고는 곧 가장 좋은 쾌락을 얻으며, 여러 해자 안에는 맑은 물이 가득하여 향기롭고 깨끗함이 진주 유리와 같으며, 이 물 위에는 7보 배가 있어 모든 사람들이 마음대로 타고 다니면서 목욕도 하고 유희도 하며 서로 즐기니 그 쾌락이 그지없었다.

 

또 한량없는 가지각색 연꽃이 있는데 우발라화·구물두화·파두마화·분타리화들로서 그 꽃의 크기가 수레바퀴만하며, 해자의 언덕 위에는 숲동산들이 있고, 동산마다 못 다섯씩 있고, 이 여러 못 가운데는 또 우발라화·구물두화·파두마화·분타리화가 있어 크기가 역시 수레바퀴만하고, 향기가 아름다워 참으로 즐길 만하며, 그 물은 깨끗하고 맑아 부드럽기가 제일이며, 오리·기러기·원앙새 등이 그 속에서 헤엄치며 다니고 그 동산 안에는 각각 여러 가지 보배로 만든 궁전이 있고, 그 궁전 뜰마다 길이와 너비는 사방이 반듯하게 4유순씩이며, 그 담벽은 모두 네 가지 보배로 되었으니 금·은·유리·파리며, 진금으로 만든 창호에는 난간이 둘러 있고 매괴로 된 땅 위에는 금모래를 깔았으며, 그 궁전에는 7보로 된 못과 내가 많고 낱낱 못가마다 열 여덟개의 황금 사다리가 있고 염부단금으로 파초나무가 되었으니, 마치 도리천의 환희원(歡喜園)과 같았다.

 

이 성곽마다 8만 4천 임금이 있고 임금마다 한량없는 부인과 궁녀가 있어 서로 즐기고 쾌락을 누리며, 다른 백성들도 또한 그와 같이 제각기 사는 곳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있는 중생들은 다른 이름은 듣지 못하고 위없는 대승의 법만 들으며, 여러 가지 꽃 가운데는 각각 사자좌가 있으니 사자좌의 다리는 모두 감색 유리로 되었으며, 부드럽고 흰 옷으로 자리 위에 깔았으니 그 옷이 아름답기란 삼계(三界)에 뛰어나고, 사자좌마다 한 임금이 앉아서 대승법으로 중생을 교화하며, 어떤 중생들은 받아 지니고 쓰고 읽고 외우며 말씀한 대로 수행하여 대승 경전을 펴는 것이다. 그 때 무변신보살이 한량없는 중생들을 자기의 몸에 편안히 머물게 하여 세간의 즐거움을 버리게 하니, 모두 말하였다.

 

"애달프다, 애달프다. 세간이 비는도다. 부처님이 오래지 않아 열반에 드시리라."

 

그 때 무변신보살이 한량없는 보살에게 겹겹으로 호위되어 이러한 신통력을 나타내고 나서 한량없는 가지각색 공양거리와 훌륭하고 아름다운 음식을 올렸는데, 만일 그 음식의 향기를 맡기만 하면 모든 번뇌의 때가 모두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 보살의 신통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대중이 이렇게 변화하는 것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무변신보살의 몸뚱이 크기가 가이없어 허공과 같아, 여러 부처님을 제하고는 아무도 이 보살의 몸이 가이없음을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다시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壁斷際禪師宛陵錄)이라는 법어집의 내용입니다.

 

 

"무변신보살(無邊身菩薩)은 왜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합니까?"

"실로 볼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무변신보살이란 곧 여래이기 때문에 응당 보지 못한다. 다만 너희에게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부처라는 변견(邊見)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며, 중생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중생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있다[有]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있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없다[無]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없다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범부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범부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며 나아가 성인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서 성인이라는 변견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만 모든 견해만 없으면 그대로가 곧 가이 없는 몸[無邊身]이니라. 그러나 무엇인가 보는 곳이 있으면 곧 외도라고 부른다. 외도란 모든 견해를 즐기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있어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여래란 곧 모든 법에 여여(如如)한 뜻이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미륵도 또한 그러하고 모든 성현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여여하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다. 여래의 정수리는 두렷이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두렷이 보는 것도 없으므로, 두렷하다는 변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 몸은 하염 없으신 것이다. 숫자로써 헤아리는 범주에 속하지도 않지만, 다만 방편으로 허공에 비유할 뿐이니라.

 

‘원만하기가 태허공과 같아서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으며’ 한가로이 일삼을 것이 없다. 다른 경계를 억지로 끌어들여 설명하려 하지 말 것이니, 설명하려 들면 벌써 식[識]이 이뤄지고 만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의식의 바다에 잠겨서 나부끼는 쑥대처럼 흘러 도네.’라고 하였다.

 

그저 말하기를 ‘나는 알았으며 배워서 얻었으며, 깨달았으며, 해탈하였으며, 도의 이치를 얻었노라.’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강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지만 약한 곳에서는 뜻대로 되질 않는다면 이런 견해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내 너에게 말하노니, 한가하여 스스로 일 없도록 하여 쓸데없이 마음을 쓰지 말라.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나니, 오직 모든 견해를 쉴지니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봄[內見]과 밖으로 봄[外見]이 모두 잘못이며 부처의 도와 마구니의 도가 모두 나쁜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문수보살이 잠깐 두 견해를 일으켰다가 그만 두 철위산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문수보살은 참된 지혜의 상징이고 보현보살은 방편적인 지혜의 상징이다. 방편과 참됨이 서로서로 작용을 하여 끝내는 방편과 참됨 그것마저도 사라지고 오로지 한 마음뿐인 것이다. 마음은 결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서로 다른 견해가 있는 것이 아닌데, 부처의 견해를 갖기만 하면 바로 중생의 견해를 내게 되느니라.

 

있다는 견해[有見], 없다는 견해[無見], 영원불변하다는 견해[常見], 단멸한다는 견해[斷見]가 바로 두 철위산 지옥을 이룬다. 이처럼 견해와 장애를 받기 때문에 역대의 조사들께서 일체 중생의 본래 몸과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바로 가리키신 것이다. 이것은 닦아서 되는것도 아니고 점차적인 단계를 밟아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밝음이나 어두움에 속하지도 않아서,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도 없으며 어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두움도 없다. 그러므로 밝음 없음[無明]도 없으며 또한 밝음 없음이 다함[無明盡]도 없다. 우리이 선가의 종문에 들어와서는 누구든지 뜻을 간절하게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것을 이름하여 법이라 하고 법을 보기 때문에 부처라고 하며, 부처와 법이 모두 함께 없는 것을 승(僧)이라 부르며, 하릴없는 중이라 부르며, 또한 한몸의 삼보[一 三 ]라 하느니라. 대저 법을 구하는 이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고,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도 말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아서 마땅히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하느니라.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부처랄 것도 없으며, 법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랄 것도 없으며, 대중에 집착하여 구하지 않기 때문에 승(僧)이랄 것도 없느니라."

 

 

 

진본 불설팔양신주경은 동방과 매우 관련이 깊은 경전이고, 그 활용본인 불설천지팔양신주경도 역시 동방과 매우 관련이 깊습니다.

그렇기에 동방과 매우 관련이 깊으면서 팔양경의 마인드를, 천지팔양경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두 보살님이 등장하신 것입니다.

 

즉, 집착없는 마음을 강조하기 위해 무애보살이....

무변신보살의 몸은 여러 부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볼 수 없다라는 내용을 통해,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마음을 연구하는 유가학파의 유식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무변신보살이 등장한 것입니다.

 

 

자! 이제 무애보살과 무변신보살이 어떤 분인지 대략적으로 이해를 하셨을텐데요.

두 보살님의 특징을 머리속에 잘 기억하시고 천지팔양경의 번역본을 다시 한번 보시면....

그 내용과 와닿는게 평소와는 조금 다를 것입니다.

 

천지팔양경은 원래 이렇게 읽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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