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무속의 잊혀진 흐름 (1) ~ 시대적 상황
무속의 기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삼천년도 더 된 토착신앙이라고 하지만...
고려시대, 삼국시대, 그 이전의 한국 토착신앙의 맥은 간간히 흔적으로 남아있는게 대부분이고 상당수가 이미 소실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무속의 맥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대부분 조선후기를 기점에서 멈춥니다.
즉, 현대에 전해지고 있는 무속의 형태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이 아닌 조선후기에 전해진 것들과 가장 유사합니다.
조선시대는 크게 조선전기(1392~1591)와 조선후기(1592~1897)로 나뉘는데,
전기와 후기의 기준점은 전쟁과 혼란으로 가득한 1592년 임진왜란으로 보며...
1592년~1599년 7년간의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의 국토는 상당히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고통에 신음하며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나라가 힘들고 백성이 힘들 때에는 결국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신(神)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종말론을 언급하며 혼란을 가중시키는 사람들에 대한 부분은 제외합니다.)
그때 당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민간에 이미 퍼진 불교와 임진왜란 이후로 큰 변화를 겪어 발전한 무속신앙이었습니다.
(참고로, 천주교와 동학 등은 이때보다 백년은 더 지난 이후에 퍼지게 됩니다.)
임진왜란 이후의 상황은,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많이 사라진 625전쟁이 막 끝난 혼란스러운 상황과 유사했을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후의 참상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고통속에 자그마한 희망을 찾으며 살아가게 됩니다.
즐거움보다 고통이 더 많은 날들...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전쟁에 직접 참여한 군인들도 정신이 병드는 것을 막지 못하는데,
그러한 상황을 아무런 준비없이 겪은 사람들의 육체적, 정신적인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시작되고, 양이 극에 달하면 음이 시작되듯....
사람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면 고통을 덜어주고 진정시켜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는건 천지자연의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당시 무당은 아니지만, 하늘과 소통할 수 있으며....
현재 전해지는 무속의 큰 틀을 만든 그들은 이러한 시대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필연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무속역사의 뒤에 묻혀 사라진 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무속의 잊혀진 흐름 (2) ~ 소격서의 상황
고려시대에는 송도에 있던 소격전(昭格殿)은 삼청경의 세분의 천존과, 일월성신, 태일신, 뢰신, 용왕 등의 여러 도교신들을
모시고 도교적 제사를 지내는 부서였는데 태조5년 1396년에 현재의 종로구 삼청동으로 옮겼습니다. 처음에는 소격전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세조12년 1466년의 관제개편 때 소격서(昭格署)로 격하되었습니다.
잡과(雜科)에 속한 소격서는 과거시험이 아닌 취재(取材)를 통한 면접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조선초기에는 주로 양반의 서얼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운영 되었습니다.
성종5년 1484년 1월 16일...
조선왕조 역사상 처음으로 성종이 소격서의 해체에 대해 승정원에 조언을 구하였지만,
승정원에서는 국가의 큰 제사중 하나이며 유래 또한 오래되어 가볍게 없앨 수 없다라고 답변을 합니다.
성종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소격서를 감찰을 하여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은 어떤지 조언을 구하였고,
승정원에서는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다음날 17일에 승정원에서 소격서의 감찰을 시작하였고...
나흘뒤인 21일 감찰의 결과가 보고 되어, 소격서의 기강을 바로 잡습니다.
아래는 승정원에서 소격서를 감찰한 보고내용입니다.
1. 초제(醮祭)에 실과 등의 물건을, 감찰(監察)과 관원으로서 마음을 써서 검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제조(提調)가 규적(糾摘)하여 계달(啓達)해서 중하게 논죄한다. 도성 안의 사녀(士女)들이 세탁한다는 핑계로 난잡하게 왕래하니, 금단(禁斷)하는 일을 거듭 밝힐 것이며, 또 종들은 자기 집에 왕래하지 못하게 하고, 밖에 있는 종은 재소(齋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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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몇일간 감찰한거 치고는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소격서의 기강이 헤이해지고 부패하였는지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성종이 소격서 폐지의 기회를 만들기 위한 감찰이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종의 재위기간 당시에 이미 왕실과 대다수의 양반들의 마인드가 불교와 도교 그리고 무속인은
좌도(左道)이며 사도(邪道)라고 보고 있었고, 우도(右道)는 오로지 유교 하나뿐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성종이전부터 있었으며, 세종대왕도 도교를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참고로 이 당시의 좌도는 잘못되고 삿된 도(道)를 의미하였고, 우도는 올바른 도(道)를 의미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양반들의 소격서 해체운동이 시작되었고...
양반의 서얼들은 소격서에서 점차적으로 줄어들고, 그 자리를 중인들이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산군(1494∼1506)과 중종(1506∼1544)의 재위기간에 양반들의 소격서 해체운동은
가장 치열했고 결국 왕실과 양반들의 치열한 대립구조로 이어지게 됩니다.
당시 왕이 연산군과 중종이 아니라 성종이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텐데, 이 두 왕들은 역대왕들이 유지해왔던 것을
무너뜨리면 안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당시에 도교의 법술중 세속적인 법술 일부를 도교 전체의 문제라는 식으로 부풀려 마녀사냥을 하듯
도교를 펌하하거나 세상을 속이고 더럽히는 좌도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기도 하였고,
도교의 신들은 천자(天子)인 명나라의 황제가 제사를 올리는 것이지 일개 왕이 제사를 올리는건 예의에 어긋난다는 등의
황당한 주장들까지 빈번하게 나왔습니다.
중종13년 1518년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의 강경함에 못이긴 중종은 결국 소격서를 폐지하였지만,
중종14년 1519년 기묘사화로 중종이 조광조와 신진사류를 제거한 후,
중종20년 1525년 모후의 병중 간청이라고 하면서 소격서를 다시 복설(復設)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지식인들이 아닌 중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조선초기의 소격서보다 질적으로도 기능적으로 상당히 낮아졌으며...
실질적으로 소격서의 온전한 기능은 거의 정지된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중종25년 1530년 4월 5일 소격서의 참봉 유종원이 1529년 9월~11월에 초제에 쓰이는 쌀과 벼의 사용에 대한
공문서를 위조하여 의금부로 끌려가는 일이 발생하였고...
명종10년 1555년 2월 13일 집의(執義) 신희복(愼希復)이 명종에게 보고를 할 때...
소격서의 상황이 극히 안좋고, 문자를 아는 사람은 1명 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문자를 아는 1명 이외에는 녹봉을 주지 않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중종이 복원한 소격서는 왕실입장에서 애물단지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문자를 모르면서 녹봉을 받지 못한 소격서의 인원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요?
이때부터가 조선후기 무속의 잊혀진 흐름을 되찾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그들은 소격서의 초재를 토대로 백성들과 양반들에게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제사를 돈을 받고 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당시에는 무속의 색체라기 보다는 도교의 색체가 강했습니다.
그러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소격서는 완전히 폐지되어,
소격서의 도사들은 자리를 잃고, 소격서 출신의 노비는 사직서 등의 다른 부서로 이속됩니다.
친분 있는 양반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은 도사,
혼란한 세상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백성들을 돕기위해 여행을 떠난 도사,
이유 없이 정처없이 떠돌게 되는 도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도사...
이렇게 소격서의 도사들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며,
민간신앙과 도교신앙의 융합을 통한 무속신앙 탄생의 밑거름이되는 그들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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