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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달마재(達磨齋)

by 예경 2020. 10. 7.

 

 

이 글은 한국 불교계에 ‘달마재(達磨齋)’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기 위해
월간 <법시法施> 第26號(1969년 11월호, http://seondohoe.org/9020 )에 이어,
종달 선사(宗達 禪師)께서 ‘동진(東珍)’이란 호(號[필명筆名])로 거듭 제창(提唱)하신 글입니다.

 

 

월간 <법시法施> 第62號 (1972년 11월호, 18-20쪽)


달마재(達磨齋)

 

 

이동진(李東珍)

 

 

달마재(達磨齋)는 ‘초조기(初祖忌)’ 또는 ‘소림기(少林忌)’라고도 하여 매년 음력 10월 15일(十月十五日) 선종(禪宗)의 각 사원(寺院)에서 성대히 법회(法會)를 거행하며 그 전통을 이어왔다.

특히 선방(禪房)에서는 어느 행사(行事)보다 중요시 한다. 그것은 중국(中國) 이래 선종(禪宗)의 기원(起源)을 달마(達磨)로 하기 때문이다.

‘칙수백문청규(勅修百文淸規)’ 혹은 ‘황벽청규(黃檗淸規)’ 등 옛날 문헌(文獻)에 달마제(達磨齊)가 성대히 행해졌을 때의 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달마기(達摩忌) 선일일(先一日) 법당상(法堂上)에 상(像, 달마達摩)을 걸고 향화등촉다과진수(香花燈燭茶果珍羞)를 설(設)하고 이날 밤에 북(鼓)을 울려 대중을 모여 대비주(大悲呪) 념(念)하여 당두(堂頭, 주지住持) 념향(拈香)함. 날이 밝음에 이르러 종을 울려 대중이 위의(威儀)를 갖추어 안행측립(雁行測立)하여 당두(堂頭)를 기다림. (주지住持의 등단登壇함을 기다려 의식집행儀式執行)’

 

이 한 토막의 구절만 보더라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달마는 보리달마라고 하는데 그의 출생은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제3 왕자라고 한다. 처음 반야다라에게 배워 동문하(同門下)의 준족(俊足)으로서 당시의 국왕을 교화하고 6종(유상종有相宗 무상종無相宗 계행종戒行宗 무애종無碍宗 적정종寂靜宗)을 논복(論伏)하여 그의 명성을 떨쳤다.

 

달마는 그때 천하를 두루 살펴본 즉 중국에 선(禪)의 전도(傳道)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백여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멀리 중국에 왔던 것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3년을 거쳐 광동(廣東)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양무제 보통원년(梁武帝 普通元年) 9월이라고 했다. 양무제 보통원년(520)은 북위정광원년(北魏正光元年)으로서 당시 중국전토는 양자강을 경계로 북쪽은 낙양에 도읍한 위(魏, 북위北魏)와 남쪽 금릉(金陵, 남경南京)에 도읍한 양(梁, 南梁)과 분할되어 있었다. 이 남북조의 경쟁적 대치(對峙)는 달마가 다다른 그 당시 극에 달해 있었다. 낙양에는 음분교사(淫奔驕奢)한 호태후(胡太后)가 어린 아들 효명제를 끼고 조정(朝)에 임(臨)하고 있었고 금릉에는 자부심이 강한 교만한 무제(武帝)가 조정(朝)에 임(臨)하여 정치적 경쟁외에 미신 불교와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달마가 무제의 종형인 당시 광주광동(廣州廣東)의 칙리(勅吏)로 있던 소앙(蕭昻)의 상주(上奏)로 무제를 만나게 되었다.

 

(중략)


선종(禪宗)에서는 달마를 초조(初祖)로 한다. 당 태종(唐 太宗)은 선사에게 원각대사(圓覺大師)의 익호(謚號)를 내렸다.

이조혜가(二祖慧可) 삼조승찬(三祖乘燦) 사조도신(四祖道信) 오조홍인(五祖弘忍)으로 육조혜능(六祖慧能)에 이르러 당시 중국의 400(四OO)여 주(州)를 선풍(禪風)이 풍미(風靡)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맥이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달마는 석가세존으로부터 28대 법손(二十八代 法孫)인데 달마까지 인도에서는 법대(法代)가 끊어졌다.

그 이유로서 근기(根機)가 약화되어서 달마의 대(代)를 이을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선(禪)은 다른 학문과 달라 불법의 정통에 이르지 못하면 법(法)을 넘겨주지 못하는 엄격한 법도(法度)가 있기 때문이다.

 

달마 이래로 극동3국(중국 한국 일본)을 대승(大乘)불교 국가로 보아 달마의 법맥(法脈)이 면선(綿線)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신라 혜공왕(惠恭王)으로부터 끝의 경순왕(敬順王)까지 약 200(二OO)년 간을 선도울흥기(禪道蔚興期)라고 하여 불교의 우수한 문화재(文化財)가 이 기(期)를 전후하여 조성(造成)되었던 것이다.

이 맥(脈)이 고려에 계승되어 오다가 이조(李朝)에 와서 약간 난맥(亂脈)을 보인 듯 하나 그래도 구석구석에서 약동(躍動)하고 있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원문

 

 

 

 


출처 : http://www.seondohoe.org/board_2/13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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