續古今譯經圖紀
속고금역경도기
지승(智昇) 지음
주법장 번역
(생략)
7) 두행의(杜行顗)
청신사(淸信士) 두행의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의봉(儀鳳) 연중(年中, 676~678)에 홍려사(鴻臚寺) 전객서령(典客署令)에 임명되었다. 두행의는 천축의 말에 밝았고, 문조(文藻:詩文을 짓는 재주)까지 겸비하여, 모든 번역 경전을 미묘하게 참조하여 가려내었다. 그때 계빈국 승려 불타파리(佛陁波利)가, 범본 경전 일협(一夾)을 싸가지고 와서, 궁궐에 바쳤다. 이에 천황(天皇)이 두행의를 시켜, 번역케 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陁羅尼經)』1권이라고 했다. 영원장군(寧遠將軍) 도파(度婆)와 중인도 삼장법사(三藏法師) 지바하라가, 번역을 증의[證]하였다. 그리고 이때가, 의봉(儀鳳) 4년(679) 정월 5일이었다.
이 두행의의 번역은 묘휘(廟諱)와 국휘(國諱)를 모두 기피하였는데, 이를테면 세존(世尊)을 성존(聖尊)이라 하고, 세계(世界)를 생계(生界)라 하였으며, 대세(大勢)를 대취(大趣)라 하고, 구치(救治)를 구제(救除)라고 한 것 따위이다. 번역을 마치고 황상[皇]에게 바치자, 황상이 읽어 보고 두행의에게 말했다.
“이미 성인의 말씀인데, 휘자[諱]를 기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때 두행의는 조칙을 받들어 바로잡았고, 이런 까닭에 휘자를 피하는 일이 그치게[寢] 되었다. 그 뒤 일조삼장(日照三藏)이 조칙을 받들어, 다시 번역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불정최승다라니(佛頂最勝陁羅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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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불타파리(佛陁波利)
사문 불타파리는 당나라 말로, 각호(覺護)라고 한다. 북인도 계빈국 사람이다. 자신의 몸을 잊고 불도를 따랐으며, 부처님의 신령스러운 사적을 두루 참배했다. 그리고 문수사리보살이 청량산(淸涼山)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멀리 사막을 지나 몸소 참배하기 위해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다 천황(天皇) 의봉(儀鳳) 원년(676) 경자(景子)에 오대산에 석장(錫杖)을 멈추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고 슬픔에 복바쳐 눈물을 흘리니, 마치 비 오듯 흘리면서 성스러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한 노인이 산 속에서 나와 바라문(婆羅門)의 말로 불타파리에게 말했다.
“스님의 정성스럽고 간절한 모습이 측은해 보입니다.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불타파리가 대답했다.
“문수대사(文殊大士)께서 이 산에 자취를 숨기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인도로부터 와서 우러러 예배하고자 합니다.”
노인이 말했다.
“스님은 그 나라에서 오실 적에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陁羅尼經)』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는지요? 이 국토의 중생들은 죄업을 많이 지었고, 출가한 무리들도 파계한 이가 많습니다. 불정신주(佛頂神呪)는 죄업을 제거하는 비밀스런 방술인데, 만약 『불정존승다라니경』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으며,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한들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인도[西國]로 돌아가 그 경전을 가지고 오셔서 이 국토에 유전(流傳)케 하신다면, 이는 바로 뭇 성인을 두루 받들고, 널리 중생들을 이롭게 하여 3악도(惡道)에서 건져 주는 것이 될 터이니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또한 스님께서 그 경전을 가지고 여기에 오시면, 제자는 마땅히 문수사리보살이 계시는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불타파리는 이 말을 듣고 뛸 듯이 기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구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산을 향하여 예배하고, 머리를 드는 사이에 노인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불타파리는 깜짝 놀라 더욱더 경건한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가 경전을 가지고 제성(帝城:황제가 사는 長安)에 도착하여, 곧바로 황제를 뵙고자 했다. 이에 유사(有司)가 문서를 갖추어 황제에게 아뢰자, 천황(天皇)이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비전(秘典:불정존승다라니경)을 존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칙령을 내려 홍려시(鴻臚寺) 전객령(典客令)인 두행의(杜行顗)와 일조(日照) 삼장으로 하여금 궁중에서 함께 번역케 했다. 번역을 마치자, 비단 30필을 하사하고, 경전을 모두 궁중에 두도록 했다. 이에 불타파리가 울먹이며, 아뢰었다.
“신명(身命)을 버리는 것은, 그 뜻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데 있어서입니다. 청컨대, 간절히 바라오니 경전을 널리 유통시켜 주십시오.”
이에 황제가 그 지극한 마음을 가엾게 여기어서 마침내 번역한 경전은 궁중에 두고, 범본(梵本)은 돌려주어 유포하게 했다. 불타파리는 경전을 얻고서 뛸 듯이 기쁜 마음을 가누지 못하였다. 그리고 서명사(西明寺)로 가서 범어(梵語)를 잘 하는 승려 순정(順貞)을 만났고, 곧 그와 함께 번역할 것을 황제에게 아뢰자, 황제가 그 청을 윤허하였다. 마침내 대덕(大德) 원측(圓測) 스님과 순정이 함께 번역하였고, 경전의 이름을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陁羅尼經)』1권이라고 했다.
불타파리는 소원을 이룬 다음에 범본 경전을 가지고 오대산으로 들어갔는데, 지금까지 나오지 않아 그 소재지를 알 수 없다. 여러 번역본을 비교해 볼 때, 이것이 가장 많이 유포되었다.그 경전의 서문은 영창(永昌, 689) 이후에 어떤 사람이 기술한 것이다. 여러 역본(譯本)은 연월(年月) 차이가 나는데, 자세히는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 기술한 것과 같다.
(생략)
16) 석의정(釋義淨)
사문 석의정(635~713)은 제주(齊州) 사람이다. 속성(俗姓)은 장씨[張氏]이고, 자(字)는 문명(文明)이다. 어린 나이에 영화를 버리고 머리를 깍고, 출가하였다. 명망 높은 스님들을 찾아다니면서 묻고, 여러 서적을 널리 탐구했다. 아울러 내외의 전적에도 모두 밝아, 고금(古今)의 일을 두루 알았다. 15세에 서역(西域)을 유행하고자 뜻을 세웠고, 법현(法顯)스님의 맑은 지조를 우러르고 현장(玄奘)법사의 뛰어난 풍모를 사모했다. 이에 더욱더 부지런히 공부하여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는 더욱 굳게 지켜 정직하게 행동하였다.
함형(咸亨) 2년(671) 37세에, 비로소 전에 마음먹었던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마침내 광주부[廣府]에서 처음 맹세했던, 동지(同志) 10여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나 정박했던 범선을 띄우자, 함께 갔던 사람들이 모두 되돌아갔다. 하지만 오직 의정(義淨)만은 인도에 가고자 하는 굳은 마음이 더욱 치성해졌고, 마침내 혼자 출발하여 수많은 고초를 겪으며, 인도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는 지역마다 그곳의 말을 다 통달했고, 만나는 왕(王)과 신하들도 모두 의정을 존중하고 예우해 주었다. 취봉산[鷲峯:영취산]과 계족산[鷄足]에도 직접 올라가 보았고, 기원정사[祇園]와 녹야원[鹿苑]을 모두 순례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란타사[那爛陁]에 머물면서 공부하고, 보리수(菩提樹)에 예배했다. 아울러 학문에 뛰어난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대승과 소승을 배우기도 했다. 배울 것을 다배우고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30여 나라를 거쳤고, 왕래하면서 불도(佛道)를 물은 세월도 20년이 넘었다.
천후(天后) 증성(證聖) 원년(695) 을미(乙未) 중하(仲夏:음력 5월)에 낙양[洛]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적에 가지고 온 범본(梵本) 경ㆍ율ㆍ논이 400부 가까이 되었는데, 모두 50만 게송이었다. 아울러 금강좌진용(金剛座眞容) 1포(鋪)와 사리(舍利) 300립(粒)을 가지고 왔다. 천후(天后)는 불법[法]을 공경하고 사람을 존중했으므로, 몸소 동문(東門) 밖에까지 나아가서 맞이했다. 그리고 낙양(洛陽)의 승려들은 깃대와 깃발을 갖추어 시설하고, 줄지어서 악기를 연주하며 앞에서 인도해 나아갔다. 칙명으로 불수기사(佛授記寺)에 편안히 머물게 하고, 가지고 온 범본(梵本)을 번역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우전국[于闐] 삼장(三藏:實叉難陁)과 함께 『화엄경(花嚴經:80화엄)』을 번역했으나, 구시(久視:700) 이후로는 직접 번역했으니, 곧 구시 원년(700) 경자(庚子)부터, 장안(長安) 3년(703) 계묘(癸卯)에 이르기까지, 동도(東都) 복선사(福先寺)와 서경(西京) 서명사(西明寺)에서 『금강명최승왕경(金剛明最勝王經)』 1부10권ㆍ『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1권ㆍ『입정부정인경(入定不定印經)』1권ㆍ『미륵하생성불경(彌勒下生成佛經)』1권ㆍ『만수실리보살주장중일자주왕경(曼殊室利菩薩呪藏中一字呪王經)』1권ㆍ『장엄왕다라니주경(莊嚴王陁羅尼呪經)』1권ㆍ『선야경(善夜經)』1권ㆍ『대승유전제유경(大乘流轉諸有經)』1권ㆍ『묘색왕인연경(妙色王因緣經)』1권ㆍ『무상경(無常經)』1권ㆍ『팔무가유가경(八無暇有暇經)』1권ㆍ『장조범지청문경(長爪梵志請問經)』1권ㆍ『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1부50권ㆍ『근본살바다부율섭(根本薩婆多部律攝)』 1부20권ㆍ『근본설일체유부니타나목득가(根本說一切有部尼陁那目得迦)』 1부10권ㆍ『근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根本說一切有部百一羯磨)』 1부10권ㆍ『장중론(掌中論)』1권ㆍ『취인가설론(取因假設論)』1권ㆍ『육문교수습정론(六門敎授習定論)』1권ㆍ『용수보살권계왕송(龍樹菩薩勸誡王頌)』1권 등을 번역하여 엮어 베껴서 궁궐에 바치자, 천후(天后)가 새로 번역한 성교(聖敎)에 서문(序文)을 지어 경문 첫머리에 기록하도록 했다.
그는 또 화제용흥(和帝龍興) 신룡(神龍) 원년(705) 을사(乙巳)에 동도(東都) 내도량(內道場)에서 『대공작주왕경(大孔雀呪王經)』 1부3권를 번역했고, 또 대복선사(大福先寺)에서 『불위승광천자설왕법경(佛爲勝光天子說王法經)』1권ㆍ『향왕보살다라니주경(香王菩薩陁羅尼呪經)』1권ㆍ『일체공덕장엄왕경(一切功德莊嚴王經)』1권 등을 번역했다. 그러자 화제(和帝)가 진심으로 불경[釋典]을 숭상하여 서문을 지어 찬양했으니, 이것이 대당용흥삼장성교서(大唐龍興三藏聖敎序)이다. 황제가 낙성(洛城)의 서문(西門)에 행차하여, 군벽(群辟)11)에게 의정이 새로 번역한 경전을 알리고 드날리게 했다.
의정은 신룡 2년(706) 병오(丙午)에 어가를 따라서 수도[京]로 돌아왔고, 칙령으로 대천복사(大薦福寺)에 번경원(飜經院)을 특별히 설치케 했으며, 3년(707) 정미(丁未)에는 황제가 궁궐로 불러들여서 번경사문(飜經沙門)들과 함께 90일 동안의 하안거를 지냈다.
황제가 옛적에 살던 방에 유폐[幽]되어 돌아올 수 없게 되었을 땐 약사여래부처님께 기원하여, 마침내 내려 주는 복덕을 입고 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지난날의 은택을 가상히 여겨, 넓고 큰 불법을 다시 밝히려고 법도(法徒)들에게 칙명하여, 또 번역하도록 했다. 이에 불광내사(佛光內寺)에서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七佛本願功德經)』 1부2권를 번역했다. 그리고 황제가 법연(法筵)에 행차하여, 손수 필수했다.
또 경룡(景龍) 4년(710) 경술(庚戌)에 대천복사(大薦福寺)에서 『불위난타설출가입태경(佛爲難陁說出家入胎經)』 1부1권ㆍ『욕상공덕경(浴像功德經)』1권ㆍ『수주공덕경(數珠功德經)』1권ㆍ『관자재보살여의심다라니주경(觀自在菩薩如意心陁羅尼呪經)』1권ㆍ『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陁羅尼經)』1권ㆍ『발제죄장주왕경(拔除罪障呪王經)』1권ㆍ『오온개공경(五蘊皆空經)』1권ㆍ『삼전법륜경(三轉法輪經)』1권ㆍ『비유경(譬喩經)』1권ㆍ『요치병경(療痔病經)』1권ㆍ『근본설일체유부필추니비나야(根本說一切有部苾蒭尼毘柰耶)』 1부20권ㆍ『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根本說一切有部毘柰耶雜事)』 1부40권ㆍ『근본설일체유부계경(根本說一切有部戒經)』1권ㆍ『근본설일체유부필추니계경(根本說一切有部苾蒭尼戒經)』1권ㆍ『근본설일체유부비냐야송(根本說一切有部毘柰耶頌)』 1부5권ㆍ『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섭송(根本說一切有部毘柰耶雜事攝頌)』1권ㆍ『근본설일체유부니타나목득가섭송(根本說一切有部尼陀那目得迦攝頌)』1권ㆍ『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1부5권ㆍ『관소연론석(觀所緣論釋)』1권 등을 번역했다.
또 예종(睿宗) 경운(景雲) 2년(711) 신해(辛亥)에 다시 『칭찬여래공덕신주경(稱讚如來功德神呪經)』1권ㆍ『불위해룡왕설법인경(佛爲海龍王說法印經)』1권ㆍ『약교계경(略敎誡經)』1권ㆍ『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釋)』 1부3권ㆍ『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송(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論頌)』1권ㆍ『인명정리문론(因明正理門論)』1권ㆍ『관총상론송(觀總相論頌)』1권ㆍ『지관문론송(止觀門論頌)』1권ㆍ『수장론(手杖論)』1권ㆍ『일백오십찬불송(一百五十讚佛頌)』1권ㆍ『법화론(法華論)』 1부5권ㆍ『집량론(集量論)』 1부4권 등을 번역했다.
천후(天后) 구시(久視) 원년(700) 경자(庚子)부터, 예종(睿宗) 경운(景雲) 2년(711) 신해(辛亥)에 이르기까지, 모두 56부 230권을 번역했다. 북인도 사문 아이진나(阿你眞那)와 토화라(吐火羅)12) 사문 달마말마(達磨末磨) 등이 범의(梵義)를 증의했고, 계빈국[罽賓] 사문 달마난타(達摩難陁)와 거사 동인도(東印度) 수령(首領) 이사라(伊舍羅) 등이 범문(梵文)을 증의했다. 사문 갈리말저오제제바(曷利末底烏帝提婆)와 중인도(中印度) 거사 이석가도파다(李釋迦度頗多) 등이 범본(梵本)을 읽었고, 동인도 거사 구담금강(瞿曇金剛)과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 왕자 아순(阿順) 등이 번역된 말을 증의했다.
사문 파륜(波崙)ㆍ복례(復禮)ㆍ혜표(慧表)ㆍ현산(玄傘) 등이 필수(筆受)했고, 사문 법보(法寶)ㆍ승장(勝莊)ㆍ신영(神英)ㆍ인량(仁亮)ㆍ혜소(慧沼)ㆍ법장(法藏) 등이 증의했으며, 수문관대학사특진조국공(修文舘大學士特進趙國公) 이교(李嶠)ㆍ병부상서소요공(兵部尙書逍遙公) 위사립(韋嗣立)과 조언소(趙彦昭)ㆍ노장용(盧藏用)ㆍ장열(張說)ㆍ이예(李乂)ㆍ소정(蘇頲)ㆍ서견(徐堅) 등이 문장을 윤색(潤色)했다. 좌복야(左僕射) 서국공(舒國公) 위거원(韋巨源)ㆍ우복야(右僕射) 허국공(許國公) 소괴(蘇瑰) 등이 번역하는 일을 감독했고, 부마도위(駙馬都尉) 양신교(楊愼交)ㆍ사호(嗣號) 왕옹(王邕)ㆍ태상경(太常卿) 설숭윤(薛崇胤) 등이 앞뒤에서 보호하고, 감독했다.
또한 따로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1부2권ㆍ『대당남해기귀내법전(大唐南海寄歸內法傳)』 1부4권ㆍ『별설죄요행법(別說罪要行法)』1권ㆍ『수용삼수요법(受用三水要法)』1권ㆍ『호명방생궤의(護命放生軌儀)』 1권 등 모두 5부 9권을 번역했다. 또 『설일체유부발솔도(說一切有部跋窣堵)』곧 모든 율(律) 중에 건도(健度)와 발거(跋渠) 같은 부류이다. 범음(梵音)의 초하(楚夏) 언어에서 초래된 언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를 번역했는데, 약 70~80권이나 된다. 다만 진본(眞本)과 대조하여 정리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열반에 들고 말았기 때문에, 번역문을 제대로 정리할 수 없게 되었다.
의정은 또 일체유부율(一切有部律) 중에서, 모든 연기(緣起) 부분만을 초록[抄]하여 별부(別部)를 만들어 유행(流行)시켰으니, 『마갈어인연경(摩竭魚因緣經)』 등 42경(經) 49권이다. 그러나 이미 따로 초록한 경전은 번역한 경전의 정수(正數)에 합산되지 않았다.지금 모두 『개원석교록開元釋敎』「별생(別生)」편에 수록되어 있다. 의정이 비록 3장(藏)을 골고루 번역했으나, 특히 율부(律部)에 더욱더 관심을 기울였다. 때문에 번역한 글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학도(學徒)들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었으니, 즉 모든 일을 하는 중에서 녹랑[漉]으로 물을 거르고 더러움을 씻어내는 일을 급선무로 하여, 보통의 사람들보다 특이한 행동을 보인 것이다. 이에 배우는 무리들이 서로 전하여 경락(京洛)에서 두루 행하게 되었으니, 아름다운 일이요 또한 남기신 법(法)이 성대하게 행해짐이로다.
(생략)
19) 석지엄(釋智嚴)
사문 석지엄은, 우전왕(于闐王)이 볼모[質]로 보낸 아들이었다. 성(姓)은 위지(尉持)이고, 이름은 낙(樂)노(盧)와 각(各)의 반절이다.이다. 당(唐)나라 조정에서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을 제수[授]하고, 금만군공(金滿郡公)으로 봉(封)했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고 질박하며, 곧고 신의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청하였다.
“출가하여, 깊은 은택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경룡(景龍) 원년(707) 11월 5일 화제(和帝)의 생일에, 집을 떠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종남산[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정사[蘭若]에 머물면서, 도를 닦았다. 마음을 텅 비우고 선정[靜慮]에 들어 좌선하고, 경행(經行)하고 애써 정진하며, 조용한 곳에 살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는 경전에도 해박했고, 당나라 말과 범어[梵]에도 능통했다. 아울러 지혜가 깊고 미묘한 이치에 다 통달하여, 진리의 말씀이 보배처럼 쌓인 여래의 비밀스런 게송을 빠르게 깨달았다. 따라서 임금의 칙령을 받고[綸旨] 오랫동안 번역에 참여했으며, 자주 윤언(綸言)을 받들어 번역된 말을 증의하기도 했다. 항상 석별곡(石鼈谷)의 아련야(阿練若)에 거주하면서, 두타행(頭陁行)을 익혔다.
개원(開元) 9년(721) 신유(辛酉)부터, 석별곡의 아련야와 봉은사(奉恩寺)에서, 『설묘법결정업장경(說妙法決定業障經)』1권ㆍ『출생무변문다라니경(出生無邊門陁羅尼經)』1권ㆍ『사자소태사왕단육경(師子素駄娑王斷肉經)』1권ㆍ『대승수행보살행문제경요집(大乘修行菩薩行門諸經要集)』 1부3권 등 모두 4부 6권을 번역했는데, 문채의 내용과 외관을 갖추었고, 그 깊은 취지[趣]를 얻었다. 또 『존승다라니주(尊勝陁羅尼呪)』1수(首)와 『법화경약왕보살등주(法華經藥王菩薩等呪)』6수를 번역했다. 그때 경본(經本)에 새로운 주(呪)를 베껴 넣었는데, 괴이하게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貞元新定釋教目錄卷第二十二 武
정원신정석교목록 제 22 권
원조 지음
1. 별분승장 ③
1) 유역유본록 ③
(1) 보살삼장록 ③
①보살계경장 ③
대승경중단합역 ③
(생략)
불정승다라니경(佛頂勝陁羅尼經) 1권[대당 조산랑(朝散郎) 두행의(杜行顗)가 제령(制令)을 받들어 번역하였다. 첫 번째 번역본으로 『대주록』에 나와 있다.]
불정승다라니경(佛頂勝陁羅尼經) 1권[대당 중천축 삼장 지바하라(地婆訶羅)가 번역하였다. 두 번째 번역본으로 『습유록』에 편입되었다.]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陁羅尼經) 1권[대당 계빈국 사문 불타파리(佛陁波利)가 번역하였다. 세 번째 번역본으로 『대주록』에 나와 있다.]
최승불정다라니정제업장경(最勝佛頂陁羅尼淨除業障經) 1권[대당 중천축 삼장 지바하라(地婆訶羅)가 동도(東都)에서 다시 번역하였다. 네 번째 번역본으로 『습유록』에 편입되어 있다.]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陁羅尼經) 1권[혹 주(呪)자가 더해진 것도 있다.]
이상 5경은 동본이역이다.
불정존승염송법(佛頂尊勝念誦法) 1권[경 안의 제목에는 『불정존승다라니염송의궤(佛頂尊勝陁羅尼念誦儀軌)』라 하였다. 대흥선사 삼장 사문 대광지 불공이 조서를 받들어 번역하였다. 정원 연간에 새로 목록에 편입된 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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