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선사 구도기(大行禪師之求道記)
내 삶 속에서 만난 가장 위대한 도인.. 대행 큰스님.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많은 다른 큰스님들에 대한 행장기는 있는데 대행 큰스님에 대해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대행 큰스님의 법문들은 많이 소개돼 있었지만 일대기가 없었다. 갑자기 내가 만들어 봐야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기초 자료로 김정빈의 <도>와 <무>를 이용하기로 했다. <도>는 대행 스님의 삶을 그린 소설이고, <무>는 대행 스님의 법어집이다.
<도>는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대행 큰스님의 행장이 소개된 것은 2부이다. (1부는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교리를 통한 삶의 성찰이, 3부는 큰스님에 대한 신도들의 증언이 소개돼 있다.)
이 구도기의 기본틀은 <도>의 2부 내용 중 작가의 이런저런 부언을 빼고 큰스님의 삶의 궤적만을 좇아 발췌한 것이다. 거기에 3부 내용 중 일부와 법어집 <무>에 나온 내용의 일부를 포함하였고, 중간에 살짝 새로운 자료를 삽입하기도 했다.
1. 유년시절
1930년대, 어린 소녀 대행(속명: 노점순)의 주변은 온통 혼란과 질곡 그것이었다. 민족은 주권을 잃었고 사회는 굶주림과 질병과 무지 속에 버려져 있었다. 당시 소녀 대행 앞에 다가 온 것은 바로 그 절벽과도 같이 거대한 현실이었다. 당시 이제 일곱 살 난 어린 소녀 대행은 뼈아픈 가난으로부터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대행의 집안은 아버지가 훈련대장을 지낸 바 있는 한말의 한 퇴역 무관의 집으로서 결코 남부럽지 않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국망과 함께 집안도 기울어갔다. 역시 무관으로, 영락해가던 나라를 돕던 아버지 노백천에게는 조선군의 해산이 곧 나락의 시작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폭력 앞에 아버지는 번번이 저항하곤 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투옥과 석방이 되풀이 되면서 아버지는 점점 자포자기, 성격 파탄의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한 집안을 지탱해야 할 가장의 수난은 말할 것도 없이 식구들 모두에 대한 수난이 되었다.
마침내 어느날 아침 일본인의 사주를 받아 들이닥친 집달리들에 의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대행의 가족은 정들었던 이태원을 떠났다. 그것은 참담한 패배였고 어린 대행에게 닥친 현실의 거대함이었다.
대행은 세 살 아래인 남동생, 갓 두 살 난 여동생과 함께 흐느끼는 엄마의 품속에 안겨있었다. 수십 간이나 되는 집이었다.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일순 이렇게도 변해 버릴 수가 있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을 어린 대행은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당장이 문제였다. 부친과 모친, 그리고 두 오빠와 동생들과 대행, 이렇게 식구는 일곱이었다.
그 일곱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세 살 난 남동생을 업은 아버지는 앞서 걸었고 그 뒤를 큰 오빠가 따랐다.엄마의 품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두 살 난 여동생이 안겨 있었고 둘째 오빠와 대행은 엄마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냥 걸었다.
목적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한강을 건너 흑석동에 다다랐다. 우선 당장의 한 끼가 문제였다. 엄마가 이집 저집을 돌았다. 아버지와 오빠는 어디서 도끼와 톱, 망치 따위를 빌려 와서 나무를 몇 그루 쓰러뜨렸다.
엄마가 가져온 갖가지 것들로 겨우 허기를 채우자 식구들은 우선 오늘밤을 지낼 움막을 짓는데 모두 매달렸다. 움푹 패여진 지형을 이용해서 나무를 세우고 외를 엮었다. 우선 아쉬운 대로 거처할 곳이 마련되었다.
졸지에 거지로 전락한 셈이었다. 그러나 살아야 했다. 반 구걸 반 차용으로 그릇들을 빌렸고 동정 받은 것들을 끓였다. 식구들은 가을 걷이가 끝난 논밭 주변을 돌며 캐다 남은 고구마쪽이나 줄기 따위를 거두어 죽을 쑤었다.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 먹을 수 있는 나물이나 열매 따위를 모았다.
며칠 후 큰 오빠는 기와를 굽는 곳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가 있었다. 큰오빠는 아예 숙식을 거기서 해결함으로써 부모를 기쁘게 하였다. 그러나 그도 이제 겨우 열 일곱 살 난 소년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는 도련님으로 불리며 고생 모르고 자란 터였다.
그로부터 얼마 동안이었던가. 한번 대행의 집안을 유린한 가난은 결코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식구들은 점점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시래기나 호박넝쿨이나 풀뿌리 따위로 식량을 대용했던 그것마저 건너야 할 때가 점점 많아졌다.
혹독한 추위와 싸운 겨울이 지나고 보릿고개가 닥쳤을 때 쯤에는 이미 아버지는 예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성난 사자처럼 좌충우돌했다. 거의 매일처럼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는 가족한테 온갖 화풀이를 하곤 하였다.
그런데 그 화풀이는 이상하게도 어린 대행에게로 떨어지곤 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화풀이는 점점 심해졌다. 이제 겨우 일곱 살 난 소녀에게 아버지는 가혹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눈 앞에서 얼씬거리지 않아야 했다.
마음 놓고 동무들과 공기놀이도 못할 정도였다. 벽력 같은 호통소리와 함께 솥뚜껑 같은 손이 모든 걸 얼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는 들을 수 없는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겨우겨우 사귀어 놓은 이웃집 아이들도 점점 집에 찾아 오지 않게 되었다. 어린 대행에게는 이중의 고역이었다.
그런 속에서 어머니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그녀는 엄마가 굶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부엌에서 먼저 먹었다. 너희들이나 먹으렴!"
엄마 말을 곧이 듣고 정말로 엄만 부엌에서 먼저 잡수시는 줄만 알았던 대행이었다. 그러나 실상을 알아버린 순간 대행의 고통은 더욱 커졌다.
어떻게라도 엄마를 도와야겠다고 소녀 대행은 생각했다. 대행은 되도록 밖에서 지내기로 했다. 우선 아버지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또 그래야만 한 끼라도 엄마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가 있었다.
산에서 풀뿌리를 캐어먹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다. 그리고 산등성이나 계곡에 쪼그리고 앉아서 넋을 놓고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그렇게 해서 두 해가 지나갔다. 이제 대행은 아홉 살이 되어 있었다. 대행에게 나무와 새와 짐승들은 친구와 같았다. 차츰 그녀는 자연을 친구로 어버이로 스승으로 삼게 되었다. 대행은 점점 산과 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렇게 친근한 자연이라고는 해도 밤중에만은 예외였다. 아버지는 일에서 돌아온 다음 저녁 식사가 끝날 때쯤 대행을 불러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움막에서 담배 가게가 있는 아랫마을까지는 십리 길에 가까웠다. 그런데 아버지는 꼭 밤에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아홉 살짜리 여자 아이가 혼자서 십리 밤 길을 다녀온다는 것은 공포의 극을 체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건 숲길이었다.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온몸을 뻣뻣하게 굳도록 만들었다. 어슴푸레한 달빛어린 숲에서 금방이라도 흰옷 입은 귀신이 나타날 듯한 밤 길이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며 소녀 대행은 그 심부름을 해냈다. 그러나 아버지의 학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행은 이틀이 멀다하고 아버지에 의해 집에서 내쫓김을 당했다. 낮밤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한 달의 반 이상은 바깥잠을 자게 되었다.
차츰 그녀는 밤의 칠흑 같은 어둠으로부터 공포가 아니라 아늑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낮 동안의 하루가 그녀에게 가혹하면 할수록 그녀는 밤의 포근한 위안에 취했다. 아버지의 학대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달래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던 엄마도 이제는 지쳐 버렸다.
소녀 대행이 밤조차 아늑한 위안이 된 것은 바로 내면의 소리 덕분이었다. 버림 받은 고독한 아홉 살 소녀의 내면에서 참 자기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소녀는 그 내면의 목소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한한 애정을 보내고 있었다.
"아빠..."
견딜 수 없는 고독감에 그녀는 소나무 등걸을 쓸어안고 나직이 뇌었다. 뼈져린 고독의 한 영혼에게 위로의 목소리로 다가오는 그 미지의 존재에 대해서 소녀는 그저 '아빠'라고 불렀다. 육신의 아빠로부터 버림받은 한 소녀의 혼은 이제 보이지 않는,그러나 불생불멸하며 영원한 아빠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이제 어린 대행의 영혼은 깊이 잠들 수가 있게 되어갔다. 모두가 자기의 벗이었으며 아빠였다. 그들은 인간계로부터 가혹하게 버려진 한 소녀의 혼에 전적으로 응해 주었다. 무언의 대화가 밤새도록 이어졌고 대행은 이제 완전하게 자연이 주는 공적함이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공포에 짓눌려서 엎드려 코를 박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던 소녀는 강인하고도 유연하게 변해 있었다. 오히려 이제는 집보다도 숲이 좋았다. 밥보다는 풀뿌리가 입에 달았다. 친구들과의 소꿉놀이보다는 자연과의 무언의 대화가 더 깊고 은밀한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소녀의 시선은 내면으로 옮겨졌고 마음으로써 하소연했으며 오직 마음에다가 모든 문제를 맡겨가고 있었다.
당시 소녀 대행이 즐겨했던 것은 상상 보시였다. 그녀는 어느날 동네 할아버지 한 분으로부터 도깨비 감투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은 일이 있었다. 머리에 쓰면 온 몸이 보이지 않는 도깨비 감투는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 도깨비 감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몸이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을 자유자재로 활보하면서 온갖 좋은 일, 착한 일을 다 할 수 있을 텐데..
정작 자기의 배고픔은 잊고 상상 속에서 갖가지 보시를 하는 동안 훌쩍 날이 새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마음만으로라도 세상의 모든 불쌍한 이들에게 실컷 보시를 했다는 것이 그렇게 스스로 대견하고 기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훗날 이때 상상으로만 베풀던 것을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있었다. 아빠, 즉 참나의 무한한 힘을 통해서 몸 없는 몸으로써 무한한 보시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2. 깨달음
마침내 소녀 대행은 자기 한 몸이라도 덜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가난으로 힘들어 하는 엄마나 오빠를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야 겠다고.
그러던 차에 대행에게 기회가 왔다. 대행은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영천에 사는 외할머니의 소개를 받아 어떤 집에 심부름하는 아이로 가게 되었다.
꼭 3년간이었다. 대행은 엄마 없는 아이를 업어 키웠다. 보수라는 건 아예 없었다. 하루 세끼를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다는 것과 이제는 무서운 아버지도 없고, 따라서 바깥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는 그것만이 보수라면 보수랄 수 있었다.
아직은 상수도라는 게 없던 때였다. 그 집안의 식수를 공급하는 임무가 아기를 보는 일과 함께 어린 대행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는데, 그것은 마치 어린 토끼 새끼에게 드럼통을 안겨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대행은 군말 없이 물지게를 지고 우물가로 나갔다. 주인이 준 동전 한 닢을 손에 쥐고. 동전 한 닢에 물은 두 통이었다.
일본인 주인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킨 소녀는 열 번도 더 쉬어야만 했다. 서툰 지게 솜씨 때문에 양동이의 물이 반쯤은 다 쏟아져 버렸다. 젖을 대로 다 젖어 버린 허름한 삼베옷. 그러나 아직도 일곱 번이나 더 다녀와야 했다. 하루에 여덟 번씩 대행은 물지게를 지었다.
물을 흘릴 때마다 어지간히 머리통도 쥐어 박혔다. 한 열흘 쯤 지나 지게질에 익숙해지자 거의 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되었다.
남의 집살이를 하며 겪은 고통은 이루 다 말 할 수 없었다. 참 많이도 울었다. 아기가 불쌍해 소녀 대행은 업고 자다시피했고 아기가 울면 안타까워 자기도 울었다. 그러나 주인은 아기한테 줄 과자를 대행이 먹었다고 구박하기도 했다. 한 겨울이면 찬물에 기저귀를 빨아 널어야 했다. 손이 얼어 터지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대행은 내면의 아빠를 부르며 울었다. 슬퍼도 고독해도 '아빠'만을 부르며 울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닥치든 '아빠'한테 모든 것을 맡겼다.
3년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또 머지 않아 다른 집으로 가곤했다. 어린 나이에 회사 일을 돕는 급사가 되기도 했고 배가 고프다 고프다 못해 이름도 모를 남의 집 문전에 쓰러진 일도 있었다.
의지할 데가 한 곳도 없었던 그녀. 어떻게나 엄한 지 아버지 보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던 그녀는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미지의 존재한테 아빠라고 불렀다. 그리고 모든 것을 거기에 맡기고 죽고 사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한 해 한 해가 흐르고 어느덧 대행도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결혼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풀어야 할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남아 있었다. 이미 아홉 살 때부터 자신을 위로하며 이끌어온 '아빠'는 이제는 스승으로서 가혹한 시련을 그녀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아빠'는 그녀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과 모든 아픔을 다 겪게 할 모양이었다.
"네가 죽어야 나를 보리라."
'아빠'는 드디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죽어야 '아빠'를 본다? 그것이 무슨 뜻일까? 대행은 질문 아닌 질문에 매달렸으나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갈증은 점점 깊어졌다. 그녀는 목마르게 '참'을, 영원을, '아빠'를 찾았으나 목마름은 적셔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이 한 번 나왔다가 한 번 가는 것인데 늙고 젊고가 따로 있겠는가. 어차피 이렇게 갈 거라면 차라리 그냥 가는 게 좋겠지?'
마침내 그녀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집을 떠났다. 그녀는 이제 '아빠'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를 셈이었다. 내가 죽어서야 그 참된 것을 볼 수가 있다면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었다.
정처 없이 걸었다. 마침내 절벽 위에 섰다. 발 아래로는 검푸른 강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아빠'의 가르침을 따라 이 세상을 여의리라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견딜 수 없는 절망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저 무의 심연으로 몸을 던지려는 순간 예기치 못한 방해자가 나타났다. 시간을 잊은 채 강과 그녀가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흐름이 그녀였고 그녀가 흐름이었다.
삼매.. 그녀는 모든 것을 잊었고 모든 것을 놓았으며 모든 것을 쉬었다. 주객일여. 순일. 흡사 돌덩이가 된 듯 그녀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에서는 아무런 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중추명월과도 같은 맑음이요 명경지수와도 같은 평화였다.
어찌해서 바로 그런 순간에 그 삼매의 깊은 체험이 그녀를 덮어버렸던 것일까. '아빠'는 바로 나였고 나는 곧 '아빠'였던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도리를 그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도 꼬박 반나절을 거기서 선 채로 보냈나 보다. 그녀는 문득 법열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기쁨이었다. 이름 지을 수도 없는 충만감이 지극한 간절함과 함께 그녀의 내면에서 흐르고 있었다.
8·15 해방이 되기 전, 그러니까 그녀의 나이 열여덟 살이 되던 때였다. 항상 내면의 '아빠'의 인도를 받던 그녀에게 벼락같은 의식의 각성이 열려왔다. 그전에도 항상 감응은 왔지만 이처럼 시원한 열림은 아니었다.
어느날 '아빠'가 물었다.
"네가 일할 때는 내가 너와 하나가 되고, 일을 안 할 때는 네가 나와 하나가 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그리고 또 이렇게 물었다.
"자(子)가 부(父) 앞으로 가면 부와 하나가 되고, 부가 자 앞으로 오면 자와 하나가 되느니라, 무슨 까닭이냐?"
대행이 대답했다.
"마음에는 체가 없으니, 마음이라는 것은 이름이지 결과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 부와 자는 둘이 아닙니다."
그날은 퍽 추운 한 겨울이었다. 다시 '아빠'가 물었다.
"여름이 옳은 거냐? 겨울이 옳은 거냐? 겨울이 좋으냐? 여름이 좋으냐?"
그러자 대행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여름과 겨울이, 사계절이 어떻게 둘이 되겠습니까? 사람이 춥다 덥다 하는 거지 진리라는 것에 춥다 덥다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때였다. 그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 천지가 한데 합쳐지는 거 같았다. 산하대지가 일제히 하나로 모이고 천지가 그냥 하나로 뭉쳐져 불덩어리가 되더니 서서히 작아지면서 '펑!'하고 불구슬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깨달음! 그러나 당시에 그녀는 그것이 깨달음인줄도 몰랐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왜냐하면 천天은 지地를 다스리면서 산하대지의 일체 만물을 다 기르는데, 우리 인간들은 제 각각 천차만별로 마음에 따라서 저렇게 죽이고 살리고 싸우고 하니 참 너무도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데, 왜 저렇게들 사는 것일까?'
그처럼 한참 울던 그녀는 또 이번에는 미친 것처럼 싱긋싱긋 웃고 다녔다. 이렇게 마침내 가는 길을 알고 오는 길을 알게 된 그녀는 이제 고생을 해도 고생하는 것 같지 않았다.
3. 부산생활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서의 대행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제 그녀의 나이는 열 아홉이었다. 그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하염없이 걸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멀리 부산이었다.
부산까지의 여정은 그야말로 고초의 연속이었다. 남못지 않은 일솜씨를 타고났던 그녀는 당시 미군이 주둔해 있던 근처에서 군복을 수선해 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부산에서의 생활은 대행에게 최초의 물질적인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워낙 근면이 몸에 배인 데다가 친절했기 때문에 군복 수선의 일감은 쌓이고 쌓였다. 이듬 해 봄이 되자 그녀는 경제적인 면에서 제법 여유를 가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해가 바뀌고 이듬해 봄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일자리에 앉자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낮이 조금 지나서 네 가게로 어떤 손님이 찾아 올게다. 세상에서 가장 측은한 사람이 찾아올 거야.
네가 아니면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고통스러워해줄 사람이 없어. 모든 사람들이 침을 뱉고 눈살을 찌푸리는 그 가여운 사람에게 네가 인정을 베풀 수 있겠니? 그리고 여자인 네가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겠어?"
대행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빠'가 말하는 그 측은한 사람이 문둥병자일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행은 속삭였다.
"전 두려워 하지 않아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오늘 오후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는 한적한 오후. 허술한 판자집이 서 있는 곳을 돌아서 한 사내가 엉금엉금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에는 우그러진 중절모를 쓰고 있었고 몸에 걸친 옷은 걸레쪽처럼 해져 있었으며 신발은 없었다.
"어서 오세요."
대행은 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다. 사내는 피고름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사내의 얼굴은 일변 썪어 터지고 있었고 일변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채 아물어가고 있었다.
눈썹이 없다. 한쪽 눈에서는 피고름이 흐르고 있다. 비틀어진 입 때문에 무어라고 중얼거리기는 하지만 그 소리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한쪽 손은 몽둥이처럼 문드러져 손가락이 없었다.
"저, 저, 저..."
"말씀하세요. 옷이 아주 험하게 됐군요."
"사실은 그게... 제 옷을 좀 누벼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좀 죄송해서... 돈도 없어요..."
"거기 좀 앉으시겠요? 제가 갈아 입을 옷을 한 벌 드릴테니까요."
대행은 우선 집히는 대로 남자 옷 한 벌을 집어 사내에게 준 뒤 사내의 갈갈이 찢긴 옷에 천조각을 대어 옷을 누비기 시작했다. 한 시간 쯤 걸렸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사내가 와 있는 동안에는 아무 다른 손님이 찾아오지를 않았다. 다만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무심코 안을 들여다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쳐 버렸다.
"아가씨는.. 천사로군요.."
누비고 기워서 이젠 새것처럼 된 옷을 갈아 입고 나서 사내는 중얼거렸다. 그 이상은 입을 떼지 못했다.
가슴이 답답해 왔던지 사내는 얼굴 근육을 힘겹게 씰룩거렸다. 아마도 감동을 참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서는 피고름이 섞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서 가 보세요. 꼭 병 나으시고요."
"..........."
대행은 집히는대로 군인들이 수선대금 대신 두고 간 피엑스 물품 중에서 통조림들을 싸서 그에게 건네 주었다. 사내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한 번 눈물을 주루룩 흘리고는 천천히 그곳을 떠났다.
대행은 그날 하루가 다 가도록 우두커니 앉아서 그 측은한 사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병... 병... 병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아빠!"
그녀는 울부짖었다.
"대답해 주세요. 도대체 병이란 것은 무엇인가요? 왜 우리는 이처럼 고통스럽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요?"
"아가야..."
그 목소리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아가야, 나는 네게 질문을 할 뿐이다. 대답은 네가 찾아라. 나는 네게 대답해 줄 수가 없어."
"......"
"아가야, 아는 게 문제가 아니란다. 할 수 있는 게 문제란다. 아는 일은 누구로부터 배울 수 있겠지만, 하려면 자기가 직접 겪는 수밖에 더 있겠니? 넌 네가 직접 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해."
"그럼 저 문둥병자는 어떻게 하지요? 아빤 제가 의사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아니란다."
"그럼 아빤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건가요?"
"육신의 병의 뿌리는 존재의 병이란다. 넌 그 뿌리를 캐내야 해. 그렇게 되면 넌 영육을 모두 치료하는 의사가 될 수 있지. 넌 수술기구가 없이도 수술을 할 수 있게 되는 거란다."
"제가요? 그건 도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옛 성인들은 그런 힘을 가지셨다는데요?"
"누구든 가질 수 있지."
"그렇지만 전 지금 군복 수선을 하고 있는 일개 아녀자일 뿐인 걸요."
"......"
그러나 그에 대해서 내면의 목소리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 대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모든 존재의 본질적 고통을 또 다시 절감한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고통을 극복하는 길을 따라서 걸어갈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병마에 시달리고 굶주리는 모든 이들이 또다른 나요, 대행이었다.
얼마만큼 돈이 모였을 때 그녀는 허술한 식당 하나를 인수하였다. 그녀는 배고픈 것의 서러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부둣가에서 하역작업을 하며 생활을 영위해 가는 순박한 노무자들을 보며 그녀는 그들의 아픔, 아니 세상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꼈다.
식당 이름은 '낙원'이었다. 그녀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주변의 어려운 노무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고단한 육체 노동을 하는 그들이 국밥 한 그릇을 먹어야 할 것인지 먹지 않고 참아야 할 것인지를 망설이고 있다고 느끼자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노무자들은 차츰 대행의 사심 없는 호의에 응해 오게 되었다. 낙원 식당은 차츰 그들의 아름다운 생활 근거지가 되었다. 훈훈한 인정이 오고가는 그 식당에서 대행으로서는 오랜만에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같이 식당 일을 돕는 포항 아주머니 내외분도 신바람이 났다.
점심 식사 시간이나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수십 명의 노무자들이 식당으로 몰려 들어오면 식당은 금방 즐거운 소란 속에 파묻히곤 했다. 그 속에서 대행은 몸이 피로한 줄을 몰랐다. 그러나 대행이 직접 식당을 경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가끔씩 식당에 들렀을 뿐 식당일을 포항 아주머니 내외분한테 맡기고 자신은 계속 수선소를 맡아 일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선 일은 물론 식당일 또한 대행의 길은 아니었다. 그녀는 고작 몇십 명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면서 만족해 할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 날이었다. 번개 같이 그녀의 뇌리를 치는 무엇이 있었다.
그렇다. 물질로 베푸는 데는 한계가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게 베푸는 것이 참된 베풂이다.
마음의 묘법을 통해 무위의 행을, 무주상 보시를 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베풂이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방한암 대선사!
4. 한암 큰스님
대행이 방한암 스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열 네 살 때의 일이었다. 당시 대행의 외삼촌은 한암 스님이 주석해 계시던 오대산 상원사에서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었다. 대행은 열 네 살 되던 해에 어머님을 따라 외삼촌 댁에서 몇 달을 지낸 일이 있었다. 그때 마침 상원사에서는 재가 있었고 대행은 외삼촌, 엄마와 함께 상원사에 올라가 한암 스님을 대면하게 되었다.
한암 스님은 당시 예순 네 살 나신 노승이었다. 대행은 한암 스님에게서 평생을 선미 속에서 살아오신 고승의 맑은 연꽃과도 같은 마음의 향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한암 스님은 속가의 신자들과 합석하시는 일이 많았다.
당시 조계종의 초대 종정이셨던 고승으로서 스님의 인품은 참으로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인자하셨고 자연스러운 데가 있었다.
대행은 물론 한암 스님이 얼마나 높은 수행승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아니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이 무엇인지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다. 대행은 다만 가끔씩 흑석동 산 위에 있는 절에 올라가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드리시는 어머님을 보고 부처님은 저렇게 경배되어야 하는 분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국 선의 중흥조라고 일컬어지는 경허 대선사의 가장 뛰어난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서슬퍼런 조선총독부 미나미 총독의 초청을 깨끗이 거절할 만큼 의연한 분이었고, 오대산에 들어오신 이후 26년 동안 한 번도 동구밖에 나가보신 일이 없이 산사를 지켰으며, 일본 조동종의 명승이요 경성제대 교수이던 사또오가 '세계에 둘도 없는 분'이라고 극찬했던 대선승으로서 당시의 불교계를 대표하다시피하던 한암 선사와 대행의 만남은 그렇게 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대행은 외삼촌 댁에 머무는 동안 시간이 나는 대로 상원사로 한암 스님을 뵈러 올라가곤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가르침이려니와 왠지 모르게 한암 스님의 인품이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대행은 서투르나마 한암 스님을 위해 승복을 지어드렸고, 공양을 올렸으며, 또 그럴 때마다 스님으로부터 삶에 대해서, 불법에 대해서 깊고 고마운 말씀을 듣곤 하였다.
스님의 말씀에는 어렵고 딱한 형편에서도 꿋꿋하게 자기의 갈 길을 가고 있는 어린 소녀에 대한 지극한 자비심이 듬뿍 실려 있었던 것이어서 소녀 대행은 가끔씩 뭉클한 감동을 받곤 하였다. 물론 어린 대행은 부처님의 교설도 수행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한암 스님 문하에는 수행승들이 많았다. 소녀는 궁금했다. 저들은 도대체 노스님에게서 무엇을 배우는 것일까? 도대체 가사, 장삼을 입고 머리를 깎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행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안다면 나도 알테지만 네가 모른다면 나도 모른단다. 그것이 불법이다."
언젠가 스님은 대행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일이 있었다. 당시의 대행에게는 그 말씀의 깊은 의미가 얼른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해할 수 없는 말 속에 깊은 뜻이 실려 있음을 대행은 사량으로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랬으므로 그것은 화두가 되었다.
스님은 또 말씀하시곤 했다.
"손 없는 손으로 함 없는 함을 할 수 있어야 대장부라고 할 수 있느니라."
손 없는 손으로 함 없는 함을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일까? 대행은 그것도 얼른 납득할 수 없었다. 당시에 대행은 스스로에게 묻고 물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세월은 흘렀고, 운명이 그녀를 부산으로 이끌었을 때까지도 대행에게는 한암 노스님이 그녀에게 던졌던 몇몇가지 말씀들이 화두 아닌 화두가 되어 맴돌고 있었다.
'그렇지! 바로 그거구나.'
대행은 문득 깨달았다.
'바로 그것이다. 내가 한암 스님이요, 한암 스님이 또한 나인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저 영원한 그것, 저 무한한 그것이 아니겠는가!'
대행은 순간 불이不二의 깊은 뜻을 알고 마음으로부터의 답답함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시원 통쾌함을 느끼면서 쾌재를 불렀다.
그렇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나는 내 갈 길을 찾은 것이다. 육신의 손으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저 무량광의 세계로부터 사랑을, 자비를, 눈물을, 기쁨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을 얻어야만 한다.
대행도 이제 스무 살의 어른이 되어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상원사로 한암 노스님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낙원 식당을 포항 아주머니 내외분한테 인계했다. 그렇게 하여 대행은 부산 생활 1년만에 다시 빈손이 되어 그곳을 떠났다.
오대산으로 떠나기 전, 우선 상경을 한 대행은 얼마 동안 집에 머물렀다. 그동안의 경과를 묻는 가족들에게 대행은 몇 마디 간단한 말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는 집을 떠났다.
존재의 뼈아픔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꼈던 그녀, 그녀는 이제 더 큰 가족, 더 넓은 의미에서의 가족들을 위해 살아야 했다. 이미 그녀는 세속의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빠'의 부름에 따랐다.
발걸음은 동으로 동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그녀가 오대산 상원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근 한 달이 지난 뒤였다. 대행은 한암 큰스님께 문안을 드리고 자비로운 스님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큰스님은 여전했다. 맑고 부드러우면서도 투철한 스님의 안광은 여전히 깊은 선향을 내뿜고 있었다. 열네살 적에는 짐작하지도 못했던 스님의 지밀한 선의 세계, 마음의 세계가 이제는 점점 뚜렷하게 대행에게 느껴져 왔다.
스님 앞에 앉은 대행의 몰골은 참담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반걸식, 반노숙으로 옷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온몸에는 긁히고 찢어져 피멍이 맺힌 데가 많았다. 이런 몸으로 큰스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된 것이 이상스러울 지경이었다.
바로 그랬다. 한암 스님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시는 분은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승려든 속인이든 가리지를 않으셨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진심으로 응대하셨던 것이다. 아마 걸인과 다름없이 보였던 대행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한암 스님을 직접 친견할 수 있게 된 것은 스님의 그런 성품을 알고 있는 시자들이 대행을 가로막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대행에게는 더욱더 한암 큰스님이 친근하게 느껴진 것인지도 몰랐다.
"쯧쯧쯧..."
초라한 몰골의 대행을 바라보시며 스님은 나직하게 탄식을 하셨다. 대행은 갑자기 가슴 속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딸아이에게 하듯이 던지시는 그 "쯧쯧"하는 탄식이 굳건하게 다져지고 있던 대행의 마음을 와르르 무너뜨려 버렸던 것이다.
대행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암 스님께서는 옆에서 시봉을 하고 있던 탄허 상좌에게 삭도를 가져오도록 분부하였다. 탄허 상좌는 곧 접시 위에 삭도를 받들고 다시 들어왔다.
서로들 아무 말이 없었다. 노스님께서는 직접 삭도를 들어서 삭발을 해주셨다. 이윽고 삭발이 끝나자 대행은 이제는 속인이 아니라 한 사람의 행자로서 큰스님께 삼배를 올렸다.
그때 큰스님께서 문득 물어 오셨다.
"지금 누가 예배를 했느냐?"
거침 없는 노(盧)행자의 답변.
"큰스님과 제가 서로 둘이 아니기에 이렇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야무진 대답에 한암 스님께서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행은 이제 예비 승려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상원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암자로 보내어졌다. 상원사는 비구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이었으므로 비구니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곳으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대행은 거기에서 불제자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면서 본격적인 내면 탐구에 매진했다. 그러나 틀에 박힌 사찰 불교가 그녀의 뜨거운 마음을 흡족하게 적셔 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관념과 의론만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외형적인 교수 방법이 그녀에게는 불만스럽기 그지 없었다. 대행은 이미 마음의 본체를 보아 버린 때문이었다.
대행은 눈에 불이 뚝뚝 떨어지는 뜨거운 수도자였다. 그녀는 결코 안일하게 규정된 시간 동안 규정된 형식을 따라서 수행을 한다는 것 속에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행은 이미 수행 삼매 속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선배들은 그렇지가 못했고, 그 때문에 갈들이 생기게 되었다.
참으로 마음의 깊이를 맛본 대행에게, 아직 마음이라는 것의 발자취도 찾지 못한 선배들이 자신의 교학과 의론을 강요할 때, 대행은 이미 그 체득자로서의 떳떳함으로 의연하게 응대하였다.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진리에 대해서만은 결코 양보할 수가 없었다.
대행은 더 이상 형식적인 절간생활이 자신에게 진리를 찾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미련없이 암자를 떠나버렸다. 그리고는 정처 없는 만행과 산행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산승의 생활을 하기 그 얼마였던가. 세상에는 그녀처럼 온몸으로 부딪치며 길(도)을 찾는 이는 적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행에게 한암스님의 모습만이 점점 크고 둥뚜렷하게 비쳐올 뿐이었다.
아아, 큰스님...
대행은 뜨겁게 큰스님을 불렀다. 그것은 그분이 걸어가신 그 길이 얼마나 멀고, 또 진리 그 자체에서 한 치의 빈틈도 없었던가를 점점 알게 되면서 토해내는 찬탄이었다.
"큰스님, 문안드립니다."
대행은 큰스님에 대한 그리움이 뭉게뭉게 솟을 때면 단걸음에 상원사로 달려가곤 했다. 아무 때든 가리지 않고 그녀는 달려갔다.
"오, 네가 왔구나..."
한암 스님은 여전하셨다. 그러나 이제 전보다 대행은 태도에 있어서 더욱더 공손하였고, 마음에 있어서 이를 바 없는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대행은 큰스님과의 선문답을 통해서 자신의 경과를 확인하였다. 오직 아는 이만이 아는 이 세계를 더불어 이야기하고 또 점검할 수 있는 사람은, 대행에게는 한암 큰스님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가 존경해 마지 않는 한암 스님의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내키지 않을 때 그녀는 날카롭게 응대하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면 한암 스님은 대견스러운 듯 대행을 찬탄하실 때가 많았다.
네가 쑥쑥 커가고 있구나...
한암 스님은 그런 마음으로 대행의 기개를 받아들이시는 듯하였다. 그러고 나면 대행은 또다시 자기의 갈 길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만행. 강원도 일대의 거의 모든 산과 암자에 그녀의 발길이 닿아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대행이 한암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1950년이었다. 그해 3월, 대행은 한암 큰스님의 생신을 기억하고 큰스님께 문안을 드리기 위해 상원사로 갔다. 음력 3월 23일이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는데 큰스님은 상좌 탄허와 함께 반갑게 노행자를 맞아 주셨다.
그날은 마침 한암 스님의 생신이면서, 한암 스님으로서는 마지막 직제자 두 사람을 배출한 날이기도 했다. 낮에 두 사람의 새로운 구도자에게 스님께서는 비구계를 주셨던 것이다.
대행은 한암 스님의 방에서 스님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물론 독대라 해도 한암 스님을 늘 곁에서 모시는 탄허 상좌는 그 자리에 없을 수가 없었다. 탄허 스님은 대행 스님이 한암 스님과 인연을 맺은 이래로 그녀를 격려해 주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대행 스님과 다시 상면하게 되었을 때 탄허 스님은 얼마나 기쁘게 사제의 성도成道를 기뻐해 주셨던지!
그리고 그 뒤로 대행 스님과 탄허 스님 두 분은 서로 법우요, 선지식으로서의 교분을 계속하게 되었다.
"내가 오늘 마지막 아이들을 내보냈어."
한암 노스님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에는 어떤 예감 같은 것이 짙게 실려서 대행의 가슴에 와 닿았다.
"너도 이제 정식으로 사미니계를 받아야지. 이젠 다시 기회가 없을라. 이리 오렴, 우리 여장부님!"
거기서 대행은 한암 큰스님에 의해서 정식으로 계를 받고 여승이 되었다. 한암 스님은 형식적으로 계를 주기보다는 곧바로 마음의 본분을 묻는 선문답을 던져왔다. 무려 4년 만에 다시금 한암 스님에 의해 정성스러운 삭발이 끝나고 나자 큰스님의 비수처럼 날카로운 질문이 떨어졌다.
"지금 누가 계를 받았느냐?"
촌각의 여유도 주지 않는 노행자의 대답.
"스님께서 계 주신 사이가 없고, 제가 계 받은 사이가 없습니다. 다만 한 마리 학이 청산에 훨훨 날 뿐입니다."
다시 큰스님.
"네가 죽어야 너를 볼 것이다."
"죽어야 할 나는 어디 있으며 죽여야 할 나는 어디 있습니까?"
문득 소리를 높여서 큰스님.
"네 마음이 어디 있느냐?"
역시 거침없는 노행자의 응수.
"목마르실 텐데 맑은 물 한잔 드십시오."
다시 큰스님의 질문.
"내가 지남철이요, 네가 못이라면 어떻게 되겠느냐?"
노행자.
"못도 지남철이 됩니다."
그에 이르러서 한암 스님께서는 감탄하시고 말았다.
"네가 정녕 너로구나. 가거라. 네 법명은 청각淸覺이니라."
노행자는 큰스님께 정성스러운 삼배를 올렸다.
아마도 한암 스님께서는 자신의 현생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셨던 것 같았다. 그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이 아니던가. 강토는 갈갈이 찢겨졌고 모든 사람들의 삶은 뿌리를 잃고 이리저리 떠서 휩쓸렸다. 그 와중에도 한암 스님께서는 결코 절을 떠나지 않다가 1951년 3월에 단정히 앉으신 채로 태연하게 입적하셨다.
그때 세수는 75였고 법랍은 54년이었다. 그래서 대행은 한암 큰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마지막 승려가 되었다.
5. 고행
대행은 산과 들을 헤매면서 마을과 마을을 떠돌았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가시덤불에 할퀴였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옷은 누더기가 되었고 맨발이었다. 어쩌다 산속 깊은 데서 길을 잃어 사찰에라도 들릴라치면 그녀는 여지 없이 박대를 당했다.
"산속에도 왠 미친 년이 다 있어."
스님들은 세속 사람들보다 더 매정했다. 밥 한 술이라도 빌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잠을 청할 계제도 못 되었다. 나중에는 아예 스님들에게는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직접 대면하지 않고 밤이 깊어서야 법당에 들어가 잠을 자고 새벽 일찌감치 나가버렸다. 법당 문이 잠겨 있을 때는 산신각이나 칠성각에서 잠을 잤다.
그런가 하면 마을 앞이라도 지나치노라면 아이들이 그녀에게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었다. "미친 년! 미친년!"을 합창하면서 돌을 던져댔다. 묵묵히 걸어갈라 치면 기가 오른 아이들은 꼬챙이 따위로 그녀를 찌르거나 후볐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했다.
'다 내 탓이다. 내가 이 꼴을 하고 있으니 놀림감이 될 수밖에.'
그녀는 차차 인적 없는 산 속에 머물기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인간보다 나무와 짐승들이 더 다정한 벗이었다. 내면의 '아빠' 참나는 그녀를 가혹한 시련 속으로 몰아넣었다. 지쳐 쓰러지고 쓰러지기를 몇 번이었던가. 그녀는 별도로 누구한테서 화두를 받고 참구하지는 않았다.
자생화두.
내면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질문이 화두였다. 나무를 붙들고 지밀한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길가에 버려진 감자 하나를 들고 한나절 내내 생각에 잠길 때도 있었다.
어느 때는 물이 마른 웅덩이에서 허우적대는 올챙이를 퍼서 물 있는 곳으로 옮기느라고 한나절을 보냈다. 또 어떤 때는 깊은 밤 사색에 잠겨 걷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마침 그 낭떠러지 밑에는 나뭇단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기 때문에 다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푹신한 나뭇단 위에서 그날 밤을 한숨 늘어지게 잘 보냈다.
한 겨울 눈보라 속에서도 목숨을 연명할 최소한의 먹거리는 언제나 주어졌다. 굶어 죽는다 싶으면 언 밭에서 무 꽁지 하나라도 보이곤 했다. 또 신발을 얼음 사이에 빠뜨렸던 어느 날, 그녀는 야생 댓잎으로 발을 엮고 십리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 산속에서 그녀는 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는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들에게서 신발 한 켤레를 받았다.
그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라 번번이 되풀이 되었다. 내가 이제 죽는 것이로구나 싶은 순간 꼭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어느날 숲 속을 거닐고 있을 때 나무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쪽으로 가지 마. 낭떠러지가 있거든."
그러자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을 거야. 하지만 가고 가지 않는 건 내 뜻대로란다. 난 그쪽에 낭떠러지가 있는 지 미리 알고 싶지 않아. 가다가 낭떠러지가 있으면 되돌아오면 되지."
또 어느 날 눈 내린 언덕을 걷다가 문득 배고픔을 느껴졌다. 순간 언덕 아래 구덩이진 곳을 파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눈을 두손으로 헤집고 보니 그 속에 놀랍게도 싸리버섯 한 무더기가 오롯하게 자라고 있었다. 무심코 버섯을 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는 갑자기 번갯불을 얻어 맞은 듯 내밀던 손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버섯도 하나의 생명이거니, 내 어찌 배고프다고 저걸 죽여 나의 배를 채울 수 있으랴.
그녀는 버섯과 대화를 나누었다.
"얘야, 난 배가 고프단다. 네가 나를 불렀지?"
"네 그래요. 제가 불렀어요. 어서 나를 뜯어 잡수세요."
"하지만 얘야, 너도 생명이기는 마찬가진데 내가 어떻게 널 뜯어서 내 입속으로 넘길 수가 있겠니?"
"나와 당신은 둘이 아니에요. 나를 잡수세요. 나는 기뻐요. 당신이 나를 먹는다면 난 당신의 일부가 되어요. 그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요! 우리는 무수한 윤회 끝에야 인간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당신이 나를 먹는다면 나는 단번에 당신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기쁜 일이에요. 어서 날 잡수세요. 나는 죽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사는 거에요."
"오오, 너는 참으로 기특한 녀석이로구나"
그녀는 즐겁게 그 버섯의 소망과 자기의 필요를 일치시킬 수가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여름 깊은 밤 그녀가 지친 몸을 무덤에 기대어 쉬다가 막 잠에 빠져들 무렵이었다. 문득 무덤 속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어떤 녀석이 왔군."
굵은 남자의 음성이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받아 다른 남자의 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훔치려고 온 거야."
"맞아 단단히 지키자구. 도둑 맞으면 안 되니까."
그런데 문득 그녀의 마음 속에서 저 신발을 꼭 가지고 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서는 신발을 지켜야겠다는 다짐이 야무진데, 자기는 그것을 꼭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녀는 이 자생 화두에 깊이 몰입했다. 한참 후 그녀는 무릎을 쳤다.
"아하!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내가 왜 그것을 잊었던가. 어이, 거 무덤 속의 친구들아! 그대들이 곧 나와 한 뿌리요, 내가 곧 그대이거늘 무엇을 빼앗고 또 무엇을 빼앗길 것인가? 이제 장난질은 그만하고 밤도 깊었으니 우리 푹 쉬세 그려."
그러자 무덤 속은 쥐죽은듯 조용해졌고 그녀는 무덤가에 기대어 한 숨 푹잤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커다란 소나무 밑에서 몸을 기대 쉬고 있던 그녀가 깜빡 잠에 빠지고 말았다. 눈을 떠 보니 새벽녘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눈이 내려 발이 푹푹 파묻힐 만큼 쌓여 있었는데 자신의 몸에 아무런 탈도 없는 게 아닌가. 이미 동사하고도 남았을 터였는데 말이다. 그녀는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가 기대고 누웠던 소나무 근처에는 눈이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짐승의 발자국들이 보였다. 짐승들이 그녀를 둘러싸 추위를 막아주었던 것이다.
어느날 길을 걷는데 내면의 목소리가 찔레가 우거진 골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 길이다. 이곳으로 가거라."
그녀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곧 그 길로 들어섰다. 이미 자신의 몸은 버린 그녀였다. 그녀는 성큼성큼 가시덤불을 헤치며 걸어갔다. 그렇게 길을 헤매이던 그녀는 문득 그 '길'의 참된 의미를 깨우치게 되었다.
몸 없는 몸으로 갈 때 가시밭이건 바다건 길 아님이 없다는 것을, 허공을 거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가시밭길을 길이라 한다고 곧이곧대로 따랐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가지 않았으면 길이 길이 아닌 이치를 몰랐을 터였다. 그 이후 그녀는 몸 아닌 몸을 자유로이 나툴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발길은 남산에서 국립묘지로, 국립묘지에서 관악산으로, 그리고 청계산 일대를 헤매다 마침내 수원 용주사 근처의 화산능을 거쳐 헌인능에 이르렀다. 생식만으로 살아온 그녀의 몰골은 반 야수와도 같았다.
헌인능에 도착한 그녀는 사당 한 채를 발견했다. 그녀는 낮에는 무덤가에서 앉아 깊은 선정에 들었고 밤이면 사당에서 낙엽을 깔고 잠을 잤다.
그녀의 수행은 계속 깊어 가고 있었다. 누진통을 얻은 그녀의 앞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펼쳐졌고
천안, 천이, 숙명, 타심, 신족통의 신통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확인과 검증을 요구하였고 어디에 어떻게 쓰여져야 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였다.
당시 그녀는 헌인능을 중심으로 수십리 안팎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영적인 능력을 시험하고 점검했다. 특히 당시 그녀가 관심을 가진 것은 질병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질병의 원인을 파악하고 영적으로 치유하였다.
누가 알았을 것인가. 커다란 무덤 가에 앉아 깊은 선정에 든 한 여인이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갖가지 질병들을 진찰하고 투약하며 치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6. 어머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행은 아침녘에 한 예감을 받았다. 그것은 틀림 없었다. 한낮이 되었을 때 경찰관들이 와서 그녀를 체포했다. 그녀는 웃었다. '내 이럴 줄 다 알았으면서 왜 고초를 겪어야 하나.' 근처를 쏘다니는 그녀를 발견한 능지기가 경철서에 신고를 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빨치산들이 극성을 부리던 때였기 때문에 그녀는 여자 빨치산으로 오인되었던 것이다. 대행은 경찰관들의 모진 취조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통할 리가 없었다. 그 초라한 복색에 산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노라는 대답이 경찰관들에게는 가당치도 않게 들렸던 것이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그녀는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야 경찰서에서 그녀를 석방해 주었다. 노량진 경찰서에서 그녀에 대한 신원조회 회신이 왔던 것이다.
헌인능으로 돌아오던 길에 마을 앞에서 그녀는 어머니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처참한 딸의 모습을 본 순간 어머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까무라치고 말았다. 당시 대행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손발은 얼어터져 있었고 씻지 않은 얼굴은 험하게 갈라진 채로였다. 그것은 도저히 사람의 모습이랄 수가 없었다.
대행은 어머니를 부축하여 근처의 오두막집으로 옮겼다. 그 집에는 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대행은 할머니한테 어머니를 부탁했다.
어머니는 경찰서에서 대행의 신원을 묻는 조회를 받고서 수소문 끝에 잃어버린 딸을 찾으러 그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이틀 뒤 대행의 여동생 영조가 그곳에 도착했다. 영조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때까지도 영조는 언니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 거의 모르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는 같이 겪으며 자랐지만 언니는 영조가 어렸을 때부터 밖으로 다녔기 때문에 기억에 없었다.
자라면서 언니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는 사실들은 한결같이 기분 나쁜 것들뿐이었다. 당시만해도 영조는 도니 불법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밖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언니에 대해 크나큰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언니가 헌인능에 있다가 경찰관들한테 체포되었다는 연락이 집으로 왔고 어머니가 그곳으로 부랴부랴 떠나자 영조가 어머니를 모셔 오리라며 뒤를 좇아 온 것이었다. 그 때 그녀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한 여자 때문에 불쌍한 엄마만 고생하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찻길에서 내려 논밭 사잇길을 첩첩이 지나 헌인능 근처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영조는 마침 나오시던 어머니와 마주쳤다.
"네가 오려고 그러셨구나."
어머니가 영조보고 말했다.
"이생님(당시 대행은 사람들에게 이생님으로 불렸다)이 그러시더구나. '어머니, 어머니께서 세상에서 제일 귀애하시는 사람이 저기 옵니다. 나가 보셔요.'"
어머니는 대행에게 늘 경대했다. 그래서 그녀를 호칭할 때도 '얘'라든지 '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영조는 늘 그것이 싫었다. 영조는 어머니와 함께 대행이 있는 뒷산으로 갔다. 이 기회에 저 미친 여자한테 분풀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언니의 몰골은 아주 비참해 보였다. 동정심 같은 건 일지 않았고 다만 저 징그럽고 보기 싫은 여자가 자기 집안, 어머니나 자기와 아무 상관없는 여자이길 바랐을 뿐이었다.
영조는 언니를 보자마자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구 퍼부어대던 영조의 입이 그만 꽉 봉해져 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마 더 이상 듣기 거북했을 언니가 어떤 손을 쓴듯 여겨졌다.
영조는 집을 떠나 친척 형님과 차를 타고 헌인능으로 오면서 내내 언니를 욕했었다. 그런데 언니의 입에서 영조가 했던 말, 행동이 낱낱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언니의 태도나 말투로 보아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언니는 아주 의연 침착하게 동생을 꾸짖었다. 그러는 동안 영조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영조는 마음 속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영조는 왜 어머니가 그토록 언니를 중히 여기는 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고, 언니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영조가 대행에게 귀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행은 어머니를 동생한테 맡기고 새로운 길을 떠났다. 그 뒤로 대행은 어머니를 생전에 볼 수 없었다. 처참한 딸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가 집에 돌아가자 곧 병을 얻어 몇 년 뒤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또 다시 겨울이 왔다. 대행의 발길은 광나루의 백사장에 이르게 되었다. 강바람은 매서웠다. 그러나 방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칼바람이 부는 모래톱에서 그녀는 구덩이를 파놓고 잠을 자면서 수행을 계속하였고, 근처 건초더미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한겨울 들판에 널린 얼어터진 무꼬리와 배추시래기 따위를 먹는 것도 지쳐버렸을 때 그곳을 지나던 한 노인이 그녀를 발견했다. 뜻밖에도 그 노인은 대행의 가혹한 수행방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와 동정을 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네 집으로 가기를 청했다. 그러나 대행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노인은 곧 마을로 가더니 보자기에 강냉이 떡 두 개와 날콩이 한 줌을 싸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그녀의 식사량은 아주 극미한 것이었기 때문에 노인이 갖다 준 음식은 여러날 치의 식량이 되었다. 헌인능에 있을 때는 보리 아홉 알로 하루를 견딘 일도 있었다. 때문에 날콩 한 줌이면 그녀에게는 거의 한달치의 식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광나루에서 겨울을 난 대행은 이듬해 봄이 되자 그곳을 떠났다. 남한산성을 지나 이천을 거쳐 강원도 영월 쪽을 다 밟고 마침내 충북 제천의 백련사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풀뿌리와 산열매를 먹으면서 산으로 산으로 걸었다. 풀뿌리 하나면 이레를 먹던 그녀에게 그런 풀뿌리조차도 구할 수 없는 때가 왔을 때 대행은 초식동물처럼 생풀을 먹어야 했다. 혹시 몸에 상처라도 날라치면 아무 풀이든 뜯어서 쓱 문질렀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7. 견성암
대행이 백련사에 도착하기 며칠 전이었다. 한 여인이 길거리에서 간질로 발작하는 것을 본 대행이 그 자리에서 그녀를 낫게 하였다. 그 여인은 깜짝 놀랐다. 한번 간질이 시작되면 두 시간 넘게 고생하곤 했는데, 허름한 몰골의 여자가 자기 병을 멈추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울며불며 스님께 감사드렸다. 스님은 이제 다시는 그 병이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는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그 뒤 스님은 구학리라는 마을에서 또 한 번 법력을 행사했다. 논에서 일하다가 소뿔에 받혀 고생하는 한 늙은 농부를 보고 낫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마을을 떠나는 스님에게 어디로 가시냐고 사람들은 물었고, 스님은 그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그냥 조그만 소리로 "백련이야, 백련..."하고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대행이 백련사에 도착했을 때 몰골은 거지나 미친 사람과 다름 없었다. 게다가 비까지 마구 퍼붓고 천둥, 번개가 요란한 날이었다. 대행은 절에서 하룻밤 자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주지 스님은 그녀를 사정없이 내쫓았다.
대행은 할 수 없이 절에서 내려오다가 워낙 빗발이 드셌기 때문에 잠시 우묵한 바위 밑을 찾아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때 거기서 바지게에 떡을 지고 올라오던 한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남자는 소뿔에 허벅지를 관통당하고 고생하다가 대행을 만나 낫게 되었던 늙은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는 대행을 보고 아주 반가워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병이 낫자 고마운 마음을 갚을 데가 없어서 떡을 해서 짊어지고 백련사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대행은 웃으면서 어서 올라가 보라고 말하였다.
잠시 후 절에서는 야단이 났다. 농부가 떡을 지고 가서 전말을 이야기하자 백련사의 스님들은 자신들이 큰 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는 부랴부랴 대행을 다시 모셔갔다. 그리고 진정한 도인을 알아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렇게 하여 대행은 백련사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대행은 이생利生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백련사에 이생님이 계신다는 이야기가 일대에 퍼졌다. 그 소문을 들은 이근 지역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이생님을 보기 위해 백련사로 왔고 스님은 그들의 딱한 사정에 응해 주었다.
그러던 중 백련사의 여자 신도회장이던 오보살이라는 분이 백련사에 왔다. 그녀는 오자마자 대행의 시중을 들고 여러가지로 뒷바라지를 했다. 또 윤처사라는 분도 그곳에 왔는데, 그는 대행을 위해서 남자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자청해서 했다.
그때까지도 대행은 생식을 할 뿐 여느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윤처사는 산중에서 도라지며 칡뿌리, 머루 따위를 구해다가 스님에게 공양 올렸다.
어느 날 오보살은 신비한 꿈을 꾸었다. 대행 스님을 치악산 상원사로 모시고 가라는 내용의 꿈을 거푸 세 번이나 꾸게 된 것이었다. 오보살은 꿈 내용을 스님에게 이야기했고 스님은 묵묵히 그에 응했다.
그때 대행은 처음으로 오보살이 준비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당시에 대행과 함께 상원사로 간 사람은 오보살, 장보살, 윤처사, 그리고 승려 두 분과 어느 대학생 한 사람이었다.
말이 꿈의 계시를 받고 간다고는 하지만 상원사 측에서 초대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보살은 은근히 불안했다. 대행을 지극히 존경하였던 그녀는 스님이 혹시 푸대접이나 받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자 대행은 담담하게 자기는 상원사가 아니라 상원사 밑에 있는 토굴에서 지낼 것이라고 말했다.
일행은 저녁 무렵에 상원사에 도착했다. 치악산의 정상에 있는 상원사는 당시 폐사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주지 스님도 병중에 있었다. 다음 날 대행은 주지 스님에게 토굴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아무도 대행에게 토굴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대행은 그곳에 갈 때부터 그곳을 염두에 두었던 듯싶었다.
주지 스님은 비어 있는 토굴이니 누가 그곳에서 공부를 하겠다면 말릴 수 없노라고 말함으로써 승낙을 하긴 했지만 한 마디 경고를 했다. 즉, 그 토굴은 여간 터가 세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몇몇 스님들이 크게 결심을 하고 정진하기 위해 그곳에 갔었지만 모두들 며칠 지나지 않아 초죽음이 되어 물러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행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 토굴이 바로 상원사에서 약 5백미터쯤 아래 있는 견성암이었다. 토굴이 서 있는 곳이라야 십여 평 넓이밖에 되지 않았다. 또 토굴은 사방 여섯 자가 채 안되는 작은 집이었다. 부엌이 하나 있고 문이 둘 있었다.
대행이 그곳으로 내려왔을 때 토굴 앞에는 날감자가 하나 있었다. 대행은 그것으로 3일을 먹었다. 윤처사와 장보살 등이 땔나무라든지 먹을 것들을 구해 왔다. 밤중에는 대행 혼자 그 토굴에서 지냈다. 스님은 문을 안으로 굳게 잠그고는 거의 말도 하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대행을 만나 간질병을 나은 바 있는 여인이 그곳을 찾아왔다. 그 여인은 수소문 끝에 백련사로 갔으나 이생님(대행)이 상원사로 갔다는 말을 듣고 뒤따라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여인이 돌아간 뒤부터 대행에 대한 이야기는 원주를 중심으로 수십리 근처에 퍼져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행을 찾아 치악산을 오르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대행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토굴 문을 안으로 잠그고 아무 대답도 없이 묵연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찾아온 사람들은 가지고 온 초나 향 따위를 토굴 밖에 두고 정성을 드린 다음 떠나갔다.
당시 상원사와 견성암에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오륙백명씩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이생님에게 소원을 빌면 모든 것이 형통한다고 믿었다.
깊은 밤중에는 호랑이가 나와 토굴을 지켜주곤 했다. 어떤 사람은 호랑이를 보고 놀라 기절해버리기도 했다. 아마 대행에 앞서 그 토굴에서 수행을 하려 했던 스님들은 호랑이를 보고 놀라서 수행을 포기하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대행을 찾아서 몰려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한 달 두 달이 아니라 해를 두고 계속되자 마침내 경찰에서 개입하는 정도가 되었다. 원주, 제천 일대의 약국들이 경찰서에 진정을 냈던 것이다. 치악산으로 오르는 길목마다 마을 청년들이 지켜 서서 산으로 올라가려는 신도들을 제지하자 사람들은 먼 길을 돌아서 견성암을 찾아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신림면 경찰 지서의 경관 두 명과 방범대원 이십여명이 대행을 연행하려고 상원사로 올라왔다. 그러나 대행이 조목조목 법률상식으로 응대하자 그들은 혀를 내두르며 속수무책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대행의 독특한 능력이었다. 대행은 언제 그렇게 세상 일을 다 배웠나 싶을 만큼 필요한 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 신도들이 법률 문제를 말하면 법조문의 해석에 대해서 말하였는데 그것이 틀림없었고, 병에 대해 말하면 병원에서 진단한 것과 같은 진단을 내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행은 그런 것을 알아내기 위해 별다른 표정이나 제스처 따위를 보이지도 않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대행에게 의지하려 했던 내용은 질환에 관한 것이었는데, 비록 병원에서 불치병으로 선고된 병일지라도 그녀로부터 "알았으니 가보세요."라는 나지막한 대답 한마디만 듣고 나면 그 병은 꼭 나앗다. 그렇게 해서 병을 낫거나 소원을 이룬 사람들이 감사의 인사차 다시 절을 찾아오는 일이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대행이 견성암에 머문 이후 신도가 점점 많아지자 주지 스님은 상원사 중창을 생각하게 되었다. 상원사는 신라 때 무착 대사에 의해 처음으로 지어진 절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젠 다 쓰러져가는 폐사에 지나지 않았다. 중창 사업은 1962년 봄에 시작되어 1963년 8월에 끝났다. 화폐개혁이 되기 전의 구화로 3,300만 환이 들었다.
그 모든 돈이 신도들의 감사의 헌금으로 마련되었는데 신도들 대부분이 아주 가난한 형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대행의 보이지 않는 원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대행은 1967년, 자신이 증득한 도의 세계를 세상에 펴기 위해 하산하였다. 그리고 1971년, 경기도 안양에 한마음 선원(대한불교회관)을 설립하여 본격적인 대중 교화에 나서기 시작했다.
8. 축생들과의 일화(대행 스님 말씀)
내가 산중으로 돌아다니 던 때 산짐승들이나 새들이 나에게 상처에 바르는 약초를 갖다 주거나 먹을 것을 물어다 떨어뜨려준 예가 많았다. 그런데 그 동물들은 모두 어느 때 내가 그들을 한마음으로 사랑하고 도왔기 때문에 이러노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엾은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 못난 사람에게 더 끌린다. 그래서인지 축생에게도 마음이 끌린다. 그중에서도 모든 사람과 짐승들이 징그럽다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뱀 따위에게 측은한 마음을 느끼곤 한다.
상원사를 중창하던 무렵에는 일꾼들이 뱀을 잡아서 통에 넣어둔 것을 내가 뱀의 메시지를 듣고 찾아가서 살려준 적도 있다.
나는 산중을 떠돌면서 뱀을 만날 때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했다.
"얘, 제발이지 사람들 눈에 띄지 말아. 네가 그렇게 거죽 모양을 짓고 있으니까 사람마다 너에게 돌팔매질을 하잖니? 그렇다고 사람들 탓도 하지 마렴. 그게 다 네 탓이잖아? 네 업이 중해서 그 모양으로 태어난 거니 남의 탓할 것도 없어. 얘, 제발 다음 생에는 번듯하게 한 번 태어나 보렴."
대개의 짐승들은 자기에게 진정어린 말을 해 줄 때 그 마음에 응한다. 그런 때 뱀이 자기를 쓰다듬어 달라고 했으면 나는 서슴 없이 뱀을 쓰다듬어 주었을 것이고 뱀이 자기를 죽여달라고 했으면 나는 뱀을 죽여 주었을 것이다.
추운 겨울날, 나는 뱀 한 마리를 건지려고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꺾기 위해 몇 번이나 굴러 떨어지며 나무꺾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손은 새빨갛게 얼었고 곡기도 없는 몸은 허적허적해서 자꾸만 나둥그러졌지만 나는 그 가련한 친구를 생각하며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뱀 때문에 울고, 개미 때문에 울고, 메마른 물웅덩이에서 말라 죽어가는 올챙이 때문에 울고, 가엾은 어머니 생각 때문에 울고, 아버지, 형제, 세상 사람들 생각으로 울며 떠돌기 그 얼마였는 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나는 한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묘한 지를 알았다. 내가 뱀과 한마음이 되었을 때 내 한 몸이 저 뱀 한 마리를 위해 얼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마음 먹었을 때 뱀은 훌륭한 곳으로 천도가 되었다.
산중을 떠돌 때 목에서는 핏덩이가 나오고 잘 먹지를 못해서 허기가 져 몸마저 움직일 힘이 없었다. 나는 바위 위에서 저만큼에다 시선을 던진 채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뱀 한 마리가 풀 숲에서 나오더니 바위 위로 기어 올라왔다.
나는 진작부터 놀라는 것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라 그저 묵연히 바라보았는데 놀랍게도 뱀은 이상스런 나뭇잎을 물고 온 것이었다. 나뭇잎은 뒷면에 솜털이 난 것이었는데, 그 나뭇잎을 바위 위에 갖다 놓으면서 내게 뱀의 메시지가 느껴졌다.
뱀의 뜻인즉, 당신이 나를 구해 준 일이 하도 고마워서 이것을 갖다 드리는 것이니 짓이깨어서 먹고 나으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자기는 몸이 보기에 흉하니 생각 같아서는 당신을 안아주고 싶지만 그만 가야겠노라며 사라졌다.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런 때에 나의 마음과 뱀의 마음은 진정이지 둘이 아니다. 내가 운 것은 나를 살려준 뱀이 고마워서라기보다는, 살아 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생명을 가진 것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밑바닥에 깔고 있는 진하디 진한 사랑과 자비와 서로를 살리고 위로하고 구하려는 그 지극하고 처절한 것이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너무도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풀잎들을 바위에 짓이깨어서 입에 넣었다. 너무도 고마운 나머지 가까운 개울에서 물을 두손으로 퍼다가 헹구어서 입을 대고 모조리 다 마시기까지 하였다. 나는 꼭이 살려고, 목에서 올라오는 피 때문에 그 약풀을 먹었던 것은 아니다. 뭐라 말할 수도 없는 진하디진한 감동, 그것이 나를 울면서 그렇게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때 뱀으로부터 받아서 내 각혈이 멎게 되었던 풀을 그 뒤로 가끔씩 찾아 보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그 뒤로는 그런 비슷한 경우가 아주 흔해졌다.
한 번은 비둘기가 허기져서 앉아 있는 나에게 옥수수를 물어다 떨어뜨려준 일도 있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 헌인능에서 나무에 기대어 꼬박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깨어 보니 눈이 소복이 내린 가운데 내 주변에는 웬 짐승의 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눈은 잘 치워져 있었던 적도 있다.
청계산에서 겪은 일이다. 어느 날 황혼 무렵 묘지에 기대어 쉬고 있을 때 개미떼들이 열을 지어서 부지런히 이동하고 있었다. 거의 땅바닥이 까맣다싶을 정도로 많은 개미떼였다. 그런데 그 걸음걸이들이 여간 빠르지가 않으므로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개미들이 가는 곳으로 천천히 따라가 보았다. 개미들은 어느 골짜기의 바위 밑에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따라 그곳에 기대어 앉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있자니까 내가 있던 산벼랑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져서 나와 개미들이 옮겨온 그곳을 덮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날 새벽에 비가 약간 오긴 했지만 산이 무너질 정도는 결코 아니었는데 말이다. 때로 인간은 개미만도 못할 때가 있다.
9. 행록 1
스님께서는 평소 앉아 계실 떄 반가부좌를 주로 하셨다. 걸음걸이느느 천천히 걸으시되 태도가 진중하여 경솔하게 좌우를 휘둘러 보거나 조바심을 치시는 일이 없었고 보통 때에는 매우 침중한 태도로 홀로 앉아 계시는 때가 많았다.
어떤 일에도 놀라거나 요란스러운 적이 없었고 침착하셨으므로 비록 작은 체구였으나 제자들에게는 비할 바 없는 거인처럼 느껴지곤 했다.
목소리는 평소에는 강한 편이었으며 말씀하시는 내용이 간곡한 데에 이르러서는 매우 낮고 느리며
진지하하여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었다.
색신은 비록 여성이셨으나 꿋꿋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시어 여성적이라고 하기에는 당당하고, 남성적이라고 하기에는 또 부드러운 포용력과 친화력이 있어 제자들은 양성의 두 극단을 느끼지 못했다.
스님께서는 모든 문제를 오직 진리에 귀일시키셨는데 그것이 너무나 철저하시어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그러하셨으므로 제자들이 오히려 지칠 때가 많았다.
설법은 경전을 인용하시는 적이 드물었고 평상의 언어로 소탈하고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셨는데,
다소 조리가 결여된 듯 하였으나 제자들은 오히려 그 점을 스님의 한 매력으로 생각하였다.
스님께서는 무엇보다도 곤액을 겪는 사람에게 자비심이 움직이시었다. 특히 곤액을 겪되 진실하고 간절한 사람에게 더 마음이 움직이시었으며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버림받고 누추한 사람에게 더 인자하시었다.
스님께서는 특별히 즐겨 드시는 음식이 드물었고 세간 사람들이 탐착하는 유흥이나 취미 따위를 따르시지 않았다. 공양은 하루에 두 번에 걸쳐 작은 공기로 하나씩 드시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반찬은 두세 가지 이상 드시는 경우가 적었고 특별히 어떤 음식을 주문하시는 일이 없었다.
스님께서는 어떠한 일에도 자신감을 잃으시는 경우가 없었다. 그 일이 아무리 엄청나게 크나큰 일일지라도 위축되시는 경우가 없이 자신만만 하시었는데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무위법으로 보자면 일에는 하등 크고 작음이 없다. 손바닥 뒤집는 작은 일이나 세상 모든 문제가 걸려 있는 큰 일이나 마찬가지다."
제자들 중에는 스님에게는 세상을 움직이시는 큰 힘이 있다고 믿는 이가 많았다.
스님께서는 당신을 만나고자 원하는 사람에게 가능한 데까지 시간을 내어 만나 주시었다. 많은 제자나 신도들은 스님을 뵙거나 스님과 말씀을 나누는 그것만으로도 어려운 일이나 가슴 답답하던 마음이 풀리곤 하였다. 그랬으므로 오랫동안 스님을 친견하지 못하게 되면 제자들은 마치 연인에게 느끼는 것과도 같은 그리움을 느끼곤 하였다.
스님의 법력으로 병이 낫거나 막혔던 어려운 일을 해결한 예는 최근의 일만으로도 수천 건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언제나 그것을 믿음의 공덕으로 돌리셨고 신도나 제자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마음 안에 새길 뿐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 적었으므로 세세한 그 내용이 널리 알려지는 경우는 적었다.
어느날 객승이 와서 시주를 청하였다. 마침 여유가 없었는데 공양주 보살을 부르시더니 남은 쌀이 있는지를 물으셨다. 공양주 보살이 두어 말 정도 있다고 말씀 드리자 스님께서는 그 쌀을 모두 객승에게 시주하도록 일렀다.
공양주 보살은 그 쌀이 없으면 당장 내일 아침에 공양 준비를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으나 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마세요.없으면 들어오겠지요."
과연 그날 밤이 깊어서 한 신도가 감사의 뜻이라면서 쌀 두가마를 싣고 찾아 왔으므로 사람들은 감탄하였다. 스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다 던지면 꼭 생깁니다. 버리면 필연코 있습니다. 왜 믿질 못합니까?"
평소 탄허 스님께서는 스님을 일컬어 여장부라 하셨다 한다. 스님께서는 스승이신 한암 선사를 매우 존경하시었으며 탄허 스님에 대해서도 매우 깊은 친밀감을 가지고 계시었다.
스님을 오래 모신 사람일수록, 가까이에서 모신 사람일수록 더 스님을 존경하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무리 오묘한 법을 끼친다 해도 중생과 더불어서가 아니면 도가 될 없고 아무리 드높은 경지를 체달한다고 해도 눈물이 없는 것이라면 나는 따르지 않겠다. 깨우친 목석보다는 자비심 있는 중생이 아름답다."
한 제자가 스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스님의 설법은 이차적이다. 스님은 존재 그 자체로서 이미 설법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말씀에서가 아니라 그 거동에 진정한 스님의 법문이 있다."
서독에서 온 한 물리학자가 스님의 도력을 시험하기 위하여 자기가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자 스님께서 서독에 있는 그 학자의 집 구조를 세세하게 이르신 뒤에 "당신이 가장 아끼는 것은 서재요."라고 대답하시었다. 그 학자는 감탄한 나머지 스님을 서독에 초청하여 스님께서 그에 응하신 일이 있었다.
스님께서는 학교를 다니시지 않으셨고 다만 어려서 야학에 나가 산수를 두 시간 배우신 적이 잇을 뿐이라 한다.
한 선객이 스님께 절을 올리고 얘기하던 중에 문득 목소리를 높여 "큰스님!"하고 불렀다. 스님께서는 고개를 숙이고 등을 약간 구부린 채 손으로 무언지 만지작거리고 계셨는데 그냥 그대로였다. 선객이 다시 큰소리로 "큰스님!"하고 불렀다. 스님께서는 여전하시었다.
선객이 세번째 "큰스님!"하고 불렀다. 스님께서는 여전하시었다. 그러자 그 선객은 일어나서 공손하게 큰 절을 올리고 말하였다. "잘 배우고 갑니다."
스님 몰래 일을 처리하려는데 스님께서 스스로 아시는 경우가 간간이 있었으므로 제자들이 스님을 경외하였다.
스님께서는 출가 제자들이나 사찰 일을 보는 재가 제자들을 항상 자유롭게 방임하시었다. 직접 가르쳐서 알게 하시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할 때까지 꾸준히 기다리시는 경우가 많았다.
1986년 처음으로 있었던 재가 신자들의 수계식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들께서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이렇게 계를 받으실 수도 있으나 내게 있어서는 결코 이 수계가 가벼운 일일 수가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들과 나는 세세생생의 인연을 맺었으므로 나는 여러분들을 영원토록 이끌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책임은 실로 막중하여 나는 이렇게 간절한 마음이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중에 울음이 섞였으므로 많은 제자즐이 함께 울어 마지 않았다.
스님께서는 1986년부터 인연이 닿는대로 비구 제자들의 출가도 허락하셨다.
10. 행록 2
상원사 중창 당시의 일이다. 산길에서 스님이 나뭇꾼과 마주쳤다. 나뭇꾼은 이생님(대행스님)의 법력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왠일인지 모르지만 스님을 보자 마구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특유의 무심한 모습으로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럴수록 그 나뭇꾼은 화가 더 났던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마침내는 "네가 정말로 그렇게 도력이 높은 인간이라면 내가 당장 목숨이라도 내놓겠다!" 라고 극언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날 마을로 돌아간 그 나뭇꾼이 멀쩡한 채로 갑자기 쓰러져 버렸다.
이 일에 대해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사건은 오히려 나를 크게 배우게 했습니다. 나는 사실 무심코 있었던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냥 무심해서만 되는 것만은 아닌 것이었지요. 진실한 마음은 진실한 공덕으로 회향시켜 드리는 것이 옳겠지만 스스로 악행을 짓는다고 그것까지 금방 과보를 받도록 방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도 합니다. 상원사에 있던 당시에 비해서 저 스님은 법력이 많이 적어진 것이라고 말입니다. 내게 그런 법력이 얼마나 있는 것인지는 차치하기로 하더라도 나는 그 뒤에 생각한 바가 있었습니다. 업의 법칙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니 중생의 원을 무조건 다 들어주시는 것만이 부처는 아닐 것입니다. 중생의 악업도 가려야 하듯이 중생의 선업도 꼭 즉각적으로만 보상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 그래야만 좋은 것도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선과나 악과가 아니고 마음의 본분을 밝히는 일입니다. 그 자리에는 선과도 악과도 붙질 못합니다."
스님께서 선실에 앉아 한 제자와 담화를 하고 계실 때 영에 사로잡힌 한 건장한 사내가 방 밖에서 행패를 부리며 폭언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스님께서는 이야기하시면서 마른 땅콩을 하나 둘씩 집어 잡숫고 계시다가, 문득 땅콩을 한 웅큼 와락 쥐면서 "요놈!"하고 단단한 음성으로 호령하셨다. 시선은 그냥 그대로여서 밖을 향하지는 않으셨다.
그런데 그 순간 거구의 사내가 그대로 땅바닥을 뒹굴면면서 큰어르신을 몰라 뵈었노라며 백배사죄하였다. 스님께서는 청년의 언동 사나운 것을 모두 영의 소행임을 아시고 영과 사람을 모두 제도하시었다.
한 번은 영이 들려서 십여년을 살아온 어떤 여인이 시어머니와 함께 선원에 찾아왔다. 스님께서 영을 꾸짖자 영도 지지 않고 대꾸하였으나, 다시 스님께서 수년 전의 일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그간의 몹쓸 일들을 추궁하자 영이 한풀 꺾이며 순순해졌다.
그 뒤로 스님께서는 벽을 가리키며 저 아름다운 국토로 보내주겠노라고 설득하기도 하고, 마침 앞에 놓여 있던 음료수 병을 들어보이시면서 이 국토의 아름다운 호수가 보이지 않느냐, 이곳으로 가서 살도록 하라고 달래시었다.
영은 곧 응할듯 하다가 응하지 않기를 수차나 하였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며 네가 정 가지 않겠다면 힘으로써 몰아내겠노라고 호되게 꾸짖으시었다. 그러자 마침내 여인에게서 영이 떠나게 되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영은 마음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마음으로 벽이나 음료수 병에 아름다운 국토를 그려 보이면 그 국토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안다면 그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영의 마음의 차원은 살아 당시의 차원과 같다. 그러니 어찌 살아 있는 동안 마음 닦기를 게을리 할 수 있겠느냐?"
스님께서 치과 치료를 받으신 때가 있었다. 잇몸을 파고 치주를 심되 마취도 하지 않으시었다. 얼굴이 약간 상기되시었을 뿐이었다. 치료 중 치주가 잇몸 부위의 살을 찢고 밖으로 꿰뚫리게 되시었으나, 오히려 의사를 위해 안타깝게 여기실 뿐이었고, 감정의 동요가 조금도 없었고, 거의 붓지도 않으셨다.
또 돌아오셔서는 그런 상태로도 설법을 하려 하시므로 제자들이 쉬실 것을 권하였으나 스님께서는 듣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제놈(주인공)이 있다면 아무 일도 없으리라."
제자들이 울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많은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여러 스승들을 찾아 다니며 수많은 말씀을 배워 듣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경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는지 마음으로 짐작할 뿐이며 그나마 배운 것이 있다면 처음에 한암 스님께서 제자로 나를 받아 주시던 때를 전후해서 직접 간접으로 스님께 배운 것과,그동안 여러곳을 떠돌며 스스로 살펴보고 느낀 것이 있을 뿐입니다.
산으로 들로 헤매면서 갖가지 고생을 하기 도 했지만 나는 그것을 고행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나의 고독을 함께 나누어준 나의 주인과 더불어 다녔을 뿐입니다. 나는 오직 그 영원한 주인, 생명수를 주시는 그 주인과 함께 산과 들을 떠돌았던 것 뿐입니다. 내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들 자신의 본래 모습인 주인공을 철저하게 믿으시라는 것뿐입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eyeinhand/1017536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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