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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대행선사 이야기(大行禪師之話)

by 예경 2017. 1. 14.

 

 

 

대행선사 이야기(大行禪師之話)

 


 

대행 큰스님과 관련된 신행담들은 많다. 여기서는 기존 출판된 책들에 실린 것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여섯 편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출처는 <도道(1985)> <무無(1986)> <영원한 길의 시작(1990)> <죽어야 나를 보리라(1991)>이다.

 

 

먼저 1편 ‘이생 전설’은 <도>의 3부에 실려 있는 것이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경어체를 평어체로 바꾸었고, 제목이 없기 때문에 편의상 제목을 달았다. 이 원고에서 큰스님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은 큰스님 구도기 7편(견성암)의 것과 동일하다.

 

 

 


 

 

이생 전설 1

 


 

글/이은수 (한마음선원 관리부장)

 

 

 

 

내가 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61년이었다. 당시 내 나이는 16세였고, 원주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했다. 어린 녀석이 열심이라면서 격려하고 도와주시는 동네 어르신들 덕분에 가게는 그런대로 꾸려갈 수 있었다.

 

 

초겨울(11월) 어느 날 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치악산 상원사에 계시다는 여스님 이야기를 들었다. 내게 상원사의 여스님 이야기를 전해 준 이는 마흔이 넘어 보이는 남자 분이었다.

 

 

그 분은 이생님(당시 대행 스님은 이생利生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에 대해서 크나큰 존경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분은 나와 얘기를 하면서도 가끔씩 치악산 쪽을 향해 경건하게 합장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 남자분의 말씀에 의하면 이생님은 보통 도력이 높은 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생님이 상원사에 온 뒤로 그분의 도력에 대한 소문은 원주, 제천, 충주 일대에 널리 퍼져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그곳으로 몰려간다고 했다. 그분 앞에 동전 세 개(구화 3백환)만 놓고 오면 원하는 것이 다 성취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스님께서는 산중으로 헤매며 수도를 하시다가 제천에 있는 백련사까지 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백련사에 도착하시기 며칠 전에 길거리에서 간질로 발작을 하는 한 여인을 그 자리에서 낫게 하셨다.

 

 

여인은 깜짝 놀랐다. 한 번 간질이 시작되면 두 시간 넘게 고생하곤 했는데 이 초라하고 작은 여자가 자기 병을 멈추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울며불며 스님께 감사드렸다. 스님은 이제 다시는 그 병이 당신을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시고는 가던 길을 재촉하셨다.

 

 

그 후 스님은 구학리라는 마을에서 또 한 번 딱한 사람과 마주치셨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 소뿔에 허벅지를 깊이 찍혀 고생하는 한 늙은 농부를 보게 되었다. 스님은 그 농부도 낫게 해 주셨다. 그리고는 마을을 떠나시는 스님에게 어디로 가시냐고 사람들이 물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대답을 하시지 않은 채 그냥 조그만 소리로 “백련이야 백련…” 하며 생각에 잠겨 중얼거리셨다고 한다.

 

 

백련사에 도착했을 때 스님의 몰골은 거지나 미친 사람과 다름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비까지 마구 퍼붓고 천둥번개가 요란한 날이었다. 스님은 절에서 하룻밤 자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주지 스님은 이생님을 사정없이 내쫓으셨다고 한다.

 

 

이생님께서는 할 수 없이 절에서 내려오시다가 워낙 빗발이 드셌기 때문에 잠시 우묵한 바위 밑을 찾아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바지게에 떡을 지고 올라오던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 남자도 쉬려고 짐을 내리다가 문득 이생님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소뿔에 허벅지가 찍혀 고생하다가 이생님을 만나 낫게 된 바로 그 농부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농부의 아들은 이생님을 보고 아주 반가워했다. 그는 아버지의 병이 낫자 고마운 마음 갚을 길이 없어 떡을 해서 짊어지고 백련사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생님은 웃으시면서 어서 올라가 보라고 말씀하셨다.

 

 

절에서는 야단이 났다. 그 사람이 떡을 지고 가서 전말을 이야기 하자 백련사의 스님들은 자신들이 큰 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는 부랴부랴 이생님을 다시 모셔갔다. 그리고 진정한 수도자를 알아 뵙지 못한 사실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렇게 해서 이생님은 백련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윽고 이생님이 백련사에 계신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소문을 들은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이생님을 뵙기 위해 백련사로 찾아왔다. 이생님은 그들의 딱한 사정에 응해 주셨다.

 

 

그러던 중 오보살이라는 분이 백련사에 왔다. 그분은 오시자마자 이생님의 시중을 들고 여러 가지로 뒷바라지를 했다. 그런가 하면 윤처사라는 분도 그곳에 왔다. 이분은 또 이생님을 위해서 남자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자청해서 했다.

 

 

그때까지도 이생님은 생식을 할 뿐, 여느 음식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윤처사는 산중에서 도라지며 칡뿌리, 머루 따위를 구해다 이생님께 공양을 드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백련사 여자 신도 회장이던 오보살이 신비한 꿈을 꾸었다. 당신이 이생님을 치악산 상원사로 모시고 가라는 내용의 꿈을 거푸 세 번이나 꾸자 그분은 꿈 내용을 이생님께 이야기했다. 이생님은 묵묵히 그에 응하셨다.

 

 

그때 이생님은 처음으로 오보살이 준비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셨다. 몸도 깨끗하게 씻으셨다. 그리고나서 일행과 함께 상원사로 향했다. 그 당시 이생님과 함께 상원사로 간 사람은 오보살, 장보살, 윤처사, 그리고 승려 두 분과 어느 대학생 한 명이었다고 한다.

 

 

말이 꿈의 계시를 받고 간다고는 하지만 상원사 측에서 초대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일행은 미래에 대해서 불안한 감도 가지고 있었다. 이생님이야 정처 없는 만행으로 이미 그런 따위의 일에는 희비가 없는 분이었지만 보살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이생님을 지극하게 존경하였던 오보살은 이생님이 혹시 푸대접이나 받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러자 이생님께서는 담담하게 나는 상원사가 아니라 그 밑에 있는 토굴에서 지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생 전설 2.

 

 

일행은 저녁 무렵에 상원사에 도착하였다. 해발 1,050 미터나 되는 치악산 정상에 있는 상원사는 폐사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주지 스님도 병중에 있었다. 모두들 주지 스님께 병문안을 드리고 함께 공양을 했다.

 

 

이튿날 이생님은 주지 스님께 토굴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토굴이란 글자 그대로 흙을 파서 만든 굴이 아니라 나무와 흙을 층층으로 쌓아 올려 지붕을 얹은 단칸집을 말한다. 아무도 이생님께 토굴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생님은 이곳에 올 때부터 그곳을 염두에 두셨던 듯하였다.

 

 

주지 스님은 비어 있는 토굴이니 누가 그곳에서 공부를 하겠다면 말릴 수는 없노라고 말하며 승낙은 했지만 한마디 경고를 잊지 않았다. 그 토굴이 여간 터가 세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몇몇 스님들이 크게 결심을 하고 정진하기 위해 그곳에 갔었지만 모두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초죽음이 돼 물러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생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토굴은 상원사에서 약 5백 미터쯤 아래쪽에 있었다. 지금(1985년)도 그곳에 반쯤은 스러진 채로 그러나 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토굴을 볼 수가 있다. 오른쪽으로는 계곡이 깊고, 그 건너편에서는 높은 산봉우리가 계곡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왼쪽으로도 작은 계곡을 이루고 있어서 약간 우묵한 곳인데, 토굴자리라야 십여 평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토굴 자체도 사방 여섯 자 이상은 되지 않은 작은 집이다. 높이도 여느 사람 같으면 바로 설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부엌이 하나 있고 문이 둘 있었다.

 

 

이생님이 그곳으로 내려왔을 때 토굴 앞에 날감자가 하나 있었다. 이생님은 그걸로 3일을 잡수셨다고 한다. 윤처사와 장보살 등이 땔나무라든지 먹을 것들을 구해 왔다.

 

 

밤중에는 이생님 혼자 토굴에서 지냈다. 밤이 되면 토굴 주변은 무서운 분위기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이생님은 문을 안으로 굳게 잠그고는 거의 말씀도 없었고 외출도 하지를 않았다.

 

 

그러던 차에 예전에 길에서 이생님을 만나 간질병을 나은 여인이 그곳을 찾아왔다. 그 여인은 수소문 끝에 백련사로 갔지만 이생님이 상원사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뒤따라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여인이 돌아간 뒤부터 이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원주를 중심으로 인근 수십 리까지 퍼져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생님을 찾아 치악산을 올랐다. 그러나 이생님은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토굴 문을 안으로 잠그고 아무 대답도 없이 묵연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찾아온 사람들은 가지고 온 초나 향 따위를 토굴 밖에 두고 정성을 드린 다음 떠나갔다.

 

 

 

 

그리하여 이생님에 대한 신비스런 소식은 원주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던 내게도 전해지게 된 것이다. 나는 그런 분이라면 한 번 뵙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꼭이 무슨 소원을 기구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아직 열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던 때였으니까 호기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돈 삼백 환과 양초, 과일 등을 준비한 다음 상원사로 떠났다.

 

 

겨울이었다. 눈이 많이 내렸기 때문에 산길은 아주 미끄러웠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녀서 반은 얼음길이 돼 있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나섰는데도 상원사에 도착해 보니 오후 4시나 돼 있었다.

 

 

절에 도착해 보니 적어도 이삼백 명은 될 사람들이 모여서 혹은 법당에서 정성을 드리는가 하면, 혹은 공양을 하는 등 온통 잔칫날 같았다. 사람들에게 물어서 나는 이생님이 계신다는 토굴로 갔다. 그런데 거기에도 이삼백 명은 될 사람들이 토굴 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나는 덩달아 그들 뒤를 따라갔다. 그때 누군가가 이생님이 오신다고 말했다. 보니 아주 조그맣게 생긴 분이 토굴 쪽으로 올라오고 계셨다. 사람들은 그분을 뒤쫓아서 모두들 다시 토굴로 올라왔다. 그분은 토굴에 도착하자마자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그 방 앞에 가지고 온 것들을 놓고 기원을 했지만 이생님은 일언반구가 없었다. 나도 간신히 기회를 얻어, 가지고 온 것들을 문 앞에 놓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생님께서 문을 여셨다. 내가 공손하게 절을 드렸더니 이생님이 말씀하셨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한 번 만나겠지요.”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처럼 아무에게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던 그분이 유독 내게만 의미심장한 말씀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

 

 

그런데 그 말씀의 의미는 나중에야 밝혀졌다.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범상치 않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처음 내게 이생님 이야기를 해주셨던 분의 새삼스런 권고도 있고 해서 약 한 달 뒤에 다시 상원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이생님과 단 둘이서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생님의 말씀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조금 있으면 주지 스님이 이리 오실 거요. 주지 스님은 학생보고 이곳 절 일을 도와달라고 그러실 텐데, 두말 말고 그러겠다고 대답하도록 해요.”

 

 

나는 한편 무서운 생각도 들고 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자 내 심중을 아셨던지 이생님이 나를 달랬다.

 

 

“내가 학생을 중 만들려고 그러는 게 아니오. 여기 있으면 여러 가지로 배울 게 많을 것 같아 그러오.”

 

 

나는 얼떨결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해 버렸다. 이생님은 내게 몇 가지를 물으시더니 그러면 언제 다시 오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생각나는 대로 정월 스무 날 다시 오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이 여간 이상하게 된 게 아니었다. 생각지도 않은 절간 생활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약속은 약속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내 주변을 정리하고 정월 스무 날 상원사로 올라갔다.

 

 

 

거기서 내가 맡았던 일은 땔나무 준비, 방에 불을 때고 밥하기, 잔심부름 따위였다. 나는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한 달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이생님을 보려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이 치악산을 올라왔다. 하루면 약 5-6백 명 정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식사를 했고 또 일부는 잠을 잤기 때문에 나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곳에는 나 말고도 행자가 한 사람 더 있었지만 일손은 턱 없이 부족했다. 한 달 동안 나는 한 번도 방안에서 잠을 자보지 못했다. 한 달 쯤 지났을 때 나는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을 게 뻔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하산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생님이었다. 내가 하산을 작정한 걸 어떻게 아셨는지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는 말리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주저앉고 말았는데 얼마 지나자 또 다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생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왜 그런 마음을 먹느냐면서 간곡하게 타이르시는 것이었다.

 

 

두 번이나 마음먹은 것을 들키고 나서야 나는 이분이 보통 어른이 아니구나 싶었고, 그 뒤부터는 내 마음이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이생 전설 3

 

 

매일같이 몰려오는 5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쌀을 두 가마나 삶곤 했다. 그런데 그날 필요한 정도를 이생님께서 귀 뜸해 주시곤 했다. 유난히 사람이 많은 날은 미리 일러 주셨기 때문에 차질 없이 준비할 수 있었다.

 

 

당시 이생님의 외모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온몸이 부르트곤 했었다는 건 얘기로 들었지만 내가 모시고 있을 당시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살결이 곱고 어디 하나 흠이라고는 없는 맑은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토굴에서 혼자 보내셨다. 나는 그분이 뭘 잡수시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중에야 이생님은 화식火食으로 돌리셨는데, 그때에도 아주 극소량을 드실 뿐이었다.

 

 

나는 차츰 이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깨닫게 되었다. 눈이 무릎까지 푹푹 묻히는 한 겨울, 그분은 외딴 토굴에서 혼자 지내시는 데도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몰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이생님에게 소원을 빌면 모든 것이 형통한다는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그 신도들에 의하면 깊은 밤중에는 토굴을 지켜주는 범이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법을 목격한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그 뒤로 나도 범 이야기에 대해서는 여간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끝내 범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 토굴 주변에서 발자국을 볼 수는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토굴에 불을 지피러 갔던 행자가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내가 어슬렁어슬렁 토굴로 내려갔다. 그런데 행자가 부엌에서 까무라쳐 있는 게 아닌가. 그의 말로는 범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토굴 뒤쪽으로부터 나타난 황소만한 범이 토굴 앞에 있는 바위에 쪼그리고 앉는 바람에 오금을 펼 수 없었고 그만 기절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아마도 이생님에 앞서 그 토굴에서 수행을 하시려 했던 스님들은 범을 보고 놀라서 수행을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이생님은 별 말씀이 없이 다만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이생님을 찾아 몰려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한 달 두 달이 아니라 해를 두고 계속되자 마침내 경찰에서 개입하는 정도가 되었다. 치악산으로 오르는 길목마다 마을 청년들이 지켜 서서 산으로 올라가려는 신도들을 제지하자 사람들은 먼 길을 돌아서 이생님을 찾아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원주, 제천 일대의 약국들이 경찰서에 진정서를 냈다고도 한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만 아무튼 그런저런 결과로 신림면 경찰지서의 경관 두 명과 방범대원 이십여 명이 이생님을 연행하려고 상원사로 올라왔다. 그러나 조목조목 법률상식으로 응대하시는 이생님의 침착함 앞에 그들은 혀를 내두르며 속수무책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이생님의 독특한 능력이었다. 신도들에게도 그렇지만 이생님은 언제 그렇게 세상일을 다 배우셨나 싶을 만큼 필요한 사항을 잘 알고 계셨다. 신도들이 법률문제를 말씀드리면 법조문의 해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또 병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병원에서 진단한 것과 같은 진단을 내린다고 한다.

 

 

이생님은 그런 것을 알아내기 위해 별다른 표정이나 제스처 따위를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차차 이거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지극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이생님께 몰려왔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하고 무식했다. 그러나 여간 순박하지가 않았고 이생님은 그런 점을 기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생님께 의지하려는 내용은 질환에 관한 것이었는데, 비록 병원에서 불치병으로 선고된 병일지라도 이생님으로부터 ‘알았으니 가 보세요’라는 나지막한 대답 한 마디만 듣고 나면 그 병은 꼭 낫는다는 것이었다.

 

 

거짓말 같은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병을 낫거나 소원을 이룬 사람들이 인사차 다시 절을 찾아오는 일이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도 모여들게 되어 나의 할 일은 점점 더 많아졌다.

 

 

당시 나로 말하더라도 점점 부처님의 지극하신 가피력을 입게 되었던지 오직 일심 그것뿐이었다. 이생님이 계시는 토굴 앞에 숱한 물건과 돈들이 쌓였지만 나는 물론 누구도 그것을 욕심내는 일이 없었다. 하긴 물건들이라야 크게 값이 나갈 것은 없었고, 돈이라는 것도 동전들뿐이긴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로 나는 일심으로 매일 매일의 그 힘든 일과를 해나갔다.

 

 

밤늦게 주지 스님 심부름을 갔다 오다가 지쳐서 산길에서 쓰러져 잠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주지 스님께서 출타 중일 때 혹시 밤늦게 돌아오시기라도 할라치면 이생님께서 나를 깨우셨다. 지금 주지 스님께서 산 입구에 오고 계시니 어서 마중을 나가 보라고 이르시는 것인데, 틀림없었다. 그런가 하면 밤중에 산길에서 신도들이 길이라도 잃을라치면 이생님께서 내게 그분들을 안내해 오라고 일러 주시곤 했다.

 

 

 

그러다가 점점 신도가 많아지자 주지 스님께서는 마침내 상원사 중창을 생각하시게 되었다. 상원사는 신라 때 무착대사에 의해서 처음 지어진 절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고 보니 이젠 다 쓰러져 가는 폐사에 지나지 않았다.

 

 

중창 사업은 1962년 봄에 시작되어 1963년 8월에 끝났다. 화폐개혁이 되기 전의 구화로 3천3백만 환이 들었다. 그 모든 돈이 신도들의 감사 헌금으로 마련되었다. 신도들 대부분이 아주 가난한 형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생님의 원력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절을 다시 짓는 거지, 1,050 미터나 되는 산꼭대기였다. 인부 한 사람이 산 밑에서 두 번 올라오고 나면 하루해가 저물 만큼 높은 산이었다. 하루에 시멘트 한 포와 모래 한 포를 지고나면 그만이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자재를 다 나르고 나서 대웅전과 부속 건물을 지었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치악산 정상에 지금의 상원사가 세워진 것이다.

 


 

 

상원사 중창사업이 시작되면서 나의 일손은 더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열심이었다. 새벽 3시면 일어나 법당으로 갔다. 새벽 예불을 드렸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늦게 잠이 든 날에도 새벽엔 꼭 그 시간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예불을 드리고 가는 분이 있었다. 그분은 이생님이었다. 눈이 많이 내려 산중의 길이 다 파묻혀 버렸을 때에도 이생님의 새벽 예불은 언제나 나보다 이른 시간에 치러졌다. 토굴에서 주무시는 이생님은 새벽 3시가 되기 전에 꼭 법당으로 올라오시곤 하셨다.

 

 

당시의 일로 잊혀지지 않는 일은 주지 스님의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눈길에서 지쳐 쓰러졌던 일이다. 주지 스님께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신도의 집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고 내게 이미 엄명을 내리신 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시내에서 일을 본 다음에는 시간이 아무리 늦더라도 꼭 절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렇지만 산길을 오르면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다가 힘이 부쳐서 스러져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잠이 깨어 다시 눈을 뜨려니 눈이 얼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동이 터오는 산을 헤매면서 기어 올라갔다. 상원사에 도착해 보니 오전 10시경이었다. 나는 그만 거기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한참 만에 나는 내 손이 얼어서 새까맣게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생님이 내 손을 만지시며 울고 계셨다. 그리고는 찬 물에 손을 담그도록 하셨는데, 마치 손이 조각조각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거기서 또 한 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부처님의 도우심으로 손의 동상은 지금껏 아무 탈이 없을 만큼 완전하게 나았다.

 

 

불가에 전해지는 말로 행자 때 견성하지 못하면 비구 때는 어렵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니까 행자시절 땔나무 하고 신도들과 스님들 뒷바라지 하면서 그 속에 일심이 있으면 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절이 지나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약간 여유가 생기게 되면 오히려 일심을 갖기가 어렵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당시의 나는 아무 다른 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입이 뾰족한 새가 무심코 내민 내 손 위에 앉는 것을 체험한 일이 있었다. 아마도 그 새가 내 손바닥 위에 날아와 앉은 것은 그런 나의 일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의식하자 이제는 새들이 날아오지 않게 되었다.

 


 

 

아무튼 나는 그런저런 인연으로 상원사에서 6년을 보냈다. 그런 다음 군에 입대하게 되었는데, 나보다 앞서서 1967년 이생님은 자신이 증득하신 도의 세계를 세상에 펴시기 위하여 하산하셨다.

 

 

나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치악산의 상원사 주변 풍경이 훤하게 떠오른다. 울창한 잣나무 숲, 계곡에 넘실거리던 희뿌연 새벽안개, 깊은 겨울 밤 혼자서 듣는 설해목雪害木 지는 소리….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 경건한 마음으로 법당에 들어 종송鍾頌을 드리고 부처님께 정례頂禮를 드리던 그때의 심정이 내 가슴에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게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생님, 즉 대행 큰스님의 세계이다. 스님의 심심미묘한 도법과 중생들에 대한 지극한 자비심은 곁에서 6년 가까이 스님을 모시는 동안 아주 절실하게 느껴졌다.

 

큰스님은 내게 있어서 부처님의 지극한 세계를 처음으로 눈뜨게 해주신 스승이면서,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질 수 있는가를 직접 보여주신 참된 법사法師이시다.

 

 


 

이 글은 <도>의 3부에 실린 것이다. 제목이 없기 때문에 편의상 제목을 붙였고, 경어체를 평어체로 바꾸었다. 그리고 글이 너무 길다싶기 때문에 중간에 사적인 내용들은 생략하였다.

 

 

한마음의 힘 1

 


 

글/박재원 (한마음선원 법형제회 고문)

 

 

 

 

 

내가 종교의 힘을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6·25 때였다. 나는 야전병원의 위생병으로 수많은 환자들을 대하면서 죽음 앞에 직면한 사람들이 어떻게 종교의 힘을 통해서 고통과 공포를 이겨나가는 지 보았다.

 

 

당시 내가 근무했던 야전병원에는 수술 후 처치실이라는 곳이 있어서 항상 수백 명의 부상병들이 고통스런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 대부분의 환자들은 거의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이어서 위생병 부르는 소리가 모기 소리처럼 가늘었다. 심지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몸을 까딱도 않고 누워 있는 환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중 누군가가 죽게 되어서 간호장교가 조화를 갖다 꽂고 사병들과 함께 찬송가를 부를라치면 입도 뻥끗하지 못하던 환자들의 대부분이 따라서 함께 찬송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무의식적인 반사작용이라고 하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내게는 아주 충격적인 것이었다. 따라 부르는 노랫소리가 아주 또렷하고 어찌 보면 씩씩하기까지 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환자도 찬송이 끝나면 또 다시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때까지 나는 사실을 말하자면 아주 방종한 생활을 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즐길 수 있는 온갖 쾌락을 실컷 즐기는 것일 뿐, 그밖에 무슨 학구적이고 고답적인 종교의 계율 따위는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종교란 인간의 나약함이 그려낸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6·25의 극한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죽어가면서도 신께 매달리며 기구하는 사람들과, 또 그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마음에 깊은 위안을 얻으며 생을 마친다는 사실 앞에 종교의 의미를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군에서 제대한 뒤 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Y대학에 입학하였다. Y대학에 입학한 나는 기독교 학생회에 가입해서 아주 적극적으로 종교 모임을 이끌었다. 나의 열성은 교목의 추천을 받아 여러 가지 장학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 만큼 높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나는 다시 예전의 불량청년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우선 내가 전쟁터에서 보고 실감했던 종교와 학교에서의 종교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극한 상황에서 부르는 신은 생생한 생명수를 주시는 살아 있는 분이었지만, 이미 격식화되고 의례화돼버린 학교에서의 신은 한갓 관념의 하나님에 불과했다.

 

 

내게 있어서는 이제 신학 공부가 단순히 학점을 따기 위한 공부로밖에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까지 되어갔다. 나는 보다 절실한 의미에서의 종교를 원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실망은 엉뚱하게도 절도 없는 주벽과 외적인 방종으로 거침없이 표출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내 몸은 형편없이 망가지고 말았다. 서른 여섯 살 내가 결혼을 했을 때 이미 나는 한시도 약을 놓아서는 안 되는 고혈압 환자였다. 그리고 가끔씩 혈압 때문에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그런 건강으로도 나는 정부기관에 직장을 두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아 직무를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금 새롭게 종교와 접할 수 있는 계기가 찾아왔다.

 

 

 

 

당시 나를 돕던 분으로 양씨 성을 가진 분이 있었다. 서울시에 근무를 하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우리 부서에 들어와서 서무직을 맡은 분이었다. 나보다 10년 정도 연세가 높았는데, 아주 사리가 바르고 매사에 빈틈이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양선생이 어느 날 내게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권유해 왔다. 양선생으로서는, 나이는 아래지만 어찌됐든 내가 상사이니만치 몇 번을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떼는 것 같았다.

 

 

양 선생은 내가 고혈압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자기가 아주 좋은 곳을 소개해 드릴 테니 한 번 가보자는 것이었다. 내가 그곳이 어디냐고 묻자 양선생은 용기를 내어 안양에 계신다는 모 스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자기도 아직은 한 번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아내가 몇 년 째 그곳에 다닌다고 했다. 오랫동안 산중에서 도를 닦으신 분인데, 그 분께서 한 번만 응하신다면 내 병은 틀림없이 나을 거라면서 꼭 한 번 같이 가주기를 권했다.

 

 

나는 웃었다. 아직도 그런 미신 따위를 아주 꿀떡 같이 믿는 사람이 있다니 싶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나는 내 주먹밖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도대체 내가 못 고치는 병을 알지도 못하는 여승이 무슨 수로 고친단 말이요, 하고 거절을 하자 양선생은 아주 섭섭한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얼마가 지났을 때 양선생이 또 한 번 내게 ‘안양의 스님’을 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 무렵에 양선생의 허리춤에 혹이 생겨 석 달 만에 달걀정도로 커졌던 것이다. 그럼 병원에 가보시오, 하고 내가 말했다. 그랬더니 양선생 말은, 이 병은 안양의 이생님께 가면 틀림없이 낫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병은 거기에 가기만 하면 틀림없이 낫는 것이지만, 이 기회에 나도 같이 가서 치료를 받자는 것이었다.

 

 

양선생은 집안 형편이 대단히 어려웠다. 아마도 경제사정 때문에 병원을 찾아가기가 어려운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양선생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그의 청해 응했다.

 

 

토요일 오후, 나는 양선생과 함께 안양으로 가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6년 전에 장출혈로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개인병원에 갔지만 웬일인지 지혈이 되지 않아서 종합병원으로 옮겨야 될 형편이 되었는데, 입원비가 전혀 마련되지 않아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던 상황에서 양선생의 부인은 이생님을 찾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양선생의 부인은 이생님에게 다니면서 여러 가지 좋은 법담을 듣고 마음의 위안을 받았을 뿐 어떤 일로 구원을 요청해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으로 부인은 이생님께 다급한 사정을 말씀드렸고, 이생님은 알았으니 어서 퇴원이나 시키라고 대답하시고 퇴원수속을 하라시면서 돈까지 주시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인이 고마운 마음으로 병원으로 되돌아 왔을 때 믿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그렇게도 멎지 않던 출혈이 멎었던 것이다. 부인은 이생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했다. “이번에 나으시거든 뒷조리를 잘하시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6년 후에 재발하게 됩니다.” 이생님은 그렇게 경고했던 것이다.

 

 

부인은 그 말을 잊지 않고 갖가지 보약을 지어 남편의 병 뒷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생님이 말씀하신 그 뒷조리란 육신의 뒷조리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피력에 대해 감사하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6년이 지나서 옆구리에 혹이 생긴 것이다. 양선생은 이생님께서 이미 하신 말씀도 있고 하니 이 병은 이생님의 힘으로 얼마든지 나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 비슷한 것을 나도 이미 수없이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게는 그런 신비스런 우연이 한 번도 은혜를 베풀어 준 일이 없었다.

 

 

한마음의 힘 2

 


 

안양에 도착해서 양선생과 나는 대한불교회관(한마음선원의 옛이름)으로 갔다. 보니 아주 체격이 작은 여승이 앉아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이생님인 듯했다. 양선생은 그분께 절을 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공손하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별로 신통한 생각이라곤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고등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직장의 성격상 학계의 석학들과 불교계의 대덕 스님들과도 교유가 있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종교라는 것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생님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별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까지 역사상 여승으로서 대도를 성취했다는 예를 거의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성한 종교를 내세워 병을 고친다, 소원을 이룬다 하며 기복신앙적으로 사람들을 이끈다는 것은 정법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정법이란 오직 자기 구원에 있는 것일 텐데, 이는 틀림없이 신들린 어떤 여자가 교묘하게 사술을 부리는 것이려니 싶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 같은 배례도 드리지 않았다. 양선생이 나를 자기의 상사인데 이러이러한 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자기에게도 이런 병이 생겼노라고 말씀드리는 것을 나는 시큰둥하게 듣고만 있었다.

 

 

그러자 이생님은 말씀하기를, 설사 고친다 해도 자기 힘으로 자기가 고치는 것이지 내가 고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무당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자리였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고 가볍게 응대를 하고 그 자리를 물러나오고 말았다.

 

 

양선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옆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이생님이 혼자서 내 방으로 오셨다.

 

 

“선생님이 저 분의 상관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저 분이 암에 걸리셨습니다.”

 

“예?”

 

 

나는 깜짝 놀라서 이 작은 체구의 여스님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스님은 그저 담담해 보였다.

 

 

“내가 저 분을 6년 전에 고쳐 드린 일이 있었는데, 그때 뒷조리를 잘못하셔서 재발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치료할 방법이 없고, 다만 내가 수술을 하면 6개월 정도는 더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참 안됐군요. 그러나 정말 양선생이 암에 걸렸고, 곧 돌아가실 분이라면, 6개월이나마 더 사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병원에 가지 않고도 어떻게 수술이 되겠습니까?”

 

 

“예, 부처님의 힘을 제가 조금 빌리는 거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저 양선생이 너무 가난한 분이니 선생님께서 음덕을 조금 베푸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이제야 돈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워낙 진지하게 말씀을 하실 뿐 아니라 또 양선생에게 도움이 된다면, 하는 마음으로 수술비용을 내가 대겠노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수술비용을 대지요.”

 

 

“참 고마우신 일입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까지 10만원을 가지고 오도록 하십시오.”

 

 

당시 사무관이던 내 월급이 약 7만원 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니까 10만원이라면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집에 도착하는 즉시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서 그 돈을 마련한 다음 어김없이 이튿날 다시 이생님을 찾아갔다. 물론 양선생게게는 전혀 귀뜸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돈을 드리자 이생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은 틀림없이 그분께서 나를 시험하신 것이 분명하다. 이생님은 인간에게 있어서 물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뼈아픈 것인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이었다. 그랬으므로 결코 헛되이 쌀 한 톨 허술히 하시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인간에게는 그것보다 본질적이며 영원한 무엇이 있다는 점을 결코 잊지 않는다. 인간에게 병고가 닥칠 때, 물질적 궁핍에 시달릴 때야말로 저 위대한 보리심에 눈 뜰 기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것을 향한 첫걸음을 스스로 떼어놓게 하기 위해서, 이생님은 때때로 돈이나 육체적 고통 따위를 디딤돌로 사용하시는 일이 많았다.

 

 

“오늘 저녁에 수술을 할 겁니다.”

 

 

이생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이야기하셨다. 그리고는 덧붙이셨다.

 

 

“수술이 끝나면 내일부터는 지방이 낀 뿌연 섬유질이 용변 속에 섞여 나올 겁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시고 절대로 병원에는 가시지 말라고 양선생께 얘기해 주세요.”

 

 

나는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무엇에 씌인 사람처럼 야릇한 기분을 느꼈다. 도대체 그 수술이란 것이 어떤 것이기에 환자는 전혀 모르는 사이에 진행될 수 있으며, 저분은 무엇을 믿길래 저토록 단정적인(임상의사보다도 더 확정적으로) 말을 하시는 것일까.

 

 

아무튼 나는 이생님의 말씀을 양선생 부부에게 전했다. 그리고는 이제 하루만 지나면 모든 것이 명백해질 거라는 생각에 부쩍 양선생의 병리상태에 대해 호기심의 충동이 일었다.

 

 

그런데 설마하던 내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이튿날부터 아니나 다를까 양선생은 뿌연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이 지나면서 옆구리의 혹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아하,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초상超常현상이라는 것이 있긴 있나보다, 하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한마음의 힘 3

 

 

사실 세상에는 이상스런 능력을 가진 이들도 많아서 필리핀의 어떤 심령 치료사는 맨손으로 외과 및 내과 수술까지 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그 수술이 끝나고 나면 수술한 자리는 흔적도 하나 남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에 비해서 이생님의 경우는 아주 특이한 것으로 내게도 생각되었다.

 

 

이생님은 그런 분이었다. 보통 조금쯤 이적 능력이 있는 이들은 세상에 많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 능력을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로 과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은 맨손으로 피부를 절개하기도 하고 요란하게 기도를 드리기도 하며 상대방의 아픈 마음을 정통으로 찌름으로써 사람을 굴복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뒤로 무려 십 년이 넘도록 내가 주의해 가면서 보아 온 이생님에게는 자신의 은밀한 힘을 자기 과시용으로 쓰시는 일을 보지 못했다. 이생님에게 있어서의 그 범상치 않은 능력은 언제나 단 하나의 척도를 기준으로 쓰이는 것이다. 그 척도란 일컬어 도道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분의 능력 사용은 언제나 자리自利이면서 이타利他일 경우에만 동원되었다.

 

 

이생님의 태도는 중도적이었다. 이생님은 내게 돈을 요구함으로써 내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눈 뜨게 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돈은 나보다 더 긴박하게 돈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어느 신도에게 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양선생의 병은 낫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의미의 손실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진 것이다.

 

 

참으로 깊은 뜻이 이생님의 행동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나는 오래 지나서야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이 나중에 묵중한 의미를 지닌 화두가 되어 나를 이끌어 주었다. 이생님의 교화 방법은 언제나 그랬다. 그분은 교화 중에 교화하는 자(즉 자신)는 쑥 빼버렸다. 그러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이생님은 가끔씩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엄청난 시주를 요구하시는 일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신도의 자녀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자. 그동안 그 신도는 몇 차례의 경험을 통해 이분의 도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분이 응낙만 하신다면 불치병도 씻은 듯이 나으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그래서 결국 이생님께 기대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 이생님은 거기에 응하시는 것이지만 어떤 때는 엄청난 치료비를 요구하실 때도 있다. 그러면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좌중의 신도들도 찔끔하고 놀라게 마련이다.

 

 

평소에는 그토록 인자하고 또 남의 슬픔과 고통을 잘 이해하시는 그분이 거의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치료비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생님은 평상시 신도들에게 늘, 덧없는 재화 따위에 기대어 왜 울고 슬퍼하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막상 자신은 놀랍게도 그 덧없다는 재화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어날 법한 의문을 이생님도 짐작 못하시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결코 변명을 않으신다. 누가 돈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해도 웃을 뿐이다. 나는 이생님이 돈을 가지고 헛된 곳에 쓰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남몰래 신도들에게 자선을 베풀거나 꼭 긴요한 곳에만 돈을 쓰시는데, 여간해서는 그것을 공개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생님 당신 스스로는 그곳에 없는 셈이다.

 

 

이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쑥 밀어 놓아 버린다’는 것이다. 이 세계는 공한 것이다. 그 공한 세계에서 물질이 오고 물질이 가는 것 또한 공할 뿐이다. 다만 그 물질에 실려서 가고 오는 마음만이 값진 것일 것이다.

 

 

이생님의 능소능대한 능력은 불교에서 말하는 육신통六神通에서 나오는 것이다. 먼 뎃 것을 보고 듣는 능력, 사람의 과거 인과를 꿰뚫어 보거나 마음을 아는 신통력으로 자연스럽게 정황 판단과 그 처방이 내려지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범상치 않은 일이지만 지금 대행 스님을 따르고 있는 수많은 신도들은 그런 능력에 대해 대부분 실제로 경함한 이들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양선생의 병은 점점 좋아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일은 이상한 쪽으로 빗나가 버렸다. 당시 나는 이생님의 신비한 능력에 흥미를 느끼고 불교와 초심리학 서적 따위를 사다 놓고 읽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양선생의 친척 한 분이 양선생을 보러 왔다가 이건 심상치 않다며 입원을 시켜버린 것이다.

 

 

당시 옆구리의 혹은 거의 다 나아서 이제 작은 호두알 크기 정도였다. 그런데 그 친척이 마침 인천 도립병원의 X선과에 근무하던 분이어서 서둘러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진찰을 했다.

 

 

사진을 찍어보니 역시 암이었다. 수술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절개를 해보고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선언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양선생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그 뒤에 시간이 나는 대로 양선생의 집을 방문했다. 양선생은 절대 병원에 가지 말라는 이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그러면서 진심을 다해서 이생님을 부르고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나는 점점 이생님에 대한 의문이 커져갔다. 정말이지 불가사의한 분이 분명했다. 나는 기회가 닿는 대로 이생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뒷자리에 앉아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했다. 아무리 보아도 특별한 데라고는 없었다.

 

 

다만 어느 날 어느 때도 여전히 변함없는 자세로 변함없는 표정을 지으며 변함없는 목소리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 특별하다면 특별한 점이었다.

 

 

아침부터 거의 저녁 무렵이 될 때까지 모여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세계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러다가 특별한 환자가 온다든지 하면 이야기를 듣고 간단하게 ‘알았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그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생님의 도움으로 병이 나은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이 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면 이생님은 웃으면서 그건 당신이 한 일이라고 밀치며 감사를 받으려 하질 않았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이제부터는 당신이 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처럼 당신도 할 수 있어요. 언제까지나 빌려서 쓰겠소? 자력으로 할 수 있어야 필요할 때 꺼내서 쓰는 거지.’하며 조금 엄하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면서 이생님은 자신이 수행 중에 겪었던 경험이나 견해를 쉬운 말로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역시 언제나 같은 자세로 저렇게 앉아서 사람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무려 십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스님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십 년을 한결같이 그분은 그분의 길을 묵묵히 걸어오신 것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끔씩 이생님은 자나가는 말처럼 우리 양선생님을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하곤 할 뿐, 내게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이생님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내게 말을 걸어 오셨다.

 

 

“박선생님은 아만을 좀 없애세요.”

 

 

이생님이 웃으시면서 내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아마도 내가 내심 잔뜩 벼르면서 이생님을 살피고 있었던 것을 아셨던 모양이다.

 

 

“제게 무슨 아만이 있습니까?”

 

 

나는 그 정도로 대답해 두었는데, 이생님은 뒤에 앉아 있는 나에게 좀 가까이 오라고 청했다. 나는 늘어앉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가서 앉았다. 그런데 이생님은 뜻밖에도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새벽에 양선생님이 여길 다녀가셨습니다.”

 

“예?”

 

“오늘 아침 양선생님께서 제게 작별 인사를 하러 오셨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마 내일 아침에는 장례 준비를 해야 할 텐데 아시다시피 양선생 집 경제형편이 어려우니 우리 박선생님께서 끝까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아, 네…”

 

“병원엘 가지 않았어도 6개월 정도밖에는 더 사실 수 없었겠지만 두 달도 못 되어 돌아가시게 되다니…. 성실한 분이었는데 참 안됐습니다.”

 

 

 

나는 내일 일에 대해서 이렇게 단정적으로 얘기하시는 이생님의 말씀에 대해 참으로 야릇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당장 양선생의 집으로 가 보았다. 그런데 웬걸, 양선생의 건강상태는 금방 돌아가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었다.

 

 

‘바로 이거로구나.’

 

 

나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사실 내심 이생님의 예지력이나 신비한 능력에 대해 경탄을 하면서도, 이생님이 지적했듯이 아직도 내게는 아만심이 있었던 것이다. 저 왜소한 여자에게 내가 굴복할 수는 없다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 마음이 이제야말로 이생님의 단언을 마음껏 비웃을 기회를 잡게 된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 출근을 했을 때 양선생의 부음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나는 마지막까지 버텨 보려던 어떤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한마음의 힘 4

 

그렇게 해서 나는 본격적으로 이생님이란 분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김차리’라는 분에 의해서 이생님의 전기 <씨앗을 뿌리며>가 이미 출간돼 있었다. 나는 그 책을 구해다가 정독했다.

 

 

그 책에는 이생님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도력의 소유자이며, 얼마나 어려운 역경 속에서 가시밭길 같은 구도의 길을 묵묵히 걸어 왔는지 상세하게 씌어 있었다. 특히 치악산에서 상원사를 중창하기 전후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도력을 행사하셨다는 것이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으로 실성했던 사람이 정신을 찾았다든가, 아무 풀을 으깨어서 쓱 바르는 것만으로 상처가 아문다든가 하는 등의 이야기가 수백 건도 아니고 수천 건 이상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씨앗을 뿌리며>를 쓰신 김차리 선생은 미국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하신 분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이생님을 뵙고 나서 불교의 무한한 세계에 접하고 심취했다고 한다. 그리고 근 1년여에 걸쳐서 갖가지 자료를 섭렵하여 마침내 전기를 간행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나서 생각했다. 아마 여기에 거짓이 얼마쯤은 섞였을 것이다. 치악산 정상까지 매일같이 5-6백 명의 신도들이 찾아와 들끓었다면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 게다가 현대의학으로 손도 쓰지 못하는 병을 이분은 다만 마음의 힘만으로 고치셨다는 것인데, 어딘지 미심쩍은 데가 많았다.

 

 

사실 내 마음 한 켠에서는 이생님의 도력이 글자 그대로의 진실이어서, 이제 나를 괴롭히는 병도 나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이 비합리적인 세계를 나는 질서정연한 설명 없이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뒤부터 약 6개월간에 걸쳐서 <씨앗을 뿌리며>가 기록하고 있는 치악산 인근 마을들을 찾아서 이생님의 행적을 조사해 보았다.

 

 

그런데 틀림 없었다.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편인가 하면, 내가 조사해 본 사실에 비해서 책에 기록된 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이는 곳에서 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분의 힘을 입은 사람들 모두를 추적한다는 것은 아무리 전기 작가라 해도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대부분은 이생님이 단순하게 능력을 쓰시는 분이 아니라 더 깊게 사물의 실상을 투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생님은 가끔 오신통도 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 말은 도란 능력적인 공리성을 궁극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 신비한 천안통, 천이통, 숙명통, 타심통, 신족통은 마지막 신통인 누진통에 이르러 비로소 도라 불리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능력의 쓰일 곳과 때를 알고 오직 유일하고 참된 방향으로 능력을 투사하게 하는 힘이 바로 누진통일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무아無我에서 성취된다고 본다면 누진통이야말로 그런 무아를 가리키는, 존재의 마지막 귀의처일 것이다. 오직 무아를 성취한 사람, 오직 공空을 체현한 사람만이 자신의 도력을 개인적인 이기심의 수단으로 쓰지 않고 오로지 참된 방향으로 선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참된 무아, 참된 이타정신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나는 차츰 이생님의 그 드넓은 능력과 걸림 없고 치우침 없는 세계에 점차 경도돼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나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어느 날 이생님을 찾아갔다.

 

 

“오늘은 제가 이생님께 삼배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한 번도 절을 하지 않던 내가 97 킬로그램이나 되는 거구로 깍은 듯이 삼배를 드리자 이생님은 웃으셨다. 나는 불문곡직하고 내 병을 좀 고쳐주십사고 청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세상에 거저가 어디 있습니까?”

 

“예?”

 

“사흘 뒤에 법회가 있는데 45만원만 부처님 앞에 시주하세요.”

 

 

아마도 비록 삼배를 하긴 했어도 마음속으로 여전히 완전하게 승복하지 않는 내 의중을 이생님은 아셨을 것이다. 당시 45만원이라며 거금이라고 할만 했다. 나는 고민했다. 그러나 역시 목전의 병이 급했다. 이 지독한 고혈압만 아니라면 세상에 부러울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약속된 날 돈을 준비해 가지고 가서 이생님 앞에 드렸다.

 

 

이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더니 사람을 시켜서 아무개 보살을 좀 모시고 오라고 일렀다. 지금도 나는 그때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남색 치마저고리를 허름하게 입은 50이 훨씬 지났음직한 아주머니(또는 할머니라고 해야 할지) 한 분이 방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손이 마치 갈쿠리처럼 보였고, 얼굴에는 무수한 잔주름이 덮여 있었다.

 

 

이생님은 당신 앞에 놓인 돈을 쓱 밀어서 그 아주머니께 드렸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생님이 말씀하셨다.

 

 

“45만원이에요. 그러고 계시지 말고 방이라도 한 칸 얻어서 우선 짐이라도 넣어 두도록 하세요.”

 

 

아주머니는 이게 무슨 뜻일까 생각하는 듯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생님이 하신 말뜻을 이해하고는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흐느꼈다. 연방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주머니 앞에서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주머니는 당시 안양의 무허가 건물에서 살다가 대책 없이 철거민이 돼 이생님께 하소연을 했던 모양이었다. 이생님은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아주머니에게 이 돈은 저기 저 선생님이 주시는 것이니 나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저분께 감사드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아주머니가 내게 와서 두 손을 잡으며 수없이 되풀이 말했다.

 

“선생님,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도 그 감사를 받을 수는 없었다. 나로서는 내 병 때문에 부처님께 그 돈을 바친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했다. “이 돈은 이미 부처님께 바친 것이니 그 뒷일은 저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주머니가 물러가고 나서 이생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전생에 선생님이 지으신 업보를 갚았다 생각하시고 너무 고깝게 생각지 마십시오. 나중에 돈이 되돌아오면 돌려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박선생님 병은 박선생님 스스로 만드신 겁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스스로 고치셔야지 누가 고쳐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열심히 기도하시고 마음에 나쁜 것은 다 비우도록 하세요. 깨끗한 마음으로 사시노라면 저절로 병이 다 나을 테니까요.”

 

 

말하자면 이 말씀이 45만원을 드리고 얻은 약방문인 셈이었다. 나는 아차, 이제 45만은 고스란히 날렸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생님의 모습이 우뚝하게 커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뒤로 토요일 오후가 되면 꼭 안양으로 가서 이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생님은 여전히 예전과 같이 고요하게 앉아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다. 나는 이생님과 함께 또 여러 신도들과 함께 방 안에 앉아 있노라면 마음이 지극히 평온해졌다.

 

그리고 점차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이로제나 신경증세 따위를 잊게 되었다. 물론 지병이었던 고혈압은 씻은 듯이 사라져서 지금은 건강하게 지내게 되었다.

 

 

아마도 이생님께서는 겉으로는 나를 내치시면서도 나 모르게 병을 돌보아 주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육신의 병과 함께 정신적인 독소들도 차츰 씻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는 많은 스승들이 있다. 나는 그 뒤에 점차 불교에 심취하게 되어 명산대찰의 여러 선지식들을 찾아 높은 법문을 듣곤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바다처럼 넓던 여느 스승들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좁아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주 왜소하게 비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생님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처음엔 산골에 흘러가는 개울물처럼 평범하고 작게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넓어져가는 이생님의 내면세계를 발견하고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오래된 신도일수록 스님을 더 존경한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생님을 만남으로 해서 내 인생은 여러 가지 면에서 변모하게 되었다. 그 뒤 이생님은 45만원이라는 돈도 돌려주셨지만 나는 다시 그것을 부처님께 바쳤다. 또 내가 18년간 봉직한 뒤 퇴직금으로 받은 돈도 전액 이생님의 지혜로운 선용에 일임했다.

 

 

그리고 나는 이생님을 통해서 탄허 스님이라는 또 한 분의 스승을 알게 되었다. 탄허 스님은 방한암 스님의 상좌 시절 이생님과 서로 알게 되셨다고 한다. 두 분은 서로 격의 없이 같은 길을 걷는 입장에서 모든 일을 돕곤 했다.

 

 

특히 탄허 스님은 교학적인 테두리를 떠나 문제가 영적인 무위의 세계에 언급될 때에는 이생님의 견해를 경청하시곤 했다. 이생님에게 있어서 그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처럼 분명한 것이었으므로, 아무리 동양의 석학이라는 탄허 스님이라 하더라도 그 분의 견해를 경청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하는 사람, 남도 위하고 나도 위하는 사람, 남을 죽이고 나를 위하는 사람, 남과 나를 모두 죽이는 사람. 이 중에서 이생님은 분명 나를 버리고 남만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다.

 

나는 70년 가까이 세상을 살아 오면서 이처럼 치우침 없이 세상을 사는 분, 그리고 무한한 도의 세계로부터 자유자재로 세상의 필요에 응하는 분을 본 일이 없다.

 

대행 큰스님은 분명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전모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드높은 마음을 지닌 선지식임이 분명하다.

 

 


 

 

이 글은 한마음 선원 신행담 모음집 <영원한 길의 시작(1990)>에 나오는 것이다. 글 중간에 포함된 다른 사람들의 체험담은 생략했다. 

 

 

큰스님 모시고 살아온 세월 속에 1

 

 

글/노영조 (큰스님 동생)

 

 

 

 

 

어느 날 친정에 와 보니 어머니께서 인적 조회 문제로 헌인능 관할 경찰서에 가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를 모시러 그곳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내게 이렇게 대단하신 스님 형제가 있는 사실을 몰랐었다. 스님은 어머니의 큰 딸이셨고 내게는 언니였다. 스님이 부모에게 너무 큰 상심과 고통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도 났고 원망도 많이 했다.

 

 

그 무렵 스님께서는 공부를 하시느라 산으로 다니실 때였나 보다. 이 산 저 산, 산으로 산으로만 다니시다가 헌인능 근처에 이르르셨는데 빨치산 공비인 줄 알고 경찰서에 연행되었던 것이다.

 

 

그때 처음 본 스님의 모습은 갈기갈기 찢어진 옷의 남루한 차림이었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똑바로 보기가 무서우리만치 형형했고 당당했으며 빛이 났다.

 

 

스님께서는 내가 집을 나서면서 경찰서에 도착할 때까지 쏟아놓았던 갖은 원망의 말들을 그대로 반복하여 말씀해주시면서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타일러 주셨다. 그리고 부처님의 진리를 잘 배우라고 하시면서 스님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쓰러지신 어머니를 모시고 가라고 하셨다.

 

 

스님께서는 어머니가 가져가신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으신 채 ‘부처님 도리를 알게 되면 어머니 앞에 다시 올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못 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곤 어디론가 떠나가셨다. 헌인능에서 그렇게 헤어진 후 너무도 초라하고 불쌍해 보이던 스님의 모습이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치악산 상원사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남편과 같이 상원사로 향했다. 인적도 없는 골짜기 초행의 수십 리 산길을 오르며 미끄러지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산골짜기까지 와서 자기도 고생하고 다른 사람까지 고생을 시키지?’

 

 

푸념과 눈물을 흘리며 엉금엉금 기어 산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골짜기에 왠 노인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스님의 인상착의를 대강 말하고 난 뒤 그런 사람을 찾는데 어느 길로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노인이 ‘그 분이 어떤 분인데 말을 함부로 하느냐.’고 나를 나무라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렇지 않아도 내려가면서 올라오고 있는 부부를 만나거든 길을 가르쳐 주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노인이 알려준 대로 험준한 산허리를 올라왔을 때,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토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감자 세 개를 구워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기진맥진하여 도착한 우리 부부에게 구운 감자 두 개를 주시고 스님께서도 한 개를 드셨다. 우리는 저녁이 나오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감자 한 개가 저녁이었던가 보다.

 

 

배가 고프냐고 물어보시더니 버섯을 따다 놓은 것에 소금을 약간 뿌리고는 꼬챙이에 끼워서 구워주셨다. 먼 길을, 그것도 초행인 산길을 오르느라 배도 고프고 허기진 상태였는데 버섯 에 물 한 그릇을 먹고 나니 겨우 살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나는 스님께 말씀드렸다. “스님 왜 이 고생을 하십니까? 저희와 같이 가시죠.” 그러자 스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한 어머니 배를 빌어 형제로 태어났지만 이제 나는 네 언니가 아니다.”

 

그리고는 한참을 설법을 하시는 거였다. 하지만 당시 내 귀에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들어오지 않았다. 죽도록 부모님 마음 고생시키고, 또 부모님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사람으로 이렇게 냉혹할 수가 있느냐고 원망을 하면서 울며울며 상원사를 내려왔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어렴풋하게 잠이 들었는데 스님께서 상원사에서 내려오시는 꿈을 꾸었다. 스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데 백발에 양쪽으로 부축을 받으시는 걸 보고 꿈에서도 내가 뵙고 온지 얼마 안 되는데 벌써 백발이 다 되셨구나 생각하며 너무도 허무하여 탄식하며 울다가 눈물을 닦고 보니 산골짜기마다 수천수만의 스님들이 서서 통곡을 하는 것이다.

 

‘우리 중생들이 불쌍해서 어찌합니까.’하면서 우시는 스님들의 울음소리가 온 산을 진동했다.

 

 

절은 작은데 스님들은 산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숫자였다. 새빨간 큰 바닷물 위에 붉은 배가 떠 있고 그 많은 스님들이 다 그 배 위에 타고 끝으로 빨간 동자 두 명이 큰스님을 태우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꿈에 본 스님이 너무 늙어보여 불쌍한 마음에 울다가 깨었다.

 

 

이상한 꿈도 다 있구나 생각했다. 스님께서 이소조 신도님 댁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늘 반신반의하고 스님에 대해 신뢰보다는 원망이 많은 나를 가르치신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스님을 모시게 되면서부터 어렴풋이 불법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발심하는 마음이 생겼을 무렵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아프고 통증이 왔다. 나는 데굴데굴 구르며 일어나지도 못한 채 혀가 굳어 들어가면서 의식을 잃었다. 남편은 다급하게 병원에 연락을 하여 의사의 왕진을 청했다.

 

 

진찰 결과 장이 꼬인 것 같으니 종합병원에 가서 대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남편이 스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당신들 알아서 하지 뭘 그러냐고 태연히 말씀하시면서 ‘뜨거운 물에 소금을 타서 찜질이나 해 주세요.’하시더라는 것이었다.

 

 

남편의 상식으로는 장이 꼬였는데 뜨거운 물로 찜질을 하면 오히려 살이 썩어 들어 갈 텐데, 하는 생각에 스님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남편이 큰 병원으로 가자고 말했다. 나는 몸도 못 쓰고 의식이 혼미해 있었다. 그 와중에 내가 한쪽 팔을 겨우 움직여 배를 가리켰다고 한다.

 

그러자 남편은 내가 찜질을 해달라는 시늉을 하나보다 생각했다. 이윽고 시어머님께서 뜨거운 물을 준비해서 배 위에 찜질을 하고 내 발을 담궈 주셨다고 한다.

 

 

그러자 내 의식이 차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죽는구나. 어린 자식들이 불쌍해서 어떡하나?’

 

잠시 후 차츰 몸이 풀리고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뒤에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나는 완전히 나아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문득 내가 너무 불법을 모르니까 주인공이 이런 병고를 통해 공부를 시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진 다녀간 의사에게 왕진비를 주려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놀라면서 어떻게 해서 나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뜨거운 물에 소금을 넣어서 찜질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의사가 화를 벌컥 내면서 대장이 꼬였는데 뜨거운 물에 찜질을 하면 썩을 텐테 그런 무식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의사가 내게 종교가 뭐냐고 물었다. 불교라고 하니까 아까 전화한 곳이 절이냐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톨릭교인이지만 아무튼 천만다행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겁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기적이 아니고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진 무한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으로 나는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지혜는 현대 의학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까지 능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지혜로 이끌어주시는 큰스님에 대한 감사와 불법에 점점 매료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스님을 모시면서 그밖에도 수없이 많은 것들을 경험하였고 참으로 큰 은혜를 입었다.

 

 

설법으로 깨우쳐 주셨고 행으로 보여주셨고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일러주셨다. 평소 한 말씀 한 말씀이 그저 흘려버릴 수만은 없는 무궁무진한 법문이셨음을 알았을 때 그 감사함이란 머리를 잘라 신발이라도 삼아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큰스님 모시고 살아온 세월 속에 2

 

어느 날이었다. 그 전 날 밤까지도 여일하시던 스님께서 아침에 입원을 하시겠다며 병원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스님께서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으셨는데 내가 모르고 있었나 하는 마음에 놀랍고 죄송스러웠다.

 

 

내가 여쭈었다. “스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병원에는 왜 가시는지요?” 그러자 스님께서 영문 모를 말씀을 하셨다. “나를 달라는 사람이 있으니 가져가 보라고 하지.” 그리고는 가까운 곳에 있는 성혜 병원으로 가자고 하셨다.

 

 

내가 큰 병원으로 모시려고 하니까 굳이 작은 병원으로 가시겠다는 것이었다. 그 병원에서는 수술을 할 수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수술을 하는 게 아니고 내 몸을 실험해 보는 거야.”

 

 

병원에 간 스님께서 의사에게 자궁을 들어내 보라고 지시했다. 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수술 중에 잘못되어도 괜찮다는 각서를 쓰고 도장을 찍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스님께서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하시고 난 이틀 밤이었다. 스님께서 부르시길래 자다 깨어 가 보았다. 그런데 수술한 자리에서 시퍼런 창자가 꾸역꾸역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도 놀라 의사를 찾았지만 이미 퇴근한 뒤였다. 간호사는 자기 혼자 손을 댈 수가 없으니 내일 아침 의사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고 했다. 지금 그때 그 모습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다시 스님께 와보니 손으로 창자를 집어넣고 반창고를 붙이고 계셨다. 그리고는 태연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집어넣고 붙였어.”

 

 

다음 날 의사들이 그 사실을 알고 놀란 나머지 서둘러 다시 수술을 하였다. 창자를 씻어내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수술을 끝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수술한 그 자리가 또 터지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다시 수술을 해보려고 해도 살이 썩어 들어가서 도저히 꿰맬 수가 없고 설령 꿰매었다 해도 여기저기 살이 터졌기 때문에 다시 새살이 나와야 수술이 가능하고 하는 것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새 살은 나오지 않고 살이 자꾸만 썩어들어갔다. 나는 도저히 안타까워 볼 수가 없었다. 내가 스님께 수술 부위를 보시라고 거울로 비춰드리며 말씀드렸다.

 

“스님, 스님을 살리시려면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자 스님께 태연히 말씀하셨다.

 

“살이 썩어 들어가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그러자 내가 막 울면서 어느 정도인지 잘 보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여전히 태연하신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다.

 

“어휴, 이렇게 깊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구나. 이젠 이대로 두면 안되겠군.”

 

 

나는 엎드려 통곡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하늘에서 연꽃이 내려와 수술한 부위에 한 잎씩 꽂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울지만 말고 빨리 일어나라는 소리에 그만 놀라 눈을 뜨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의사가 소독을 하려고 반창고를 떼어보니 썩었던 살들이 반창고에 붙어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의사가 이젠 반창고조차 붙일 자리가 없다고 하면서 서울에서 급히 박사님들을 모셔왔다.

 

 

다섯 명의 박사들이 들어와서 수술한 부위의 썩은 살을 보더니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는 나가벼렸다. 가망이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지난 밤 연꽃이 내려와 앉는 꿈을 생각해 내고는 한편으로는 안심도 되었다.

 

 

병원 측에서는 가망이 없다며 소독을 하고 가제로 그냥 매어놓기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부터 새 살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썩은 살들을 잘라내고 수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새 살이 많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정작 의사들이 겁을 내어 마취를 할 수 없다고 하며 스님의 팔과 다리를 묶어 놓고 수술을 시작했다. 스님께서는 ‘윽’하는 소리를 한 번 내시더니 이를 꽉 물고 아무 소리도 없으셨다. 옆에서 보고 있던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참혹하여 그 자리에서 똥을 싸고 말았다.

 

 

꿰매는 걸 보니 썩었던 자리가 우묵하게 패여 있고 열십자로 얼기설기 묶어놓은 정도였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자 그 뚫어졌던 자리가 메꾸어지고 그냥 아물었다. 그리고는 일주일 뒤에 퇴원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몸을 그냥 던져보니 그대로 아무 탈 없이 나가게 되는구나.”

 

스님의 그 말씀을 듣고 그제서야 비몽사몽간에 연꽃이 내려오는 장면을 본 얘기를 드렸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한마음 도리가 그렇게 광대하고 묘한 거란다.’라고 하셨다.

 

 

의사들은 그동안 수술을 하면서 주사 한 대 안 맞고 살 가망이 없다고 포기했던 분이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하게 되니까 너무도 놀라워하며 자기들도 계룡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야겠다고 농담을 건넸다.

 

 

의사들은 스님께 사진이라도 같이 찍고 가시라고 붙들었다. 하지만 스님께서는 찍을 게 없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해라. 그간 수고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병원 뜰을 나서셨다.

 

 

나는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부재不在한 상태의 몸은 송장이나 다름없고, 구름덩이 하나 떠다니다 없어지는 것 이상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몸의 아픔이나 고통은 마음이 함께 할 때만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당신 몸을 던지시면서까지 실험을 하시고 뭇 중생들의 아픔을 함께 하시고 건지시기 위해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견디어 내시며 이 길을 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땅을 치고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으리만큼 가슴이 아팠다.

 

 

지금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며 스님께나 신도님들에게 지난 일처럼 얘기를 하지만 여전히 마음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그 당시의 저리고 아팠던 기억이 되살아나 눈물이 나고는 한다.

 

 

내 몸이 가루가 된다 해도 기필코 이 도리를 공부하리라 원을 세우며 마음으로 삼배를 올립니다.

 

 



 

작가 김정빈 님은 몇 권의 책을 통해 대행 스님의 존재를 세상에 널리 알린 분으로, 한 때 한마음 선원에 적을 두고 활동하기도 했었다. 비록 지금은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지만 대행 스님에 대한 그의 시각과 해석은 오늘날 일반인들이 대행 스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깊이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이 글은 법어집 <무無>의 부록에 실린 것으로, 원래 <선사상> 1986년 3-4 월 합병호에 게재되었던 원고이다. 원고 중에서 작가의 개인적 문학 여정을 언급한 서두 부분은 생략하고 큰스님과 바로 관련된 본문만을 발췌하였다.

 
 
  

대행 스님과 나 1

 

글/김정빈(작가)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세계의 유일한 실재, 유일한 의미로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왔었고, 그것을 주로 직관적이기보다는 관념적, 분석적으로 탐구해 왔었다. 그런데 내 견해에 의할 때 그런 논의가 불교에서처럼 명쾌하고 극명하게 전개된 예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줄곧 불교 또는 불교적인 저작이나 견해에 경도되어 왔었다.

 

 

그러던 차에 내게 ‘예정된 필연으로서’ 대행 스님은 다가왔던 것이다. 내게 대행 스님의 소식을 전해주신 J형은 나의 새로운 욕구(소설 단 집필 이후의)를 이해해 주었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카르마(소설 단을 통해 느끼게 된 작가로서의 불만족감)를 해소시켜 주실 분으로서 대행 스님을 내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일단 한 번 뵙게 되면 나의 마음공부에 도움이 되리라는 J형의 권고는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꼭 이 스님을 뵙고 나서 책을 펴내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J형은, 한 번은 선도를 다루었으니 이번에는 불도를 다루어 볼 것을 권했다. 그리고 그 모델로서 대행 스님처럼 적합한 분은 달리 없으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왕에 발행된 대행 스님의 전기를 한 권 건네 주었다.

 

 

솔직히 말하기로 하자. 그런데 나는 그 전기를 대충 훑어보고나서 약간 야릇한 느낌을 가졌었다. 전기의 저작자께는 미안한 생각이 들지만 이 마당에 감출 수가 없다. 나는 책이 약간 신파조인데다가, 주로 신통 능력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실망했다.

 

 

이미 말한 대로 나는 신통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을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약간 끌리려던 마음이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훌륭했던 것은 J형이었다. 내가 짐작하기로 J형은 훌륭한 불교이론가이며 또 수행도 깊고 신심도 견실하신 분이다. 그분은 그 전기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왜 내게 그것을 자세히 말하지 않았을까. 그 분은 사실 이상할이만치 내게 대행 스님을 적극적으로 권하면서도 정작 대행 스님의 진면목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고, 또 전기의 왜곡된 부분을 해명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 깊은 뜻은 나로 하여금 아무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그분을 뵙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지금도 J형의 깊은 뜻에 감사하고 있다.

 

 

그런 한편 내가 지금 대행 스님의 지극하고 심오한 세계에 경탄한 나머지 나의 지인들에게 수많은 말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 면괴스럽게도 생각한다. 나는 나의 그런 이야기들이 대행 스님의 크나큰 세계를 나의 류(類)만으로 이해하게 하는 오류를 갖게 됨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아마도 내 이야기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 이야기를 듣는 그분들은 대행 스님의 참모습을 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내가 한 말들이 관념의 틀이 될 터이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님의 위대성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이것은 아마도 기묘한 이율배반이며, 이런 이율배반 때문에 성서가 씌어지고, 불경이 남게 되어,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복음이 되어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그 한계 안에 가두게 되는 것이리라.

 

 

그 뒤에 J형은 나의 작은 아파트로 직접 찾아와 주었다. 말수가 적은 J형의 이야기로 미루어 나는 그분의 정성을 이해했다.

 

 

우리는 1985년 3월 16일 스님이 계시는 한마음 선원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날은 내게 있어서 참으로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이 땅에서 진리를

 

 

약속된 날로부터 스님과의 대담은 시작되었다. 스님께서는 당시 하루에 약 7-8시간 정도(길 때는 10 시간이 넘었다) 신도분들과 담선談禪 법회를 주관하고 계셨다.

 

 

스님의 모습은 맑고 빛나 보였다. 때는 봄이 시작된 3월이었고, 선실의 분위기는 쾌적한 것이었다. 첫날 나는 꽤 많은 질문과 이야기를 했었다. 누가 묻고 누가 대답하는지 쉬이 분간이 되지 않으리 만큼 나는 말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나의 사량심과 망상을 나무라시기는커녕 은근히 격려조차 해주시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까지 나는 소위 덕 높으신 스님들을 친견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짐작키로는 큰스님들은 (특히 선사들은) 남성적이고 활기차서 마치 포효하는 사자와 비슷할 거라고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관념 한 올, 망상 한 줄기도 붙을 바 없이 형형한 눈빛으로 섬광과도 같은 언어의 칼날을 휘두르는 명쾌한 사나이가 내게 있었던 선사의 이미지였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행 스님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퍽 의외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스님은 역시 어떤 고정된 이미지 속에 갇힐 그런 분이 아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보아온 스님의 인상을 말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스님에게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자비와 냉엄이 동시에 구족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는 스님의 이미지를 어떤 한 단어로써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굳이 찾는다면 ‘보살’이라는 말 정도가 될 것이다.

 

 

소설 <도>에도 썼지만 나는 대행 스님을 일반에게 알려져 있는 선사로 보지는 않는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에 있어서의 선사란 ‘남성적’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편이가 하면 스님의 이미지는 남성과 여성을 다 가능케 하는 모성을 느끼게 한다.

 

 

위대한 어머니, 마치 천주교의 신자들이 마리아에 품는 존숭의 마음과도 같이, 또 노자의 현빈玄牝과도 같이 대행 스님의 인격적 진폭은 한 없이 넓었다. 그리고 이런 면모야말로 참된 선사의 면목이며, 그런 의미에서 옛 선사들 또한 꼭이 ‘남성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닐 터이다.

 

 

일반에게야 어떻게 알려져 있든 참된 진리의 체현자란 상대성을 초월하였을 것이므로, 남성적이라든지 여성적이라든지 하는 일면의 편향성을 가질 수가 없을 터이기에 말이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스님의 감화력 속에 나의 딱딱하게 굳었던 자의식을 풀어놓았다. 그것은 얼마나 큰 진리였던가. 그러면서도 나는 그 아무런 ‘정신적인 체험’을 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아무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나는 소위 ‘불교적’이라고 할 때의 그 ‘적的’자를 떼어버리고 순수한 발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이 글의 머릿 부분에서 밝힌 대로 나는 어려서부터 성자들을 흠모해 왔었다. 그런 나머지 나는 그런 성자를 ‘지금 여기에서’ 뵐 수 있기를 또한 갈망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종로 거리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나 서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리고 오백 아라한 중의 누구와 더불어 법에 대해 성스러운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성자들이란 교리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본분에 있어서는 어떤 공통분모가 있다고 믿고 있다. 구태여 그것을 찾는다면 아마도 ‘마음’ 그것이 아닐까.

 

 

성자들이란 한결같이 마음과 무위와 자비와 인仁, 형제애를 말해 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과 ‘경經’에 의해서 오늘까지 전해져 왔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부처님의 가장 위대한 첫 번째 가르침은 부처님의 태어나심 그것이며 부처님이 살아계셨던 바로 그것이라고.

 

 

말씀은 차라리 부차적인 것이다. 그분은 성스러운 실존이 이미 천만 어語의 경전을 능가할 무게를 지닌다. 보라! 이처럼 위대한 현현 그것보다 더 육중한 무게를 지닌 경전이 어디 있으랴. 부처님의 살아계셨다는 자체가 위대한 불법인 것이며, 그 실존이 그 말씀을 웅변으로 증언하는 것이 아니랴!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에서’ 그런 진리의 현현자를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가엾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아마도 기독교인이라면 나의 그런 마음을 가리켜 도마와 같은 마음이라고 부르리라.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들의 대부분은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 도마가 아닐까. 나는 보기를 원했었다. 바로 이 시대에, 이 땅에 ‘마음’의 길이 참되며 영원한 것임을 존재로써 웅변해 주실 분을.

 

 

성자들이 가르쳐 온 그 마음의 길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정리해 두었던 터였으므로, 그런 나의 마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인 요청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역시 세계는 마음에 따르는 것인가 보다. 바로 내 앞에 바로 그 증거자가 뚜렷이 나타나신 것이니 바로 대행 큰스님이었던 것이다.

 

 

성자들은 참으로 딱하리만치 그 마음의 길을 가르쳐 오셨다. 그러나 세속의 우리들, 특히 첨단과학시대에 사는 우리들의 눈앞에 그 마음이라는 것은 얼마나 나약하고 무의미한 것일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역시 ‘성자들은 옳다’고 믿는 적은 사람들의 견해를 지지해 왔었다.

 

 

그것이 진리일진대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바뀔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더구나 교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값을 드높이려 했던 커다란 공통분모 속에 모든 성자들이 손을 맞잡는다고 본다면 더더욱이나 진리의 불변성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나는 대행 스님과 또 스님을 모셔온 스님들과 신도들로부터의 많은 자료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대행 스님께서는 ‘마음’이 여전히 이 세계의 유일한 실재라는 것을 형형하게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을. 마음은 나약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은 당위와 필연성을 지닌 것으로서 여전히 진리로 살아 있었다.


 

대행 스님과 나 2

 

 

소설 <도>와 대행 큰스님

 

내가 짐작하기로는 소설 <도>에서 표현된 것은 스님으로부터 내가 직접, 간접으로 듣고 느꼈던 그 열렬한 구도 정신의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연대기적인 정확성에도 자신이 없으며 특히 주인공의 마음의 발전을 뒤쫓아 가는 과정적인 필연성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상당부분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채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스님께서는 당신께서 살아오신 과거를 거의 오늘에 담아두고 계시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점이 그 점이었다. 정작 스님께서는 당신께서 머물렀던 곳이나, 체험하신 일, 행하신 일에 대해 머무르고 계시지 않았으므로 취재가 취재랄 수도 없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듯이 착着이 떨어져 버린 경우, 마치 녹음이 된 테이프에 다시 녹음이 되면 전에 녹음되었던 것은 지워져 버리는 것처럼 된다는 명확한 실증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야기는 과거를 회상하는가 하다가 언제나 끝나는 곳은 도였다. 그랬다. 스님께서는 만법이 귀일함을 철두철미 보여주셨던 것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우러러 보고 존경할 만큼 뛰어난 덕성의 소유자, 지혜의 소유자가 간혹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보통의 위대한 이들은 다르다. 우리를 감격시킬 만큼 드높고, 우리를 꼼짝 못하도록 묶어 놓을 만큼 진실한 말씀을 하시는 어떤 분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체험한 바에 의하면 언젠가는 그 끝이 있었다. 즉 그 말씀, 그 뜻이 화엄경의 웅대함과 법화경의 부사의함에 이르더라도 그것은 얼마 동안 그러할 뿐인 것이다.

 

짧게는 두 시간, 길어도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그분도 역시 인간적인 한계 안으로 내려오게 마련인 것이다. 거기서 그 위대한 이도 ‘그러나 배가 고프군’이라든가, ‘경전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니까…’라는 투의 포기와 후회를 보여주게 마련이다.

 

그런데 아직껏 나는 대행 스님께서 진리로부터 물러서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사소한 일상의 일로부터 지고한 법문을 행하실 때까지 그분은 언제나 법을 기준하고, 법에 의해 사시는 것이었다.

 

어떤 것을 물어도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것은 귀일歸一이었다. 그렇다. 그러기에 법이요 진리인 것이다. 크건 작건, 보이건 보이지 않건, 추하건 아름답건, 높건 낮건 간에 모두가 다 머리 쉬고 깃들어 마땅한 것이기에 진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여법如法하심에 조금의 작위성도 없다는 그 점이 또한 경탄스러웠다. 아니, 그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다. 진정으로 법에 의해 사시는 분이라면 무슨 작위가 있으랴. 당신께서 늘 말씀하시듯이 그분은 진실로 부딪히는 모든 경계를 그 자리에 놓고 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또 그래왔기에 지난 날의 그 숱한 체험들이 불성이라는 맑고 투명한 거울에 새겨져 있을 까닭이 없었으리라.

 

진실로 내가 무엇을 행한다는 마음, 또 내가 무슨 공덕을 지었다는 사량이 없을 때, 우리는 그 불성의 거울에 아무 얼룩이 없는 청정함을 회복하게 될 터이다. 그리고 스님의 살아가심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의 겸손으로서가 아니라 스님께서는 진실로 자신의 모든 행위에 관념으로서의 공덕 따위가 붙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아마, 참으로 공덕 없는 그 공덕이야말로 참 공덕일 것이니!

 

위에서 적은 것처럼 당신께서 해오신 공과로부터 이미 자유스러워지신 상태에서 구태여 내가 연대기적인 역정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다, 나는 생각했다. 이분을 표현하고 묘사하는 자는 마땅히 그 세세한 사실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그 진의에 유의해야 한다고. 그러므로 <도>의 독자들이 그 속에서 주인공의 간절하고 지극하고 절실한 마음을 볼 수만 있다면, 그 속에 깃든 뼈저린 동체대비심을, 진리의 명명백백함을 볼 수만 있다면, 다소의 사실적 착오는 허허로이 웃어 주리라.

 

마음의 힘이 진정으로 위대한 것이며, 이 세계의 근본임을 웅변으로 보여 주시는 이로서 나는 대행 스님과 같은 분을 알지 못한다. 선가禪家에서는 도력을 간혹 용用이나 술術로 폄하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같은 행위라 하더라도 무아의 입장에서는 도가 된다.

 

또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위대한 희생정신이라 하더라도 에고가 끼어들면 아무 공덕이 없으리라. 대행 스니메서도 강조하시듯이 신통에 의해 부려지는 자가 아니라 신통을 뷔는 이가 되어야 하며, 오신통은 아직 도라 할 수 없으니 거기엔 누진漏盡 즉 에고의 멸진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최소한 내가 보는 바에 의할 때 대행 스님의 신묘불가사의한 힘은 이타적일지언정 소위 자리自利의 그것은 아니다.  

 

 

 

스님의 뜨거운 눈물

 

내가 대행 스님으로부터 배우게 된 몇 가지가 있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에 비추어 중요한 시사를 던질 수도 있으리라 짐작된다.

 

1.

 

대행 스님의 보살정신, 즉 자비심이다. 어느 편인가 하면 지금의 선가 중심적인 한국불교는 문수와 보현으로 상징되는 부처님의 공덕 중에서 최소한 비교적으로는 문수적인 쪽에 기울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대행 스님의 경우는 중생의 아픔에 깊이 동참하는 뜨거운 눈물이 있다.

 

선사의 눈물!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해볼 수 있으랴. 그러나 실제로 대행 스님께서는 중생의 아픔에 동체로서의 아픔을 느끼시는 것인데, 나는 그 뜨거운 눈물을 직접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깊은 감동이었다. 나도 울고 말았던 것이다. 그 눈물에 어찌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을 것인가.

 

나는 대행 스님의 법명이 보현보살의 이명異名임을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다. 오늘날 불교가 현실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까닭 중의 하나가 높은 지혜는 있으되 깊은 자비심이 결여된 데 있는 것이란다면 틀린 말일까.

 

깨닫게 되면 중생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게 된다고도 하고, 중생의 아픔을 같이 어루만지다 보면 깨닫게 된다고도 한다. 지금 한국 불교에 전자는 많으나 후자는 적다. 물론 문수와 보현이 따로 있을 까닭이 없다.

 

참으로 문수가 되지 못했기에 보현이 아닌 것이요, 참으로 보현이 되지 못했기에 문수가 빠진 것뿐이리라. 그런 뜻에서 본다면 이런 우리의 형편이란 사실 문수편향적이라기보다 색상色相 편향적 또는 논리편향적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논리를 넘어서 있다는 지고한 가르침도 논리를 배경에 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에 대해서 대행 스님의 면모는 체와 용, 지와 행, 문수와 보현을 동시에 시사해 준다.

 

2.

 

바로 그 점에서부터 대행 스님의 근기를 가림이 없는 포용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님은 근기를 묻지 않는다. 기복祈福신자로부터 눈빛 맑은 수행 납자에 이르기까지. 최상승이란 그런 것이 아닐는지. 가장 높은 가르침이 최상승법이 아니라 근기에 차별 없음이 최상승법일 것이다.

 

<도>의 본문에도 썼거니와,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뜻이 십대제자나 오백 아라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 속에서 괴로워하는 더 많은 중생에게 있다고 한다면 과연 틀린 말일까.

 

부처는 바다요, 전체라고 한다. 또한 부처는 일체중생을 다 제도한다고 한다. 하물며 비록 근기는 낮다 하더라도 어엿한 사람임에랴. 여기에서 스님의 근기 가리지 않음의 뜻이 자연 이해될 것이다.

 

 

대행 스님과 나 3

 

3.

 

생활선禪에 대해서이다. 바로 삶 그 자체 속에 깨우침이 있고, 화두가 있고, 수행이 있다는 것이다. 입산과 하산, 입선과 방선의 구별함 없이 마음을 쉬고 나면 모든 것이 쉬게 된다.

 

작은 지면에 자세히 논급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으나, 아무튼 이점으로 미루어 그 수행방법이 현대적이며 새롭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현대적이라든가 새롭다든가 하면 마치 전통적 · 정통적인 것을 배척하는 것처럼도 느껴질 우려가 있다.

 

그런데 스님의 설명을 듣고 보면 그렇지가 않다. 이야말로 참으로 옛선사들의 참선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은 현대의 선공부가 퇴색, 변화되었기 때문일 뿐, 옛 선사들 또한 바로 그런 참선법을 지도하셨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즉 옛날에는 의정이 나는 그것을 화두로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틀리지 않으면 그대로 ‘그 자리’에 놓고 다시 새로이 부딪혀 오는 의정을 갖고 나갔다. 다시 그것이 새로운 의정과 대체된다.

 

그런데 지금의 화두선을 보면 우선 화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초지일관 붙들려고만 애를 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억지와 무리가 따르게 되는데, 그 억지와 무리야말로 자연스러움을 해치게 마련이다.

 

선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실상이라고 할 때, 그런 의타적이고(자생 화두가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또한 실상을 직접 보는 그것이 아니라 화두라는 하나의 문을 세우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실상이 포착될 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의 대부분의 스승들은 자생화두 그것이 소중한 것을 모른 채 오히려 그것을 망상이라고 해서 쫓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참선이란 화두든 무엇이든 고정되고 불변한 것을 세우려는 데서 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재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경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세히 살펴서 오히려 선정삼매가 스스로 일어나게 되어야 참선인 것이다.

 

내가 선정삼매로 가서 그것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정삼매가 오히려 이곳에 있고, 그것은 꽃이 피듯이 피어나는 것뿐이다. 그것을 대상화시킬 때 참선은 겉돌게 된다. 깨달음은 대상화될 수 없다. 내가 태어난 이것이 바로 화두다. 갈 곳도 없고 올 곳도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에는 문(대상화된 것으로서의)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께서는 별도로 화두를 세움이 없이 항상 바로 나 자신을 화두로 하는 참선법을 지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4.

 

스스로 진리를 깨우치신 바, 그 깨우친 진리가 불법과 일치함으로써 불법이 실존하는 것임을 몸소 증명하신 점이다. 물론 한암 선사나 탄허 스님과의 교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깨침이 스스로의 터득으로 이루어지신 것인데, 놀랍게도 경전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는 경전이란 비록 소실되거나 다른 까닭으로 인멸되더라도 법은 결국 형형하게 존재하리라는 것을, 즉 진리란 찾는 자에게는 언제나 드러나게 되는 것임을 웅변해 주는 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스님께서 거의 경전을 인용함이 없이 자기 살림살이로만 말씀하실 수 있는 힘은 바로 철저한 그 독각獨覺에서 가능했던 것이리라.

 

5.

 

여법如法하신 삶 그 자체가 위대한 법문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스님께서는 수많은 신도들을 진심으로부터 귀복케 하신 것인데, 사실 여러 신도분들이 스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마음씨들은 나를 감동시킨 맨 첫 번째 유의점이었다.

 

더구나 스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분일수록, 오래도록 뵙고 지내오신 분일수록 그 존경심의 도는 높았다. 그리고 그런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인품이 신도들과의 거리감을 갖게 하시지는 않고 신도들로 하여금 늘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하시는 것인데, 이는 그 여법함, 그 자연스러움 때문일 것이다.

 

6.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놀라운 지혜와 힘이다. 쉽게 법력이나 도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것인데, 이 부분은 미묘한 것이며 또 자칫 오해의 여지가 많으므로 자세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다만 나는 대행 스님을 통해서 실제로 위대한 법력의 세계가 있음을 믿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또한 그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것도 믿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스님의 법력은 위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누진의 입장에서 행사되는 것으로, 흔히 사교의 교주들이 쓰기도 하는 신통과는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완전히 나(我)가 여읜 상태, 거기에서 체體와 용用의 화해는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아무튼 스님의 놀라운 마음법의 힘을 직접 체험하신 분들의 수는 수백, 수천을 넘어 헤아리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아직은 그 전모의 수백 분의 일도 채 헤아리지 못하는 내가 감히 대행 스님의 구도기를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 한편 광영이면서도 한편 면괴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99가지의 짧음을 보기보다는 한 가지의 긴 것을 보아 주시는 스님의 자비에 의해서 소설 <도>는 그 엄청난 제목을 떠안고 시중에서 독자와 만나고 있다.

 

내가 감히 도를 말하다니! 그러나 반사적 광영이라는 말도 있다. <도>를 쓰면서 나는 대행 스님이라는 광원光源을 반사시키는 거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다.

 

아무튼 나는 소설 <도>와 이 책(법어집 <무>)이 대행 스님의 크신 뜻을 펴는 데, 그리고 불교를, 진리를 찾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도>를 읽고 ‘그것’을 버리는 사람이 많아질 때 나와 <도>는 그 임무를 다한 셈이 될 것이다.

 

7. (*주)

 

스님의 진면목은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유창하고 드높고 광활하며 또 오묘한 법문이 세상에는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진실이 꼭 그렇게 드높고 찬란한 변재辯才에 있지 아니함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일 것이다.

 

말은 쉬우나 행이 따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기에 늘 우리는 말과 행이 일치하느냐 못하느냐를 문제 삼게 된다.

 

필자에게 있어서 대행 스님의 법문이 지극히 평이하고 또 다소 논리정연하지 못하다는 그 점은 오히려 진실이 수사학修辭學에 있지 아니함을 직접 보는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면까지 있었다.

 

1년이 넘도록 가까이에서 스님의 사소한 일거일동까지를 직접 보아 오면서 필자는 스님의 언행에서 무한한 시사와 감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것을 전달하기에는 말과 글의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곧 삶이 그려내는 살아 있는 감동으로서 나에게 육박해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의 대강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인류의 큰 스승들에 의해서 밝혀진 그대로이며, 또 그런 큰스승들의 말씀을 통할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의 마음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그냥 ‘진실하라’든가 ‘서로 사랑하라’든가 하고 말하게 되면 너무나 상투적으로 들려서 오히려 싱거워지게 된다. 그러나 실인즉 진실, 사랑, 자비, 눈물 따위를 빼고 따로 무엇이 있단 말인가.

 

스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원초적인 선善들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의거한 것이요, 따라서 어떻게 보면 평이하면서도, 다시 생각해 보면 태산과 대해 그것보다도 더 우뚝하고 광활하게 느껴지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그런 진실조차도 성장盛裝을 하고 나서지 않으면 믿지 않게 된 우리들의 무감각증을 역으로 통타痛打하는 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언어로서만 아니라 그대로 믿고, 그대로 알고, 그대로 사시는 스님을 직접 보면서 그 단순한 가르침의 힘은 무한히 증폭되어 듣는 이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사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난해한 철학서나 교묘한 형이상학, 화려한 언어유희를 통해서가 아닌, 가장 단순하며 촌부라도 쉬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순수함이 곧 진리요, 진리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새로이 믿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주:  위 글에서 7번 항목 글은 원래의 원고에는 없는 것으로, 법어집 <무>의 후기에서 발췌한 것이다. 같은 카테고리 안에 묶을 수 있는 성격의 글이라고 보아 임의적으로 추가하였다.

 

 


 

 

이 원고는 한마음 선원 청년회 신행담 모음집 <죽어야 나를 보리라(1991)>의 8장 ‘죽어야 나를 보리라’에 실린 글이다. 이 책의 서술 방식은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글쓴이(서술자)는 이야기 전달자의 역할만을 하고 있다.

 

이 글은 진원이라는 인물이 정신적인 고뇌를 통해 자신의 참나와 대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글의 특성상 큰스님은 주변으로 살짝 물러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틀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큰스님의 면면이나 가르침을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아닌가 한다.

 

 

 

죽어야 나를 보리라 1

 

글/노만호(한마음저널 편집장)

 

 

 

진원鎭元은 내면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부를 하던 중, 예수의 생애와 죽음에 대하여 공부하다가 내면으로부터 진원 자신의 구체적인 죽음에 관한 질문에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살리기 위한 방편을 구사함에 있어서 지혜의 폭에 관한 문제를 떠나서라도,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죽었듯이 진원 자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얼마 앞두고 예비 대학생으로 청년모임(한마음선원 청년회)에 동참하였었던 진원이 군을 제대하고 복학하였다. 그리고 자신 안의 많은 문제로 하여 불가피하게 휴학을 하였고 이후 선원에 발길이 잦아졌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대명제와 그에 따른 많은 부수적인 문제, 솟구치는 의문들은 그를 편안케 놔두지 않았다.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찾아 많은 시간들을 보내었고, 그런 고심의 결과로 해결책을 찾은 듯싶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원위치였고 문제는 더욱 그를 조여 왔다.

 

온통 문젯거리였다. 발 하나 떼어 놓기도 힘이 들었다. 의문으로 하여서도 그랬고, 구체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그랬다. 답답함은 더욱 더 커져 이제는 아예 무엇을 보아도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다.

 

문제와 의문들은 또 다른 문제와 의문들을 낳고 그것은 점점 커져 태산만한 무게로 그를 짓눌렀다. 불면의 날이 길어졌고, 그 문제와 의문들로 하여 몇날을 도저히 잠을 이룰래야 이룰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생겼는지 너무나 고민스럽고 답답했다. 무엇인가 자신이 어리석은 탓에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구체적인 자신의 문제점을 알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는 모든 일에 대하여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고 어떠한 일이라도 무리 없이 잘 처리할 수 있는 현자라고 자부해 왔던 터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소원은, 자신이 원하는 바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었다. 설사 지금까지 또는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어진 사실에 대해서도 가능성과 예외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이 소원하는 것이라면 가능하게 되리라 믿어왔다

 

나이가 들면서 진원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중학시절 무렵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가장 현명한 자’가 되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가장 현명한 자가 된다면 자신의 소원 실현에 대한 가능 여부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진원은 현자가 되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했다. 누구의 말이나 글이더라도 배울 바가 있으면 부끄럼 없이 배우고 익혔다. 하지만 남의 말이나 글로 배운 것을 곧 자신이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설사 성자나 성현의 말씀을 통해 조금 안 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흔히 지행일치知行一致가 강조되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진원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현실에서부터 자신의 사고를 출발했기 때문에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즉,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방식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마음공부의 일면이 자신의 길을 자신의 걸음으로 떳떳하게 걷는 데에 있다면 자신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세는 수행인의 당연한 모습이긴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의 자세는 진원에게 아만과 교만을 갖게 하였다. 스스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런 속에서 진언은 자신이 점점 현자적인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칠흑의 어둠 뿐 도무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지금까지 당당하게 이끌어 왔던 현자로서의 자부심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리고 해결되었다 싶었던 문제와 의문은 다시 자신을 조이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아도 보이지 않고, 무엇을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잠을 이룰래야 이룰 수 없는 문제의 크기와 아픔의 깊이는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

 

그때 번개처럼 지나가는 한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러한 문제를 놓고 ‘자신’이 절망하여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자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인정해 왔던 ‘자신’. 그래서 별다르게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았던 바로 ‘나’. 언제나 대상(소원이나 문제 또는 절망감 등)만을 놓고 현자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도 노력했던 ‘자기’라는 존재.

 

진원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순간 그토록 자신을 얽어매고 짓눌렀던 ‘문제’라는 대상은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깨어난 후의 꿈처럼 사라져 버리고, 순식간에 자신의 소원을 지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라는 자신의 출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번개 치는 순간이 이렇게 빠를까?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의식할 틈도 없었다. 진원은 며칠을 마치 넋 빠진 사람처럼 보내야 했다. 그야말로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사건이라 그저 멍할 따름이었다.

 

며칠이 더 지나서야 이 일이 무엇인지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선배가 읽어 보라고 주었던 유마경을 기억해낸 진원은 단숨에 그 경을 읽어 내렸다. 그러고서야 자신의 체험이 또 그것으로 얻게 된 법에 대한 안목이 결코 유마경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난 뒤 큰스님께서 주재하시는 청년 법회에 참석하였다. 큰스님께서는 언제나처럼 담담한 어조로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시며 평이한 비유로 불법의 이치를 설하셨는데, 큰스님의 설법이 자신의 체험과 일치되는 부분에 이르자 그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진원은 조용히 스님을 친견하였다.

 

“그간 저는 나뭇가지의 열매만 따낼 생각을 해왔습니다. 열매를 익히려면 뿌리를 잘 돋우고, 거름을 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몇 개의 나뭇가지만을 붙잡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그 뿌리야말로 바로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뭐가 있기는 있지?”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가 법회 때 웃고 있는 너를 보고 이미 알았다. 그것은 삼천대천세계를 덮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예전에 스승과 제자가 한 암자에서 공부를 했었더란다. 그런데 스승은 깨닫지를 못한 채 그만 세상을 뜨고 제자는 열심히 수행을 해서 마침내는 크게 깨닫게 되었단다.

 

오랜 세월이 지나 깨닫지 못하고 열반하신 그 스승이 다시 환생을 하여 예전의 자기 제자였던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지. 제자였던 그 스님은 그 당시 나라에서 아주 존경받는 훌륭한 국사國師가 되었단다. 물론 국사께서는 자신의 수하에서 수행하는 그 스님이 예전의 자기 은사 恩師 스님인 것을 알았지.

 

그 스님은 국사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정진했고 마침내는 깨닫게 되었단다. 깨달은 그 스님은 너무나도 감사했지. 그 스님은 위의를 갖춘 후 국사 스님을 뵙고 감사의 삼배를 드렸어. 그러자 스승인 국사께서 일어나시더니 오히려 제자에게 정중한 삼배를 다시 올리는 것이야.

 

그러니 제자가 얼마나 당황했겠어? 왜 이러시냐며 스승을 만류하자 스승인 국사께서 말하기를 ‘스님이야말로 전생에 제 스승이셨습니다. 그때 저는 스님의 은혜로 공부할 수 있었고,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삼배를 올리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오늘 스승께서 마침내 깨닫게 되셨으니 제가 천배인들 만배인들 못드리겠습니까?’ 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거야.

 

 

그러니 예전의 스승이었던 그 스님은 얼마나 감개무량하고 기뻤겠어? 그래서 두 스님은 서로 손을 꼭 잡고 너무나도 기뻐서 엉엉 울고 말았지. 그러면서 스님은 이렇게 말했어.

 

‘예전의 스승이 오늘의 제자이고, 오늘의 제자가 예전의 스승이니 어찌 스승과 제자가 둘이겠습니까? 스승이 제자이고 제자가 곧 스승이 아니겠습니까?’

 

일체가 다 그러해. 그러니 높은 것이 높은 것이 아니고, 낮은 것이 낮은 것이 아니야. 또 부처가 부처가 아니고 중생이 중생이 아니지. 그러면서도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인 것이야. 아무튼 참 감사한 일이구나. 열심히 정진해라.“

 

진원은 이러한 일이 역사적으로 계속 되어 왔다는 사실을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체험은 지금까지 그가 걸어왔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현자가 되고자 했던 그의 소원도 ‘완전한 자유’로 자연스럽게 바뀌었고 선원의 목표나 선禪의 내용이 자신의 목표나 내용과 일치되자 선원을 마음의 거처로 정할 수가 있었다.

 

 

죽어야 나를 보리라 2

 

 

그 체험 이후 가장 큰 변화중의 하나는, 지금까지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내면의 문제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꽤나 진실하고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저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었던 가식이나 허위 등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훤히 드러나자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하기야 한 생명이 수억 겁을 지내오면서 저질러온 오류가 어찌 한둘일까? 때로는 원한에 사무쳐 보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는 남에게 원한을 품게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인과를 낳고 그렇게 수없이 되풀이 되었으니, 그 복잡하고 난해한 인과에서 비롯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은 얼마나 많을 것이며 자신도 살기 위해 가져야만 했던 허위와 가식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것들이 이제 드러나기 시작하여 천년의 어둠을 뚫고 밖으로 드러나 빛으로 하여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자기정화였다.

 

진원은 철벅거리는 진흙탕 속을 걸으면서도 그것을 교향악 정도로 좋게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야 그 길의 내용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눈을 바로 뜨고서야 보이는 내면의 문제점들. 스스로에게 너무도 부끄러운 모습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진원은 조금씩 조금씩 습과 업을 녹일 수 있었다. 한 달, 두 달 그의 정화작업은 순조로웠다. 숨겨진 부분을 새로 찾아낼 때의 즐거움은 어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활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 7,8개월 정도가 되자 새로운 문제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진원의 생각으로는 숨겨져 있던 문제를 드러내 놓은 것만으로도 문제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아닌게 아니라 처음에는 그러한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떳떳한 마음도 갖게 되었고 생활도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체험과 그러한 정화작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살아 있는 진리 그 자체와 자신의 실제 생활은 너무나 큰 거리가 있어 보였다. 산 너머 산이라더니 마치 그 격이었다.

 

그것은 인위적인 노력의 한계였다. 무위를 통해 무위 그 자체가 되야 체험과 실제 생활이 일치될 것인데, 그렇지도 못한 채 인위적인 노력으로 무위를 대신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러나 무위가 되고자 한다고 어떻게 무위가 될까?

 

지금이야 인위적인 노력이라고 하든 아니라고 하든, 모든 바램을 그치기만 한다면 아쉬운대로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확실한 공부를 해 놓지 않는다면 언제 또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어리석음 속에서 헤매게 될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방법이 없었다. 이 길이 자유인으로 가는 바른 길이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만 하는 지를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고 저렇게 생각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또 몇 날을 뜬 눈으로 새워야 했다.

 

진리 그 자체와 현실과의 거리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렇게 동떨어진 현실을 살게 한 구체적인 인과관계가 규명돼야 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것이 규명되면 인과의 뿌리를 몽땅 드러내어 깨끗이 해결해 버릴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이 바라는 자유인의 길에 들어설 터인데….

 

진원은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안간힘을 써봤지만 해결책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또 한 번의 막막한 절망이 그를 휩싸버렸다. 그렇게 또 몇 날이 지나고 첫 체험을 한 지 9개월여가 되었을 때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동안 해온 공부가 책을 보고 한 것이라면 몇 달, 아니 몇 년이 걸리더라도 책을 뒤져 해결책을 찾아보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또 누가 준 화두로 공부를 해 온 것이라면 화두를 준 사람을 붙잡고 사생결단이라도 하겠지만 그렇게 공부한 것도 아니었다. 이 공부야 그야말로 스스로의 자기 공부가 아니었던가.

 

물론 큰스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많은 이끎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큰스님을 통해서 자신의 공부를 확인할 수 있었고 더 넓고 깊은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큰스님께서 입안에다 밥을 떠 넣어준다 하여도 씹어 삼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큰스님의 가르침이 깊고 훌륭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분이 아무리 잘 일러 주셔도 그것은 ‘길 안내’일 뿐이었다. 스님의 가르침대로라면 그 한 고비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아 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이렇게 끝나야 하는가?’

 

그간의 세월동안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소원 하나를 품고 살아왔던 그였다. 그 소원은 꼭이나 그가 살아온 25년 세월의 무게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 생명으로서 흘러온 길고 긴 역정 동안의 무게와도 같았다. 그 역정의 세월은 천년이 될지도 모르고 만년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다. 한 생명의 역정이 어찌 만년뿐이겠는가. 수억 겁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라. 수억 겁 동안 품어온 소원이 이제 막다른 곳에 이르러 죽음과도 같이 자신을 억누르는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의 어둠의 두께를!

 

9개월 전 그때 진원은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았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이 나락의 끝에 서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고 그의 소원실현은 눈앞에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이 어둠의 무게는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

 

그렇게 또 몇 날을 헤매었는지 모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바늘 끝만큼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삶의 끝. 그것은 은산철벽이었다. 산다는 것이 어찌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일까. 살아갈 의미나 희망이 없는 자의 숨은 과연 붙어 있는 것일까?

 

포기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닥의 지푸라기라도 없이 해 볼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는데…. 이제는 도저히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가소롭다는 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헉~!”

 

순간적으로 사방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러자 그 웃음소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진정으로 공부하고 싶은가?”

 

진원은 너무나도 놀랍고 당황스러워 대답이고 뭐고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온 몸이 찌르르 저려오고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멈춰진 듯 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고 오로지 그 알 수 없는 느낌의 소리에만 온 정신이 집중되었다.

 

“네가 그토록 원한다면 네가 소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공부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이 공부는 매우 힘이 들고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하나 둘이 아니다. 세상 어느 사람이 공부를 하고 싶지 않으며 자유롭기를 바라지 않겠느냐만, 목숨마저도 내 놓아야 할 정도의 어려움 때문에, 또 진실한 마음이 부족하고 믿음이 강하지 못한 까닭에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 그래도 할 마음이 있는가?”

 

진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놀라운 상황에 그저 정신만 아득해질 뿐이었다. 그러나 진원은 이미 삶의 끝에 온 셈이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고, 오로지 그 ‘느낌의 소리’와 자신이 ‘존재적 의지’뿐이었다.

 

“하겠습니다.”

 

“진실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능히 참아낼 수 있겠는가?”

 

“예,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참아내겠습니다.”

 

“그렇다면 좋다. 이제부터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꼭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우선 나를 믿어야 하며, 지금부터는 나의 뜻을 따라야만 한다. 한 치의 의심이나 거스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겠느냐?”

 

“예.”

 

“또 지금부터 공부하게 되는 모든 것은 절대로 기억해서는 안된다. 배운 바가 크건 작건 그 즉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예.”

 

“좋다. 그러면 네게 문제되는 모든 것, 또는 궁금한 것이든 소원하는 것이든 그 어떤 것이든 관계없다. 질문해라.”

 

진원에게는 죽음의 일보 직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격이었다. 그 컸던 의문의 갈증만큼이나 그의 질문도 수없이 많았다. 진원은 정신없이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해서 진원은 법의 묘리妙理에 흠뻑 젖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진원의 일과는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 대학 고시실에서 고시공부를 하던 진원은 아침 일찍 책상머리에 앉아 책 한 권 펴놓고 안으로 질문하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때로는 질문에 대한 답을 놓고 여러 가지를 참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답에 대해 반론도 제기하면서 그 웅대하고 광활한 법의 이치를 배워나갔다.

 

밤이 깊어 학우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면 그제서야 슬며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어디 책상머리에서뿐인가. 길을 가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하다못해 화장실에 앉아서도 오직 그 일만이 진원의 일과가 돼 버렸다.

 

이러한 작업은 법法의 이치를 배우는 것이기도 했고 하나의 관觀이 되기도 했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을 일컬어 자심관自心觀이라 하는데, 진원에게는 그러한 작업이 병행되는 셈이었다.

 

 

죽어야 나를 보리라 3

 

 

진원의 눈은 언제나 내면을 응시했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음의 눈은 언제나 자기의 내면이었다. 그렇게 안으로의 공부에 푹 빠져있던 어느 날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내가 미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마음 공부에 정성을 쏟아 오면서 자기와 같은 경우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애 처음이며 상상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라, 이 일 역시 어디 물어볼 곳이 없었다.

 

큰스님께 여쭤볼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그러나 왠지 두려웠다. 공연히 여쭤보았다가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고 큰 질책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물론 질책 그 자체가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절망의 끝에서 만난 생명과도 같은 인도였는지라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의 소리’는 마치 캄캄한 밤중에 단 하나뿐인 등불과도 같았다. 오로지 그것 하나에만 의지하여 어둠 속을 헤쳐 나오는 중이었는데 만일 그것이 잘못된 공부라고 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렇다고 확인해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원에서 선배인 병욱을 만났다. 병욱에게 그러한 일을 이야기하며 고민스러워 하자 병욱은 예전에 큰스님께서 처음 공부하셨을 때도 내면의 이끎을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큰스님을 뵈어 볼 것을 권유하였다. 진원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래요?”

 

진원은 곧바로 스님을 친견하였다. 그리고 상세히 지난 일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스님은 뜻밖에도 너무나 기뻐하시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너야. 너의 원소! 그것을 통해서만이 보이는 유有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무無의 세계 양면을 거둬 잡고 자유로울 수가 있는 거야. 창살 없는 감옥이 뭔 줄 알아? 보이지 않는 무의 50 퍼센트를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창살 없는 감옥인 것이야.

 

또 너의 그 원소는 일체의 원소와 다르지 않아. 그래서 높은 것도 아니고 낮은 것도 아닌 바로 ‘너’ 자체야. 그 ‘너’는 때론 스승이 되어 주기도 하고 때론 친구, 때론 동생이 되어주기도 해. 이제 그 ‘자기’를 믿고 해 나가봐. 절대로 의심치 말고. 그러다 보면 알 바가 있을 거야.“

 

스님께서는 아주 환하게 웃으시며 진원을 격려해 주셨다.

 

그 후 진원의 공부는 치열해졌다. 날마다 날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공부의 내용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아무리 크고 귀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처음의 약속대로 기억해 두려 하거나 붙잡지 않고 곧 되놓았다. 만에 하나 기억해 둔 것이 있을 때면 그의 내면은 철저하게 점검을 해왔다.

 

또 붙잡은 바가 있을 때는 전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진원은 그가 그토록 목말라 했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수개월 후 법문이 거의 끝나가고 시자 스님이 목탁을 들고 일어섰을 때 진원이 들어왔다. 진원이 무엇인가 질문을 하려 하자 시자 스님은 그것을 무시하고 목탁을 내렸다.

 

“따르르르르륵……”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질문을 하려는데 막는다며 시자 스님을 크게 책하였다. 드문 일이었다. 진원이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다.

 

“항상 같은 말을 되풀이 하시느라 참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니지. 같은 말이기는 하나 같은 말이 아니지. 늘 아침밥을 먹으나 어떤 날은 보리밥을 먹기도 하고 어떤 날은 조밥 또 어떤 날은 쌀밥을 먹기도 하지,”

 

“온 우주 삼라만상이 사대오온四大五蘊이 모여 있다는 생각조차 없으니 있는 것이고, 순간순간 나투어 고정된 형태가 없으니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 신통력이 있다는 사람이 있다 하여 한 번 찾아보려 하였습니다. 오신통을 더듬어 보니 신통이라 하는 것은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데서 있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지옥 극락이 어떠어떠하다 하시어 그곳을 구경해 보려 하였습니다. 그곳을 구경하려면 그곳을 출입하는 자를 만나야 하는데, 몇 날을 찾다가 마침내 만났습니다. 그놈은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며 돌도 아니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지옥 구경을 하고 싶으니 데려다 달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그곳은 걸어서도 갈 수 없으며 비행기를 타서도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가는데 나라고 못 갈 이유가 있겠소? 하였더니 그렇다면 따라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그대로 쫓아 하여 지옥에 가보니 옛날에 사진으로만 보았던 사람들이 다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극락 구경을 하고 싶어 그곳도 구경하고 싶다 하니까 정 소원이면 구경시켜 주겠다 하여 극락엘 갔습니다. 극락에 가 보니 거기에는 부처며 예수며 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구경을 잘 하고 가겠노라 하였더니 그 이상한 사람이 자기가 데려다 주겠노라 하여 돌아와 보니 내가 방금 섰던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지옥과 극락을 왔다 갔다 하니 부처님의 법은 참으로 묘법인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 그 이야기를 다 들으시더니 천천히 말씀하셨다.

 

“물맛을 봤다면 쓴 맛 단 맛도 알겠지. 그래서 그놈이, 부처나 사람 모두, 지옥과 극락을 다 오고 가는 것이 그놈이라는 것을 봤다면, 세 모금만 마시면 삼세의 모든 유생 무생이 한 거적에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세 모금이 아홉 모금이 되고, 아홉 모금이 세 모금이 되며 한 모금이 곧 아홉 모금이 되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가 당시 했던 공부 중에는 큰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무의 세계에 관한 것도 있었고 세상의 법칙에 대한 단편적인 것들도 있었다. 아무튼 그런 속에서 그의 마음은 점차 밝아졌고 그 밝음은 다시 새로운 법을 드러나게 하였다.

 

물론 진원을 절망에 빠지게 했던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던 허위나 위선, 가식 따위의 숨겨진 업과 습이 원초적인 인과관계에 대해서도 하나 둘 씩 알게 되었다.

 

사실대로 말하기로 하자. 진원이 처음 자신의 출현 이전에 대하여 체험한 이후, 자신에게 숨겨져 있던 숱한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들에게 숨겨져 왔던 부정적인 모습들을 함께 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는 매우 훌륭하다고 느꼈었던 어떤 사람의 숨겨진 위선의 얼굴을 보게 되기도 했고, 그와 반대로 우습게 보아왔던 사람의 숨겨진 마음의 깊이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일은 종종 혼돈이었다. 다른 사람의 치부를 알아버린다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는 괴로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러한 위선을 갖고도 훌륭한 채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로움을 넘어 분노와 적개심을 일으켰다.

 

이러니 그가 편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당연히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했고, 진리의 존재 자체였던 첫 체험의 자유와는 너무나도 큰 거리를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왜 사람들에게 그러한 위선이나 가식이 존재해야 했는지, 그 인과를 밝혀내야만 했던 것이었다.

 

진원은 맨 처음 그 일을 물었다.

 

“어찌하여 그 사람은 그러한 위선을 갖고도 그토록 당당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오히려 그를 훌륭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러한 일이 있어야만 합니까?”

 

“거기에는 그 사람만의 뼈저린 아픔과 고통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는 그런 아픔이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내력을 죽 말하는 것이었는데, 진원은 그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복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울어 버리고 말았다. 어찌하여 세상에는 그토록 쓰린 눈물의 사연이 있어야만 하며, 왜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겪어야만 하는 지….

 

진원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러한 사연으로 정당화 될 위선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저 배척해 버리고 손가락질 해 버릴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을, 그 불쌍한 이를 어찌 버려둘 것인가. 진원은 그 사람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보이는 대로 그렇게 간단하게 판단될 수 없는 것이었다. 숨겨진 비밀과 복잡한 인과관계는 아주 오래 전부터 기인된 것이었다. 그것이 어찌 쉽게 인지될 수 있겠는가. 그 인과관계를 모르면서 어찌 사람에게 그저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더구나 손가락질 하는 사람마저도 배척하는 그 일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면….

 

인과의 세월이란 생명의 한 생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 세월 전부터 맺어온 인연들이 그럴만한 까닭을 같고 오늘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현재의 모습은 그 숱한 과거의 함축된 모습이었다. 그 구체적인 과거의 인과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 50 퍼센트를 마저 알아야만 했다.

 

우리가 이생에서 겪는 모든 일들, 그것이 즐거운 일이든 슬픈 일이든 거기에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 모두는 우리 자신이 지은 바였다. 수억 겁 전부터 쌓아온 인과의 무게.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토록 힘든지도 모른다.

 

 

수억 겁의 업을 소멸하는 방법에 대해 큰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가 오랜 세월동안 쌓아왔던 인과며, 유전, 업 등의 모든 것을 이 생애에 모두 녹여야 한다. 그 방법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근본을 진실로 믿고 모든 것을 그 근본에 일임하여 놓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모든 것을 믿고 되놓을 때 수억 겁 전부터 쌓아온 업은 녹아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근본은 마치 용광로와 같다. 업이든 유전이든 관계가 없다. 또 크든 작든 상관이 없다. 진실로 믿고 맡겨 놓기만 하면 된다. 녹음 테이프에 녹음을 하려면 앞서 있던 내용이 비워져야 새로 녹음이 되는 법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지나온 모든 것을 되놓아야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거에 집착하고 달라붙는 그 마음 때문에 이토록 부자유스러운 것이다.

 

생각해 보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없다. 또한 현재는 순간순간 공하게 나투며 돌아가기 때문에 없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믿으라. 그리고 모든 것을 자신의 근본에 일임하고 생활하라. 바로 이것이 수억 겁의 묵은 빚을 갚는 법이다.“

 

내면과의 뼈저린 공부는 진원으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공부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지난날에 대한 참회 때문이었다. 또 생명수와도 같은 자신의 근본과 일체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었다. 그것은 억겁의 업이 녹아 흐르는 것이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내면과의 대화라는 진원의 공부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내면과의 대화라는 형식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자신이 자신을 알지 못해 대화의 형식일 수밖에 없었던 마음의 교감은 이제 대화 이전에 곧 감지가 되었고 전달되었다. 아니 그것은 대화 이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자신과 자신의 근본이 결코 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것이 바로 근본이 느끼는 것이었다.

 

그동안 진원이 기억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공부가 얼마나 많았는지, 또 얼마나 넓고 깊게 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직접 이 모든 것을 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길로 가는 첩경은 아마도 진실한 삶의 묵묵한 걸음일 것이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수행이고, 공부가 끝이 있는 것이 아닐진대 우리의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근본을 믿고, 일체가 둘이 아님을 믿고, 일체가 자심自心임을 알고 그렇게 걸어가는 것일 것이다.

 

 


 

 

이 글은 <도道(1985)>의 3부에 실린 원고이다. 편의상, 제목이 없기 때문에 제목을 붙였고, 경어체를 평어체로 바꾸었다. 

 

여여(如如)의 묘법 1

 

 

글/혜원 스님(한마음 선원 주지)

 

 

1970년에 내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나이 서른셋이면 아무리 여자라 하지만 인생도 살 만큼 산 셈이니까 최소한도의 자립심이라든지 세상 살아가는 요령 정도는 알았어야 할 것이지만 그때 나는 그렇지가 못했다.

 

 

나는 아주 나약하다 못해 숙맥이라고 해야 할 만큼 여리고 눈물 많고 숫기 없는 여자였다. 똑똑한 소녀만큼도 주변이 없었고, 사람이 셋만 모여 있는 곳에서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당시 나는 각박한 운명에 의해서 홀홀 단신 외톨이로 세상에 버려진 몸이 되었다. 그간의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하고 싶다. 서른세 살이 되도록 스스로의 앞가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내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지난 삶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더 큰 이유는 거기서부터 내 인생은 새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말하자면 새로 태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미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잊혀져도 좋은 서른셋까지의 이야기보다는 그로부터 새로이 시작된 제2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다.

 

 

당시 거친 인생을 헤쳐 나갈 용기를 잃어버린 나약한 여자였던 나는 자살을 결심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같이 시내의 약국을 다니면서 극약을 사 모았다. 조금만 거친 사람 앞에서는 기도 펴지 못하고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내가 이제 보호자가 세상을 떠나버린 다음에야 살아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내게 다가온 것이 불법의 크고 깊은 이치였다. 나는 당시 대행 큰스님께 다니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불자였다. 나는 한편으로는 극약을 사 모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대행 스님을 뵙기 위하여 시간이 나는 대로 선원엘 찾아가곤 했다. 그런데 거기서 대행 스님의 인자하신 손길이 뻗쳐 왔다.

 

 

어느 날 스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한없이 눈물만 흘리는 내가 불쌍해 보이셨던지 선원에 와서 행자가 되지 않겠느냐고 물어 오셨던 것이다.

 

 

나로서는 그 말씀이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음성으로 들렸다. 나는 살려고 해도 살 용기가 없었고, 막상 죽으려고 해도 죽을 용기도 없었던 겁쟁이 여자였다. 그런데 스님께서 나를 행자로 받아주신다는 데에야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승려로서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구도求道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낱 세상살이의 각박함을 이기지 못하고 피난해 온 절간 생활은 이제 나에게 있어서는 새로이 인생을 시작할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나 자신이 인자하신 스승님 밑에서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살아가지 못할 불쌍한 여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지푸라기도 잡는다는 마음으로 오직 불법에, 오직 스님께 매달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노력을 다 바쳐서 절 살림을 도왔다.

 

 

그런 한편으로 나는 이미 신도 적에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마음공부에 몰두했다. 당시 큰스님께서는 지금과 같은 많은 설법을 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간혹 해주시는 말씀을 통해 나는 불법이라는 것이 단지 부처님 앞에 향을 꽂고 절을 하면서 복이나 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큰스님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말씀하시는 법이 없으신 분이다. 모든 것은 자유방임이었다. 나는 손윗 스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불제자로서 필요한 요식을 배우는 한편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공부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일년은 아무 터득한 바 없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마음공부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고, 또 어떻게 배워가야 하는 것인지도 잡힐 듯 잡히지 않아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년이 지나면서 나는 하나의 의단을 붙들 수 있었다.

 

 

큰스님께서는 언제나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도대체 참나가 뭔가, 나는 묻고 또 물었다. 나로서는 그 참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일이야말로 일대 생사의 문제였다.

 

나는 이미 한번 죽기를 결심한 바 있었던 몸이었다. 그리고 나는 큰스님 밑에서가 아니라면 세상 어디에서도 마음 놓고 살아갈 자신이 없는 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 절 생활이 내 삶에 있어서 최후의 카드였을 뿐만 아니라 바로 맨 처음 부딪힌 참나의 문제가 또한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될 일대 생사의 문제였던 것이다.

 

 

도대체 참나란 무엇인가? 나는 하루 종일을 두고 그것에 매달렸다. 물론 행자로서의 생활은 눈코 뜰 새 없을 만큼 바쁜 것이었지만, 그 바쁜 육肉의 생활 속에서도 의단이 놓치지 않았다. 따로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이 참나의 의단에 매달렸다.

 

 

그런데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알음알이로 이해될 것은 아니다. 참나가 이런 것이다 하고 누군가가 내게 이야기해 준다고 해서, 또 그것을 납득한다고 해서 참나에 대한 의단이 풀리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나는 그 맛을 보아야 했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저 큰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분명 참나는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의단을 풀어내는 일은 아주 중차대한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마음으로 그 참나에 대한 절실한 의문을 붙들고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낮에 일을 하던 중에 나는 그 참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참나의 의미가 단번에 내 뇌리를 치고 들어왔다. 그것은 생각도 아니었고, 이해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게 뜻 없는 뜻으로 다가와 이해 아닌 이해를 시켜주었던 것이다.

 

 

아!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던지! 나는 그제서야 보았던 것이다. 내 육체를 참으로 있게 한 나의 참 주인공을. 나는 눈물을 주루룩 쏟으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연방 고마움의 마음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여 한번 내게 나타난 그 참나는 이제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되었다. 나는 점차 내면세계의 깊은 맛에 취해 갔다. 나는 수시로 참나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 참나는 나를 지극하게 위로해 주었다.

 

 

고된 행자생활로 내 몸이 솜처럼 지쳤을 때 나는 눈물겨운 마음으로 참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주인공…, 주인공…. 당신 시자가 건강해야 할 것 아니야. 시자가 건강치 못하면 당신 심부름을 할 수가 없잖겠어. 주인공, 당신이 내 주인공이니까 당신께서 알아서 하도록 해."

 

 

내 마음은 안타까운 눈물에 배여 이렇게 중얼거렸는데,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고 있노라면 정말 씻은 듯이 아픔은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되풀이 되었다. 거기에서 나는 점점 참나에 대한 믿음을 키워갔다. 그리고 나는 점차로 그 참나에 대한 믿음을 여러 가지 절 살림살이에 적용해 보게도 되었다.

 

 

예를 들어서 스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있을 때 나는 주인공게게 그것을 반조시켰다. 말로 표현하자니까 주인공에게 하소연을 하거나 서로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냥 거울에 비추듯이 눈앞에 닥치는 문제를 그대로 비춰 보인다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큰스님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스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사소한 물건들 정도는 없으면 없는 대로 아무 탈이 없는 것이지만, 나로서는 큰스님께 정성스럽게 드릴 것이 무엇이든 꼭 필요했다.

 

그때 나로서도 나의 큰스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의 마음을 아직 마음 자체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으므로 무엇이든 눈에 보이는 징표가 있어야만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큰스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이 없을 때 나는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 안타까운 마음은 늘 나와 대면하고 있는 내면의 거울, 즉 참나, 주인공에 그대로 비쳤다. 그러면 그 이튿날부터 여러 신도님들이 내가 마음에 생각하고 있던 물건들을 사들고 오시는 일이 영락없이 벌어졌다. 번번이 그랬다.

 

 

한 번 마음을 내면 그것은 빈틈없이 결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젠 너무 많아…’하고 내면의 참나에게 이야기 해야만 했다. 그러면 약속이나 한 듯이 이튿날부터는 그 물건을 들고 찾아오시는 신도분들이 없었다.

 

 

나는 여간 기쁘지 않았다. 나는 절 살림살이에 이 원리를 응용했다. 그러자 내게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단지 마음을 일으키는 그것만으로 다 충족되었다.

 

 

그러다 얼마가 지나자 이제 그런 것이 스스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점차 마음의 크나큰 원리를 사소한 물질을 구하는 데 쓴다는 그것이 왠지 싫어졌고,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슬쩍 비켜 놓아버렸다. 그리고 나는 다시 더 넓고, 더 은밀한 마음의 비의를 찾아 무형의 벽을 뚫고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제 한 분과 이야기를 하던 중 내 눈 앞이 별안간 환히 틔었다. 그리고 그 환히 트인 시야 속에서 큰스님이 걸으시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모두 참의 이치를 가르치시는 진실한 법문으로 명징하게 비쳐 보였다.

 

 

또한 이 세상 모든 존재, 예를 들어서 나뭇잎의 한 이파리 한 이파리 모두에도 생명이 낱낱으로 살아 생생하게 숨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그것은 가차 없는 인식이었다. 그것은 나의 존재 전체로 느끼는 앎이었고, 나의 존재 전체를 세포 하나하나까지 낱낱이 비추일 듯이 청명하게 깨닫게 되는,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생생한 앎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직관했다. 이 이치에는 거짓이라고는 한 점도 묻을 수 없을 만치 드맑은 자리라는 것을! 한 올의 허위도, 한 점의 오차도 없는 가장 적확的確하고 가장 명명백백한 이치가 바로 이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마음법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한 찰라에 내게로 와서 떨어진 것이었다. 일순간에 그 모든 것들이 내 눈 앞을 환히 비추면서 명징하게 인식되었다.

 

 

나는 그동안 내 마음속에 쌓이고 쌓였던 의단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앞뒤 끊어진 자리에서 손뼉을 치면서 같이 앉아 있던 아우님에게 소리쳤다.

 

 

“얘! 얘! 이건 거짓이라고는 한 점도 붙을 수 없는 자리야! 바로 그런 자리야!"

 

 

나는 기뻐서 목소리를 높여 마구 소리쳤다. 그러나 사제는 깜짝 놀라서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하기야 그 사제가 나의 의단이 무너지는 그 오묘한 기쁨을 이해했을 까닭이 없었다.

 

 

여여의 묘법 2

 

 

이튿날 아침에 나는 큰스님 앞에 나아가서 어제의 내적 경험을 말씀드렸다. 오직 큰스님만을 믿고 따랐던 나는 나의 모든 번민과 모든 기쁨을 언제나 다 큰스님 앞에 털어놓곤 했다. 그것은 내가 승려가 되기 이전에도 그랬고, 승려가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또 스님께 찾아오시는 수많은 신도분들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큰스님을 스승으로, 어버이로, 친구로 느꼈다. 그런가 하면 연인처럼 뜨겁게 큰스님에게 끌린 적도 있었다. 큰스님께서는 한량없는 마음의 넓이를 갖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나는 큰스님으로부터 언제나 위로를 받을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날도 나는 전날에 있었던 그 신묘한 체험을 큰스님께 말씀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큰스님께서는 그저 듣고만 계셨다. "그래, 그래, 그렇지?" 정도로 말씀하실 뿐이었다. 늘 그랬다. 큰스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미 밟아가셨던 그 길을 차근차근 뒤따라오는 후학들에게 언제나 다정한 맏누이처럼 또는 자상한 엄마처럼 격려해 주시는 한편으로, 그 작은 체험에 심취하여 앞으로 나아가기에 게으를까 저어하심인지 그닥 크게 격려하거나 칭찬하시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마침 신도중에서 아주 덕망이 높았던 부부가 아침 일찍이 스님께 문안을 드리러 들어오다가 나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남자 신도분은 "그렇지요! 그렇지요!" 하고 내 말에 긍정을 표하였고, 부인은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스님, 참 애 많이 쓰셨네요. 드디어 한소식 하셨군요!"

 

그러나 나는 그 한소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 뒤로 나의 추구는 거의 의식 없는 추구가 되었다.

 

나는 특별히 어떤 의단을 붙들고 있지 않아도 자연히 마음이 집중되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절살림에 바빴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은 언제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임 없이 그 어떤 점 하나에 뚜렷하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큰스님을 모시고 함께 목욕을 간 일이 있었다. 큰스님께서는 앞서 걸으시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시면서 나를 돌아보시더니 불쑥 한 말씀을 던졌다.

 

"이 문으로 아주 들어가랴?"

 

 

나는 그만 꽉 막히고 말았다. 분명히 그 말씀은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이 문으로 아주 들어가느냐? 그러나 나는 도저히 그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큰스님의 그 말씀에 대하여 입이 꽉 막힌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날부터 끙끙 앓기 시작하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그 의문을 들어 주인공 그에게 던졌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주인공. 그러나 당신은 일체이니까 다 알잖아. 모든 것을 다 아는 당신이 제발 좀 대답해줘. 당신은 알잖아. 제발, 큰스님께서 하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내게 좀 가르쳐 줘. 가르쳐줘요."

 

 

나는 큰스님께서 던진 그 한마디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저 무한하며 영원한 본래의 나 자신에게 던졌다.

 

 

그리고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여전히 큰스님을 모시고, 신도님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대문간에 들어오던 중에 그토록 간절하게 주인공에 일임하였던 그 의단이 풀리며 분명한 답이 퍼뜩 떠올랐다.

 

그것은 깊은 밤 둥뚜렷하게 떠오르는 달을 보듯이 명료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큰스님. 이렇게 자상하게, 이렇게 분명하게 무지하고 어리석은 저를 가르쳐 주시는군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 그 경과를 큰스님께 말씀 드렸다. 큰스님께서는 내 말을 들으시고 역시 “그래, 그래" 하시며 고개를 끄떡이실 뿐이었다.

 

 

그 뒤로도 나의 내적 추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무심중에 큰스님께 이런 말씀을 드린 일이 있었다. “큰스님, 큰스님이 저이고 제가 큰스님이네요!" 큰스님께서는 나를 이윽히 쳐다보셨다. 그때 무엇이 내게 그런 말을 하게 했는지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 말은 내가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어떤 보다 더 큰 힘에 의해서 무심코 튀어나온 것이었다. 나는 다시 말했다. "아이, 그런 것을 가지고! 큰스님이 저요, 제가 큰스님이로군요. 난 왜 그걸 여태도록 몰랐을까요!" 큰스님께서는 이윽고 전과 다름없이 "그래, 그래…" 하셨다.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며 이것이 불법이라고 말했다는 옛 선사의 가르침에 대해서 내가 탐구한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나는 그 공안을 큰스님으로부터 들었다.

 

 

어떤 제자가 스승에게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 스승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보이셨다는 것이었다.

 

 

뭔가, 도대체 이게 뭔가…. 나는 또다시 그 의단 속에 빠져들었다. 이 도리는 아무리 유창한 설법을 듣고 그 뜻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결코 대답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말이나 관념으로는 도저히 발 한 걸음 떼어놓지 못하는 것이 마음법의 지밀하고 냉엄한 세계이다.

 

오직 한 잔 냉수를 유유히 마신 그 사람만이 그 맛을 말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앎으로서가 아니라 체험지, 직관지로서만이 알고 또 대답할 수 있는 이 대답이자 물음.

 

 

나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는 그 선사의 깊은 마음의 세계에 대해서 그만 앞이 꽉 막혔다. 그리고 그것이 나로서는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은산철벽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일심 앞에서는 스르르 빗장이 풀리고 말았다. 순일한 마음으로 오직, 오직 하면서 의단을 의심하고 또 그 의단을 ‘참자기’에게 일임하여 버리자 결국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그것이 훈풍에 얼음이 녹듯 스르르 녹아 무너져 버렸다.

 

 

또 다시 감격, 또 다시 눈물, 또 다시 기쁨, 또 다시 감사였다. 아아, 나는 이제 거기서 마음 속에 어떤 떳떳한 것이 분명하게 쥐여져 있게 된 것을 깨달았다. 뭐랄까, 그것은 말하자면 주장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제 예전의 그 나약하고 눈물 많던 여자가 아니었다. 나는 당당해져 있었고, 아무 거리낄 것 없이 자신에 차 있었다. 나는 어느 사이엔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곳에 와 있었다.

 

 

그때부터 큰스님께서는 나를 사람들 앞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세 사람만 모인 곳에서도 주눅이 들던 나는 이제 많은 신도님들을 앞에 모시고도 차분하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다. 내게는 이제 두려움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주인공의 시자로서 사람들 앞에 나아갔던 것이다. 나는 시자였다. 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여러 신도님들 앞에서 정작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참된 그 영원한 그였다. 그렇게 하여 나는 아무 준비 없이도 여러 사람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마음법에 대해서 설할 수가 있게 되었다.

 

 

참으로 신비한 일이었다. 이 기막힌 도리는 보려 해도 볼 수가 없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있었다. 마치 법당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일이듯이, 그리고 그 불상 앞에는 촛대가 놓여져 있는 것이 틀림없는 일이듯이 이 묘법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심정을 큰스님께 말씀드렸다. "스님, 묘법은 있긴 있는데 잡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아요!" 그러자 큰스님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역시 "그래, 그래…"하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아니었다. 나는 뒷날에야 그것을 알 수가 있었다. 세상은 정말이지 ‘그냥’이었다. 아무 말이 필요 없는 것, 그것이 세상의 미묘한 이법이었다. 그냥, 그냥…. 세상은 그냥 있었고, 나의 의지도, 나의 마음도, 나의 행위도 그냥 그냥 그렇게 들고나며, 있고, 될 뿐이었다.

 

 

큰스님께서는 간혹 ‘모든 게 그냥 그냥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나에게는 그 말씀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그 문제에 매달렸던 것인데 어느 날 <육조단경>의 첫머리 시송詩頌을 읽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가엾은 여자, 내가 이 공부 아닌 공부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큰스님께서 늘 말씀하시던 ‘그냥, 그냥…’이라는 무상성의 깊은 의미를 이해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세상에서 남들이 다 정규교육을 받고 좋은 가정에서 부모님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동안 갖가지 고생을 하면서 무지와 빈곤 속에 살아야 했었다. 사실 그 때문에 절간 생활 중에도 알게 모르게 나는 세속에서 학부교육을 받고 승려가 된 내 사제들에게 위축감을 느끼곤 했었다.

 

바보 같았던 나, 연약하고 주변 없었던 나, 남을 의심할 줄도 남과 다툴 줄도 모르던 나, 그저 윗어른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이렇게 하나하나 마음법의 깊은 이치를 깨달아 나아가면서 느끼는 법열은 버림받았던 나의 반생을 백 배, 천 배로 보상해 주고도 남는 바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부처님께, 큰스님께, 내 마음속의 주인공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 뒤로 큰스님께서는 내게 이제부터는 네가 억겁 전에서부터 쌓아온 습을 죽이는 공부를 하라고 일러 주셨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어리석음과 성냄과 좋은 것을 탐내는 독소들이 잠복해 있을 것이었다. 하나의 지극히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수십만, 수백 만 번의 윤회를 거치면서 나는 그 탐진치 삼독을 찌꺼기처럼 내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혔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것을 정화해야 할 때였다. 이제는 참으로 나를 죽여야 할 때였다. 사람은 진정으로 한번 죽어보아야 거기서 참된 새 생명이 태어나게 되는 것인가 보다.

 

 

여여의 묘법 3

 

 

요즈음 나는 그 습을 죽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 작업만은 그렇게 간단하게 되지 않을 엄청난 과제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묵묵히 내가 처한 시점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갈 뿐이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직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이유도 변명도 목적도 뚝 끊어진 그 시점에서 우리는 묵묵히, 마땅히, 불성을 지닌 존재는 그러해야 할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법의 공부과정에는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참 많았다. 예를 들면 공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몸을 마구 학대하고 싶어지는 때가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흠씬 욕을 먹고도 싶었고, 실컷 두들겨 맞고도 싶었다. 그러다가는 얼마 뒤에는 그 사실이 부끄러워서 이번에는 마구 걷잡을 수 없는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왜 나는 바로 그런 피학심리를 가볍게 옆으로 젖혀버리고 나의 갈 길을 묵묵히 가지 못했던가. 내가 진정한 내가 아니요, 참나의 시자일진대, 왜 나는 내게 닥쳐오는 것들에게 그토록 쉽게 속아 헤매어야 했는가. 나는 못난 나 자신을 꾸짖으면서 펑펑 눈물을 쏟았다.

 

 

그런가 싶으면 또 어느 땐가는 큰스님이 마치 연인처럼 그립고 보고 싶어지는 때가 있었다. 그 때는 행자시절이었는데, 그렇게도 인자하신 큰스님을 뵙고 싶은데 손윗 사형께서 한사코 나를 큰스님이 계시는 선실로 올려보내시려 하질 않았다.

 

나는 미칠 듯한 기분이었다. 염불을 외다 말고 큰소리로 마구 큰스님을 부를 지경이었다. "스니임! 뵙고 싶어요! 스님을 뵙고 싶어요!" 나는 울면서 울면서 소리쳐 큰스님을 불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큰스님에 대한 착이 뚝 끊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칼로 무를 자르듯이 가차 없었다. 나는 갑자기 마음속에서 오똑한 심정이 되어서 야멸차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큰스님을 믿고 살진 않아! 나는 나요, 큰스님은 큰스님이시지. 내가 왜 그렇게도 큰스님을 부른담! 큰스님의 그 뜻을 따를지언정 나는 큰스님의 육을 보고 살진 않을 거야!"

 

 

그 뒤로 나는 큰스님에 대한 열병같은 애착을 버리고 중추명월같이 흠 없는 마음을 되돌릴수가 있었다.

 

 

그러나 마음공부를 해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힘든 것은 뭐니뭐니 해도 몸으로 겪는 고통 그것일 것이다. 일체를 참자기에게 다 맡기고 내 육신은 하나의 방편이요, 심부름꾼으로 알고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공부이다. 거기에는 하나의 예외도 없다.

 

 

만약 몸에 무슨 병이라도 날 때에는 절대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서는 안 된다.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때야말로 참으로 마음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알고 다시 더 깊은 신심으로 모든 것을 다 주인공에게 던지고 맡겨야만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수행자인 것이다.

 

 

세상의 이치대로 하자면 가당치도 않은 말이요, 어찌 보면 인체생리를 무시하는 억지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많겠지만 우리들에겐 그렇지 않다. 우리들은 병에 걸리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만일 병에 걸리더라도 그 치유는 바로 자기의 참 주인공에 의해서 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참주인공은 완전성을 구족하고 있으며 바로 이 몸의 주인인 것이므로 이 몸이 병에 든 것도, 이 몸을 낫게 하는 것도 그 영원한 자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몸이 하나의 시자일 뿐인 것을 참으로 믿고 모든 것을 주인공에 일임해 버린다면 그때 병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몸이 따로이 있고 마음이 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마음만이 근본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육신의 아픔도 오직 유일한 실재인 그 마음의 뜻에 따라 겪거나 또 낫게 되는 것이다.

 

 

때로 온몸이 탈진 되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싫을 정도로 육신이 괴로운 때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참자기가 육신의 아픔을 통해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공부케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눕거나 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곧 시험에 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온몸에서 기운이 모조리 빠져 나가버리거나, 뼈 마디마디가 저미는 것처럼 쑤셔온다든지 하게 되면 아무리 참마음의 이치를 배운다는 우리들로서도 견디기가 힘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승려가 되고 지금까지 하루, 한 시간도 육신의 아픔 때문에 쉬어 본 일이 없다.

 

 

그것은 첫째, 나는 이미 육을 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씩 생각해 보곤 한다. ‘지금 당장 네가 목숨이 끊어진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과연 지금 당장 세상을 등져도 아무 미련이 없을 만큼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애착을 비워버렸느냐?’ 그럴 때 나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나는 한갓 주인공의 시자일 뿐이다. 주인공은 모든 것을 밝게 하시는 이요, 오직 나를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 시험도 주시며 고통도 안기시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럴 때 내 목숨을 앗기는 일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묵묵히 그것을 받아들일 따름이다. 그런데 하물며 몸이 아픈 정도로 내가 저 영원한 주인공의 시자 노릇을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거기에다 내가 몸이 아무리 아프다고 하더라도 쉴 수 없는 다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나의 스승이시며 비할 바 없이 자비롭고 지혜로우신 큰스님 때문이다. 십 년, 아니 이십 년이 넘었다. 큰스님께서는 그 긴긴 세월을 시종여일하게 오직 중생구제를 위해 쉼 없이 살아오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최근의 수년 동안은 내가 직접 큰스님을 모시면서 지켜보아온 바이며, 그 전의 십수 년 동안의 일은 많은 신도님들로부터 들어서 아는 바이지만, 큰스님께서는 지극한 자비심으로 눈살 한번 찌푸리는 일 없이 그 세월을 중생교화를 위해 보내오신 것이다. 그동안 스님께 가피를 입은 신도분들은 그 얼마이며,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은 그 얼마이겠는가.

 

 

그 긴긴 세월 동안 그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교화하시기까지 내가 나라는 생각을 가지신 분이라면 도저히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여윈 분이시다. 큰스님께서는 이미 완전하게 실현하신 그 진아의 원리, 공의 원리, 뿌리 없는 주장자의 원리에 따라 모든 것을 잊고 버린 채 살아오셨다. 그리하여 해도 함이 없고, 베풀어도 베푼 바 없는 그 여여하신 마음이 바로 그 머나먼 길을 쉼 없이 걸어오게 하셨던 것이다.

 

 

나는 큰스님의 그 지극한 마음, 그 자취 없는 마음, 그 깊고 은밀한 마음을 생각할 때마다 여기에는 위대하다는 형용사조차도 차마 부족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 큰스님을 생각해 볼 때 내가 어찌 파렴치하게도 쉬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온몸이 파김치가 되면 나는 견딜 수가 없어서 내 방으로 가서 잠시 눕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거짓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 5분도 편히 쉬어보지 못했다. 누워서 몸을 쉬려는 바로 그 순간 "안 돼! 안 돼!" 하면서 나를 세차게 밀치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 그럴 때마다 나는 큰스님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렇게 되고 보면 큰스님의 지극하신 지난 세월을 생각하는 그것만으로 나는 무엇에 쏘인 사람처럼 다시 제 정신을 찾고 방에서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내게도 그랬지만 누구에게든 큰스님께서는 이래라 저래라 말씀하시는 법이 없다. 큰스님께서는 절 살림에 대해서든 신도님을 응접하는 문제든 또 무슨 문제든 간에 모든 것을 다 자재법에다 맡기고 계실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 선원은 여러 가지 규칙이나 제도나 지시사항이 없이도 부드럽게 모든 일이 잘 처리되고 있다. 이야말로 무위無爲의 위爲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승려가 되겠다고 선원에 오게 되는 아우님들은 처음에는 큰스님께서 여러 가지 면에서 간섭이 없으시다는 사실에 일견 안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차차 느끼게 된다. 이 자유가 얼마나 무서운 자유인지를. 이 무서운 마음의 법리 안에서는 모든 것이 법 없는 법으로, 보이지 않는 속에서 빈틈없이 운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유는 진정 방종의 자유가 아니라 여법하게, 진실하게, 올바르게 도의 길을 가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인 것을 아우님들도 차차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아무런 지시나 간섭 없이도 큰스님의 뜻은 꽃이 피어나듯이 가장 자연스럽게 손아래 스님들에게도 배어나게 된다. 거기에는 큰스님에 대한 크나큰 존경심이 스며 있다. 우리들은 그렇게 해서 큰스님의 손 없는 손에 의해 길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대한 스승만이 가지는 법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한 가지, 꼭 이야기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계戒에 대한 것이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계는 타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예를 들어 아무리 승려는 오신채가 든 음식이나 육식 따위가 금지되어 있다고 해도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그리웠다. 마늘. 파 따위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음식이란 사실 무의미한 것일 테니까. 그러나 이제는 ‘저절로’ 그런 따위의 음식은 입에 대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도 법이라면 법일지 모른다. 일부러 마음에 성을 쌓고 계를 지키려 해서가 아니라 차츰차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어지는 것, 그것이 계의 진정한 의미인지 모른다. 그것은 다른 여러 가지 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나는 큰스님을 곁에서 모셔오면서 해가 가고 달이 바뀌면서 점점 더 깊고, 넓고, 은미隱微한 큰스님의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경외심의 도가 더해지고 있다.

 

 

나는 내가 모시고 있는 대행 큰스님에 대해서 무한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흠모의 마음을 갖고 있다. 아마도 그런 흠모의 염은 큰스님에 대해서 많이 아시는 분이면 많이 아시는 분일수록, 또 큰스님과 오랜 교분을 맺고 계시는 분은 오래 맺고 계시는 분일수록 더하리라고 생각된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이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정성으로써 대행 큰스님을 모실 것이다. 그것은, 아직은 그 깊이와 위대함의 전모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대행 큰스님의 자취도 남지 않는 법신에 대한 나의 지극한 애정 때문이며, 그 애정이야말로 배운 바 없고 눈물 많고 나약했던 나를 가장 크나큰 은혜 밑으로 인도해 주신 부처님의 깊은 은덕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eyeinhand/10175370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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