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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지장보살 영험담 과거판(地藏菩薩 靈驗談 過去版)

by 예경 2017. 1. 15.

 

 

 

지장보살 영험담 과거판(地藏菩薩 靈驗談 過去版)

 


1. 지장보살이 된 신라왕자 김교각 / 苦行고행의 길 택한 金喬覺김교각

 

성덕왕의 맏아들 金守忠김수충설 유력 / 眞身진신모신 고찰, 中國 민족 성지로


중국 안휘성 합비시(合肥市) 남쪽에 구화산(九華山:해발 1342m)이 있다. 구화산은 아미산 보타산 오대산과 함께 중국의 4대 불교 성산(聖山)의 하나로 꼽히는데 무려 80여개의 사찰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구화산을 성산으로 만든 인물이 김교각(金喬覺)이란 신라 왕자 출신 승려이다. 김교각은 `쌀 보내준 은혜에 보답함(酬惠米)'이란 시에서 비단 옷 납의로 갈아입고/불법을 닦으려 바다 건너 구화산에 이르렀네/나 본래 왕자의 몸으로/수행의 길에서 오용지를 만남이여라고 자신이 신라의 왕자임을 스스로 밝혔다.

 

그는 서기 794년(신라 원성왕 10년)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는 그가 696년(효소왕 5년)에 태어났음을 뜻한다. 그는 24세 때인 719년(성덕왕 18년) 당나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가 무엇 때문에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중국으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국의 사주전(謝澍田) 교수는 그가 성덕왕의 장자 김수충(金守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삼국사기' 성덕왕 13년(714)조는 왕자 김수충을 당에 보내 숙위케 하자 당 현종이 그에게 제택(第宅)과 비단옷을 내렸다고 전하고 있고, 성덕왕 16년조는 견당대감(遣唐大監) 김수충이 돌아와 문선왕(공자) 10철 72제자의 그림을 바치자 이를 대학(大學)에 안치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문선왕 10철 72제자 등은 모두 유교와 관련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김교각이 과연 김수충인가는 의문이 있다.

 


신라서 겪은 정치경험 / 자유로운 참선 밑거름


이처럼 김교각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구화산에는 그에 관한 수많은 일화들이 전한다. 그는 도당(渡唐)할 때 신라의 삽살개를 가져왔다고 전하고 있는데, 평생 그의 수행을 도왔다는 삽살개는 상으로 만들어져 현재 구화산을 지키는 영물로 여겨지고 있다.

 

다른 하나가 낭랑탑(娘娘塔)으로서, 현재는 기단만 남아 있는데 신라 여인을 위해 세워졌다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낭랑탑 기단 위에는 명안천이 있는데, 김교각의 어머니가 신라에서 구화산으로 찾아와 울음을 그치지 않아 눈을 상했는데 교각이 화성사 앞 우물에서 물을 길어 어머니의 눈을 씻기자 눈이 나았다 한다.

 

이 우물에 세운 보탑을 후세사람들이 명안천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성전(二聖殿)은 김교각의 외삼촌으로서 그를 데리러 왔다가 도리어 그에게 감화되어 승려가 된 소우(昭佑) 소보(昭保) 두 사람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인데 현재도 두 사람을 기리는 이성회가 매년 열린다.

 

이런 전설 외에 김교각이 고향으로 떠나는 자신의 동자에게 준 시는 그의 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문이 쓸쓸하여 집 생각 하더니/절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떠나는구나/난간에 기대어 죽마 타던 어린시절 그리워하던 너/금같은 불도의 땅도 너를 붙잡지 못하는구나/첨병곡의 달 구경도 마지막이며/자명구의 꽃놀이도 끝이 났구나/서운해 눈물 흘리지 말고 잘 가거라/노승은 안개와 노을을 벗하리라'

 

사찰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떠나는 어린 동자를 떠나보내며 김교각은 자연스레 고향 산천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교각은 `안개와 노을을 벗'하며 수행을 계속했다. 당시 불교계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으나 김교각이 경전을 읽고 참선을 계속하면서도 특정한 종파에 매달리지 않은 것은 신라에서 겪은 정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교각을 지장보살로 만든 것은 그가 입적한 후에 벌어진 신비로운 일 때문이다. 99세 때 김교각은 주위의 모든 승려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적했는데 사찰에서는 그의 육신을 돌항아리에 넣었다. 3년 후에 열어보니 그때까지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해서 사람들은 그를 지장의 화신이라 여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장보살은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후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6도의 중생을 교화, 구제한다는 보살인데, 중생이 모두 제도한 후에 깨달음을 이룰 것이며, 지옥이 빌 때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는 지장보살의 서원(誓願)을 김교각은 육신으로 실현한 셈이었다.

 

김교각 스님을 지장보살이라고 확신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육신에 금을 입히고 3층 석탑을 세웠는데 후인들이 그 위에 세운 사찰이 바로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김교각의 진신(眞身)을 모신 이 고찰은 797년 지었으며, 청나라 때 중건되었는데, 중국 민중불교의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백토와 쌀, 모닥불로 수행 / 99세 모든 것 버리고 입적


그가 신라 왕실을 버리고 중국으로 건너간 이유는 그 자신의 자각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신라왕실의 권력투쟁에 염증을 느낀 결과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현실의 유한한 가치보다 이상의 무한한 가치를 추구했다는 사실이다. 김교각은 식량과 의복이 부족할 때는 스스로 농사짓고 땔감을 해 날랐으며, 그래도 부족하자 백토와 쌀을 섞어 먹고, 모닥불만으로 한기를 이겼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수행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의 육신이 썩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전쟁의 시대, 증오의 시대, 갈등의 시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영원한 삶을 얻었던 김교각의 생애는 하찮은 것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인생의 의미를 생각게 해 준다.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

 


2. 나옹스님의 효심

 


지금으로부터 6백여 년 전, 고려의 유명한 스님 나옹화상(법명 회근, 1320∼1376)은 춘설이 어지럽게 흩날리는 길을 시자도 없이 혼자 걷고 있었다. 지금의 양주땅 회암사에서 설법을 마치고 이천 영월암이 있는 설봉산 기슭을 오르는 스님의 발길은 찌뿌듯한 날씨처럼 무겁기만 했다. 이때였다. 어디선가 가까이서 울리는 요령소리가 스님의 귓전을 울렸다.

 

『허, 또 누가 이생을 하직한 게로군.』

 

자신의 출가 당시 화두였던 사람이 오고가는 생사의 도리를 되뇌이면서 막 산모퉁이를 돌아서려던 나옹 스님은 초라한 장의 행렬과 마주쳤다. 상여는 물론 상주도 없이 눌수그레한 영감이 요령을 흔들며 상엿소리를 구슬피 메기고, 그 뒤엔 장정 하나가 지게에 관을 메고, 무거운 듯 힘겹게 걷고 있었다. 바로 뒤엔 두 명의 장정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따랐다. 행렬은 스님을 보자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허리를 굽혔다.

 

『누가 갔는데 이처럼 의식도 갖추지 못하고….』

『예, 아랫마을 돌이어멈이 아직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거참 안됐구먼. 얼마 전 아들을 잃고 정신이 이상해졌다더니… 나무 관세음보살.』

 

스님은 마지막 가는 돌이어멈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염불을 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평소 마을을 지나다 몇 번인가 본 돌이어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들을 잃고 난 뒤충격을 받아 남의 집 물건을 예사로 훔치고 자주 마을 사람들과 싸우는 등 포악해졌다. 처음엔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도 나중엔 하도 말썽을 부리니까 가두어야 한다고 하여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그만 명을 달리하고 만 것이었다. 을씨년스런 날씨에 마음마저 착잡한 스님은 문득 출가 전 자신이 고뇌하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스님이 스무살 때였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자고 약속한 절친한 친구가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비통에 잠긴 나옹은 「사람은 죽으면 어딛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어른들께 수없이 되풀이했으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벗과의 사별을 인생의 근본문제로 받아들인 나옹은 그 길로 공덕산 요연 스님을 찾아갔다.

 

『여기 온 것은 무슨 물건이냐?』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으나 보려 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 없나이다. 어떻게 닦아야 하겠나이까?』 이 말에 요연 스님은 나옹의 공부가 보통 경지가 아님을 알았다.

 

『나도 너와 같아서 알 수 없으니 다른 스님께 가서 물어라.』 나옹은 그곳을 떠나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1344년 양주 회암사에서 4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앉아서 용맹정진을 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스님은 더 높은 경지를 체험하기 위해 1347년 중국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났다. 연경 법원사에 도착하여 그 절에 머물고 있던 인도 스님 지공화상을 만나 계오(契悟)했다. 2년간 공부하다 다시 남쪽으로 가서 평산 처림에게 법의와 불자를 받고 사방을 두루 다니며 선지식을 친견하던 스님은 어느 날 어머니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이 솟아올랐으나 스님은 출가사문의 본분을 내세워 멀리서 왕생극락을 기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잊고 지내온 어머니 생각을 모두 떨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스님은 선정에 들어 어머니의 행적을 좇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옹 스님의 어머니 정씨는 뜻밖에도 환생하지 못하고 무주 고혼이 되어 중음신으로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자신을 원망했다.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에 대해 그토록 무관심했던 자신의 불효가 한스러웠다.

 

「자식이 출가하면 구족이 복을 받는다는데 우리 어머님은 업장이 얼마나 두터우시길래 구천을 맴돌고 계실까. 혹시 아들의 모습을 못 보고 눈감으신 정한이 골수에 맺힌 것인 아닐까?」

 

스님은 지옥고에 허덕이는 어머니를 제도한 목련존자를 생각하며 어머니를 천도하기로 결심했다. 나옹 스님은 영월암 법당 뒤 설봉산 기슭 큰 바위에 모셔진 마애 지장 보살님 앞에서 어머니 천도 기도를 시작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옥의 한 중생까지도 제도하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어머니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나옹 스님의 독경은 간정했다. 그렇게 기도하기 49일째 되던 날, 나옹 스님은 철야정진에 들어갔다. 새벽녘 아직 동이 트기전, 나옹 스님은 지장보살님의 전신에서 발하는 환한 금빛 광채를 보았다. 그것은 눈부신 자비의 방광이었다.

 

스님은 놀라서 고개를 들고 지장보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장 보살님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듯했다. 고통받은 지옥 중생 때문에 지옥 문전에서 눈물이 마를 새 없다는 지 장보살님이 어머니를 천도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았다.

 

「아, 지장보살님께서 내 기도에 감응하시어 눈물로써 현현하고 계시는구나.」 나옹 스님은 기도가 성취되어 기뻤다.

『어머니, 이제 아들에 대한 섭섭하신 마음을 거두시고 편히 극락에 드십시오.』 기도를 마친나옹 스님은 선실에 입정하여 이미 천도왕생하신 어머니를 보았다.

 

그 이후부터 영월암 지장보살님 앞에는 선망 부모의 왕생극락을 빌면서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려는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나옹 스님은 영월암에서 14안거를 성만하면서 후학을 제접하고 신도들을 교화했다. 이 마애지장 보살상은 지난 1984년 12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됐다

 

 

3. 지장도량 _ 철원 보개산 심원사

 

심원사는 지장도량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찰이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1리 72번지에 위치한 심원사는 ‘생지장보살 도량(生地藏菩薩 道場)’으로 불린다. 심원사에는 ‘지장영험비’가 있으며, 지장보살의 영험함을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사냥꾼 형제의 출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신라 성덕왕 17년(720) 의 일로 보개산 아래 마을에 산짐승을 잡아 목숨을 이어가던 이순석(李順碩) 형제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제는 사냥에 나서 보개산 너머 담터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마침 큰 멧돼지 한 마리가 눈에 띄었고, 순석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화살을 쏘았다. 마치 금란가사를 두른 듯한 누런 멧돼지는 왼쪽 앞다리에 화살을 맞고 보개산 정상인 환희봉 쪽으로 달아났다.

 

사냥꾼 형제는 핏자국을 따라 멧돼지가 멈춘 곳에 이르러 바라보니 금빛 멧돼지는 볼 수 없고 왼쪽 어깨에 화살이 꽂힌 돌로 된 지장보살상이 맑은 물이 넘쳐나는 샘물 가운데 상반신만 내놓은 채 있었다. 화살을 뽑으려 했으나 석상은 태산 같은 무게로 꿈적도 하지 않았다. 크게 놀란 형제는 깨달은 바 있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대성(大聖)이시여! 저희들을 죄에서 구해 주시려고 이 같은 신변(神變)을 나타내신 것임을 알겠나이다. 만약 내일 이 샘물 곁에 있는 돌 위에 앉아 계신다면 마땅히 출가하여 수도하겠나이다.” 다음 날 형제가 그곳으로 가 보니 과연 석상이 돌 위에 있으므로 두 사람은 바로 300여 명의 추종자를 거느리고 출가하였다.

 

샘 옆의 숲 속에 돌을 모아 대(臺)를 쌓고 항상 그 위에 앉아 정진하였으므로 그곳을 석대암(石臺庵)이라고 불렀다. 암자에는 자신들의 화살에 맞은 석상을 모셨다. 견불령(見佛嶺)과 대광리(大光里)라는 지명도 지장보살석상의 영험에서 유래한다. 고려 초의 일로 전해지는 이야기로 심원사 아래 마을에 어려서 열병을 얻어 장님과 앉은뱅이가 된 이덕기와 박춘식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심원사 대종불사를 하기 위해 마을에 내려온 화주 스님에게 “대종불사에 시주하면 부처님의 가피로 재앙이 소멸되고, 현생에서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화주가 되기로 약속했다.

 

3년여 동안 이들은 서로의 눈과 다리가 되어 시주를 하였으며, 마침내 대종불사의 타종식 날이 되었다. 첫 타종의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앉은뱅이 박춘식은 오색구름을 타고 밝은 구슬을 손에 지닌 지장보살님께서 하늘에서 심원사 쪽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앉은뱅이는 “지장보살님이 보인다”고 소리치며 장님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자 두 다리가 쭉 펴지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덕기 또한 “어디! 어디!”하고 소리치며 눈을 비비자 앞이 보였다. 그들은 산 마루 위의 오색구름에 쌓여 큰 빛을 발하고 힜는 지장보살님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절하였다. 마침내 지장보살님의 가피를 입은 것이었다.

 

그들이 지장보살님을 본 고개를 견불령, 그들이 살던 마을을 부처님의 큰 광명이 머무르는 동네라 하여 대광리라 불렀다. 애초에 심원사가 개창된 곳은 지금의 심원사에서 서남쪽으로 약20km떨어진 경기도 연천군 보개산(寶蓋山)이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원년)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영주산(靈珠山, 보개산의 옛이름)에 흥림사(興林寺, 심원사의 옛 이름)로 창건하였다.

 

그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왕사로 유명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주지로 주석하며 삼창(三創)하고 산이름을 영주산에서 보개산으로 절이름을 심원사로 고쳐 불렀다. 이후 수많은 영험이 생기며 사세가 확장되었으며 근세에까지 금강산 유점사에 딸린 말사(末寺)로 석대암, 지장암, 남암 등의 산내암자와 250칸의 당우, 1609위의 불상, 탱화, 탑이 있었던 대찰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6.25 전쟁의 참화로 본당이 천불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천불전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고 석대암 지장보살상을 봉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의 절터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부도 12기와 아미타불 입상, 사적비, 공적비 만이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부도 가운데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의승군을 이끌었던 제월당 경헌(霽月堂 敬軒) 스님의 부도는 옥개석 운룡문(雲龍紋) 조각 솜씨가 빼어나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해야 하며, 아미타불입상을 포함해 사지(寺址)에 대한 전체적인 문화재조사가 시급하다는 것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옛 절터는 군부대 안에 있어 순례하려면 미리 군부대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4. 문둥병을 고친 지장기도

 

조선 순조 때의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 석대 지장암(현재의 생 지장 도량 강원도 철원소재 의 심원사)에 문둥이가 구걸하러 떼거리로 몰려왔다. 암자의 주지 스님은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다가 10여 세 가량 보이는 어린아이가 문둥병에 걸려 다니는 것이 측은하여 문둥이 떼거리 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이에게 말했다.

 

"이보게, 저 아이는 여기 두고 가시게. 이 겨울에 저 아이가 헐벗은 채 구걸을 다니는 것은 무리인 듯 싶으니 여기 두고 갔다가 봄에 다시 데리고 가시게."

"그렇게 맡아 주신다면 저야 고맙지요. 아이가 아직 어려서 데리고 다니다 보니 우리도 귀찮을 때가 많았습니다."

 

문둥이 떼거리는 어린아이를 두고 떠났다. 이 아이의 이름은 영기(永奇)인데 부모가 일찍 돌아간 뒤 문둥병에 걸려 돌아 다녔던 것이다. 이 아이를 제대로 돌봐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 스님은 아이에게 말했다.

 

"이대로 다녀서는 사람노릇을 못하겠구나. 너의 병을 낫게 할 방법이 있는데 한번 해보겠느냐?"

"이런 몸으로 살다 죽느니 스님이 시키시는 대로 해보겠습니다."

 

주지스님은 아이의 결심이 굳음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법당에 계신 지장 보살 님께 청수를 떠놓고 절을 하면서 하루에 천 번씩 지장보살님을 부르고 병이 낫게 해 달라고 기원하거라."

 

영기는 추위도 피할 수 있고 먹을 것도 주리지 않게 주면서 기도하게 해주시는 스님이 너무 고마워 주야를 가리지 않고 법당에서 절을 하며 염불을 하였다. 이렇게 50일 가량 되었을 때였다. 그 날도 밤에 기도를 하는데 꿈에 어떤 노장스님이 나타나시더니 손자를 어루만지듯 만지시는 것이었다.

 

"불쌍한 아이구나. 아무 죄도 없는 것이 부모 탓으로 몹쓸 병에 걸려 고생이구나. 그래도 네가 과거에 불연(佛緣)이 있어 여기를 찾아 온 것이다. 잘 했다."


노장 스님은 머리끝에서 눈·코·입이 있는 얼굴 부위를 만지시고, 등과 팔, 어깨·다리 등 수족 전체를 어루만져 주시는데 그럴 때마다 영기는 몸이 아주 날아갈 듯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노장 스님은 영기를 고루 고루 어루만져 주시고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네가 병이 낫거든 중이 되거라. 훌륭한 도승이 되어야 한다."

 

영기가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런데 그 꿈을 꾼 후 영기는 하루 하루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 졌다. 결국 문둥병이 씻은 듯이 다 나았다. 전신에 퍼져 곪아있던 부스럼도 간 곳이 없고 ,맨송맨송하게 빠졌던 눈썹도 새까맣게 나고, 까마 잡 하던 살결도 아주 맑게 변했다. 자신의 모습이 전과 다르게 바뀌고 나자 영기는 자진하여 주지스님께 중이 되겠다고 지원하고는 머리를 깎았다. 이분이 바로 동방의 율사로 이름이 높은 남호(南湖)대사이다 스님이 어려서 이러한 가피를 받은 까닭에 남보다 부지런히 공부하여 경학 도 잘 배우고 글씨도 잘 익혔다. 그리하여 명필과 문장을 겸한 율사로 알려지게 되었다.

 

 

5. 아버지를 구하고 천상에 나게하다.

 

당(唐)의 무주자사의 딸인 조씨는 평소의 지장보살님께 깊이 공경심을 내어 참으로 그 신심이 간절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들은 믿음이 전혀 없었는데 이를 안타까워한 조씨는 자신이 가진 여러 패물과 옷감을 팔아서 부모님을 위하여 높이가 석자가 되는 금색 지장보살님을 조성하여 정성을 다해 공양하고 모시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바깥일로 출타하시고 어머니 혼자 계셨는데 그날밤 도둑이 들어와 문 틈을 옆보니, 금빛이 찬란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에 빈손으로 돌아가 그 이튿날 옷을 바꿔 입고 그집에 가보니 연세가 높은 노부인 한사람만 있을 뿐 지난 밤에 본 금빛옷을 입은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도둑은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하여 노부인에게 물으니, 금빛 옷을 입은 사람은 없고 시집간 딸이 금빛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있다 하였다. 도둑은 고개를 숙여 생각하기를, 이 집은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계시는 곳이라 생각하여 노부인에게 지난밤의 자신의 행동을 다 말하고는 진정으로 참회하며 돌아갔다.

 

그일이 있은 후에 아버지가 무주성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우연히 과거 자신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사람은 아버지를 보자 바로 칼을 빼어 목을 치려하였다. 엉겁결에 놀라 피할 수도 없는 가운데 순간 금빛옷을 입은 스님이 나타나 손으로 칼을 막다가 칼날이 스님의 머리에 맞아 땅에 쓰러졌다. 그러자 그 사람의 눈에는 칼을 맞은 스님이 자신의 원수인 아버지의 얼굴로 보여졌는지 피를 흘리고 쓰러진 것을 확인한 후에 황급히 가버렸다.

 

한참 후에 아버지는 꿈속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차려 좌우를 둘러봐도 쓰러진 스님은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너무도 놀랍고 신기한 일이라, 가던 길을 멈추고 시집간 딸집에 찾아가 자초자종을 말하고는 부녀가 지장보살존상께 예경하려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 지장보살님을 보니 칼을 맞은 듯한 상처와 금색이 조금 변한 것이 눈에 보였다. 순간 조씨는 지장보살님께서 화현하시어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신 것을 알고 깊이 감사하였다. 그후로 부모님 두분도 신심이 일어나 딸과 더불어 지장보살님을 믿고 예경하였다.

 

후일 아버지는 79살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돌아가신 뒤 35일이 지나 딸의 꿈에 아버지 몸에서 금빛 광명을 내며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시는 것을 보고 너무도 기쁜 나머지 묻기를, '어버님은 어디에 나셨습니까.' 하니. 아버지는 '나는 동사보처[同事補處]에 태어났다. 나뿐만 아니라 이 하늘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지장보살님의 인도를 받아 태어나느니라. 너도 지장보살님을 잘 공경하여라. 너의 어머니는 13년이 지난 후에 오게되며, 너는25년후에, 사위는 28년후에 여기로 오게 될것이다하며 홀연 사라졌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어머니와 조씨부부 모두 그 날짜에 이르자 사바세계를 떠나갔다. 그 뒤로는 무주 고을 안에 지장보살님의 형상이나 화상을 조성하여 예배 공양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또한 감응도 매우 많았다고 한다.

 

 

6. 지장보살 성상을 조성하여 어머니를 지옥고에서 구하고 천상에 나게하다.

 

당나라 진도독(陳都督)의 딸은 어머니를 잃고 밤낮으로 식음을 전폐하며 울고만 있었다. 그대로 놓아두면 조만간 꼭 죽을 것만 같아 그의 아버지는 딸을 붙들고 백가지로 위로하며, "네가 참된 효녀라면 너의 어머니를 위하여 부처님께 정성을 드리는 것이 좋겠다. 이제 집에 지장보살님의 성상을 모실터이니 네가 어머니를 위하여 기도를 드리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성상이 완성되자 그의 딸이 어버지 앞으로 나와 청하였다.

 

"아버지, 이번에 모신 지장보살님은 어머님께서 계셨던 자리에 모시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생각이 날 때마다 지장보살님을 우러러보고 지장보살 염불도 하고자 합니다."

 

진도독은 딸이 마음을 돌린 것이 기뻐서 딸의 말대로 어머니 침실에 존상을 모시게 해주었다. 그 다음부터 딸은 지장보살께 밤낮으로 예배 공양하며 염불을 쉬지 않고,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 그러는사이 딸의 마음도 안정되고 텅 비어 쓸쓸한 바람이 부는 듯했던 집안에도 차차 훈기가 도는 어느날 밤, 진도독의 효녀는 꿈속에서 한 스님을 만났다.

 

"갸륵하다, 효녀여. 너의 어머니는 생전에 지은 죄가 많아 지옥에 있느니라. 나도 옛날 너와 같은 딸이 되었을 때가 있었는데 그 때 나의 아버지는 이름이 시라선견이었고, 어머니의 이름은 열제리였다.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어 태어난 곳을 몰라 애태우다가 마침내 부처님의 자비하신 인도를 힘입어 어머니가 지옥에 빠져 한없는 고통을 받고 계시는 것을 알고, 부처님께 발원하여 기도하며 어머니로하여금 천상에 나게하였더니라. 그 때부터 내가 보리심을 발하여 일체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기로 맹세하였다. 이제 너의 효심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너의 효성이 장하니 내가 지옥에 들어가 방광설법을 하여 너의 어머니를 죄고에서 건져내어 천상에 나게 하여주리라."

 

이 말씀을 마치자 스님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더니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밝은 얼굴에 자비스런 웃음을 띠고 진도독의 딸 가까이에 오셨다. 도독의 딸이 얼핏 보니 스님의 옷자락이 불에 타 있었다.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옥에 들어갔을 때 불꽃에 탄 것이다."라고 하자 스님의 모습은 다시 사라지고 꿈이 깨었다.

 

진도독의 딸은 꿈을 깨고 나서 어머니가 천상에 태어난 것이 기뻤다. 그리고 애달픈 마음, 그리운 마음, 안타까운 마음, 괴로운 마음, 가슴 터질 듯한 슬픈 마음 그 모두가 사라지고 가슴 속이 환히 열리는 듯 하였으며 가슴에는 기쁜 마음이 잠잠히 피어올랐다.

 
출처: 나무아미타불

 


7. 염라청에서 만난 지장보살

 

당나라 옹주 운현땅의 이씨부인은 신심이 두터워 부처님의 법을 받드는데 정성을 다하는 분이었다. 항상 재일(齋日)을 지키고 수행이 남달리 뛰어나 집에 나무로 조성한 1자 6치 가량되는 지장보살을 모시고부터 이상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씨부인에게는 쉰 살 되는 한 여종이 있었다. 그는 소견이 삿되고 불법을 믿지 않으므로 자기 주인이 불법 믿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는 이씨가 외출한 틈을 타서 지장보살 존상을 앞산 아래 풀숲에 버리고 돌아왔다. 이씨가 집에 돌아와 보니 보살상이 보이지 않으므로 걱정만 하던차에 누가 부르는 듯한 느낌이 있어 문밖에 나가보니 앞산 밑 풀 숲에서 이상한 광명이 비치고 있었다. 느낀 바 있어 광명이 나는 풀 숲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생명같이 모시던 지장보살 존상은 풀 숲에 누워 있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빙긋이 웃어보였다.

 

이씨 부인은 눈물과 웃음과 울음이 섞인 감동으로 지장보살을 다시 모셔다가 정성껏 봉안하고 예배하고 염불하면서도 그것이 여종의 소행인 줄은 몰랐다. 그 때 여종이 갑자기 쓰러져 인사불성이 된 것을 발견하고 즉시에 온갖 방법으로 구환하니 잠시후 깨어나 통곡하며 말하였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제가 조금 전에 누군가에 잡혀 정신없이 끌려갔는데 당도한 곳이 명부였습니다. 거기에서는 말탄 관리들이 서첩을 읽는데 ‘너는 성상을 모욕하여 대죄를 범하였으니 결박지어 대왕 앞에 심판을 받게 하고 마땅히 지옥에 잡아 넣어 큰 고통을 받게 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때 한 스님이 그곳에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우리 신도 집에서 일하는 종이니 비록 나의 형상을 보기 싫다고 내다 버리기는 하였으나 나는 그사람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왕은 이 사람을 불쌍히 보아 도로 살려주기 바랍니다." 하셨습니다.

 

염라대왕은 곧 저를 방면하여주시니 저는 그 말을 듣고 곧 저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저는 부처님을 좋아하지 아니했고 지장보살을 내다버린 것을 뼈아프게 참회하면서 그 자리에 꿇어 앉아 '나무지장보살' 하고 큰 소리로 부르며 뉘우쳤습니다. 그랬더니 그곳 명부에 있던 죄인들에게 채워졌던 고랑쇠가 지장보살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데까지는 전부 벗겨졌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저의 손을 이끌어 염라청에서 막 나오면서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읍니다. 마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여종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이씨부인 앞에 엎드려 일어날 줄 몰랐다. 이씨부인은 그를 달래어 지장보살 앞에 예경을 드리며 참회하게 하였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그 고을 사람들은 불법의 신비한 영험에 놀랐고 크게 신심을 일으켜 부처님 법을 받들며 지장보살 신앙이 높아졌다. 이씨 부인과 여종도 신앙이 몇배나 더 깊어졌다.

 


8. 길가에서 주운 지장보살의 영험

 

당나라 간주(簡州) 금수현(金水縣)에 살던 등시랑(鄧侍郞)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사람은 본래부터 부처님을 믿어왔다. 그는 어느날 길가에서 지팡이 머리 같은 것을 주웠는데 거기에는 스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등시랑은 그것을 주어서 집에 가지고 와 벽에 꼿아 두고, 2~3년이 지나서 등시랑은 병이 들어 죽었다. 염라청에 끌려간 그에게 염라대왕은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았는데 그때에 한 스님이 홀연히 나타나니, 형용이 매우 누추했으나, 대왕은 벌떡 일어나 자리에서 내려와 공경스러이 합장하며 그 앞에 꿇어앉아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더라.

 

스님이 답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신도이니, 꼭 죄를 사하여 주기를 바라오." 하시는 것이었다.

대왕은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죄업이 이미 결정되었고, 또한 수명과 식록까지 모두 다하였으므로 죄를 사해 주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했다.

 

스님이 다시 말하시기를 " 내가 옛적에 삼십삼천 선법당(善法堂)에 있을 때, 부처님께서 나에게 부촉하시기를 <죄업이 정해진 모든 유정 중생들도 구제하라>고 하셨으며, 내가 죄업 중생들을 제도코자 하는 것은 오늘 처음 시작하는 일도 아니니 이 사람은 그다지 중한 죄를 범한 것도 없는데 어찌 구제 하지 못한단 말이오?" 하셨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나더니, 공손스러운 말로 여쭙기를 " 대사님 원력이 크고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으시니 마치 금강산과 같습니다. 대사님의 뜻이 그러하시니 이 사람을 곧 인간으로 내보내겠습니다." 하더라.

 

이 말을 들은 스님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나의 손목을 잡고 오던 길로 다시 인도해 주셨다. 우리 마을 가까이 와서 헤어질 때 스님께 법호를 여쭈니,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지장보살이니라. 네가 인간에 있을 때에 길가에서 나의 형상을 보고 잘 알지 못하면서도 소중하게 주어다 너의 집 벽에 꽂아둔 일이 있지 않느냐? 그것은 아이들이 장난으로 지팡이 머리에 내 얼굴만 새겨두고 밖의 나머지는 새기지 못한 것이니라. 그래서 나의 형상이 이렇게 추하니라. 네가 나를 소중히 한 마음씨가 갸륵하다."

 

이 말을 마치다 문득 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더라. 그리고 그는 이제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시랑이 깨어난 뒤에 생각이 나서 자기 집 벽에 꽂아둔 지팡이를 다시 보니, 과연 그 말씀과 같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팡이 가운데가 갈라졌으므로 전단향목을 구하여 다시 5촌 가량 크기를 보충하여 조성하였다.

 

시랑이 죽을 곳에서 살려준 지장보살의 은공을 생각하고 정성을 다하여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 뒤로부터는 지장보살 형상이 때때로 광명을 놓아 집안을 밝게 비쳤다. 시랑은 크게 환희심이 나서 이번에는 아주 새로이 지장보살을 크게 조성해 모시고 자기 집을 절로 만들었으며, 절 이름을 지장대(地藏臺)라 하고 작은 지팡이 등상까지 함께 모시고 예배 공양하며 염불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이 소문은 원근에 곧 퍼져서 예배 공양하러 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지장대는 마침내 큰 절이 되었다.

 


9. 지옥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다

 

당(唐)의 종산현에 개선사(開善寺)란 절에 오래된 지장보살존상이 계셨는데 아무도 누가 조성한지 몰랐다. 하지만 보살님 주변에는 항상 은은한 빛이 사방에 비치는 듯 하여 예경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였는데, 양주 관찰사인 '등종'이 나이 60살이 되어 병으로 죽었는데 어쩐지 몸에 온기가 식질 않아 그대로 두었는데 하루가 지나서 다시 일어나 정신을 차려 한차례 울더니, 곧바로 개선사의 위치를 묻고는 자손들과 함께 가자고 하였다. 절에 도착한 등종은 스님께 묻기를, 이절에 지장보살존상을 찾고자 한다하였다. 스님이 인도하여 그곳에 당도하니. 등종이 예배 공양하며 스님께 부탁하여 자신의 집에 모셔가길 원하니,스님이 그 연유를 물었다.

 

등종이 대답하기를, 제가 죽음에 임박하여 저승사자를 따라 염라대왕 앞에 끌려 갔는데 왕이 말하기를, '너는 죽을 때가 되지 않았으니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받들고 널리 이웃에 전하여라. 하지만 이왕 지옥에 왔으니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보고가라 하였다.

 

왕이 한사람을 불러 인도하여 그곳을 나가 동북쪽으로 조금나가니 큰철로 된 성이 있고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습니다. 내가보니. 잠깐 동안에 불이 크게 타오르는데 여러 불기둥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스님 한분이 검게 타오르는 불 가운데서 사람들을 교화하니 순간 타던 불꽃이 일시에 사라지며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같았습니다. 다시 다른 철로 된 여러성에 나아가 살펴보니.열여덟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루 말로 다할수 없었습니다. 그중에서 다시 스님이 보이시는데 다른성과 같이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계셨습니다.

 

거의 다보고 나오는데 스님께서 같이 나오시며 "나를 알겠느냐?"하시기에 저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종산 땅에 있는 개선사 지장보살이다. 예전 지장법사의 제자중에 智滿지만이란 스님이 있었는데 삼악도 가운데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하기 위하여 나의 모습을 조성하였으므로 내가 그원을 따라서 열여덟 지옥에서 수많은 작은 지옥까지 다니면서 교화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전생에 착한 업을 지은 사람은 한번 마음을 내면 바로 지옥의 고통을 벗어나고 힘이 약한 사람은 단지 고통을 벗어날 인연만 심고 착한 업도 없고 삿된 견해가 깊은 사람은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여 끝내 지옥의 고통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착한 업을 지었으나 힘이 약한 사람은 교화하기 쉽지만 악한 세계에 들어가면 이는 마치 목석과같다. 이와같이 깨닫지못한 사람은 죄업이 다하여 스스로 벗어날 때만 기다리고 과거에 착한 업이 움직일 때면 참회가 되고 후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너는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법력을 받들어 지옥의 고통을 면해주니 인간세상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뜻을 전하여라."하시기에 눈을 들어 스님의 모습을 보니 몸의 높이가 삼척이고 이마위에서 광명이 나오는데 무엇이라 말할 수없을만큼 자비롭고 위엄이 있었습니다.

 

또 스님께서 저에게 두 게송을 말씀하셨는데, '인간세계에 살면서 도를 닦을 수 있으니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도 신심을 낸다면 끝내 얻을 것이다. 만일 악한 세계에 들어가 죄업이 마음을 가리게 되어 선악마저 분별하지 못한다면 구제받기 참으로 어렵도다. 늙고 쇠약한 사람들이 길을 가고자 할때 팔다리를 부축하여 나아갈 수 있으나 병이 들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될수 없듯이. ..

 

 

10. 법문을 받들고 다시 살아나다.


당나라 종산(種山) 개선사(開善寺)의 지장보살 존상에 얽힌 실화이다. 이 지장보살은 높이는 三척인데 그 둘레에서는 항상 큰 광명이 났으며 배광(背光)이 4척 5촌이나 뻗었다고 한다. 그런데 개선사가 있던 양주(揚州)의 도독 등종(鄧宗)이 나이 61세 되던 해, 가벼운 병으로 눕더니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의 가족들은 너무 급히 당한 일이고, 또한 가슴이 따뜻하므로 염하지 않고 놓아두었다. 그랬더니, 하루를 지낸 다음날 밤중에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말없이 슬피 통곡하더니 이윽고 자손들에게 입을 열었다.

 

" 나를 개선사에 데려다 다오" 할 뿐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개선사에 도착한 등도독은 말없이 지장보살 앞에 나아가더니, 한번 쳐다보고는 그만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울고 나서 또한 여러번을 우러러보면, 예경하더니, 이윽고 주위 사람에게 말문을 열었다.

 

" 내가 죽을 때 四품 벼슬로 보이는 관인이 와서 나를 끌고 가더니, 마침내 당도한 곳이 염라대왕 앞이었습니다. 대왕은 나를 보시더니 말씀하시기를 <너는 아직 죽을 때가 멀었으니 다시 인간에 돌아가거라 그리고 부처님 법을 받드는 것으로 너의 집 사업을 삼도록 하여라. 이곳 지옥이라는 데는 세상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인데 세상 사람들로는 전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네가 지옥을 한 번 구경하고 가겠느냐? 네가 돌아가서 지옥이라는 곳이 과연 무섭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관인을 따라 동북방 쪽으로 3~6리 가량이나 가니, 거기에는 쇠로 만들어진 큰 성이 있는데 쇠문이 꽉 닫혀 있었고, 성 안에 들어서니 맹렬한 불길이 솟아오를고 쇠 녹은 물이 강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를 자세히 살펴보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고초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쪽을 본즉, 맹렬한 불길을 헤치며 고초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교화하고 계시는 스님이 보였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스님이 가시는 곳은 금방 불꽃이 멎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앞으로 계속 나아가면서 지옥 구경을 하였는데 한 성에 이르니, 그 가운데는 또 무서운 지옥이 있어서 十八이나 되는 큰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양은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도 또 앞서의 스님이 보였는데 불길을 멎게 하고, 죄인을 교화하는 것은 앞서와 같았습니다. 내가 차마 볼 수 없는 지옥의 가지가지 광경을 낱낱이 구경하고 돌아올 때에 그 스님도 지옥에서 나오시며 나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네가 나를 알겠느냐?> 저는 사실대로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개선사에 있는 지장보살이니라. 옛날 智滿법사가 三도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해내기 위하여 나의 형상을 만들어 모셨으므로 내가 지만 스님의 청을 받아들여 매일 한 번씩 지옥에 까지 다니면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중에서 보면 지옥 속에서도 혹 선근이 남아 있어 착한 마음이 강한 자는 내말 한 번에 곧 발심하여 지옥고를 벗어나며, 사견만 많은 자는 고통을 벗어나기 어려우니라. 그 중 선근이 미약한 자는 오히려 교화하기 쉬우나, 한 번 지옥에 들어가기만 하면 좀체로 구제하기 매우 힘드느니라. 그런데도 세간에서 악한 업력만 기른 사람은 자기 허물을 깨달을 줄 모르고, 오직 고통받는 일과 빠져나올 것만 기다리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세상에 살면서 선근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허물을 뉘우치는 마음을 낼 것이니, 너는 부처님의 법력을 받아 세상 사람들이 지옥고를 받지 않도록 일러주고 힘쓰도록 하라. 어서 인간에 나가 여러 사람들에게 이 뜻을 전하여라.>

 

이 말씀을 듣고 고개를 들어 스님을 처다보니, 이제까지의 스님의 몸은 어느덧 적어져 키는 三척 정도로 보이고 이마에서 환하게 광명이 났으며 눈이 유난히 빛났습니다. 내가 공손히 예배를 드리고 돌아서려 하니, 스님께서는 이런 글귀를 일러주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도 도 닦을 수 있나니 모든 선근 끊인 자도 발심하면 다 되네. 악도에 떨어져서 죄업이 익어지면 깨달을 맘 못내니 구원하기 어려워라. 노쇠한 사람들이 길을 가고자 할 때 팔다리를 부축하면 나아갈 수 있어도 누워서 부동하면 어찌 할 수 없나니 중생들이 지은 바 정업도 그같니라.

 

스님께서는 이 게송을 말씀하시고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그 스님이 일러주신 말씀을 잊을까봐 그것만을 생각하느라고 아무에게도 말못하고, 지금까지 와서 이제 여기 지장보살의 존상을 우러러 뵈오니, 지옥에서 보던 바와 똑같고 또한 그때에 말씀하신 것이 생생히 되살아납니다."

 

이 말을 들은 개선사 스님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던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고, 또한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몇 번이고 지장보살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고서 신심이 두텁고 솜씨좋은 화공을 청하여 앞서부터 모셔왔던 지장보살 탱화를 본떠서 다시 그리게 하고 앞서의 탱화와 함께 그대로 모셨다.

 

 

11. 존상의 썩은 나무와 호랑이난

 

당나라 화주(華州) 혜일사(慧日寺) 법상(法尙)스님의 출가에 관계된 이야기이다.

 

스님이 출가하기는 삼십 칠세 때인데 그때까지는 사냥하는 것을 즐기며 지내왔다. 여느 때와 같이 사냥 길에 나서 산을 누비고 다니다가 숲 속에서 간간이 어떤 빛이 보여 그곳에 가보니 거기에는 길이가 겨우 한자 남짓한 썩은 나무토막만이 있었다. 어쩐지 기이한 생각이 들어 나무토막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호랑이를 만나 의식을 잃고 말았는데 그의 꿈같은 의식 속에는 홀연히 한 스님이 나타나 자기를 가리고 호랑이에 맞서 싸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호랑이에게 호령을 하니 호랑이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나를 이렇게 구해 주시는 당신은 누구시오?"
"나는 지장보살인데 네가 주워 둔 숲속의 썩은 나무가 곧 나의 몸이니라. 옛날에 너의 증조부가 이곳에 절을 짖고 부처님을 조성하여 모셨었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절은 퇴락하고 다 없어졌으며, 그 당시의 나의 모양도 썩은 오직 나무 속만 남아 있었더니, 네가 그 후손으로 나의 광명을 보게 되었으므로 그 인연으로 내가 너를 구해 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법상은 깨어났다. 그의 곁에는 그가 탔던 말이 울고 서 있었으며 호랑이는 간데 없었다. 그리고 다시 살펴보니, 그곳은 바로 자기가 썩은 나무를 주웠던 바로 그곳이었다. 호랑이에게 쫓기어 피하며 돌아다니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게 그 썩은 나무가 있던 곳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얼마를 지나 법상은 큰 결심을 하고 빛이 나던 곳에 절을 지어, 자기가 주운 썩은 나무에 향을 썩은 진흙을 발라 지장보살존상을 조성하여 모셨다. 그리고 절 이름을 혜일정사(慧日精舍)라 하고 증조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출가하여 열심히 수도 정진하였다. 법상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수행하다가 78세가 되는 이월 이십 사일에 입적하였는데 그때 곁에 있던 도반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좀 전에 지장보살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는 자씨여래(慈氏如來 ; 미륵불)의 삼회(三回) 설법 중에 제 이회(二回)에서 도를 깨칠 사람이다. 이제 죽게 되면 곧 도리천에 나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천상에 나면 오욕락의 즐거움이 비할 데 없다고 하오니, 천상에서 쾌락을 받다 가는 보리도(菩提道)를 잊기 쉽다고 하옵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 뵈올 날이 멀어지지 않겠습니까?'고 하였더니 지장보살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면 너희 소원대로 하여라. 네가 만약 극락정토에 가서 나고자 하거든, 마땅히 아미타불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전심전력 생각하라. 그러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곧 아미타불을 전심전력으로 생각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였더니, "이제 원을 이루어 정토 세계로 떠납니다."라고 한 다음 합장하고 앉아서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히 왕생하였다.


 

12. 상투속에 모신 지장보살 방광

 

당나라에 별가(別駕) 벼슬을 한 건갈(健渴)에 대한 이야기다.

건갈은 신심이 돈독하였고 그의 일상수행은 매우 청정하였다. 항상 지장보살을 받들어 모시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단향나무를 구하여 높이가 세 치되는 지장보살 존상을 조성하여 상투머리 속에 정중히 감추어 모셨다. 그러니 다닐 때나 머무를 때나 눕거나 앉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나 생각에서 잊지 않았다. 가히 생각생각에 지장보살을 잊지 않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장흥년(長興 서기930년)에 건갈은 새로운 관명을 띠고 부임하는 중이었다. 어느 후미진 냇가에 다다르자 이상한 느낌이 들어 건갈은 더욱 일심으로 지장보살을 생각하면서 다리를 건너 산 밑에 이르렀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그를 부르며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일찍이 그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건갈은 <이제 올 것이 왔구나>생각을 하였더니, 그 사나이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민망하리만치 정중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번에 당신이 이 길로 부임하는 것을 알고서 미리 다리 밑에 숨어 있었소. 멀리서 당신 혼자서 말타고 오는 것을 보았는데 다리 가까이 와서는 갑짜기 스님 한 분이 지나가실 뿐, 당신도 말도 보이지가 않았소. 이상한 일이다 생각하고 한참 지켜보았지만, 역시 당신은 보이지 않고 스님 한 분만이 다리를 건너가셨는데 다시 한참 있다 보니, 당신이 여전히 말을 타고 가는 것이 아니겠소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 하잖은 일 가지고 당신과 원한을 맺고 원수를 갚으려 하였으니, 이것은 잘못되었다 생각하오. 당신은 분명히 부처님이 도우시는 사람같소. 이제 내가 과거 일을 다 풀어버리니 당신도 마음을 놓으시오."

 

하는 것이었다. 건갈이 죽은 것은 청태(淸泰) 2년(서기935년), 그의 나이 78세 때인데 임종하면서 그는 단정히 앉아 합장하여 염불하고 있었다. 그의 상투에서는 유난히 밝은 광명이 퍼져 나와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그는 고요 속에 잠겨 들어갔다.

 
출처: 나무아미타불

 


19. 천일 기도에 나타난 지장보살님

 

송[宋]의 공관사[空觀寺]에 사는 정법 스님과 승준 스님은 다 같이 지장보살님께 귀명하여 매월 지장 재일 때마다 지장 보살님의 형상을 베껴 그리면서 발원하기를 보살님께서 응신[應身]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천일이 다 되어 하루는 정진하는데, 한 순간 누군가 말하기를, 젊은 스님이 절의 처마 밑에서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을 듣고 느낀 바가 있어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하고 공경히 맞으려 나갔는데 한두 마다 말을 하고는 밖을 나가기에 얼른 따라나서니 벌써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정법 스님이 홀로 앉아 스님, 스님하고 외치니,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여 흔들어 깨워 물으니, 자초지종을 말하여 사람들이, "그 스님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묘한 원은 그만하면 되었는데 의기[意氣]는 어찌하여 더딘가,"하였다고 한다.

 

모두들 듣고 나서 말하기를, "너는 이미 지장 보살님을 친견하였다. 그러나 네가 생각하는 것은 실천할 생각을 하지 않으므로 보살이 나타나 의기가 짧다고 하신 것이다."하니. 정법 스님은 " 이미 성인께서 나타나셨으니 마땅히 보리심을 일으켜 기쁜 마음으로 깨달음을 구하겠다."하며 스스로 다짐을 했는데, 후일 꿈에 다시 지장 보살님께서 나타나 이르시기를, "전에 그대가 만난 지장 보살이다. 네가 나의 응화신을 보고싶어하지만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너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너는 나의 형상을 많이 그렸기에 영원히 삼악도에 들어가지 않으며 육신을 벗어나면 도리천에 태어나 미륵 부처님께서 사바 세계에 내려 오실때 반드시 성불의 예언을 받을 것이다. 지장 보살을 염하는 너의 마음을 따르는 것은 그림자가 형상을 의지하는 것과 같다." 하시었다.

 

정법 스님은 꿈에 깨어난 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더니, 자신의 바루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지장 보살님의 존상을 조성하였으며, 항상 지장 보살님의 형상을 그려서 공양을 했는데 여러 묘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20.지장 보살님의 이름을 불러 악한 귀신을 내쫓다.

 

당[唐]의 이신사[李信思]는 노수 지방의 사람이었는데, 친척이 삼십 여명이나 되었다.

어느 날 이상하게 생긴 그림자 같은 것이 나타나더니 가족 가운데 어떤 사람은 병이 들어 헛소리 하며 또 귀신같은 환상이 보이고 다른 사람은 심지어 피를 토하거나 기절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매우 놀란 이거사는 근처 사찰에 계시는 스님께 말씀드려 보았더니, 스님께서 오랫동안 생각하시다가 말씀하시기를,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마갈제국 비부라산 아래에 사는 교제 장자 집안에도 이와같은 악한 귀신이 나타나 그 집에 모든 권속이 쓰러지고 병이 들며 기절하는 사태가 열흘이 지나도록 끊이질 않아 지장 보살님을 청하여 다라니로써 악한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자를 구했습니다. 이거사님도 이와 같은 법력에 의지하여 지장 보살님께 깊이 신심을 내어 귀의한 다음 일심으로 지장 보살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하였다. 이거사는 크게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여 지장 보살존상을 직접 그려 집에 모시며 예경을 다하였는데 그후로는 노수 지방에 그런 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21.지장 보살님 가호로 사악한 귀신도 집 앞을 피해가다.

 

당[唐]의 노주자사 강거통은 평소에 신심이 매우 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인연으로 여러 해 동안 지장 보살님을 받들어 모시다가 다시 발심하여 한지를 구하여 지장 보살님의 존상을 그리려는데 여러 색을 칠하기도 전에 환한 빛이 나타나는 듯하여 믿음이 한층 더 했다.

 

어느날 꿈에 말을 탄 두 사람이 자신을 쫓아 오자 피할 수 없어 두려운 마음으로 서 있는데, 그들이 말에 내려 탄식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잘못 판단하였다. 비록 염라 왕의 명령일지라도 지장보살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어찌 할 수 없다."하며 가 버렸다.

 

꿈을 깬 후 매우 기쁜 마음으로 더욱 정성을 다하여 지장보살님을 받들어 모셨는데 마침 나라에 전염병과 여러 가지 귀신병이 나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꿈속에 푸른 옷을 입은 귀신이 강거사의 집 앞을 지나면서 "이 집은 지장보살의 집이다. 모두들 반드시 문 안에 들어가서는 안될 것이다."하였다. 그런 후에 모두가 무사하였다.

 

세월이 흘러 강거사는 일이 있어 먼 길을 가다가 겨울이라 눈 속에 길을 잃어버렸는데 불안한 마음에 지장보살을 간절하게 불렀는데 어디선가 앵무새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늙어서는 병이 들었는데 정성으로 지장 기도를 한 후에 병이 다 나았다. 꿈에 한 스님이 와서 이르기를, "너는 푸른 새를 죽인 과보로 지옥에 가야하지만 지장보살님의 가호로 그 업을 면하였다. 이후로 점차 병이 나아서 며칠후 정토에 날 것이다."하였다.

 

이 말을 듣고 꿈에서 일어난 강거사는 지장 보살님께 깊은 감사의 예경을 올렸는데 병은 이미 다 나았고 스님께서 예언한대로 이틀이 지나자 강거사는 지장 보살님의 명호[正念]를 외는 가운데 이 세상을 떠났다.


 

22. 지장보살님을 단 한번 생각해도 지옥을 벗어나다.

 

송[宋]의 최이계는 장안의 관찰사였는데 한번은 죽은 후 이틀만에 소생하여 주변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었을 때 어떤 사람들이 나의 양 겨드랑이를 잡고 가는데 도중에 수많은 병사들이 흰 말을 모는 행렬이 보았으며 마침내 동북쪽에 큰 성에 이르러 여러 기와집에 당도하였는데 그들의 모습은 모두가 검은 관을 쓴 사람으로서 족히 삼십 여명이 되었다.

 

모두가 염라왕이었으며 마침내 앉아 있는 염라왕 앞에 나가니, 나에게 묻기를, "너는 살아 생전에 어떤 분을 받들어 모셨는가?"하여 "저는 지장 보살님을 모셨으며 모든 스님들께 공양하였습니다."하니, 왕은 이르기를, "허허 그래 이미 대성인을 모셨으니, 이는 천상의 복이다."하니,

 

그곳이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은 수명이 다하지 않았습니까?"하여 염라왕이 한 권의 책을 읽고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지장 보살님의 은혜로 명을 다하지 않았소," 하더니, 사자를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부처님을 믿는 사람의 수명만 잡아 오는가,?"하고 흰 말을 탄 사람을 책망하고는 벌을 주었는데, 저승에서 며칠이 지나자 염라왕이 나에게 묻기를, " 그대는 세상에 돌아가고 싶은가,?" 하기에 내가 그렇다고 하자.

 

왕이 말 한 필과 사자 두 사람을 시켜서 동북쪽을 가니 사방 수 십리에 큰 철로 된 집이 하나 있는데 쇠끊는 물과 불꽃이 가득 차있고 그 다음 철로 만든 집에는 이계의 조부모들의 모습이 모두 있는 것이 보였다. 모습을 보니, 목에다 칼을 걸고 있기도 하고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고 몸에 쇠줄이 묶여 있으면서 불이 활활 타고 있었다.

 

손자인 이계를 보자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너는 반드시 우리 모두를 구해야 할 것이다."하여 조상님들께 지장 보살님의 명호를 생각하라고 말씀드리며 스스로 다짐을 하고 지장 보살님을 마음속 깊이 염하여 또 한 성에 나아가니, 쇠로 만든 평상에 어디선가 안면이 익은 스님이 앉아 있는데 몸은 숯과 같았고 맹렬한 불꽃이 붙고 있어서 내가 묻기를, "스님은 청정한 수행을 하셨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하니 스님께서 이르시기를, "저는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수행하였으며 마음과 실행아 서로 맞지 않아 침구와 평상이 변하여 고통을 주는 기구가 되었고 의복과 음식은 변하여 쇠옷과 끊는 구리물이 되었습니다. 불자님은 반드시 저희들을 구해주십시요"하였다.

 

나는 스님께 말하기를, "스님은 꼭 지장 보살님을 생각하십시요,?"하고 나왔다. 그뒤로 수십 개의 성을 보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받고 있었는데 대체로 세상에서 보던 사람들이었다. 다시 적사 지옥에 이르니, "칼로 만든 나무와 구리로 된 기둥이 백천 개였는데 죄인들이 그 위에 있는데 모두 이계를 보면서,"우리를 구해주십시요"하고 애원을 하니, 나는 "오직 지장 보살님을 생각하십시요,"하였다.

 

이와같이 황사. 백사. 초사지옥 등의 일곱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오는 길에 어떤 푸른 집이 있는데 길가에 보배 나무와 온갖 과일이 아름답게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물으니, 저승 사자는 "지장 보살님을 받들어 모시거나 형상을 그린 족자나 등신불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은 정토 세계나 도리천에 태어나서 원하는 것을 성취하게 되고 그림이나 등상을 믿지 않고 받들어 모신 사람은 이곳에 머문다"하였다.

 

다시 앞을 나아가니, 큰 성안에 보배로 만들어진 방이 있는데 그 안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남녀들이 행복한 가운데 춤을 추며 그 가운데 이계의 조부모와 육친들이 보여서 너무나 기뻐하여 물으니, 그들이 말하기를, "전에는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었으나 그대가 지장 보살님을 생각하라 말 한마디로 바로 천상에 태어났다,"하였다. 내가 여기는 어디냐고 물으니, 이곳은 복을 받는 곳인데 수명도 길고 모든 괴로움이 멀리 떠난 곳으로 미륵 부처님의 삼회 설법을 만나면 모든 고통이 다해진다."하였다.

 

내가 묻기를, "그렇게 되면 어떤 땅에 태어나 만나게 됩니까?"하니. "옛날 지장 보살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부처님의 부탁을 받고 반드시 모든 사람들을 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원을 세웠고 미륵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기 까지 오십 육억 칠천만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만약 정토 세계와 제 사천에 태어 나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그 복이 적은 사람은 모두 이 복받는 집에 태어나 다시 악한 세계로 돌아가지 않고 미륵 부처님만을 친견하길 기다릴 뿐이로다."하였다. 그러고 난후 다시 염라왕 앞에 돌아와 사자를 돌려 보내고 난후 이계는 세상에 살아 나왔다고 한다.

 

 

23.

 

조계형(趙桂馨)은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 사람인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독경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부부가 다같이 50살이 되었어도 자손이라고는 아들 존금(存金)뿐 이었다. 존금이 서당에 들어가 글을 배우던 기미년 가을에 이질병이 들어 손 쓸사이도 없이 수일 만에 죽어버렸다. 계형부부는 넋을 잃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약도 변변히 써보지도 못한 채 졸지에 죽어버렸으니 세상에 살 생각이 없어졌다. 너무도 원통하여 부부는 아주 몸져 누웠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꿈에서 지장보살을 만났다. 지장보살은 그에게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너무 상심마라. 너의 아들은 명(命)이 다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네가 너무나 애통해하기에 혼신을 잠시 붙들어두었다. 지금 어떤 사람 집에 죽은 사람이 있어 혼신이 그 곳에 바꾸어 있게 하였으니 금년 겨울에 구화산(九華山)으로 가보아라.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다."

꿈을 깬 다음 놀랍기도하고 기쁘기도하고 의심도 났다. 꿈을 꼭 믿을 수는 없어도 평소에 부처님을 공경하던 계향인지라 불보살의 위신력이라면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해 12월 계형부부는 함께 구화산에 참배하였다. 막 법당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막 존금이만한 처음보는 아이가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부부를 보더니 큰소리로 "아버지! 어머니!"하고 부르며 달려와 안겼다. 부부는 이상하여 아이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며 집은 어디냐?"

 

아이의 집은 그 곳에서 멀지않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며 또렷또렷한 말씨가 죽은 존금과 똑같았다. 얼굴과 모양은 달랐어도 분명 그의 혼신은 존금인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계형은 눈물을 흘려가며 반가와하면서 지장보살존상앞에 무수히 절을 올렸다. 꿈에서 들은 바와 같이 지장보살이 신통력으로 자기들 부부를 도와 주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계형부부는 자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를 낳은 부모들이 아이를 빼앗아갔다고 관가에 송사하기에 이르렀다.

 

그 아이는 관가에서 수령에게 말하기를 "나는 조존금입니다. 나의 혼신이 조씨인이상 조씨 아버지와 살겠습 니다."하고 육신의 본 집으로 돌아가기를 마다하였다. 그러나, 육신의 부모도 매한가지였다. 혼신이야 알 바아니고 분명한 자기자식이니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존금은 두 집을 왔다갔다하며 두 집의 자식노릇을 하기로 하였다. 그 후 계형은 슬픔을 잊고 더욱 독경에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고, 부처님법을 찬양하는 글과 불법의 오묘한 이치를 책으로 만들어 널리폈다.

 

출처: 지장보살영험록(불광출판부)


 

24. 지장신앙으로 귀먹은 병을 고치다

 

운철조는 오래 전부터 귀를 앓더니 마침내 귀가 먹어 버렸다. 그를 생각하는 고마운 분이 여러 차례 염불을 권하고 편지까지 써 보냈지만 듣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 벗이 지장경을 보내면서 열심으로 읽어보라고 권하였더니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여편을 읽고 나서 깊이 지장보살을 신앙하게 되어 독경과 염불을 열심히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에 경쇠 치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고 또 염불소리도 분명하게 들려왔다.

 

그는 10년 동안 소리를 못 듣고 있다가 소리를 들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의심도 들었다. 그날부터 귀가 열려서 평상시 같이 잘 들렸는데 새벽 4시에 경쇠소리와 염불소리는 매일 들려왔다. 어떤 때는 저녁에도 역력하게 경쇠소리와 염불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수십귀의 게송도 들려왔는데 그 소리는 참으로 신기하고 묘하여 평생에 듣지 못했던 소리였다.

 

그 후 하루는 게를 먹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염불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른 소리는 다 들리는데 새벽 염불소리가 들리지 않으므로 자기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뉘우쳤다.

 

「종신토록 게를 다시 안먹겠습니다.」 라고 맹세하고 「나무지장왕보살」 하고 염불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새벽 염불소리는 또 들려왔다. 그는 너무나 신묘한 기쁨과 놀라움을 억제하지 못하고 돈 2백원(元)을 내어 지장경을 출판하여 널리 법보시하였다.

 

<지장보살영험설화> 연인사 도창스님

 

출처: 나무아미타불


 

25. 전란에서 기도하고 천안통을 얻다

 

이것은 신미년 전군(입주군)이 들어왔을 매에 당했던 일이다. 당시 진금선(陳琴禪)은 부역에 동원 되었고 그의 여동생 정(情)도 또한 군을 따라갔고 이웃의 많은 사람들이 징발되어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사이에 여러 집이 불안 초조하여 견딜 수가 없어서 마침내덕이 있어 존경받는 진금선에게 물어왔다. 그러나 그도 알 길이 없었다.

 

그는 한 가지부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런 때에 지장보살께 기도하면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일심으로 기도하면 지장보살의 위신력으로 모두가 무사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다들 모여 문을 달고 3일간 정성껏 기도하였다. 그리고 지장보살 명호도 수천, 수 만 번 불러보았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시원한 건 없었다. 진금선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아직 우리의 성의가 부족한 것이다 하고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다들 모여 앉아 지장보살을 묵념하시오. 」 하였다.

 

그때 진금선도 함께 지장보살을 묵념하고 있는데 향이 반쯤 탔을 때 비몽사몽간에 한 경계가 벌어졌다. 한 산천이 보이고 그 사이를 통한 작은 길이 보이며 자기 여동생이 뭐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있더니 한 스님이 다녀갔는데 앞서 나타났던 산천이 또 보였다. 작은 길을 거슬러 깊은 산으로 올라가니 길가에 오두막집이 하나 있었고, 그 아래에 송장이 하나 보인다. 깜짝 놀라니 대중은 여전히 염불하고 있었다.

 

그 후 며칠 안 되어 잡혀갔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진금선의 여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적군에게 잡혀 죽은 것이었다. 기도 중에 나타났던 경계가 분명히 금선의 여동생이 죽은 것을 보여 주었으며 또한 기도공덕으로 스님 모양을 한 지장보살이 나타나시어 모든 사람들을 무사히 돌아오게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장보살 본원경에 이르기를 「사람이 능히 일심으로 지장보살을 보고 그 이름을 만번만 부르면 마땅히 보살이 큰 위신력의 몸을 나타내어 그 사람의 권속들이 난 곳을 일러 주고 혹은 꿈에 보살이 친히 그 사람을 데리고 가 그의 권속이 태어난 세계를 보여준다. 」 하였으니 과연 진실한 말씀이다.


<지장보살영험설화> 연인사 도창스님


 

26. 지장경을 읽고 무사히 산액을 넘기다

 

다음의 글은 상입기(湘入記)에 기록된 것을 요약한 것이다. 경오년 봄에 나의 내자 건강에 이상이 있는 듯하였다. 순산 달이 석 달 가까이 남았는데도 태동이 없는 것이다. 배가 불러 근근히 걸음을 걷는데 걱정이 대단하였다. 그때 생각난 것이 10년 전에 어떤 스님이 하던 말이다.

 

「당신 나이 36세에는 산액(産厄)이 있으니 특별히 주의하시오.」

 

하더니만 그것이 들어맞는가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던 중에 지장보살 본원경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내외가 함께 지장보살을 생각하며 지장보살 본원경을 정성껏 독송하고 지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새벽에 순산을 하였는데 태신은 썩었고 그나마도 거꾸로 나왔다. 이러고도 무사했으니 기이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내가 그해 분명한 산액이 있어서 상배(喪配)당할 액난이 있었는데 지장보살의 가피력으로 무사하게 된 것을 믿게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맹세를 새로이 하여 지장보살을 생각하고 지장보살의 은혜를 보답하기로 하였다. 내가 믿기로는 약으로 못 고치는 병은 지성으로 지장보살을 생각하고 독경하며 방생하기를 권한다. 결코 살생은 하지 말 것이다. 산난이 있더라도 반드시 순산할 것이다. 우리 부처님 말씀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니 내가 곧 그 증명자요 체험자이다.


<지장보살영험설화>

 

**연인사 道窓스님

 

 

27. 삿된 신의 장난을 물리치고 건강을 회복하다

 

황장혜주(黃莊慧珠) 거사는 복주(福州)사람이다. 24세 때 여소(茹素)라는 사람을 따라 처음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 그 무렵 그의 집에는 사신(邪神)을 숭배하여 제사 지냄이 요란하였다. 거사는 이런 폐습을 없애버리자고 분연히 제사 지내는 토신 형상을 고기 키우는 항아리에 던져 버렸다. 그랬더니 얼마 안가서 거사는 점점 몸이 쇠약해졌는데 전신에 종기가 생겨 병상에 눕게 되었다.

 

백약이 무효였다. 거사는 토신의 침범이라는 것을 직감하였다. 그때 거사는 생각하기를 「나는 부처님 믿는 사람이다. 사신을 숭배하는 것을 옳다고 놔둘 수 없다. 내가 지금 병들었으니 불보살님이 나를 안구하시면 누가 구해 주겠는가.」 하고 정성을 오로지 하여 마음속에서 일심으로 기도하였다.

 

(대비관세음보살과 대원지장보살은 항상 인간과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시니 어찌 나를 버리시겠는가. 내가 비록 이대로 죽게 될지라도 지장보살 생각하는 것은 쉬지 않으리라.) 결심하였다. 그리고서 매일 수 만 번씩 성호를 불렀다. 그러기를 일주일이 지나 거사는 꿈을 꾸었다. 꿈에 찬 바닷가에 갔는데 물이 끓어오르고 물빛이 검다.

 

그리고 수많은 슬픈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그런 중에 문득 한 스님이 나타나더니 바다 위를 나는 듯이 다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스님 이르는 곳마다 신음소리가 잠잠해지고 물이 맑아지는 것이었다. 꿈을 깨자 거사는 꿈속에서 본 스님이 지장보살인 것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기뻐서 견딜 수가 없어서 일어나서 보니 아프던 몸이 날듯이 가벼웠다. 어느 사이에 병이 다 나아버린 것이다. 그는 지금 매우 건강하다. 그는 항상 그의 오늘의 행복은 지장보살의 은덕이라고 말한다.


**연인사 道窓스님**
출처:http://cp0433.culturecontent.com


 

28. 독경 예배로 기형성 관절을 고치다

 

원경암(袁鏡庵) 거사의 어머니 장씨는 천성이 매우 착하고 밝은 분이었다. 문학에도 능통하고 가사에도 극진하여 이웃의 칭찬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 신앙이 지극했고 특히 관음경과 지장보살 신앙이 극진하다. 그가 오늘날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모으며 건강하고 활기 있게 지내는 동안에 다음과 같은 지장보살의 영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평소에 육식을 즐겨하지 않았다. 삿된 미신도 일체 물리쳤다. 그리고 염불 일과를 빼놓지 않았는데 어느 해 별안간 걸음걸이가 둔해지고 두 팔이 올라가지 않으며 아파서 몸져눕게 되었다. 효험이 있다는 약은 모두 구하여 썼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는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생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더욱이 병상에 누운 후로는 열심히 지장보살을 생각하였다. 그의 아들 경암은 생활에 시달려 기도할 시간을 낼 수 없었으므로 지장보살 본원경 전 23품의 내용을 대강 기억하고 매품의 제목을 모두 암송하였다. 그리고서 절할 때마다 경제목을 외우고 뜻을 음각하며 절 한 번씩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지장보살 명호를 수백 번씩 불렀다.

 

그와 같이 몇 달이 지나서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깊은 잠이 들어서 깨어나지를 못했다. 가족들과 이웃들이 모두가 당황하고 의사도 손을 못 쓰고 두었더니 사뭇 오랫만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그때부터 그는 몸이 아픈 것이 사라지고 걷기 시작하여 지금은 매일 예불 독경기도를 하면서 피로한 줄 모른다. 그가 어떤 업연으로 금생에 중병을 얻었다가 이제 그의 신심과 아들의 효성으로 지장보살의 가피력을 입은 것이 틀림없다. 경암은 지금도 어머니의 건강과 함께 지장보살 찬탄을 잊지 않고 있다.

 

**연인사 道窓스님**
출처:http://cp0433.culturecontent.com

 


29. 부모님께 효도하고 존상공덕으로 수명을 늘여 살아난 진건

 

대주(臺州) 땅에 진건(陳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용모가 단정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 부모님을모시면서 지극 정성으로 잘 받들었지만 부모님이 이 현생에서 뿐만 아니라 긴 미래까지 복락을 누리게 해드릴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위하여 지장 ·관음 두 존상을 조성하였는데 높이는 3자였다. 지성으로 예배하고 염불하며 부모님의 건강과 복락을 기도하면서 지냈다. 그러더니 건덕(乾德) 4년(서기 572년)갑자기 병이 났다. 금방 의식이 사라지는 것이다. 효자가 죽은 것으로 알고 집안사람들과 이웃이 다 모여 슬피 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다시 깨어났다. 그리고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말하였다.

 

『내가 아파서 신음하는 중에 어느덧 나는 어딘가를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를 가서 성문과 같은 큰 문을 지나 어떤 큰 궁궐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생각에 여기가 염라대왕이 계신 곳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느덧 내 좌우에는 지장보살과 관음보살 두 보살이 와 계셨으며 내가 염라대왕 앞에 이르니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나의 단월인데 효성이 지극하오. 효도를 아직 다 못 마치고 왔으니 대왕은 이 사람을 다시 인간으로 내보내주기 바라오. 」

 

염라대왕은 그 말을 듣고 장부 같은 것을 몇 장 넘기더니 「이 사람의 수명은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아직 수명이 많이 남았습니다. 」

 

다시 두 보살이 말하였습니다. 「수명은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니며 또 고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소. 나의 단월에게 선업을 닦게 하겠다는데 어찌 그것이 안 된단 말이오? 」

 

염라대왕은 책을 다시 몇 장 넘기면서 살펴보더니 말하였다. 「이 사람은 부모님께 효도하고 존상을 조성한 공덕이 있습니다. 그러니 수명을 40년 더 이어주겠습니다. 」

 

그러자 염라대왕 곁에 있던 관인이 대왕에 게 말하였다. 「진건에게 40년을 더 연장시켜주면 복록도 그만큼 있어야 할텐데 어렵게 되지 않겠습니까? 」

 

「염라대왕은 두 가지 말을 할 수 없소. 40년의 명을 이어 주겠소.」 그랬더니 두 보살이 저를 집까지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진건의 효성으로 보아 마땅한 일이라 하면서 모두가 기뻐하며 두 보살 존상 앞에 두 손을 모았다.


 

30. 지장경을 읽고 지장보살 명호를 부른뒤 병이 낫고 복을 얻다

 

노산(魯山)에 한 소년이 병으로 누워 있었다. 날마다 하늘의 달만 쳐다볼 뿐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였다. 그때 양병원 거사가 그 산에 있었는데 그 아이에게 지장보살의 영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열심히 지장경을 생각하라고 일러 주었다.

 

지장보살을 생각하고 지장경을 존중하면 선세에 진 모든 죄업이 소멸된다는 것을 믿게 된 그 아이는 정성껏 지장보살을 생각하였다. 그러기를 10여일 만에 그 아이는 병이 완쾌되어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양병원 거사는 너무나 기뻐서 지장보살 영험록 만권을 출판하여 사방에 돌려주어 지장보살의 위신력을 믿게 하였다


출처: 나무아미타불

 


31. 독경공덕으로 어머니의 명을 연장시킨 이화좌군

 

좌군(左君) 이화(履和)는 본래 불법을 지극히 믿었던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도 또한 지장경을 독실하게 독송하며 지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약을 만들어 여러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약을 만들 때는 반드시 대비주(천수다라니)를 일심으로 지송하며 만들었는데 약의 효험이 매우 좋았다. 이화가 24세 때 그의 어머니가 병이 들어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화는 스님을 청하여 지장경을 3일간 정성껏 독송하였다. 그랬더니 그의 어머니는 비몽사몽간에 지장보살을 뵈었다. 위의는 스님의 모양을 나투셨고 광명이 나는 몸과 형용할 수 없는 안온감을 주는 표정은 곧 지장보살임을 알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 말을 하였다.

 

「너의 수명은 벌써 다 되었다. 그러나 네가 정성껏 나를 생각하고 또한 착한 일을 많이 하였으니 수명을 1기 (12년) 만이라도 더 늘려주도록 하마. 」 하였다. 꿈을 깨면서부터 어머니의 병은 차차 차도가 있어 얼마안가 완쾌하였고 그 뒤 36년이나 더 세수를 누렸다.

 


32. 종이에 쓸 지장보살 명호에 예배하고 순산한 양부인

 

양벽원(梁璧垣) 거사의 장녀는 장(張)씨 집으로 시집갔다. 하남(河南)땅으로 광산하는 남편을 따라 갔는데 그때는 마침 임신하여 해산이 가까웠다. 그런데 그 곳에는 해산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양벽원거사는 딸이 걱정이 되어 종이에 「나무 지장왕보살」 이라고 써서 딸에게 보내면서, 「매일 아침마다 향을 피우고 지장보살에게 예배하고 기도하라. 그러면 반드시 순산할 것이다. 」 하였다.

 

그 딸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벽에 지장왕보살 명호를 써 붙이고 그 앞에 향을 사르고 열심히 기하였다. 과연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시원스럽게 순산하였다. 아들이었다. 2년을 지나 또 임신하였는데 그 때도 전과 같이 하여 아무 고통 없이 딸을 낳았다. 아기의 상호가 단정하고 총명하였으며 매우 착했다.

 

<지장보살영험록>

 


33. 기도한 물을 마시고 위장병을 고치다

 

비구니 관원(觀願) 스님은 원래 복건성(福建省)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광주(廣州)에서 국난으로 순국한 후 출가하여 주로 계율을 배웠다. 그 후 출가 수행하는 중에 평소부터 약했던 몸이었으나 어느덧 위장병이 생겨, 마침내 미음으로 연명하기를 반년에 이르렀다. 온갖 세간의 약이나 치료법을 써 보았지만 도무지 효력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지장보살 성덕대관(聖德大觀)」 이라는 책에 그려진 지장보살 존상을 보고 크게 환희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지장보살전에 향과 꽃과 그 밖의 공양구를 힘껏 장만하여 공양하면서 예배 기도하기를 7일이 되었다.

 

기도하는 동안은 오직 묵언하고 참회 발원을 쉬지 않았다. 7일이 지난 후 맑은 물 한 그릇을 지장보살 존상 앞에 올려두고 하루 밤낮 동안 지장보살을 일심으로 생각한 다음 그 물을 마셨다. 그 후부터 위장병이 완쾌되고 건강하여 오늘날 지장보살 성덕을 크게 건양하고 있다.

 


(옮긴이註: 과거 영험록들을 보면 지장보살님 성상을 모시고 기도하였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실제로 볼 때 법력있는 스님의 점안의식을 거치지않고는 가정에서는 모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점안의식을 거쳐 모셨더라도 향도 피우지않아도되고 향만 한 자루 여법하게 피우고 기타 초를 붙이거나 다른 음식은 차리지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꾸 여러가지 차리면 여러 떠돌아다니는 영에 의해서 장난이 생기기쉽습니다. 일부러 영가장애를 불러들이고 싶은 분은 없기에 말씀드립니다. 지장보살본원경책을 읽으면서 그것으로만 읽고 절하고 기도하시면 될 것입니다.)

 

출처: 나무아미타불

 

 

최종출처 : http://cafe.daum.net/wonh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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