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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티벳의 역사와 활불환생(活佛轉世)

by 예경 2025. 4. 19.

티벳의 역사 by 중은우시

 

원시의 전설

 

티벳족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는 인도에서 왔으며, 석가모니의 후예라고도 하고, 일설에서는 티벳인들의 모습이 말레이인과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말레이반도에서 이주해왔다고도 한다. 그런데, 티벳의 민간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티벳어로 된 역사서인 <<티벳왕통기>>에 나오는데, "원숭이가 사람으로 변하였다(??變人)"는 설화이다.

 

보타산에 사는 관세음보살은 그의 제자인 미후(원숭이)에게 남해에서 눈내리는 티벳으로 옮겨가 수행하라고 하였다. 티벳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미후는 현지의 요녀(妖女)와 결혼하여 6마리의 어린 원숭이를 낳았다. 아비 원숭이는 이들을 숲속에 보내어 각자 먹을 것을 찾아서 생활하게 하였다. 이들 어린 원숭이들이 자란 후에, 다시 교배하여 500여 원숭이로 늘어났다. 이처럼 개체수가 늘어나자 숲속에서 따먹을 과실이 점차 적어졌다. 관세음보살은 미후에게 수미산에서 가져온 오곡종자를 티벳의 땅에 뿌리도록 시키고, 그러자 티벳땅에는 각종 곡물이 자라기 시작한다. 이들 원숭이는 오곡을 먹기 시작한 후, 꼬리가 점차 짧아지고, 점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이들이 티벳인들의 조상이다.

 

체당(Tzedang, 澤當, 라싸 동남쪽 약 200킬로미터. 인구1.52만)의 공포산(貢布山)에는 아직도 당시 원숭이들이 서식하던 "후자동(?子洞)"유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체당의 티벳어에서의 의미는 "원숭이가 놀던 곳"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체당에서 멀지 않은 사라림(撒拉林)은 전설에 따르면 미후가 곡물을 대지에 뿌린 곳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티벳족의 첫번째 밭"이라는 호칭이 전해져 온다. 지금도 매년 봄이 되어 씨를 뿌릴 계절이 되면, 티벳인들은 이곳의 '신토(神土)'를 한줌 집어가서 풍요를 기원한다.

 

이러한 신화들은 고증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티벳고원에도 인류가 역사를 기록하기 이전부터 원시인류의 활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들어 임지(林芝), 정일(定日), 창도(昌都)등에서 구석기,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이 그 방증이다.

 

티벳의 원시인류는 감숙, 청해 일대에서 이주해온 강(羌)족과 융합되어, 티벳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장족은 원래 산남(山南, 체당)지구에만 거주하던 원시부락이었고, 부락이 첫번째 우두머리는 섭적찬보(?赤贊普)였다. "찬보"는 뛰어난 군주라는 의미이다. 그는 나중에 토번(吐蕃)왕조의 시조가 된다. 그의 자손은 "찬보'의 칭호를 세습했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티벳군주는 '찬보'라고 부른다. 7세기이전에 티벳족부락은 각지에 분산되어 이썼는데, 33대찬보인 송찬간포(松贊干布)가 무력으로 각 부락을 통일하고, 토번왕조를 건립했다. 티벳족은 이때부터 강성해지기 시작한다.

 

통일된 토번왕조

 

송찬간포는 토번왕조를 건립한 후, 수도를 라싸로 이전한다. 그리고 정치, 군사, 경제, 문화등 각방면에서 중요한 조치를 취한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본떠서 티벳문자를 창립한다. 이외에 송찬간포는 정략결혼의 외교술로 왕조를 공고히 한다. 먼저 남방의 네팔에 청혼하여 적존공주(赤尊公主)를 취한다. 그후 당태종 정관8년에 사신을 장안에 보내어 혼인을 요청한다. 그러나, 당태종은 완곡하게 거절한다. 송찬간포는 대노하여 병사를 이끌고 당나라를 치게 된다. 당태종도 무력으로 반격하여 토번을 격파한다. 이번 전투를 거치면서 당태종은 토번이 완강함을 알게 되고, 정복이 쉽지 않다는 생각에 문성공주(文成公主)를 티벳왕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때가 정관14년이다.

 

다음해(정관15년), 문성공주는 장안에서 출발하여, 2년간 산넘고 물건너 라싸에 도착한다. 문성공주를 따라 티벳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한족의 문화, 예술, 의학, 역법, 농업등 문화기술을 티벳에 전파해준다. 나중에 문성공주는 당나라에서 불러온 장인들로 하여금 대소사(大昭寺, Jokhang Temple), 소소사(小昭寺, Ramoche Temple)를 건축한다. 대소사는 건축이 웅장할 뿐아니라, 티벳불교의 성전으로 되어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문성공주가 가져온 불상, 불경 및 경건한 신심은 티벳에서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불교는 티벳문화 및 티벳인들의 생활에 깊고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문성공주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650년, 송찬간포가 죽은 후, 당나라와 토번의 관계는 악화되어, 쌍방은 싸우기도 하고 휴전하기도 하였다. 당목종 장경3년(823년)이 되어서 쌍방은 각자 내란이 빈번해지자, 상호불가침협정을 맺고 이를 비석에 새겼다. 그리고는 장안과 라싸에 각각 세웠다. 지금도 라싸에는 "당번회맹비(唐蕃會盟碑)"가 대소사의 앞에 서있다.

 

송찬간포부터, 불교는 토번에서 성행한다. 나중에는 인도의 고승이 티벳에 들어와서 불법을 전하면서, 티벳의 원시종교인 발교(鉢敎)와 결합하여 티벳밀교가 창립된다. 즉, 현재의 라마교이다. 라마교의 세력이 점차 증대하면서, 구귀족대신들과 갈등이 발생하며, 각종 충돌이 일어나게 되며, 심지어 군웅할거의 국면까지 벌어진다. 토번은 점차 암흑시대로 접어들고 국력은 날로 쇠락한다.

 

사카(薩迦, Sakya)왕조와 정교합일

 

기나긴 암흑시대를 거쳐, 11세기초 토번문화는 다시 부흥한다. 불교는 티벳에서 몇개의 교파를 탄생시킨다. 13세기때, 토번은 원나라에 투항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판도내에 들어간다. 원나라는 비록 장군을 파견하여 토번에 주둔시키기는 했지만, 티벳인들은 자주권을 유지했다. 원세조 쿠빌라이가 등극한 후, 티벳에 대하여 회유정책을 써서, 티벳불교의 사카파의 영수인 파스파(八思巴)를 국사로 모시고, 티벳의 통치권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티벳은 다시 한번 통일된 왕조 사카왕조를 이루게 된다. 다른 측면으로, 티벳의 불교도 원나라황제의 신앙을 힘입어 북방의 몽골초원에까지 전파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중앙아시아, 내몽고, 외몽고의 몽골각족이 라마교를 신봉하는 원인이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사카왕조도 함께 쇠망한다. 마침내 갈거파(?擧派,Bka-brgyud 白帽派)의 파죽(?竹, Phag-gru)파에 의하여 대체된다. 이후, 티벳왕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티벳의 권력자가 된다. 다만, 티벳왕와 라마교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하여, 정교합일의 국면은 여전히 유지된다.

 

이 시기에 티벳에서는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바로 종카파(宗喀巴, Tsong-Kha-pa, 1357-1419)의 종교개혁이다. 그는 티벳불교계가 퇴폐하였다고 보고,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새로운 교파인 게루파(格魯派, Gegupa, 黃帽敎)를 창시한다. 게루파는 신속히 발전하여 티벳의 주류종파가 된다. 종카파가 죽은 후에는 게루파가 '활불'제도를 이용하여 교파의 계승문제를 해결했다. 그의 두 제자는 각각 환생하는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가 된다.

 

명신종 만력8년(1580년), 게루파의 우두머리는 몽고 투무터의 옌다칸에 의하여 '달라이라마'라는 존호를 받는데, 그가 바로 달라이3세이다. 그는 이전의 두 사람을 달라이1세, 달라이2세로 추존한다. 1645년, 샤가츠(Shiagatse, 日喀則)의 게루파 장문인은 몽고허소트부의 구시칸에 의하여 '판첸라마'라는 존호를 받는다. 그도 이전의 세 장문인을 추존하고 스스로 판첸4세가 된다.

 

17세기중엽부터 20세기중엽까지, 비록 외부세력의 개입이 있기는 했지만, 티벳정권은 달라이라마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달라이라마정권이 건립된데는 달라이5세의 공이 크다. 달라이5세(1617-1682)는 정치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1643년, 그는 몽골구시칸의 군대를 이용하여 티벳왕을 격파하고, 티벳을 통일한다. 그리고는 정교합일의 "간단포장(甘丹頗章)"정권을 건립한다. 이후 청나라순치9년(1652년), 북경으로 황제를 친견하고, 청나라정부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그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진다. 그가 살아있을 때는 티벳문화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경제, 문학, 예술에서 모두 큰 발전이 있었고, 티벳에술을 집대성한 포탈라궁도 이때 중건된다.

 

청나라초기의 통치와 영국의 침입

 

달리이5세이후, 티벳의 국면은 불안정해졌다. 청나라조정은 티벳을 안정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강희44년(1705년) 주티벳대신(駐藏大臣)을 파견한다. 강희59년, 청나라조정은 다시 군대를 보내어 라싸에 주둔시키고, 달라이7세의 신정부를 성립시킨다. 옹정5년, 청나라조정은 주장대신제도를 명확히 규정한다; 건륭15년, 주장대신의 권한을 강화시켜, 티벳의 주요한 정치사무는 반드시 달라이라마와 주장대신이 합의하여 결정하게 하였고, 티벳은 이로써 청나라의 종주권하에 있는 보호국이 된다. 건륭55년, 네팔이 티벳에 침입하여, 샤가츠를 함락시킨다. 청나라조정은 군대를 보내어, 네팔을 격퇴한다. 그리고 영토를 위(衛, 前藏), 장(藏, 後藏), 강(康, 西康) 및 아리(阿里)의 네 부분으로 나눈다. 이로써 중국의 티벳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된다.

 

18세기말엽이후, 영국은 인도를 근거지로, 세력을 중국서남지구로 전개하고자 하며, 여러차례에 걸쳐 티벳과의 통상을 요구한다. 1888년, 영국과 티벳간에 무장충돌이 발생하여, 상호관계가 악화된다. 마침내 1903년, 영국은 영국령인도의 군대를 티벳으로 들어가게 한다. 쌍방은 강자(江孜) 종산(宗山)에서 격전을 벌인다. 지금도 종산에는 영국군에 대항하여 싸운 포대가 남아 있다. 강자를 함락시킨 후 영국군은 라싸로 쳐들어간다. 달라이13세는 몽고로 도망친다. 판첸라마는 영국과 "라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다. 달라이13세는 몽고에서 북경으로 간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청나라조정이 무능하여 부탁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선통원년(1909년) 다시 라싸로 돌아가서 독립하고자 한다. 청나라조정은 이를 알고, 사천총독을 보내어 라싸를 점령한다. 달라이13세는 다시 티벳을 나와서 인도로 가서 영국에 보호를 요청한다.

 

독립충격하의 티벳

 

신해혁명(1911)이 일어난 후, 달라이13세는 다시 라싸로 돌아오고, 영국의 도움하에 독립을 선포한다. 그리고 금사강서쪽을 티벳의 땅으로 선언하여, 서강일대에서 자주 사태가 발생했다. 국민당정부가 건립된 후, 중앙정부가 티벳판사처를 설치했지만, 금사강서쪽지역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51년,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벳을 진주하고, 티벳평화해방협정을 체결한다. 1956년, 티벳자치구를 설립하고, 금사강서쪽지역을 티벳자치주에 속하게 한다. 티벳자치주정권이 성립된 이후, 전통적인 노예제사회체제와 종교지상의 사원제도가 개혁됨에 따라, 티벳각지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은 인사들이 반항운동을 벌인다. 심지어 1959년에는 라싸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고, 달라이14세는 인도로 망명하며, 그를 따라 망명한 티벳인들이 10여만에 달한다.

 

1966년, 문화대혁명은 티벳에도 영향을 미친다. 많은 사원들이 파괴되고, 승려들은 쫓겨났으며, 문화재도 파괴되었다. 티벳의 역사문화에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가하게 된 것이다. 현재 중국정부는 이미 티벳인들의 종교자유를 회복시키고, 티벳인들에 의한 티벳통치를 추진하는 등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독립의 목소리를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987년가을에서 1988년봄까지 반년동안 라싸에서는 여러차례 반정부운동자들과 군대간에 충돌이 있었다. 이리하여 라싸는 1988년봄 계엄을 선포하고 1990년4월에야 계엄을 해제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 망명한 달라이14세는 시시각각으로 각국을 다니면서 티벳의 '비폭력'독립운동을 선전하고 있다. 1988년 6월, 그는 프랑스에서 선언을 발표하여, 만일 중국이 티벳의 자치권을 인정한다면, 티벳도 중국이 티벳의 외교권을 보유한다는 것을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달라이14세 본인은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4712335

 

서장진마도(西藏鎭魔圖) by 중은우시

 

서장의 지형이 마녀(魔女)를 닮았고, 서장의 왕인 송찬간포(松贊幹布)는 12개의 진마사(鎭魔寺, 마녀를 진압하는 절)를 지어 마녀의 사지관절을 누르고 있다는 내용의 기재가 티벳어로 된 기록에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티벳의 지형이 마녀가 누워있는 것(魔女仰臥)과 같다는 전설은 기원7세기 문성공주(文成公主)가 티벳으로 화친을 위한 혼인을 하는 때로부터 시작된다. 전설에 의하면, 문성공주가 팔괘를 가지고 추산해서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라싸(拉薩)는 8가지 길상(吉祥)의 상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8가지 또는 5가지의 지살(地煞)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설역 토번이라는 지방은 누워있는 여자의 형태와 같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1990년대에 티벳자치구의 문화재관리위원회는 나포림카(羅布林)문화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두 폭의 <<서장진마도>. 당카(唐)를 발견한다. 크기는 서로 다르지만, 그림의 내용은 똑같았다. 그림의 길이는 152.5센티미터, 넓이는 72센티미터였다. 그림의 위에는 여마가 나체로 하늘을 보고 누워 있으며, 두 다리는 살짝 구부리고 있고, 왼쪽다리는 음부를 가리고 있다. 화가의 구상이 아주 기묘했고, 그림의 의미도 뛰어났다. 마녀는 오른 팔은 높이 들고 있으며 팔굽은 내려뜨렸고, 왼쪽 팔은 위로 들었는데, 손이 머리를 지난다. 몸에는 산도 있고, 물도 있으며, 맥락이 분명하다. 곳곳에는 크고 작은 절들이 세워져 있는데, 그 중에는 기원7세기경에 세워진 진지(鎭肢, 사지를 진압하는 것), 재진지(再鎭肢)등 12개의 진마종묘사(鎭魔鐘廟寺)가 있다. 그림은 금, 은, 마노, 산호, 진주등 여러가지 광물안료로 그렸고, 장홍화 천초, 대홛으 식물원료도 섞어서 그렸다. 안료의 순도도 높고 화면효과도 아주 뛰어나며, 아직도 찬란한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서장진마도>>의 구상이 뛰어나고 교묘하며, 세밀한 선과 풍부한 색체는 높은 산과 하류, 그리고 계곡을 잘 묘사하고 있으며, 마녀의 신체와 오관이 충분히 드러나게 하였다.

 

여마는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다리를 서쪽으로 두며 누워 있는데, 심장에 해당하는 곳이 서장의 정치, 경제, 문화중심인 수도 라싸이다. 포달라홍산에선 왕궁을 만들어 여마의 심골(心骨)을 누르고, 네팔공주는 문성공주의 계산에 따라 산꼭대기에 흙을 쌓고, 와당호를 묻었으며, 와당호위에 대조사(大照寺)를 지어 여마의 심골을 눌렀다.

 

여마의 왼쪽 어깨는 창주사(昌珠寺)

여마의 오른쪽 어깨는 갈택사(澤寺)

여마의 왼쪽발에는 중파강사(仲巴江寺)

여마의 오른쪽발에는 장장사(章樟寺)

--이 네 개는 사지를 누르는 절이다. 즉 진지사(鎭肢寺)이며, 진변사대사(鎭邊四大寺)라고도 한다.

 

여마의 왼쪽 팔에 찰공청사(擦空廳寺)

여마의 오른쪽 팔에 포곡사(布曲寺)

여마의 왼쪽 무릎에 찰동철사(擦東哲寺)

여마의 오른쪽 무릎에 강진격걸사(絳眞格杰寺)

-- 이 네 개는 관절을 누르는 절이다. 즉 진절사(鎭節寺)이며, 재진변사사(再鎭邊四寺)라고도 한다.

 

여마의 왼쪽 손바닥에는 당탁마사(塘卓瑪寺)

여마의 오른쪽 손바닥에는 당길곡사(塘吉曲寺)

여마의 왼쪽 발바닥에는 희탁마사(喜卓瑪寺)

여마의 오른쪽 발바닥에는 파농륜사(巴弄倫寺)

-- 이 네개는 사대진익사(四大鎭翼寺)라고 부른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1167485

 

 

 

영국의 티벳 침략

 

1. 정보취득

 

1600년, 영국은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한다. 동인도회사는 처음에는 통상, 무역을 주요한 목적으로 한 상업기구였지만, 나중에는 영국식민통치의 도구로 변모한다. 동인도회사는 인도를 장악한 후, 중국 티벳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첫번째로 티벳에 들어간 영국관리는 동인도회사의 비서인 보겔이었다. 티벳에 들어간 핑계는 영국이 부탄을 침략했을 때, 판첸6세가 조정해준 적이 있는데, 사람을 보내어 이에 대한 감사를 표시한다는 것이었다. 1774년 11월, 28세의 보겔이 시종을 데리고 부탄을 통해서 티벳에 들어갔다.

 

보겔이 티벳에 들어올 때, 티벳지역의 최고통치자는 청왕조가 임명한 종교지도자인 달라이라마, 판첸라마 그리고 청나라정부의 주장대신(駐藏大臣)이었다. 5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려 보겔은 마침내 판첸라마가 거주하는 자스룬부사에 도착했다. 판첸6세는 그를 접견했고, 그에게 티벳의복을 선물했다.

 

보겔은 이후 판첸라마에게 라싸에 가보고 싶다고 요청하나 거절당한다. 보겔이 티벳에 들어오기 전에, 최초의 영국인도총독인 하스틴스는 그에게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판첸라마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영국을 위하여 라싸에 상업기구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1775년 4월, 보겔은 귀로에오른다. 5년후, 보겔은 심장병으로 인도의 캘커타에서 서거한다.

 

보겔이 가져간 정보는 동인도회사로 하여금 중국티벳남부변경의 몇 개 협곡중에 10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차마고도가 여전히 통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동협곡은 최초로 영국인들이 주목한 티벳으로 향하는 통로였고, 이 고대의 통로에 연결시키기 위하여 영국은 인도에서 철도를 건설한다.

 

역대 영국인도총독들은 "탐험가"들을 매수하여 그들에게 티벳지역의 정보를 얻어냈다. 소위 "탐험가"인 홀더시는 "티벳의 많은 재물은 모두 여기에 있다. 소위 재물은 원시적인 예술품뿐아니라, 주로 무궁무진한 광물과 양모이다"

 

영국에 더욱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 사람은 "반지다"라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티벳의 주변에서 생활하는 인도토착주민이고, 영국비밀간첩기구에서 훈련을 받은 후 티벳에 보내어졌다. 위장을 위하여 측량을 하였다. 계속되는 측량을 통하여 영국인들은 그들의 수중에 유일한 강희연간의 티벳지도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장기간의 복잡한 조사를 거친 것은 단순히 통상만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2. 사방에 봉화불이 붙다.

 

1882년, 영국은 경제위기를 맞이한다. 영국의 타임스는 "우리는 티벳에 들어갈 것을 요구한다. 그곳에는 광대한 시장이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였다.

 

오랫동안 중국과 이웃한 대부분의 국가와 지역들은 중국봉건왕조와 종번관계를 맺었다. 이는 중국이 종주국이 되고, 번속국에 대하여 군사적인 보장을 제공해줌으로써, 번속국은 중국에게 있어서 자연스럽게 외래의 침략을 방어하는 방어선이 되었던 것이다.

 

19세기부터, 티벳의 주변국가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 영국령 인도는 네팔, 버마, 라다크, 부탄, 시킴에 대하여 계속 전쟁을 일으킨다. 이들 중국의 종번구성국들은 돌연한 타격을 받았고, 유일한 희망을 청나라정부의 군사적 지원에 기대었다. 그러나, 아편전쟁후의 청나라는 이미 번속국에 군사적인 지원을 해줄 능력이 없었다. 중국과 주변국가의 전통관계는 이로써 결렬된다.

 

1870년대에 이르러, 티벳에 이웃한 중국의 외번국은 모두 영국의 세력범위에 들어간다. 영국은 전략적으로 티벳을 포위하는 국면을 형성했다.

 

티벳지방정부는 외부의 위협을 받는 동시에, 청나라의 군사지원에 실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외국인들이 티벳에 들어오는 것을 저지했다.

 

3. 연태조약

 

당시 영국군은 함부로 티벳에 진입하지 못했다. 그들은 티벳에 진입할 핑계를 찾고 있었다.

 

1884년, 영국은 200여명의 무장 "탐험대"를 영국의 주중국대사관 번역인 마가리(馬嘉理)의 가이드하에 버마에서 강제로 중국운남으로 들어간다. 현지주민과 충돌이 발생한 후, 마가리는 피살된다. 영국인은 이를 핑계로 삼아, 청나라정부에 <<연태조약>>을 체결하도록 강박한다. 이 조약에서 영국인은 중국서남변경에 "여행, 탐험"을 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조약에는 그들이 중국내륙에서 티벳을 거쳐 이도로 가는 경우, 청나라정부는 주장대신에 통보하여 통행에 협조하도록 규정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티벳지방정부는 중앙정부에 글을 올린다: "영국인이 통상 여행하는 곳은 곧 영국의 땅이 됩니다" 영국이 중국주변국가에서 한 행위로 인하여 티벳정부는 이미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태조약>>을 체결한지 얼마되지 아니항, 영국인도정부의 재무비서인 마크레이가 이끄는 영국정부의 소위 "상무대표단"이 300명의 호위부대의 호송하에 티벳변경으로 왔다. 이 대표단에는 상인이나 상무관리는 한 명도 없었고, 그저 측량인원, 지도제작인원등 전문가들만 있었다. 이처럼 적나라한 침략행위는 당연히 티벳지방의 제지를 받게 된다.

 

티벳지장정부는 이교도로 구성된 사절단에 대하여 티벳의 종교에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입경을 거절한다. 오래지 않아, 티벳에 들어가지 못한 마크레이는 국내정치계의 비난을 받으면서 시킴에서 병사한다.

 

4. 대문을 열다.

 

이와 동시에, 영국인들은 티벳의 초원을 침략하여 점거하고, 티벳지방정부는 1886년 룽투산에 관문을 설치한다. 영국은 즉시 청나라정부에 항의를 제기하고, 중국측이 국경을 넘어 관문을 설치했다고 비난한다. 티벳정부는 이에 대하여 반박했다: "건륭59년에 설립한 경계비에 근거하여 르나종과 룽투는 중국의 영지에 속한다"

 

1888년 3월, 3000명의 영국병사가 룽투산에 나타난다. 티벳군도 신속히 증원한다. 양군이 대치할 때, 청나라정부는 그러나 철수명령을 내린다. 주장대신 문석(文碩)은 철군에 반대하였고, 청나라중앙정부에 티벳의 항영투쟁을 지원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전선에는 항영의 명령을 하달한다. 청나라정부는 이에 대하여 두려움에 휩싸이고 급히 명을 내려 승태(升泰)를 보내서 문석을 대체하게 한다.

 

1888년 3월 20일, 2000여명의 영국군이 돌연 티벳군진지로 진공한다. 티벳군의 허름한 장비로는 영국군의 중형화포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룽투산을 잃는다. 티벳군은 아동인진강으로 물러난다. 티벳지방정부는 계속 증원시킨다.

 

주장대신 승태는 부임한 후 철군을 명령한다. 문석은 나중에 이홍장에 의하여 삭탈관직당한다. 당시 부탄국왕은 1700여명으로 구성된 군대를 보내어 중국과 함께 영국에 대항하겠다고 제안하지만, 승태는 그들을 그냥 돌려보낸다.

 

영국군이 르나종을 점령한 후, 시킴국왕 도랑제는 영국군에 구금된다. 1890년 2월, 승태는 영국인도총독과 <<중영회의장인조약>>을 체결한다. 여기서 시킴이 영국의 보호에 속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중국티벳과 시킴의 국경선을 확정한다. 조약으로 인하여 시킴은 중국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중국티벳의 르나종과 강바종등 전략요충지와 광활한 목장도 중국의 판도에서 잘려나가게 된다.

 

아동협곡은 티벳에서 외적을 방비하는 첫번째 방어선이다. 1893년 12월, 중영쌍방은 <<중영회의장인조관>>을 체결하는데, 아동이 상업지로 개방된다. 1894년 5월 1일, 아동은 정식으로 개관한다. 1세기동안 닫아두었던 티벳은 대문을 영국인에게 활짝 열게 된다.

 

5. 침략계획

 

개관 10년간, 영국티벳무역은 240%가 증가한다. 농부산품과 공업원재료는 경공업제품으로 바꾸어졌다. 당시 진귀한 티벳양모의 이윤은 그저 1척짜리 베의 값이었다. 이런 불평등한 거래는 티벳의 돈이 외부로 유출되는 결과를 낳았고, 물가는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침략자의 탐욕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1900년, 8국연합군이 침입하여 청나라정부는 철저하게 붕괴될 지경에 처한다. 제정러시아의 짜르도 티벳에 들어오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이는 영국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영국은 오래지 않아. 중국티벳의 캉파종과 시킴의 변방에서 전쟁을 일으킨다. 1902년, 영국은 캉파종을 지키는 티벳장군이 국경선을 넘어 침입했다는 핑계를 대고, 군대를 이 지구에 진입시키며, 오랫동안 살아왔던 티벳주민을 몰아낸다. 중국관리가 참여하지 아니한 상태하에서, 영국군은 티벳과 시킴의 국경선을 임의로 그어버린다. 티벳지방정부는 영국의 행위에 대하여 굳세게 저항한다.

 

이후,영국령 인도총독인 조지. 처송은 여러차례 13세달라이라마에 서신을 보니여 그와 단독으로 대화하기를 원하나, 계속 거절당한다. 처송은 "이는 세계강 가장 기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국경과 20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적수공권의 중들이 감히 오랫동안 우리를 멸시해오다니.."

 

1903년 가을, 처송은 영국에 전보를 보낸다. "티벳인은 변방에서 네팔의 야크를 공격하고, 적지 않은 것들을 티벳으로 잡아갔다. 이는 아주 적의를 나타낸 행위이다" 영국의 국무대신은 "티벳인들의 현재의 행동으로 볼 때, 폐하와 정부는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한다.

 

6. 영국침입

 

1903년 가을, 근 만명에 이르는 영국무장사절단은 중국과 시킴의 국경선에 집결한다. 영국무장사절단으 정치담당 롱허펑은 대부대를 이끌고 저리라산을 넘어 아동협곡으로 진격한다.

 

주장대신인 유강(裕鋼)은 신속히 영국이 침범한 소식을 티벳지방정부에 통보한다. 13세 달리이라마는 "전체 티벳승려와 인민은 중대한 희생을 각오하고 불교대적인 영국침략군과 죽기를 각오한 전쟁을 벌인다"고 결정한다.

 

유강은 신속시 청나라중앙정부에도 글을 올린다. 서신을 전하는 병사는 동상으로 두 다리를 잃는다. 이후 근 2개월에 걸친 서신전달을 통해서 중앙정부에 하나의 소식을 알린다: "영국인이 침입했다" 글에서는 '티벳은 이미 침략군을 방어하겠다는 뜻이 강해서 꺽을 수가 없다'고 적었다.

 

중국세관을 통과해서 영국군은 근 2만마리의 야크, 마필을 모아서 물자조달에 사용한다. 날씨가 안좋은 파리지구로 들어간다.파리는 해발 4360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라는 별명이 있다. 당시의 파리종정부는 이 곳에 있었다. 여러해동안 전쟁이 없었으므로, 이곳에는 군대를 두지 않고 있었다.

 

파리의 목민들은 이미 가축을 옮겼고, 침입자들에게 남겨두지 않았다. 1903년의 성탄절날, 이곳에서는 지질학자를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자고이래로 가뭄이 들고 물이 부족한 파리에서, 그날 밤에 도시성곽주변에 갑자기 물이 불어나서 영국군의 숙영지는 연못으로 바뀐다. 현지 백성들은 주모로산의 산신이 그들에게 복수한 것이라고 말했다.

 

티벳군이 방어공사를 하면서 침입자들과의 결사전을 준비할 때, 유강등은 광서제로부터 회신을 받는다: "절대 움직이지 말라. 주장대신과 영국측이 화해를 하기를 기다려라" 광서제가 말한 주장대신은 유강의 후임자인 유태(有泰)로 그는 승태(升泰)의 동생이었다.

 

폭설이 내린 후, 기온은 급격히 하락했다. 영국군장교인 맥타나는 계속 전진하는 것을 반대했다. 롱허펑은 그러나 철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맥타나는 아동으로 돌아오고, 롱허펑은 그 곳에 남았다. 엄동설한에 11명의 인도시킴족 사병은 동상으로 죽어갔다.

 

영국군이 체류하는 동안, 13세 달라이라마는 총을 만들도록 독촉한다. 그러나, 만들어낸 총은 수량이 적어서 이전의 대도장모를 모두 대체하지는 못했다.

 

7. 피바람나는 살육

 

1904년 3월 31일, 엄동설한에서 깨어난 영국군은 곡미신곽(曲米新郭)으로 전진한다.

 

티벳군의 전선지휘관인 라딩스, 랑차이린 장군이 나서서 담판한다. 그러나 담판을 하면서 영국군은 티벳군을 포위한다.

 

담판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영국군은 돌연 총을 쏘기 시작한다. 700여명의 티벳군이 죽었다. 라딩스, 랑차이린 장군은 파리지구의 관리인 체보크와 함께 이곳에서 전사한다. 도살자인 롱허펑은 잔인하게 적었다: "가축을 도살하는 것과 같았다. 이들 가련한 자들은 모두 우리의 총에서 수 피트 떨어진 곳에 갇혀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희생된 티벳군의 유해는 모두 영국군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두이즈'의 우물에 던져넣었다고 한다. 전설상의 우물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저 그 곳이 피로 물든 강이라고 얘기한다.

 

1904년 티벳에 침입한 근 만명의 영국군대에 대하여 영국은 지금까지도 "외교사절단"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외교사절단은 티벳에서 살인을 많이 저지른다.

 

곡미신향의 참안과 강자(江孜)의 사건은 속세와 담을 쌓고 살던 티벳인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8. 강도행위

 

강자지구는 역대이래로 라싸로 통하는 대문으로 일컬어진다. 강자종의 산성은 원나라때부터 하나의 표지였다. 롱허펑은 강자종산을 점량하는 것이 라싸로 통하는 대문의 열쇠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인이 성보를 향한 진격을 할 때야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은, 성보에 티벳군은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영국침입자들은 티벳의 사묘에 금, 은, 보석이 가득찼다는 말을 믿었다. 이 탐욕스러운 영국군에게 이는 하나의 유혹이었다. 며칠동안 강자의 모든 사원은 영국군에 의하여 강탈당한다.

 

백거사는 1427년에 건립되었다. 사내에 8미터높이의 도금동상이 있었다. 영국인은 이 도금동상을 순금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잘라내서 인도로 옮겨가려다가 비로소 구리로 만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 백거사내에서, 우리는 영국군의 만행이 남긴 흔적을 볼 수가 있다.

 

영국군은 자금사를 강탈할 때, 승려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다. 수십명의 영국군이 피살된다. 롱허펑은 이 소식을 듣고, 화가나서 대포를 쏘개 하여 절안의 40미터높이의 대전과 근 60개의 불전이 모두 무너진고, 승려들은 모두 죽는다.

 

영국이 강탈한 재물은 "400마리의 당나귀에 실어 운반해갔다. 그 안에는 귀한 종교경전, 신상이 있고, 많은 기물도 있었다"

 

9 공부(貢布)용사

 

영국군의 만행에 대하여 티벳인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티벳지방정부는 평화적인 해결을 포기하고, 대규모로 병사를 모집하게 된다.

 

처음으로 강자에 도착한 지원병은 임지(林芝)지구에서 온 공부병(貢布兵)이었다. 그들은 장가와 아동의 통로에 있는 남니사를 점령하고, 영국군의 보급선을 끊었다. 맥타나는 급히 강자로 증원하려 하였지만 남니사에서 공부병의 완강한 저항을 받는다.

 

현재의 남니사에는 공부도(貢布刀)인 메이두오 한 자루가 전시되어 있다. 칼의 주인은 아다니마자바라는 사람이다. 그와 동생은 공부의 민병을 이끌고 남니사에서 용감하게 적들과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웅스럽게 희생되었다. 전투중에 영국포병지휘관인 자넷하이는 이 칼에 의하여 몸이 둘로 잘리기도 하였고, 15명의 영국군을 죽였다. 영국의사는 티벳인의 용감함은 세상에 둘도 없을 정도이다라고 감탄했다.

 

이와 동시에 1500명의 르카저에서 온 민병이 강자종산을 점령하고, 나취, 린지에서 온 구원병이 장로린카부군의 마을을 되찾는다.

 

1904년 5월 4일 새벽, 800여명의 티벳군은 장로린카의 영국군 진지를 공격한다. 티벳군은 기습에 익숙하지 아니하여 소리를 지르면서 돌격하여, 잠자던 영국군이 모두 깨었다. 영국군이 기관총으로 반격하여 티벳병은 200-300명이 죽었고, 결국 퇴각했다. 또 다른 포병진지에서는 수십명의 영국군이 하룻밤만에 모두 죽었다.

 

티벳의 항쟁으로 영국군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3751511

 

 

나치독일의 티벳탐험대

 

글: 성월주(星月珠)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티벳지구는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전쟁의 포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티벳도 나치독일의 시선을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1938년과 1943년 히틀러의 비준을 받아, 나치의 SS두목인 히믈러는 친히 두 번 탐험대를 조직하였고, 그들은 티벳을 깊숙히 탐험하며 "게르만민족의 조상" -- 아틀란티스신족(神族)이 존재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였고, 시간을 변경시키고 불사군단(不死軍團)을 만들 수 있는 지구축심(地球軸心, ZPM, Zero Point Module)을 찾고자 하였다. 1945년, 소련군이 베를린을 함락시킨 후, 내무인민위원회(KGB의 전신)의 장교는 독일제국빌딩의 지하실에서 총살당한 티벳의 라마 1명을 발견했다. 이 것이 나치독일이 티벳에서 한 비밀작전에 관련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시작이었다.

 

히믈러는 신족부대(神族部隊)를 만들고 싶어했다.

 

1933년, 히틀러는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한 후, 대대적으로 종족우월론을 고취시켰다. 인류는 700년마다 한번씩 진화하는데, 최종목적은 아리안족(나치언어에서 아리안족은 어떤 때는 비유태혈통의 백인종을 의미하며, 더 많게는 게르만족을 의미한다)이라는 우수한 인종이 진화하여 초능력을 가진 신인류로 진화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히틀러 수하의 SS 우두머리인 히믈러도 철두철미한 인종주의자였다. 그는 SS를 조직하면서 명확히 규정했다. 단지 키5피트9인치, 금발벽안, 양호한 교육을 받은 순수아리안혈통의 젊은이를 뽑았다. SS장교를 뽑을 때에는 가장 기본적인 하나의 조건이 피선발자는 자기의 가족이 1750년이래로 다른 인종과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원수의 이론을 인증하기 위하여, 히믈러는 1935년, 나치교조를 따르는 "조상유산학회"를 조직했으며, 의학자, 탐험가, 고고학자 심지어 강호의 술사, 정신병환자를 포함한 각종 '전문가'를 조직하여 인종, 혈통, 고대종교, 고대유적지, 신화전설등에 대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전쟁말기에 이 학회는 이미 40여개 부서를 지닌 방대한 기구로 성장했다. 이 기구는 유태인에 대하여 생체실험을 하였을 뿐아니라, 점성술, 점복술등의 수단으로 독일군의 군사작전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오랫동안 전해진 아틀란티스에 대한 전설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아틀란티스대륙은 아주 부유하며, 그곳의 사람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신족이라는 것이다. 그들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기원전350년에 저술한 <<대화록>>이다. 그는 "1.2만년전에, 지중해의 서쪽으로 먼 대서양상에, 하나의 놀라운 대륙이 있었다. 그것은 무수한 황금과 백은으로 장식되어 있고, 빛나는 금속--산동(山銅)을 캘 수 있다. 그곳에는 설비가 잘 갖추어진 배와 항구가 있고, 사람을 태우고 날 수 있는 물체도 있다" 아틀란티스의 세력은 멀리 아프리카 대륙에도 미친다. 대지진이 있은 후, 이 대륙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일부 아틀란티스인들은 배를 타고 도망쳤으며, 최종적으로 중국의 티벳과 인도에 정착하였다. 이들 아틀란티스인들의 후손은 일찌기 중앙아시아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고, 나중에 그들의 일부는 서북과 남방으로 이전했으며, 각각 아리안족과 인도인의 조상이 되었다. 일부 나찌전문가들은 아틀란티스문명은 확실히 존재했고, 아리안인은 나중에 보통사람과 결합하면서 조상의 신적인 능력을 상실했다고 믿었다. 히믈러는 이런 신화전설을 깊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일단 아리안인의 조상이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이후 선택적인 번식등으로 종족을 정화(淨化)하는 수단을 취함으로써 초능력을 지니고, 무적인 아리안 신족부대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티벳족들의 신체특징을 상세히 조사하다.

 

조상의 유민을 탐방하기 위하여 1938년, 히믈러는 명을 받아 박물학자인 잉스터 사이퍼와 인류학자인 부르노 벨거를 대장으로 한 "독일친위대사이퍼고찰대"를 만들어 티벳으로 보냈다. 이 팀의 다른 구성원에는 식물학자, 곤충학자와 지구물리학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나치분자들이 찍은 다큐멘터리 <<티벳비밀>>에는 그들의 진정한 목적을 모르는 현지의 영주들이 매우 환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딴 마음을 품고 있던 친위대원들은 그들의 원래 임무를 잊지 않았다. 벨거는 많은 티벳인들의 머리의 크기를 측정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모발과 다른 인종의 모발을 비교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피조사자의 안구의 색으로 종족의 순도를 평가했다. 데이타를 보류하기 위하여, 이 나치분자들은 생석고로 십여명의 티벳인에 대하여 얼굴과 손의 본을 떴고, 이 사람들의 머리, 얼굴, 귀와 손의 석고모형을 만들었다.

 

이번 고찰에서, 대원들은 현지 사람들로부터 '샴발라(Shamballa)'라는 동굴에 대하여 듣고, 그곳에는 무궁한 능력을 지닌 '지구축심'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 것을 찾을 수 있다면, 생물장의 보호를 받게 되고 '도검불입(칼이나 검으로 다치게 할 수 없는)'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임의로 시간과 사건의 변화를 콘트롤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1939년 8월, 고찰대는 독일로 돌아가서 히믈러의 성대한 환영을 받는다. 히믈러는 사이퍼에게 '친위대명예검'을 하사한다. 1943년 1월, 나치는 뭰헨대학에 스웨던 고고학자 스원 허딩의 이름을 딴 고고및인류학학원 즉 스원 허딩학원을 만든다. 사이퍼는 히믈러의 추천을 받아 제1기 원장으로 임명된다. 사이퍼와 동행하였던 벨거도 히믈러에 의하여 친위대고급장교가 된다. 이로써볼 때, 제1차 티벳탐험활동은 나치고위층으로부터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구축심"을 찾아서.

 

1941년 12월말, 소련전쟁터에서 독일군대는 50만명의 병사, 1300량의 탱크, 2500문의 대포를 잃어버리는 참혹한 대가를 치르면서 모스크바전투에서 참패했다. 같은 해 겨울, 백만의 독일군은 또 다시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곤경에 처했다. 이런 나쁜 소식 앞에서 히틀러와 그의 총참모부는 아무런 방법도 취할 수가 없었다.

 

이 때, 히믈러는 어떻게 군사적인 불리한 국면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에 대하여 깊이 고심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강호술사들을 통하여 대서양지도에 추를 거꾸로 다는 황당한 방법으로 동맹군의 함대를 찾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멀리 동방에 있는 '지구축심'을 생각해냈다. 그후 히믈러는 히틀러를 만나서, 특별행동소분대를 파견하여, 티벳의 샴발라동굴로 가서, 전세계를 통제할 수 있는 '지구축심'을 찾게 할 것을 제안했다. 그후 수천명의 낙하산부대를 그 곳에 떨어뜨려, '불사군단'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지구축심'을 뒤집어 독일을 1939년으로 되돌아가게 하여 당초 범한 잘못을 고치고,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히믈러와 히틀러는 6시간을 밀담하고, 또한 히틀러에게 2000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중의 1장의 지도에는 샴파라의 대체적인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다.

 

1943년 1월, 하인리히 할러가 이끄는 나치 5인탐험대는 비밀리에 티벳으로 떠났다. 일찌기 직업등산가였던 할러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골수 나치친위대원이었다. 일찌기 1933년에 나치당에 가입했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이후, 그는 다시 친위대에 가입했다. 스위스에서 진행된 등산대회에서 할러는 1위를 차지했고, 그는 아리안족의 '우수한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었으며, 히틀러가 직접 그를 접견하고 사진까지 찍었다. 할러등의 사람등의 여정은 순탄치 못했다. 1943년 5월, 그들은 인도에서 영국군에 체포되었다. 여러번의 탈옥실패를 거쳐, 할러등은 마침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처음에 그들은 일본군에 투항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계속 '지구축심'을 찾는 사명을 수행하기로 결정한다. 당시의 영국인도총독이 티벳에 파견한 관리인 리차드슨은 독일인에 대하여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으므로, 독일제품판매원으로 위장한 할러는 티벳에서 7년간의 여행을 시작한다. 아무도 할러와 그의 탐험대가 어느 지방으로 갔었는지를  자세히 말할 수 없다. 황당한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최종적으로 '지구축심'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을 조종해야할지를 몰랐다. 그리고 아무도 할러 수하의 3명의 동료가 어디로 갔는지를 모른다. 왜냐하면 전쟁이 끝날 때, 할러의 탐험대는 겨우 그와 히믈러의 심복인 피터 우프스나터만이 남았다. 1948년, 할러는 라싸에서 달라이라마의 개인교사 겸 정치고문이 되었다. 1951년 티벳이 평화적으로 중국에 합병될 때, 할러는 황급히 인도로 도망쳐서 재판을 피한다. 그는 리히텐시타인에 정착한다. 이후, 할러와 달라이라마는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1977년, 일부 인사들이 할러의 나치분자라는 신분을 폭로한 후에도 달라이라마는 여전히 기자회견에서 공개적으로 이 '스승'을 변호해주었다. "나는 당연히 하인리히 할러의 독일배경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참회자로 전세계의 앞에 섰다. 그러나, 우리는 항시 '패배한 개'에 감동을 느낀다. 그래서 독일인들은 40년대말부터 동맹군으로부터 충분한 징벌을 받았다" 나중에 할러는 자기의 회고록 <<티벳에서의 7년>>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는 그가 히믈러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지구축심'을 찾으러 갔다는 것은 밝히지 않았고, 그가 나치분자라는 진실한 신분도 밝히지 않았다.

 

현재, 독일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나치의 제1차 티벳탐험시의 다큐멘터리는 1945년 가을의 쾰른대화재에서 소실되었다고 한다. 1951년 라싸로부터 오스트리아로 돌아올 때 휴대한 대량의 자료는 영국군에게 몰수되었다. 할러 본인도 이미 죽었다. 나치가 티벳에 진입한 자료는 아주 극비자료로 취급되었었다. 독일, 영국, 미국의 규정에 따르면 아마도 2044년이후에 비밀해제될 것이다. 아마도 영원히 역사속에 묻힐 지도 모른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1245862

 

 

활불환생(活佛轉世)에 관하여

 

글: 희열다길거사(希熱多吉居士)

 

"활불환생"(중국에서는 活佛轉世라고 함)은 티벳불교(藏傳佛敎)의 독특한 문화현상이다. 이는 중국불교(漢傳佛敎)나 동남아불교(南傳佛敎)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활불환생"은 중국역대중앙정부가 티벳불교의 질서를 유지하고,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인정한 일종의 조치였다. 활불환생제도는 티벳불교사원이 자신들의 지도자의 승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건립한 제도이다.

 

현재, 티벳불교에서 가장 큰 몇 개의 활불환생체계는 모두 역대중앙정부가 책봉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달라이(達賴)라마환생체계, 판첸(班禪)라마환생체계, 대보법왕(大寶法王)환생체계, 장자후투크투(章嘉呼圖克圖)환생체계등등이 그것이다. 이들 활불환생체계는 예외없이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았고, 중앙정부의 지휘를 받았다.

 

역대중앙정부는 "활불환생"을 책봉하고 권력을 인정했을 뿐아니라, "활불환생"을 금지한 선례도 있다. 청나라 건륭제때 "반란죄"를 이유로 가마가쥐(噶擧)홍모계(紅帽係)의 활불환생을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이 일맥은 환생체계가 중단되고 만다.

 

많은 사람들은 가마가쥐 흑모계(黑帽係)(즉, 현재의 17세 대모법왕의 전승)는 알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가마가쥐 홍모계의 전승체계도 있었다는 점을 잘 모르고 있다. 가마가쥐 홍모계는 제1세활불인 찰파승격(札巴僧格, 1283-1349)이 원나라 황실구성원으로부터 붉은 승려모자를 받았다는데서 유래한다.

 

홍모계의 제10대 활불, 즉 마지막 활불은 이믐이 주자춰(朱嘉錯)였다. 그는 6세판첸라마인 패단의희(貝丹意希, 1738-1780)와 동모이부(同母異夫) 형제간이었다. 6세판첸라마는 건륭제의 70회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열하(熱河)의 수미복수사(須彌福壽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해 겨울에, 천연두에 걸려 북경에서 원적하고 만다. 당시 건륭제와 만주, 몽고, 한족의 각 왕공대신들은 6세판첸라마에게 많은 부의와 물건을 보낸다. 합치면 약 10만냥 백은에 해당하였다. 6세판첸라마의 또다른 형인 중바후투크투(仲巴呼圖克圖)는 당시 찰십륜포사(擦什倫布寺)의 주지를 맡고 있었는데,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는 이 재산을 주자춰에게 나눠주지 않고, 모조리 자기가 독차지 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자춰는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네팔로 도망쳐가서, 고르카(廓爾喀)의 통치자를 끌어들여 티벳으로 쳐들어오고, 찰십륜포사의 재물을 강탈한다.

 

건륭제는 청나라의 유명한 대장인 푸캉안(福康安)을 파견하여 대군을 이끌고 티벳에 가서 고르카의 침입을 물리친다. 주자춰는 겁을 먹고 자결해버린다. 푸캉안은 대군을 이끌고 고르카를 티벳에서 몰아냈을 뿐아니라, 네팔까지 쳐들어가고, 나중에 고르카의 왕에게 주자춰의 유골과 처자식, 제자시종을 넘겨주는 것을 정전의 조건으로 삼는다.

 

나중에 건륭제는 주자춰의 유골을 티벳각지의 사원에 보내어 걸어놓게 함으로써, 반란에 대한 경고를 삼았다. 홍모계에 속한 사원, 토지, 목장, 농노는 모조리 국가에 몰수된다. 홍모계의 승려들은 칙령에 따라 황모파(黃帽派)로 개종하게 하며, 홍모계의 활불환생을 금지시킨다. 이로써 가마가쥐 홍모계는 단절되어 버린다.

 

재미있는 일은 건륭제가 최초로 활불환생을 금지시킨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티벳지방정권에서도 일찌기 달라이라마의 환생을 금지시킨 바 있다.

 

3세달라이라마 소난자춰(索南嘉錯)가 원적한 후 1년만에 명나라 목종에 의하여 순의왕으로 봉해진 몽고 투무터부의 칸잉 얜다칸의 손자인 수미르의 아들이 탄생했고, 이 어린 아이는 3세달라이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되어, "환생영동(轉世靈童)"으로 인정받았다. 그가 바로 4세달라이라마 운단자춰(雲丹嘉錯, 1589-1616)이다.

 

달라이라마의 환생이 몽고왕족의 집안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은 당시 황모파의 상층부와 몽골족 통치계급간의 당시형세하에서 쌍방에 모두 유리하게 처리한 미묘한 조치였다. 이로써 황모파는 티벳의 다른 교파와의 지방세력투쟁에서 몽골족의 군사력에 의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황모파 지도자들은 모두 운단자춰가 소난자춰의 환생영동이라고 인정했으며, 이는 황모파집단의 사원이 당시 외족의 군사력의 지원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1602년, 몽고에서 군대를 대동하여 운단자춰를 티벳으로 보낸다. 가는 길만 1년여가 걸려서 1603년에 비로소 라싸에 도착한다. 4세 달라이라마와 그를 호송한 몽골군대가 도착하자, 후장(後藏)지구에서 새로 흥성한 신사바(辛廈巴)가족은 아주 불안해 했다. 그들은 전장(前藏)지구를 무력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1605년, 신사바가족의 단송왕부(丹松旺布)는 라싸북부의 분성(盆城)을 점령한다. 1610년, 신사바가족의 지도자인 펑춰난제(彭錯南杰, 1586-1620)는 티벳지방정권 즉 디시장바(第悉藏巴)정권을 건립한다. 이로써 라싸의 황모파세력과 산남(山南)의 파주(竹)집안과의 연결을 차단시켰고, 파주 집안과 기타 세력의 연합군을 무찌르게 된다.

 

1612년에서 1613년 사이에, 펑춰난제의 세력은 라싸주위까지 확장되고, 황모파세력과 그를 지지하는 몽고군대와의 사이에 마찰이 발생한다. 이 시기에, 몽고족의 상층인물은 부처를 배알한다는 명목으로 라싸로 찾아오고, 대량의 인원을 데리고 와서 황모파를 지지하는 것을 보여준다. 쌍방은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긴장된 국면하에서, 1616년말, 4세달라이라마인 운단자춰가 돌연 철방사(哲蚌寺)에서 사망한다. 일설에 의하면, 펑춰난제가 중병에 걸렸는데, 운단자춰가 저주를 해서 그렇다고 의심하여, 사람을 보내어 운단자춰를 암살했다고 한다.

 

4세 달라이라마가 죽은 후, 펑춰난제는 달라이라마의 환생을 금지시킨다. 나중에 몽고는 군사력을 이용하여 1617년, 1621년 두번에 걸쳐 티벳으로 진입하여 디시장바정권과 전투를 벌인다. 펑춰난제가 1620년 병으로 사망하면서, 5세 달라이라마의 환생이 이루어지게 된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4568255

 

 

티벳지역의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

 

글: 강각지(江覺遲)

 

다른 곳은 모르겠고, 내가 일하는 티벳족지역에서 일처다부(一妻多夫)와 사분(私奔, 애인과 도망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이상할 것도 없다. 하루는 누군가가 나에게 물어왔다. 당신의 소설에서 일처다부에 대하여 썼는데, 사진으로 보면 사실이 그러한 것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글을 쓰면서 혹시 독자들이 엽기적인 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까 걱정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그저 평소에 있던 일을 쓴 것이다. 평상심으로 써나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곳의 생활이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무슨 엽기인가. 아마도 내지에서는 일부 일처다부라는 단어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혹은 여러가지 망상을 하여 엽기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일처다부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얘기해볼까 한다. 이 글을 읽으면 여러분들은 이해가 될 것이다. 그건 뭐 신기한 것도 아니다.

 

사실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지역에서 일처다부라고 하지만, 남편과 부인은 명절같은 때를 제외하면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3명의 부인의 남자를 예로 들자. 내 소설의 바상여인처럼. 그녀는 3명의 남편이 있었다. 한 명은 농사를 짓고, 한 명은 초원에 있고, 한 명은 외지로 나가서 장사를 했다.

이런 방식은 전체 가정의 생활상, 경제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섹스'를 놓고 본다면 분명히 나뉘어져 있다.

 

만일 명절이 되어 모두가 함께 모여야 하는 때가 되면, 그때는 그 나름의 방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자신의 침대가 있다. 형제중 누군가 여인과 함께 있을 때면 문옆에 물건을 걸어둔다. 예를 들어,자신의 허리띠를 걸어두어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형제들이 자리를 피해준다.

현지에는 기본적으로 부모, 남자, 아이들과 함께 큰 대청에서 함께 잠을 잔다. 그리하여, 일종의 묵계는 어떤 형제가 잠을 잘 때 대청을 떠나게 되면 다른 형제들은 무슨 뜻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런 측면에서 특별한 규정이나 약속은 없다. 묵계는 왕왕 평소생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일처다부의 가정은 둘 내지 3명의 형제가 한 명의 처를 공유한다. 4,5명이 처를 공유하는 경우는 적다. 그러나 결혼할 때는 두 세명이 공동으로 부인을 맞이하지는 않는다. 큰형이 대표하여 맞이한다. 다른 형제들도 마음 속으로는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지역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떤 지방에서는 일처다부의 결혼방식도 다를 수 있다.

 

결혼하면 여자도 생활이 쉽지는 않다. 내지의 어떤 인사들은 여러 남자들이 그녀를 떠받들어주므로 그녀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티벳지역의 부인들은 일처다부이건, 일처일부이건, 모두 아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필자의 소설에서의 앙종여인처럼 여인들은 가정노동과 농업노동의 거의 대부분을 떠맡아 하고 있다.

처의 지위를 말하자면 대부분 젊은 부녀의 지위는 아주 낮은 편이다. 노동기계와 같다. 농번기에는 하루종일 땅에서 일을 한다.

필자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매년 수확의 계절에 친구의 집을 가보면, 낮에는 여자를 볼 수가 없다. 새벽부터 농기구를 들고 밭으로 나가서 일을 한다. 저녁 깜깜해져서여 돌아온다. 큰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어지간한 비에는 나가서 일을 한다. 돌아오고나서도 남자들은 그저 앉아서 그녀가 밀크티를 끓여주기를 기다린다. 당연히 남자들도 일은 한다. 그러나, 그건 그저 힘을 많이 써야하는 일일때 뿐이다. 그 일이 끝나면 그냥 논다. 번잡한 집안일이나 밭일은 모두 여자들의 몫이다.

 

일처다부의 가정에서 여자들도 잘해야 한다. 치우쳐서는 안된다.

형제가 처를 공유하는 기본목적은 가정의 단결과 재산의 분산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가 형제간의 단결에 아주 중요하다. 여자가 어느 한 형제에게 마음을 치우쳐서 쏟거나, 아니면 말이 많거나, 일하기를 싫어하거나, 고부관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거나 하면, 형제간에 갈등이 생긴다. 이렇게 하면 어떤 형제는 가정과 처에 흥미를 잃게 되고, 떠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다른 여인을 찾아서 도망치고, 분가하게 된다.

 

여인이 시어머니를 잘 모시고, 남편의 말을 따르고, 말이 적고, 일은 열심히 해야 남자들을 남겨둘 수 있다. 시부모도 그녀의 편을 들게 된다. 만일 아들이 다른 마음을 먹더라도 시부모가 나서서 며느리를 편들어줄 것이다. 일처다부의 혼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하느냐는 많은 경우 여인의 고상한 덕성에 의존한다.

 

금방 말했듯이, 일처다부의 탄생은 첫째는 가정과 재산을 온전하게 지키기 위함이다. 그외에 과거로부터 흘러내려온 이유도 있다.

농노제도시대에, 오랍차역(烏拉差役)을 피하려는 것도 있다. 오랍차역은 호(戶)를 기준으로 계산했다. 형제 여러명이 처 1명을 공유하면 하나의 호이다. 그래서 오랍차역으로 장정을 차출하더라도 가정에서 남자 1명만 차출된다. 만일 각각 부인을 두게 되고, 분가해서 별도의 호를 만들면 한 집안의 아들들이 모조리 잡혀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자식들은 어떻게 구분하고 대우하고 호칭하는가?

 

이것은 현지사람들의 혈친에 대한 이해와 가족관념에 대한 태도를 보아야 한다.

한족들은 '혈친(血親)'과 '전종접대(傳宗接代)'에 대하여 뿌리깊은 인습이 있다. 누군가가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고, 친아들이 없다면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티벳지역의 어떤 지역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한족만큼 그렇게 중시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전체가족을 기준으로 이것을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자시의 여동생에게 아이가 있다면, 사생아라고 하더라도 이는 자시의 아들이다. 즉 하나의 가족이고, 자신의 것이다. 자신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사랑하고 이를 통해서 만족을 얻는다.

 

내지의 어떤 사람들처럼, 자신이 자식을 낳을 수 없다고 하여, 시험관아기까지 하지는 않는다. 내가 느끼기로 이곳에서 그들의 사랑과 가족애는 공향성(共享性)을 지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사촌여동생이나 친여동생이나 차이가 없다. 우리 도시에서처럼 재산을 갖기 위하여 가족들간에 피터지게 싸우는 일은 거의 볼 수가 없다.

 

호칭에 있어서, 일처다부의 가정에서도 어느 정도 편하게 처리한다. 일반적으로 형제를 대표하여 결혼한 큰형을 아빠라고 부르고, 그 다음 형제는 아저씨로 부른다.

 

일처다부의 존재는 교통이 불편한 원시지역, 자연재해가 빈발하는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은 이해가 된다. 생각해보라. 아주 빈곤한 지역에서, 토지는 척박하고, 생활은 낙후되어 있는데, 서로 힘을 도와가켠서 살아가야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생활도 안정되고, 더 공고해진다. 가정이 크면 클수록, 생활은 더욱 안전감을 느낀다. 소가족은 이런 곳에서 아주 취약하다. 생각해보라 여자를 따로 취하면 가정을 새로 꾸미고, 집을 새로 만들고, 노동도구도 더 만들어야 할 것이다. 빈곤한 곳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티벳지역도 갈수록 개방되고 발전되고 있다. 사람들은 외부의 새로운 문명,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였다. 현재 티벳지역의 일처다부는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필자가 접촉한 일처다부는 대부분 80년대 90년대에 결혼한 경우이다. 90년대이후에 결혼한 가정에서는 이미 일처다부가 드물어 졌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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