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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굴원의 초사(楚辭)의 구가(九歌) ~ 태을경(太乙經)과 관련이 깊습니다.

by 예경 2020. 6. 9.

<九歌 : 종말을 앞둔 자가 부르는 마지막 아홉 가지 노래> 번역.

translated by  "書山"​

 

 

 

예서원 간략해설 : 아직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지만, 굴원의 초사(楚辭)의 구가(九歌)는 태을경(太乙經) 전승의 삼경법(三經法)에서 신도태을경(神蹈太乙經)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곧 언급해보겠습니다. 아마 저에게 태을경 강의를 들으신 분들은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대략 감이 오실 것입니다.

 

 

 

 

<구가>라는 것은 굴원이 지은 작품이다. 지난 날 초 나라의 남쪽 도시인 영의 읍은 상강과 원강의 사이에 있었고 그들의 풍속은 세속에서 귀신을 믿으며 제사지내기를 좋아하였다. 그들의 제사는 반드시 노래 가락을 짓고 춤을 추며 제 신들을 기쁘고 즐겁게 해드리는 데 있었다. 굴원이 추방당하자 뭇 쥐들이 그 지역에 창궐하고 후회들과 걱정들로 씁쓸한 감정을 금할 길이 없었는데 이에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세속의 제사의 의례를 나와서 보고 가무의 즐거움과 더불어 그 말들은 매우 속되고 비천하다. 이에 <구가>를 지었으니 위로 신들에 제사지내는데 경배하고 아래로 천민들의 원한 맺힌 것을 풀어주었으며 풍간의 수법으로 시를 지어바쳤다. 고로 그 문장이 지니게 된 의미들은 다르지만 문장과 각 문단이 어지러이 섞이어 있어 새로운 다른 의미들의 폭을 넓혔다.

 

 

 

 

<동황태일>

 

길일이라는 것이 별자리에 늘어져 있어 빛나고

떳떳한 마음은 장차 저 위에 걸리어 있는 황홀한 태양을 넘나들 듯 하지만

긴 칼을 매만지며 옥같은 늘어진 귓불과

낭랑하게 울리는 옥방울 아름다워라

옥돌로 만들어놓은 자리에서 옥돌들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고

덮어놓은 그것도 옥돌이어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향기롭게 퍼진다.

소반과 안주는 매화의 그것과 흡사한데

계수나무 꽃으로 빚은 술로 먹는 향초를 두른 음식들

드날리는 큰 박으로 치는 장구와

드문 드문 성글고 느리게 치는 편안한 가락에

진세는 끝 간데에서 비파를 튕기며

기세 호탕하게 노래 불러 외치네!

신령들은 스러지듯 넘어가며

교태롭게 엎드리고

향기 뿜어져 나오는 향초들의

향기는 만당에 가득하며

다섯 음의 조화는 분분하게 울려퍼져

모임을 즐겁게 하니 임금이시여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만수무강 누리소서!

 

다섯 신하는 매 편의 제목은 초 나라의 신들에 대한 이름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제목을 각 편의 뒤에다 배치했다고 말했다. 또한 역시 <모시> 속에서도 제목을 통해서 문장을 구성한 취지를 말하기도 했다. 태일이라는 것은 별의 이름이며 하늘의 고귀한 신이다. 제사당은 초 나라의 동쪽에 있었는데 동쪽의 황제에 배속되어 고로 동황이라고 부른다. 홍흥조의 보에서는 <한서, 교사지>에는 하늘의 신이며 태일이라는 것을 숭배한다. 태일을 보좌하는 것은 다섯 황제, 즉 오제이다. 옛날 천자는 봄과 가을에 태일신을 동남쪽의 교외에서 제사지냈다. <천문지>에서는 중궁의 천극성이 그것이 하나로서 빛났으며 태일로서 항상 상주하고 있는 곳이라 믿었다. <회남자>에서는 태미라고 일컬어지는데 태일이 기거하는 정원이라는 의미이며 자궁이라고도 하는 바, 태일이 기거하는 곳이다. 말하는 자들은 태일이라는 것은 하늘의 고귀한 신으로서 빛나는 백의 정령의 보고이다라고 했다. <천문대상부> 속에서는 각주에 이르기를 천황 대제를 모시는 한 별이 자미궁 내에 들어온 것으로 구부러진 진중의 한 가운데이다라고 했다. 그 신은 빛나는 백의 정령의 보고이며 주로 뭇 신령의 혼들을 제어하며 백만가지 형틀을 부여잡고 신명스럽게 구획한다. 그 별은 숨어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점령한 것은 그것을 보고서 재앙이 됨을 알 수 있다. 또 말하기를 태일이라는 한 별은 그 다음 번으로 하늘의 남쪽으로 천제의 신하이다. 주로 십육 마리 용을 부리며 풍우를 알고, 홍수와 가뭄을 알며 병기와 갑옷 그리고 기근 및 질병을 다룬다. 점성적으로 밝지가 못하면 도리어 재앙으로 변모된다.

 

 

 

 

<운중군>

  

 
멱을 감는 난초들의 탕지 속에서

목욕하는 그 향기

화려한 채색이 담긴 옷은

꽃다운 영웅호걸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은

곤충들도 묶어두어 남겨두게 하고

화려한 불꽃은 비추고 비추이니

마치 가운데가 없어보이는 것과 같도다.

한기가 찾아들진데 임금이 계신 수궁이 걱정되네

다만 남은 날과 달에나 빛이 가지런해질 건가

용이 달려드는데 황제의 뜻에 복종하고

부상하여 날아오르는데 주밀한 업적을 가지고 올라

지상에서는 영험하고 신비스러움에 황홀하고

타오르는 열기는 구름 속에 갇히었도다.

기암괴벽의 기주를 보니 살아갈 여유 있음에

사해를 주유하도록 궁벽한 곳 그 어디에 있을까

임금을 그리워하는 긴 장탄식

극도로 수고스러운 마음에 솟아오르는 울분 어찌할 수 없구나

 

 
  
구름신이 풍성히 꽉차게 깔려있는 저 천장과도 같은 것을 말함이다.

또 다른 말로 <병의>라고도 한다.

 

 

 

<湘君> ‘湘君’이시여!

임금이시여! 행차하지 마소서!

보고 있으나 오히려 보여지지가 않습니다.

험난한 저 곳에 도대체 누구를 남겨두었는가요?

저 한 가운데의 섬 속에.

아름다움은 1초간만 머무른다고 해도

마땅히 다스려야 하겠지요

가득찬 내 마음은

계수나무로 만든 배에 올라 타는 군요

원과 상강을 몰아 파도가 없게하고

흘러가는 강물을 안정시켜

바라보는 것은 저기 저 우리 임금

아직 오시지 않으셨구나

부르고 불러보는 피리의 복잡한 가락으로 얽히어진

내 마음은 누구를 그리워하고 있는가!

용을 몰아치고 몰아가서는 북방을 정벌하고

나의 길로 방향을 틀어 ‘동정’호로 와서는

피리로서 정박하여둔 채

소반을 아름답게 꾸미고

손요의 풀들과 매화의 펄럭임

바라보는 강물의 일렁임은 강포에서 극렬하고

저 큰 강을 가로지르며

일어나는 신령들의 혼은

아직도 다하여지지 않는데

나의 누이는 매달리며 나를 탄식하게 하는도다!

횡류하는 나의 눈물이 흐르고

그윽하게 그리워하게 되는 사무치는 임금에

옆으로 비껴서서

노를 저어 얼음을 깨고선 그곳은

눈이 쌓여져 있네

물 속에서 피리 향초를 캐고

부용을 나무 끝으로 캐내보네

마음은 누이만큼 수고롭지 않은데

은혜는 그리 가볍게 떠나가지도 않는구나

돌에 부딪히는 물결은 잔잔하고

나는 용은 날개를 펄럭이고

섞이어 어울림이 미덥지 않으니

원망이 길어지며

기다리는 것은 모두 믿지 못할 말들

나에게 한가롭게 지내지도 말라하네

자라와 노새는 강 언덕에 자리하고

석양은 북쪽의 물살을 끌어당기는데

새가 집위에서 머무르니

물들도 마루아래로 다 들어왔구나

강물 속에서 나의 옥패를 잡아끄니

아름다운 강포에다 내 옥패를 남기고

방초를 강 위의 섬에서 캐어다가

두와 같이 만들어 두니

장차 그곳에선 하녀들이 모여들까?

어찌 다시 얻을 수 없으랴!

어지러이 일어난다면 소요하여

포용의 마음으로 더불어 살리!

 

 

 

<湘君>

 

한 유향의 <열녀전>에는 “순은 옮겨진 곳(혹은 전쟁에 참여해 죽은 것으로 드러난다. 그 이유는 ‘옮겨지다’라는 글자가 순이 임금으로 있었으나 좌천되어 전쟁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실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전하기도 한다. 바로 굴원이라는 인물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백의종군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바로 순에게서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이 순임금에 대한 기록을 굴원이 그의 <초사> 속에서 처음 언급하였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창오’에서 죽었고, 두 왕비는 강상지간에서 죽어 세속에서는 이를 일러 상군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예기>에는 “순을 창오의 들판에 장사지냈는데, 대략 그의 두 왕비는 그를 따라 죽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주에는 말하기를 “<이소>에서 노래 불렀던 ‘상부인’은 순의 왕비이다”라고 했다. 한퇴지의 <황릉묘비>에서는 “상의 강둑에는 묘가 있는데, 황릉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이 전 시대에서부터 오래부터 세워져 있었는바, 요의 두 딸을 제사지내던 것으로 순의 두 왕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진의 박사가 시황제에게 아뢰기를 “상군이라는 것은 요의 두 딸로서 순의 비이다”라고 말했다. 유향과 정현은 모두 두 왕비를 상군이라고 여겼다. <이소>와 <구가>에서는 모두 그 ‘상군’이 있고, ‘상부인’이 있다. 왕일은 ‘상군’을 수의 신으로 보고 있는데, 상부인은 곧, 순의 두 왕비라고 말했다. (왕일은 굴원이 그의 작품 속에서) 순의 남정을 따랐던 ‘삼묘’ 뿐 아니라 ‘도’ 역시 원상지간에서 죽은 것이라고 여긴 것이라는 설명이다. <산해경>에선 말하기를 “동정의 산은 제의 두 왕비가 머무른 곳이다”라고 했다. 곽박의 이에 대한 말은 이 두 왕비라는 것을 ‘제순지후’라는 것에 합치시켜 그 부인을 위하여 조그마한 비를 내리게 하도록 한 것은 부당하며 다만 두 여인이라는 것을 가지고 천제의 여인이라고 여긴 것이라는 설명이다. 내가 보기에, 곽박과 왕일은 모두 본래의 의미를 잃었다. 요의 장녀인 아황은 순의 정 부인이며, 고로 ‘군’이라 하고, 차녀인 여영은 스스로 ‘항’이라는 것을 마땅히 여겼기 때문에 ‘부인’이라 부른다. (<논어>에는 타국의 여인이 되어버린 자국의 왕후를 일러 부인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고로 <구가>라는 단어는 아황을 군으로, 여영을 제자로 말하고 있는 바, 각각 그것을 가지고 명성을 지니게 된 것은, 이를 가지고서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의 ‘예’라는 것에는 소군이 있고, 군모가 있는 바, 그 바름을 밝혀 스스로 ‘군’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이다. (<공자가어> 속에는 순이 남으로 가서 행하신 덕행의 정치가 그 곳의 음악까지도 모두 정화시켜낸 것이라고 말하면서 순의 풍모는 ‘남’쪽의 풍성한 문화의 산물이자 그것과 어울린다는 말이 있다. 남의 그곳이라는 것과 굴원에게 있어서의 남방 그리고 순임금의 남정이라는 것은 모두 아름다운 어떤 것으로 내재화 되어 불려지게 된 정화이자 순수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자로가 알아듣기에는 부족한 점도 있었으니, 어떤 사상이 녹아들어가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최소 그 속에는 자로가 투영한 시각과 공자가 투영한 시각 그리고 기타 자공과 민자건이 투영해 낸 것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동일하게 보여지는 것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었다.)

 

 

<湘夫人> ‘湘君의 夫人이시여!’

 

 

堯의 차녀인 아영이 항복을 하니,

- 그 북쪽에서 온 오랑캐인 ‘渚’들에게

눈빛이 영롱한데 (상상만 하여도)

나를 슬픔에 빠져들게 하도다!

연하게 살랑대는 가을 바람.

‘洞庭’ 호수의 물결은

일렁이고- 나뭇잎은 떨어져 버리네.

흰, 薠草는 이 가을에

달리는 말들을 바라보기만 하고,

‘佳人’과 더불어 기약하네-

가을 날, 석양의 펼쳐짐을.

그 흰 臥薪의 薠草(짚 덤불) 속에는 새가 모여들기만 하는데,

투망은 어찌하여

나무 위로 던져지는가?

沅 江의 물줄기 주위에 자라나는

芷草와 풍성하고도 풍성히

자라나는 蘭草들

왕손인 저 ‘公子’를 그리워하지만,

감히 말 못한다네-

경황없는 사이, 홀연

먼 데를 바라보며,

흘러가는 저 강물을 보나니

저 물살의

보일 듯, 말 듯 한 소용돌이와 일렁임

麋 野의 짐승들은 그러나 어찌

저 ‘정원’의 한 가운데에서

풀을 뜯고만 있는가?

‘교룡’은 어찌,

물의 후예가 될 수 있었을까!

‘그 靜朝-’, 朝政으로 달려가는 ‘내’ 말은

아침을 내 닫는

강의 가장 힘찬 물살의 저 높은 곳에서,

석양이 넘어가는

서쪽의 그 끝.

가이네 대하여 소식을 들어보니,

나를 부른다는데-

장차 뛰어오르고, 내 달릴

‘나이와 늙음도 잊어버릴 偕老’ 세찬 그 강물의 건너감이여!

‘室’을 지어 세우고

그 강물의 한 가운데에

茨草의 저 무성한

박하의 향기를 덮고,

荃草 향기 일어나는 절벽에 세운

자줏 빛깔의 제단

채집하여 거두어 들여놓은 고혹적인 芳香

그것들은 지금 한 가득 ‘成堂’을 이루네.

계수나무 기둥들과 난초들과 각각의 橑木

‘辛夷’라는 (辛이라는 글자는 나무 끝에 서있는 새를 상형화한 글자라는 설이 있고, <주역>의 ‘明夷’라는 것은 나무에 걸린 태양, 동쪽에 떠오르는 태양이자, 한 마리 새이기도 하다고 했다. <노자>에는 ‘視而不見曰夷’라고도 말했다.)

붉은 새는 그 난간의 기둥(楣, 楣間, 鴟楣) 사이에서

노래하네.

仙藥이 깃들어 있는 이 房을

蘗藾(벽력, 피리, 징조 등등)이 없는 그곳에

장막을 두르고,

곱게 두른 장막을 거두고서는

아주 활짝 열어 재낀 채

백옥으로 채워진 곳에

앉아

水石과 蘭草를 다듬는 것으로

芳年을 보내리.

芷, 葺, 荷로 지은 초간 茅屋

마치 杜라는 옛 정취 비틀어진 그 집에서

이것저것 재어가며

억압 받듯 살면서

백가지 풀들과 합일되어버리는,

이 實在의 공간

‘庭’ 속이라 여기겠지-

허나,

廡門에 라도

芳馨이 솟아날까?

‘九毉’(의무려산, 구의산)라는 순 임금,

지아비의 ‘묘’ 에는

‘죽은 귀신’이 되어

두 아내가 찾아오리. (순이 먼저 비극적으로 객사하여 죽고 나서 두 왕비가 죽은 것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신령들과 묻 영령들이

함께 와서는

구름과 같이 뒤 덮어

나의 옷소매도 끌고선

강 속에 뛰어들라 하겠지.

그러나

내 ‘초패’만은

남겨 둔 채

제물로 바쳐질

이 浦(강어귀, 항구)여!

고결한 인재를 찾으려,

올 이 평탄하기만 하고, 무미건조한

섬과 같은 이 洲는,

장송 떠나보내는 ‘杜’와 같이

장차 남겨져버릴 것이라네.

아주 멀리-멀리-

‘現在의 이 時’는

모여들 수 없고,

수군거리기만 한 謀議 속에서

다만,

일어나는 逍遙(騷擾, 小搖, 小謠)라는 것은

다만,

더불어 포용하고자

하겠다는 것일 뿐.

 

  


 
<대사명> ‘크게 運命을 받들던 者의 司命’

 

 

널리 열어둔, 天神들만이 出入하는

‘門口’

분분히- 나의 수레들은

그곳에 뒤덮여진 검은 구름 속에서

돌개바람을 주무르며

먼저 내딛고

폭우는 일어나는 먼지들을 씯고 가네 (涷雨는 바로 석달 열흘 혹은 삼일 밤낮을 내리붓는 비, ‘靈’이다. 상당히 기우제에 대한 것들도 암시하고 있다.)

저 君은 그러한 飛翔을 運走하듯 달려가면서

아래를 향해

텅 비어버린 저 ‘扶桑’도 뛰어넘어

우리 두 女人을 따르려 하네.

뭉게뭉게 일어나는 무리들은

저기 아홉 능선 위로 펼쳐진 국토(九州) 위에서,

어찌, 장수라거나

요절이라는 것을

‘내 속에다 심어두고 숨겨두라는 것인가요?’

높이 날아오른다는 것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飛翔이며

맑은 우주의 ‘一氣’를 타고

陰·陽을 다스려보세.

‘나’와 君은

목욕을 재계하고선,

바삐 제촉하여

하늘에 계신 上帝를 도와, 이끌어서는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무덤 ‘九坑’에로 가보세.

신령스러운 옷을

나도 입고

君도 입고

玉佩는 육지의 것이니

떨구어 멀리하고,

높이 둘러쳐진 한 개 저 그늘은

저기 위 하늘 높이 뜬

‘태양’

衆生의 알지 못함과

蒙昧

는 바로 내가

다 이루어 해냈던 바인 바,

성글은 麻의 줄기를 꺾어보았던-

그것은,

아름다운 玉質의 화려함 속에서

장차 남겨지는 것은

‘安居’라는 것으로부터의 분리일까.

늙은 자의 허망함과

무상해져버린 시계는

이미 지극한 곳에 다다랐으니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가까워지네.

더더욱 소원해져만 가면서도

‘신룡’을 타고서도 넘실대기만 할

수레의 물결과

높은 낙타의 콧등과 같은, 아득한

우주 속의 저 ‘沖天’

계수나무 가지를 엮어,

길게 세워두고선

서쪽 변방의 저 오랑캐들을

걱정하듯 사무치는

번민과 애수의 그 사람

「번민과 애수의 그 이는

어찌될까? 하는 수 없어

고뇌가 지금까지 여전히-

썩어 없어지지조차 않는데,

지독한 그 사람, 그 운명

마땅하게 그럴 수밖에 없던

까닭이 있었다면,

그 누구가

분리되며, 그러고서는 또

합일하리

가능이나 한 것일까?」 (감정이입과 그의 이중 시선이 독자로 하여금 느껴지게 한다. 즉, 굴원이 가진 역사 시대에서 현실 자신의 상황이라는 것과 매우 결부되어 합일된 자의 바라봄이 그가 처했던 사회 현실에로 투영된 것이다.)

 

 

 

 

<주례>에는 대- 와 소-라는 것으로 관직을 양분했는바, 대라는 것은 먼저이며, 처음이고, 우편이면서도 긍정적이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소라는 것은 말기이며, 나중이고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서, 소라는 것으로 수식되는 직책은 나쁜 어떤 것을 받아든 자의 사명과도 같은 것이며, 대라는 것으로서는 흥기하여 맡게 되는 그런 커다랗고 서로에게 희망을 안겨줄 직책이다. <주례>의 대종백에서는 ‘초료’를 하여서는 (향을 불살라서는) 제사를 지내던 중에 사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중국의 고대에는 명이라는 글자를 함부로 쓸 수가 없고, 종래 삼강오륜에 상부 혹은 앞에 위치하던 자가 그 뒤에 거하는 자들이나 아래에 거하던 자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하늘이 내리는 천명’과도 같은 것으로 받들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는 대종백이니 만큼, 왕이 명하는 것을 말하는 사명이며, 유협이 밝히기도 한 것으로 시 속의 송찬이라는 것 그리고 잠명이라는 것 등은 기도하는 자가 노래하는 기원의식이 깃든 노래일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러므로 <구가>라는 형식은 기도문이며, 사명을 다하기에 앞서 축원하는 노래로서 그것은 굴원에 의해서 종말을 앞둔 자가 자신의 심원을 바쳐 노래하는 기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즉, 굴원이 자기 나름대로 창작한 것이지만 그것이 고대 축원문 혹은 기도문의 형식을 띄고, 국운의 사명을 다해 노래부르는 자의 노래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초혼’이라는 노래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나, 서사시인 만큼 여러 장으로 분류된 <초사> 속에서 <대사명>은 ‘역사성이라든가 객관적 성격’이 <초혼>보다 더 강하다. 그러므로 <구가>의 뒤에는 <천문>이 오는바, 일종의 루카치가 말한 작가의 역사철학적 각성 속에서 역사 사건을 자기나름으로 재구성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세계 내 존재로서 인간이 가지고 지녀야 할 바른 인간 사회의 총체성으로서의 재 면모가 어떠해야 하는 것인가를 상당한 문학적 완성도로 소화시키고 승화시켜냈음을 공통된 감정으로서 읽을 수가 있다.

<星傳> 속에는 “‘삼대’라는 것이 있어 상대에서 올라가 사명을 부르짖었는바, 그런 자가 태위이며, 또, 문창궁은 다음의 네 번째에 위치한 자가 말하는 것이 바로 ‘사명’이라 했다. <사기> 천관서 속에는 ”문창의 여섯 별 중에서, 제 네 번째의 그것을 일러 ‘사명’이라 한다”고 했다. <진서> 천문지에는 “‘삼대’라는 것에는 여섯 개의 별이 있는데, 균형을 이루면서도 보기 좋게 占居하는데, 서쪽에 가까운 文星의 세 별은 상대라 말하기도 하고, 사명을 다 한다고 했다. 이는 주로 전 생애와 장수를 관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두 가지 종류의 사명이 있다. (‘장경’과 ‘태백’이라든가, ‘직’과 ‘궁’을 가리킨다.) <제법>이라는 책에는 ”왕이 서면, 일곱 가지 제사를 지냈던 바, 제후는 다섯 가지를 연다. 이에는 모두 ‘사명’이 각각 있다”고 했다. 疏에는 “사명은 궁중의 소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서> 속 교사지에는 “荊인이 지닌 巫·俗적인 풍습에는 ‘사명’이라는 것이 있다. 기쁘거나 말하는 자는 ‘문창’이며, 제 네 번째의 별을 가리킨다. 옆에 두루 선 다섯 신하들은 ‘사명’의 역할을 하며, 이 들은 각각의 별들을 이름 짓는 것이다. 이들은 앎과 지혜 그리고 생과 사를 주관하며, 하늘의 운행이라는 것의 변화라는 것을 도와 보충해 주고, ‘악인’을 주살하며 착한 바를 기르고 교육하고 양생한다. <대사명>은 “乘淸氣兮御陰陽 맑은 우주의 일기를 타서는 음과 양을 다스리고”라고 말하고 있으며, <소사명>에는 “登九天兮撫彗星 아홉 가지로 얽힌 저 무시무시한 하늘 위로 올라가선 어두운 종말을 고한다는 저 귀신같은 ‘혜성’을 떡 주무르듯 하리”라고 말하고 있는 바, 대비가 이루어지는 이러한 문장들은 종말담론이 이루어져 횡행했을 수가 있는 역사적 실체에 접근할 수도 있으며, 그것은 또한 궁중에서 어떤 소소한 신명으로도 될 수가 없었던 바, 참혹한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궈웨이와 위치우위가 말하던 <구가> 속 노래 부르는 자의 祝과 巫는 주술적 속성으로서의 ‘사명’(창궐하는 병의 治癒와 기근의 극복 및 기우제와 마귀의 퇴치 그 전쟁의 승리)을 다하고자 그 ‘사명’이라는 언어를 기록하여 노래부르고서는 청년들을 이끌어 축제의 한 마당 속 왕과 뭇 신들의 신명과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 신명을 이끈다고 말했던 것이며, 이는 이러한 매개물적인 속성을 통하여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어’ 풍성한 탄생과 풍요로움의 상징을 위해 신께 기도하면서 음악을 위시하여 춤과 가무 그리고 희를 벌이는 것이다.

 

 

 
 
<소사명> ‘어두운 운명을 부여잡을 그 ‘사명’이여!’
 
 

 

가을날의 난초들은

노루, 사슴 그리고 말들의 먹이가 될 뿐이지만,

당하에 줄지어

벌이어 섰네.

녹색의 연한 이파리와

그 흰 가지들

향기를 품은 풀들의 은은함과 오묘한 향기가

내게도 스미는 듯, - 가을 날의 난초는 無香의 극치로서 단지 생과 삶에의 의지, 그 超魂의, 焦 魂의 욕망과 의지를 엿보게 한다.

저 ‘두 부인’은 스스로 아름다운 자식을

가졌는바,

천하에 거하는 만민의 무성하게 피어나는 그들, 그 ‘자손과도 같은 향초(蓀)’들은

그런 싱싱하고 젊은 그들에게 있어서 마저도

어찌 지독한 우수와 번민이 없으리.

가을날의 난초는

푸르고 또 푸른데,

녹색의 저 바라다 보이는 연한 잎이여!

자색의 빛깔을 지닌 질경이(莖) 풀과도 같이

滿堂에 가득 모여든

아름다운 이 여인들!

홀연 외로움과 더불어

나의 눈은 빠져버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는

말 못하고,

나오게 되어서도 그와

이별할 수조차 없네.

회오리 바람을 일으켜버린

구름을 가득 실은 장대히 솟아오른

저 깃발!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태어나서는

헤어져 버려,

영-영- 만나지 못하는

즐겁지만,

즐겁지 않은

새로운 서로의 앎과

지식.

박하향기 품은 옷

아름다운 허리띠

훈훈하게 피어오르는 아름다움과 그리고

다가와서는

홀연

사라져 감-.

석양은 잠들고

황제는 교외에서

‘임금이시여,

그 누구가 마땅히

구름과 구름의 축제를 기다리고만

있겠습니까?’

여인들과 더불어

노니는

아홉 강물 위에서,

부딪히는 바람

은 물살과

물결을 격앙시키고,

여인과 함께

목욕을 재계하며

‘함지’에서

희고도 고운 여인의

머리카락,

따뜻하고 밝아라-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고서는

오지도 않는

바램을 맞으며

황망히-

불러보는 호쾌한 노래!

드넓은 천정을 덮고

모여들은 비취 빛

공작새의 앉아 있는

모습

‘구중천’에 올라서는

‘혜성’도 주무르리!

긴 칼을 부여잡고,

여린 치기의 사랑스런 艾女를 - 구중천과 현포 그리고 천문 관측을 하던 경험의 기록들이다.

포획하여, (한 나라 때의 고사를 더불어 군중에서 군의 사기의 충천을 위하여 젊고 아름다운 처녀를 잡아다 목을 베어 희생제물로 화하게 하였다는 고사가 존재한다.)

뭇 자손과도 같이 자라난 풀들은

천하 만민의

외로우나 당당히

백성이 부여잡을

바른 덕이 될 것을.

 

4. <소사명> ‘어두운 운명을 부여잡을 그 ‘사명’이여!’

‘소사명’이라는 편명 자체가 하나의 비극을 말하고 있는 시편으로 비극 속 애잔한 사랑과 희생에 대한 사명감과 희망을 함축하고 있다. 굴원의 수사학을 예로 간단히 압축하자면 : 긍 + 부 = 소긍이며 부 + 긍 = 긍정에의 지향이며, 긍 + 긍 = 반어적인 긍정이며 부 + 부 = 극단적인 부정 혹은 소극적 긍정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자크 데리다의 이중 중복과 전락한 이차성의 과제를 시 속에다 투영해 본 것이다. 이는 굴원의 ‘이소경’이 매우 힘찬 낙관적인 마음과 기세 그리고 전쟁의식과 투쟁의식이 존재하고 게다가 소리 없는 혁명을 노래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5. <東君> ‘동방의 임금이여!’

 

돈후하고 두텁게

덮쳐오는 흰 광명은

장차 ‘동방’에서

나오며,

나의 붙들어 둔

방패를 비추어 줄

‘부상’으로부터-

내 말을 매만져주며,

평안을 기도해 보는

말의 전신과

밤은 교교히 떠오는

저 흰- ‘달’과

이미 그리고

가득차올라 버린

밝은 달빛과

‘신룡이 몰아주는’ 배(舟)를 몰아,

우레를 올라타고,

구름을 채워넣은 깃발을 들고

울렁이는 뱀의 비늘같은

그 ‘깃’의 펄럭임과

긴 ‘장탄식’에

장차 저 위에서

마음은 낮게 깔린 바닥에서

다시 휘돌아

고뇌와 후회와 회상만이-

마주쳐질 때,

서쪽 지방에서 몰려올 오랑캐들은

목소리 한 번

맛깔나게 들려오니,

음탕한 그쪽 나라 족속의 여인들

바라다만 볼 그 참담함 앞에

잊자! 그

돌아옴일랑.

급박한 지휘자(師)의

길게 타는 거문고 소리-

섞여 울려지는 북소리와

퉁소와 종 소리는

옥으로 치장하여

‘피리’가 울리고

생황이 울려

그리워 사무치게 되는

‘축제를 지휘하며 청년들을 가르쳤던’ 靈保와

그 아래에서 같이 놀던

현량한 각각의 젊은이들.

둥글게 돌아들며 춤을 추는

飛舞와

공작새의 모습을

흉내낸 몸짓

‘시’를 펼치고,

모여서는 춤을 춘다네

마땅히 그 속에서 운율을 울려

절묘한 음악과 합해서는

신령한 영혼들은

올 것이다

어둠. ‘몰락’에

가려져 버린

이 날에.

청운의 꿈과 소망과 사랑.

의 옷을 입고,

흰 무지개의 치마를

입은 채,

긴 화살을 장전해서는

‘저 높이 뜬 하늘 天’ 속에

살고 있다는

그 너구리를 쏘아 맞히리!

나의 활시위를 가늠하고 맞추어

당겨서는

그것이 더러운 구더기 속에

쳐박혀 버릴테니

‘북두 성’ 그 커다랗고 거대한 하나의 동쪽에서 떠오른

황홀한 태양의

國·祖를 도와

계수나무 꽃으로

빚은 술을 마셔보리라!

내가 모는 말 고삐를 쥐어선

높은 낙타의 콧등

위로도 비상하여

어둡고 흐리게 깔려있는

그림자를 헤치고-

동쪽으로 가셔보세나 - 羿의 射陽에 대한 고사를 서술한 것으로 그 만큼 비극에서 희망으로 적극적인 투쟁의 의지는 소리 없는 평화와 함께 찾아오는 것으로 그러한 극적 반전과 카타르시스가 이 단락에 함축돼 있다.

 

 

 

 

<博雅>에서 말하기를 “붉은 빛으로 밝게 비추이는 신령스러움” 그 동군은 ‘태양’이며, (혹은 그 날, 혹은 굴원이 맞았던 종말의 어느 한 ‘날’에 대한 상징이다. 白과 朱는 모두 ‘태양’에 대한 그 빛에 대한 은유이다. 물론, 오색의 하나인 황과 흑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사물은 모두 최소 다섯가지의 성질을 지녀, 이름도 다섯가지이며 혹은 일곱 가지이거나, 아홉가지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통일 왕조의 맨 처음인 진 왕조에서부터 만물 각각은 음과 양이라는 것과 오색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확정적인 진리를 발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기록들을 보게 된다.) <한서> ‘교사지’에는 ‘동군’이란 말이 있는바, “한 대의 임금들은 이 ‘동군’이라는 것에 제를 지냈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이는 ‘태양’ 토템 신앙의 하림, 강림에 대한 의인화이다. <사기> 정명 그리고 <장자>의 정고보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양과 그와 관련된 역사 주체는 다름 아닌 백성이었으며 그 당시의 주군은 태양과 같이 온화했다. 이는 <대학> 속의 사상이기도 한 명덕, 지어지선 그리고 친민과 신민이 모두 이 放逐諸鬼와 미신타파와 하루 12*2의 시간분할에 대한 역사 사건의 비유로서 모두 온장돼 있는 극적 성격의 서사시라 할 만하다.

 

 
 


 

‘물의 神, 하백(河伯)이여!’

 
 
 

女人과 함께,

가져보는 노닐음

그 아홉 물줄기의 강 위에서

맞아오는 바람은

일으키네-

횡으로, 저 강물의 파랑을

‘水車’를 타고선,

박하향의 뒤덮임이

두 신룡을 몰아가고

‘驂螭’ 그 뿔 없는 용으로

말을 희롱하듯,

‘곤륜’ 위에 올라

四海의

外極도 바라다보며

마음은

날고 뛰듯 격앙되어

‘호탕하리라!’ 그리고,

날은 장차 저물겠지

悴悵히 초췌하게-

돌아옴일랑, 잊자!

오로지, 저 끝에선 浦에 도착해

어두운 내 침상 위에서나

가져볼 ‘회포’

물고기의 비늘로도 모옥 집을 세우고

용담도 만들어

자색 빛깔의 조개껍데기로 궐을 만들어

세우고, 붉은 궁전을

지어보자.

신령한 기운이 어찌

물 속 ‘용궁’에만

있을소냐.

흰 자라 등을 타고

문어들을 쫓아낸다는 말

이라는 것도.

여인과 함께 그녀와 더불은

‘유희’ 속에선

河에 사는 ‘渚-’ 洲에도 이르고,

물결이 세차고 파랑이

거세도 장차,

도래할 걸세-

河伯이 손을 도와

東行하여 줄,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내고 선

남포에선

파도가 아무리 거세게

일어나도

나가 맞으며

고깃 비늘처럼

늘어선 긴 행렬은

오히려 나를 저 곳으로

보내주겠지.

 

 

 

<산해경>에선 “정 중앙의 한 가운데에 심연이라는 곳에는 깊이가 ‘삼백 仞’과 같은데 氷夷가 살고 있다고 한다”고 했다. 빙이는 사람의 모습을 한 용을 탄 자인데, <목천자전>에는 “천자가 서쪽으로 정벌 원정을 할 때, 양우지산에 까지 갔다고 하며, 하백, 무이가 사는 곳까지 가서 머물렀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북극해의 북극 그리고 북극해의 얼음을 채집하였을 수 있다는 말로 환원이 가능하다. 고대 얼음과 관련한 전설로 얼음의 채집이라는 것을 위시해, 북극해의 얼음 그리고 서쪽 변방의 사람들이 전해준 말들 그 소식 ‘서쪽 어느 바다 위에 얼음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서쪽으로 가서 얼음을 채집하였던 고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빙이, 무이는 모두 풍이라는 것이다. <회남>은 또 풍지라고도 했다. <포박자> 석귀편에서는 “풍이는 8월 상경일 (상현달이 뜨는 때) 도하하다가 익사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에 계시는 상제는 하백을 위한 제를 드리기 위한 관서를 두었다”고 했다. <박물지>에는 “지난 날, 하우가 하를 보다가 긴 사람의 몸에 물고기 몸을 한 사람이 나타나서는 ‘나는 물 속 요정이에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백이란, 풍이가 득도하여 신선이 되어 하백이 되어버린 것이다. 상기의 모든 도리가 같을 손가?

 

 

 

 

<山鬼>‘저 산 높은 곳에도 사는 감쪽같은 彗靈의 鬼여!’
 
 

어떤 사람이 있어,

산의 외진 골짜기에

피리, 그 엷은 나뭇잎 가지들과 파리한 식물들을 덮은채

벌거벗은 여인을 데리고,

눈물을 머금은 채,

또한 웃어버리기도 하면서

저들이 나를

사모하면서 ‘요조’를 자처하네.

적색의 말을 타고,

무늬를 가진 짐승이 뒤따르니,

‘辛夷’의 붉은 새가 모는 수레는

계수나무로 엮은 깃발을

달았네.

石과 蘭을 덮고,

杜 속에서 衡을 가진채 정박한 듯,

향기와 훈정이 꺾이고,

그리워하는 바만 남아버렸네

내가 처한 곳은

깊고 황홀한 곳

하늘은 보이지 않고,

가는 길은 험하고

듣기도 어려워

홀로 나오겠네.

홀로 선다는 것을

보이며

산 위에서

눈은 둥글고 희게

아래로 내리네.

어둡고 미묘한

그 속에서

서쪽 변방에서 뛰쳐나올 오랑캐는

낮과 밤도 없이

동풍이 크게 일어날 때

신묘하고 영험있는

비가 와준다면

신령한 영혼을 남기려는

노력은 참담히 다만

돌아옴일랑 잊으세!

세월은 이미

스러져가는데

누가 나를

화려하게 세워줄까?

지초를 채집하여

산 간에서

바위 덩어리

엉켜있는 그곳

칡과 같이 무성히

자라나는 그곳에서

원한을 품은 公子는

초췌히- 돌아옴을

잊었다네.

임금은 나를 그리워하고,

가져보기도 힘들,

한 가한 세속의 제 事 속에서

山中人은 풍성히 아름답고 고혹적인 향기를 피워내는

杜와 같이

석천을 마시며,

소나무와 잣나무가 가져다준 그늘에서

임금은 나를 그리워하는데-

그러나

결정키 힘드네

폭풍우가 길게 이어지고

비는 매우 내려

천하가 어두운데

울부짖는 짐승소리는

밤에 더욱 시끄럽고,

바람도 거세게 몰아치니

나무는 죽은 가지들

부딪히는 소리를 내고,

‘公子’를 그리워하니

걱정 속에서

떠날 날을

기약해 봄세.

 

 

 

<장자>는 “산 속에는 夔가 존재해 있다”고 했다. <회남>은 “산에서는 부엉이가 양으로 나오는데, 초 나라 사람들이 제사지냈던 바는 어찌 모두 이러한 부류들일까?”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이런 시들을 분류함에는 진혼곡이나 만가시의 형태라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발두라는 것으로서 극형식에 있어 산발한 머리를 한 산곡을 불러 아버지에 대한 효를 다했다는 기록이나 ‘산 중달이 죽은 공명에게 쫓겨가다’라는 고사들은 모두 이런 죽은 영혼을 산 사람처럼 모시던 시나 극형식에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런 말들은 모두 ‘풍수’의 보이지 않으나 드러나는 현상으로서 산맥의 흐름 속에도 천신이 강림했다는 설등이나 천문의 관찰로부터 예언과 예언자에 대한 객관적 암시이자 투영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십삼경주소> 속에는 제례를 드리는 대상으로서 1. 신이며 2. 귀이다. 그것은 아마도 고려시대에도 드렸던 천산제가 국가 제례로 기록돼 있는 것을 보면, 신은 자연신이자 호국신이며, 귀는 인귀이고 또 죽은 모둔 것에 제례를 드리는 대상이라고 생각된다. 정의 표면에는 도철을 새겨넣었다는 말이나, <설문>에 ‘도자 수지로’, ‘노자 지지로’등의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하늘의 귀일과 강래로 제 사람들에게 천명을 깃들이나 이러한 방법은 모두 교화의 한 수단이었다. <노자>라는 책에는 ‘天生養育’이 바로 來라는 의미이다고 말하고 있다.

 

 

<國殤> ‘나라의 요절과 요절한 그 영혼이여!’
 
 

吳 땅의 창(일명 戟이라는 창이다. 한 가운데에 솟은 칼날이 있고, 옆으로 또 여러 가지를 쳐 세부의 작은 칼날을 가진 창이다.)을 들고 뼈로 만든 갑옷을 입고,

수레가 서로 바퀴살을 부딪힐 정도로 이어가니

짧은 칼을 든 무기들은 전사들이 들고선

맞대고는

깃발로 뒤덮어 버린 하늘은

적이 마치 ‘구름처럼-’

보이지 않는 하늘과 같은데,

화살이 엉켜지고 날리면서

떨어지니 기개있는 선비들이라면

먼저 나가 싸우라.

내가 벌여놓은 진세를

덮친다면,

나의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왼쪽으로 참마를 죽이며,

우켠으로 날카로운 칼날로

입힐 상흔과 상처를 도우려

霧는 두 바퀴살과도 같이

縶은 네 말들이 모는 수레를 박차려 드는 채찍-

옥으로 만든 곤룡포와 무기를

구해내거나 도와주어선

공격을 지지하세- 북을 울리라!

하늘이 명한 때를, 시대의 의미란

땅에 떨어졌고

왕이 가진 위의와 신령들은

怒하네.

엄숙히 ‘殺伐’을 다하기

위해서. (<주역> 리괘와 함괘에도 실려있는 중국 고대 선사시대로부터 내려온 ‘방벌’의 의미이다. <맹자>가 이를 더 명확히 하였다.)

높은 우리의 다짐을 위한 성소(原)과 몸소 일구어온 밭(堥)을 버리자.

나오고서는 못 들어가나니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언인 ‘만물은 같은 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명언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가고서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 비극적인 운명이여!

평원히 저 들판에선 성소는 홀연!

가는 길을 훨씬 멀어지게 하네.

긴 칼 옆에 차고,

晋의 각궁을 옆에 끼고 (<공자>가 말한 사추의 운명에 곡하며, 살아서도 화살 같으며, 죽어서도 화살 같았으리!라고 했던 진의 화살, 활이다. 晋 나라의 師인 師襄子, 趙簡子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중국 고대의 ‘사’라는 관직은 사광이라 일컫는, 師曠 한 명이 사를 맡았던 게 아니라, 총 3명으로서 두 명이 더 있다.)

머리와 몸이 분리도 되었으나

마음은 증명할

징벌할, 수조차도 없네!

신실함을 다해 싸우는

일찍이 든든히 박힌

‘용사’라면은

더더욱 창으로서 무력을 뭉게버릴 ‘武’라는 尙武의 精神을 가지고서

승리를 얻고, 전쟁에서 승리할테니

강인함과 강함의 필경에는

범할 수조차 없다네

몸 그 일신이 죽어버려

영혼으로써 하는 ‘신’들의

현시는

당신의 혼과 백을 귀수의 짐승으로

化하게 할테니.

 

 <國殤> ‘나라의 요절과 요절한 그 영혼이여!’

(殤이라는 글자는 <논형>을 쓴 왕충이 말하길, “나이가 차지 않아서 죽게 되는 것을 殤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 말은 이하를 수식하는 ‘요절’, ‘귀재’라는 말들과 모두 통한다.)

 

 

國殤이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을 말한다. <소이아>에서는 “주인이 없는 자의 영혼과 그 사람의 죽음을 상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禮魂> 혼신의 예를 갖추어 다하는 예의 혼

 

 

예를 갖추어

모아 혼이 나간 듯,

넋이 빠진 듯 치는

‘군악’

파초의 바람 풍기는 일으켜지는 향초 잎을

오로지 하여

전하는 춤과 가무-

아리따운 여인이

노래부르니

아름답고 절도있도다

아, 봄날의 난초는

가을 날의 국화인가

길고도 길게 끊어지지 않네

그 지나간 옛 것의

종말이라는 것도.

 

8. <天問> : ‘저 하늘에 한 번 물어보리!’

 

<천문>이라는 것은, 굴원이 지은 작품이다. 어찌 하늘에 물어본다 말하지 않았으랴? 하늘이 매우 존귀하여 물어본다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천문’이라 말한 것이다. 굴원이 방축되고나서, 소우한 마음에 수가 깊어지고 초췌하게 됐다. 산과 택을 방황하면서 모든 육지 위 지역들을 지나쳐 갔다. 저 하늘의 높고 밝게 빛남에 ‘어차’ 부르짖으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초 나라에 선왕의 묘가 공경대부를 모신 사당이 있음을 보고 천지 산천의 신령을 지도화, 도표화해 그리고는 기묘하고 존귀하고 위태롭고 어리석은 모든 것들에 주술로서 퇴마하며 비판을 가하기도 했는바, 옛 현인과 성인들이 이상한 사물들에 행사하던 바도 있었음을 전한다. 모든 곳들을 두루 다니면서 떠돌아 다녀도 권태롭게 여기지 않고, 차라리 그 아래에 거하여 휴식을 취하고는 그들이 모두 남겨 전했던 도서들에 우러러 보면서 절벽에 그려놓기도 했던 데 대해서는 차마 물어 볼 수나 있었을까? 사기와 기만에 눈물과 분노로 가득 차 유려한 솜씨로 자신의 수심 가득찬 생각들을 모두 다 풀어놓았던 것이다. 초 나라 사람들은 굴원이라는 자에 매우 애석해 했는데, 공감을 얻은 그가 쓴 논설과 기타 기록들에 대해서 그 문장이 지닌 의미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차례대로 운운해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기군각오라는 굴원의 <초사> 속 사상이 엿보인다고 했다. 이 말은 임금에 기탁해 엄청난 깨달음을 일깨우도록 하는 글이라는 말이며, 그리하여 그 임금이 폭군으로서 드러내게 되었다는 설명이 있다. 이는 바로 <천문>과 같은 기탁하는 성격이 강한 시를 예로 들 수 있는데, 그것은 <천문>이라는 시에 “역사와 수와 천문 관찰 경험 그리고 정확하다는 속성과 각오를 담아 그의 목적을 이뤄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속에는 오히려 구중천 사상과 시간 분할의 역사적 사건 그리고 민중과 굴원과 굴원이라는 실재 그 사람의 지기로서의 그 인물이라는 세 가지가 중첩되어 있다. 즉, 독자가 읽고 해석하기에 이런 세 인물의 주체성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출처 : http://philos0702.blog.me/50194110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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