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을신수 역사산책 (2) 2011년 중국 재스민 혁명 실패
중국 재스민 혁명에 대해 측국으로 알아보려면,
먼저 이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중국에게 무슨 영향을 주려고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설명에 앞서 재스민 혁명의 시작과 진행과정 및 결과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의 중부 도시 시디 부지드(인구 12만)의 시내에서
대학졸업 후 취직을 못하여 무허가 과일노점상을 하던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판매허가가 없다는 이유로 경찰관이 상품과 저울을 몰수하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이에 부아지지는 경찰의 부당한 과잉진압에 항의하기 위해 오전 11시 30분
지방청사 앞 도로 한 켠에서 휘발류를 몸에 끼얹어 분신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이후 부아지지의 가족과 지인들이 항의시위를 벌였는데
사촌이 휴대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이 사건이 전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2010년 12월 18일 벤 알리 튀니지 대통령이 부아지지가 입원한 병원에 방문하여 위문하였지만,
2011년 1월 4일 오전 5시 30분 부아지지는 사망합니다.
부아지지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튀니지 전역에서 높은 실업률과 물가,
부패한 정권, 인권침해에 반발한 민중들의 항의시위가 시작되었고
1월 5일 부아지지의 장례식에서 경찰이 시민들의 행진을 저지하였으며...
1월 7일 중부도시 타라로를 시작으로 시위대는 정부청사와 은행, 경찰서 등에
방화, 약탈 등의 행위를 하기 시작했고 보안군과 경찰이 총을 쏘아 시위대를 사살했습니다.
1월 14일 노조 총파업이 일어났고, 벤 알리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며
24년 독재정권의 해산을 발표하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였습니다.
이 재스민 혁명은 튀니지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여러 중동 아랍 국가로도 퍼져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민주화 혁명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이 봄의 기운은 오랜기간 독재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에도 닿게 되었고...
온라인을 통해 중국시민들이 '중국 재스민 혁명'을 지지하며
2011년 2월 20일 오후2시 여러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인 집단시위를 하려했지만,
공안당국의 인터넷검열 강화, 글 삭제, 검색금지, 참여자 강제연행, 가택연금 등을 통해
시위를 원천봉쇄하였습니다.
인권 운동가, 정치 활동가, 변호사, 시민 등이
시위에 참석하려고 집밖을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경찰에 의해 가택연금, 외출금지를 시키고...
상황이 안좋으면 구금을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실종,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장소에 수백여명의 시민들이 모였지만,
대기하고 있던 경찰과 특수기동대가 연행하는 등의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 날에는 국가차원에서 인터넷과 휴대폰 인터넷을 모두 제한했다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권을 무시한 강경대응으로 몇 차례의 시위를 무산시키고 해산시켰습니다.
중국 재스민 혁명 시위는...
중국정부가 다른 시위들에 비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한 시위였다고 국제내외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https://www.ytn.co.kr/_ln/0104_201102220801171479
그러므로 태을신수 측국을 통해 확인을 해볼 수 있는 사안이라고 판단되었고,
2011년 태을신수 측국을 보면 태을적년수 10,155,928로 임자원 6기(하원) 양40국이 됩니다.
중국 기준으로 '중국 재스민 혁명'의 시발점인 튀니지를 보면
유궁(대족) 정소, 천임, 상문입니다.
이 궁자체는 별문제가 없지만,
대충궁인 묘궁(고충)에 태세, 사신, 대유, 천심, 경문이 유궁을 충(沖)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에 의해 깜짝 놀랄만한 파괴력을 가진 침략이 발생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위는 부패한 독재정권의 타도와 세계화 흐름에 따른 민주화 혁명이라는
정치적인 명분이 있기 때문에 현 공산당 정부를 가리키는 태을이 있는 궁을 함께 봐야 합니다.
곤궁(대무) 태을, 주대, 객소, 천영, 생문으로
시위에 동감하는 공산당원도 있었지만 주류는 아니어서 약간의 방해가 될 뿐...
공권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하여 철저하게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켜 정권을 흔들리게 할만한 요소를 처리합니다.
(정부차원에서 대학교 교수들에게도 학생지도에 대한 별도지침을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시민들이 먼저 움직였기에 객(客)이 되고,
이를 막고자 중국 공산당이 뒤늦게 대응했기에 주(主)가 되는데...
주산은 27하화이고 객산은 19잡중양 양화라 파워게임에서 객에 해당하는 시위대가 지게 됩니다.
가뜩이나 막강한 공권력을 자랑하는 중국인데다 주산이 하화고 숫자도 객산보다 크니
시도는 좋았지만 아직은 천시(天時)가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사건에 대한 중국의 전근대적인 대응으로 인하여 중국은 국가 위신이 떨어지게 되는데
국가의 위신에 해당하는 군기가 있는 축궁(양덕), 군기, 시격, 천금, 사문을 보면...
국가의 위신이 떨어지지만 사문에 의해 그 흉함도 줄어듭니다.
중국의 전근대적인 방침은 하루이틀 있었던게 아니고
이를 어느정도 힘으로 누를 수 있는 강대국의 입장이라
잠시 국제적 이슈는 되지만 결국 흐지부지하게 사그라 듭니다.
예로부터 인군이 덕을 닦고 국정을 올바르게 운영하며 백성들을 부유하고 편안하게 되도록 힘쓰면...
천시(天時)의 흉함 또한 사라진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태을신수 측국의 흉함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설사 독재정권이라 할지라도 올바르고 정직하며 투명하게 운영한다면, 시민들의 불만은 아마도 크게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당수의 중국시민들이 부패한 독재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중국정부는 부패척결과 투명한 국정운영 그리고 민심안정에 더욱 힘쓰며
세계화의 흐름에 발맞춰 나아가야 부국강병의 길을 걸을 수 있다라고 봅니다.
아마도 중국시민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잿속에 살아있는 작은 불씨와 같이
이 시위의 영향력이 남아있으리라 봅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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