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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태을신수 역사산책 (3)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by 예경 2021. 9. 9.

 

태을신수 역사산책 (3)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중 하나인 일본제국이 식민지배하는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조선에서 일제의 억압, 수탈, 약탈 등에 반발하여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를 표출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이자 독립운동입니다.

 

저희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배우는 그 독립운동이죠...

이제 곧 다가올 815 광복절을 맞이하여 오늘은 31운동에 대한 태을신수 측국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1운동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많은 분들이 31운동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므로...

여기서는 31운동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1919년 일반적인 태을신수 포국

 

원래의 1919년 태을신수 포국은 위와 같은데,

이것은 한반도 조선의 데이터가 부족한 강대국 기준의 포국도이기 때문에...

한반도 일제강점기 기준으로 새롭게 태을신수 포국을 해서 보아야 합니다.

 

1919년 한반도 일제강점기 기준 태을신수 포국

 

포국도를 보면 건궁, 미궁 2개의 궁이 특히 눈에 띕니다.

 

먼저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조선의 인구 759만명중

약 16.3%인 288만 4000명이 감염되었고 14만명 정도가 사망하여 민심이 혼란한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승하 후,

일제의 고종 독살설이 퍼진 것을 계기로 백성들은 분노하였습니다.

 

참고로, 고종황제의 사망하기 몇개월 전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다이쇼 덴노에게 '조선은 평온하다'라고 보고하였는데, 고종의 독살설로 분위기가 바뀐 것이죠.

 

거기에 마침 작년인 1918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한 민족자결주의 발언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의 민족자결론이 함께 맞물려 영향을 주어...

고종의 장례일(因山日인산일)에 맞추어 전세계에 조선이 독립의지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평화적 방법으로 비폭력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1919년 3월 1일 광화문 앞 칭경기념비각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까지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모이는 것을 기점으로,

장례일 전날과 당일인 3월 2일과 3일은 경비가 삼엄하기 때문에 3월 1일로 봉기하는 날을 잡았고...

 

민족대표 33인과 학생들의 주도하에 종로 광화문 앞에서 시작되어 국내와 전국으로 퍼지고,

조선총독부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이후 독립선언서는 만주, 연해주, 일본, 미국 등으로 퍼져나가갔습니다.

 

 

포국에서는 미궁(천도) 태을, 계신, 태세, 천예, 경문을 봐야 합니다.

 

1919년에는 일제강점기 시대로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통치하고 있던 시절이므로,

권력과 정치의 별인 태을은 대한제국이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됩니다.

(대한제국은 1910년에 멸망하였고, 이후 1945년 8월 15일 전까지 일제강점기가 시작됩니다.)

 

정치와 권력을 뒤흔들 큰 파괴력을 가진 깜짝 놀랄만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추가로 대충궁인 축(양덕) 천을도 함께보면 백성인들이 피를 흘린다가 됩니다.

바로 31독립운동이죠...

 

일제는 1911년 105인사건 등으로 당시 한반도 내의 독립운동 조직을 거의 괴멸시키고,

조선인들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어 1919년 3월 1일에 독립운동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합니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80630/90832298/1

 

日 보도통제 뚫고… ‘한국 독립운동 소식’ 마침내 전세계 타전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만세운동이 기습적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당황했다. 일경(日警)은 군중의 열광적인 만세 함성에 기가 눌렸다. 1910년 한반도를 강제 병탄한 이…

www.donga.com

 

그리고 밑에서 자세히 설명드리겠지만,

31운동의 여파는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해임(정치 권력을 뒤흔드는 파괴)으로 이어지고...

 

 

해궁(대의) 신기, 천충, 생문은 좌우궁에 객대와 시격이 옆에 붙어 있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배력이 크게 흔들린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http://www.100ssd.co.kr/news/articleView.html?idxno=59741

 

[3.1운동 100주년 되새기는 만세운동] 도시→농촌→해외로 확산… 일부 지역선 무력시위도 - 백세

[백세시대=배성호기자]3개월간 전국서 1692건 “만세”… 교사‧학생 등 지식인 유인물 뿌려서울·경기가 427건 최다… 경북선 철도운행 막고, 경찰 주재소 습격태화관 선언식을 계기로 시작된 3·

www.100ssd.co.kr

 

백세시대 [3.1운동 100주년 되새기는 만세운동] 도시→농촌→해외로 확산… 일부 지역선 무력시위도

3월 1일 이후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간 독립운동은 약 3개월에 걸쳐 한반도 전지역에 연이어 일어났고,

그 기간 동안 무자비한 학살, 가혹한 고문을 통해 무력으로 강제진압하였는데...

이 부분은 건궁(음덕) 시격, 주대, 오복, 대유를 봐야 합니다.

 

 

조선총독부를 방어하는 주대가 독립운동가 분들에 해당하는 시격, 대유와 충돌하는데

오복이 시격의 힘을 약화시키고 주대는 방어에 성공합니다.

 

 

조선총독부인 주산이 3 순양 양화, 독립운동가가 객산 27 하화, 정산 2 순음 음화로 

계산적으로는 객산이 매우 유리합니다.

 

그런데 '무력으로 치면' 총칼을 지닌 일제군인까지 투입한 조선총독부와 

비무장한 조선인들의 비폭력 독립운동이기 때문에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태을신수적으로 길(吉)하더라도,

현재 한국이 미국 본토를 침략해 정복할 수 있냐는 것과 똑같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죠.

 

그렇기에 단순하게 포국도만 보고 판단할게 아니라 현실적인 정세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아일보 '기미독립선언서 해외로 어떻게 전파됐나'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31독립운동의 목적은 일제와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미국과 러시아 강대국들에게 독립의지를 강하게 보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독립운동 집회는 일본군에게 진압되었지만, 31운동과 독립선언서는 전세계로 퍼져나가

여러 강대국들의 눈을 한반도로 향하게 했고, 몇몇 일본인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31운동을 계기로 저희 민족은

1919년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를 수립,

1919년 4월 2일 경성에서 한성 임시정부를 수립,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

1919년 4월 23일 한성정부의 이승만이 워싱턴DC에 대한공화국 활동본부 설치,

1919년 5월 13일 상해 임시정부와 블라비보스토크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 통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내에서는 사회적 민족운동(청년운동, 여성운동, 소년운동 등)이 전개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독립군이 조직되어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항일 무장투쟁 절정기를 맞이하고,

미국한인협회인 대한인국민회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임시정부에게 전달하였으며,

시간이 흘러 1929년 광주학생 항일운동,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동아일보 항일 언론투쟁가 파하 이길용 선생님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을 비롯한 여러 항일운동의 근본이 되었으며,

한반도와 멀리 떨어진 핍박받는 약소민족들에게도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주산 3 순양 양화를 꺾은 객산 27 하화의 지속적인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봅니다...

그리고 정산 2 순음 음화이므로 최종적으로 주산을 이긴 객산이 이롭게 됩니다.

만약 31독립운동이 단순한 무력투쟁이었다면, 이러한 파급력은 나타나지 않았을듯 싶습니다.

 

즉, 이 31독립운동은 집회자체는 일본군에게 제압당했지만 그 정신만큼은 제압하지 못했고...

저희 민족 마음 깊숙이 자리잡아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다양한 행동을 하게 되었으므로,

실패한 운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어떤 종목이든 일본만큼은 이겨야 한다라고 

 

저희 민족의 올바르고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비폭력 행동과 천시(天時)가 묘하게 잘 맞아 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

 

 

당시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3개월 동안 시위진압과정에서 7,509명이 사망했으며,

15,961명이 상해를 입었고, 46,948명이 구금되었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소각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무자비하게 진압을 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통계이자...

 

묘궁(고총) 객소, 민기, 천임, 두문을 통해 민간경제에 타격이 있음을 보여주고,

태을이 있는 미궁의 계신, 태세도 한반도 경제의 위축을 보여줍니다.

 

 

자궁(지주) 객대, 직부 천충, 생문이 오궁(대위) 정계, 정대, 합신, 천심, 사문을 치니

조선총독부나 독립운동가 분들이나 '중재나 화해불가'라고 볼 수 있을듯 싶습니다.

(참고로,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31운동 진압에 강경책과 유화책을 함께 썼다고 합니다.)

 

 

이렇게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무단통치(武斷統治, 무력통치)에서 문화통치(文化統治)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갑자기 31운동이 일어났다고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급선회한게 아니기 때문에

 진행과정을 함께 보셔야 합니다.

 

초대 조선총독(1910~1916)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무관, 즉 육군군인이었고...

한반도에서 강압적인 무단통치(武斷統治, 무력통치)를 행하였는데,

2대 총독(1916~1919)인 하세가와 요시미치 역시 육군군인으로 동일하게 무단통치를 하였습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총독을 그만두고

1916년 일제의 제18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가 1918년 9월 29일 내각이 붕괴되고...

다이쇼 데모크라시(1910~1920년대)를 이끈 일본 최초의 문민총리 하라 다카시가 제19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하라 다카시는 온경파에 속했고, 이후 하라 다카시가 이끄는 내각은 조선의 31운동에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식민지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조선총독부와 대만총독부를 통제하고자

군인만 총독을 할 수 있던 것을 문민 총독(문관 출신 총독)도 총독을 할 수 있게 바꾸었는데...

대만은 문관 총독이 부임했지만, 조선은 여러 이권문제 등으로 여전히 무관 총독이 부임했습니다.

 

또 하라 다카시는 조선총독부에게 한반도 지역 조선인들의 반발을 줄일 수 있도록

유화정책으로써 문화통치를 지시하였습니다.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초대부터 진행되어온 '조선 토지조사 사업'을 1918년에 완료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내각총리대신 하라 다카시가 "해외 국가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잔혹한 탄압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라"라고 주문한 것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으로 인해 군부와 정계 그리고 자국민에게도 비판을 받게 되었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과잉진압에 대한 비판과 국제사회에서의 일본 이미지를 실추시킨 것,

제암리 학살 사건 등 기독교인 학살 사건으로 일본인 기독교도들에게 비판을 받는 등의 연유로...

 

초대 총독과 이후의 여러 역대 조선총독들은 임기를 마친 후 정치적 요직에 많이 등용되었지만,

그는 1919년 10월 조선총독 자리에서 해임되어 귀국한 후 어떤 요직에도 앉지 못한 채 은퇴하고 여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동아일보 1924년 11월 5일 "모이나 주지 말았으면"

 

이후 1919년 9월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해군대장출신)가 부임하여

하라 다카시의 지시대로 문화통치를 하였는데...

 

말이 문화통치일 뿐 이 기간 동안 순사(경찰)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식민통치에 비판하는 신문 언론에는 폐간, 기사삭제 등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인에 대한 고문과 탄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고,

회유책으로 민족을 버리고 친일파가 된 조선인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온화한 방식이 아니라 어찌보면 한층 더 교묘하고 교활해졌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화통치 기간중 조선총독부는 1919년 일본의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에게

조선 민속에 대한 조사를 맡기고 1941년까지 22년간 여러 보고서를 남겼습니다.

이 보고서들은 경찰을 동원하였다고 하며, 그렇게 작성된 보고서 제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

조선의 귀신

조선의 민간신앙

조선의 풍수

조선의 무격

조선의 점복과 예언

조선의 유사종교

부락제

석전·기우·안택

조선의 향토오락

 

또한 조선총독부는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 이마무라 도모(今村枉)에게도

조사를 맡겼는데 그 보고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 젠쇼 에이스케 >

조선의 성씨, 조선의 취락, 조선의 범죄와 환경, 생활상태조사(평양, 수원 제주, 경주, 강릉),

조선귀화족의 발전·조선청년 성공록 등

 

< 이마무라 도모 >

인삼사 1~7권, 조선풍속집, 역사민속 조선만담, 풍속관계자료촬요(고려이전, 이조실록, 이조각종문헌) 등

 

 

그 외에도 책검색에서 '조선총독부'라고 치시면 정말 다양한 서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식민지배에 쓰기 위해 만든 이러한 보고서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제강점기 때의 귀한 연구자료로써 쓰이게 됩니다...

 

 

이렇게 31운동은 일제에게도 조선총독부에게도 큰 당황감을 주었고,

태을신수 측국으로도 그와 관련된 별들의 조합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당시 조선총독부의 자료만으로도,

독립운동가 분들의 자료만으로도 알기가 어렵고...

 

독립운동가 분들의 자료와 조선총독부의 자료 그리고 당시 일제의 자료까지

모두 있어야 비로소 전모가 들어납니다.

 

그렇기에 태을신수를 현대에 디테일하게 운용하려면 여러 정보들이 생명입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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