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태을신수 측국에서 못다한 중국 이야기...
사실 1950년 한국전쟁 측국과 크게 관련은 없지만,
어느정도 관련성이 있는 중국에 대한 추가내용이 더 있습니다...
https://cafe.daum.net/yeseowon/VcYl/121
중국의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대해 후회한다라고 하고 소련과 북한을 비판했지만...
마오쩌둥이 어리석어서 소련과 북한에 등떠밀려 한국전쟁에 나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처음에 전쟁개시일을 알려주지 않아 혼란이 있었을 뿐...
실질적으로 중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무엇보다 큰 이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6일에 본색을 들어내고 10월 경에 시작한 티벳침공이 그것이죠.
사실 한국전쟁이 계획되기 몇개월 전부터 티벳침공은 천천히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1950년 1월 1일에 중국 국제방송(라디오 베이징)은 친중적인 입장을 가진
티벳불교 서열 2위 10대 판첸라마의 요청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중국인민해방군이 티벳을 해방시킬 준비가 되었다고 방송했습니다.
6월 25일 소련과 북한이 중국에게는 전쟁개시일을 알려주지 않고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마음의 준비없이 전쟁이 시작되어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회복합니다...
9월 16일 티벳 대표단이 델리에 있는 인도 주재 중화인민공화국 대사를 역임하고 있던 위안중셴(袁仲賢)을 만났을 때,
위안중셴은 '티벳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분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의 국방, 무역, 외교를 담당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면 티베트를 "평화적으로 해방"시키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티벳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협박을 했습니다.
1950년 9월 19일 체폰 샤캅파 티벳 재무부 장관이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후 티벳의 수도 라싸에서 치열한 논의가 이루어지던 중...
10월 6일~7일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300만 티베트 인민을 해방시키고
중국의 서부 변경에 대한 방위를 공고히 한다'는 명분으로
인민해방군 4만명이 티벳 동부국경을 침공해 진사강을 넘었고
10월 19일 티벳 국경에 가까운 창두 주변을 포위했습니다.
10월 21일 라싸 정부는 중국 공산당 정부와의 협의를 위해
베이징에 주재하고 있던 티베트 대표단을 철수하도록 지시했고
티벳의 지도자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달라이 라마의 신분이 보장된다면
일부 요구 사항을 제외한 최초의 요구 사항에는 합의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사실상 항복한 것입니다...
참고로,
티벳 국경에 가까운 창두 주변을 포위한 10월 19일은
중국이 중국인민지원군 26만명을 결성하여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압록강으로 출정한 날로
이미 티벳침공의 선수는 쳐놓고나서 한국전쟁에 나선 것이죠...
11월 7일 티벳정부가 유엔에 티벳침공에 대한 국제적 대응을 호소했지만,
10월 25일부터 중공군, 북한 VS 국군과 유엔군의 교전이 시작되고
패배로 기울어진 북한의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하며...
다시 한번 급변하는 한국전쟁에 UN의 온 시선이 집중되어 티벳침공에 신경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타쌍피를 노린 참으로 지능적인 전략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으로 중국 공산당의 계획이 무(無)로 돌아간 것도 한가지 있으니...
중화민국 즉 대만의 점령입니다.
1949년 12월 7일 국공내전으로 중국 공산당에게 패한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대만의 타이페이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중국 전지역 지배를 성공한 공산당은 국민당이 도망간 대만까지 점령하여
완전한 '하나의 중국'으로 통일하고자 했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미국이 대만에 함대를 파견함으로써 공산당의 대만점령 계획은 좌초됩니다.
이때 대만점령의 기회를 놓친 중국은...
대만을 점령하여 '하나의 중국'이 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토하며...
지금까지도 호시탐탐 대만을 삼키려고 노리고 있습니다.
만약 625 전쟁 때문에 미군함대가 대만에 파견되지 않았다면...
중국은 티벳과 대만 모두 점령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중국의 진짜 속내는 625 전쟁 이전 또는 시작의 순간
티벳과 대만 모두 점령할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마오쩌둥의 한국전쟁 후회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통계적으로 생각보다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했기에 그런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유엔군과 한국군과 북한군 각각보다 더 많은 피해를 중공군은 받았기 때문에...
국가원수인 마오쩌둥의 입장상 '하나의 중국'을 위한 통일전쟁도 아닌 남의 나라 전쟁에,
이긴 것도 아니고 진 것도 아닌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어 버린 것.
그리고 소련과 북한이 쉽게 이길 수 있다라고 호언장담했던 전쟁에
너무나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은 통한의 판단미스였다고 생각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부분도 알고 계셨으면 하여 추가적으로 글을 올립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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