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존 이야기 #2 / 위덕대학교 김영덕 교수님
앞에 이어서 올립니다.
귀한 글을 나누어주신 김영덕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삼십칠존이야기- 20.금강인보살
발심하자마자 법륜을 굴리는 보살
연꽃이 가진 상징적 의미 가운데 화과동시(華果同時)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꽃은 꽃이 지면서 열매를 맺지만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힌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꽃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일에는 인과의 도리가 함께 함을 볼 수 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처럼 원인에는 이미 결과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백미터 단거리 경주나 마라톤의 경우에 맨 처음 내딪는 걸음에는 목적지까지의 결과가 이미 담겨있다. 모든 걸음에는 처음의 원인과 나중의 결과가 깃들어있어서 걸음이 시작에 가까운지 목적지에 가까운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작과 끝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것을 더 확대하면 지금의 이 순간은 무한한 과거의 결과이면서 무한한 미래의 원인이 된다.
매 순간 순간은 인(因)이면서 동시에 과(果)이기도 하다. 우주의 모든 것이 원인이면서 결과로서 무한한 가능성으로서 흐르고 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만일 어떤 모임에 갔다고 하면 지나간 온갖 인연의 결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 동시에 미래에 전개될 무한한 원인으로써 그 자리에서 인연이 전개되어가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방향, 내가 일으킨 마음, 나의 행위 모두는 결과이면서 원인이고, 무한한 수렴과 확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 논리로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바른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발심을 하면 그 시작이 되는 발심속에는 결과로서의 바른 깨달음이 담겨있게 된다. 이것을 초발심시변성정각이라 하며 처음에 발심할 때에 문득 바른 깨달음의 결과가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면 또한 궁극의 목적인 중생교화에 나서야 한다. 대일경의 삼구법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보리심을 인으로 하면 대비를 근본으로 하고 궁극적으로 중생교화의 방편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심하자마자 법륜을 굴릴 수도 있게 된다. 대승불교 보살의 이념인 자리이타가 전후 구별없이 전개되는 것이다. 발심과 동시에 법륜을 굴리며 어떠한 대상이든 남김없이 설복하여 진리에 눈뜨게 하는 위력을 갖는 이러한 가능성을 재발심전법륜보살이라 한다.
법륜이란 법의 바퀴를 가리키는데 륜(輪)이란 범어로 차크라라고 하며 바퀴처럼 둥근 모양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우주의 바퀴를 범천의 바퀴라 하여 이를 돌리는 자는 신들 가운데서 최고의 신이라 생각했으며, 지상에서도 이상적인 왕은 7개의 보물을 소유하고 그 하나인 윤보를 굴리는 자라고 하여 전륜성왕이라 불렀다. 륜은 일종의 무기로서 커다란 바퀴 양쪽에 창을 달았기에 굴러가면서 적들을 무찌른다고 해서 고대 인도에서는 이보다 더 효과적인 무기가 없었다. 그래서 륜을 굴리는 왕은 인도를 통일하여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전륜왕이라고 하였으며, 윤보는 어떠한 적들도 다 물리치는 고대인도제왕의 표치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이미지를 불교에서 가져와 부처의 교법이 중생의 번뇌 망상을 없애는 것이 마치 전륜성왕의 윤보가 산과 바위를 부수는 것 같으므로 법륜이라 하였다. 또 교법은 한 사람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늘 굴려서 중생들을 이롭게 함이 마치 수레바퀴와 같으므로 법륜이라 한다. 법륜을 지닌 부처님은 전륜성왕이 윤을 가지고 사방을 제압하듯이 부처의 설법도 외도들을 모두 설복시키는 법의 바퀴를 굴린다고 비유되었고, 이를 전법륜이라 한다. 굴려야 할 법륜 가운데 특히 밀교의 가르침을 금강륜이라 한다. 진리를 상징하는 8폭의 법륜은 밀교를 가리키는 말로서 금강승과 함께 사용된다.
재발심전법륜보살의 이미지는 금강계만다라에 들어오면서 금강의 명호로써 금강인(金剛因)이라 개명하였다. 그리고 진리를 펼치는 전법륜의 특성에 따라 서방 월륜 중 무량수여래의 좌측, 즉 북방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보살은 '금강정경'에서 일체여래의 큰 바퀴라고 부르며, 또한 전법륜대보살ㆍ평등심을 일으켜 법륜을 굴리는 대보살ㆍ금강장ㆍ보리도량ㆍ재발심전법륜보살이라 한다. 기타 다른 경전에서도 금강륜보살, 전법륜보살, 재발심보살로 표현된다. 백팔명찬에서는 금강륜ㆍ마하이취ㆍ대견실ㆍ묘전륜ㆍ금강기라고 하는데 모두 법륜을 굴린다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밀호는 불퇴금강이다. '금강정경'에서 그 출생을 밝힌 문단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평등심을 일으키는 전법륜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법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들어가시니 이 이름을 일체여래의 대륜삼매라 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금강륜의 상을 출현시키고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 머문다. 그런 다음에 저 금강륜의 상 가운데로부터 일체세계에 극히 미세한 티끌처럼 많은 여래상을 내어서 이에 평등심을 일으켜 묘한 법륜을 굴리는 등 일체부처의 신통과 유희로써 일체세계에 널리 시여하고 나서, 저 평등심을 일으켜 법륜을 굴리는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평등심을 일으켜 법륜을 굴리는 대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금강인보살을 출생한 일체여래의 대륜삼매는 큰 법륜을 굴리는 삼매이다. 이 삼매로 인해서 중생들 모두가 법계만다라에 깨달아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다시 '성위경'에는 이 보살의 삼마지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비로자나여래는 내심에서 금강인전법륜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인전법륜삼마지지로부터 금강륜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사섭법으로 일체중생을 포섭하며, 무상보리에 머물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인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관자재왕여래의 왼쪽 월륜에 머문다.”
중생을 포용하며 무상보리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업을 위한 설법을 해야 한다. 설법하는 것이 윤을 굴리는 것으로 비유되며, 그 윤은 전륜성왕의 윤처럼 어떠한 상대든지 설파하여 보리심을 불러 일으키는 대용맹심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보살의 인계를 결하면 오묘한 법륜을 굴릴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전법륜의 지혜가 설법교화의 인이 되며 전법륜지를 내증으로 하는 보살을 금강인보살이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정과 지혜의 힘으로 스스로 깨달은 즐거움을 자신만이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에게 돌려 함께 이익케하고자 법륜의 바퀴를 굴리되, 그 견실하기가 금강과 같다. 그 설법하는 교화의 인은 물러섬이 없는 전륜성왕의 천하평정의 보륜과 같아서 중생심이 있는 곳이면 언제든지 법신과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만다라세계의 법을 굴리는 보살이다. '금강정경'에 금강륜의 인계를 견고하게 결하기에 모든 만다라를 주재하게 된다고 하며,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다음과 같이 견고한 금강법륜이 중생교화의 굳센 서원[因]을 상징함을 설한다.
“나는 금강인보살이다. 나는 세간의 아주 귀한 감로이다. 나는 금강의 위대한 가르침의 바퀴이다. 내 몸의 색과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 온갖 중생, 시방세계의 산천과 강, 연못, 초목, 수풀은 다 홍련색이다. 나는 지금 금강법륜을 시방세계에 세 번 굴린다.”
앞에서 금강리보살의 반야의 바른 지혜를 인으로 해서 금강인보살은 금강의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 따라서 '약출염송경'에 ‘금강륜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일체여래가 설하신 법륜을 굴린다’고 그 결인의 공덕이 찬탄되며, '이취석'에서는 ‘재발심전법륜보살’이란 서남쪽의 월륜에 있으면서 일체여래의 네 가지 륜을 나타낸다. 그것은 금강계륜, 항삼세륜, 변조복륜, 일체의성취륜이다. 진언행을 닦는 보살은 이와 같은 륜에 들어감으로 해서 사종지인에 의지하여 십육대보살을 성취하고 문득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한다’고 금강인보살의 동체인 재발심전법륜보살의 묘용을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묘용을 상징하기 위해 금강인보살은 삼매야형으로 오른손에 팔폭륜을 가지고 가슴 앞에 대고 있는데, 이것은 팔정도의 지혜를 바탕으로 해서 금강법륜을 시방계에 굴리는 자세를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를 수인으로 나타낼 때에는 양손을 금강권으로 하고 두 집게손가락을 나란히 펼쳐서 가슴 앞에서 돌린다.
삼십칠존이야기- 21.금강어보살
말없이 전하는 지혜로운 비밀어
언어의 기능은 전하는 데에 있다.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뜻을 소통하기 위하여 소리나 문자 등의 수단을 사용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문화에 대한 참여자로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언어를 통하여 사람은 사회집단을 이루어 생존하고, 자기가 속하는 사회·문화 속에 참여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또는 둘러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가운데 언어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언어는 전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언어를 학습하고 이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며, 언어를 통해 경험을 전하는 능력은 문화로 알려진 모든 행동양식 발전의 기초이며 인간다운 삶의 근본이다.
그래서 언어는 소통과 진보의 도구이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때에는 도리어 장벽이 되기도 한다. 지구상의 많은 국가가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국가 간에 또는 부족 간의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국가에서도 교류가 뜸한 지방의 언어는 다른 지방어와 만날 때 소통이 쉽지 않다.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의 습관이나 음식을 고집하는 것처럼 언어의 습관을 쉽게 놓지 않으며, 다른 지역의 언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이것은 과거에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평화롭게 지내기보다는 영토와 식량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대부분인 것이 그 이유라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영역확장과 재물을 추구하기 위하여 오히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현재 세계의 젊은이들이 타국의 언어를 익히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소통의 영역을 보다 넓히기 위한 노력이다. 과거에도 불교를 세계에 전하기 위해서 인도의 승려들이 수많은 지방어가 있는 인도에서, 그리고 서역과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로 퍼져나갈 때에 이들이 법을 전하기 위한 방법도 언어였고 장벽이 된 것도 언어였다.
불교경전에서는 이러한 언어의 문제에 관한 언급이 있다.
'화엄경'에서 “한 음성 가운데서 한량없는 음성을 내어 중생들의 차별한 마음을 따라 골고루 이르러서 그로 하여금 해탈케”한다고 한다. 중생의 근기에 맞는 다양한 설법이기도 하지만 언어가 막힐 때 접하게 되는 장벽이라는 점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밀교에 이르러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모든 언어에 통달한 금강어보살이 등장한다.
“나는 금강의 언어이다. 나는 지금 모든 중생에게 완전한 성취법을 수여한다. 내 몸의 색과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 온갖 중생, 시방세계의 산천과 강, 연못, 초목, 수풀은 다 홍련색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금강권을 하고 입의 좌우에 두고 오고 가는 모습을 만드는 것이 마치 금강어언보살과 같다. 이 인을 결하면 온갖 중생의 언어에 통달한다.”
한 음성으로 무수한 언어를 설한다고 하는 구절은 여러 경전에서 설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보살을 금강계만다라의 금강어보살에서 볼 수 있다. 혹은 과거에 언어소통으로 인해 곤란을 겪었던 전법승이 갖고자 했던 수승한 능력이 금강어보살로 승화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금강어보살에게서는 언어가 달라서 법을 전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유가유기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서 ‘금강언보살’, ‘금강어언보살’, ‘무언대보살’이라 하며, 모든 중생의 언어에 통달하여 모든 중생들의 언어대로 알아들을 수 있게 제법의 실상을 중생을 위하여 설법한다. 백팔명찬에는 ‘금강어언ㆍ금강염송ㆍ무언의 깨달음을 수여함ㆍ금강의 최고 성취ㆍ금강언설’로 그 덕이 찬탄된다. 이러한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강어보살의 특징은 설법에 있다. 학문의 완성을 언어의 표현에서 보듯이 불교의 가르침은 언어가 되어 중생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이것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하는 지혜문 사보살의 궁극적 활동목적이기도 하다. 중생들로 하여금 지혜를 증장시키고 번뇌를 없애고자 사보살 가운데 금강법보살은 중생의 청정함을 지켜주는 뛰어난 지혜의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번뇌를 아직 끊지 못한 중생들에게 금강리보살은 법열의 마음을 가지고 반야의 바른 지혜를 일어나게 하고 일체의 번뇌를 끊게 한다. 또한 곧 발심하자마자 곧 법륜을 굴리는 보살이 지혜를 인으로 하는 금강인보살이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비밀어를 지닌 금강어보살에 의해서 일단락되는 것이다.
그러나 금강어는 '금강정경'에 ‘일체여래의 비밀어’와 ‘무언대보살’로 표현되듯이 말없이 전하는 지혜로운 비밀어이다. '금강정경'에서 그 출생을 밝힌 문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무언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법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들어간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나오자마자 곧 저 덕을 갖춘 금강수보살은 일체여래 진리의 문자를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이로부터 금강염송의 모습을 출현하고 일체여래의 법광명을 내뿜으며, 일체부처의 신통과 유희로써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무언대보살신을 출생한다.”
이와 같이 금강어보살은 무언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하였으며, 무언으로써 법광명을 내뿜으며 고요히 퍼지는 가르침이 금강어보살의 설법이다. 진리의 문자로부터 출현한 금강염송도 입을 다물고 묵묵히 하는 염송을 가리킨다. 이것은 앞에서 ‘저 견고한 본래의 무신으로 말미암아 금강살타신을 출현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무언의 설법에서 금강과 같이 견고한 설법이 보여지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여래의 음성은 방소에 머무르지 아니하여 말이 없다.”고 한다. 정해지지 않은 모습이기에 모든 언어에 맞는 무한한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 여래의 음성이다.
다시 '삼십칠존심요'에는 다음과 같이 무언의 의미를 설한다.
“진여법계는 평등한 경전이다.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이 원만하고, 대승불교의 공성를 깨달아 열어 펼치지 않음이 없다. 이에 뛰어난 법을 모든 부처님과 함께 담론하며, 율을 외우고, 훌륭하게 일대의 진언을 여기에서 준비한다. 이것이 말없는 무언보살의 언어삼마지지이다.”
만일 법을 설하되 그 법에 고정불변의 성격이 있어서는 참된 가르침이라 할 수 없다. 대승의 공을 설한다면, 그 가르침마저도 종국에는 강을 건넌 뗏목처럼 버려야 하는 것이 언어이다. 왜냐하면 언어의 특성은 무엇인가 완결된 것, 고정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대승의 공은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는 것이므로 고정성을 지니는 언어로써는 그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마치 '유마경'에서 문수보살이 불이(不二)법문에 대한 견해를 유마거사에게 물었을 때에 그 유명한 침묵으로 설법을 대신한 것과 같다. 침묵이란 상대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분별의 차별심을 텅 비운 본래심의 입장이며, 진실과 하나가 된 불이의 경지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무언의 설법을 성취하기 위하여 '금강정경'에는 ‘금강결인과 상응하므로 최상의 금강어를 성취한다’고 하며, 또 '약출염송경'에는 ‘금강어언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염송의 성취를 얻는다’고 그 결인의 공능을 설한다. '성위경'에는 그 언어를 떠난 무언의 삼마지지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밀어의 언설을 떠난 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이러한 삼마지지로부터 금강의 혀[舌] 위의 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시방 일체중생의 못된 꾀를 없애며, 네 가지 걸림없는 말솜씨를 얻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어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관자재왕여래의 뒤쪽 월륜에 머문다.”
여기에서 금강의 혀는 온갖 중생의 언어에 통달하면서도, 우리들의 상대적인 언설이 아닌 절대의 금강어로 사람들의 마음에 품은 온갖 못된 꾀와 악행을 제거하고, 사람들에게 진리를 이해하게 하는 언어를 떠난 언어를 상징한다. 이와 같이 말없이 사람을 납득시키는 수승한 지혜와 뛰어난 변론의 묘용을 상징하기 위하여 금강어보살은 오른손으로 여래의 혀[舌]을 들고 가슴에 대고 있으며, 좌권은 무릎 위에 놓고 있다. 이것은 지혜의 비밀어를 가지고 중생들에게 설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삼십칠존이야기- 22.금강업보살
부사의한 교화행을 실천하는 보살
업(業)이란 짓는다는 뜻이다. 마음으로 하는 작용인 생각이 뜻을 결정하고 업을 짓게 하여 선악의 업이 생긴다. 업은 생각하고 사유하는 정신적인 뜻의 업과 한번 뜻을 결정한 뒤 바깥으로 표현되는 몸의 업과 입의 업으로 나뉜다. 곧 신구의 3업이다. 3업은 모두 인간의 의식을 기본으로 하여 펼쳐지는 것으로 한 개인의 삶이나 여럿이 모여있는 복잡한 사회생활까지도 물의 흐름과도 같이 끝없이 흐르는 우리 의식의 전개과정이다. 우리의 의식이 업으로 드러날 때에는 힘을 가지게 되어 과보를 불러일으킨다. 업력은 역학적 인과관계에 의하여 그 강약에 따른 인과응보의 결과로서 선악의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업의 논리에 의하여 개인이 주변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순환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일상생활의 굴레로서 윤회하는 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해탈이라 한다.
그렇다면 업으로부터 해탈한 이후의 행위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해당되는 업이 바로 부사의업이다. 그 옛날 인도의 니련선하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성취한 석가모니불이 그대로 열반에 들었다면 우리는 불교를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범천의 권청에 의해 열반에서 방향을 돌려 중생계를 향하였으며, 전법이라는 업을 행하셨기에 우리가 지금 불교의 가르침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은 자의 중생제도를 위한 활동은 생사에 윤회하여 그 과보를 받는 중생의 업과는 달리 부사의업이라 한다. '대승기신론'에서 설하는 부사의업상은 지정상(智淨相)이라고도 하며 진실한 지혜로써 증득한 진여의 근본 깨우침 위에 갖추어 있으므로 다른 이를 교화하고 이익케 하는 부사의한 작용이라 하고 있다. 밀교에서는 이러한 작용을 행하는 존재를 일컬어 법신의 변화한 바, 즉 변화법신이라 한다. 만다라에 등장하는 여러 불보살은 근본인 비로자나불로부터 전개되는 다양한 활동을 상징하는 변화법신의 형상화이다.
금강계만다라에서는 북방에 그러한 역할을 맡기고 있으며 이 방향은 중생들이 보기 좋아하는 몸으로 변화하여 중생제도활동을 펼치는 불공성취여래의 세계이다. 불공성취여래의 해탈륜에 속하는 네 보살은 불공성취여래의 성격을 따라 대정진의 사보살이라 한다. '삼십칠존출생의'에서는 이들 사보살의 출생에 대해 일체여래의 뛰어난 공예와 대비의 갑옷, 두려움 없이 조복함, 성취에 머무름이라는 개념으로부터 각각 금강업⋅금강호⋅금강아⋅금강권의 네 보살을 출생한다고 하여 일체여래의 중생을 교화하는 대정진바라밀을 성취하는 활약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 첫 번째가 금강업보살이다. 정진바라밀을 성취한 북방 불공성취여래의 4친근의 첫째로서 '금강정경'에는 ‘일체여래의 헛되지 않는 갖가지 사업’이라 하며 ‘갖가지 사업을 행하는 금강업보살’이라 표현된다. 다른 경전에서는 ‘금강갈마보살’, ‘비수갈마대보살’, ‘교업대보살’, ‘허공고보살’이라 하며, 백팔명찬에는 금강의 뛰어난 활동⋅금강의 오묘한 가르침⋅모든 장소에서 두루 행함⋅금강의 헛되지 않음이라 하며 밀호는 금강불공⋅선교금강⋅변사금강으로 불린다. 업이라는 명칭이 말해주듯이 여래의 사업의 덕을 관장하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여래와 모든 보살에 대한 공양 사업을 성취시키는 존이기 때문에 그 행위를 중시하여 뛰어난 교화행을 실천하는 보살로 그 덕이 찬탄된다. 바른 지혜로 관찰하고 훌륭히 설하는 행위가 모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그 미묘한 가르침이 세간 생활상에서 낱낱의 실천수행임을 보이고 있다. 이 보살은 무량겁에 스스로 수행하고 증득하여 선교방편으로 다른 이를 교화하는 사업을 성취하였다. '금강정경'에서 이 보살의 출생을 밝힌 문단은 아래와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일체여래의 교업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갈마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들어가니 이 명칭을 일체여래의 갈마삼매라 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일체갈마평등지로써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잘 통달한 까닭에, 곧 저 구덕지금강자는 일체여래의 갈마광명을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이 광명으로 일체세계를 두루 비추고, 섞여서 일체여래의 광대한 갈마의 세계를 이룬다. 저 일체여래의 가이없는 사업의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고, 일체여래의 뛰어난 업을 행하는 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위와 같이 교업대보살삼매, 즉 갈마삼매에서 교업대보살신이 출생한다. 이 보살은 갈마금강저의 모습으로 상징되는데, 갈마금강저란 금속으로 만든 삼고저 두 개를 십자 모양으로 조합한 형태로서, 여래의 작업을 상징하는 삼매야형이다. 끝의 세 갈래는 신구의 삼업의 뜻이며, 십자의 결합에 의해서 중생과 부처 두 세계의 삼업이 명합한다는 뜻이 있다. 또는 모두 12개의 고(鈷)가 유전(流轉)의 십이인연을 깨어부수고 열반의 12인연이 되는 의의 등을 설한다. 진각종 심인당의 난간에 이러한 금강저의 무늬로 장엄해 놓고 있다.
갈마금강저를 들고 있는 금강업보살은 지혜를 바탕으로 하여 바르게 일체를 관찰하고, 바르게 선설하고 교화하는 활동을 상징한다. 그 활동을 원만히 행하기 위하여 '삼십칠존심요'에서는 다음과 같이 금강업보살의 동체인 허공고보살의 공능을 설하고 있다.
“허공을 변화시켜 창고로 삼으며, 그 가운데 진보를 허공 중에 채우고,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일체제불을 공양한다. 이 허공고보살은 바로 비수갈마보살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에서 허공고보살을 비수갈마보살이라고도 하는데 비수갈마란 뛰어난 활동이라는 의미로서 바로 금강업보살의 다른 이름이다. 어떠한 장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비수갈마를 통해서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금강업보살의 근본서원임을 알 수 있다.
'성위경'에서도 금강업보살이 허공고보살과 동체로서 일체중생의 광대한 공양을 성취함을 보이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업허공고장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업허공고장삼마지지로부터 금강업의 광명을 유출하여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고,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여래와 여러 보살께 광대한 공양을 하게 한다. 돌아와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업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불공성취여래의 앞쪽 월륜에 머문다.”
이와 같이 이 보살은 허공고보살의 삼마지를 증득하였기에 여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는 광대한 공양의 활동을 펼치게 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금강업보살이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행하게 하는 일체의 공양이 헛되지 않은 묘업임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나는 금강갈마이다. 나는 금강불공이다. 반드시 정해진 결과를 얻는 것으로 헛되지 않다. 나는 갖가지 사업을 성취하고, 모든 장소에 도달하며, 갖가지 사업을 행하고, 묘한 사업을 성취한다.”
수행자는 금강업보살을 관함에 의해 금강업보살과 동등하게 모든 교화의 업에서 반드시 정해진 결과를 가져오는 금강불공의 갈마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취석'에서는 ‘모든 부처님께서 묘법을 설하심을 듣고 속히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채우고, 허공을 창고로 삼아 여러 중생계의 인연에 따라 모든 유정을 널리 구제하고 이익케 하고 점차 무상보리에 이르게 함을 교묘한 방편으로 삼는다’고 금강업보살의 동체인 허공고보살의 묘용이 설해지는데 그것이 다양한 공양으로 펼쳐진다.
따라서 이 보살은 모든 공양문의 중심이 된다. 공양문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유가경전의 가르침 가운데에서는 네 종류의 공양이 있다. 이른바 보리심공양·자량공양·법공양·갈마공양이다. 또 '소실지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다섯 종류의 비밀공양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8종의 공양, 16종의 대공양, 20종의 공양, 176종의 잡공양 내지 일체의 공양이 있다. 모두 다 허공고보살의 공양의궤 가운데에 섭입된다.
이와 같이 금강업보살은 수행자가 이타에 입각한 다양한 보시 등의 봉사행을 통하여 불의 묘법을 생활하는 가운데 모두 실천함을 그 묘용으로 삼는 보살이다. 금강업보살은 여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는 활동을 행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왼손에 금강권을 결한 다음 갈마령을 가지고 있으며, 오른손은 갈마금강저를 가슴 앞에 대고 있는 계인이 있으며, 수인으로는 두 손을 나란히 펼쳐서 이마 위에 세우고 있다. 이 인계에 대해 '금강정경'에서는 ‘갈마금강인과 화합하여 금강갈마의 사업과 동등하게 될 수 있다’고 하며, '약출염송경'에는 ‘금강갈마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일체여래의 사업에 수순하게 된다’고 그 결인의 공덕을 찬탄한다.
삼십칠존이야기- 23.금강호보살
번뇌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보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초기 경전 숫타니파아타에 나오는 전도의 선언으로 유명한 이 글귀는 불법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둘도 아니고 묵묵히 혼자 가서 법을 전하도록 권하고 있다. 그러면서 코뿔소의 뿔과 같은 모습으로 가라고 한다. 코뿔소의 뿔은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어무기이다. 즉 혼자라는 것과 방어한다는 의미가 이 구절에 담겨있다. 중생을 교화하면서 맞닥뜨리는 외로움과 어려움을 흔들리지 않는 결심으로 이겨내면서 나아가라는 뜻이다.
보살의 정진이 중생을 교화함이라면 교화에 따르는 어려움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중생들 가운데 때로는 교화하기 힘든 대상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교화하는 보살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도 있다. 이러할 경우 보살이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한다면 중생교화의 묘업은 이룰 수 없다. 삼십칠존 가운데 금강업보살 다음에 등장하는 금강호보살은 이렇게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견고한 갑옷을 가진 보살이다.
'금강정경'에는 ‘일체여래의 대정진을 의미하는 견고한 갑옷’과 ‘정진의 갑옷 금강호’라고 하며, 여러 경전에 ‘금강정진보살’, ‘승리하는 정진의 대보살’ 등으로 표현된다. 밀호는 ‘정진금강’이고, 백팔명찬에는 ‘금강수호·마하무외·금강갑주·대견고·상수정진·금강정진’이라 하여 누구도 적대할 수 없는 금강호보살의 특징을 찬탄하고 있다. '금강정경'에서 그 출생을 밝힌 문단은 다음과 같다.
“이때 세존은 다시 극난적정진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갈마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들어가시니 이 명칭을 일체여래의 선호삼매라 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나오자마자 저 덕을 갖춘 금강수는 견고한 갑옷과 투구의 형태를 이루어 출현하고 나서 곧 세존 대비로자나여래심에 들어가 합하여 한 몸이 된다. 이로부터 거대한 금강의 갑옷을 입은 형상을 출현하고 저 지극히 어려운 적을 상대로 정진하는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극난적정진대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극난적정진대보살신, 즉 금강호보살은 일체여래의 선호삼매로부터 출생하였으며, 금강의 갑옷을 입고 있는데, 이 보살의 삼매와 삼매야형에서 그 스스로를 보호하며 아주 어려운 적을 대상으로 정진하는 보살임을 알 수 있다. 인용문에서 난적은 금강의 갑옷을 입었으므로 적대할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성위경'에는 그 어떤 난적도 물리치는 금강호보살의 견고한 삼마지지를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호의 큰 자비로 장엄한 갑옷과 투구의 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스스로 수용하고자 금강호의 대자비로 장엄한 갑옷과 투구의 삼마지지로부터 금강갑옷의 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폭악하며 분노하는 중생을 잘 다스려 빠르게 자비심을 얻게 한다. 돌아와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호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불공성취여래의 오른쪽 월륜에 머문다.”
폭악하며 분노하는 중생은 보살의 교화활동을 방해하는 사악한 무리와 보살이 활동하는 데에 따르는 수많은 난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어려움을 맞닥뜨렸을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대비로 장엄된 갑옷과 투구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여 그 난관을 타파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저 악한 무리를 교화하는 것이다.
밀교의 수법 중에 수행자의 몸에 금강의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게 하는 것은 삿된 신들이나 악마의 해침을 방호한다는 의미를 지니면서 동시에 자신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여 내부에 있는 번뇌로부터 청정심을 보호하는 것도 의미한다.
왜냐하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범망경’에는 사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벌레 이야기가 나온다. 지상의 그 어느 짐승도 죽일 수 없는 사자가 오히려 몸속에 있는 작은 벌레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는 이야기이다. 사자의 뱃속에 살면서 영양분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벌레가 사자의 살을 먹어치워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지, 외부의 그 어느 짐승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언제나 적은 내부에 있다. 한 나라이든지 사회나 단체가 외부의 적에 의해서 궤멸하는 것보다는 내부의 적에 의해서 자멸하는 것이 상례이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불자들이 스스로 불법을 파괴하는 것이지 외도나 천마들이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단체뿐만 아니라 개인에게서도 그 개인을 무너뜨리는 것은 내부에 있는 번뇌들이다.
번뇌란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미혹하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이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 업을 짓게 되며,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 미혹의 세계를 헤매게 된다. 불교는 바로 이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번뇌에도 갖가지 분류가 있는데 예로부터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의 2혹설과 근본번뇌와 수번뇌로 나누어지는 2번뇌설이 널리 통용되었다. 견혹이란 사고·지식·인식작용에 바탕을 둔 번뇌를 뜻한다. 여기에서 견(見)은 지혜에 의해 얻어진 지식적인 내용을 뜻하며, 혹은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서 지혜로 제거할 수 있는 번뇌, 올바른 지혜를 가로막는 번뇌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가지고 있는 소견이 잘못된 것인 줄만 깨달으면 곧 없어지는 번뇌이며, 보기만 바로 보면 곧 해탈된다는 뜻을 가진 번뇌이다. 수혹은 정서적·의지적·충동적 번뇌로서, 그 번뇌의 성질이나 내용을 알았다고 해서 곧 바뀌지 않는 번뇌이다. 돈이나 명예나 이성에 대한 탐욕이 바람직하지 못한 줄도 알고 있고, 시기·질투가 나쁜 줄 알면서도 그러한 심리작용이나 습관이 일시에 제거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표면상으로는 견혹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반면, 수혹은 정신의 이면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인간의 생을 이끌어가는 번뇌로써 좀처럼 끊어지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견혹의 88가지와 수혹의 10가지 번뇌에 탐심과 진심과 치심의 근본번뇌에서 일어나는 10가지 부수적인 번뇌를 더하여 백팔번뇌가 되는 것이다. 또, 2번뇌는 근본번뇌와 수번뇌로 분류된다.
'대지도론'에서는 ‘번뇌라고 하는 것은 간략히 말하면 삼독이다. 번뇌의 습기란 번뇌의 남아있는 기운이다. 만약 신업, 구업으로 지혜를 따르지 않으면 번뇌가 일어난다. 비록 번뇌는 끊을지언정 습관은 끊을 수 없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 난타가 음욕의 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비록 아라한도를 얻었으나 남녀대중 가운데에 앉아 있었을 때 먼저 여자들을 보고 설법한 것과 같다. 부처의 일체지는 강력한 불과 같아 모든 번뇌를 태우고 다시 남는 습기가 없게 한다.’
이와 같은 난적을 상대하는 금강호보살은 금강계만다라 북방 월륜 가운데 불공성취여래의 오른쪽에 머무는데 이 보살의 동체가 되는 분이 반야보살이다. 대승불교에서 널리 알려진 반야보살이란 반야부경전의 본존으로 지혜를 본서로 하며 반야바라밀다보살이라고도 한다. 모든 부처가 깨닫는 데에는 반야의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불모(佛母)라 칭한다. 반야를 통해서 모든 부처님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부모 가운데에 어머니의 공덕이 가장 중하니 이 까닭에 부처는 반야를 어머니로 한다는 의미에서 반야불모라 한다.
즉 지혜로써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보살이며, 또는 이 부류의 성스러운 대중들의 통칭이다. 반야보살이 지닌 번뇌를 그쳐 깨달음을 얻는다는 반야의 이미지가 금강계만다라에서 금강호보살로 명칭이 바꾸면서 번뇌척결의 상징성이 강화되었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 ‘나는 금강호이다. 나는 금강의 갑옷이다. 견실하고 굳세어서 파괴되지 않는다. 나는 금강정진이다. 나는 시방의 무량한 온갖 중생을 수호하여 두려움이 없게 한다’라고 하는 표현은 바로 그와 같은 금강호보살이 반야의 지혜를 스스로 지키며 또 다른 사람의 내외에 있는 온갖 마장을 이겨내게 하고 굳은 마음으로 자신과 중생들 모두를 수호하는 강인한 서원을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금강호보살은 중생 가운데 특히 어려운 상대를 대상으로 이타를 행하기 위한 정진, 그리고 수많은 번뇌 가운데 극복하기 어려운 번뇌를 타파하기 위한 금강과 같은 정진의 묘용을 상징하기 위하여 금강갑주인을 견고히 결한다. 금강갑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금강으로 이루어진 몸을 획득한 금강호보살은 두려움이 없이 뭇 마장을 항복시킬 뿐 아니라, 일체의 번뇌마가 범접하지 못하게 한다.
삼십칠존이야기- 24.금강아보살
번뇌를 부수어 없애는 보살
코끼리의 윗니 중에서 앞니가 커진 것을 상아(象牙)라 한다. 입 양쪽으로 길게 튀어나온 상아는 온순해보이는 코끼리가 지닌 일종의 무기이다. 짐승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도 큰 상아를 가진 코끼리를 함부로 공격하지 못한다. 이렇듯 상아는 초식동물인 코끼리로 하여금 맹수의 공격을 저지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기능을 지닌다. 여기에서 치아가 밖으로 돌출됨으로써 자아내는 위맹의 표현은 외부의 위협을 사전에 방지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힌두교에서 불교로 유입된 여러 존상 가운데 치아가 밖으로 돌출된 폭악한 형태의 대표적인 예로 야차를 들 수 있다. 야차는 형모가 추하고 괴이하며 사람을 해치는 잔인 혹독한 귀신으로 알려져 있기에 그 누구도 야차를 해치려는 시도를 하기가 쉽지 않다. 약차⋅야걸차 등으로 음역되며, 포악으로 번역되는 야차는 인도신화에서 북방 산악지대에 사는 구베라신(Kubera)의 권속이었으나 나중에 팔부중에 더해져서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특정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비사문천의 권속으로 재보를 지키는 귀신의 총칭이며, 후에 '대반야경'을 수호하는 16선신(善神)이 되기도 한다.
야차에 금강의 이미지를 추가한 금강야차는 대단한 위력을 가진 보살로 금강계 계통의 불교에서 창조된 명왕으로 인정되는데, 치아가 밖으로 돌출된 야차의 폭악한 이미지가 금강계37존 가운데 금강아보살에게 계승되었다.
금강아보살은 '금강정경'에서 ‘두루 보호하는 금강야차’, ‘사납게 씹어삼키는 금강아’라고 하며, 기타 다른 경전에서 ‘금강최복보살’, ‘금강의 덮개를 쓴 보살’, ‘모든 마군을 부수는 보살’이라 표현된다. 밀호를 조복금강⋅맹리금강⋅호법금강⋅금강야차⋅금강폭악이라 하는데 이들 명칭에서 야차가 지닌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왔음을 읽을 수 있다.
금강야차, 즉 금강아보살은 야차가 지닌 공포라는 방편으로 일체의 마구니를 두렵게 해서 준동하지 못하게 하는 존이다. 야차가 의미하는 바는 위맹의 뜻이며 또한 모두 없앤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외부의 공격만이 아니라 내부의 조복하기 힘든 번뇌도 그 대상이 된다. 실제로는 내부의 번뇌야말로 다루기 힘든 난조복중생이다. 우리가 번뇌로 힘들어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얻고 미워하는 것을 놓는 취사선택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마음 자체를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상에 대해 탐⋅진⋅치를 일으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탐⋅진⋅치 자체가 우리 마음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금강야차의 방편을 구해야 한다. 금강야차의 지혜로운 어금니는 일체의 번뇌와 수번뇌를 남김없기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마음속 번뇌에 관한 그 행위에 대한 단절보다는 스스로 일으킨 번뇌로부터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이때 코끼리의 상아와 금강야차의 어금니는 외부의 마구니를 준동하지 못하게 막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상징성을 드러내어준다.
'금강정경'에서 우리 마음 내외의 마구니를 항복시키는 금강아보살의 출생을 밝힌 문단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최제마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갈마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들어가시니 이 명칭을 일체여래의 방편삼매라 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자심으로부터 내어서 이 진언을 송한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덕을 갖춘 지금강자는 금강의 거대한 어금니의 모습을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일체여래의 폭악조복 등의 사업을 행하고, 일체부처의 신통과 유희로써 널리 시여하시고 나서, 저 모든 마군을 굴복시키는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하게 합하여 한 몸이 되어 최제마대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위 경문을 통해서 금강아보살은 바로 모든 마군을 굴복시키는 최제마보살로서 마음속에 번뇌를 품은 중생을 붙잡아 그 번뇌를 눌러 교화하고자하는 방편삼매에서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그 방편삼매의 유출경위를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약차방편공포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야차방편공포삼마지지로부터 금강아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굳세어서 교화하기 어려운 중생을 항복시키고, 보리도에 안치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약차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불공성취여래의 왼쪽[東] 월륜에 머문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금강아보살은 금강약차와 동체가 되며, 최제마보살이기도 하다. '이취경'에서는 능조지지권여래(能調持智拳如來)가 최일체마보살의 이칭으로 나온다. 지권으로 일체의 악마를 꺾어 부수는 여래라는 의미이다. '금강정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문이 나오는데 ‘금강야차를 성취함으로 말미암아서 금강야차와 동등하여 다름이 없게 된다'고 하며, ‘금강아의 뛰어난 인계를 결하게 되면 온갖 마구니와 악한 자를 부술 수 있다’고 하는 데에서 내외의 모든 번뇌를 방편공포삼마지의 광명으로 조복하는 금강아보살의 성격을 읽을 수 있다. 번뇌를 끊음에 있어서 드러나는 단호한 의지가 금강아보살의 어금니가 의미하는 바이다.
다시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용맹한 금강야차의 공능을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는 금강약차이다.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대방편력신통변화이다. 나는 입 가운데에 금강의 날카로운 어금니가 있다. 일체의 삿된 견해를 가진 자와 큰 두려움을 부수고, 모든 마구니의 원한을 없앤다. 내 몸은 오색이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 온갖 중생, 시방세계 또한 다 오색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나서 금강권인을 결하고, 좌우의 새끼손가락을 서로 굽혀 입에 붙이고 두 검지를 펴서 좌우의 뺨에 두니 이는 날카로운 어금니의 모습이다. 금강야차의 공포삼매야를 증득한 금강아형(牙形)으로 장애를 제거하는데 진력한다는 뜻에서 분노형을 한 야차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처의 교화사업을 달성하는데에 있어서 삿된 견해를 고집하여 교화하기 어려운 존재들을 붙잡아 교화하기 위하여 무서운 형상을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마음속에 고치기 힘든 번뇌도 굳은 다짐과 서원을 의미하는 분노형의 야차를 통해서 제어해나가는 것이다. 모든 괴로움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오는데 이 두려움을 벗어던진다면 온갖 괴로움은 떠나간다.
'일체비밀최상명의대교왕의궤'에는 번뇌를 멸하는 금강아보살의 공능을 다음과 같이 찬탄한다.
“날카로운 어금니로 죄업을 씹어삼키듯
모든 번뇌 멸하는 뜻도 역시 그러하네.
번뇌 끝나기에 묘용 이루니
이것이 바로 금강아보살이다.”
이와 같이 금강아보살은 어금니라는 상징적인 방법을 활용하여 우리 마음속 번뇌를 완전히 부술 수 있도록 하는 정진을 표현하고 있다. 금강아보살의 아는 금강의 날카롭고 힘센 어금니로서 단단한 음식물을 잘게 부수는 것을 보살의 자유자재한 대방편력으로 일체의 삿된 견해를 가진 자의 미혹과 온갖 큰 두려움과 마구니의 원한을 부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약출염송경'에는 양손의 두 손가락을 세워서 돌출된 치아모양을 하는 ‘금강아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이 금강은 더 한층 잘 부술 수 있다’고 그 결인의 공덕을 설한다. 삼매야형은 가로로 누운 횡저 위에 2개의 날카로운 이가 있으며, 반삼고저 2개를 기울여 세운다.
앞에서 보생여래 해탈륜에 속하는 금강소보살의 삼매야형으로 나타난 이[齒]는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앞니였는데, 불공성취불의 해탈륜에 속하는 금강아보살의 어금니(牙)가 음식물을 잘게 부수는 기능을 의미하는 것이 같은 치아를 삼매야형의 소재로 하면서도 다르게 활용하는 면을 보여준다.
25. 금강권보살
모든 인계를 성취하는 보살
인계, 즉 무드라(mudrā)의 기원은 갖가지 현란스러운 손놀림으로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인도무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도에서는 손가락, 손, 팔 등의 갖가지 형태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통하여 마음속에 담긴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전달한다. 이러한 무용의 손놀림은 무드라의 소재가 되었다. 인도의 다양한 종교에서 무드라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고대의 조각에서 보여지는 요기들의 손모양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인도의 여러 종교와 민간에 있던 무드라는 불교 내로 흡수되어 불상의 손모양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고, 불교가 성립하면서 발생했던 여러 가지 사건이나 상징적 의미가 무드라로 정착되었다. 그 대표적 예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들 수 있다.
<법구비유경> 권3 ‘분노품’에는 제바달다가 아사세왕을 꼬여 부처님을 해치려고 흉계를 꾸미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 부처님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아직 5백 명의 제자가 그 좌우에 남아 있소. 대왕은 내일 부처를 청해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5백 마리의 큰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였다가, 부처님이 성안으로 들어오면, 취한 코끼리들을 내몰아 저들을 다 밟아 죽여 그 종자를 없애겠소. 그리고 내가 장차 부처가 되어 세상을 교화하겠소.”
이튿날 공양 때가 되자 부처님께서 5백 아라한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셨는데, 5백 마리의 술취한 코끼리들이 굉음과 함께 달려와 담을 무너뜨리고 나무를 부러뜨렸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온 성이 다 벌벌 떨었다. 5백 아라한은 모두 공중으로 날아가고 오직 아난만이 부처님 곁에 서 있었다. 술취한 코끼리들이 부처님을 발견하고 그 앞으로 달려들었으나, 부처님께서 손을 드시자 다섯 손가락은 이내 5백 마리의 큰 사자왕으로 변화하여, 한꺼번에 외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술취한 코끼리들은 겁에 질려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머리도 들지 못하였고, 취했던 술이 곧 깨어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을 뉘우쳤다. 이 광경을 본 왕과 신하들은 모두 놀라고 숙연해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시무외인은 이렇듯 부처님께서 다섯 손가락을 들어 광폭한 코끼리들을 제지하였던 데에서 유래하는 무드라로서,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왼손은 주먹 쥐어 허리에 얹거나 옷자락을 잡는다. 이러한 손모양은 불자에게 공포를 제거하는 인으로 불상에 널리 채용되었다. 시무외인을 결하고 진언을 송하는 자는 시무외자라 하고, 그 무드라를 시무외수라 하는데, 중생의 공포와 불안을 제거하기 위하여 부처의 대비를 나타내는 인계이다. 여원인이 대비로써 즐거움을 주는 덕이 있는 반면에 이 시무외인은 대비로써 고통을 없애주는 덕을 나타내기에 시감로인(施甘露印)이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선정에 들어있음을 나타내는 선정인, 마군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 불법을 널리 펼치는 전법륜인 등 무드라는 각기 그 상징하는 바가 있다.
모든 불보살은 각기 본서(本誓)를 지니고 그 낱낱의 본서를 표시하기 위하여 언제나 양손의 열 손가락으로 혹은 하나의 특수한 신체동작으로 갖가지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무드라이다. 무드라는 제존의 내증과 본서를 표현하기 때문에 하나의 손가락을 구부리고 펴는 결인에 말미암아 법계를 진동하게 하며 범부와 성인을 만나게 한다. 그러므로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한 범부중생이 중생의 몸으로 본존의 밀인을 지니는 것은 본존과 상응하는 가지력으로써 본존과 하나가 되어 성취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무드라의 상징성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존상이 의미하는 바와 계합하는 것이고, 존상의 무드라를 통하여 상징하는 것과 일치하는 삼마지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즉 무드라를 통해서 삼마지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바로 중생의 세계에 속한 우리를 깨달음의 세계와 연결지을 수 있는 고리가 무드라라고 하는 것이다.
무드라는 그 종류가 수없이 많으나 가장 기본이 되는 무드라를 4종권, 또는 6종권을 들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금강권은 금강여래권·분노권이라 하며, 엄지손가락을 손바닥 안에 넣고 네 손가락을 견고히 쥐어서 권의 형상을 만드는 인계의 기본형으로 <금강정경>에 ‘견고집지금강권’이라 표현되는 것처럼 금강같이 견고한 지혜를 뜻한다.
이 인계를 결한 보살을 금강권보살이라 하며 금강계 37존 가운데 북방에 있는 불공성취여래의 4친근의 하나로 앞서 금강업·금강호·금강아보살로 전개된 불공성취여래의 활동을 마무리짓는 네 번째의 보살이다. 즉 첫째의 금강업보살은 광대한 공양을 일으켜 유정을 이롭게하는데 허공을 무한한 창고로 삼아 중생에게 다함없이 펼쳐서 교화하는 온갖 공덕을 의미한다. 이어서 정진의 갑옷을 입고서 만행을 행하며, 법문을 수호하고 퇴전하지 않게 하는 용맹스러운 지혜를 금강호보살이 상징한다. 정진을 이미 갖추었어도 온갖 번뇌마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금강야차의 두려운 형상을 보이는 금강아보살은 금강의 어금니를 지니고 일체유정의 무명과 모든 집착의 견해를 부수며 대비방편을 일으킨다. 이렇게 전개되는 위맹에 의해서 해탈의 이치를 도와 이루고 고통의 바다에 빠져 있는 중생을 비밀의 금강권으로 결박을 풀어주고, 고통에서 벗어나게하며 즐거움을 주는 보살이 바로 네 번째의 금강권보살이다. 이들 갈마부 네 보살의 활동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다같이 협력해서 중생교화의 대정진이라는 불공성취여래의 활동목적을 성취하고자 한다.
금강권보살은 <백팔명찬>에 금강밀합·금강박·선능해방·상승삼매야라 찬탄하며 밀호는 비밀금강이다. <금강정경>에서 금강권보살의 출생을 밝힌 문단은 아래와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일체여래의 권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갈마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들어가시니 이것을 일체여래의 신어심의 금강박삼매라 이름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저 일체여래의 지권인이 지닌 요묘한 결박의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하기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일체여래의 권대보살신을 출생한다.”
금강박이나 권이라는 이 보살의 특징을 볼 때에, 금강권보살이 대승불교의 다른 보살을 그 모델로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금강과 같은 견고한 인계의 공덕을 의인화했음을 알 수 있다. 금강권보살, 즉 권대보살신은 일체여래의 권대보살삼매, 즉 금강박삼매에서 출생한다.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그 유출경위를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권인의 위력으로 감응하는 삼마지의 지혜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권인의 위력감응삼마지지로부터 금강권의 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그 업장을 제거하고, 속히 출세간의 실지를 원만히 획득하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권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불공성취여래의 뒤쪽의 월륜에 머문다.”
여기에서 금강권인의 위력으로 감응하는 삼마지의 지혜는 결합의 덕을 보이는 금강권인으로써 일체의 인계를 집결한 표치를 마음에 두고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감응시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상징하기 위하여 금강권보살은 두 손을 금강권을 하고 가슴 앞에 대고 있는데, 12합장과 여섯 가지 권인 등 일체의 인계를 성취하며, 특히 금강권인의 삼매야형을 보여서 신구의의 삼업을 삼밀로 상응시켜 자재하게 정진하여 실지원만을 보인다. 여기에서 여래의 교화활동은 완성된다.
금강권이란 <제불경계섭진실경>에 ‘중생의 앞에 시현하여서 금강의 계박을 해탈하게 하는 인계이다. 즉 중생이 지닌 무쇠처럼 견고한 집착의 뿌리를 풀어내는 부처의 견고한 지혜의 모습을 금강권으로 상징한 것이다. 그 결인은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미세하고, 깊이 뿌리박힌 번뇌를 훌륭히 제거하는 데에 특징이 있다.
이것은 번뇌가 깊어 교화하기 어려운 존재를 이끈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하여 금강권을 잘 결함으로써 일체의 인을 모두 성취하게 되며, 금강권인을 견고하게 결함으로해서 온갖 인이 순순히 조복하게하고, 또 실지를 획득한다고도 하는데, 일체중생의 업장을 제거하고 세간과 출세간의 실지를 원만하게 성취시킴을 상징하는 인계가 금강권이다. 따라서 <이취석>에서는 ‘일체여래의 세 가지 비밀이 금강권보살의 손바닥에 있는 것을 나타낸다. 진언행보살로서 이미 만다라단에 들어가 관정을 받은 자는 여래삼업의 밀교수행을 들음으로 해서, 세간과 출세간의 뛰어난 실지를 획득하며, 시작도 없는 때부터의 열 가지 종류의 착하지 않은 악업을 깨끗이 없애고, 장애없는 구경지를 증득한다’고 모든 인의 근본인 금강권보살의 결인의 공능이 설해지고 있다.
삼십칠존이야기-26.금강희희보살
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보살
중생을 보고 가엾이 여기는 따뜻한 마음을 내는 것은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고통을 덜어주려는 부처의 자비심이다. 중생은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나 무명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여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없애고 희망하는 것을 베풀어 주어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자비를 풀이하여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 하는데 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자(慈)이고 고통을 뽑아주는 것이 비(悲)이다. 종교적 입장에서는 비(悲)가 중심이 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역할도 중요하다. 준다는 것은 재물이나 진리의 가르침이나 따뜻한 위로나 친절을 베품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때 베품을 받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면 서로 막힘없는 연결이 이룩됨으로써 원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 연결의 내용은 모든 존재는 서로 나눔으로써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누군가와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몸은 끊임없이 채식이든 육식이든 다른 존재의 몸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받기만해서는 안되며 나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 비록 내놓는 것이 작아보이기는 하지만 나의 몸은 끊임없이 다른 이의 몸이 들어와 잠시 나의 몸이 되었다가 다시 다른 이의 몸으로 옮겨가는 물질의 순환 가운데에 있다. 나의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무수한 다른 이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이 나에게 들어오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무수한 다른 이에게 나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을 전달한다. 다른 이를 통해서 내 정신이 성장하였다면 나는 다른 이의 정신이 성장하도록 돕는다. 몸이든 정신이든 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가 필요했고 나는 다른 이의 존재를 돕는다. 다시 말하면 남이 나를 만들고 나는 남을 만든다. 끊임없는 서로 만들어주는 순환의 고리 가운데 중생들 모두가 속해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나 기술을 배우는 것, 노동을 하는 것도 모두 이 범주 안에 들어간다. 상점에서 식재료를 파는 것은 남의 식사를 위해서이며, 신발가게의 주인은 평생 남의 신발을 만들고 수리하고 판매하며 살아간다. 내가 공부해서 학자가 되는 것은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며, 의사가 되는 것은 남을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은 모든 것이 남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며 남을 위하여 살 때에 바로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된다.
불자가 불도를 닦는 것도 오대서원에서 “중생가가 없는지라 제도하기 서원이라”고 하는 것처럼 타인을 위한 봉사를 실천할 때에 진실한 불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주는 것이야말로 중생답게, 또는 불자답게 사는 길이다. 그래서 주는 것은 존재의 한 방식이며,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줄 때에 기쁨에 넘치고 기쁨을 주어서 상대방을 환희하게 한다면 삶의 가치를 실답게 아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주려는 마음을 불교에서는 희사(喜捨)라고 하며 또한 공양(供養)이라고 하거니와 주려는 마음을 통해서 부처님과 중생 모두에게 닿게 된다.
금강계만다라에서는 기쁘게 주는 존재의 모습, 즉 공양의 내용을 크게 여덟 가지로 나누어 8공양보살이라 칭하고 있다. 8공양보살은 대일여래가 4불의 공양에 응답하기 위하여 출생시킨 금강희, 금강만, 금강가, 금강무의 내4공양과, 사불이 대일여래의 공양에 답하기 위하여 출생시킨 금강향, 금강화, 금강등, 금강도향의 외4공양을 합한 총칭이다.
그 첫 번째가 금강희희보살이다. 금강희희보살의 밀호는 널리 공경을 펼친다는 뜻의 보경금강(普敬金剛), 그리고 성불의 수기를 준다는 뜻의 수기금강(授記金剛)이라 한다. ‘금강정경’에서 금강희희보살의 출생을 밝힌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 대비로자나여래는 일체여래의 열락공양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삼마지에 드신다. 곧 일체여래부의 대명비를 자심으로부터 낸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곧 대금강인을 낸 지금강자는 금강희희대명비의 형상을 출현한다. 금강살타의 모습과 같아서 갖가지 형색의 묘하고 좋은 위의를 갖추고 온갖 장엄구로 장엄하였다. 일체여래부의 금강살타명비를 모두 포섭하고 아축여래의 만다라 왼쪽 월륜 가운데에 머문다.”
‘금강정경’에 의하면 금강희희보살의 출생근거는 일체여래의 열락공양삼매이다. 이 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희희대명비상은 대비로자나여래가 자심으로부터 유출하여 동방 아축여래에게 공양하는 보살로서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체여래의 열락, 즉 보리심을 얻어 크게 환희하는 여성형의 모습이다. 이것은 바로 아축여래의 삼마지와 상응한다.
금강희희보살들을 출생하여 허공이 다하도록 법계에 두루한 동일체성의 금강계라고 하는 절대의 세계에 구름과도 같이 가득한 일체의 공양을 베푼다고 하는 것을 ‘삼십칠존례’에서는 일체여래의 기쁜 마음, 즉 적열심이라 하는데 이것은 위와 같은 사업에 의한 기쁨을 말한다.
‘성위경’에서도 비로자나불이 내심에서 금강희희법락표치삼마지지를 증득하여 금강희희표치광명을 유출하고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범부의 탐염과 세간의 쾌락을 깨뜨리고, 희희법의 원만한 안락을 획득하게 한다고 설한다.
여기서 금강희희의 법락표치삼마지라는 삼마지는 정법을 알게 된 기쁨의 깃발을 높이 받드는 삼마지로 일체의 여래도 일체의 중생도 모두 여여법성의 입장에서 하나의 맛이고 하나의 모습이기 때문에 일체의 여래신이나 일체의 중생신을 모아서 하나의 금강희희를 이룬다는 것이 그 뜻이다.
그 기쁨의 내용은 믿고 이해함을 통해서 불법의 진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서 무한한 중생들에게 믿음과 이해라는 공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고 이해함을 신해라 하거니와 가르침을 확신하고 잘 이해하며 나아가 향상하고자 하는 의욕이다. 밀교에서는 스스로 확신함에서 더 나아가 다른 이도 믿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일경소’에서는 신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신해란 참되고 바른 발심에서 성불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을 통칭하여 신해지(信解地)라 이름한다. 이것은 용약의 뜻이며, 유희의 뜻이며, 신변의 뜻이다. 처음 발심한 이래 깊이 선근을 심어, 갖가지 서원과 수행을 일으켜서 불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킨다. 언제나 수승하게 나아가고 쉬지 않는다. 즉 이것은 초월하여 오르는 등약의 뜻이다. 마치 사람이 북치며 춤추면서 뛰어난 삼업으로 널리 중생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
즉 참된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인 보리심을 일으켜서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사이를 신해지라 한다. 동방 아축여래의 덕을 공양하는 금강희희보살은 중생이 처음으로 부처와 더불어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크게 환희하며 이 기쁨을 널리 베푸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제불경계섭진실경’에 “금강희희는 시방세계의 모든 불과 보살들과 중생에게 환희를 준다”고 하듯이 이 보살의 진언을 염송함에 의하여 불보살과 모든 중생은 보리심공양을 성취하고 기쁨과 환희를 일으킨다. 비밀진언으로부터 삼매야형을 출생하고, 그 삼매야형인 금강인의 문에서 구덕지금강자는 비밀신변을 시현하는 것이다. 신변의 상은 가이없으며 다함없다. 그것은 여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도 역시 삼매에서 무진장엄장이기 때문이다. 무진장엄장의 금강희희가 대비로자나여래로부터 동방 아축여래에게 보리심을 찬탄하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공양되는 것이며, 이것을 불이나 중생이라 할 것 없이 모두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장엄한 광경이다.
기쁨을 주는 금강희희보살에 대해 ‘제불경계섭진실경’에서는 “금강권을 받들어 양 무릎 위에 두고 눈을 감고 회전해서 두루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을 예경한다. 이 인을 이름하여 금강희희라 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동방 아축여래의 덕을 공양하는 보살로서 아축여래의 삼마지에 상응하는 희희의 표치로써 아축여래께 공양함과 동시에 시방세계의 모든 유정에게 보리심의 환희를 수여함을 보이고 있다.
이 보살은 금강계만다라 대월륜 서북방에 위치하고 성신회의 상은 흑색으로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있다. 이 인상은 금강희희를 성취하는 까닭에 곧 금강의 오묘한 즐거움을 받는 모습이며, 금강희희가희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모든 환희를 받게 된다. 성신회에서는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있으며, 공양회의 상은 삼고저를 세운 연화를 양손으로 들고 있다. 삼매야형은 약간 휘어진 삼고저이다.
삼십칠존이야기-27.금강만보살
보배꽃다발을 든 보살
꽃은 이를 보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를 환희하게 한다. 환희 가운데 주고받는 꽃에도 그 숫자에 따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한 송이는 오직 상대방만을 위한다는 의미가 있고, 세송이는 삼각구도처럼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사랑을 의미하며 일곱송이는 행운, 아홉송이는 꽉차는 숫자로서 만족감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다른 견해도 있겠지만 꽃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부여되는 의미도 다양해지며 이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마음은 풍요로워진다.
숫자를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꽃다발은 주고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파안대소하게 하며 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념할 만한 날에 수많은 꽃으로 장식한 꽃다발을 건넨다. 그 꽃다발에는 풍요와 함께 만족과 기쁨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올림픽과 같이 큰 대회에서 우승자의 목에 거는 꽃목걸이는 오랜 세월 동안 정진했던 노고에 대한 찬탄이며 경사스러운 날에 주고받는 꽃다발은 이 날을 위해 애써왔던 지난날의 수고에 대한 치하이다.
일상적인 중요한 행사만이 아니라 꽃다발은 그 아름다움과 청정한 성품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분에게 공양하는 것이 세계 여러 나라의 풍속이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비구가 꽃으로 몸을 장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공양받은 꽃다발은 다만 방안에 걸어 두거나 또는 부처님께 공양하는데 사용하였다. 공양된 꽃다발은 부처님 앞에 놓여서 그 자리를 장엄하게 되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여러 경전에서 볼 수 있다. ‘백연경’에 의하면 바라나꽃으로 꽃다발을 만들고 아울러 채집한 꽃으로 부처님 앞에 뿌린다고 한다. 혹은 불상 앞에 꽃을 길게 엮어서 둥근 바퀴 모양으로 만든 꽃다발을 나란히 줄지어 놓기도 한다.
꽃다발을 가섭탑에 바치면 그 공덕으로 천계에 태어나 금색의 몸을 얻는다거나 한다발의 꽃이 법계에 두루하여 광대무변한 공양으로 된다는 식으로 꽃다발 공양의 공덕에 대해 기록한 경전이 많다. 꽃공양물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이 있다. ‘다라니집경’ 6권에는 공양하는 꽃나무로 버드나무가지·잣나무가지·대나무가지·과실나무가지나 온갖 꽃나무 등을 사용한다고 한다. 별도로 ‘소실지갈라경’ 공양화품에는 침향과 상반목이라는 두 종류의 공양물이 있다고 하며, 그 중에서 침향은 청련화와 아주 흡사하고 상반목은 언제나 푸른 상록수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언제나 공화로서 사용한다. 그러나 냄새나는 꽃·가시나무에서 핀 꽃·쓰거나 신 맛이 나는 꽃·이름없는 꽃 등은 공화로 사용하지 않는다.
밀교에서 일반적으로 공양되는 꽃은 불부·연화부·금강부나 혹은 수법의 종류가 다름에 따른 차별이 있다. 공양되는 꽃은 긴 시간이 지나도 마르거나 시들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은 죄장이 이미 제멸되었거나 기원이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재를 지낸 다음에 흩뿌리는 꽃 중에서 싱싱한 것은 이 꽃이 있는 곳이 현성이 모일 때에 앉았던 자리임을 나타낸다.
꽃다발 중에서도 금강만(金剛鬘)이라 불리우는 것이 있다. 금강만에서 만이란 생화를 실로 묶고, 혹은 한줄로 이어서 만든 꽃다발을 가리킨다. 꽃은 반드시 일정하지 않으나, 주로 향기가 많은 것을 고른다. 오랜 시간 마르지 않은 꽃은 상화(常華)라고 하여 종이나 나무로 만든 꽃에 금박을 입힌 조화를 사용하기도 한다. 후세에는 주로 금속으로 만든 꽃을 많이 만들어 불전의 장엄구로 사용하였다. 이 모든 것이 마음속 깊이 담긴 존경과 감사의 뜻, 그리고 헌신과 보시, 그리고 이러한 공양을 통한 지족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밀교에서는 금강계만다라의 8공양보살의 하나인 금강만보살과 화만비나야가(華鬘毘那夜迦), 그리고 태장만다라의 다섯 공양 가운데 하나인 화만보살의 삼매야로 꽃다발을 사용한다. ‘대일경 입만다라구연품’에는 ‘진언을 수지하는 수행자여, 모든 성스러운 존을 공양하는 데에는 기쁨을 담은 꽃을 올려야 한다. 아주 희거나 노랗거나 붉은 색인 연꽃과 푸른 연꽃과 용화분나가와 계살라와 말리꽃과 득벽람과 첨복과 무우와 저라검과 발타라와 사라 등은 모두 신선하고 기묘한 꽃으로 길상하며 모두가 좋아하는 것이니 모아서 꽃다발을 만들고 경건한 마음으로 공양해야 한다’고 설한다.
‘소실지갈라경’에는 ‘화만법을 성취하려면 사디화를 가져다 꽃다발을 만들라’고 한다. 그런데 ‘수호국계주다라니경’에서 ‘갖가지 보배로 화만을 만들고 이로써 장엄한다’고 하는 것처럼 불전을 장엄하는 화만은 갖가지 보배를 조각해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금강만은 보배의 꽃다발이다. 보배꽃다발을 든 보살을 금강만보살이라 하며, 누구나 이 보살을 보고 만족하고 공경한다고 하여 밀호를 애경금강이라 한다.
‘금강정경’에 의하면 대일여래가 보생불로부터 받은 복덕의 공양에 보답해서 보만관정삼매로부터 화만을 나타내어 남방 보생불의 왼쪽 월륜에 머무르게 하여 그 공덕장엄을 찬탄하는 모습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생불은 힘을 더욱 증장시키게 된다. 대일여래로부터 받은 보배의 꽃다발은 장엄한 빛을 발하며 주변을 밝게 한다. 금강만보살의 앞에 등장하였던 금강희희보살의 적열심은 보리심의 체이고 이 보배꽃다발은 보리심의 권속, 즉 보리심에 속한 덕을 나타낸다. 두 보살의 상징을 통해서 기쁜 마음이 꽃다발의 무수한 꽃을 통해 주변으로부터 널리 퍼져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이 보살의 삼마지를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화만보리분법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화만보리분법삼마지지로부터 금강꽃다발의 광명을 유출하고 널리 시방세계를 비춘다. 일체여래께 공양하고 모든 중생들의 추하고 천한 모습을 없애고, 삼십이상 팔십종호의 뛰어난 몸을 획득하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화만천녀형의 보살이 되어 비로자나불의 서남쪽 모퉁이의 월륜에 머문다.”
이처럼 남방 보생불의 덕을 공양하는 보살로서 이 보살이 표치하는 꽃다발은 이치와 지혜의 구족, 그리고 만가지 덕을 개발하는 모습으로서 이것은 보생불의 삼마지에 상응하는 것이다. ‘약출염송경’에 ‘금강만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미묘한 모습을 얻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보생불의 빛나는 복덕취의 생활을 보배 꽃다발로 찬탄하는 것이다. 또한 ‘삼십칠존례’에 이구증, 즉 티끌없는 비단이라 한 것은, ‘금강만공양보살의 인계를 결함으로써 이 인계의 가지로 말미암아 정계바라밀을 채운다’고 하는 것이다. 빛나는 보배의 꽃다발은 청정한 계행으로 이룩되는 행주좌와의 모든 위의를 나타내어 주변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 보살의 수인은 두 손으로 하는 금강권으로서 티없는 청정한 아름다움은 청정한 계로부터 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공양받는 불과 보살에는 미래의 불보살도 포함될 것이고, 그렇다면 금강만보살은 일체의 중생들에게 우주대생명이 가진 끝없는 장엄한 광경을 끊임없이 이어받고 있음을 일깨우는 보살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금강만보살을 만날 때에 보배꽃다발을 들고 환희하는 만족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들은 스스로 지니고 있는 성불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더욱 증장시키게 되는 것이다.
금강만보살의 형상은 성신회에서 백황색으로 양손에 화만을 쥐고 가슴 앞에 대고 있다. 실로 연결한 꽃으로 만든 화환인 만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며, 보생여래가 중생 속에 숨겨진 보배의 특성을 찾아내어 찬탄해서 공양한다. 이 인상은 금강보만의 법에 상응하며 온갖 부처가 베푸시는 관정을 받는 모습이다. 보리심의 복덕원만한 덕을 내증으로 하는 금강만보살의 진언을 염송하면 적열과 환희를 얻기 때문이다. 공양회의 상은 꽃을 얹은 연화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금강권을 하고 있다.
삼십칠존 이야기-28. 금강가보살
진리를 노래하는 보살
사람들의 감정은 기쁘거나 슬픈 감정이 격앙되어 흥분된 상태가 되면 외침이라는 형태로 분출된다. 외침이 반복될 때 리듬을 갖게 되며, 이것은 노래의 형식을 구성하게 된다. 이처럼 감정을 소리로 나타내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노래가 시작되었고 한다. 또는 후렴처럼 반복되는 공동작업의 맞춤소리 등을 노래의 기원이라 하기도 한다.
노래가 곡조를 갖추면서 소리를 내는 악기와 만나고 또 노랫말을 만난다. 처음에는 무의미했던 노랫말이 차츰 의미를 갖추어나가면서 가사가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곡조에 맞추어 노랫말이 지어지기도 하고, 노랫말에 맞추어 곡조가 생성되기도 한다. 노래에는 노랫말과 곡조가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기능이 뒤따른다. 그래서 노래를 통해 어떤 가치를 추구하게 하고 그 가치에 따른 행동규범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인류의 문명과 함께 발전한 노래는 곡조와 말소리의 형식을 갖추면서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종교적인 의례에서도 노래는 필요하고 생활의례나 교육의 측면에서도 노래는 사람들의 삶과 뗄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래는 즐거움을 주는 기능이 있기에 연희나 오락 등에서 그 역할이 대단하였다.
이것은 노래의 우리말 기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중세 국어자료를 보면 그 당시에 노래는 ‘놀애’로 표기되어 있다. 놀다[遊]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짐작되는 노래는 놀이의 성격을 분명히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노래는 함께 부르는 것이고 떼창하듯이 서로서로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떼창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공동체라는 인식이 생겨난다. 노래를 통해서 개인과 개인 간의 단절을 넘어 원래 하나라는 자각이 깨어나며 흥을 함께하는 것이다.
슬픔은 나누면 줄어들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너와 나의 단절이 원래 없기에 모두가 하나라는 진리를 알게 된 환희가 노래로 드러난다. 이러한 벅찬 감동의 오묘한 노래를 금강계만다라에서는 금강가보살이라 부른다. 비로자나불과 사불 사이의 상호공양의 공덕으로 일으킨 환희를 흥겨운 노래로 부르는 보살이다.
밀호를 무외금강, 묘음금강이라 하는 금강가보살은 ‘금강정경’에 의하면 일체여래의 묘가삼매(妙歌三昧)로부터 출생한다. 묘가삼매란 비로자나여래가 서방 지혜문 법부의 주인 아미타여래를 공양하기 위하여 내심에서 노래로 찬탄하는 묘법음을 일으키고자 우선 그 삼매에 들어가 이 보살을 출생한 것이다. 아미타불의 설법에 의한 법열의 경지에 보답해서 가영공양삼매야, 즉 묘한 노래로서 공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 가영은 법을 찬탄하는 것이기에 가영공양은 법찬미의 환희이다. 그러므로 이 가영공양이라는 법의 기쁨에 의하여 소리에 따라서 메아리지는 것처럼 제법의 진실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나는 너에게 영향을 주고 너는 나에게 영향을 주어서 서로서로 만들어가는 것이 모든 존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서로 통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연등을 만들기 위해 내가 만진 종이연잎의 물감이 손가락에 물들고, 내가 먹는 음식이 내 몸에서 소화되어 내 몸의 일부를 만들거나 활동의 원천이 되는 것은 나와 다른 존재 사이에 애초부터 아무런 장벽이 없음을 알려준다. 생명체인 나와 무생물인 색종이가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 내 손가락에 물감이 들어올 리가 없으며, 나와 내 입으로 들어오는 식물과 동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이 소화되어 내 몸을 구성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남이라고 보았던 것들이 나에게 들어와 내 몸과 마음을 구성함을 바라볼 수 있다. 처음부터 내 것인 것은 없었고 모두 남으로부터 옮겨온 것뿐이다. 서로가 의지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진리, 어떤 하나의 존재는 그것이 있게 한 다른 모든 것의 결과이며, 동시에 다른 것들의 형성에 관여한다. 즉 너는 나에게 들어와 내가 되고 나는 너에게 들어가 너를 이룬다.
서로서로 영향을 주어 끊임없는 변화의 물결을 이루게 하는 것이 세상 모든 것의 본질이다. 나와 관련한 모든 존재는 나의 생성에 관여하며 나는 그 모든 존재의 생성에 관여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된다. 이렇게 세상 모든 존재들은 서로서로 연관되므로 세상만물은 하나의 큰 연기를 이룬다는 사실을 모든 존재는 흥에 겨운 감동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화엄경’에서는 “일체가 불법을 설한다”고 표현한다. 부처와 보살만이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아니라, 지·수·화·풍과 산·나무가 설하며 구름과 개울물이 설하고 티끌·돌맹이·국토가 설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산하대지 일체가 불법을 설한다. 자연에서 우러나는 경이로운 울림이 바로 연기법을 설하는 묘법음이다.
묘법음을 상징하는 금강가보살은 서방 아미타불의 덕을 공양하는 보살로서 설법의 표치를 나타낸 것으로 아미타불의 가영삼매(歌詠三昧)에 상응한다. 이로 인하여 아미타불의 활동은 더욱 증장된다.
‘가영송(歌詠頌)’이란 미묘한 노래소리이므로 ‘삼십칠존례’에서는 묘법음이라 한 것이다. 깨달은 자의 눈으로 볼 때 일체 소리는 묘법음이고 자수법락의 설법상이며, 묘한 노랫소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래는 굳이 귀로만 듣는 것은 아니라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고유의 파장을 지니고 있다. 파장은 다른 존재에 전달되어 그 영향을 준다. 역으로 어떠한 존재는 다른 모든 존재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서로 상의상관하는 존재의 모습은 그 자체로 연기법을 설하는 법문이다. 깨달음을 얻게 하는 법문을 불교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가릉빈가새에 비유한다. 법의 희열을 얻게 하는 소리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 할 수 있다. 그 소리는 음률과 노랫말을 가진 노래처럼 되는 것이다. 노래의 요소로서 노랫말은 불법이라는 언어가 함축된 시(詩)이며 시의 감성을 노래로써 흘러넘치게 한다. 아름다운 글귀는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노래가 된 시는 음률과 더불어 경이로운 세계를 드러낸다. 그 시의 글귀는 수행을 통한 깊은 성찰을 통해서만이 노래로써 들을 수 있다.
온 산하에 울려퍼지는 부처님의 법음은 노래이다. 산이 노래하고 물이 노래한다. 지구라는 별이 노래한다. 이렇게 노래로 듣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자와 듣는 자가 함께 하모니라는 파장에 몸을 맡긴다. 부처님의 말씀인 진언은 이를 염송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가 동일한 울림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임을 알게 해 준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울림은 진언이 되어 울려 퍼지고 이를 듣는 수행자의 언어 또한 모두 진언이 되고 그 진언은 노래처럼 아름다운 음율을 갖고 울려 퍼진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 ‘나는 금강가이다. 나는 지금 시방삼세의 모든 불과 보살께 노래하여 찬탄한다. 미묘한 소리를 내니, 입 가운데로부터 나와 시방의 무량세계를 가득 채운다’라고 하는 것은 금강가보살에 의해 시방의 무량세계에 가득히 그 설법이 퍼져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중생은 일체의 사실에서 미묘한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지혜가 증장됨에 따라 점점 이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약출염송경’에는 ‘금강가영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청정한 묘음을 얻는다’고 하며, ‘문수사리궤’에서는 ‘금강가영인을 결함으로 해서 속히 안인바라밀을 획득한다’고 그 인계의 공덕을 찬탄한다. 무량수불의 법열의 생활을 노래로 찬탄하는 금강가보살은 자성청정의 법열삼매로부터 일어나는 가영설법을 내증으로 하기 때문에, 이 보살의 진언을 염송하면 법열로 인한 묘락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금강가보살의 인계는 노래로 찬탄하는 음성인으로서 금강의 오묘한 노래에 상응하여 곧 금강의 묘가영을 얻는 것을 상징한다. 그와 같은 금강가영을 공후로써 상징한다. 성신회의 상은 흰색으로 왼손에 공후라는 악기를 가지고 오른손으로 이것을 타고 있다. 공양회는 공후를 얹은 연화를 양손으로 쥐고 있다.
삽십칠존 이야기- 29.금강무보살
춤으로 공양하는 보살
불교교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삼법인(三法印)은 세상 모든 것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일체는 항상 하지 않고 괴로움이며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세 가지이다. 여기에서 첫 번째의 항상 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일체가 영원히 변치 않는 고정된 실체로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물질적이나 정신적이든 일체는 언제나 변화한다. 움직이든지 다른 내용으로 바뀌든지 끊임없는 인연생기가 전개되며, 이러한 연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천년만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 같은 높은 산일지라도 지구라는 별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작은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초속 29.8km의 속도로 돌아 하루에만 258만km를 공전한다. 그것도 하루에 한 바퀴씩 자전하면서 가는 거리이다. 자전의 속도는 지구의 둘레가 가장 넓은 적도에서 1초에 약 456m라고 한다. 지구가 태양주위에 머물 수 있는 조건은 엄청난 공전 속도와 끊임없는 자전의 움직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 태양계를 벗어날 것이고 느린 속도로 움직이면 태양에 빨려 들어가 불타 없어질 것이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지구로 하여금 태양 주위에 머물 수 있게 한다. 서로 끌어당기면서 움직이는 것이 존재의 조건인 것이다.
지구라는 행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구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끊임없는 움직임이 그 존재를 유지하게 한다. 어떤 존재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자리를 지킨다 해도 지구의 중력과 상호작용하면서 지구와 함께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속도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나 사물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모든 존재는 서로 주고받는 움직임 그 자체이다.
그러나 분별로 쌓아 올린 우리들의 인식은 그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한다. 인간은 존재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 존재를 고정된 형상으로 알아채고 그때 존재라는 인식을 성립시킨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우리가 보았을 때 이미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을 것이다. 지구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우리의 인식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모든 존재도 생성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가지만 고정된 인식에 습관 되어온 우리들의 사고는 그 움직임 가운데 임시의 가상을 고정시키지 않으면 대상에 대해 분별할 수 없다. 그래서 높은 산은 천년만년 그 자리에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는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실제로는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빠른 움직임이 있기에 그들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존재와 존재 간에 서로 영향을 주는 상호작용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것처럼 세상 모든 존재는 다른 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으면 주어야 하고 주었으면 받아야 한다. 다른 존재와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사랑하고 미워하며, 뺏으려 하거나 베풀려는 것, 우리 중생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따라 움직이는 그 몸짓은 모두가 상호작용의 원칙에 따르며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중생들은 상호작용에서 이로움을 느낄 때 기뻐하고 손실을 입었다고 느낄 때 슬퍼하지만, 전체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로움이나 손실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움직임은 하나라는 전체에서 볼 때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는 작은 세포들의 어울림이다. 중생들에게는 아름답게 보이고 어떨 때는 추하게도 보이지만 그 움직임의 근원적인 표현은 춤과 같이 아름다운 몸짓이다.
보통 무용수가 가락에 맞추거나 절로 흥겨워서 팔다리나 몸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동작을 춤이라 한다. 그러나 누구나 가슴 벅찬 감동을 받았을 때, 흥겨운 음악에 도취되었을 때에 일어나는 흥겹게 몸을 움직인다면 그 자체가 모두 춤이 된다. 자아의 경계가 모두 사라지고 한없이 자유로워지는 상태가 바로 춤의 상태이다. 이렇게 세상 모든 존재가 작은 세포처럼 어울리는 광경을 아름답게 보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온 우주는 무용수가 추는 춤 못지않게 아름다운 춤으로 드러날 것이다.
온 우주를 춤으로 바라보고 스스로 춤을 추어서 우주 대생명이 걸림 없이 자재하게 생명 활동을 지속하는 모습을 의인화하여 금강계만다라에서는 금강무(金剛舞)보살로 표현한다.
금강무보살은 밀호를 신통금강, 묘통금강(妙通金剛)이라 하며, ‘금강정경’에 의하면 일체여래의 춤이라는 공양의 삼매로부터 출생한다. 즉, 불공성취불의 공양에 보답하기 위해서 비로자나여래가 무공양삼매로부터 묘한 춤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 금강무보살이다. 비로자나여래가 일체여래무상공양의 갈마지삼매에 들어가는데, 그 갈마지는 위로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갈마지의 삼마지를 춤의 공양이라 하는 것이다.
금강무에서 무(舞)는 춤을 의미하는데, 춤이란 다름 아닌 신통한 몸의 놀림으로 ‘삼십칠존례’에서는 이 보살을 ‘신통업’이라 찬탄하고 있다. 대비로자나의 입장에서 모든 존재의 몸의 놀림은 신통한 활동이다. 그래서 ‘금강정경’에서는 신·구·의 활동을 비롯한 일체의 활동을 신변유희, 신통유희라 하고 있다. ‘성위경’에서는 이 보살의 삼마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법무신통유희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이 삼마지로부터 금강무의 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춘다. 일체여래께 공양하고 일체중생의 무지와 무명을 깨뜨리며, 육신통을 획득하여 자재로이 유희하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법무천녀형의 보살이 되어, 비로자나불의 동북쪽 모퉁이 월륜에 머문다.”
여기에서 비로자나불이 금강법무천녀를 유출한 것은 그 내용상 휘돌아 추는 춤을 의미한다. 그 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는 것처럼 틀에 박힌 고정된 것은 아니다. 돌고 뛰고 또는 느리게 움직이는 가운데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것이 몸짓을 통해 흘러나온다. 춤춘다는 것은 무아 속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상호작용해야 할 존재라면 그 작용이 이타를 위해서 전개될 때에 그 몸짓은 아름다운 춤이 된다. 이 춤은 불공성취불의 삼마지로서 신통유희 자재의 작업임을 보이고 있다. 양손을 들어 춤추는 자세를 취하며 불공성취여래의 활동성을 찬탄, 공양한다. 그 작업의 목적은 일체중생의 무지와 무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보살이 금강계만다라 대월륜의 동북에 위치하는 것은 왕성한 교화활동을 나타내는 불공성취불과 동일한 성격임을 나타낸다.
중생의 무명을 깨드리는 것이야말로 무량세계의 중생과 제불보살 모두에 대한 광대한 공양이 될 수 있다. 이 공양으로 말미암아 쉼 없이 창조작업을 계속하는 불공성취불의 활동이 더욱 증장된다.
따라서 금강무보살은 대비로자나불이 불공성취불에게 그 창조의 활동을 찬탄하는 모습으로서 공양되는 보살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들로 하여금 대비로자나불의 신통변화상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중생들의 일체 활동도 또한 신통유희의 자재한 활동임을 알게 해 주는 춤으로 활동하는 지혜가 금강무로 표현된 것이다.
이 보살의 인계에 대해서는 ‘제불경계섭진실경’에 “금강권을 결하고 양팔로 춤을 추라. 이것은 바로 금강무인이다. 이 무인을 결하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바로 크게 환희하여 온갖 원을 들어주며 행자의 몸을 보호하리라”고 한다. 이 인상은 금강무보살의 휘돌아 추는 춤의 법에 상응하여 널리 모든 부처에게 공양 올리는 상이므로, 금강무의 공양하는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일체를 따르게 한다고 그 인계의 공덕이 찬탄된다. 또한 금강무의 인계를 결하면 그 인계의 가지력에 의해 속히 정진바라밀을 채운다고도 한다.
금강계만다라 대월륜의 동북에 위치하고 성신회의 형상은 청색이고 좌우의 손을 벌리고 다섯 손가락을 뻗치고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허리 부분에 붙여서 춤추는 자세를 하고 있다. 공양회의 상은 연화 위에 보주를 얹고 양손으로 쥐고 있다.
삽십칠존이야기-30.금강향보살
향기로 세상을 정화하는 보살
현대인들은 각종 화학물질에 오염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적당한 정도로 후각이 퇴화되어 있다. 볼 것이 많은 세상에서 시각을 통해 세상을 보고 느끼는데 충분한 만큼 후각기능이 떨어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책을 보든지 컴퓨터를 보든지 스마트폰을 보든지 하루종일 보는 일에 열중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볼 것이 넘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눈으로 보고 산다고 할 수 있다면 사람보다 1만배의 후각을 갖고 있는 개는 세상을 코로 느끼고 기억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냄새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법이다. 그래서 경찰견은 냄새만 가지고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으며 해당되는 사건의 진위를 정확히 가려준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에게 후각의 기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같이 미세먼지와 오염물질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의 코는 숨쉬는 것만이 아니라 냄새를 통해서 삶의 질이 변화하기도 한다. 퀘퀘한 냄새가 나는 방이나 자동차 안에 냄새를 제거하는 향을 넣는다면 짜증으로부터 벗어나 쾌적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숨쉬기도 어려운 오염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맑은 공기와 숲의 향기는 쾌적함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온갖 냄새로 넘쳐나는 세상에 한 줄기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나간다면 세상을 정화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코로 맡는 향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향기처럼 모든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 마치 사루는 한 줄기의 향이 모든 우주법계를 덮는 것처럼 세상을 청정한 정토로 바꾸기 위해 서원하는 보살의 마음이 바로 향과 같은 기능을 갖는다.
‘유마경’에는 향기로운 나라의 이야기가 있다.
“상방에 중향(衆香) 세계가 있으니 중생이 이 향기를 듣고 함께 가만히 계율을 지키면 저절로 악을 멈추고 선이 생겨난다.”
여기에서 향은 비유로써 향처럼 자신을 사루어 그 정성이 위로는 부처님과 아래로는 모든 중생에게 전해져 세상의 악을 없애는 보살의 행을 가리킨다. 온갖 향기가 일어나 널리 퍼지듯이 보살행에 따라 자연히 악이 멈추고 선이 생겨나서 세상의 뭇 중생들이 함께 즐거워하는 이상적 세계가 바로 중향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향을 공양하는 그 마음을 따라 중생들이 지니고 있던 과거의 원한을 풀고, 온갖 악한 행위가 사라지며, 선한 공덕을 지어 풍요로운 과보를 받으니, 괴로움이 사라지고 이르는 곳마다 상서로우며 속히 깨달음을 성취하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공덕을 지닌 사람을 향기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금강계만다라에서는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활동을 의인화시켜 금강향보살이라 부른다.
향은 스스로를 태워 그 향기로 주변의 잡냄새를 없애고 맑고 깨끗하게 하듯이 금강향보살은 좋은 행위를 보여 그 행위를 보는 중생들로 하여금 향기처럼 맑고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열어준다. 보살이 자신을 희생하여 중생구제에 진력하는 것은 자신을 희생해서 주변을 향기로 채우는 향과 같다. 그 향은 어둡고 구석진 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보고 훈훈한 향기를 심어주어 모든 것을 향기로운 것으로 만든다. 그 방식은 향기의 작은 입자가 되어 두루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정경’에서 금강향보살을 일체여래의 편입의 지혜라 하고 있다. 향은 자체의 성격을 고집하지 않고 연기처럼 곧 사라져버리나, 주변의 모든 것 속에 골고루 스며들어 모든 것과 하나가 되어 모두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향기가 스며든다고 하여 주거나 받는다는 분별심을 내는 일도 없으며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고, 모든 것에 섞여서 일체를 향기롭게 한다.
금강계만다라에서 앞서 내사공양보살의 공양에 의해서 대비로자나불로부터 새로운 힘을 부여받은 사불이 그 활동결과로 얻은 힘을 다시 중앙의 대비로자나불에게 회향하는 것의 첫째가 금강향보살이다.
금강향보살은 달리 금강분향보살이라거나 금강소향보살이라고도 한다. ‘금강정경’에 의하면 동방 아축여래는 대일여래에게 공양하기 위하여 자기가 증득한 편만무애의 향삼매에 들어가 이 보살을 유출한다.
“아축여래는 세존 대비로자나여래의 공양사업에 보답하기 위하여 곧 일체여래의 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삼마지에 든다. 곧 일체여래의 아니가대명비를 자심으로부터 낸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금강향대명비의 형상을 출현시키고, 금강마니보봉누각의 모서리 왼쪽의 월륜 가운데에 머문다.”
향이란 법계에 두루하여 중생을 훈발시켜서 기쁨을 생하게 한다. 또한 향은 제불의 몸 가운데 들어가 즐거우며 환희하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향의 삼매를 적열삼매라 한다. 금강분향보살은 바로 이러한 기쁨의 삼매, 향의 삼매에서 출생한 보살이다. 금강계만다라 외곽의 동남쪽에 머무는 이 보살은 좋은 향을 태워서 번뇌의 때를 제거하고 청정한 보리심을 더욱 청정하게 하는 왕성한 활동 그 자체이다.
또한 금강분향보살이 그 내증으로 삼는 정보리심은 밀교수행자의 계의 근본이므로 정보리심을 계향 또는 분향이라 칭한다.
‘성위경’에는 비로자나불의 금강분향운해삼마지지로부터 금강분향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어 일체중생의 냄새나는 더러운 번뇌를 부수어 없애고, 기쁨의 장애없는 지혜의 향을 획득하게 한다고 설한다. 여기에서 금강분향광명은 정진의 지속성과 번뇌를 없애는 청정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삼십칠존례’에서 ‘진여훈’이라 함은 진여의 향기로서 곧 보리심의 청정한 향기를 말한다. 아축여래는 이와 같은 보리심의 향기로 일체의 번뇌를 제거하며 청정을 증진시켜 이것을 대비로자나불에게 돌린다. 이것은 법의 윤택함과 자비의 구름으로 중생들을 진실의 가르침 가운데 풍요롭게 한다. 보이지 않는 냄새가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모든 중생들의 몸과 마음에 무시로부터의 무명과 냄새나고 더러우며 선하지 않은 것을 무량한 공양의 진실한 향기로 변화하게 하는 공능이라는 것이다.
금강분향의 구름바다와 같은 삼마지란 ‘제불경계섭진실경’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수행자는 이 금강무보살의 관문으로부터 일어나 동북각의 금강소향보살의 관문에 들어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금강소향의 구름이다. 시방의 무량세계를 가득 채우고, 허공 가운데에서 시방의 모든 불과 보살들께 공양한다.’
이렇듯 금강분향보살은 아축여래가 그 한량없는 보리행을 통해 대비로자나불에게 공양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중생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한없는 보리행을 일으켜 일체중생에게 베푸는 모습이다. 즉 세상을 정화시키는 진리의 향기로써 모든 중생들에게 낱낱이 그 향기를 전하는 소임이 금강분향보살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 역할을 상징하기 위하여 ‘제불경계섭진실경’에서는 금강향보살의 인계로 금강소향인이 설해진다.
‘금강권을 결하고 두 손을 서로 나란히 하며, 손의 앞을 아래로 향하여 양손을 펴서 내며 무량한 향운이 인계를 따라 위로 나온다고 관상하라.’
이 인을 결하면 곧 안팎에 있는 온갖 번뇌를 소멸해서 청정심을 얻는다고 한다. 따라서 금강소향의 법에 상응하면 널리 세간에 큰 적열을 베풀 수 있게 되며, 그밖에 금강분향보살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기쁜 곳을 얻는다거나, 금강분향보살의 인을 결하는 힘에 의하여 정려바라밀을 증득한다는 등으로 인계의 공덕이 찬탄된다. 삼매야형으로는 향로를 들고 있다. 이것은 보리심의 활동으로 번뇌를 정화하는 금강분향보살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삼십칠존이야기-31. 금강화보살
깨달음의 꽃을 공양하는 보살
언제부터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는지 그 시점을 알 수는 없지만 불교설화에 따르면 불교와 연꽃과의 인연은 아기부처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보요경>에 의하면 부처님이 탄생하였을 때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향수로 부처님의 몸을 씻고 지하에서 연꽃이 솟아 나와 그 발을 받쳤다고 한다. 또한 아기부처님이 맑은 눈동자로 사방을 돌아보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을 때에 그 걸음마다 아름답고 깨끗한 연꽃이 피어났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부처님의 거룩한 탄생을 기리기 위하여 아름답게 묘사한 설화이지만 이 설화에 담긴 내용은 깊은 상징성을 지닌다. 부처님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누구든 수행하면 청정한 본성을 드러낼 수 있음을 상징하며,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것은 육도윤회를 초월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발자국을 디딜 때에 연꽃이 피어났다고 하는 것은 꽃이 지니고 있는 출생이라는 개념이 승화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꽃의 목적은 씨앗을 맺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개체를 다음 세대에 이어주기 위해서 꽃이 피어나기에 꽃에는 생성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꽃을 생명의 창조로 여기는 전통은 인도에서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인도의 고대 대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서는 천지창조의 신화로서 연꽃이 묘사된다. 즉 비슈누신이 아난타용왕 위에 누워서 명상에 잠겨있었는데, 그 명상에서 깨어난 비슈누의 배꼽에서 황금빛의 연꽃이 피어났다. 그 위에 범천이 앉아 있으며, 이 범천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즉 창조의 신 브라흐마가 광명의 신 비슈누의 배꼽에서 피어오른 연꽃 속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연꽃이 빛과 생명의 상징, 신성한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되어 인더스 문화에서 어머니신은 머리에 연꽃을 꽂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어머니가 상징하는 출생의 의미를 연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신화에서 연꽃이 가지는 출생이라는 의미에 육신의 출생만을 내포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 언어 가운데에서도 악한 사람이 개과천선할 때에 ‘새롭게 태어난다’고 표현하거나, 새롭게 안목이 트일 때에 ‘새 삶을 얻었다’고 하는 것처럼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것이 시작하는 것은 정신적인 출생으로 간주한다.
세친의 <법화경론>에서는 연꽃에 대하여 ‘물에서 벗어남과 꽃이 피어남’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진흙탕물에서 벗어남은 끝이며, 꽃이 피어남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연꽃이 오염되지 않고 진흙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은 혼탁함 가운데 청정이 생하는 것으로서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을 획득하는 정신적 출생을 상징하는 것이다.
원래 불교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무상하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을 기본 가르침으로 하기에 생과 멸은 부정된다. 불교경전 곳곳에 보이는 생과 관련된 서술에서는 육도를 윤회하는 생이 환상이나 아지랑이와 같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기부처님이 육도를 상징하는 여섯 걸음을 넘어서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데에는 부처님의 탄생에 육체적 탄생뿐만 아니라 윤회를 초월한 성자로써의 태어남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겹쳐진다.
일반적인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이 부정되어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하는 불교에서 오직 유일하게 인정되는 마지막은 윤회의 끝, 즉 중생으로서 더이상 생을 받지 않음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멸을 초월한 그 위의 상태는 다시 생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여섯 걸음을 지나 일곱 번째에 내딛은 발걸음은 육도윤회를 벗어난 새로운 시작이기에 생이라 하는 것이다. 생사를 초월한 성자로서 펼쳐지는 거룩한 시작이 여기에 있다.
석가모니부처님 이후에도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출생을 의미하는 연꽃에 앉는 것은 중생들의 윤회하는 생멸을 끝내고 새롭게 전개되는 공덕생으로서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다.
밀교의 만다라에서도 연꽃이 지닌 출생의 상징성을 강조한 것이 <대일경>에 근거하여 건립되는 대비태장생만다라이다.
<대일경소>에서는 ‘세간 사람들이 연꽃을 가지고 길상하고 청정하다고 하며 중생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처럼 지금 비밀한 가르침 가운데에도 역시 대비태장의 묘법연화로써 가장 깊고 비밀한 길상을 삼으니 모든 가지법문의 몸이 이 연화대에 앉는다’고 설하며, ‘부사의한 법계를 연화대(蓮花臺)로 비유할 수 있고 갖가지의 방편도를 연꽃의 잎에 비유한다.
이 연화대는 실상자연의 지혜이다. 연꽃잎은 바로 대비방편이며, 꽃술은 모든 삼매문·다라니문·6바라밀 등으로서 이 낱낱의 꽃술로부터 가지신력으로 삼중만다라 가운데의 한 종류의 장엄권속을 출생한다. 정방향의 네 잎은 여래의 네 지혜이고 모퉁이의 네 잎은 여래의 네 가지 행이다. 여기에 의거하여 나타나 여덟 종류의 선지식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여덟 개의 연꽃잎에 네 부처와 네 보살이 자리한 중대팔엽원이 성립되며, 이는 바로 연꽃이 지닌 출생이라는 의미가 불심을 열어 펼친다는 의미로 전화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만다라의 세계에 들어오는 행자는 안으로 대비의 공덕을 갖추고 밖으로 모든 부처님의 호지를 받으므로, 생사에 처하여도 물들지 않는 새로운 생을 받게 된다. 연꽃에서 출생한 불보살에 의해서 거듭 중생들이 연꽃과 같은 청정한 보살의 생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금강정경>에서는 이러한 연꽃의 의미를 의인화하여 금강화보살이라 부른다. 금강화보살은 금강과 같은 연꽃을 사방에 뿌리는 금강산화천녀, 또는 꽃 그 자체를 미화하여 금강묘화보살이라고도 한다. 꽃은 봄에 피기에 금강춘(金剛春)이라고도 하며 밀호는 묘색금강이다. <금강정경>에 의하면 금강화보살은 남방 보생여래가 대일여래를 공양하기 위해 보장엄공양삼매에 들어가서 이 보살을 유출한 것이다. 즉 만개한 연꽃을 손에 들고 대일여래에 공양함을 의인화하였다.
<이취경의술>에 ‘능히 보리로써 깨달음의 꽃을 피워 구름과 바다처럼 공양한다. 또한 방편을 중생에게 수여하여 공덕의 이익을 행하게 한다’고 하는 것처럼 보생불의 시현인 오묘한 연꽃을 가지고 비로자나부처님께 공양올리며, 다시 방향을 바꾸어 세상의 모든 중생들에게 공양되는 꽃이다. 이로써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깨달음이라는 덕성을 일깨우고 이를 장엄하게 된다.
<성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구름이나 바다처럼 광대한 금강의 깨달음이라는 꽃의 삼마지로부터 금강각화광명을 유출한다’고 하였는데 그 금강의 깨달음이라는 꽃은 중생의 미혹을 깨뜨려 깨달음의 심화(心花)를 꽃피우는 것으로 결국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이 공양의 근본적인 의미가 된다.
이처럼 금강화보살은 보생불이 증장시킨 보리심의 장엄상을 비로자나여래에게 공양하는 모습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숨어있는 깨달음의 덕성을 찾아내게 하고 그 가치를 증장시켜 활짝 꽃피우도록 돕는 온갖 공양의 행을 상징한다. 꽃이란 만행이 청정히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기에, 꽃으로 공양함이란 깨달음으로 향하는 모든 행위에 그 가치를
새롭게 부여하여 승화시키고자 하는 공덕행이다. 더 나아가 보생불이 일체 수행에 대해 가치와 공덕성을 증진시키고 다시 이것을 일체에게 회향하는 모습이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삼십칠존례>에서는 훌륭한 장엄이라는 뜻의 승장엄(勝莊嚴)이라 한다.
성신회의 상은 옅은 황색으로 연꽃봉우리를 얹은 소반을 오른손으로 들고 왼손으로 이것을 받치고 있다. 이 인상은 금강의 오묘한 연꽃의 법에 상응하여 세간에서 경애하는 일을 행하는 상이며, 금강화보살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장엄을 획득한다고 한다. 금강화보살은 청정한 보리심의 무진장엄을 그 내증으로 삼으므로 이 진언을 송함에 따라 청정보리심 장엄의 덕을 성취하고 각화해운삼마지(覺華雲海三摩地)에 들어가 머문다고 하는 것이다.
삼십칠존이야기-32. 금강등보살
진리의 광명을 공양하는 보살
불교도 가운데 널리 알려진 ‘빈자의 일등(貧者一燈)’이라는 불교설화가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아사세왕의 초청을 받아 왕궁에서 설법을 하고 밤이 깊어 기원정사로 돌아가는 길을 밝히고자 왕은 대궐에서 절까지 수만 개의 등불을 공양했다. 이때 한 가난한 노파가 거리에서 구걸한 돈으로 등불 한 개를 사서 부처님께 공양을 했다. 이 한 개의 등불은 왕이 공양한 수만 개의 등불보다 밝았고 새벽이 되어 왕의 등불은 다 꺼졌으나 오직 노파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설화는 온 정성을 다해 등불을 밝힌 참다운 공양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자주 반복되어 설해진다.
그 등불은 어두운 밤 동안 그 등불을 보는 모든 이의 눈동자에 비추어졌을 것이다. 그들이 서로 바라볼 때에 한 사람의 눈동자에 비추인 등불은 다른 이가 보고, 다른 이의 눈동자에 비친 등불은 또 다른 이가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인 사람의 숫자만큼 많은 등불이 동시에 빛났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 거울처럼 비추는 눈동자는 서로서로 빛나면서 끊임없는 상호비춤을 반복한다. 그래서 서로서로 다른 이의 눈동자를 볼 때에 그 속에서 빛나는 또 다른 눈동자에 비친 무수한 등불까지 보게되면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은하수처럼 모든 존재가 등불이 되어 광명으로 휩싸인 장관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노파가 공양한 하나의 등불이 켜져서 뭇 중생들에게 스스로가 광명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던 것이다. 그 등불을 따르면 밝게 빛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하는 본래의 모습이다. 자신을 밝히고 진리를 밝혀서 무명의 흑암을 지워나가는 행자의 모습이다. 자신을 밝히는 것이 진리를 밝히는 것이며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등불을 공양함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으며 <금강정경>에서는 이러한 등공양의 공능을 의인화하여 ‘금강연등천녀’라 하며 또한 금강등보살이라고 한다. 등불은 두루 비추기에 밀호를 보조(普照)금강이라 한다. <금강정경>에 의하면 금강등보살은 서방의 관자재왕여래가 대일여래에 공양하기 위해 자신이 증득한 지혜삼매인 등공양삼매에 들어가서 이 보살을 유출한 것이다.
“이때에 세존관자재왕여래는 세존대비로자나여래의 공양사업에 보답하기 위해서 곧 일체여래의 등공양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삼마지에 드신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곧 일체등공양의 장엄을 나타내어 금강등대명비의 상을 출현하고 세존의 금강마니보봉누각의 모서리 왼쪽 월륜 가운데에 머문다.”
등공양이란 다름아닌 등불을 밝혀서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우주를 밝히고 무명의 어두움을 지워나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등은 부처의 지혜로부터 퍼져나가는 등이다.
<성위경>에는 비로자나불의 금강등명운해삼마지지로부터 금강등명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어 일체중생의 무명주지를 깨뜨린다고 설한다. 여기에서는 비추어지는 장소가 시방세계로 되어있지만 <금강정경>에서는 이 보살에 대해 삼계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번뇌즉보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삼계의 현재 모습 그대로가 무명이 아닌 지혜의 등이기 때문에 삼계로써 등공양을 표현한 것이다. 공양된 등은 일체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의 등불이므로, <삼십칠존례>에서 상보조(常普照)라 하여 항상 서로 비춘다는 점을 강조한다. 서로 비춘다는 것은 연기적인 입장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러한 상호영향관계를 통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마치 두 개의 거울이 있을 때에 하나의 거울은 다른 거울을 비추면서 동시에 다른 거울에 비추어지듯이 모든 존재는 서로서로 비추는 관계에 있다. 거울이 무수하게 많을 때에는 그 모든 거울이 서로서로 중첩해서 비추는 것이 무한하다. 그리고 무한한 상호비춤의 관계는 모든 존재들을 하나로 연결한다. 비록 그 가운데 깨진 거울과 물들어서 잘 비추지 못하는 거울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울간의 상호작용에서 떨어져 있지는 않다. 이와 같이 삼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서로 비추는 거울과 같다. 다시 말하면 나는 너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존재하고 너는 나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존재하게 된다. 상호작용하지 않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기에 상호작용이 바로 존재의 참모습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설의 공식에서 이것과 저것은 영향을 줌으로써 이것과 저것으로 있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고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는 독존자는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영향없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란 바로 작용에서 정지된 한 순간을 포착한 것에 불과하다. 마치 흐르는 강물을 우리 뇌리에 간직하거나 사진으로 찍어서 ‘이것이 저 강이다’라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기억이나 사진으로 남은 강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움직이는 것을 정지시켰을 때에 성립한다. 움직인다는 것은 끊임없이 다른 것들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인데 그 흐름을 정지시켰을 때에 다른 것과 관계성을 상실한
단독의 존재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이해를 통해서 사물과 사물 사이를 갈라놓는다. 여기에서 나와 너,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생겨나며, 대립과 갈등이 발생한다. 원래 상호작용 자체가 모든 존재의 실상인데 우리는 찢어지고 떨어져나간 파편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이 가운데에서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사랑과 미움 등의 대립개념이 성립하며, 한 번 생겨난 감정의 에너지 자체도 상호작용의 결과이기에 끊임없이 다른 힘을 불러들여서 반복적으로 전개된다. 그리하여 수행을 통해서 그 힘을 잃기 전까지 우리의 삶을 온통 휘어잡아 빠져나가기 어렵게 한다. 이렇게 괴로움이 반복되는 상황을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설파하셨는데, 그 이유는 모든 것이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상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먼저 등불을 밝게 비추어서 모든 이들이 보게 하고 ‘그대들 모두가 나와 다름없이 밝게 빛나는 광명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작용이 바로 금강등보살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존재할 수 있게끔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 그 자체뿐이라는 것을 등불이라는 상호공양의 형식으로써 알려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밝게 빛나는 광명이며, 또한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금강등보살의 광명은 낱낱의 거울에 두루 닿아서 온 우주를 비춘다.
이것을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나는 금강등보살이다. 나는 지금 다함없는 등불을 밝혀서 시방무량세계의 허공 가운데에 가득 채워서 시방의 설할 수 없고, 설할 수 없도록 한량없고 가이 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께 공양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금강권을 결한다. 양손을 서로 합하여 심장 앞에 가까이 하라. 이것을 금강등인이라 이름한다. 이 등인을 결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는가. 현재의 몸으로 여래의 청정한 다섯 가지 눈을 획득하리라.”
이와 같이 금강등보살은 아미타불이 증장된 수용지혜를 대비로자나불에게 공양하는 모습으로서, 언제나 지혜의 등불로서 온갖 어두움을 깨뜨리고, 또한 방편으로써 중생에게 수여하여 무량한 광명의 구름과 바다같은 공양을 일으키는 묘용이 있다. 또한 중생에게 청정한 지혜로써 자비를 베푸는 보살이며, 중생이 그 가르침을 수용한 뒤 여래의
청정한 다섯 가지 눈을 획득하여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모든 것의 참된 모습을 보고 스스로 지혜를 밝혀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돕는 보살이다. 금강등보살은 법성의 실상을 관조하고 자성청정을 증득하는 광명삼매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능을 상징하기 위하여 성신회의 상은 백색으로 양손에 등 그릇을 가지고 있으며, 공양회의 상은 연화 위에 등을 세워 양손으로 들고 있다. 다른 회의 존상이나 삼매야형도 모두 연꽃 위의 등으로써 표현되어 있다.
삼십칠존이야기-33. 금강도향보살
맑은 향기로 만나는 보살
<진각교전>에도 인용되어 있는 <법구비유경>에는 향기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땅에 버린 종이 있어 부처님이 이르시되 ‘이 종이를 주워보라’. 비구가 곧 가르침을 받들어서 종이 주워 부처님께 말씀하되 ‘향을 쌌던 종이니다. 이제 비록 향 없으나 향기 여전하나이다.’ 부처님이 다시 갈 때 땅에 새끼 있는지라 비구에게 말씀하되 ‘이 새끼를 주워보라.’ 비구가 곧 새끼 주워 부처님께 말씀하되 ‘비린내가 많이 나니 고기 묶은 새낍니다.’ 부처님이 이르시되 ‘대저 세간 만물들은 본래 청정한 것이나 인연으로 말미암아 죄와 복을 일으키니 현명한 이 친근하면 도의 절로 높아지고 어두운 이 사귀며는 재앙 죄업 일어나니 비유하면 저 종이와 새끼토막 같은지라.’
오직 향에 가까우면 자연 절로 향내나고 고기 묶어 비린내가 나는 것과 다름없어 점점 깊이 물이 들고 나쁜 습성 될지라도 모두 각각 제 스스로 깨쳐 알지 못하니라.”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세상사람들은 서로 비슷한 부류끼리 만나지만, 오래 살아온 가족들의 얼굴이 닮는 것처럼 어울리다보니 같은 부류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가까이 하는 것은 서로 영향을 주어서 닮아가는 일이다. 향이 종이에게 향을 주어서 향기나는 종이가 되고, 생선은 새끼줄에게 생선내를 주어서 비린내가 나게 한다. 즉 무엇인가는 다른 것에게 자신을 주어서 영향을 미치면서 같은 부류가 된다. 이렇게 서로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 모든 존재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마치 매일 먹는 음식물이 나의 몸을 지탱하기도 하지만 구성요소가 되는 것과 같이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나를 만들어가는 방법이 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와 만나지 않으면 연기를 이룰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연기적인 존재이므로 만나서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 모든 존재의 실상이다.
사람들이 지난 과거를 회상할 때에 누구와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였고, 어떤 생각을 공유하거나 감정을 교류했던 일을 떠올릴 것이다. 책을 보아도 다른 이야기를 만나게 되고,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해도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만나는 것이 경험을 이룬다. 우리의 기억은 이렇듯 내 몸 외부의 무엇인가와 관계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병원에서 수술한 환자가 아니고서는 자신의 몸 내부에 대해 큰 관심을 갖는 일도 없다. 즉 대부분의 기억에서 자신의 몸 내부의 오장육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신의 심층의식이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나의 기억을 이루는 내용은 주로 타인이나 다른 대상과의 관계성에 치중되어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나와 관계한 모든 것을 그 내용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연기적인 존재란 관계성을 의미하기에 이러한 가정이 가능할 것이다. 오늘의 만남이 오늘의 나를 만들고 내일의 만남이 나를 만든다라고.
그래서 <실행론>에서는 그 만남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가져갈 것을 일러준다.
“관행자는 심인전당 가까이해 사는 것이 선지식을 친근함에 제일 좋은 것이니라. 심인전당 가까우면 선우 절로 친근하고 심인전당 멀리하면 외도 절로 친근하며 자성불공 궐없으면 선우 절로 친근하고 자성불공 궐하는데 악우 절로 친근한다.”
관행자가 애써 만나야 할 대상은 올바른 마음을 가져서 맑은 향기를 풍기는 자이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 향기를 내면서 그와 만나는 모든 이들을 청정하게 하는 보살이다.
이렇듯 맑은 향기로 그를 만나는 모든 이들을 청량하게 하는 보살을 금강계만다라에서는 금강도향보살이라 한다. ‘금강도향천녀’ 또는 두루 청정하게 한다는 의미의 ‘보청금강’이라 하는 금강도향보살의 출생에 대해 <금강정경>은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때에 세존불공성취여래는 세존대비로자나여래의 공양사업에 보답하기 위해서 곧 일체여래의 도향공양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삼마지에 드신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곧 일체도향공양장엄을 나타내며 금강도향대명비의 형상을 출현하고 세존금강마니보봉누각의 모서리 왼쪽 월륜 가운데에 이치답게 머무른다.”
즉 북방의 불공성취불이 스스로 도향공양삼매에 들어가 유출한 것으로 몸에 향을 발라 청정히 하는 도향의 삼매가 금강도향의 출생처이다. 이 도향은 계·정·혜·해탈·해탈지견의 아주 뛰어나며 번뇌가 없는 오온(五蘊)의 향으로써 중생의 몸과 마음을 쐬어서 번뇌의 혼탁한 열기를 사라지게 하고 오분법신(五分法身)의 향을 이루게 한다. 또한 방편으로써 중생에게 수여하여, 모든 독의 열을 서리와 눈처럼 풀어주는 전단도향으로서 구름과 바다같은 도향의 공양을 일으키게 하는 공능이 있다. 몸에 향을 바르는 것은 정결하게 몸을 씻은 후가 아니면 안된다. 먼저 몸을 청정히 한 뒤에 그 몸에 향기가 나게 하는 것이므로, 모든 번뇌의 때를 없애고 청량하게 하는 청정의 덕으로서 대일여래에 공양함을 이 보살이 상징한다. 여기에서 청정한 몸이란 행동과 언어가 율의에 어긋나지 않고 올바른 습관을 갖는 정신적 청정을 의미한다.
<성위경>에는 비로자나불의 금강도향운해삼마지로부터 금강도향광명을 유출하여 일체중생이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 짓는 율의에 어긋나는 잘못을 깨뜨리고 다섯 가지 청정한 법신을 획득하게 한다고 설한다. 여기에서 도향을 몸에 바르는 것은 신구의의 삼업으로 짓는 잘못을 제거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이것은 바로 대일여래에 대한 최상의 공양이 된다. 그러므로 이 보살의 진언을 송하면 열뇌를 없애어 청량을 얻는다고 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다음과 같이 도향의 공양에 대해 설하고 있다.
“나는 금강도향이다. 나는 지금 가장 좋은 백단도향을 시방 한량없는 세계의 대허공 가운데에 충만하게 하는 것을, 마치 큰 구름이 세계를 두루 채우는 것과 같이 해서 시방의 모든 보살을 공양한다. 양 금강권으로 좌우의 목 내지 가슴과 배를 마찰하며 곧 이렇게 관상하라.나는 지금 이 우두전단의 가장 좋은 도향을 가지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 내지 중생의 몸에 바른다.”
이처럼 금강도향보살은 선교방편지로써 자리이타의 사업을 성취하고 무명번뇌를 제거하여 청량을 얻게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그래서 <삼십칠존례>에서는 ‘계청량’이라 하는데, 이것은 청정한 계행을 통하여 시원하고 맑은 몸과 마음의 경지에 머문다는 뜻이다. 계에 철저하다면 몸과 마음이 얽매일 것이 없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청량이 된다. 즉 불공성취여래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모든 활동을 정화하고 창조의 활동을 증진시켜서 대비로자나불에게 공양하는 모습이 금강도향으로 표현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십선(十善)을 행해 십악업을 짓지 않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밀교 삼매야계의 정신에 투철한 것이다. 삼매야계는 <대일경>에 설하는 3구법문의 실천으로서 계의 바탕을 청정한 보리심으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대일경>에서 설하듯이 희고 깨끗한 신심이 바탕이 되어 출세간적인 삼매의 수행과 관련된다. 희고 깨끗한 신심이란 바로 밀교계사상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 밀교정신을 파악하고 있으면 결코 계를 범하거나 반도덕적이 되지 않는다. 즉 청정한 보리심으로 온몸을 향기롭게 한 경지를 ‘계청량’이라 할 수 있으며, 도향을 몸에 바른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공능을 상징하기 위해서 성신회의 형상은 왼손으로 청색의 도향기를 가지고 오른손의 작은 손가락을 그릇에 담고 있다. 이 인상은 일체의 온갖 고뇌를 없애는 상이다. 공양회의 형상은 도향기를 얹은 연화를 양손으로 들고 있다.
<약출염송경>에는 금강도향의 인계를 결하면 중생들을 청량한 세계로 구소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청정한 계행을 통해 중생에게 봉사하고 중생들도 몸과 마음을 청량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또한 도향인을 결함으로 해서 서원바라밀을 속히 채운다고 한다.
삼십칠존이야기-34.금강구보살
중생을 잘 불러모으는 보살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이 말은 순리에 따르며 인연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으나 모든 것에 의지를 발동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살겠다는 수동적 입장도 포함되어 있다. 갈 사람은 붙잡는다고 해도 가게 되며, 오는 사람 막는다고 해도 오기 때문에 인연 따라 물 흐르듯이 내버려 두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기는 하지만 법을 전하는 수행자로서 불도를 퍼뜨리는 데에 주어진 대로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지 않는 사람 오게 하고 가는 사람 오래 머물도록 노력하는 데에서 붓다의 자비를 읽을 수 있다. 혼자 와서 불도를 성취하고 떠난다면 세상 사람에게는 어떠한 이로움이 있겠는가! 보리수 아래에서 바른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께서 범천의 권청을 거절하였다면 어찌 우리가 불도를 닦을 수 있었겠는가! 자신을 떠나간 다섯 명의 수행자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초전법륜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겠는가!
이 모든 것이 만나는 인연 거부하지 않고 떠나는 인연 붙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불교에서 인연이란 주어진 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데에서 참된 인연의 의미를 볼 수 있다. 중생들에게 불도의 씨앗을 심어주는 인(因)을 통해서 언젠가 성불의 연(緣)으로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비란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끌어모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베풀어서 정법에 따르게 하고[보시섭], 항상 따뜻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하며[애어섭], 몸과 말과 마음으로 선행을 하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고[이행섭], 동체대비심에 근거하여 중생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함께 일하고 생활함으로써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동사섭], 즉 사섭의 지혜를 쓰는 것이다. 마치 갈고리로 농작물이나 물건들을 쓸어 담듯이 네 가지 포섭의 지혜로 중생들을 껴안는 것이다.
금강계만다라 37존의 마무리를 담당하는 보살이 바로 사섭의 지혜를 활용하여 찾아오는 중생을 거부하지 않고 떠나려는 중생을 붙잡는 사섭보살이다.
사섭보살은 금강계만다라 월륜의 네 문에 머무르며 일체중생을 이익케하기 위해 타인을 교화하는 덕을 갖추고 있다. 이들 네 문을 지키는 보살들은 일체중생을 포섭하여 비로자나부처님의 법계 궁전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일체중생을 큰 갈고리를 가지고 끌어들여[금강구], 밧줄로 묶고[금강삭], 쇠사슬로 견고하게 한 뒤[금강쇄]에 방울을 흔들어서 즐겁게 하는[금강령] 네 가지 덕을 현실에 구현하는 보살들이다.
‘삼십칠존례’에서는 이러한 사섭보살의 공능을 각각 사섭지 금강구보살, 선교지 금강삭보살, 견고지 금강쇄보살, 환락지 금강령보살이라 표현하고 있다. 사섭지, 선교지, 견고지, 환락지의 네 지혜를 상징하는 사섭보살은 사불의 공양을 받아 그 능력을 배가한 비로자나불이 그 활동력을 구체적으로 현실에 실현시키기 위해 사방사문에 시현한 보살이다. 사보살 각각에 보시·애어·이행·동사의 사섭법이 해당한다. 여기에서 금강구보살을 사섭지라 하는 것은 금강구가 사섭보살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대비로자나불이 아촉불에게 공양한 금강구보살은 아촉불의 활동인 보리심의 세계로 일체 유정을 인도하는 데에 힘을 배가시켜주는 모습이 표현된 것으로서 삼세제불과 중생을 잘 불러모아 끌어들이는 덕을 상징한다.
금강구보살은 금강계만다라 동쪽 문에 위치하며 밀호를 선원금강(善源金剛)이라 하고, 여러 경궤에서는 ‘금강구천’, 갈고리로 두루 불러모은다는 뜻의 ‘구소집’ 등이라 표현된다.
‘금강정경’에서 금강구보살의 출생을 밝힌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때 세존대비로자나여래는 다시 일체여래의 삼매인 금강구삼매로부터 출생한 살타금강의 삼마지에 드신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덕을 갖춘 지금강은 일체여래의 무수한 구소삼매금강인을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금강구보살의 몸을 출생하니, 저 금강구보살은 금강마니보봉누각의 금강문의 월륜 가운데에 머무르며 일체여래의 구소삼매를 행한다.”
대일여래가 대비로 갈고리처럼 모두 불러모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일체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해 삼매구대사삼매, 즉 구소삼매에 머무는 것이 금강구보살의 몸으로 상징된 것이다.
이 구소삼매는 ‘성위경’에 다음과 같이 설해진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청소금강구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청소금강구삼마지지로부터 금강구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춘다. 일체여래를 금강계도량에 불러들이고 일체중생을 악취에서 건져내며, 무주 열반의 성에 머물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보리심의 집을 지키는 금강구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동쪽문의 월륜에 머문다.”
중생들에게 지옥 등 악한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잘 알고 이에 맞추어 열반의 성이라는 이상향을 제시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마치 갈고리로 모든 것을 쓸어 담는 것과 같다. 비전을 제시하고 중생들의 정신적 바램을 해결해주는 과정에서 금강구보살은 리더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금강구보살은 중생들의 마음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흐름을 잘 알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얻게 될 성취를 제시함에 따라 중생들은 믿고 따르게 된다.
사람의 변화는 감동했을 때에 온다. 진리의 가르침이 마음속 깊은 울림이 되어 마음이 움직이고 그 움직이는 힘에 따라 변화가 이룩된다. 금강구보살이 중생들을 이끌 수 있는 것은 불법을 통한 확신과 깊은 감동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마치 갈고리로 농작물이나 작은 동물들을 죄다 긁어모으는 것처럼 불법에 목마른 중생들의 미혹을 없애고 확신에 찬 마음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모두를 잘 불러모음으로써 자비를 행한다.
이처럼 금강구보살은 이타를 실천하기 위하여 일체중생을 금강계도량에 불러들이고 무주 열반의 성에 머물도록 하기 때문에 ‘금강정경’에서는 두루 구소함으로 해서 만다라를 집회하게 하는 금강구보살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제불경계섭진실경’에 ‘나는 금강구이다. 나는 모든 불과 보살들의 방편지혜인 대금강구이다’라 하는 것이다.
금강구보살이 사용하는 대금강구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금강의 갈고리로서 일체중생을 끌어들이는 방편지혜인 포섭의 의미가 있다. 구체적으로 ‘삼십칠존례’에서는 ‘사섭지’라 하여 사섭을 잘 활용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사섭은 또한 인간들 상호 간에 상호협조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여래가 중생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네 가지 방편, 즉 보시섭·애어섭·이행섭·동사섭은 그대로 중생들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자비의 활동내용이다. 더 나아가 그 사섭행의 대상에 인간과 천상뿐이 아니라 제천과 귀신까지 포함됨을 ‘제불경계섭진실경’의 다음 경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양손에 금강권을 결하고, 좌우의 검지를 펴서 조금 구부려 서로 굽히고 그 두 소지의 양 끝을 서로 향하고 모든 제천과 귀신들을 세 번 구소하여 도량에 들어가게 한다. 잠깐이라도 이 인을 결하면 수행자로 하여금 큰 힘을 얻어 일체의 모든 천과 귀신 등을 부려서 온갖 사업을 성취하게 한다.”
이 경문에 표현하는 금강구보살의 인계는 중생들이 윤회하는 육도 가운데 모든 세계에 있는 중생들을 금강계의 도량에 끌어들여 교화하게 될 것임을 상징한다.
이상과 같은 구소의 덕을 나타내기 위한 금강구보살의 삼매야형은 갈고리가 붙고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고저이다. 성신회의 상은 오른손으로 큰 갈고리를 손에 들고, 왼손은 허리에 붙이고 있다. 이 인상은 금강구소의 법에 상응하여 모든 훌륭한 교화의 업으로써 중생들을 잘 불러들이는 상이다. 이 보살의 진언은 널리 구소하는 공능이 있으므로, 금강구보살의 진언을 송하면 중생을 깨달음의 성에 구소할 수 있다고 설해진다.
삼십칠존이야기-35.금강색보살
금강의 밧줄로 붙잡는 보살
밧줄이란 볏짚이나 삼 따위를 굵고 기다랗게 꼰 줄을 가리킨다. 어떠한 물체를 매거나 얽거나, 연결하거나, 또는 끌거나, 당기거나, 매달거나 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밧줄의 용도는 매우 광범위하다. 그 용도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매어서 묶는다는 기능과 두 가지 이상의 물체를 연결한다는 기능을 들 수 있다.
경전에는 종종 중생이 갖고 있는 올바르지 않은 집착을 밧줄의 얽매임에 비유한 것을 볼 수 있다. 구사론 등의 불교논서에서는 인생사에서 중생들을 묶는 밧줄에 아홉 가지가 있다 하여 구결(九結)이라 한다. 첫째는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이 앞서는 애욕의 결박이고, 둘째는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음에 일어나는 성냄의 결박이며, 셋째는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의 결박이고, 넷째는 어리석은 무명번뇌의 결박, 다섯째는 편견과 오만으로 가득찬 삿된 견해의 결박이다. 여섯째는 집착과 이에 따른 탐욕의 결박이고, 일곱째는 다른 이를 믿지 않는 의심의 결박이며, 여덟째는 시기하는 마음으로 남을 해치는 질투의 결박이고, 아홉째는 받기만 좋아하고 남에게 베풀지 않는 인색의 결박이다. 이와 같은 결박은 한 번 묶이면 좀처럼 헤어나오기 어렵고 점점 더 심하게 조여온다. 그리하여 밧줄에 꼭꼭 묶인 것처럼 자신을 부자유하게 하며, 수없는 생애 동안 윤회하면서 고통을 받게 한다.
매어 묶는다는 밧줄의 용도와 더불어 많이 쓰이는 용도는 두 물체를 이어주는 것이다. 밧줄은 절벽에서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을 구조할 때에 사용하고, 밧줄로 만든 다리는 이쪽과 저쪽을 연결한다. 우리나라 민속놀이에서 밧줄은 정월 대보름날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줄다리기할 때 쓰던 도구로서, 밧줄로 인해 두 마을이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죽음의 위험한 장소에서 생명의 안락한 장소로 연결시켜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대장엄경론>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 인도 어느 나라의 왕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을 세우려고 이 방면에 탁월한 기술을 가진 사람에게 일을 시켰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훌륭한 탑을 완성하였으나 석탑이 준공된 날에 왕은 이 기술자를 높은 탑 꼭대기에 홀로 남겨 둔 채 사다리나 밧줄 등 탑꼭대기와 연결된 모든 것을 치워버렸다. 그것은 만약 이 기술자를 살려 두면 다른 나라에서 이 기술자를 시켜서 이보다 더 훌륭한 탑을 만들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머지 않아 왕의 이런 생각을 눈치챈 기술자는 좁고 높은 석탑 꼭대기에서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다만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전해들은 기술자의 가족들은 걱정이 되는 나머지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구해 내려고 그날 밤에 몰래 탑 밑으로 갔다. 그리고 조그만 목소리로 탑 위에 있는 그에게, “어떻게 하면 내려올 수 있을까?”하고 물었다. 그는 원래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서 그것을 가늘게 찢어서 끈으로 꼬아 밑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밑에 있는 가족들에게 일러서 우선 자기가 내려뜨린 가는 끈 끝에 다른 가는 끈을 잡아매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딸려 올라온 긴 끈을 끌어 올렸다. 그는 그것을 꼬아서 조금 더 굵은 끈으로 하여 다시 밑으로 내려보냈으며, 이렇게 몇 번 되풀이 하니 나중에는 아주 굵은 밧줄이 되었다. 그는 그것을 탑 꼭대기에 단단히 묶은 다음 그 밧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올 수 있었다.
기술자의 지혜는 굵은 밧줄이 되어 탑 꼭대기와 지상을 연결하는 생명줄이 된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모두 밧줄을 통하여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을 연결하는 데에 활용한다. 연결에는 굳이 눈에 보이는 연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의 연결을 밧줄로 비유하거니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밧줄이 있다. 연인 사이에 사랑의 밧줄이 있으면 평생을 다정한 배우자로 행복하게 지낼 것이며, 친구 사이에 우정의 밧줄이 있으면 서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처님의 법을 전하는 데에서도 밧줄과 같은 강한 흡인력을 갖는다면 중생교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금강계만다라의 서른 일곱 가지 역할 가운데에 밧줄처럼 중생을 이끄는 보살이 있다. 이 보살을 금강삭보살, 즉 금강의 밧줄을 가진 보살이라 일컫는데 실제로는 비단의 밧줄로 중생들을 부드러우면서 강하게 붙잡는 보살이다. 이 보살의 지혜를 <삼십칠존례>에서는 ‘선교지’라 하는데, 잘 가르치고 인도하는데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삭보살의 밀호는 등지금강이며 금강라삭, 불공견삭관세음보살, 불공견삭보살 또는 금강삭천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견삭은 비단끈으로서 잘 이끌어들임[羂索引入]을 의미한다. <금강정경>에서 이 보살의 출생을 밝힌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일체여래의 중생들을 잘 이끌어들이는 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삼마지에 들어가 곧 일체여래를 이끌어들이는 진언을 자심으로부터 내어 송한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구덕 지금강자는 일체여래의 중생들을 이끌어들이는 삼매의 대인을 이루고 금강삭보살의 몸을 출생하여 세존금강마니보봉누각 보문의 월륜 가운데에 머문다.”
이 보살은 대일여래가 대비의 비단으로 짜 만든 밧줄을 가지고 일체중생을 이끌어들이기 위하여 삭인삼매에 주하여 출생시킨 보살이다.
<약출염송경>에 ‘금강견삭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잘 이끌어들인다’고 하듯이, 금강삭이라는 밧줄을 가지고 사람들을 묶어 불도에 마음을 향하도록 함을 상징한다.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그 삼마지를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견고하게 중생들을 이끌어들이는 방편의 밧줄과 같은 삼마지의 지혜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잘 이끌어들이는 방편의 견삭삼마지의 지혜로부터 금강견삭광명을 유출하고 널리 시방세계를 비춘다. 일체여래와 성자들을 이끌여들이고 일체중생이 현실을 실제로 착각하는 진흙에 빠져 있는 것을 밧줄로 붙잡아 깨달음의 법계궁전에 편안히 머물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공덕의 집을 위호하는 금강견삭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남문의 월륜에 머문다.”
이처럼 중생을 방편으로 이끌여 들여 이익케하는 것이 광대하므로 금강삭보살을 <금강정경>에서는 ‘중생익’이라 한다. 번뇌의 진흙탕속에 빠져 있는 중생을 밧줄로 붙잡아 올리고 잘 인도하여 교화의 이익을 주는 것이다. 사섭법 가운데 애어의 덕에 해당되는 보살이다. 앞서 금강구보살의 보시섭에 의해 불도에 가까이 다가온 중생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좋은 언어, 즉 애어섭을 통해서 불도에 견고하게 머물게 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다음과 같이 금강삭의 관을 설한다.
“행자는 삼매로부터 일어나 서방의 금강삭보살의 관문을 관하라. 스스로 이렇게 관상하라. 나는 금강삭이다. 먼저 구소한 일체의 천과 귀신 중에서 아직 들어오지 않은 자를 도량에 들어가게 한다. 나는 대금강삭으로서 견고히 묶어서 놔주지 않는다.”
위의 글은 금강삭보살이 금강의 밧줄로 일체중생을 견고히 묶는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을 견고하게 묶는 이유는 공을 의미하는 금강의 밧줄로 묶음에 따라 일체 윤회의 원인이 되는 번뇌의 밧줄이 끊어지며 다시 속박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보살의 성신회의 상은 백황색으로 오른손에 밧줄을 쥐고, 왼손은 권을 지어서 허리에 붙이고 있다. 이 인상은 금강삭에 상응함으로 해서 널리 일체를 두루 이끌어들어오게 하는 상이다. 이 보살의 진언을 송하면 중생을 진리의 바른 깨달음 안에 들어오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삼십칠존이야기-36. 금강쇄보살
중생의 마음을 불도에 매어두는 보살
반야심경은 그 첫머리에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물질과 정신, 즉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텅 비어있음을 보고 모든 괴로움을 벗어남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인간의 다섯 가지 감관으로 알아채는 모든 것들이나 대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부정된다. 270자로 구성된 짧은 경전이면서 반야심경에는 무(無)자가 21번, 공(空)이 7번 등장할 만큼 계속되는 부정이 진행된다. 그러다가 경전의 후반부에서는 부정의 연속이 그치고 반전이 일어난다. 이 크게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에 대한 찬탄과 함께 진언으로 끝맺고 있다. 공한 세상의 이치를 비추어보고 생노병사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진언을 염송하도록 일러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하기에 집착을 벗어놓게 하되 그 방법으로써 수행을 통해 체험할 수 있도록 마무리짓고 있다.
마무리를 수행으로 귀결짓는 스타일은 대부분의 불교 경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경전의 끝을 장식하는 여러 가지 서술 가운데에 단연 많이 보이는 글귀에 신수봉행(信受奉行)이 있다. 경전에서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을 잘 이해하였으면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할 것을 강조하며 끝맺는다. 그다음은 경전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무한한 수행이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다. 우리가 경전을 단순히 읽기만 하였다면 잠깐의 감동으로 남을 수 있을지언정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우리가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할 때에라야 그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 구현되고 그에 따른 이로움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해시킨 뒤에, 그 이해를 통하여 얻게 된 환희한 마음이 실천으로 전개되도록 유도한다. 경전의 구조가 대부분 믿음[信]으로 들어가 그 가르침을 잘 이해[解]하여 환희한 마음으로 직접 실천[行]하며, 실천함에 따라 단계적인 증득[證]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음은 경전 성립의 목적이 중생들로 하여금 실천을 일으키도록 권유함에 있는 것에 말미암는다. 경전의 규모가 큰 경우에는 짧은 문구가 아니라 아예 품의 제목을 ‘촉루품’, ‘부촉품’, ‘유통분’ 등으로 하여 받들어 행해야 할 내용에 대한 구체적 서술뿐만 아니라 이 가르침을 널리 펴도록 권하고 있다.
그런데 경전에서 누누이 설했건만 실천의 노력이 약한 중생들이 있을 수 있다. 마음은 불도에 두면서 현실의 삶에서 정진과는 거리가 멀어진 사람들이 있다. 붙잡아두면 호시탐탐 탈출할 방법만을 모색하는 동물처럼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들이 있다. 이들에게 불도를 향한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자물쇠처럼 방편으로나마 꼭꼭 잡아맬 필요가 있다.
자물쇠란 문 따위의 여닫는 물건으로 잠그는 장치를 가리킨다. 견고하게 붙들어 매어서 문이나 금고 등을 잠그는 데 사용되는 도구로서 안에 있는 것을 굳게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현대적인 자물쇠가 만들어지기 이전 옛날에는 쇠사슬 등으로 묶어서 동물 등이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을 통칭하여 쇄(鎖), 즉 자물쇠라고 불렀다.
자물쇠로 견고하게 묶인 데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는 몸이 아닌 마음이 묶여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어딘가에 마음이 끌려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 우리는 마음을 빼앗겼다, 또는 사로잡혔다고 표현한다. 넋을 잃고 바라보거나 몰입해 들어갈 때,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기는 어렵다. 불법의 깊은 뜻을 알아 환희심이 벅차 더 이상 다른 어떠한 가르침도 들어오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불법에 사로잡혀 꽁꽁 묶인 것이다. 불법에 들어오기 전에 가졌던 수많은 속박은 반야심경에서 설하는 무수한 무(無)자와 공(空)자로써 부수고 진리의 가르침에 굳게 머무르며 그 상태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진언을 염송하게 되는 것이다. 또는 중생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다양한 법문을 믿고 이해한 뒤에 신수봉행해 나가는 것이다. 다시 그 이해가 견고한 지혜가 되어 이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중생으로 하여금 세속의 번뇌를 벗어나 불법에 몰입해 들어가 안주하면서 널리 이롭게 하는 행은 깊은 감동을 통해 자물쇠에 묶인 것처럼 견고한 결박으로부터 전개된다.
이렇듯 중생의 마음을 견고하게 붙들어매는 역할을 금강계만다라 37존 가운데 금강쇄보살이 담당하고 있다.
금강쇄보살은 ‘금강쇄천’, ‘구쇄박’이라고도 하며 중생을 확실하게 붙잡는 공덕을 상징한다. 그래서 밀호를 견지금강이라 한다. 붙잡은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금강정경>에서 금강쇄보살의 출생을 밝힌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일체여래의 삼매쇄대사의 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삼마지에 들어가, 곧 일체여래삼매를 자심으로부터 낸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구덕 지금강자는 일체여래의 견고한 삼매의 인을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금강쇄보살의 몸을 출생하고 세존금강마니보봉누각의 법문의 월륜 가운데에 이치답게 머무르며 일체여래께 오묘하게 결박하는 형상을 짓는다.”
대일여래가 일체중생을 이익케하기 위하여 삼매쇄대사삼매, 즉 쇄박삼매에 머물러 이 보살을 유출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매어 둔 것이다. 따라서 금강쇄는 자물쇠를 가지고 사람들을 불도에 매어둠을 상징한다. 이 보살은 사섭법 가운데 이행(利行)의 덕에 상당한다.
자비의 서원으로 모든 악취문을 걸어 잠그고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에서 물러서지 않도록 이로움을 주려고 하는 금강쇄보살의 삼마지를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견고한 금강쇄계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견고한 금강쇄계삼마지지로부터 금강쇄계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춘다. 일체여래의 성자들을 금강계도량에 들어가게 하고 나서 대비서원의 결박에 머물며, 내지 모든 중생들이 갖고 있는 외도의 온갖 견해를 부수고, 위없는 보리에서 물러서지 않는 견고하고 두려움 없는 큰 성에 머물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쇄계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지혜의 집을 지키며 서쪽문의 월륜에 머문다.”
이처럼 금강쇄보살은 대비로써 중생을 보리도량에 견고하게 결박해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라연이 견고한 힘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금강정경>에서는 ‘잘 붙잡는 자’라 하고 <삼십칠존례>에서는 ‘견고하게 하는 지혜’라 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이 보살의 관상과 인계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다시 다음에 행자는 이 삼매로부터 일어나 정북방의 금강쇄보살의 관문을 관해야 한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나는 금강쇄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금강쇄인을 결하자마자 행자로서 훌륭히 가르침의 법을 베풀게된다. 손에 인을 결하는데 먼저 좌우의 엄지, 검지로 서로 구부리는 것을 마치 쇠로 만든 자물쇠처럼 하고, 좌우의 나머지 손가락 모두로 주먹을 쥐라. 이것은 금강쇄인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금강쇄보살임을 자각함에 의해 이미 들어온 중생을 깨달음의 성, 정진해 나아가는 불도수행에 단단히 매어둘 수 있다. <약출염송경>에서도 금강구쇄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묶어서 중생들을 진리에 머물게 한다고 그 인계의 공능을 설한다. 또한 자물쇠모양의 금강구쇄인을 결함으로써 본존으로 하여금 견고하게 머물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성신회의 모습은 옅은 황색으로서 왼손으로 권을 하고 허리에 붙이고, 오른손으로는 굵은 쇠사슬을 쥐고 있다. 이 인상은 금강쇄의 법에 상응하는 까닭에 곧 일체의 묶음을 감당하는 상이다. 공양회의 삼매야형은 견고한 결박을 의미하는 연꽃 위의 사슬이다. 이 보살의 진언을 송하면 이미 들어온 중생을 깨달음의 성에 붙들어매어 번뇌장과 소지장을 단멸함을 나타낸다.
삽십칠존이야기-37. 금강령보살
중생과 함께 불도로 나아가는 보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가 어떠한 자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불교에서는 가장 악한 자를 일천제라 하고 있다. 일천제(一闡提)는 선근이 끊겨져서 구원받을 가망이 없는 자로서 ‘선근을 끊어버린 자’, 또는 ‘믿음을 갖추지 못한 자’라고 풀이할 수 있다. 원래의 뜻은 ‘욕구를 계속하는 사람’이나 세속적 쾌락만을 추구하고 또 불교의 가르침을 훼방하여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자라고 한다. 즉 성불하는 인(因)을 갖지 못한 이로서 스스로도 성불하지 못할 뿐 아니라, 누군가가 성불하는 길로 가는 것을 막아서며 함께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자이다.
그런데 <입능가경> 2권에는 일천제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본래 해탈의 인(因)이 없는 단선근을 가진 단선천제(斷善闡提)와, 보살이 일체중생을 제도하고자 고의로 열반의 깨달음에 들어가지 않는 대비천제(大悲闡提)의 둘이다. 대비천제는 보살천제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지옥중생이 모두 성불하기까지 스스로의 성불을 유보한 지장보살이 대비천제이다. 그러나 앞의 단선천제와 다른 점은 타인의 성불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갈 수 있도록 스스로 성불의 인을 유보한 것일 뿐이다.
단선천제의 경우 불종자를 끊는다는 것으로 최고의 악이지만, 대비천제는 불종자를 잇는다는 것으로 최고선이라 할 수 있다. 두 경우에 성불에서 멀어진 것은 같기에 다 천제라고 하지만, 함께 가지 않는 단선천제와 모두와 함께 나아가려는 보살천제는 그 방향이 다르다.
금강계만다라 37존에서 맨 마지막 위치에 있는 금강령은 중생들에게 환희심이 일어나도록 방울을 흔들어서 중생의 마음에 불종자를 일깨워 불도로 나아가도록 옆에서 함께 거들어주는 보살이다.
사섭보살에서 제일 먼저 금강구보살이 갈구리를 사용하여 중생들을 깨달음의 성에 불러모으고, 금강삭보살이 불러들인 중생들을 잘 인도하여 이익을 주며, 금강쇄보살에 의해 중생을 깨달음의 성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면 마지막으로 금강령보살이 깨달음의 성에 머무는 중생들에게 보리심의 종자가 싹이 터서 자라나게끔 돕는 일이다. 종자(種子)란 씨앗이라는 의미로 무엇인가가 생겨날 가능성을 가리킨다. 초목의 종자가 갖가지 싹을 틔우는 것처럼 보리심의 씨앗이 성불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므로 이것을 종자라 하는 것이다. 종자가 싹이 트면 부처의 나무가 자라난다. 그 자라남을 위한 만남은 기쁨이며 함께 가는 길은 더욱 큰 기쁨이다. 금강령보살의 방울은 함께 가는 기쁨의 심정을 드러내어 묘사하고 있다.
함께 가는 기쁨을 <승만경>의 성(城)에 들어가는 비유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선남자여, 마치 어떤 성의 가로 세로 넓이가 각각 1유순이고, 많은 문이 있으며 그 길이 험하고 캄캄하고 어두워서 아주 겁이 나지만, 일단 성에 들어간 사람은 많은 안락을 받는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오직 외아들만 있어서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깊었는데, 저 성이 그렇게 즐겁다는 말을 멀리서 듣자, 즉시 외아들을 버리고 성으로 가서 들어가려고 하였다. 이 사람이 방편으로 험한 길을 지나서 저 성문에 이르러, 한 발은 문 안에 들여놓고 한 발은 아직 들여놓지 않은 때에 문득 그 아들이 생각났다. ‘나는 오직 외아들만 있는데 올 때에 왜 끝까지 같이 오지 않았을까? 누가 기르고 보호하여 뭇 고통을 여의게 할까?’ 그리고는 즉시 안락한 성을 버리고 아들의 처소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이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오신통을 닦아 익혀서 거의 번뇌를 다하면서도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신통을 버리고 범부의 세계로 향한다. 선남자여, 성은 대반열반을 비유하며 험난한 길은 여러 마구니의 업을 비유하고, 성문에 도달한 것은 오신통을 비유한다. 한 발을 들여놓음은 지혜를 비유하며, 다른 발을 들여놓지 않음은 모든 보살이 해탈을 아직 증득하지 않음을 비유하며 외아들은 일체중생을 비유한다. 이런 보살은 즉시 대비심을 일으켜 일체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중생의 세계로 돌아가 열반을 취하지 않는다. 또 모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세간에 나아가 범부의 경지를 나타내 보인다.”
그래서 보살은 보살천제가 되어 모든 이와 함께 하고자 한다. 이러한 보살행은 사섭법에서 동사(同事)의 덕에 상당한다. 금강령보살이 상징하는 사섭법 가운데 동사섭이란 불종자를 갖고 있는 중생이 그 불종자를 키울 수 있도록 외아들처럼 끝까지 버리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과 더불어 함께 나아가는 것이 보살의 궁극이다. 그래서
37존의 마지막 마무리는 중생과 언제나 함께하는 보살인 금강령보살로 귀결짓고 있다.
금강령은 밀교 법구의 하나로서 금령(金鈴)이라고도 한다. 제존을 경각시키고 또는 기쁘게 하기 위하여 수법 중에 흔드는 방울로 금강저의 한 끝에 매어 있다. 수법(修法)할 때 중생을 독려하여 정진하게 하고 여러 부처를 권청하며 일깨우고 환희하게 하기 위하여 울리는 악기이다. 종 모양의 방울 부분과 손잡이로 이루어지며, 손잡이 끝의 양식에 따라 독고령·삼고령·오고령·보주령·탑령이라 일컫는다.
금강령은 달리 금강편입이라 하는데 중생들을 널리 불러들이는 보살이라는 뜻이며, 밀호는 ‘해탈금강, 환희금강’이다.
<금강정경>에 의하면 금강령보살은 일체여래의 편입대사삼매로부터 출생하였다. 대일여래가 유정을 경각시키고 불도에 귀명하여 들어오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금강령의 삼마지에 주하여 이 보살을 유출한 것이다. 그것은 일체중생에게 환희를 시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염송결호법보통제부>에 일체여래의 모든 일을 불러모은다고 하는 것처럼 금강령은 방울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본문에서 편입이라 한 것은 금강령을 흔들어 나오는 묘한 소리가 두루 일체의 몸과 마음에 들어가는 까닭이다.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금강령의 삼마지를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반야바라밀금강령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반야바라밀금강령삼마지지로부터 금강령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춘다. 일체여래의 바다처럼 모인 성중과 금강계도량에 머무는 자를 환희케하고, 일체중생의 이승의 갖가지 견해를 부수어 반야바라밀의 궁전에 안치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령보살형을 이루고 정진호를 지키며 북문의 월륜에 머문다.”
여기에서 금강령은 흔들면 소리가 나는 법구로서 반야바라밀에 입각함에서 오는 기쁨의 소리를 나타낸다. 일체중생에게 금강령을 들려줌은 곧 반야바라밀의 법문을 들려줌과 같다. 중생은 금강령의 소리를 듣고 보살과 함께 불도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인왕반야다라니석>에서는 금강령이란 반야바라밀의 뜻을 나타낸다. 방울을 흔들어 우매한 중생을 깨우치는데 한 번 방울소리를 들으면 반야바라밀을 깨쳐 알게되므로 최일체마원보살, 즉 모든 마구니의 원한을 부수는 보살이라 한다. 이 까닭에 이 보살은 손에 금강령을 지닌다고 한다. 이와 같은 금강령의 묘용을 <삼십칠존례>에서는 ‘환락지’라 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다음과 같이 그 관과 인계를 설한다.
“행자는 이 삼매로부터 일어나 정동방의 금강령보살의 관문을 관하라.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금강령이다. 금강령인을 결하면 곧 모든 불과 보살들이 애념하실 것이다. 그리고 금강령인을 결하는데 좌우의 손가락을 사용하여 오른쪽으로 왼쪽을 누루고 다 각각 서로 교차하는 것을 마치 요령의 모습과 같게 한다.”
이처럼 금강령보살은 모든 불과 보살들이 애념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구체적 내용을 인계에서 볼 수 있다. 인상은 금강령으로 두루 경각함으로 말미암아 일체를 편입하여 환희케 하는 것으로 ‘금강환희인’이라고도 한다. 여기에는 중생뿐만 아니라 모든 성현들도 포함된다. 이 보살의 진언을 송하면 중생을 부처의 도시에 머물게 하며 일깨워서 감동시키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약출염송경>에는 금강령의 인계를 결하면 환희를 일으킨다고 하여 실상에 안주하고, 부처의 법문을 듣고서 법열에 잠기며 또한 일체의 중생들에게도 환희를 생하게 하는 금강령보살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성신회에서는 삼매야형으로 금강령을 들고 있으며 형상은 몸 전체가 청색이고 왼손은 권을 쥐고 허리 앞에 두며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펴고 나머지는 구부려서 가슴 앞에 두고 있다. 미세회에서는 양손에 금강령을 들고 있다. 이 존은 중생들을 끌어들여 환희하게 하는 작용을 상징한다. 마치 어부가 물고기를 잡을 때에 방울을 흔들어서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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