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존 이야기 #1 / 위덕대학교 김영덕 교수님
37존은, 중기밀교 즉 순밀의 금강계만다라를 공부하는데 있어 중요한 불보살 분들입니다.
순밀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견문을 넓힌다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삼십칠존이야기-1.비로자나여래
내마음에서 항상 빛나는 부처님
법신불 비로자나(毘盧遮那)라고 하면 우선 '화엄경'을 떠올릴 수 있다. 비로자나는 '화엄경'의 교주로서 이 경에서 여러 가지 방면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초기불교의 '잡아함경'에서도 비로자나의 명칭이 등장한다. 구나발타라역 '잡아함경'권22에는 ‘지금 비로자나가 청정한 광명을 드러낸다’고 하고 이 비로자나는 아수라의 왕인 라후라로 나와 있다. 그리고 '잡아함경'권40에는 ‘비로자나의 아들 파치아수라왕이 몸에서 온갖 광명을 기수급고독원에 널리 비추고 비로자나아수라왕이 게송으로 부처께 사뢴다’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부처로서의 비로자나가 아니라 여러 천신 가운데 하나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바이로차나가 광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태양으로 상징되는 고대의 태양신에서도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힌두교에서 태양신의 아들을 비로자나신(神)이라 한다. 바이로차나는 태양의 광명이 두루 비추는 점으로부터 태양 자체의 이름의 하나가 된 것이지만, 원래 빛나는 것으로서 불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달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이 바이로차나는 아수라의 임금의 이름으로서 데바[天神]의 왕인 샤크라, 즉 제석천과 함께 그 이름이 우파니샤드에 나오고 있다. 이렇듯 바루나를 거쳐 이란의 태양신인 아후라에 연원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바이로차나라는 명칭에는 고대 인도와 이란의 태양신 숭배의 전통과 함께 힌두교적인 신관이 흡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로자나여래는 범어로 Vairocana-tathāgata이며 변일체처(遍一切處)ㆍ광명변조(光明遍照)ㆍ변조여래(遍照如來)라고도 번역한다. 밀교경전에서 보통 칭하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는 명칭은 마하비로자나여래(摩訶毘盧遮那如來, Mahāvairocanastathāgata)를 의역한 것이다. 마하에는 크고, 많고, 수승하다는 의미가 있고 비로자나에는 변조광명, 즉 태양의 의미가 있다. '금강정경'에는 비로자나여래와 마하비로자나여래의 구별이 명확하게 설해져 있는데 비로자나여래는 경의 교주이며 만다라의 중심에 위치하는 주존이다. 마하비로자나여래는 만다라 그 자체, 즉 금강계만다라를 예로 들면 비로자나여래를 포함한 5불ㆍ4바라밀ㆍ16대보살ㆍ8공양ㆍ4섭ㆍ현겁천불ㆍ항삼세명왕 등 만다라 전체 존들의 본성이고 일체 현현하는 것들의 배후에 있는 원동력, 또는 생명의 부여자라고도 말할 수 있는 편재자이다. 이것을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일체여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하비로자나여래를 대일여래라고 번역한 것은 선무외(善無畏)삼장이 최초이다. 선무외의 제자 일행(一行)이 기록한 '대일경소'에는 '범음(梵音)으로 비로자나는 태양[日]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하여, 대일여래라는 명칭을 준 이유를 설하고 있다. 태양이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태양의 에너지를 그 근원으로 하기에 그 어느 것보다 가장 위대하고 절대적인 것이고, 그러한 존재에 여래를 결부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세간의 태양으로 가히 비유할 수 없다. 단지 그 적은 부분의 상만을 취하는 까닭에 대(大)의 명칭을 더하여 마하비로자나라 한다고 하여, 상대적인 현실계의 태양과는 다른 절대적인 광명의 특질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계의 태양에 없는 세 가지 특성이 대일여래에게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어둠을 없애어 두루 밝은 뜻[除暗遍明]이다.
세간의 해는 방향을 나눔이 있어 만약 바깥을 비추면 안은 밝게 하지 못하여 한쪽에만 있고 다른 한쪽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한 오직 낮에만 빛날 뿐 밤에는 빛을 내지 못한다. 여래의 지혜의 햇빛은 이와 같지 않아 모든 곳에 두루하여 크게 밝음을 비춘다. 안과 밖의 차별이 없고 낮과 밤의 다름이 없다. 또한 해는 염부제로 가서 일체의 풀과 나무, 수풀이 그 성분을 따라 각각 자라나니 세간의 온갖 일이 이로 인하여 성장한다. 여래의 해의 빛은 법계를 두루 비추어 평등하게 무량한 중생들의 갖가지 선근 내지는 세간 출세간의 수승한 사업을 개발시키므로 이로 인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다[能成衆務]. 또한 두터운 어두움과 혼미함이 태양을 가리나 이 또한 맹풍이 구름을 불어 태양의 빛이 드러남을 막을 수 없는 것이 처음 생겨남이 아닌 것처럼 불심의 태양도 또한 이와 같다. 오직 무명과 번뇌와 희론의 겹겹 구름이 덮힌다 해도 이로써 구경의 제법실상삼매를 줄일 수 없으며, 원만하고 밝아 끝이 없으므로 더할 바도 없는 것이다[光無生滅]. 이것은 대일여래의 보편적인 성격, 자비방편과 지혜반야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금강지(金剛智)삼장은 '금강정경의결'에서 비로자나를 최고로 높이 드러난 광대한 눈의 뜻이라 하여 최고현광안장여래(最高顯光眼藏如來)라 번역하고 또한 제불보살이 이를 의지하여 밝게 보며, 제불보살이 이 가운데에서 출생하며, 일체의 현성이 이 가운데 머문다고 표현하여 일체불보살의 근본인 비로자나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들 주석가의 명칭 외에 밀호를 변조금강(遍照金剛), 무장금강(無障金剛)이라 하며 관정명으로 금강계여래가 있다.
'금강정경'에서 일체의성취보살은 일체여래 즉 대일여래의 각성된 가르침에 의해 선정의 경지에서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을 수행하여 그에 의해 올바른 깨달음을 증득하는데, 그때 일체여래에 의해서 관정을 받아 ‘금강계(Vajradhātu)’라는 관정명을 수여받는다. 일체의보살마하살이 일체여래로부터 받는 금강계의 관정은 금강이라는 명칭이 말해주듯이 여래의 절대의 경지를 보인 것이다. 여기에서 금강계란 5지(智)를 원만구족한 불신이다. 일체여래의 신밀ㆍ구밀ㆍ의밀의 세계, 금강계를 현증한 일체의성취보살은 금강계라고 하는 명호로써 관정되고, 금강계보살이라 불린다. 일체허공계에 편만한 일체여래와 동등한 위를 얻은 보살은 일체여래에 대해 자신에게 일체여래의 금강신을 현증하는 뜻을 선언한다. 일체여래의 경계를 얻고 부처의 몸을 원만히 하고, 다시 일체여래의 가지를 입어 4지(智)를 갖추고 금강계여래로 되는 것이다. 금강계여래가 머무는 도량은 대우주 그 자체로서 모든 경계가 그대로 여래의 세계로써 신ㆍ구ㆍ의 삼밀의 작용으로서 구현되는 세계가 금강계이다. 그것을 깨달아 알고 모든 곳에 무애자재하게 머무는 것이 금강계여래라는 명칭이다.
따라서 금강계여래, 즉 비로자나여래가 머무는 자리는 어느 곳이나 금강좌이며, 동시에 사자좌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자가 온갖 짐승들의 왕으로서 모든 동물 가운데에서 두려움없이 다니는 것을 비로자나불이 제법의 왕으로서 제법 가운데 변화무애한 것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색은 흰 거위와 같고 형태는 맑은 달과 같다. 일체의 상호가 모두 다 원만하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머리털을 늘어뜨리며, 비단같은 묘한 천의(天衣)를 허리에 두르고 소매를 끌어서 웃옷으로 삼는다‘고 그 형상을 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석가여래와는 다른 보살의 모습이다. 비로자나여래의 인계는 지권인(智拳印)으로서 보리인(菩提印)ㆍ여래권인(如來拳印)이라고도 한다. 지권인에서 왼손은 소우주, 오른손은 대우주를 상징한다. 왼손과 오른손을 합하는 것에 의해서 ‘이(理)와 지(智)가 둘이 아님’ㆍ‘중생과 부처가 동일함’ㆍ‘미혹과 깨달음이 한몸인 이치’를 나타낸다. 삼매야형은 금강계자재인이라고 이름되는 탑인(塔印)이다. 삼매야회에서는 가로로 누운 오고저 위에 탑을 놓고 있다. 대일여래의 상징을 탑으로 한 것은 전통적인 불타의 세계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삼십칠존이야기-2.아축여래(阿閦如來)
동방 묘희세계의 부처님
아축여래(阿閦如來, Akṣobhya-tathāgata)는 보리심이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 움직이지 않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부동불이라 하며, 무동불(無動佛)·무노불(無怒佛)·무진에(無瞋恚)라고도 한다. 정토사상을 설하는 가장 오래된 경전 중 하나인 ‘아축불국경’ 2권에서 다음과 같은 아축여래의 기술을 볼 수 있다.
동방으로 천 개나 되는 불국토를 지나 아비라제라는 이름의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의 부처는 ‘집착하는 바 없이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으신 대목여래(大目如來)’라 하였다. 모든 보살을 위해 육바라밀에 관한 설법을 할 때 한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맞잡고 대목여래께 여쭈었다. “오직 바라옵나니 귀하신 분 가운데 귀하신 분이시여.······저는 지금부터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고자 하여 성냄과 음욕 등을 끊어 정각을 성취할 때까지 정진하겠나이다.······” 그 비구는 대서원을 세운 다음 오랜 겁 동안 정진하여 성도한 뒤, 불가사의한 무량한 세계 가운데에서 지금도 설법하고 있다. 그를 아축이라 이름하며, 아축여래가 있는 곳은 성냄이 없으므로 아축지(阿閦地)라 한다.
여기에서 대목여래를 향해 대서원을 발한 비구가 바로 아축보살이며, 이 비구가 성불함에 의해 아축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어 현재까지 동방 묘희세계에서 설법하고 계시다 한다.
그리고 <비화경>에 의하면 아축불과 아미타불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과거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아승기겁을 지나서 산제람이라고 하는 불세계에 있었다. 그때 대겁의 이름은 선지(善持)였고, 그 겁 중에 전륜성왕이 있었는데 이름은 무쟁념(無諍念)으로서 4천하를 다스렸다. 그리고 보해(寶海)라는 대신이 있었으며 그에게 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는 32상을 갖추고 영락으로 몸을 꾸미고 80종호를 차례로 장엄하였으며, 백 가지 복덕으로 모습을 성취하여, 항상 광명이 한 길만큼 비추니, 그 몸의 원만 구족함이 마치 니구로나무와 같아서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았다.
그가 태어날 때 백천의 모든 천신이 와서 함께 공양하였으므로 이름을 보장(寶藏)이라 하였다. 그 후로 장성하여 머리와 수염을 깎고 법복을 입고 출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고 명호를 보장여래라 하였다. 그리고 무쟁념왕과 그의 아들들이 부처를 공양하고 정각 구하기를 서원하였으며 그 뒤 왕은 아미타불이 되고 아홉 번째의 왕자인 밀소가 아축불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아축불과 아미타불의 밀접한 관계를 알 수 있다. 실제로 아축불이 불교계에 등장한 것은 아미타불과 거의 비슷한 시기로 여겨지고 있다.
이상의 경문 등에 의하면 아축여래와 그 나라는 성냄과 음욕 등의 번뇌를 여읜 오묘한 기쁨의 경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내외적 장애를 제거하며, 진리가 갖춘 영원성·보편성을 명확히 밝히는 역할을 담당하는 부처로 수행자의 깨달음을 향한 마음이 동요되지 않도록 그 마음을 진정시키는 여래이므로 아축불을 부동불이라고도 한다.
아축여래의 명호를 칭념하면 분노가 가라앉고 동요됨이 없는 굳건한 보리심을 내게 된다는 공덕이 있어 한때는 아축여래에 대한 신앙도 대단했다. 또한, 아축여래를 신앙함으로써 마음이 선해지고 상쾌해지며, 혹은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환희의 세계에 몰입할 수가 있다고 하므로 이 세계를 선쾌, 또는 묘희국이라고도 한다.
묘희란 절대적인 기쁨을 나타내며 그것은 우리의 참모습이 바로 여래라는 것을 볼 때의 기쁨이다. 여래에서 여(如)는 참으로 평온한 연기실상의 세계에서 세계와 함께 흘러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그 자체로 연기실상의 관계 속에 전개되는 하나의 생명체임에도 불구하고 이 가운데에서 자기를 떼어내고 남을 성립시켜서 나와 남의 분별 속에 자기라는 집착의 전개를 이어가는 힘이 어리석은 마음이다. 이 어리석은 마음에 따라 탐내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난다. 탐내는 마음은 세계와 나를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개별화되며 고정된 모습만을 자기의 삶으로 여겨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힘에 의해서 생겨난다.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힘 속에는 대상이 되는 상대와 내가 다르다고 구별하는 힘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가져서는 안 되고 내가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려는 힘은 탐내는 마음으로 전개되고, 싫어하는 것을 배척하는 힘은 결국에 성내는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성내는 마음에 대해 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부동불의 경지에서는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보게 되며 실상으로 흐르는 힘이 강해질수록 연기의 흐름 속에서 참된 생명을 살고 있는 나의 본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언제나 크고 원만한 거울과 같은 마음에서 온 우주가 하나인 원만하고 참된 성품을 보게 된다. 이것이 무명의 분별로부터 근본적인 연기의 삶으로 전환되는 지혜와 자비의 세계이며 이것이 바로 아축불이 상징하는 묘희의 세계인 것이다.
일찍부터 불교계에 등장한 아축불은 후에 밀교의 만다라에 편입되었으며, 만다라에 편입된 뒤에도 성내는 마음을 없애는 아축불의 성격은 그대로 계승되면서 독특한 역할이 주어졌다. 밀교에서는 오지여래 중 사방사불의 하나로서, 금강계만다라 성신회에 37존 5해탈륜이 있는데 그 중 동방 월륜의 주존으로 있으면서 비로자나여래의 대원경지와 본래 갖추어진 견고한 보리심의 덕을 나타낸다. 아축불이 동방에 자리 잡은 것은 인도인들의 사고방식에서 동방이 수행의 최초단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태장만다라에서는 동방의 보당불과 같은 서원을 갖고 있는 부처님이라 그와 동체로 한다. 인도의 후기 밀교에서는 대일여래에 대신하여 오불 가운데의 중존으로 되기도 하였다. 이 여래의 형상은 태장계에서 청색의 몸에 왼손 다섯 손가락으로 옷의 끝을 잡아서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서 손바닥을 무릎에 얹고, 손가락 끝이 땅을 가리키는 촉지인을 결한다. 금강계에서는 왼손을 금강권으로 결하고 배꼽 앞에 둔다. 이것도 항마부동의 뜻을 나타낸다. 독존으로서는 거의 조성되지 않고 있다.
아축불을 중심으로 한 금강부의 제존은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장애를 제거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금강부의 제존은 무기인 금강저로 번뇌를 물리치며, 그중 아축불은 항마촉지인으로 마귀를 제압한다. 불전에 의하면 석존이 성도할 때, 석존의 성도를 두려워한 마신들이 박해하고 유혹하며 방해하자 석존이 대지를 가리키며 자기의 보리심을 일으켜 마신을 항복시켰던 인계이다. <약출염송경>에는 ‘아축불의 촉지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부동을 얻는다’고 하며,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파마인을 결함으로써 모든 마귀신과 온갖 번뇌를 움직이지 않게 한다. 이것은 비나야가 및 모든 악마 귀신을 멸하는 인이라 이름한다’고 그 결인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성내는 마음을 제거하는 아축불의 금강부는 다시 그 성냄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수행으로 활용하여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기에 금강저라는 무기를 들고 마군을 항복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약출염송경>에는 ‘그 동방에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은 코끼리 자리가 있다. 아축불이 그 위에 앉는다고 관해야 한다’고 하여 이 부처의 자리를 밝히고 있다. 코끼리가 의미하는 것을 <금강정경의결>에 의해 알아보면, ‘코끼리의 힘은 모든 짐승의 힘보다 강하기에 금강부왕은 거기에 머물며 그 위에서 견고한 힘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며, ‘코끼리는 제석천의 탈 것으로 우주의 대생명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축불은 절대의 힘, 우주의 대생명의 무한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삼매야회에서는 연꽃 위에 가로로 누운 오고저가 있고 그 위에 세로로 오고저를 두고 있다. 아축여래의 색은 <제불경계섭진실경.에 ‘자신과 산천초목 모두를 청색으로 관하라’라고 하는 기술을 통해서 청색임을 알 수 있다. 청색은 항마를 상징한다.
이상과 같이 아축여래의 색, 인, 좌, 방위 등은 이 부처가 대일여래의 성격 가운데 분노·항마·용기 등의 부분적 성격을 지녀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성위경>에는 ‘최초에 무상승(無上乘)에서 보리심을 발하고, 아축불의 가지에 의하여 원만하게 보리심을 증득한다’고 아축불의 역할을 밝히고 있다. 결국, 아축불이 상징하는 부동과 아축불의 묘희세계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크나큰 장애인 성냄을 가라앉히고 흔들림이 없는 굳건한 보리심을 내는 절대적인 기쁨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삼십칠존이야기-3.보생여래
공덕의 보배로 장엄한 부처님
요즈음 같이 오랫동안 불경기에 시달리다 보면 누군가 우리에게 재물을 듬뿍 가져다주는 꿈이라도 꾸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여기 다양한 성격을 지닌 금강계 삼십칠존 가운데 재보의 성격을 지닌 부처님이 계시다. 바로 보생여래로서 온갖 보배를 쏟아내는 마니보처럼 무한한 복덕으로 가난에 허덕이는 일체중생의 갈망을 성취시키신다.
보생여래는 대일여래의 평등성지를 담당하며 금강보·금강광·금강당·금강소의 네 보살을 거느리고 일체 재물과 보배를 맡아 중생들에게 평등한 가르침을 펴는 여래이다. 이렇듯 보배를 생겨나게 한다는 의미로 보생여래(Ratna-saṃbhava-tathāgata)라 하는데, 또는 마니주를 높은 장대에 매달아 보는 이로 하여금 바라는 바를 성취케 한다는 보배깃발의 부처님, 즉 보당불이라고도 하며, 보배와 같은 훌륭한 모습의 부처님으로 보상불, 또는 보배와 같이 뛰어난 부처님이라는 뜻의 보승여래 등으로 호칭된다. 공통되는 점은 마니보배가 상징하는 최고의 복덕과 공덕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소원과 수행을 원만하게 성취시킨다고 하는 점이다. 일체중생의 소원을 원만하게 성취시키고 삼계법왕의 관정을 수여하여 행자로 하여금 평등하게 하므로 밀호를 평등금강, 또는 대복금강이라 한다. 삼매야형은 보배구슬이며 종자는 ja, trāh이다.
보생여래가 무한한 재보를 베푸는 것은 이 여래가 여원인을 결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서는 보생여래가 여원인을 결한 다섯 손가락 사이로부터 여의주를 비처럼 뿌리는데, 이 여의주는 천상의 의복ㆍ천상의 묘한 감로ㆍ천상의 묘한 음악ㆍ천상의 보배궁전을 비 뿌리고, 나아가 중생의 온갖 좋아하는 바를 원만하게 한다고 한다.
이 여원인은 보배를 베풀어 중생들의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뿐만 아니라 보리심을 발하여 모든 공덕을 중생들에게 베푼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따라서 이 인을 결하는 보생여래는 사람이나 자연, 각각의 사물 속에 숨겨져 있는 불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용을 갖게 된다. 또한, 지혜와 자비의 복덕을 모아서 몸을 장엄하게 하기 때문에 보생여래를 ‘공덕장엄취신보생불’이라 하고, 이 보배를 가지고 온갖 공덕을 만족시키고 불타의 위에 오르게끔 관정을 주기 때문에 보생여래의 지혜를 관정지라 한다.
관정이란 밀교의 법을 전하기 위해 관정을 받는 자의 머리와 이마 위에 물을 흘리는 것이다.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는 지혜의 물을 붓는 것은 여래의 지혜를 모두 이어받는다는 것을 상징한다. 관정을 통해서 부처님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며 나아가 부처님의 위를 계승할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중생들 모두가 보배와 같은 여래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보리심론’에서는 일체중생이 본래부터 금강의 성품을 갖추고 있는 보살이지만 탐진치의 번뇌 때문에 얽매여서 그 불성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한다. 중생들에게는 나면서부터 이와 같은 여래장성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으므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각성시키는 것이 바로 보생여래의 관정지로서 중생들에게 갖추어진 그 무엇보다 귀중한 보배와 같은 불성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정말 가치 있는 보배란 물질적으로 부귀와 풍요를 가져다주는 금과 은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지금 당장 보배로 인하여 현실적인 가난을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그 재물이 영원한 행복과 안락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없으면 갖고 싶고, 가지면 더 갖고 싶은 것이 중생의 욕심이다. 그 욕심은 끝나는 데가 없으므로 욕망의 충족 또한 끝날 줄을 모른다. 물질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신적 행복이다. 재물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체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만이 일체의 고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된다. 그러므로 중생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현실적인 보배라면 보배와 같은 덕성의 발견은 더욱 절실하다 아니할 수 없다. 보생여래의 보배는 사실상 이러한 출세간적인 재보에 속하는 것이다.
또한, 분별하는 중생의 마음으로 일체를 본다면 현실적인 풍요와 가난이 눈에 띄겠지만 보생여래의 눈으로 볼 때 일체는 평등한 것이다. 수행자가 부처의 마음을 체득하여 스스로에게 부처와 같은 무한한 보배 같은 성품이 있음을 알아채고 그 자체로 풍부함을 만끽한다면, 그때 더 이상의 보배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보생여래는 이러한 보배가 원래부터 중생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아는 지혜를 갖추고 계신다. 그래서 보생여래는 금강계만다라에서 비로자나여래의 평등성지를 나타낸다. 평등성지는 여래와 중생의 본질적인 평등의 세계를 여는 지혜이다. 수행자가 부처의 마음을 체득하여 무한한 보배 같은 성품을 드러내고, 원만한 인간성이 형성된 것을 보이는 지혜이다.
이처럼 모두가 보배의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평등하며 누구나 무한히 베푸는 보생여래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건만 중생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아간다. 세상이라는 것이 넓은 것 같지만, 중생들은 자기 하나만의 삶인 닫혀지고 비좁은 곳에 갇혀 있다. 나 하나의 삶 가운데에서 탄생과 죽음, 생겨남과 사라짐, 젊음과 늙음, 미움과 사랑 등 여러 가지 구조를 절대화시켜 버리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이러한 차별의 견해는 모든 것을 자기와 남으로 나누어보는 분별의 견해에 말미암는다. 실제로 온갖 사물들은 따로따로 개별화하거나 특성화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물들이 개별ㆍ특성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려고 한다. 개별ㆍ특성화시키기 때문에 사물들이 분별되어 존재하게 되며 이어서 중생 삶의 변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모든 사물을 개별·특성화시키는 데에서 떠나면 중생들의 삶 자체가 모두 연결된 하나로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준다는 자비의 열린 세계가 펼쳐진다. 그런 관계 속에는 나라던가 남이라는 주객의 분별이 존재할 수 없다. 남이니 나이니 하는 차별심을 떠나 일체 모든 법과 자기나 다른 유정들을 반연하여 모두가 평등한 성품임을 관찰하고 대자대비심을 일으키며, 중생들을 위하여 가지가지로 교화하여 이익하게 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니 이러한 지혜가 바로 평등성지이다. 그래서 이 지혜를 모든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지혜라고 한다. 무아에서 노닐기 때문에 평등하게 포섭하지 못할 것이 없고 모두가 한 몸이라는 지혜로서 한량없는 중생을 바른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밀교가 다른 가르침과 구별되는 특징이 성립한다. 보통 여래장이라는 개념은 ‘보성론’ 등에서 설하는 것으로 여래장의 객진번뇌를 떠나야만 일체유정이 성불할 수 있다고 한다. 본래부터 갖추고 있던 공성으로서의 여래장이 발현됨에 의해 일체유정은 무명에 의해 본성을 덮었던 어리석음에서 구제되어 여래가 된다. 여래장의 법성은 공성이다. 그 공성을 발현함으로써 여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객진번뇌를 떠난 공성의 체득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비밀궤’에 “나는 응당 금강살타의 대용맹심을 발하리라. 일체유정은 모두 여래장성을 갖추고 있으며, 보현보살이 일체유정에 두루한 까닭이니라. 나는 일체중생이 금강살타의 경지를 증득하게 하겠노라.”고 하는 것처럼 밀교의 수행자가 큰 용맹심을 일으켜 일체중생을 구제하고자 함에는 일체중생 누구나 여래장성을 갖추고 있다는 가능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보살로 표현되는 보현보살의 활동적인 형상을 지닌 방편의 화신을 나투어 누구나 성불할 가능성이 있음을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유정 자신의 80종호로 꾸며진 비로자나불의 화신으로서 일체 불보살의 형상을 설한다.
보생여래의 형상에 대해서는 금강계만다라의 회상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성신회에서는 온몸이 황금색이고 왼손은 주먹을 쥐어 배꼽 아래에 두고 오른손은 밖을 향해 펴고 있는데, 무명지와 소지는 약간 구부리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펴서 여원인을 결하고 있으며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이 보생불의 형상은 태장만다라의 동방 보당불, 또는 개부화왕불, 시아귀의궤의 보승여래, 구발염구경의 다보여래, 이취경의 일체삼계주여래와 동체라고 여겨졌다. ‘약출염송경’에는 그 남방에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은 마좌(馬座)가 있다.
보생불이 그 위에 앉는다고 관해야 한다고 하여 보생불의 방향과 자리를 설명하고 있다. 말이란 일천(日天)이 타는 동물로 빛과 지혜를 순식간에 수여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또한, 모든 세간에서 존귀하고 길상한 것으로 말보다 앞서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부처를 황색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ㆍ수ㆍ화ㆍ풍ㆍ공의 5대 중에서 지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인데, 이것은 대지가 식물을 성장시키고, 온갖 금ㆍ은ㆍ보석을 내장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삼심칠존이야기- 4.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
이상적인 세계의 부처님
현실의 세계가 고통이 많고 힘겨울수록 누구나 이 모든 고통을 훨훨 벗어버린 꿈과 같은 이상적 세계를 동경하며 그러한 세계의 실현을 갈망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 대한 강렬한 바램이 있을지라도 그 바람이 현실적으로 온전히 구현되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는 듯하다. 그것은 대개 이상적이라고 하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을 추구하였기에 바램 자체가 목적이고, 먼 세계에 동경의 대상으로 남게 될 것을 미리 전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에서도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 세계는 고통받는 현실과 달리 마음에 편하게 즐거움을 받아야 하므로 안락(安樂)이어야 하고, 그 이상의 즐거움이 없는 곳이기에 극락(極樂)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상적인 세계가 꿈으로만 남지 않는다. 불도를 수행하는 자들에 의해 이 세계에 가고자 하는 바램이 신앙으로 정착되어 왔으며 실현가능한 일로써 제시되었다.
불교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와 같은 이상적 세계로 서방의 극락정토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 이상적인 세계에는 역시 이상적인 부처님이 계실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과 불행이 없는 절대안락의 세계가 그 부처님으로부터 전개되어 나갈 것이라고 하게 되었다. 그 세계의 부처가 다름아닌 아미타여래이다. 아미타여래는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ābha-Buddha)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āyus-Buddha)이라 하는데, 이것은 무량한 수명, 무량한 광명의 뜻으로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의미한다. 또는 무량청정불⋅무량불⋅감로불⋅진시방무애광여래라고도 하는 한량없는 광명의 부처, 한량없는 생명의 부처로 극락세계의 교주이다. 극락은 서방으로 십만억국토를 지난 곳에 있다고 하는데, 서방이란 인도인의 관념으로 볼 때에 해가 지는 곳에 있으므로 미래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생들이 미래에 갈 곳으로서 극락세계는 서방에 위치하는 것이다. 이 아미타불이 서방불이라는 것은 '아미타경'이나 '법화경'과 기타 많은 경전에서 설해져 있으며, '최승왕경'ㆍ'다라니집경' 등에서 사방사불을 설하는 경우에도 모두 동일하게 아미타불을 서방불로 하고 있다. 태장만다라와 금강계만다라에서도 서방에 위치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원래 오랜 옛적 과거세에 인도의 왕족으로 태어나 세자재왕불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를 기원하고 또 48가지 서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장구한 수행을 지나 성불한 부처님이라고 한다. 48원의 하나 하나는 한결같이 남을 위하는 자비에 가득 찬 이타행으로 되어 있고, 그것은 보살행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48원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아미타불 자신에 대한 것, 둘째 아미타불의 국토에 대한 것, 셋째 그 불국토에 태어난 이에 대한 것, 넷째 앞으로 불국토에 왕생하려는 이에 대한 것 등으로 되어 있다.
'무량수경'에서 법장비구는 48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코 부처가 되지 않을 것을 밝히고 있으며, 48원 하나하나는 완전무결한 이상세계를 이룩하고자 세운 서원으로서 법장비구는 가지가지 보살행을 닦은 뒤 48원을 모두 이루어 아미타불이 되었으며, 48원이 모두 성취된 세계가 곧 극락정토이다.
이러한 아미타불에 관한 신화는 석가모니의 성도라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지만, 성스러운 성품의 정도가 보다 강한 존재로서 올려놓기 위해서 석가모니의 생애에서 현실적인 부분들이 빠지고 이상적인 모습이 강화되었다. 이와 같은 아미타불은 이른바 인간에게는 일찍이 없었던 모습으로, 비현실적이고 공상적이며 장엄한 정토 가운데에 조용히 중생을 지켜주는 존재이다. 석가모니불은 진리의 법칙, 그 자체가 역사 가운데에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나타난 화신이지만, 아미타불은 법장비구가 과거세에 선행을 행한 공덕의 보은으로 출현한 보신, 즉 이상적인 여래상이다.
이상적이라고 하면 대개 현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성취되지 못할 것을 사람들이 미리 전제한다고 하였지만, 대승불교에서 타력신앙의 대상인 아미타불은 누구든 이 부처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정토에 왕생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누구도 그 성취불가능을 전제하지 않았기에 그토록 오랜 기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신앙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성취가능한 이상세계가 바로 극락정토요, 그 세계의 부처가 아미타여래이다.
그 이상의 성취가능성은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인 관자재여래, 또는 관자재왕여래란 명칭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관자재보살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알려주는 이 명칭은 아미타불에게 자비라는 특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중생에 대한 무한한 대자대비로 중생들로 하여금 극락이라는 이상적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여래에 대한 신앙은 적게 잡아도 약 2천년의 기간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 동안 인도를 비롯한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에서 수억에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신앙되었다. 대장경 가운데에서도 아미타불과 직접 관련되거나 간접적으로 연관된 경론은 거의 270여부에 달하며, 최근의 연구까지 더한다면 매우 방대한 양이 된다. 이것은 이 여래가 오랫동안 넓은 지역에 걸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음을 의미한다.
정토의 교주이며 이상적 세계의 보신으로서 자비를 상징하는 아미타불은 밀교의 들어와서 증보리심을 상징하는 부처로 그 성격이 변화된다. '금강정경'에 의한 아미타불은 오지 가운데 묘관찰지가 구현된 것으로 지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다. '대일경소' 제4권에 이 부처는 대일여래의 방편지이며 중생계가 다함이 없으므로 방편 또한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무량수라 한다고 설하고 있다. 결국 최대의 자비는 절대의 경지를 체험케 하는 것이며, 성불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중생에게 힘을 가하여 강제로 성불시키는 부처님은 어디에도 없다. 자기 자신의 마음속 성품이 바깥의 연을 만나서 변화할 때에 세속적으로는 구원이며 출세간적으로는 성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내부로부터 자기 변화가 전제되지 않으면 바깥에서 만나게 되는 외연은 그저 미미한 힘일 뿐이다. 즉 스스로 자각하지 않는 한 불도성취란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에 대승불교에서 자비를 상징하는 아미타불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역할은 중생들 마음속에 자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미타여래는 밀교에 들어와서 그 자비를 더욱 철저히 수행하기 위해, 대일여래의 방편지로서 안으로 제법의 실상을 비추고 밖으로 중생의 근기를 비추어 그 덕이 무량무변하며 중생에게 이익을 주기 위하여 설법하는 부처님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중생의 능력을 묘하게 관찰하여 그에 맞추어 설법하는 특성으로 인해 설법으로 온갖 의심을 끊는 부처님이 바로 아미타여래이다. 이와 같은 중생구제의 염원을 상징하는 부처로 그 무한한 애정을 연꽃의 붉은 색으로 나타낸다.
붉은 연꽃 색이 상징하는 서방의 세계는 바른 지혜와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는 연화부의 세계로써 흡사 연꽃이 진흙 속에서 생겨나도 그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일체가 자성청정의 생명체이고 모두가 하나의 몸인 것을 미묘하게 관찰하는 묘관찰지의 경지를 보이고 있다. 연화부는 중생의 마음 가운데에 본래 정보리심의 청정한 이치가 이미 구족되어 있으므로, 생사윤회에 빠져있을지라도 물들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것을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이와 같은 역할을 '약출염송경'에서는 아미타불의 공작좌로 상징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자리를 공작좌로 한 것은, 공작이 독사를 잡아먹기 때문에 재난이나 액운의 제거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금강정경의결'에서는 세간에서 공작새를 상서로운 날짐승으로 여기는데, 이 날짐승은 아름다우며 갖가지 색을 갖추고 있기에 전법륜왕은 이를 자리로 삼아 대법륜을 굴린다고 한다. 인계에 대해서는 '제불경계섭진실경'에 모든 산란한 마음을 없애는 수인이라고 한다. 이 인을 결하고 나서 서방 무량수여래의 삼매에 들어 나의 몸과 무량세계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과 온갖 중생, 그리고 산천초목 모두가 붉은 연꽃의 색이라고 관하면 행자 및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산란한 마음을 제거하여 삼매에 들게한다고 설한다.
본래 청정한 중생에게는 그 청정을 드러내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방 아미타불은 그 지혜의 덕과 설법을 통하여 중생들의 의혹을 끊어주기 위해서 사방에 4친근의 네 보살을 시현하니 이들이 연화부의 대표적 존이다. 이들 네 보살의 활동을 통하여 중생 마음속 성품이 변화되도록 돕는 대자대비한 덕이 세계에 무한하게 펼쳐진다.
삼십칠존이야기- 5.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
반드시 성취하는 부처님
어떠한 일이 지나고 나면 대개의 사람은 지나온 일을 돌이켜보며 기대한 바에 얼마나 충족되었는가를 알게 된다. 그의 돌이킴 속에는 과거의 노력에 대한 자부심 못지않게 반성이나 후회가 따라온다. 혹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때 그 일을 성취하지 못하여서 그에 들어간 노력은 정말 쓸모없는 헛된 일이었다”고. 이런 생각이 들게 되면 쓸데없이 낭비한 노력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앞으로는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자각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 달리 우리는 어떠한 일에 맞닥뜨릴 때 이것을 성취할 수 있을지, 또 실패하여 헛된 일이 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거듭 실패를 반복하는 가운데 지혜가 생겨나서 점점 그 실패의 횟수가 줄어들지언정 완전한 성취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정말 완전한 성취는 어려운 것인가!
우리는 이 방면의 지혜를 금강계오불 가운데 ‘불공성취여래’에게서 구해보기로 하자. 불공성취는 ‘아모가싣디(Amogha-siddhi)’라 음역하고 ‘불공대모니’라고도 의역한다. 이 여래의 명칭에서 불공이라 함은 그 완성이 공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타내지만, 다시 말하면 반드시 성취하는 것이란 의미를 지닌다.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없애고 중생교화의 사업을 원만히 성취해서 헛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에 중생 가운데 교화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중생이 있다면 헛된 일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듯이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어떠한 경로와 방법으로든 교화에 임하는 것은 완전한 성공의 가능성을 가지고 행하는 사업이 된다. ‘불공성취여래’는 바로 이렇게 절대로 헛되지 않은 중생교화사업을 펼치는 부처님이다.
사방사불의 하나로서 금강계만다라의 북방 월륜에 머무는 불공성취여래는 ‘석가여래’, 그리고 태장만다라의 ‘천고뢰음여래’와 동체이며 근본서원을 같이 한다. 불공성취불이 석가여래와 동체이면, 여기에서 굳이 이 부처의 유래에 대하여 살필 필요는 없다. 그것은 초기의 ‘아함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불교경전이 주존을 석가모니로 하고 있으며 그 유래가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태장만다라에서 석가여래를 ‘천고뢰음여래’라고 하는 것은 석가여래의 설법을 천계에 있는 북이 저절로 울려서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보통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는 것은 백수의 왕인 사자가 모든 짐승을 제압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논설이 모든 외도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땅에서 울리는 사자후보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천고뢰음은 보다 강조된 표현으로서 중생들에게 벅찬 감동을 주어서 불도로 이끈다는 설법에 의한 중생교화 활동을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공성취여래’의 활동성이 강조되는 것은 불공성취불이 대일여래의 성소작지(成所作智)를 인격화한 존으로서 사업성취의 덕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성소작지란 온갖 행위를 지어 행하는 우리들의 눈·귀·코·혀·몸으로 행하는 감각적인 모든 인식을 돌려서 얻은 지혜이다. 이 지혜는 십지 이전의 보살과 이승, 범부 등을 위하여 시방에서 삼업으로 여러 가지 변화하는 일을 보여 각기 이로움을 얻게 하는 지혜로서 석가모니불이 출세하여 중생을 교화하신 것이 바로 성소작지의 실현인 것이다. 중생들로 하여금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게 하는 사업은 현실적으로 중생들과 똑같은 행위이지만 불공성취란 명칭이 말해주듯이 그 완성은 공(空)에 지나지 않는 것이면서도 중생들을 위한 감화가 반드시 성취하는 것이란 의미를 지닌다. 곧 여래의 무한한 활동과 공덕을 구체적인 가르침을 통해 나타내는 부처로서 이로 인해 일체의 번뇌를 단멸하고 사업을 원만성취해서 헛됨이 없기 때문에 ‘불공성취여래’라고 한다.
이와 같은 양상을 ‘금강정경’에서는 비로자나여래가 가장 뛰어난 갖가지의 활동을 성취하는 삼매에 들어 어깨위로부터 다섯 가지 색의 광명을 내어 북방의 한량없는 세계를 비춘다고 불공성취여래의 활동과 공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엄경’의 <여래현상품>에서 설하는 것처럼 여래가 각종 다양한 방법으로서 광대한 여래 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무한한 감동을 주어 신심을 구족하게 하고 불도로 이끌어 들여 성취하게끔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밀호를 실지금강, 또는 성취금강이라고도 하며, ‘성위경’에는 불공성취불의 가지에 의하여 모든 불사와 유정들을 위해서 행하는 이로운 일을 모두 다 성취하는 불공성취불의 묘용을 설하고 있다.
그 묘용은 인계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불공성취불이 결하는 시무외인은 설법을 통하여 중생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과 깨달음을 향해서 정진하게 하는 활동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이 인계를 두려움이 없다는 뜻의 무포외인이라고도 하는데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이 여래의 인이 무포외인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인연으로써 무포외라 이름하는가 하면 네 가지 뜻을 갖추었으므로 무포외라 부른다. 첫째는 중앙의 비로자나여래가 무명의 암흑을 멸해서 반야바라밀 등의 다함없는 허공계를 꿰뚫는 광명을 출생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동방의 부동여래가 온갖 비나야가와 악마, 귀신 등을 굴복시켜 모두 꼼짝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남방의 보생여래가 빈곤과 궁핍을 제거하여 천계의 궁전, 천계의 음식, 천계의 의복, 천계의 음악을 보시하여 모두 다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서방 무량수여래가 수행자에게 삼매의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시방허공이 한량없고 다함없음과 같고, 또한 중생이 한량없고 다함없음과 같으며, 역시 번뇌가 한량없고 다함없음과 같아서 이와 같이 유가행자의 삼매의 큰 즐거움도 역시 한량없고 다함없다. 이와 같이 네 가지 뜻을 구족하고 원만케 하는 것이다.”
즉 오불에서 앞의 네 분 부처님의 활동이 다섯 번째 불공성취여래의 활동에 의해서 구족하고 원만하게 되는 것이다. ‘대일경’에 보리심을 인으로 하고 대비를 근으로 하며 방편을 구경이라고 하였듯이 금강계만다라의 오불이 출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설법을 통해서 중생이 가지고 있는 생사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을 포함한 모든 번뇌를 제거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함에 있다. 모든 번뇌를 제거함이란 바로 열반의 성취이며,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므로, 불공성취여래는 깨달음으로 향해 나아가는 활동을 통하여 마음에 어떠한 공포도 없는 자재를 성취하도록 하는 최상의 행위를 보인다.
삼매야회에서 보여지는 이 여래의 삼매야형은 오고저 위에 갈마저가 있는 형태이다. ‘오고저’는 좌우의 오고(五鈷)를 통해서 부처와 중생의 오지(五智)가 본래 하나임을 나타내며, 갈마저는 현재 진각종의 심인당 난간에서 보여지는 형태로 열십자[十字]로 된 금강저이다. 십자는 사방으로 확산되는 구조이기에 갈마저가 상징하는 것은 여래의 활동이 중생을 향해서 빛이 사방으로 퍼지듯 무한히 발산되는 모습이다.
불공성취여래가 속한 갈마부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불보살이 중생을 위하여 일체의 교화사업을 성취하는 것을 담당한다. 이것을 ‘삼무진장엄(三無盡莊嚴)’이라 하는데 신·구·의의 삼밀활동에 의해 제각기 역량[業]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창조하겠다는 서원이다.
그 서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북방 불공성취불은 일체 사업성취의 활동을 나타내는 네 보살을 사방에 시현한다. 즉 앞에는 ‘금강업보살’, 오른쪽은 ‘금강호보살’, 왼쪽은 ‘금강아보살’, 뒤쪽은 ‘금강권보살’ 등 네 보살을 둔다. 이들 갈마부의 네 보살은 주존인 불공성취불의 성격에 따라 일체의 사업성취의 덕을 관장하며, 중생에 대해 끊임없이 일체의 사업을 이루고 성취시킴을 나타낸다.
이 여래의 좌에 대해서는 ‘약출염송경’에 “그 북방에는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은 가루라좌가 있는데 불공성취불이 그 위에 앉는다고 관해야 한다”라고, 불공성취불의 방위와 자리를 알려주고 있다. 가루라는 하늘을 나는 새로 무한한 자유의 활동을 의미한다. ‘금강정경의결’에서는 “이 새의 위력이 사대해에 머무는 모든 용을 항복시키므로 불공업왕(不空業王)은 이로써 자리를 삼아 지혜의 활용을 나타낸다”라고 하여 불공성취여래의 자리를 가루라로 삼은 근거를 보이고 있다.
실로 다함없는 중생계를 교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으나, 불공성취여래와 같은 지혜와 능력으로 임할 때 중생 모두를 성불케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또는 아직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 우리 중생들일지라도 우리가 행하는 일체의 활동에서 중생교화를 염원하며, 그 일체의 공덕을 중생교화에 회향코자 한다면, 그 모든 활동이 최상의 가치를 부여받게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삼십칠존이야기- 6.금강바라밀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금강의 지혜
거울이란 참 편리한 물건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거울을 보며 또는 반대편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거울을 보기도 한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사진도 있으나 사진이란 지나간 나의 모습이므로 현재의 내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거울이 반드시 필요하다. 눈은 모든 것을 보지만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는 눈이 눈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의 모습을 볼 재간이 없다. 우리는 거울 속에서 나의 시선과 반대방향으로 되비추어주는 영상을 보면서 그 거울 속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시선을 반대방향으로 돌릴 때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반대로 향하는 시선이 자신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울을 볼 때 외에는 자신에게 향해지는 반대로 향하는 시선은 따로 없는 것일까?
다른 이들이 나를 볼 때에 그 시선은 나의 방향과는 정반대이다. 알고보니 내가 마주치는 모든 존재들은 나의 시선과 마주치는 방향에 있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집에 돌아오는 나를 정겹게 맞이한다. 평소에 강아지에게 먹이를 주고 놀아주고 잘 대해주었던 것이 강아지의 환대로 돌아온 것이다. 강아지의 눈에 나는 마음 좋은 사람, 가까이 하면 여러 가지로 이로운 존재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우리 이웃이나 직장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해준 대로 모든 것을 반영한다. 좋은 친구와 좋은 동료는 알고보면 내가 좋은 친구였고 좋은 동료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 모든 존재들은 거울처럼 각각 모든 존재를 비추어낸다. 그러나 그 비춤에는 차별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그리고 자신이 알 수 있는 한계까지만 나의 거울은 비추어낸다. 여성과 남성, 또는 소년과 장년의 기호도에 따라 대상 가운데 일부만이 비추어지고,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컴퓨터에서 나오는 정보를 제대로 비추지 못하지만 전문가는 모두 파악하는 것처럼 우리는 아는 대로 대상을 비춘다. 알고 보니 모든 것이 그와 같아서 우리는 좋아하는 것만, 그리고 아는 것만 비추는 자신만의 차별화된 거울을 갖고 있었다. 그 차별화된 능력 덕분에 우리는 세상이 괴롭기도 하면서 즐겁기도 하며 모든 것이 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또는 무엇인가를 갖기 위해서 노력하다가도 헛된 욕심 때문에 눈앞의 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낭패를 겪기도 하였다. 사라져갈 것이 뻔한 데도 계속 붙잡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놓치고 말았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거울은 이렇게 밖에 보지 못하는 가엾은 거울이었기에 우리는 세상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아집만 키우고 살았다.
만일 모든 것을 차별없이 수용하고 어떠한 영상에도 물들지 않는 크고 깨끗한 거울이 있다면 어떠한 작용을 할 것인가?
아마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드러낼 것이다. 첫째, 모든 사물을 거짓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낼 것이다. 둘째, 온갖 사물의 선과 악ㆍ아름다움과 추함ㆍ흑과 백ㆍ크고 작음ㆍ길고 짧음ㆍ물들음과 청정을 차별없이 모두 비추어 낼 것이다. 셋째, 어떠한 사물이 다가와도 거부하지 않고, 사물이 가버려도 붙드는 일이 없을 것이다. 넷째, 아무리 많은 사물을 비추어도 거울 자체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다섯째, 대상이 나타나면 시간적 차이를 두지 않고 즉각적으로 비추며, 대상이 가버릴 때에도 곧바로 대상의 자취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갖는 거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데에 줄곧 사용되어왔다. 거울 속의 영상은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무자성ㆍ공에 비유되었으며, 거울 속의 영상은 빛ㆍ거울ㆍ대상이 인연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므로 연기의 이치에 비유되었다.
그리하여 거울은 지혜의 상징이 되었다. 지혜로운 거울이라면 우리가 간직했던 분별로 얼룩진 거울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다 쓸어안는 청정하고도 큰 거울이어야 할 것이다. 원래 강아지가 거울이고, 이웃도 거울이며, 모든 사람들이 거울일 때에 우주의 모든 존재는 거울이 되어 모든 것을 서로 서로 겹겹이 비추고 있었다. 낱낱의 거울은 각각의 차별화된 경계를 비춘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이미 비추었던 것이다. 각각의 거울이 분별을 떠난다면 모든 거울을 다 포용한 거대한 크고 둥근 거울이 되어 온 우주 전체를 비출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비추는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를 불교에서는 대원경지라고 한다.
그 지혜는 밝은 거울처럼 무심이며, 물든 바 없어서 주관과 객관에 집착하지도 않고, 청정한 까닭에 보는 것을 그대로 비출 수 있는 지혜이다. 또한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기에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 부동의 성격을 지닌다. 이 성격이 강조되어서 금강이라는 또 하나의 특징을 부여할 수 있다.
금강이란 가장 견고한 물질을 찾던 고대인도인들의 고뇌에서 파생된 개념이다. 현재 강인한 금속을 대표하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철이 있다. 무기를 만들거나 기구를 사용할 때에 사람들은 주로 철을 사용하지만 철의 경우에도 녹이 슬고 불에 녹으며 더 강한 물질을 만나면 깨진다. 여기에서 철보다 더 견고한 물질에 대한 바램이 나온다. 요즘에는 철보다 가볍고 강한 물질이 여러 가지 개발되어 있지만 그 옛날 인도에서는 그러한 물질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보석처럼 견고하면서 쉽게 부서지지 않는 금속에 대한 열망은 가장 견고한 물질이라는 금강(金剛, vajra)이라는 개념으로 전개되었다. 이 금강은 무엇으로도 이를 파괴할 수 없으며,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상징으로서 견고하여 무엇이든지 깨뜨리고 어떤 물건한테도 깨지지 아니함을 금강에 비유할 뿐이지 지구상에는 몹시 단단하여 결코 파괴되지 않는 물질은 존재할 수 없다. 텅 비어 있는 공한 성품이야말로 형체가 없기에 무엇도 이를 깨뜨릴 수 없으며,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자체의 고정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생성되는 공한 것이기에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 불교도들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세상에서 제일 강한 것으로 공성(空性)을 금강이라 하였고, 금강으로 만들어진 무기인 금강저가 세상의 모든 물질들을 부수는 것을 불교의 가르침인 공(空)이 모든 외도들을 무찌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경론 가운데에서는 금강견고⋅금강불괴 등으로 부르고 견고함의 비유로 사용한다.
따라서 지구상에 있는 물질로 금강이라는 이름을 가질 것은 없다. 다만 그 특징 가운데 하나를 담아서 보석 가운데 다이아몬드를 금강석이라 하기도 하였다. 이 보석은 현존하는 가장 단단한 보석으로서 다른 보석들을 연마하는 데 사용할 정도로 강인하다. 또한 무색투명한 물질로 햇빛이 비치면 여러 가지 빛깔을 나타내므로 그 기능이 자재한 것에 비유가 된다. 이 특징을 가져오면 금강으로 만들어진 거울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삼라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낼 수 있는 부동의 거울이라는 상징성을 일부나마 반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이아몬드처럼 견고하고도 보석처럼 빛나며 자재한 거울과 같은 지혜, 대원경지를 바탕으로 하는 보살이 금강바라밀보살이다. 그 지혜는 거울에 한 점의 티끌도 없이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추어 모자람이 없는 것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며, 마치 금강이 견고하여 어떤 물질이든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떤 단단하고 미혹한 번뇌일지라도 다 깨뜨리는 지혜이다. 밀교에서는 이것을 특별히 금강의 지혜라고 한다. 금강바라밀보살은 대일여래를 모시는 네 보살 가운데 대표가 되는 보살로서 여기서 금강은 견고한 보리심으로 ‘비로자나불의 생명’을 상징한다. 이 금강과 같은 우주 생명은 견고하다고 하여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깨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 보리심은 대비로자나의 신구심금강으로 온 우주에 충만한 것이며, 우주에 충만한 금강과 같은 보리심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금강바라밀보살이다.
'인왕반야다라니석'에서는 ‘이 보살은 금강륜을 지니고 있다. 비로자나불이 성불하고 나시자, 이 보살이 여래께 금강승의 법륜 굴리시기를 청한다. 이 법륜반야선에 올라타고 생사에 유랑하는 이 언덕에서 한량없이 수많은 중생들을 싣고서 머무름 없는 저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한다’고 하는데, 중생들을 열반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윤회를 초월하여 불국토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므로, 금강바라밀은 비로자나불의 한 측면인 아축불의 속성인 보리심의 활동을 나타내며, 이 금강바라밀에서 일체의 보리심여래가 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축여래가 내심에서 금강바라밀인을 증득하고 그 금강바라밀인으로부터 일체세계에 티끌처럼 많은 여래신을 출현하고, 이 몸으로써 스스로 성취한 바의 대원경지를 완성한다는 것으로 금강바라밀의 묘용이 된다. 동방 아축불이 시현한 금강바라밀은 비로자나불의 앞 월륜에 머무르며 금강과 같은 정보리심의 활동을 체로 하고 일체중생의 대보리심을 맑히는 작용으로 대일여래에 공양한다. 인계와 관상이 다 아축불과 같은데 이것은 아축불의 서원에 바탕하여 보리심의 활동을 촉진하는 매개의 공능을 구체화한 것이다.
삼십칠존 이야기- 7.보바라밀
모든 것에서 평등하게 보배의 성품을 보는 지혜
불교경전에서 자주 보이는 마니라는 용어는 산스끄리뜨 mani의 음역으로 보배구슬의 총칭이다. 마니가 중국인들에게 낯설기 때문에 여기에다 보주라는 한자가 혼합된 것이 마니보주이니 이 두 낱말은 같은 보배라는 뜻이다. 이 구슬은 용왕의 뇌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일반적으로 마니에는 불행, 재난을 없애고 혼탁한 물을 맑히는 등의 덕이 있다고 한다. 특히 생각대로 진귀한 보물을 낸다고 하는 보배구슬을 여의보주, 또는 여의주라 하며, 이것을 마니보주라 하기도 한다. 여의보주는 그것을 지니는 사람의 모든 소망을 이루어 준다는 보배구슬로서 보통 지장보살과 용이 지니는 지물로서 불상이나 불화 등에 등장한다.
그런데 보배라고 하면 불교의 이미지와 먼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출가자는 돈이나 보배를 저축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배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은 수행하는 데에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고, 실제로는 모든 불보살과 법이 숭고하고 존귀함을 형용하는 데에는 언제나 보배를 사용한다. 예컨대 부처님의 자리를 보좌라고 칭하거나 모든 불보살의 장엄한 모습을 보배의 모습이라 하며, 진여청정한 불성을 보배의 성품이라 하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 법을 따르며 전하는 스승, 이 셋을 삼보라 하거니와 이 셋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아니 될 귀중한 보배이다. 또한 여러 경론 중에는 모든 불보살 및 그 국토를 각종 영락과 보물로 장식하는 일을 서술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 5보라는 명칭이 경론 가운데 널리 보인다. 5보는 글자 그대로 다섯 종류의 보물을 가리킨다. 즉 금⋅은⋅호박⋅수정⋅유리이다. 밀교에서는 단을 건립하고 수법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5약⋅5향⋅5곡과 5보 등을 단 아래에 매장하며, 혹은 관정할 때에 5보를 단의 5병 속에 넣는다. 이렇듯 보배를 사용하는 것은 불법의 가치가 높고 귀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 모든 존재는 보배와 같이 모두 귀한 존재들뿐이다. 그 하나의 예로서 꽃을 들어보자.
꽃은 아름답기에 장식용으로 수요가 많다. 그래서 기념할만한 날에는 꽃으로 장엄한다. 꽃집에 가면 여러 가지 꽃들마다 독특한 개성을 갖고 꽃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으며, 각각 의미가 다르기에 사람들은 그 꽃 중에서 기념일에 알맞은 꽃을 사간다. 꽃값도 각기 달라서 크고 아름답거나 많은 사람들이 애호하는 꽃, 기르기 힘든 꽃 등은 값이 꽤 나간다. 값이 나가는 것을 가치라고 하거니와 꽃집의 꽃은 각각의 경우에 따라 그 가치가 매겨진다.
그런데 산과 들에 피어나는 꽃 중에는 절대로 꽃집에서 팔리지 않을 꽃들이 허다하다. 장식하기에 알맞지 않거나, 별로 아름답지 않거나, 어떤 꽃인지 잘 보이지 않는 등등의 이유로 그저 봄철에 피어났다가 별 관심 없이 사라지고 마는 꽃들이 많다. 이런 꽃을 구입하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꽃에도 꽃집주인이나 꽃을 사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치가 있는 꽃과 없는 꽃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 없는 꽃일지라도 그 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생각해보면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의 가르침에 따라 다음과 같은 내용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인가 그 꽃의 씨앗이 그 자리에 자리 잡아 토양과 기후와 수분이라는 조건을 충족한 뒤에 싹이 피어나 꽃을 피운 것이다. 그 꽃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모든 꽃이 다 평등하게 인(因)과 연(緣)을 갖추어 꽃으로 피어났다. 인연으로 생겨 일어난 모든 것들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당위성을 갖는다. 들판에 피어난 어떤 꽃이라도 그 자리를 차지할 권리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꽃집 주인은 하찮게 여겨지는 꽃들을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관점에서 가치가 나갈 꽃씨를 뿌릴지 모른다. 이러한 의미를 모든 존재에 결부시켜보면 세상의 어떤 것이든 우리 눈앞에 보여 질 때에는 존재해야 할 당위성을 지닌 것이지만, 이름 없는 꽃을 뽑아버리는 꽃집 주인처럼 그 존재의 지속여부를 결정짓는 인간의 행위는 탐욕 등 욕망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일 뿐이다. 연기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실로 모든 것은 존재해야 할 당위성을 지니며 무한한 가치를 가진 보배처럼 귀한 존재이다.
그 보배는 세간의 금은방에서 사고파는 보배와는 다르다. 불교에서 보배는 또 다른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존재가 연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변하는 특성이 없이 인연 따라 변화함을 말하는 것으로 고정된 성품이 없다는 뜻이다. 중생이라 하여 중생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며, 보살이나 부처라 하여도 고정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여래장이라고 하거니와 중생은 모두가 평등하게 여래장을 품은 존재이다. 불교경전에서 많이 사용되는 보배의 개념은 바로 보석과 같은 여래장을 의미한다. '화엄경'에서 중생과 마음과 부처가 무차별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은 평등하다. 현상적으로 차별되어 보일지라도 모든 것의 평등한 근원을 바라보는 지혜가 바로 보바라밀의 평등성지이다.
밀교에서 다섯 가지 지혜의 하나인 평등성지는 제7 말라식을 돌려서 얻은 무루의 지혜이다. 우리 삶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그 가운데 어느 부분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것만을 절대화시키는 것이 말라식의 작용이다. 말라식의 자기화는 크게 아치⋅아견⋅아만⋅아애의 네 가지이다. 자기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아치라 하는데 자기 삶에 대해서 무지하며 진정한 깨달음의 삶도 보지 못한다. 그런 삶 속에서 나와 너라는 대립개념이 생기는 것이 아견이다. 그리고 나는 잘났네, 너는 못났네 하면서 나를 감싸는 것이 아애이다. 서로서로 비교하는 가운데에 자신을 높게 세우는 것이 아만이다. 이와 같이 말라식이 번뇌로서 다양한 차별견을 일으켜 고뇌를 받는데 이 차별견을 떠나서 평등성을 비추어 보는 지혜를 평등성지라 한다. 이 지혜는 남방보생불의 지혜로서 보생불로부터 파생된 보바라밀의 지혜이기도 하다. 그 지혜는 일체 모든 법과 자기나 다른 유정들을 반연하여 평등 일여한 이성을 관하고 남이니 나이니 하는 차별심을 여의어 대자대비심을 일으키며, 보살을 위하여 가지가지로 교화하여 이익케 하는 지혜이다. 이른바 제7식이 무아에서 노닐기 때문에 평등하게 포섭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리고 동체지로써 한량없는 중생을 정각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래서 '금강정경'에서는 평등성지 보바라밀의 밀호를 ‘평등금강’이라 하며 중생들 모두에게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자각시키기 위해 금강보배의 관정을 펼치는 보바라밀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때에 보생여래는 대비로자나여래심과 일체여래의 지혜로 인하여서 곧 보바라밀다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보배의 삼매에 드신다. 이 삼매 가운데에서 곧 큰 보배의 광명을 나타낸 지금강자는 이 보배광명 가운데에서 일체세계에 극히 미세한 티끌처럼 많은 여래상을 이루고, 금강보배의 형상을 출현시키고 대비로자나여래의 오른쪽 월륜 가운데에 머문다.”
이 글에 의하면 보바라밀다삼매에서 금강보의 형상을 출생하는데, 이것은 결국 보바라밀과 일체여래의 금강보배삼마지로부터 전개되는 보배관정의 신변을 설한 것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보금강녀를 출생하자마자 바로 보광명을 내고, 그 보광명으로부터 저 바가범지금강이 일체세계의 먼지처럼 수많은 여래의 상호신을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여래와 지금강자가 서로 인이 된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일체여래지는 평등성지이다. 보생불이 내심에서 보바라밀을 증득하고, 이 보바라밀인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법계와 같은 몸을 시현하며, 이 몸으로써 스스로 이룬 바의 평등성지를 완성하신다고 하는 것으로, 말을 바꾸면 보생불의 시현인 보바라밀은 보리심의 활동으로 생겨나는 무량의 복력을 갖고 대일여래에 공양함을 상징하는 존격이다.
여기에서 보란 재보로써 비로자나불의 장엄상을 상징하는 말이다. 따라서 보바라밀은 비로자나불의 무진장엄상과 보생불의 속성인 공덕취의 활동을 나타낸다. 앞에서 금강바라밀이 무한한 보리심여래를 출생시키듯이, 빛나는 보배관정의 활동을 일체화한 이 보바라밀에서 일체의 공덕취여래가 출생한다. 다시 말하면 보생여래의 속성인 보배를 가지고 공양하는 보시바라밀의 가르침을 나타낸 보살이 보바라밀이다. 그래서 수인도 보생불과 같다. 금강계만다라 성신회에서 보바라밀의 존상은 왼손으로 보배를 얹은 연화를 가지며 갈마의를 입고 있다.
삼십칠존이야기- 8.법바라밀
오묘하게 관찰하는 지혜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은 한결같지 않다. 봄철에 피어나는 하얀 목련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는 슬픔을 느끼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맑고 정갈한 꽃이라 하면서 기뻐하기도 하며, 또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등 여러 가지의 인식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각 개인의 받아들임은 현저한 차이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붉은 장미를 보고서 좋은 일이 있었다면 그 기억이 붉은 장미를 볼 때마다 떠올라 장미가 특별히 아름다운 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장미가시에 찔려서 아파본 사람은 장미를 볼 때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라 장미의 아름다움에는 관심을 가질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보는 것만이 아니다. 김치와 같이 매운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감각은 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을 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이렇듯 시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에는 내가 들어가 있다. 내가 본다거나 내가 듣는다, 내가 느낀다 등은 모두 자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대상을 본다는 말이다. 우리가 보는 대상에 나의 기억이 겹쳐진다는 것은 나를 분별해서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는 만큼 보이고, 좋아하는 만큼 보이고, 자기 그릇만큼 보여서 주관적인 감각수용에 의해 외부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외부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라는 분별과 함께 하는 일이 된다.
시각에 ‘나’라는 분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청각에도 ‘나’라는 분별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선 음악을 듣더라도 이 음악을 듣는 것이 자신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도록 고상한 음악을 들으려고 한다. 후각, 미각, 촉각도 마찬가지이며 의식도 모두 ‘나’라는 분별에 의지한다. 그래서 이 여섯 가지 마음은 항상 자아에 물들어 있다. 자아에 물들어 있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감각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자아에 물들지 않은 순수의식은 어떻게 인식하는가? 먼저 대상이 되는 존재는 어떠한 모습인지 수많은 불교경전에 설해진 바에 의하면 모든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空) 그 자체이다. 마치 김춘수시인의 시에 나오는 꽃과 같은 존재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의 눈앞에 나타난 모든 것들은 내가 바라볼 때 존재로서 인식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물질이든 마음이든 끊임없이 흐르는 변화로 존재하며 우리가 그 대상을 인식할 때에 그 대상은 우리에게 존재로 다가온다. 인식은 그러한 대상에 모습을 주고 의미를 주고 명칭을 주어서 끊임없는 흐름을 정지시킨 채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며 변화하는 것이며 사라지게 되어 있다.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한 것이고 모두 허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과 귀와 코, 혀, 몸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얻은 의식은 순수하게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전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과거 인식의 그림자로서 ‘나’라는 분별이 겹쳐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환상과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하고 실제로 있는 것이라 착각하여 스스로 일으킨 인식에 속박된다.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 속박되어 자재하지 못하니 이것을 대상을 분별하는 속박이라 한다. 주관도 환상이고 객관도 환상인데 환상인 줄 모르고 분별 속에 속아서 산다.
즉 ‘나’라는 의식이 있으면 우리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어 보는 대상마다 ‘나’라는 분별이 들어가 반응한다. 그래서 반응하는 대상을 인식하는데 인식하는 내용들이 전부 다 분별망상이다. 일체의 법은 모두 허깨비 같고 꿈과 같아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므로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져 말을 따르는 자가 말하거나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분별망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다시 우리의 의식을 수행의 주체로 활용해야 한다. 의식은 바뀌어야 하지만 우리는 의식을 통해서 깨닫기 때문이다. 의식 가운데 ‘나’라는 의식을 놓아버리고 대상을 인식하면 대상이 환상인줄 알게 된다. 환상이라고 알게 되면 ‘나’라는 의식이 힘을 잃고 소멸해버리며, 이때 인식하는 대상을 알고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서 자기 몸도 환상이고 보이는 세계도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 절대로 물질이나 형상에 걸리지 않고 모든 것을 새롭고 자유롭게 본다.
이렇게 의식이 자유롭게 관찰하는 것을 묘관찰지라 한다. 묘(妙)란 연기하는 일체의 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묘하다. 관찰이란 산란한 경계의 모습을 그치고 인연으로 모든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의식에서 순수함이 익숙해지면 이전에 있었던 ‘나’라는 개념을 덧붙인 복합적 인식이 아니라 사물을 대함에 분별없이 바로 관찰이 명백해져서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지혜를 묘관찰지라고 한다. 이때 보이는 대상은 환상이면서 언제나 새로운 것이기도 하다.
실행론에 ‘마음이 항상 새로우면 어떠한 것이라도 항상 새로운 것을 맛볼 수 있다’고 함이 이와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의식으로 포착하는 모든 것은 그 순간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저 나름의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가꾸어가며 살려가는 것은 매번 새로운 마음이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묘관찰지는 서방 아미타불의 지혜로서 비로자나불의 수용지혜신을 나타내며, 그 수용신의 성격을 계승하여 법바라밀이 출생한다. '성위경'에는 법바라밀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대연화지혜삼마지지를 증득하고, 자수용인 까닭에 대연화지혜삼마지지로부터 연화광명을 유출하고,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고 일체중생의 객진번뇌를 맑히며,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지며,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한 까닭에 법바라밀의 형상을 이루고 비로자나여래의 뒤쪽 월륜에 머문다.
법바라밀은 바로 비로자나여래의 연화광명이 그 출생의 근거가 된다. 연화광명이 시방세계에 방사되면서 모든 중생들의 객진번뇌를 청정하게 함이 그 작용이다. '삼십칠존심요'에서도 ‘모든 부처의 법금강으로서 자성청정하기에 모든 탐염을 청정하게 한다’고 설한다. 이 법바라밀은 본래 자성이 청정한 까닭에 그 경지에서는 모든 탐욕과 물들음을 모두 청정하게 하는 특성이 있다. 일체의 법은 본질적으로 우주의 생명적 나툼이므로 청정하거나 더럽다거나 하는 상대적인 가치를 떠나 절대청정하다. 절대청정한 가운데에서 성립되는 무한한 관계는 인연의 얽매임이 아니라 즐겨야 할 기쁨이 된다. 이렇게 아는 것이 수용지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법바라밀은 아미타불의 속성인 수용지혜의 활동, 즉 아미타불이 일체법의 청정함 가운데에서 무한한 자비를 나투는 법열의 활동을 의인화한 것이다. 이 보살은 청정심의 법열의 경지를 상징하며 이것으로 대일여래에 공양한다. 이 법바라밀에서 일체의 지혜문여래가 출생하여 중생의 객진번뇌를 청정하게 하는 법을 설한다. 모든 법을 언제나 새롭게 관찰하여 바른 것과 삿된 것을 정확히 분별하고, 중생의 근기를 맞추어 부사의한 능력을 나타내며, 그들이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즐거워하는가에 따라 막힘이 없는 말솜씨로써 온갖 오묘한 법을 말씀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절대안락에 들어가게 하는 지혜가 법바라밀의 묘관찰지인 것이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 ‘서남각의 법바라밀천은 무량수여래에 속한다. 인계와 관상이 다 무량수여래와 같다’고 하는 것처럼, 인상은 아미타불과 같은 법계정인이다. 성신회의 존상은 육색의 천녀형으로 갈마의를 입고 미타정인을 한 형상에 불경을 담은 상자를 얹은 연화줄기를 가지고 있다. 공양회에서는 독고저를 얹은 연화줄기를 양손에 들고 있다. 기타 다른 존상과 삼매야형도 법열의 기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삼십칠존이야기- 9.업바라밀
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
흔히 인생을 빗대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에 비유한다. 수많은 재산을 불려놓은들 저 세상으로 갈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말이다. 가족이나 친구도 마찬가지이고 아무도 동행할 수 없다.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왕들은 무엇인가 가져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고대 왕들의 무덤을 파면 수많은 부장품이 나오고 심지어 저승길에 함께 동행하도록 순장한 자들의 유골도 나온다. 부질없는 짓이기는 하나 가져갈 수 없음에도 가져가고 싶어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승길 노잣돈이라고 하는 형태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놓고 가는 것들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정녕 저 세상으로 떠날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중생들은 윤회하는 가운데 지어놓은 수많은 업이 있다.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선악업과 생활하면서 지은 수많은 업이 다음 생으로 연결된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짊어지고 가는 주체가 없이 업 그 자체가 갈 뿐이며 업에 의하여 전생과 금생 그리고 후생이 이어진다.
업이란 갈마(羯磨)라고도 한다. 행위와 의지에 의한 말⋅동작⋅생각과 그 세력, 즉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신체와 말과 생각의 셋으로 구분한다. 선업이나 악업을 지으면 이것이 업의 인이 되어 업의 과보가 생긴다. 그리고 과보와 동질성의 습기가 잠재여력으로 남아 업장이 된다. 육체 위에 드러난 눈∙귀∙코∙혀∙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욕락에 빠지고 이것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난 업은 갖가지 망념을 통하는 동안 번뇌로 더욱 무거워진다. 그 업에 의해서 스스로도 고뇌하고 타인을 괴롭히며, 갖가지 죄나 장애를 지으며 생사에 윤회하는 것이다. 무릇 태어난다는 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업이라는 부모가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며, 죽는다는 것도 내가 바란 것이 아니라 업이라는 귀신이 나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우선 이와 같은 업의 구속을 물리치고 마음의 광명을 밝혀 온갖 괴로움의 덩어리인 생사에서 초탈해야 한다. 그것은 업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업을 잘 활용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불교경전에서는 악한 과보를 받지 않도록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지으라고 설한다. '율장'에 나오는 수많은 금지조항들은 수행하기에 적합한 좋은 습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온갖 악한 행위를 막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도 하면 안되고, 저것도 할 때에는 조심하는 습관이 길러진다. 수행을 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는 하나 이러한 태도는 자기자신은 청정하게 할지라도 타인에 대해 수동적 경향을 보일 것이 틀림없다. 무엇인가 새로운 업이 생겨나는 것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능동적 경향으로 바꾸는 것이 업바라밀이다. 나쁜 일은 피하고 좋은 일만 하고 싶어하는 것이 중생이므로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면 중생을 위한 보살행은 불가능하다. 나쁜 일을 당했을 때에 의기소침해하거나, 좋은 일을 만났을 때 의기양양하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당면한 모든 일들은 나쁜 일이거나 좋은 일이 아니라 그냥 일이며 인연따라 온 것으로 담담한 마음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것, 이것이 업바라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실이다.
'금강정경'에 이르기를 “삼계 속에는 분별할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탐욕을 보고 떠나는 것 또한 죄가 된다. 왜냐하면 물들음 속에 청정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물들음과 청정을 하나로 아는 자야말로 해탈한 자이다”라고 하고 있다.
행위이기는 하지만 과보를 바라지 않는 행위가 불보살의 부사의업이다. 그래서 물들음과 청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금강계37존 가운데 업바라밀은 바로 이러한 부사의한 삼밀의 교화행을 상징하는 존격이다. 중생들의 삼업을 여래의 삼밀로 전환시키는 방법에 의하여 우리의 행위는 고양된다.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업바라밀의 삼마지를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갈마금강대정진삼마지지를 증득하고, 자수용인 까닭에 갈마금강대정진삼마지지로부터 갈마광명을 유출하며,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어서 일체중생의 온갖 게으름을 없애고, 대정진을 이루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지며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한 까닭에, 갈마바라밀형을 이루고, 비로자나여래의 왼쪽 월륜에 머문다.
여기서 갈마는 금강갈마로써 대정진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갈마바라밀이란 비로자나불의 끊임없는 창조의 활동을 상징한다. 그것은 우주대생명이 변화를 지어내는 모습을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불공성취여래의 속성인 변화·창조의 활동이다. 업바라밀이 상징하는 성소작지는 북방 불공성취여래의 지혜로서 온갖 행위를 지어 행하는 전5식, 즉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은 인식을 돌려서 얻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10지 이전의 보살과, 이승, 범부 등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시방에서 삼업으로 여러 가지 변화하는 일을 보여 각기 이익하게 하는 지혜이다. 우리들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하여금 일에 따라서 응용하여 지혜로써 움직이면 어긋남이 없다. 눈으로 보든지 귀로 듣든지 육근 가운데 어떤 것을 받아들일 때 바르게 받아들여 두 모습이 없는 것이 성소작지이다.
신라의 원효는 이 성소작지가 부사의한 일을 만들어낸다고 하여 부사의지라고 하였다. 부처의 신체적 구조는 중생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중생을 교화하고 그들의 중죄를 소멸시키는 등 훌륭한 과보를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부사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작업의 지혜로부터 비로자나불의 작변화신을 나타내므로 업바라밀이라 한다.
이 세상은 환상이기에 주체의 자발적 의지에 의하여 무엇으로든 변형이 가능하다. 변화의 몸을 지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우주가 그의 몸이므로 전체의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금강계만다라의 제존이 모두 비로자나여래의 대비에 의해 투영된 영상이기에 그 영상으로 나타난 몸은 자재하게 일체세계에 투영되며, 일체제불과 일체불국, 그리고 모든 세계를 그 몸에 받아들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외만다라에 지옥이 편입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중생교화활동을 펼칠 수 있는 곳이야말로 보살이 머물러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구경방편이기에 밀교에서 모든 예토는 정토로 바꾸어나가야 할 국토로서 모든 예토를 변화시킴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밀교의 정토는 바로 정토로 만들어야 할 사바세계에 있다. 구경방편이므로 중생교화사업이 바로 정토이다. 구경이 방편인 밀교의 이상세계는 보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로서 모든 중생들이 불성을 지녔음을 보고 이를 교화하는 것이 구경이며, 중생이 무한하므로 비로자나불의 성소작지를 나타내어야 할 국토도 무한하다.
마치 중생이라는 꿈을 꾸는 자가 깨닫고 보니 모두 꿈과 같은 환상인줄을 알게 될 때, 더 이상 꿈과 같은 중생놀음은 끝난다. 그러나 그 꿈속에는 이것이 꿈인줄 모르고 꿈속에 헤매고 있는 무수한 중생들이 있다. 그들을 위하여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함께 꿈을 꾸면서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은 부사의한 업의 활동으로 생명의 창조활동인 신변유희이다. 행위는 있되 업으로부터 자재한 것이 업바라밀의 부사의한 신변유희이다. 업에 구속되지 않으며 업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적극적 행위로써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춘 지혜를 운용하는 것이 업바라밀의 정진이며, 신변유희로써 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의 활동이다.
업바라밀은 법명을 업금강녀라 하며 밀호는 ‘성취금강’이라 한다. 갈마삼매로부터 출생한 업바라밀의 대금강갈마상은 '염송결호법보통제부'에 ‘일체여래갈마바라밀작불사업관정지’라 표현되듯이, 활동성을 가지고 공양하는 정진바라밀을 현실에 표현하는 보살이다. 이 보살은 불공성취여래의 시현인데, 불공성취라는 명칭에서 나타나듯이 보리심의 일체활동을 불공, 즉 헛되지 않게 교묘히 성취하는 능력을 지니며 이것으로 대일여래에 공양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 ‘서북각의 갈마바라밀천은 불공성취여래에 속한다. 인계와 관상이 다 불공성취여래와 같다’고 하듯이 불공성취여래와 동일한 인계 및 관상에 주한다. 이 보살의 삼매야형은 무한한 활동성을 의미하는 갈마금강저이다.
※ 본래는 이 서적 고유의 금강살타 이미지가 있는데, 밀교신문에 연재할 때 이미지를 다른 분(보바라밀)과 헷갈려서 잘못 올리셨습니다. 그래서 서적과 다른 일반적인 금강살타 이미지를 올립니다.
삽십칠존이야기- 10.금강살타보살
금강과 같은 보리심을 지닌 보살
금강살타보살은 '대일경'과 '금강정경'에서 대일여래의 설법을 듣는 대중의 대표로 나오는 비밀주금강수를 말한다. 이 보살의 명칭은 금강살타 외에도 금강수ㆍ집금강ㆍ지금강ㆍ보현살타ㆍ금강주비밀왕 등이 있다. 범어명칭이 vajra-sattva이므로 ‘금강과 같은 보리심을 지닌 유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인왕반야다라니석'에는 ‘금강수란 손에 금강저를 지니고 안으로는 대보리를 갖추었으며 밖으로는 모든 번뇌를 부수어 깨뜨림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름을 금강수라 한다’고 하며, ‘금강살타란 진실법을 깨달으며 깨닫고 나서 중생들의 세계에 머물면서 일체중생을 깨닫게 하므로 금강살타라 이름한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가 강조되어 '금강정경의결'에는 ‘집금강이란 바로 일체여래와 모든 보살의 견고한 보리심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취석'에, ‘금강수보살마하살이란 이 보살이 본래는 보현보살로, 비로자나불의 두 손으로부터 친히 다섯 가지 지혜를 상징하는 금강저를 수여받고 곧 관정을 받았으므로 이를 이름하여 금강수라 한다’라 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금강살타는 보현보살의 다른 이름이며 그 성격을 계승한 존격이다.
이상 여러 경궤에 등장하는 금강살타의 명칭과 표현은 모두가 한결같이 보리심을 지니고 중생교화에 임하는 강인한 성격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이토록 강력한 금강살타의 등장에는 분명 금강살타를 요구했던 시대적 요청을 예상할 수 있다. 불퇴전의 금강과 같은 보살은 분명 교화하는데 힘들었던 시대를 반영한다. 금강살타를 비롯한 수호존은 불보살이 교화하기 어려운, 즉 평범한 수단으로는 교화하기 어려운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분노상을 나타낸 것이다. 이들은 역사적인 불타였던 석가모니불, 또는 역사적 불타를 보편화, 이상화함으로써 성립되었던 과거불, 미래불, 사방불 등 교리적 개념을 불격화한 데서 비롯된 불보살과는 다르다. 인도에서는 힌두교로부터, 불교가 수용된 지역에서는 토착종교와 타종교의 영향을 현저히 받은 존격이다. 특히 힌두교에서 도입된 수호존이 불교에 들어와 불교의 수호존이 되었다. 힌두교의 신들과 수호존은 외형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수호존과 호법존이 혼동되기도 하지만, 티베트만다라에서 수호존으로 분류되는 존격의 대부분은 인도에서 무상유가탄트라 즉 후기밀교성전의 본존이다. 인도에서 다른 종교의 교도를 조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성립된 분노존은 불교전래와 더불어 티베트에도 소개되었다. 그런데 티베트에서는 조복시켜야 할 힌두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과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힌두교의 신들을 조복시킨다는 테마가 등한시되고 힌두교신과 비교된 번뇌나 악의 퇴치라는 종교적으로 승화된 해석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금강정경'에서 금강살타의 출생을 살펴보면 금강살타는 일체여래의 대보리심과 그 보리심에 바탕한 보현행이 보현대보살의 몸을 생하는 바탕이 되며, 보현대보살삼매로부터 일체여래의 신통유희와 보현의 몸이 시현되는 것이다. '금강정경'의 게송에서 ‘보현은 견고한 살타로써 자연적으로 생한다. 저 견고한 본래의 무신(無身)으로 말미암아 금강살타신이 출현한다’고 하듯이, 출생의 근거가 물질적인 실재가 아니라, 가장 견고한 공(空)으로부터 생하는 법이의 자연신이므로 금강과 같이 견고한 금강살타신이 되는 것이다.
즉 일체중생이 가지고 있는 보리심의 본체가 견고함이 금강에 비유되었다. 일체중생은 이 금강살타의 가지력에 의해서 발심하는 것으로, 대일여래를 깨달은 분의 총체로 하면, 금강살타는 미혹한 범부의 총체로서 우리들을 대표하는 존이다. 따라서 대일여래의 설법을 듣는 중생의 대표가 되고 밀교의 가르침을 중생에게 전하는 중요한 중개자이기도 하다.
이 금강살타가 바로 밀교에서 설하는 가장 이상적인 수행자의 모델인 것이다. 즉 대승의 보살이라는 개념이 밀교에 이르러 금강살타로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질적인 변화를 이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승의 기본적인 사유인 이타를 충실히 계승한 것이면서 동시에 대승에서 볼 수 없었던 개념들이 추가되어 있다. '금강정경의결'의 후반부에 중생교화라는 사명을 어기면 보리심이 아니라고 하는 표현은 '대지도론'에 중생을 위하여 오래도록 생사에 머물러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취하지 않고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보살의 중생교화정신, 즉 방편력으로 중생들을 열반에 들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마저 취하지 않고, 열반에도 들지 않으며 중생제도에 힘쓰는 보살정신을 계승한다. 금강살타란 바로 오직 중생교화뿐인 자신의 사명을 자각한 보살의 불굴의 의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리살타와 금강살타는 보리심의 작용의 입장에서 기술한 것으로 금강살타의 대상이 대승보다 더욱 분화된 5승(인, 천, 성문, 연각, 보살승)이기에 금강살타가 필요하게 된다. 즉 회오귀일함인데 법화경의 회삼귀일은 삼승을 일승으로 인도하는 뜻이지만, 밀교의 회오귀일은 삼승만이 아닌 외도마저 회통하여 모두 금강일승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오비밀궤'에서 관련내용을 보면 오비밀의 법문을 닦음에 의하여 두 가지 집착을 끊고 현생에 보살의 초지에 들어가며, 더 나아가 몸을 백억으로 나누어 모든 유정들의 세계에 나아가 교화하는 신변의 경지까지 이름을 설하고 있다. 금강보살 자신은 비밀관정을 수여받은 선택된 존재이지만 그의 교화대상은 모든 유정들의 세계로 제한이 없다. 이것은 모든 유정들의 세계를 교화하기 위하여 특별훈련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밀교의 보살사상은 대승보살사상에 그 바탕을 둘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교화대상의 폭을 넓힌 것이며, 전문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즉, 일체만법이 모두 인연화합하여 생긴다는 것을 깨닫고, 어디에도 집착을 생하지 않는 지혜로운 자는 무량한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정토가 아닌 현실의 예토에 스스로 생하는 것이다. 연기의 이치를 바로 자각한 지혜로운 자의 입장에서 다만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발원에 따라 그의 의지대로 출생하고 무량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극악의 요소와 극선의 요소를 사용하여 다양한 중생들을 위하여 정법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선에는 선방편으로 악에는 악의 방편으로 그 마음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인격적 특징을 나타내어 교화한다는 것으로, 대상에 따른 독특한 인격활동이 전개됨을 보인다. 일체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 활동 또한 하나의 다양한 활동인 것이다. 즉 일체를 보는 것은 곧 자기 몸을 보는 것과 같으므로 동체대비를 뜻한다. 동체로서 대비이기 때문에 일체를 생하고 일체를 활용하며 각각 개개의 생명을 통하여 장엄하는 활동을 살리고 있다.
이러한 보살이 금강정경에서는 금강살타용맹보리심삼마지지를 상징하는 금강살타에 의해 집약된다. 결국 보리의 견고한 바탕에서 출생한 금강살타가 동방아축여래 4친근보살의 상수일 뿐만 아니라, 십육대보살의 대표가 되고, 이취회에서는 중대 주존이 되며, 태장만다라에서는 금강수원(金剛手院)의 주존이 되고 또 대일여래의 내권속의 주존이 되며, 보현행을 닦고자 하는 금강정경계통 밀교경전에서 일체 수행자의 이상적인 모델이 된다. 그래서 일체중생은 최초에 발심할 때 모두 금강살타의 가지에 말미암으므로 금강살타를 일체여래보리심이라 이름한다. 이 보살이 근본이 되어 삼십칠존과 사종법신 등이 출생하기 때문이다.
동방 아축여래의 서방에 머무는 금강살타는 그 견고한 보리심의 덕을 나타내기 위하여 삼매야형으로 오고저를 쥔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금강령을 쥔 왼손을 가부좌한 발 위에 놓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왼쪽에 금강령을 지니는 것은 기쁨을 나타내며, 이것을 왼쪽 허리에 두면 대아(大我)를 나타내는 것이고 오른쪽에 오고저를 둔 것은 다섯 가지 지혜의 뜻이다. 더 나아가 금강살타보살은 중생에게 견고한 보리심과 함께 모든 중생은 이러한 견고한 보리심을 가졌다는 동일성을 일깨워 기쁘게 하는 보살이라 할 수 있다. 또 오고저는 혜문(慧門)의 십육대보살을 나타내고 금강령은 금강령보살의 삼매로서 정문(定門)의 십육공양보살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존은 정문과 혜문 32존의 총덕을 구비해서 대일여래와 동체임을 보이는 금강계만다라의 대표적인 보살이다. 자리와 이타의 정점에 있는 금강살타는 보살과 불이 만나는 접점이며, 구경방편이 전개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삼십칠존이야기- 11.금강왕보살
중생들을 이끄는 데에 왕과 같이 자재한 보살
한 나라의 임금을 왕이라 한다. 왕은 모든 권한과 책임의 최고봉으로서 그 나라의 온갖 판단의 근원은 왕으로부터 나온다. 마치 사자가 뭇 짐승들 속에서 자재한 것처럼 왕은 그 나라 어디에서든 자재롭다. 그러나 자재롭다 하여서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왕이 지닌 자재함이 어떻게 전개되는 가에 따른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현명한 왕이 나라를 통치하면 온 백성이 잘사는 나라가 되지만 왕이 제멋대로 통치할 경우에 그 나라는 도탄에 빠진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에서 성군과 폭군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런데 왕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자재하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 영역 안에서 우리는 왕이 된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대외적인 대인관계이든 우리의 자주력이 발휘되어야 할 무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의외로 왕이 되어야 할 자리에서 자주력을 상실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더욱 큰 문제는 인생이라는 무대의 왕이 자주력을 상실하는 경우의 비참함이다.
얼마전 호주의 호스피스 간호사가 임종환자를 대상으로 설문했는데 그들은 다음과 같은 후회를 남겼다고 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 둘째, 일만 너무 열심히 했다. 셋째,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대신 남이 원하는 삶을 살았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너무 염려하였다.”
그 결과 의뢰적인 삶을 이루었고 그것이 습이 되어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자신으로 하여금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게 했던 남들은 내가 이러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기뻐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남들은 사실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들의 이익에 관련될 때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이것은 나도 마찬가지여서 남들이 어떻게 살든 별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머무는 이 자리에서 나는 왕이고 자재하게 자주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외부의 모든 존재와 대립각을 세우고 자신만 위하는 것이 왕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왕이란 모든 것을 자재롭게 한다고 해서 자기중심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중심은 모든 존재들과의 조화에서 나오는 중심이다. '실행론'에 “우리들은 날 때부터 자기중심 생각 있어 이것을 곧 불교에서 오직 아라 부름이니 아를 멸해 가는 것이 오직 불교수행이라”고 하면서 아(我)는 원래 자기 존재 본능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더 나아가 “안없애면 안되는 것 소아(小我)라고 이름하며 선택정화 세울 것을 대아(大我)라고 하느니라”고 자기중심에 관한 두 가지 견해를 세우고 있다. 타인의 이익에는 관계없이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소아이며, 이타가 배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습관성이나 중독성으로 약물을 취하는 사람이 보시를 요청할 경우 소아의 입장에서는 보시를 행하면서 그 보시의 공덕을 생각하지만, 대아의 입장에서는 그 보시로 인해서 더 망가질 것을 알기에 보시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좋은 길로 이끌 수 있도록 마음을 보태게 된다. 소아의 경우 상대의 이익과 무관하게 자신의 선행으로 기록하지만 대아의 경우에는 선행이라 하여도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고 궁극에는 정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기에 때로 모질게 나가는 것이 궁극의 선행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실행론은 이렇게 말한다.
“불교는 구경에 자성이 청정하여 일체 사리에 자심이 통달하게 되니 이것이 곧 자주력이 되는 것이다.”
임종의 순간까지 자주력을 발휘하지 못해서 의뢰적으로 살았던 삶의 주인공이나 자신의 선행만 생각했던 소아의 사람은 일체 사리에 자심이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중심을 세우고 자심이 통달하게 되면 곧 일체와 연결되어 있는 연기성에서 자주력을 발휘할 수 있다. 수행이든 사업이든 사회에서 자기만 위하는 중심을 세우는 왕은 이기적이라고 비판받게 되지만 인생에서의 왕은 자기를 확립하며 남과 함께 더불어 수행하여 나가는 중심이 된다.
이렇게 왕과 같은 보살이 금강계만다라 37존 가운데 아축불의 4친근보살 중 하나인 금강왕보살이다.
금강왕보살은 '금강정경'에 ‘일체여래구소삼매’와 ‘묘불공왕금강왕’으로 표현되고, 기타 다른 경전에서 불공왕·금강구소‧금강구·최상금강왕 등으로도 칭해지며 밀호는 자재금강이다.
금강왕보살은 불공왕대보살의 삼매인 구소삼매로부터 출생하며 구소삼매란 바로 불공왕의 성품이 그 출처가 된다. 이 보살은 대일여래로부터 파생한 금강살타와 애염명왕의 교리적 교섭으로부터 생겨난 존이기도 하다. 이 보살은 삼매야형으로 갈고리를 지니는데 갈고리란 끝이 뾰족하고 굽은 물건으로 농작물 등을 모을 때에 사용하는 농기구이다.
그 갈고리는 '성위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구사섭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구사섭삼마지지로부터 금강광명을 유출하여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고 사섭법으로써 일체중생을 포섭하며, 가장 뛰어난 보리에 머문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지며,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왕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아축여래의 오른쪽 월륜에 머문다.
금강왕보살이 지니는 왕처럼 자재함을 상징하는 금강의 갈고리는 첫째로 일체여래를 불러들이는 기능을 상징하고 있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을 갈고리로 이끌어 온다. 이를 금강구왕이라 이름한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일체여래께 가르침을 청하는 것으로, 두루 다함없는 모든 유정계에 널리 이끌어들여 이익하게 하며, 모두에게 불법의 기쁨과 행복을 획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중생들을 이끌어들이는 데에도 사용된다. 앞에서 금강살타보살에 의해서 자신이 보리심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중생을 갈고리를 가지고 불도로 이끌어들인다. 그 갈고리가 상징하는 것은 사섭법이다. 사섭법이란 보시·애어·이행·동사로서 일체중생을 포섭하는 구소의 덕이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에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를 말한다. 보시섭은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재물을 기꺼이 베풀어 주는 일이며, 애어섭은 사람들에게 항상 따뜻한 얼굴로 부드러운 말을 하는 것이다. 이행섭은 신체의 행위, 언어의 행위, 정신행동의 삼업에 의한 선행으로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이며, 동사섭은 자타가 일심동체가 되어 협력하는 것으로, 형체를 바꾸어 중생에 접근하여 중생과 같이 일하며 제도하는 일이다. 이 사섭은 원시불교의 중요한 수행덕목인 37조도품의 일부이다. 이 가운데 동사섭은 보살의 동체대비심에 근거를 둔 것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그들을 자연스럽게 교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금강왕보살은 쌍금강구를 들고 불러 모으는데 사용한다. 이것을 섭소하는 것은 곧 불공왕보살의 묘행이다. 따라서 이 갈고리를 지니고서 가지상응하면 왕과 같은 자주력이 있어서 일체여래의 대자재지심심삼매를 속히 얻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상호 가운데에도 갈고리처럼 중생을 모두 이끌어들이는 상호가 있다. 수족지만망상(手足指縵網相)이라 하는 상호는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모두 막이 있어 서로 연결된 문양이 마치 기러기가 날개를 펼치면 나타났다가도 펼치지 않으면 숨는 것과 같다는 데에서 나온 명칭이다. 이 상호는 사섭법을 닦아 중생을 섭지함을 상징한다.
사섭법을 상징하는 갈고리가 삼매야형으로써 중요한 의미를 갖음에도 이 보살의 이름을 왕이라 한 것은 한 나라에서 왕이 모든 것에 자재하며, 온 백성이 복종하며 그 통치를 받는 것처럼 여래의 실상의 신변이 걸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결국 사섭법을 자재로이 행하여 모든 중생을 포용하는 것을 갈고리라는 삼매야형과 왕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낸 것이다.
'약출염송경'에 금강구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빠르게 일체여래를 갈고리처럼 끌어들인다라고 하는 것처럼, 금강왕보살에게 불보살이나 중생들을 불러들이는 공능이 있는 것을 금강구, 또는 쌍금강구로 표현한다. 성신회의 형상이 두 손으로 금강권을 만들고 팔을 교차시켜서 가슴에 안고 있는 것도 '금강정경'에 “금강구보살의 오묘한 인계를 결함으로 해서 곧 모든 부처를 널리 청한다”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십칠존이야기- 12.금강욕보살
번뇌를 쏘아 떨어뜨리는 보살
욕망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을 버려야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지만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 욕망을 버리려고 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토인비, 비스베이더, 허먼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허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내가 욕망을 지멸시키고자 욕망한다면 결국 모든 욕망을 다 지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다만 한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역설은 열반이라 하여 모든 욕망을 없애려는 욕망 속에 포함된 실제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일찍이 불교 내에서도 논의된 적이 있음을 '잡아함경' 제21권 「바라문경'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경에 따르면 아난 존자와 어떤 바라문의 대화 중에서 “욕망에 의해 욕망을 끊는다”는 아난 존자의 말에 그 바라문이 “그렇다면 그 욕망은 끝이 없는 것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아난 존자는 예를 들어 “그대는 정사에 가야겠다는 욕망이 있었지만 정사에 도착하고 나서 그 욕망은 사라졌을 것이다”는 비유를 통하여 욕망의 역설은 성립하지 않음을 경험론적으로 밝혔다.
무명을 바탕으로 추구하는 욕망과 번뇌를 버리려는 욕망의 개념은 다른 것이다. 전자는 부정적 의미의 이기적 욕망으로서 탐욕과 갈애이고 후자는 이타적인 의욕, 바람, 이상, 원 등을 뜻하는 것이다. 탐욕과 갈애로써 이룩하는 것은 인연생멸의 윤회이다. 이 인연을 잘 관찰하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다. 또한 상호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리되어 있는 것이 없고 계속 변화하는 속에 실체가 없다. 이렇게 알아가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열반을 추구하고자 하는 바람이기에 생멸의 욕망과 적멸의 바람은 다르다. 부처님은 본능적인 아집⋅아욕에 가담하는 쪽의 마음작용을 번뇌⋅유루 등이라 일컫고, 해탈하는 쪽에 가담하는 마음작용을 한마디로 보리심이라 칭하였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명에서 앞의 무자를 지운 명이고 지혜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중생들에게 열반으로 지향하도록 교화하고자 하는 마음은 중생교화의 방편지혜이며, 여기에서 교화하고자 하는 서원의 적극적인 면을 살려서 이 마음도 ‘욕(欲)’이라 표현하게 된다. 이 욕망은 윤회를 야기하는 번뇌의 욕망과 다르기에 불교에서는 중생교화의 욕망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크다는 뜻의 ‘대’자를 넣어 대원, 대욕이라 하고 있다. 보현보살의 10대원, 법장비구의 48원, 지장보살의 대원 등이 그것으로 정토는 이러한 보살들의 대원으로 성취되는 국토이다. 그리고 금강계만다라 삼십칠존 가운데 금강욕보살이 이와 같은 중생교화의 대욕망을 의인화시킨 예가 된다.
동방 아촉여래의 서방에 머무는 금강욕보살은 '금강정경'에 ‘일체여래가 중생들을 애락하는 자재한 지혜’라고 표현되며, 기타 여러 경전에서 ‘금강궁(弓)보살’, ‘금강염보살’, ‘마하대애보살’이라 한다. 백팔명찬에서 ‘모든 번뇌를 굴복시키는 자⋅절대적인 안락⋅금강의 활⋅금강의 화살⋅절대적인 금강’의 이름으로 그 덕이 찬탄되며 밀호는 ‘대희금강’이다. '금강정경'에서 그 출생을 밝힌 문단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마라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살타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들어가니, 이 이름을 일체여래의 수애락삼매라 이름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나오자마자 저 구덕지금강자는 일체여래의 화기장을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곧 세존 대비로자나여래심에 들어가서 합하여 한 몸이 된다. 이로부터 거대한 금강의 화살을 출현하고 저 마라의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고 마라대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여기에서 금강애보살, 즉 금강욕보살은 마라대보살신과 동체로 표현되며 일체여래의 수애락삼매, 즉 중생구제를 즐겨 구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삼매에서 출생한다. 마라(māra)는 ‘장애’⋅살해하는 자⋅목숨을 빼앗는 자라고 하며, 몸과 마음을 요란케 하여 선법을 방해하고 좋은 일을 깨뜨려 수행을 방해하는 마군은 바로 마의 군졸들이다. 그 인계는 활과 화살이다. 또 마의 의미를 내관적으로 해석할 때는 중생을 괴롭히는 일체의 번뇌를 마라고 부른다. 중생이 언제나 온갖 번뇌에 견고하게 얽매이며 부처의 청정법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 보살은 활로서 이를 쏘아서 그 견고하게 얽힌 것을 순식간에 파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즉 살해를 뜻하는 마라가 밀교에 포섭되어 이기적 욕망을 철저히 파괴하고 살해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구체적으로는 욕금강보살이 금강의 활과 화살을 가지고서 아뢰야식 가운데의 온갖 번뇌의 종자를 쏘아 대원경지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마라대보살을 동체로 하는 금강욕보살의 욕망은 개체의 이기적 욕망이 아니라, 모든 욕망의 근원인 청정한 대욕으로서, 이 대욕의 사업을 위하여 이 보살은 금강의 화살을 지니는 것이다.
'성위경'의 다음 문장을 통해서도 금강욕보살의 역할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애대비전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애대비전삼마지지로부터 금강화살의 광명을 유출하여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며, 일체중생을 쏘아 맞혀서 무상보리에 마음이 떠난 자를 억누른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지며,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욕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아축여래의 왼쪽[西] 월륜에 머문다.”
여기에 등장하는 금강의 화살은 아주 강하므로 어떠한 것이라도 쏘아맞출 수 있다. 위 문장에서는 중생의 마음 가운데 불도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좁은 마음을 쏘아 맞추어 없앤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다시금 불도에 들어오게 된다. 애는 큰 욕망을 뜻하며 그것은 대비를 속성으로 한다. 금강애대비전삼마지는 큰 욕망의 대비로 전개되는 화살, 즉 적극적으로 중생의 번뇌를 제거하고자 하는 절대적인 의욕을 의미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비슷한 표현이 보이고 있다.
“왼주먹에 활을 잡고 오른손에 화살을 들어 자비의 눈으로 온갖 마, 탐진치 등의 모든 번뇌를 쏜다. 이 인을 이름하여 성냄을 없애는 인계라 한다. 이른바 이 보살은 수행자들이 애락하는 바를 시여하는 까닭이다.”
이렇게 금강욕보살은 대비의 화살을 잡고, 집착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쏘아맞춘다. 중생들이 집착하는 어리석은 마음이란 인집과 법집의 2집을 말한다. 인집은 아집이라고도 하며 오온이 화합하여 성립된 몸에 언제나 한결같이 주재하는 참다운 나가 있다고 주장하는 집착을 말한다. 법집이란 객관적인 일체의 사물이나 마음의 현상이 실재하는 줄 잘못 알고 고집하는 것으로 불교 수행에 장애가 되는 그릇된 집착이다. 이 집착은 성문과 연각 등 소승의 수행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불교의 교리인 생사와 열반, 그리고 색⋅수⋅상⋅행⋅식의 하나하나가 모두 실재한다는 그릇된 고집 속에 빠져 도리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이러한 번뇌를 제거하는 데에 이전의 불교에서 보여주었던 수동적인 번뇌의 제거가 아니라 밀교에서는 적극적인 방편을 동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활과 화살로써 번뇌를 쏘아맞춘다는 표현은 지혜로써 번뇌를 끊어없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적극적 활동에 의해 스스로의 번뇌뿐만 아니라 보리심의 화살로써 일체 유정을 불러들여 불도에 머물게 하려는 금강욕보살의 의욕이 발휘되는 것이다.
따라서 '금강정경'에 활과 화살을 지니는 묘애금강과 상응하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을 따라서 애락하게 한다고 하며, '약출염송경'에는 금강애염의 인계로 말미암아 일체불법을 즐긴다고 그 결인의 공능을 설한다. 모두가 능동적 번뇌제거이며 중생교화로써 일체의 불보살을 환희하게 하는 불사가 된다.
'금강정경의결'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여래께 봉사하므로 여래가 애락한다. 중생들이 받들어 지니므로 중생이 괴로움을 떠난다. 또한 송하여서 여래를 염애함으로 말미암아 여래가 호념하시게 된다. 중생을 염애함으로 해서 중생이 해탈한다. 이것을 염애의 지혜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금강애보살이 일체중생에 대해 절대적 사랑을 보내는 공덕을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공덕과 묘용을 상징하기 위하여 보살의 성신회의 상은 살색으로 오른손에 화살을 쥐고 왼손에 올려놓고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이 하고 있다.
삼심칠존이야기- 13.금강선재보살
환희로써 찬탄하는 보살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이나 옛날 한문투의 글 가운데 선재(善哉)라 하는 것은 “매우 좋구나”의 뜻으로 쓰는 감탄사이다. 사람들은 좋고 기쁜 일이 있을 때에 “오호, 선재라”하며 그 기쁨의 뜻을 표현하였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좋은 일에 대한 찬탄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기쁨을 함께 느낀다는 동참의식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좋은 일의 완결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의 씨앗으로서 마음속에 다시 심어진다. 그리하여 다음 좋은 일을 마주하였을 때 앞의 기쁨의 씨앗이 더욱 힘차게 나아가는 동력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은 기쁨을 느낄 때 에너지가 솟구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월드컵이든 국제경기이든 축구경기를 보다가 자국 선수가 한 골을 넣으면 이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일시에 환희한다. 마치 기운이 불끈 솟아오르는 듯이 함성을 지르며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일부는 펄쩍 뛰기도 한다. 환희용약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환희가 힘을 주어서 격한 감정의 표현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다음 상황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누구든 스포츠를 관람하거나 직접 운동하면서 기쁨을 얻은 자는 다음에 다시 하려고 하는 의욕을 갖게 된다. 이것은 비단 스포츠만이 아니라 학업이나 사업, 대인관계 등 모든 방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기뻐서 가슴에 희열이 가득할 때의 심정은 누구든 한 번 이상은 경험했을 것이고 그 환희는 그 다음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환희를 경험하면 계속해서 환희를 경험하고자 하는 의욕이 일어나고 그 의욕은 점점 강해져서 더욱 깊은 환희를 맛보게 한다. 즉 환희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무엇이든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이 마련된다.
불교에서도 환희는 이와 동일하다. 불법을 듣고 마음이 기쁨, 또는 신심을 얻어 마음이 즐겁고 기쁜 것을 환희라 하며, 내 뜻에 알맞은 경계를 만나 몸과 마음이 즐거운 상태이다. 구체적으로 환은 몸의 즐거움, 희는 마음의 기쁨이라 한다. 불법을 닦는 것도 그 처음은 환희로부터 출발하여 점점 고양되는 것이다.
불교의 교리 가운데에서는 '화엄경'에서 설하는 십지 중 초지인 환희지에서 환희가 이러한 동력을 가지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환희지는 기쁨의 단계로서 처음으로 불성의 이치를 보고, 삶의 잘못된 견해에서 야기되는 모든 번뇌를 끊으며 스스로가 무아인 이치와 객관적인 대상세계가 모두 공하다는 이치를 충분히 깨달음으로써 자리이타하여 열 가지 큰 서원을 세우며 마음에 기뻐함이 많다는 뜻으로 이렇게 이름한다. 이 자리는 번뇌를 끊고 더러움을 제거하여 깨끗하게 하는 지위로서 새로운 안목을 열어가는 힘을 갖추었기에, 환희지를 경험한 수행자는 그 다음 순수성의 단계인 제2 이구지로 들어가게 된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밖과 문안이 다른 것처럼 환희지의 문밖과 문안은 다른 경계이다. 두 번째 문이 되는 이구지의 문도 마찬가지이다. 불법의 가르침을 법문(法門)이라 하는 것은 진리로 향하여 들어가는 문의 뜻이어서 문밖과 문안이 다르기 때문이다. 불법을 들으므로서 얻어지는 기쁨을 법희⋅법열이라 하는데 그 기쁨은 힘으로 전개되기에 이후에 펼쳐질 보살십지의 수행을 닦아나아갈 능력을 키우게 된다. 그리하여 매 단계마다 불법의 가르침을 듣고 세간에서 그 가르침을 실현하는 자에게 그 가르침을 듣기 전과 실행한 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진리의 문을 통과한 것에 비유한 것이다.
금강계만다라에서는 이러한 진리의 문을 네 보살의 연결된 행으로 구성하였다. 삼십칠존 가운데 보리심류에 속하는 사보살의 수행이 바로 그것으로 네 보살의 행은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라 밀접한 연결관계에 있다. 즉 일관되어 있는 신해의 과정이다.
동방 아축여래의 사친근 중 제1의 금강살타보살은 초발심부터 견고하고 용맹하여 물러서지 않는, 즉 수행자가 보리심을 일으켜서 깨달음을 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금강살타보살의 경지를 증득하였을지라도 번뇌가 아직 제거되지 않았으면,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기 어려우므로 사섭의 법을 행하여 이들을 제도해야 한다. 보리심을 일으켜 자재를 얻어 갈고리가 모든 것을 이끌어오듯이 일체를 포섭하는 보리심의 덕을 금강왕보살이 상징한다.
비록 갈고리로 끌여들었을지라도 아직 대비의 마음을 갖추지 않았다면, 반드시 모든 중생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내어 구해주어야 함을 금강욕보살이 상징한다.
이 뛰어난 행으로 말미암아 “오호, 선재라”하면서 아주 기뻐하며 찬탄하는 역할을 금강선재보살이 담당한다.
이상의 네 보살은 금강부 가운데 아축불의 권속들이다. 이들의 활동 목적은 보리심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에 있다. 보리심류 네 보살의 상징성을 통해서 수행자는 발보리심이라는 법문을 열고 환희의 경지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서 네 번째의 금강선재보살은 '금강정경'에 ‘일체여래께서 훌륭하게 지으신 활동’이라 하며 ‘금강선재극희왕’이라 표현하는 것처럼 훌륭하게 행한 일에 환희하는 덕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보리심류 네 보살이 행한 활동의 마무리를 짓고 환희 가운데에 그 다음 공덕취류 네 보살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연결된 행으로써 보리심을 일으켜서 대각을 구하고 대자재력을 얻어 일체를 포용하며 진실로 사랑하고자 하는 의욕을 갖게 되었을 때에 이 의욕으로 진실한 희열을 향수하는 것이 금강선재보살의 지극히 뛰어난 기쁨이다. 이 보살은 중생들에게 자비와 이타를 보여주고 계율을 지키는 자를 찬탄하고 인욕 뒤에 안락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보리심의 덕을 완성시켜 준다. 따라서 백팔명찬에, ‘금강환희ㆍ마하열의ㆍ환희왕ㆍ묘살타상수ㆍ금강수ㆍ금강희약’ 등의 이름으로 그 덕이 찬탄된다. 기타 다른 경전에서도 ‘금강칭보살’, ‘환희왕보살’이라고도 하며 밀호는 ‘찬탄ㆍ안락ㆍ선재금강ㆍ애락금강ㆍ환희금강’ 등이 있다.
금강선재보살의 출생을 '금강정경'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환희왕대보살의 삼매에서 출생한 금강삼마지에 들어가시니, 이것을 일체여래의 극희삼매라 이름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었을 바로 그 때 곧 저 덕을 갖춘 지금강자는 금강선재의 형상을 이루고 곧 세존 대비로자나여래심에 들어가 합하여 한 몸이 된다. 이로부터 금강희의 형상을 출현하고 저 지극한 기쁨의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극희왕대보살신을 출생한다.”
여기서 극희왕이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 이상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기쁨이다. 그 기쁨의 원인은 일체의 훌륭한 사업을 행하여 일체에 베풀었기 때문이다. 기쁨을 주고 스스로도 기뻐하는 극희왕대보살신은 극희삼매에서 출생한다. 금강살타보살이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금강왕보살이 보리심을 발한 중생을 구소하며, 금강욕보살이 화살로 번뇌를 쏘아맞추는 일체의 사업에 대해, 환희를 나타내 보임을 금강선재보살로서 의인화한 것이다.
이것이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선재환희왕용약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선재환희왕용약삼마지지로부터 금강선재인광명을 유출하여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고, 모든 중생들의 근심과 슬픔을 비추며 보현행에서 소극적인 마음을 일으키면, 신심으로써 환희하는 지혜를 얻게 한다. 돌아와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의 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선재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아축여래의 뒤쪽 월륜에 머문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앞에서 금강살타ㆍ금강왕ㆍ금강욕보살의 활동에 이어, 그러한 활동에 의해 고양된 기쁨을 중생들 모두가 향수하게 하는 금강선재보살의 활동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선하지 않은 모든 것을 부수어 선함 가운데 들게 하며 저 환희하지 않는 자들까지 모두 환희케 하므로 금강선재라 칭하는 것이다. 동방 아축여래의 북방에 위치하는 금강선재보살은 '제불경계섭진실경'에 ‘좌우의 엄지와 검지를 펴고 세번 탄지하라. 이는 환희상이다. 만약 이러한 인을 결하면 바로 무명의 성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처럼 벅차오르는 기쁨을 손가락을 튕기는 탄지로써 상징한다. 중생들에게 자비와 이타의 훌륭한 사업을 보여줌에 따라 중생은 보리심의 덕을 완성하게 되는데, 이것은 보살에게 그 이상가는 것이 없는 최고의 환희가 될 것이다. 따라서 '금강정경'에 ‘금강선재인을 결함으로 해서 곧 모든 부처가 환희하시게 한다’고 하며, '약출염송경'에 ‘금강환희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최승한 것을 모두 선재라고 칭탄한다’고 금강선재보살의 공능이 찬탄된다. 공양회에서 보배를 얹은 연꽃을 양손으로 들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찬탄되어야 할 사업에 대한 무한한 공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삼심칠존이야기- 14.금강보보살
모든 존재가 보배와 같음을 일깨워주는 보살
“귀명 일체여래 공덕취”란 보생여래를 주존으로 하는 네 보살에게 귀명한다는 말이다. 공덕취에 속하는 보살들은 모두가 보생여래의 복덕의 활동을 분담하고 있으며 재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삼십칠존출생의'에서는 일체여래의 절대적인 장엄에서 금강보보살을 생하고, 일체여래의 매우 위덕있는 빛에서 금강광보살을 생하며, 일체여래의 크나큰 원만에서 금강당보살을 생하고, 일체여래의 대환희에서 금강소보살을 생하여 남방 보배광명의 공덕세계를 이루어 일체여래의 머무는 바 없는 보시바라밀을 성취한다고 한다.
그 첫 번째가 금강보보살이다. 금강보보살은 '금강정경'에서 ‘일체여래의 대관정의 보배’와 ‘성스러운 허공장의 금강보’로 표현된다. 수행의 선업인 만행을 닦아 불도 수행자에게 만행의 공덕을 보이면서 걸림이 없는 보시바라밀을 행하게 하되, 그 하고자 하는대로 한다하여 ‘여의금강’이라 하며, 두터운 복업을 짓게 하니 그 크기가 마치 허공과 같다하여 ‘허공장보살’이라고도 한다. 백팔명찬에서 ‘묘금강·의금강·금강허공·마하마니·허공장·금강부요·금강장’ 등의 명칭으로 그 덕이 찬탄된다. '금강정경'에서 이 보살의 출생을 밝힌 문단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허공장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보배로 가지한 금강삼마지에 들어가시니 이것을 일체여래관정삼매라 이름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는 가지한 바의 일체허공계에서 세존 대비로자나여래심에 섞여 들어가 뛰어나게 두루 수행하는 까닭에, 금강살타삼마지의 태장으로 이루어진 바의 일체허공계 가운데에 대금강보의 형상 등을 출현하여 일체여래의 신통과 유희로써 일체세계에 널리 시여하니, 저 일체허공계성이 출생한다. 금강살타의 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허공장대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허공장대보살삼매에서 일체여래의 관정삼매를 출생하고 이로부터 전전하여 허공장대보살의 몸이 출생하게 된다. 즉 보생불의 변화는 곧 허공장보살이며, 일체여래의 관정의 지혜창고는 허공장보살의 다른 이름이다. '허공장보살경'에 의하면 허공장보살은 큰 위신력으로 사바세계를 정토로 변하게 하고, 일체 대중의 두 손에 여의마니를 주어 갖가지의 보물을 비처럼 뿌리고, 병을 제거하고 복을 얻게 하기 위하여 모든 다라니를 설하며, 이 보살을 생각하면 큰 힘을 얻어 모든 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취석'에서는 ‘허공장보살은 일체여래의 진여와 모래알처럼 많은 공덕과 복과 자량의 쌓임을 나타낸다. 허공장보살의 행을 닦음으로 해서 네 종류의 보시를 행하는데 삼륜청정한 것이 마치 허공과도 같다’고 한다. 그야말로 우주를 모두 함장하고 무량한 복덕과 지혜를 갖추며 언제나 중생에게 베풀어서 모든 원을 성취시키는 보살이다.
이 보살의 몸은 일체허공계의 성품을 그 바탕으로 삼는다. 일체를 수용할 수 있는 허공과 같은 덕을 의인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허공장보살은 금강계만다라에 등장하기 이전에 태장만다라에서 허공장원의 주존이며, 석가원에서는 석가의 오른쪽에 위치되어 있다. 그리고 '허공장보살능만청원최승심다라니구문지법'에서는 허공장보살을 중심으로 하는 허공장구문지법이라는 밀교독특의 수행법이 설해져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밀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존이다. 이 보살은 금강계만다라에서 금강의 명칭을 받고 허공장보살의 성격을 이어받아 모든 존재가 보배와 같음을 일깨워주는 금강보보살로 활동한다.
세상에서 아무리 재산이 많은 갑부라 하여도 저 허공을 보배로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허공이란 저 무한한 하늘을 의미하며 허공장이란 저 하늘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이 보배이기에 허공 전체를 창고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 눈에는 산과 강과 들판이고 건물이며,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온갖 식물, 동물들과 사람들로 보여서 무수한 차별이 있을 뿐이지만 여래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 모든 것들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보배라는 말이다. 보배라고 하는 세간에서 그 가치를 높이 사는 사물로 세상 모든 중생들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정작 그 가치를 찾고자 하여 중생들을 자세히 보아도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생의 성품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마음도 공하고 부처의 성품도 텅 비어 있다. 원래 텅 비어 있으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아무런 성격도 지니고 있지 않기에 무한한 성품으로 전개되어 갈 수 있는 것이 중생의 성품이다. 부처의 성품도 마찬가지이기에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중생이 성불할 가능성이 있음을 여래장이라 부른다. 여래장이란 공사상이라는 기본적 토대 위에서 성립한 사상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설파함으로써 일반 대중들을 고무시키고자 설해진 것으로 이것이 허공장보살, 즉 금강보보살이 드러내고자 하는 보배와 같은 가치이다.
이러한 내용을 '금강정경'에서는 ‘금강살타삼마지의 태장으로 이루어진 바의 일체허공계’라고 하였다. 태장이란 여래장의 다른 말이다. 태장이란 바로 어머니의 사랑에 의해 아이가 잉태되어 길러지는 것처럼 여래의 대비로 인해 보리심을 발하고 삼밀의 수행을 통하여 구경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태장으로 표현된 밀교의 여래장은 일체개공이어서 번뇌가 공하며 중생 모두의 성불 가능성을 확인하는 본래적인 입장보다는 혼탁한 번뇌를 제거한다는 작용성에 중점을 두면서 설해지고 있다. 그 작용이 가지라고 하는 것이며, 삼밀이라고 하는 구체적 행법이다. 여래의 이성은 일체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으면서 대비로 말미암아 길러지는 것이 마치 태아가 모태 안에 있는 것이나 연꽃의 씨앗이 꽃 속에 숨겨져 있는 것과 같으므로 이러한 비유로 태장을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금강정경계통의 경전에서는 허공장보살을 ‘금강태보살’이라고도 하며, '성위경'에는 금강보보살이 중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여래장을 깨우치게 하는 계기로 관정을 들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보관정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보관정삼마지지로부터 금강보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일체중생의 정수리에 뿌려서, 보살의 불퇴전의 직위를 획득케하며, 돌아와 한 몸으로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보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보생여래의 앞 월륜에 머문다.”
이처럼 금강보보살은 보시바라밀을 완성시키는 남방 보생여래의 앞에 머물면서 허공처럼 무한한 복덕과 지혜의 두가지 덕을 갖추고 일체의 중생으로 하여금 본래 지니고 있는 최고의 보배와 같은 덕성을 스스로 자각하도록 금강보의 광명을 두루 유출한다. 겉으로는 발보리심의 생활을 하고 수행의 덕을 쌓아가는 수행자에게 일체의 재보를 시여하는 보살이지만, 그 보배는 세간적인 보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보배란 '제불경계섭진실경'에 ‘지금 나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과 중생을 관정한다’고 하는 것처럼, 관정에 의해 중생이 스스로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본래의 보배인 성불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고, 더 나아가 그 보배의 성품을 육성시켜 성불에 이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금강정경'에 ‘보금강인을 결함으로 말미암아 곧 부처님으로부터 뛰어난 관정을 받는다’고 하며, '약출염송경'에는 ‘대금강보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천인사로 하여금 그들에게 관정한다’고 하는데, 비로자나불로부터 수여되는 관정은 밀교의 수행을 허락하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는 스스로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관정이란 여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출발이라고 볼 수 있으며, 결국 스스로도 여래의 경지에 이르며 이 경지에 이르도록 일체에게 관정을 시여하는 것이 금강보보살의 역할이다.
이 보살의 삼매야형은 광염이 있는 보배구슬이며, 금강계만다라 성신회의 존상은 왼손으로 여원인을 하고 오른손은 보배를 받드는 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공양회의 상은 연화 위에 보배를 얹은 연줄기를 양손으로 쥐고 있는데, 이들 존형과 삼매야형 등은 금강보보살이 담당하는 역할을 상징하고 있다.
삼십칠존이야기- 15.금강광보살
광명을 몸으로 하는 보살
새해 첫날이면 전국에서 해맞이하는 인파들이 바닷가나 산 정상에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새벽에 동쪽하늘에 붉게 떠오르는 태양이 세상을 덮은 어두움을 불태우듯이 서서히 광명으로 바꾸어놓는 광경이다. 광명은 어두움을 물리치며 어둠 속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태양이 서서히 하늘로 솟아오르면서 어두움 속에 잠들었던 수많은 중생들, 즉 야행성 동물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식물은 따뜻한 햇살이 비춰올 때에 깨어난다. 그리고 그들은 태양의 광명이 빛나는 동안에 활발한 신진대사를 행한다. 광명은 이처럼 뭇 중생들을 깨어나게 하고 자라나게 한다.
광명은 스스로 밝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광명을 반사하는 모든 것으로 하여금 더욱 빛나게 한다. 맑은 이슬, 고요한 호수, 밝은 거울 등 밝은 광명 아래에서 빛나는 모든 것들은 깨끗한 것이다. 광명은 청정과 어울려서 그 광명이 널리 퍼져나간다. 즉 광명에는 청정의 의미와 확산의 의미가 함께한다. 그리하여 해가 밝게 빛나는 광명 아래에서는 자신과 타인, 다른 사물들을 분별하여 알아챌 수 있다. 광명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선명하므로 우리는 이것과 저것을 분명히 알아챌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지혜를 닦을 수 있다. 광명은 이처럼 지혜를 가져다준다.
이와 같이 광명은 어두움을 밝히고 중생들을 불러오는 의미, 깨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는 의미, 청정하여 일체를 분별하고 지혜를 가져오는 의미 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부처님의 법을 닦을 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불법을 만나는 순간 중생들은 그 법문을 듣기 위하여 모여든다. 흔히 번뇌망상을 어둠에 비유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광명에 비유하듯이 떠오르는 태양은 우리의 자심을 가리킨다. 진각교전에 ‘뉘가 허물 없으리요 고치는 자 착하도다’라고 하는 것처럼 자심이 광명으로 밝아올 때에 그 광명을 가리고 있던 탐진치의 번뇌는 걷어진다. '대일경'에서 설하는 여실지자심이란 바로 자심본성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자심본성은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본심을 말하는 것으로 자성법신이라 한다. 어떠한 중생이라도 다 본심을 갖고 있으나 탐진치의 번뇌망상이 본성을 가리어서 그 광명을 못보게 하고 있다. 따라서 그 누구를 막론하고 탐진치 번뇌 망상을 걷어 없애면 본성의 광명을 볼 수 있게 된다. 태양이 솟아올라 광명을 비추는 것은 본성의 광명을 보는 것으로 이 광명을 보고자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 법을 통하여 깨어나고 그 가르침에 의해 우리의 정신세계는 고루 성장한다. 불법의 광명 덕분에 지혜를 갖추며 불법을 닦아나갈수록 중생들은 점점 청정해진다. 이처럼 불도를 닦는 수행자는 불법이라는 광명을 체험하는 순간부터 성불의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불법과 광명은 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기에 부처님이나 불법은 종종 세간을 밝히는 광명에 비유되곤 하였다. 경전에는 중생들이 부처님을 한목소리로 청하자 부처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고 입에서 한없는 백천 광명을 내시었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부처의 32가지 거룩한 모습의 하나로서 백호상이 있는데, 부처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을 의미한다. 깨끗하고 부드러워 미세한 향과 같으며, 오른쪽으로 말린데서 끊임없이 광명을 방사한다고 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광명이 세상을 비춘다는 것은 그 지혜로 인해서 어둠과 같은 어리석음을 깨고 밝은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비유로 광명이 사용된 것이다.
광명은 무수한 여래의 명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미타경에는 아미타여래에 대하여 그 수명이 무량하므로 무량수불이요 광명이 무량하므로 무량광불이라 하였으니, 아미타불은 한량없는 광명을 지니고 중생의 번뇌의 어둠을 밝히는 한편 한량없는 생명을 지녔기에 생멸이 없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비로자나부처님도 광명변조⋅변조왕여래, 또는 변조라고 하듯이 무한한 신체의 광명, 지혜의 광명이 법계에 두루 비추어 둥글고 밝은 것을 의미한다.
광명 가운데에는 보배처럼 찬란한 광명이 으뜸이다. 보생여래는 말 그대로 보배를 생하게 하는 여래로서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불성이라는 귀한 가치를 내어쓰도록 일깨워주는 여래이다. 보생여래의 광명은 그 빛이 체계적으로 세간에 골고루 나투어지도록 보생여래를 둘러싸고 있는 네 보살로서 전개된다. 그 보살 가운데 첫번째인 금강보보살의 관정에 의해 중생들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본래의 보배인 성불의 가능성을 발견한 다음에, 두 번째로 금강광보살은 광명으로서 중생의 무명과 어리석음의 암흑을 깨뜨리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금강정경'에 ‘일체여래의 일륜광명’과 ‘대묘광은 금강광이다’라고 표현되는 금강광보살은 여러 경전에서 ‘금강위덕보살’, ‘대위광보살’이라 하며 밀호는 ‘위덕금강’이라 칭한다. 보생여래의 위광의 덕을 맡아서 모든 부처님의 치염한 위광을 경례하는 보살이기 때문에 백팔명찬에는 ‘금강위덕·금강의 태양·가장 뛰어난 빛·절대적인 빛남·금강의 광휘·절대의 위덕’ 등이라는 명칭으로 금강광보살의 덕이 찬탄된다. 이들 명칭의 공통점은 무한한 광명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금강정경'에서 이 보살의 출생을 밝힌 문단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대위광대보살삼매에서 출생한 보배 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들어간다. 이것을 일체여래의 광명삼매라 이름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나오자 마자 곧 저 덕을 갖춘 지금강은 숱한 태양을 이루고, 출현하고 저 금강일륜[태양]의 형상으로부터 일체세계의 극히 미세한 티끌처럼 많은 여래상을 내어서 일체세계에 널리 시여한다. 저 크고 오묘한 광명의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대위광대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이 글에서 크고 위력있는 광명을 가진 대보살은 일체여래의 광명삼매에서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금강광보살은 광명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 자체 광명이면서 금강일륜을 그 삼매야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세간의 뜨고 지는 태양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하나밖에 없는 세간의 상대적인 태양이 아니라 절대의 태양을 금강일륜이라 하는 것이다. 세간의 태양은 낮에만 자라나게 할 뿐이지만 여래의 태양은 낮과 밤의 구별없이 모든 어두움을 없애어 모든 일을 성취하게 하는 영원성과 끝없이 계속 비추는 활동성이라는 세 가지 점을 지니고 있어서 세간의 태양과 다르다.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위광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위광삼마지지로부터 금강일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일체중생의 무명과 어두운 어리석음을 깨어서 대지혜의 광명을 발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 하기 위하여 금강위광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보생여래의 오른쪽 월륜에 머문다.”
이와 같이 이 보살은 금강계만다라 남방 월륜 가운데 보생여래의 우측, 즉 동쪽에 머무는 보살로서, 중생의 무명과 어리석음을 깨뜨리는 지혜가 의인화되었다. 중생을 위해 불법을 설함에 따라 중생이 미혹을 버리고 스스로 지니고 있는 지혜의 광명을 발휘하도록 돕는 역할이 금강광보살로 표현된 것이다.
'금강정경'에는 ‘금강광보살의 오묘한 인계를 결함으로써 부처의 광명과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고 그 결인의 공덕을 찬탄한다. 또한 '제불경계섭진실경'에서는 ‘좌우의 양손을 다시 서로 회전시켜 태양이 오른쪽으로 도는 것처럼 세 번 돌면 일천의 광명륜을 이룬다’고 하는데, 이것은 앞에서 금강보보살이 중생이 갖춘 본래의 보배를 발견하게 하였던 것에서 더 나아가 그 보배에서 태양과 같은 광택을 발하도록 하는 금강광보살의 묘용을 상징하는 것이다.
성신회의 상은 육색으로서 좌권을 허리에 대고, 오른손은 해모양을 들고서 가슴 가까이 대고 있으며, 미세회의 상은 양손으로 해모양을 가슴 가까이 받들고 있다. 공양회의 상은 연꽃 위에 해모양을 얹고 양손으로 들고 있으며, 항삼세회의 상은 두 손을 권으로 하여 가슴 앞에 교차하여 품는 자세로 있다. 삼매야형은 빛나는 태양의 모습이다. 이들 존형과 삼매야형은 대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수행자에게 마음의 광명을 열게 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삼십칠존이야기- 16.금강당보살
보배의 깃발을 높이 드는 보살
깃발이라는 시에서 유치환시인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펄럭이는 깃발로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그저 펄럭이는 무정물에 불과한 깃발에서 시인은 이상적 세계를 향한 강렬한 향수와 그리움을 아우성이라는 단어로 응축시키고 있다. 깃발은 푯대 끝에 매달려 해원이라 표현되는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아우성을 치지만 그 몸부림은 소리가 없기에 끝내 이상에 도달할 수 없는 애수의 손수건으로 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는 깃발을 통해 이상세계를 향한 인간의 간절한 의욕을 상징하고 있다.
깃발은 이처럼 우리의 감성을 드러내고 이상을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천이나 종이로 넓게 만들어 깃대에 다는 물건으로 그 천에 어떠한 상징을 넣는가에 따라서 국기나 군기, 단체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과거 일제 치하에서의 태극기나 종교탄압을 받는 나라에서 보는 종교의 깃발은 그대로 애국심과 애종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도 불보살 및 도량을 장엄하는 법구의 일종으로 중생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중생을 지휘하며 마군을 굴복시키는 상징물로 오래전부터 사용하여 왔다. 대체로 불전 안에 두는 소형의 당간을 지칭하는데, 장대 끝의 모양에 따라서 용머리 모양을 취한 용두당, 여의주를 장식한 여의당 또는 마니당, 사람 머리 모양의 인두당 등이 있다. 당은 갖가지 다양한 색의 비단으로 표치하고 장엄한다.
특히 그 꼭대기에 여의주를 매달은 것을 보당이라 칭하였으니 그 여의주에서는 중생들이 원하는 갖가지 재물이 쏟아지고 소원이 성취된다. 더 나아가 광명으로 빛나는 지혜의 당으로써 모든 번뇌의 마군을 물리친다는 뜻을 상징한다.
이통현의 '신화엄경론'에서는 ‘십회향위의 금강당보살은 보살의 지광삼매에 드는데 금강당보살은 이 삼매에 들어서 무량한 가르침의 빛을 이끌어내어 근본지로써 빛의 근본을 삼고 차별지로써 가르침의 빛을 삼아서 근기에 따라 이익을 준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도 지혜광명의 깃발을 높이 들어 중생에게 법의 이익을 얻게하는 면이 보이고 있다. 이 서원은 지장보살과 같다고하여 금강당보살의 동체보살로 지장보살을 든다.
지장보살은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 관세음보살과 함께 가장 많이 신앙되는 보살의 하나로 도리천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매일 새벽 항하사의 선정에 들어 중생의 갖가지 근기를 관찰한다. 석가모니부처님과 미륵불 사이의 부처님 없는 시대에 천상·인간·아수라·아귀·축생·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는 대비의 보살이다. 특히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짐짓 지옥에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위무하고 교화해 제도하는 위대한 ‘지옥세계의 부처님’으로 신앙된다. '지장보살본원경'에는 지장보살이 석가모니부처님에게 한 서약의 내용이 있다.
“지옥이 텅 비지 않는다면 결코 성불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육도의 중생이 다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다.”
악행을 일삼는 중생이 아직 남아있고 그 과보를 치뤄야할 지옥이 남아있는 한 지장보살의 서원과 보살행은 그칠 날이 없다. 지옥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였을 때 지옥세계가 사라지면 그때 지장보살의 원과 행이 다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이 해탈을 얻게 되면 지옥도 극락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지장보살의 이와 같은 서원은 중국과 한국·일본에서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어 민간에 널리 신앙되었다. 지장이란 이름은 ‘지옥에 스며들어가 지옥의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님’이라는 의미 외에도 편안하게 견디는 것이 흔들리지 않음이 대지와 같고 생각하는 바 치밀하기가 비밀창고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그 모습은 천관을 쓰고 왼손에는 연화를 오른손에는 보주를 들었으며, 후세에 이르러 석장을 든 사문의 모습이라든가 동자를 안은 지장의 모습이 대두되게 된다. 또는 육도를 맡아 교화하는 육존지장의 보습, 전쟁을 갈무리하는 승군지장상도 출현한다.
대승불교의 지장보살이 밀교에 와서는 태장만다라 지장원 가운데 9존의 중존 지장살타가 된다. 금강계만다라에 들어와서 밀호를 비원금강·여원금강비민금강이라 하며 금강당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일체중생이 마음에서 바라는 것을 가득 채우는 금강당보살로 변모하여 남방 보생여래의 서방에 위치하게 된다.
'금강정경'에는 ‘일체여래대마니보당’과 ‘묘보당즉금강당’으로 표현되며, 그 외에 ‘허공기보살’, ‘보당대보살’이라 한다. 백팔명찬에 ‘중생을 이익하게 함·금강의 광명·뛰어난 환희⋅보배깃발⋅대금강⋅금강의 보배창고’라는 명칭으로 그 덕이 찬탄된다.
'금강정경'에서 그 출생을 밝힌 문단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보당대보살삼매로부터 출생한 보배로 가지한 금강삼마지에 드시었다. 이것을 일체여래의 원만의요삼매라 이름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나오자마자 저 훌륭한 지금강자는 갖가지로 교묘한 색상과 장엄한 깃발을 이루고 출현한다. 그리고 저 위대한 보배깃발의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보당대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삼십칠존 가운데 일체여래의 대마니보당을 상징하는 금강당보살은 '금강정경'에 의하면 일체여래의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성취하는 삼매로부터 보당대보살신을 출생한다. 이 보살은 당을 들고서 언제나 사람들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어서 스스로 불도를 수행하여 얻게된 지혜를 중생들에게 널리 펼치고자 한다. 깃발을 높이 매다는 것은 멀리 있는 중생들이 이를 보고 자신들이 가야할 불도를 알려주는 활동이다.
'성위경'에는 금강당보살의 삼마지지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보당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보당삼마지지로부터 금강당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일체중생이 마음에서 바라는 것을 채운다. 돌아와서 한 몸으로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당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보생여래의 왼쪽 월륜에 머문다.”
경문에 나타나듯이 금강당의 광명이 두루 시방세계를 비춤에 따라 일체중생은 그 빛의 비추임을 받아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뜬다. 비로자나불이 진리의 경지에서 진리의 빛나는 가르침을 시방세계에 전하는 활동이 금강당보살로 표현된 것이다. '금강정경'에 ‘금강당인을 성취함으로 해서 곧 온갖 바라는 바를 원만하게 된다’고 하며, '약출염송경'에는 ‘금강당의 인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보배의 비를 뿌린다’고 그 결인의 공능을 설하고 있다. 금강당보살을 허공의 깃발이라고도 하는 것처럼 중생들이 하나라도 더 볼 수 있도록 오른손으로 장대의 끝에 여의주를 매달은 당을 가지고 허공 가득히 보배를 흩뿌려서 이 당을 보는 자 모두가 그 보배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져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다음과 같이 금당당보살의 인계를 설한다.
“먼저 양손으로 금강권을 하고 그 손바닥으로 행자의 얼굴을 향하고 좌우의 두 주먹을 곧바로 공중에 세우라. 이를 금강당인이라 이름한다. 온갖 중생이 애착하는 물건을 원만케 하기 위하여 이 계인을 결하고 진언을 송한다.”
여기서 금강당보살은 그 이름처럼 오른손으로 장대 끝에 보배의 깃발을 달고서 허공 가득히 나부끼는 모습을 보여서 이 깃발을 보는 자 모두가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불도를 성취하게 돕는 보살임을 알 수 있다. 유치환의 시에서 깃발은 이룰 수 없는 이상세계에 대한 간절한 염원의 상징이었으나 금강당보살이 들고 있는 당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이상세계, 즉 불국토 구현을 위해 높이 내걸은 깃발이다. 더 나아가 높이 돌출되어 대보리심을 표치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장엄구이기도 하다. 여의주가 매달린 이 깃발이 높이 높이 흔들려서 허공 가운데 휘날려서 이 깃발을 더욱 많은 중생들이 보고 깃발을 따라오게 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금강당보살의 당에 담겨있다.
삼실칠존이야기- 17.금강소보살
법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보살
기쁘거나 즐거울 때, 또는 우스울 때 나타나는 표정이나 소리를 웃음이라고 한다.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라고 하는 것처럼 잘 웃는 사람이 병에 잘 걸리지 않고, 병에 걸린 사람도 웃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빨리 낫는다고 한다. 웃음이 병원치료보다 나은 이유는 웃을 때 체내에서 병균을 막아주는 항체를 많이 생산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웃음은 혈액을 깨끗하게 하고 스트레스, 긴장, 근심을 해소시키며 육체를 활기차게 하여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장수 비결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많이 웃는 것이다. 생리학적으로 보아도 웃을 때 얼굴 근육을 가장 많이 움직이므로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할 것이다. 어느 신경정신과의사는 웃음은 전두엽이나 변연계같이 뇌의 특정 부위 한두 곳에서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뇌 속의 여러 영역이 함께 작용해 만들어진다고 하였다. 뇌 속의 웃음회로에서 명령을 내려서 40개의 얼굴근육이 빚은 종합예술이 웃음이다.
또한 웃음은 우리에게 힘을 주어 어떤 고난도 극복할 능력을 주며, 상호간의 대화와 마음의 통로를 열어준다.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거나 ‘웃는 낯에 침 뱉으랴’는 말이 있듯이 웃음은 막힌 소통도 뚫리게 한다. 항상 웃는 얼굴을 하면 긍정적인 사고로 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 행복하면 누구나 다 웃게 되지만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자주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저절로 행복해지는 비결을 알고 있는 셈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처럼 웃음이 주는 효과는 대단하다.
많은 동물 가운데에서 사람만 웃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동물의 경우 살아가는 데 웃음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사람들은 남들을 웃게 하는 유머가 있는 것을 미덕의 한 가지로 여긴다고 하는 것처럼 웃음은 생리적인 현상을 넘어 심리적인 반응이고 문화적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웃음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어서 여러 가지의 감정을 표현한다. 그 가운데에는 긍정적인 웃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웃음은 비꼬는 웃음이며 이와 유사한 웃음으로 조소, 냉소가 있다. 헛웃음은 표정변화 없이 소리만 내는 웃음이고, 너털웃음은 소리를 지나치게 내는 웃음이다. 코로만 웃는 코웃음과 눈으로만 웃는 눈웃음은 얼굴 가운데 일부분을 사용하는 웃음이다. 웃음에 소리가 없으면 미소라 하고 크게 웃으면 대소라 하며 떠들썩하면 홍소라 하고, 갑작스럽게 크게 웃으면 폭소라 한다. 이보다 큰 것은 파안대소가 있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 사용되는 웃음의 종류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긍정적인 웃음 중에는 파안대소가 가장 크다고 할 것인데 이보다 더 큰 웃음은 없을까? 큰 일을 성취한 자녀나 제자들을 보고 웃는 웃음은 소리가 크지 않더라도 큰 웃음인 것은 분명하다. 이보다 더 큰 것은 자신과 인연관계가 있지 않더라도 모든 중생을 향한 자비방편의 입장에서 중생들이 어두운 번뇌에서 벗어나 광명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고 웃는 불보살의 웃음일 것이다.
불교에서 웃음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석가모니부처님이 대중 앞에 말없이 들어보인 꽃을 보고 지은 마하가섭의 염화미소(拈華微笑)이다.
어느 날 석가세존이 제자들을 영축산에 모아 놓고 설법을 하였다. 그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세존은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말없이 집어 들어 보였다. 다른 제자들은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 그제야 세존도 빙그레 웃으며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 정법안장과 열반묘심, 실상무상의 미묘법문이 있으니 이것을 너에게 전한다.” 이렇게 하여 불교의 진수는 가섭에게 전해졌다. 이심전심의 정점에서 스승과 제자가 마주하는 이 미소야말로 불교에서 전하는 가장 큰 웃음이라고 할 것이다.
부처님의 웃음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서 통일신라 때의 얼굴모양수막새[人面瓦]라고 하는 기와막새에 새겨져 있는 웃음을 신라의 미소라고 하며, 고구려 불상인 연가칠년명금동삼존불(延嘉七年銘金銅三尊佛)의 소박한 미소도 중생들을 향하여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이 갖고 있는 온화하고 고졸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 하는데 최근에 일본인 소장자와 환수협상이 결렬되기는 했지만 7세기초로 추정되는 백제 금동관음상을 백제의 미소라 하는 이들도 많다.
불보살의 미소와 이에 화답하는 중생들의 웃음만큼 큰 웃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깨달음의 웃음이며 성취의 웃음이다. 밀교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웃음 그 자체를 의인화하여 금강소보살이라 하였다.
'금강정경'에서 ‘일체여래의 큰 웃음’과 ‘크게 기쁜 웃음은 금강소’라고 표현하는 금강소보살은 다른 경전에서도 ‘허공의 웃음 보살’, ‘언제나 환희하는 보살’ 등이라 한다. 백팔명찬에서는 ‘금강미소ㆍ마하소ㆍ마하희유ㆍ환희를 생함ㆍ금강환희’라고 그 덕을 찬탄하며, 밀호는 ‘환희금강’이다. '금강정경'에 금강소보살의 출생을 밝힌 문단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항상 환희하는 보살의 삼매로부터 출생한 보배로 가지한 금강삼마지에 드시었다. 이것을 일체여래의 환희삼매라 이름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나오자마자 저 덕을 갖춘 지금강자는 일체여래의 크게 웃는 모습을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일체여래의 희유한 사업을 행한다. 일체여래의 신통과 유희로써 일체세계에 널리 시여하고 나서 저 환희의 성품은 금강살타의 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하게 합하여 한 몸이 되어 항상 환희하는 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항상 환희하는 보살의 몸이 일체여래의 환희삼매에서 출생한 것처럼 환희의 성품이 금강소보살의 내용이다. 그것은 여래의 입장에서 불법을 설하는 데에 환희하고, 기쁘게 미소하여 널리 유정을 제도하는 지혜, 그리고 중생의 입장에서 그러한 설법을 듣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부처님과 함께 하는 기쁨,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울려서 한 몸이 되어 금강소보살의 형상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성위경'에서도 금강소보살의 웃음이라는 의미가 강조되어 설해진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소의 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이 삼마지지로부터 금강소인의 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성품이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은 중생들에게 평등한 무상보리의 수기를 수여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소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보생여래의 뒤 남쪽 월륜에 머문다.”
금강계만다라 남방월륜 가운데 보생여래의 뒤쪽에 머무는 금강소보살은 보생여래가 평등성지의 활동에 의해서 중생과 함께 비원을 이루고서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금강정경'에 ‘금강대소법에 상응하면 모든 부처와 함께 웃게 된다’고 하는 것처럼, 스스로 정진함에 따라 법열을 맛보고, 더 나아가 다른 이에게도 진리를 설하여 그들도 법열을 향유하게 하는 역할을 금강소보살이 수행한다. 이 보살의 덕을 나타내는 삼매야형은 두개의 삼고저를 겹친 사이에 입과 치아를 보이는 소저(笑杵)이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는 금강소보살의 결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 양손으로 금강권을 하고 입의 좌우에 두고 세 번 미소하라. 먼저 주먹의 앞면으로 입의 좌우에 두어 미소하고 다음에 주먹의 등으로 입의 좌우에 두어 미소하라. 후에 주먹의 앞면을 입의 좌우에 두어 미소하라. 이와 같이 시방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기쁨을 얻어 대안락을 받게 하라.”
이처럼 양손으로 금강권을 결하고, 솟아오르는 법열로 웃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행했던 공덕취류 사보살의 각각 특색있는 역할을 종합하여 일단 마무리짓는 모습이다. 즉 보생여래의 관정공양을 다시 넷으로 나누어 중생 모두에게 무한한 가치를 베푸는 행의 마무리이다.
첫째로 금강보보살은 중생들에게 본래 갖추고 있는 보배와 같은 성품을 일깨우는 관정의 사업을 행하며, 수행의 덕을 쌓고 만 가지 공덕의 보배를 가지는 경지를 나타낸다. 이어서 지혜의 광명으로 뚜렷하게 모든 세계를 비추어야 함을 금강광보살이 상징한다. 더 나아가 수행의 덕을 깃발처럼 높이 들고 널리 일체에 베푸는 것을 금강당보살이 널리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이미 보시의 이익을 입었으면 서로 선우가 되어 모두가 법열에 잠기게 하는 것은 금강소보살의 경지이다.
중생들이 큰 안락을 받아 환희에 넘치게 하는 보생여래의 오묘한 작용의 완성을 금강소보살로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약출염송경'에 ‘금강미소의 인계를 맺으면 속히 모든 부처님과 함께 웃게 된다’고 그 결인의 공덕이 찬탄된다.
삼십칠존이야기- 18.금강법보살
관세음보살의 변신
불보살 가운데 가장 넓은 지역에서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보살로 단연 관세음보살을 들 수 있다. 언제나 친근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관세음보살은 그 명칭 그대로 세간의 소리를 관하는 보살로서 어머니가 갓난아이의 칭얼거림을 세심히 관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생각건대 우리는 고난을 겪을 때에 마음이 약해지고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하며, 누군가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기도 한다. 그래서 중생이 황야와 같은 세속에서 현세의 고뇌로 괴로워할 때에 중생이 내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와 같은 누군가가 다가와 그 아픔을 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그때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분이 바로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야말로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아주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기억되고, 불려지며, 간절히 만나기를 바라던 대상이었으니 이것은 이 보살이 세간의 고뇌음성을 관하며 자비를 바탕으로 하여 현세 이익을 가장 많이 시여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관세음보살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 기인한다. 이 품은 관음경이라고 하는 명칭으로 우리나라에 친숙하며, 단독으로 간행되어 수많은 민중들에게 독송된 경이다. 보문품에는 자비깊은 관세음보살이 여러 방향을 향하여 다양하게 고뇌하는 우리를 구원하고, 사람들에게서 위난을 제거해주고, 이익을 주는 점이 강조되어 있다.
“한량없이 많은 백천만억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당할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한 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즉시에 그 말을 관하고 모두 해탈케 하느니라.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니는 이는 큰 불속에 들어가더라도 불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보살의 신통력 때문이며, 혹 큰 물길에 빠져 떠내려가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곧 얕은 곳에 이를 것이다. 또 수많은 중생이 금⋅은⋅유리⋅자거⋅마노⋅산호⋅호박⋅진주 등의 보배를 구하기 위해 큰 바다에 들어갔을 때, 갑자기 큰 폭풍이 불어와서 그 배를 나찰 귀신의 나라에 이르게 할지라도, 그 가운데 누구든지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이가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까지 다 나찰의 액난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연으로 관세음이라고 하느니라.”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를 서원으로 하는 보살로서 자비의 가르침과 광명의 행을 성취하여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성숙하게 하며, 항상 모든 부처님처소에 머물면서 사섭법으로 중생을 받아들여 제도한다. 그의 서원은 오직 일체중생을 섭취함에 있다. 이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와 빈궁의 공포 등 현실적인 여러 가지 고통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등 정신적인 번뇌의 모든 장애들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아미타불의 왼쪽 보처로서 아미타불의 뜻을 받들어 중생을 보살피고 도와줄 뿐 아니라,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자들을 인도하는 구실을 담당한다. 관세음보살에게는 관자재보살이라는 다른 명칭이 있는데, 자비를 생각할 때는 관세음보살이지만 지혜를 생각할 때는 관자재보살이다.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 등을 비롯하여 많은 경론에 그 명칭이 보이는 관자재는 중생의 근기를 관찰함에 있어서 자재하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또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다라니경'에서 ‘관세음보살은 불가사의한 위신력이 있어서 이미 과거무량겁 중에 부처가 되었으며 정법명여래라 칭한다. 대비의 원력을 펼치어 일체 보살을 일으켜서 모든 중생을 안락하고 성숙케하고자 보살을 나타낸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이외의 다른 경전에서도 관세음보살의 전생담으로서 주로 과거 오랜 겁 이전에 이미 부처님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미 성불한 부처님으로서 관음여래라든가 혹은 정법명여래라 칭해지는 것이다.
어느 경전에서도 볼 수 있는 관세음보살의 공통점은 세상을 구하고 생명있는 자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부처의 절대적 자비심인 무연대비를 중생에게 베풀어서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권능을 실행한다. 그러므로 모든 불행한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송하고, 항상 마음 속에 새겨서 공경하고 예배하면 구경에는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수능엄경'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제가 가지가지 형상을 나타내어 가지가지 진언을 외우며, 그 형상과 그 진언이 두려움 없음을 중생에게 베푸는 것이므로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국토에서 저를 이름하여 시무외자라 합니다’ 라고 하는 것처럼, 관세음보살은 현실에 중생의 음성을 듣는 절대자로서 세간 사람들의 호소를 계기로 하여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살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에게 중생구호의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문품에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보살로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방편의 힘으로 33응신을 나타내어 중생에게 불법을 설한다고 한다.
“선남자여, 만일 어떤 세계의 중생으로서 부처님 몸으로 제도될 이는 관세음보살이 곧 부처님 몸을 나투어 법을 말하고, 벽지불의 몸으로 제도될 이는 벽지불의 몸을 나투어 법을 말하며, 성문의 몸으로 제도될 이는 곧 성문의 몸을 나투어 법을 말하고, 범천왕의 몸으로 제도될 이는 곧 범천왕의 몸을 나투어 법을 말하며, 제석천왕의 몸으로 제도될 이는 곧 제석천왕의 몸을 나투어 법을 말하고, …장자의 몸으로 제도될 이에게는 곧 장자의 몸을 나투어 법을 말하느니라. 거사의 몸으로 제도될 이에게는 거사의 몸을 나투어 법을 말하고, 관리의 몸으로 제도될 이에게는 곧 관리의 몸을 나투어 법을 말하며, 바라문의 몸으로 제도될 이에게는 곧 바라문의 몸을 나투어 법을 설하느니라.”
이처럼 관세음보살에게는 대자대비의 활동과 함께 상대방에 맞추어 33가지 몸을 나타내어서 불법을 설한다는 묘용을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변화관음으로서 33관음이 있어서 오랜 세월동안 대중들의 기원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묘용의 부분이 강조되어 밀교의 금강계만다라에서는 법을 설하는 금강법보살로 변신하여 등장한다. 금강법보살은 '금강정경'에서 일체여래의 대청정법과 능관자재금강법으로 표현되며, 기타 금강안보살, 관자재보살이라 한다. '백팔명찬'에서는 금강연화ㆍ뛰어난 청정ㆍ관자재ㆍ금강의 오묘한 눈이라 하여 그 덕을 찬탄하며, 밀호는 청정금강이다. '금강정경'에서 그 출생을 밝힌 문단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은 다시 관자재대보살의 삼매로부터 출생한 법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드시었다. 이 명칭을 일체여래의 대법삼매라 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나오자마자 저 덕을 갖춘 지금강자는 자성이 청정하여서 모든 것이 평등하다는 지혜에 잘 통달한 까닭에 금강살타삼마지 중에서 정법의 광명을 이루고 출현한다. 저 관자재의 성품은 금강살타의 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관자재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이 관자재보살의 몸을 출생하는 삼마지는 일체여래의 대법삼매로서 법을 설한다는 활동이 중시되어 있다. 관자재보살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하는 성격이 금강계만다라에 들어와 금강법보살로 계승된 것이다.
'성위경'에는 금강법보살의 광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법청정무염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 금강법청정무염삼마지지로부터 금강법광명을 유출하여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일체중생의 오욕에 물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청정한 것이 마치 연화와 같아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돌아와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법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관자재왕여래의 앞쪽 월륜에 머문다.”
이처럼 금강법보살은 서방 월륜 가운데 무량수여래의 동쪽 월륜에 머물러 중생을 연화와 같이 청정하게 지켜주려는 뛰어난 지혜의 활동을 전개한다. '제불경계섭진실경'에서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을 싫어 떠나게 하고, 출세간의 감로성에 들게 한다”는 금강법보살의 활동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세간의 욕락을 여의고서 보리심을 발하며, 결국 그 수행이 쌓여서 법열에 잠겨 그 법열을 향수하며, 더 나아가 중생으로 하여금 출세간의 깨달음에 들게하는 것이 이 보살의 묘용이다.
'약출염송경'에 금강화의 인계를 결하면 금강법을 보게 된다고 무량수여래의 공덕을 분담한 금강법보살의 결인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그와 같은 금강법보살의 성격과 묘용을 상징하는 존형과 삼매야형으로 연꽃이 부각되어 표현되어 있다.
삼십칠존이야기- 19.금강리보살
번뇌를 칼처럼 끊는 보살
인간이 칼을 만든 역사는 적어도 250만년 이상이라고 한다. 칼은 무기, 도구로 활용되며, 평소 요리를 하거나 식사를 할 때 무엇보다도 자주 사용되는 도구이다. 총이 등장하기 전에 옛날 전쟁에서 모든 무기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 바로 칼이었다. 이 칼은 칼몸이 휘어지고 한쪽에만 날이 있는 도(刀)와 칼몸이 곧고 양쪽에 날이 있는 검(劍)으로 구분된다. 칼은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찔러서 부수는 역할을 하기에 칼에는 끊어없앤다는 개념이 들어간다. 이러한 칼의 이미지를 불교에서 활용하여 번뇌를 부수는 뜻에서부터 해탈의 표치로서 여러 존의 삼매야형으로 사용된다. 그 칼을 지물로 하는 대표적인 보살이 문수사리보살이다.
문수사리라는 명칭에서 문수는 묘의 뜻이고, 사리는 머리·덕·길상의 뜻이므로 지혜가 뛰어난 공덕이라는 뜻이 된다. 이외에 묘음보살·문수동진·유동문수 등의 이명이 있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4대보살이 하나로 보현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불의 보처로서 왼쪽에 있다. 이 문수보살은 초기 대승 경전인 '아미타경'과 '무량수경' 또는 '법화경'에 문수사리법왕자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그 후 문수는 모든 보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보살로 활약하였다. '방발경'에 의하면 석가도 영겁의 과거에 일찍이 어린아이였을 때 문수의 안내로 불도에 들어섰다고 하여, ‘문수는 불도 중의 부모’라 설하고 있다. 또한 '수릉엄삼매경' 하권에 과거 구원겁에 용종상여래가 있었는데, 남방의 평등세계에서 무상정등각을 이루고 수명 440세에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그 부처가 곧 지금의 문수사리법왕자이다. '열반경'에서는 이 보살이 사위국 다라마을에서 덕망있는 바라문집안에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에 집이 연꽃처럼 변화했다고 한다. 그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출생하여 후에 석가모니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출가하여 도를 닦았다고 한다. '대보적경' 6권에 이 보살은 옛적 나유타아승지겁 이래로 18종의 대원을 발하여 불국을 엄정하여 미래에 성불하여 보현여래라 칭하며 그 불토는 남방에 있고 이름을 청정무구세계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유마경'에서 석가모니불을 대신하여 유마거사를 문병하여 불이의 법문을 펼친 문수보살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외에도 대승경전 가운데에 석가모니불이나 그 제자들과 문답하는 상대방으로 문수보살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불멸후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보기도 하고, '반야경'을 결집 편찬한 보살로도 알려져 있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의 협시보살로서 지혜의 좌표가 된다. 보현보살이 세상 속에서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띠고 행동할 때 문수보살은 지혜의 좌표가 되었고, 이 두 보살은 항상 서로의 지혜와 실천행을 주시하고 사랑하면서 스스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문수보살의 형상은 승려의 모습, 또는 동자상, 보관을 머리에 쓴 것도 있고, 대좌도 백련좌가 있으며, 공작을 탄 모습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지혜의 칼과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전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임을 알 수 있다. 지혜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곧 마음에 아무런 분별심이나 차별의식, 우열관념 등이 없는 밝음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나라에서도 보살이라 하면 자비를 상징하는 관자재보살 다음으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언급된다. 이것은 문수보살에 관한 신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결과이다. 그 신앙의 근거는 '화엄경'에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동북방 청량산을 들고,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에는 중국에 다섯 봉우리의 산이 있다고 설하는 데에 기인한다. 이로부터 중국 산서성의 청량산(오대산)이 문수의 영지로 유명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불공삼장 등이 주청하여 칙령으로 천하의 사찰 안에 각기 한군데 좋은 곳을 택하여 대성문수사리보살원을 설치하고 문수의 소상을 안치하게 하였다. '송고승전' 4권에도 규기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상을 옥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기록은 모두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중국에서 성행한 문수신앙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 오대산에 있다고 하여 지금도 그곳의 상원사는 문수를 주존으로 모시고 예배하며 수행하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문수신앙을 들여온 이는 자장이며, 이밖에도 신라의 경흥이 문수의 경책을 받은 일이나 연회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야기, 신라의 태자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한 오방위신앙을 정립시킨 것, 경순왕이 문수보살의 화신인 줄 모르고 공양올리기를 꺼린 설화, 문수보살과 함께 수도했던 고려 고승 3인에 얽힌 설화, 세조의 병을 고쳐준 문수동자의 설화, 문수동자의 경책을 들은 환우화상이야기, 땡추로 변화한 문수보살, 하동 칠불암의 문수동자 설화 등 많은 이야기가 전래되고 있다.
밀교에 수용된 문수보살은 '금강정경'에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새롭게 출생한다.
“이때 세존은 다시 묘길상대보살삼매로부터 출생한 법가지의 금강삼마지에 드시었다. 이를 일체여래의 대지혜삼매라 이름한다. 곧 일체여래심이다. 자심으로부터 내어서 이 진언을 송한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나오자마자 곧 저 구덕지금강자는 위대한 지혜의 검을 이루고 출현하고 나서 저 묘길상의 성품은 금강살타삼마지에서 아주 견고한 까닭에 합하여 한 몸이 되어 묘길상대보살의 몸을 출생한다.”
위 인용문에 의하면 금강리보살의 출생 근거는 일체여래의 대지혜삼매이며, 이 삼매는 묘길상보살, 즉 문수사리보살의 삼매로부터 출생한다.
다시 '성위경'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금강리검반야바라밀삼마지지를 증득한다. 자수용인 까닭에금강리검반야바라밀삼마지지로부터 금강의 날카로운 검의 광명을 유출하여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고, 일체중생의 번뇌를 끊고 모든 고뇌를 떠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져서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하여 금강검보살의 형상을 이루고 관자재왕여래의 오른쪽 월륜에 머문다.”
이처럼 그 지혜의 측면을 계승하여 날카로운 검으로 상징하기에 금강리를 금강검이라고도 한다.
'금강정경'에는 ‘일체여래대지혜’와 ‘묘길상지금강리’로 표현되며, 기타 ‘묘길상보살’, ‘금강수지보살’이라 하고, '백팔명찬'에는 ‘마하연나·마하기장·문수사리·금강장·금강심심·금강각’이라 하고 밀호는 ‘반야금강’이다.
'삼십칠존심요'에는 금강리보살과 동체인 문수사리보살의 역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문수사리대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원만히하여 지혜가 끝이 없다. 지혜의 검을 쥐고서 번뇌의 그물을 자르며, 네 가지 마군과 이승의 견고한 집착의 마음을 없애고 머무는 바가 없다. 공이나 유에도 머물지 않는다. 영원히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끊고 일체유정의 번뇌의 마음을 잘 끊어서 언제나 무위에 주하고 지혜가 원명함은 곧 문수반야의 지혜이다.”
'인왕반야다라니석'에는 ‘금강리란 반야바라밀금강의 날카로운 검으로 번뇌의 싹을 끊어버린다. 금강리는 문수사리보살이라 이름하며 이 까닭에 이 보살은 손에 금강검을 지니고 있다고 하며, '이취석'에는 이 금강과 같이 견고한 대지혜의 날카로운 금강검이 바로 반야바라밀다 지혜의 검으로 삼해탈문에 머물어 진여·법신·상락아정을 현현한다. 문수사리보살에 의하여 이 지혜를 증득함으로 해서 문득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게된다고 표현되어 있다.
'일체비밀최상명의대교왕의궤'에서는 “대승의 미묘한 지혜 지극히 날카로와 모든 번뇌의 종자 끊고 지혜의 장애 깨뜨림도 역시 그러하니 이것이 바로 금강리보살이다.”라 하고 있다. '약출염송경'에서도 “금강장검계를 결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일체의 고를 끊는다”고 하듯이, 이 반야의 날카로운 검은 일체중생의 모든 번뇌를 끊어버리고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금강리보살의 활동, 그 자체이다. 이러한 표현은 금강계만다라에서 서방월륜 가운데 무량수여래의 우측, 곧 남방에 머무는 금강리의 성격과 묘용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금강리보살의 오묘한 인의 가지로 말미암아 반야의 깊고 깊은 지혜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금강리보살의 존형은 만다라에서 검을 든 모습으로 표현되며, 그 삼매야형은 연꽃 위의 검이다.
출처 : https://www.milgyonews.net/news/news.php?idc=29&idp=72&pag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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