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화』속의 비보풍수
----- 이 원고는 지난 8월 20일에 한양대학교에서 있었던 "풍수대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 그대로의 원문입니다
안종선
그린농업대학 강사, 서일풍수학회 학회장
1. 머리말
우리사회에는 사람들 대다수가 인정하거나, 널리 인식하고 있는 독특한 사고가 존재하고 있다. 각 지방, 혹은 일정 지역에 살고 있거나 태생인 사람들에 대한 지극히 통속적이고도 널리 알려져 인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한 사회통념이 바로 그것이다.
지극히 통속적이지만 강원도 하면 산골이라는 사고처럼 일정한 지역에 대해 떠오르는 그런 통념이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우리 사회에서 안동(安東)사람이라고 하면 으레‘양반(兩班)!’하고 알아주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지극히 통념적인 사고이다.
안동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를 이어온 양반사회의 잔존이나 역사의 흐름이 멈춘 듯 여겨지는 느낌을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물론 안동만이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울 북촌(北村), 봉화(奉花), 전주(全州), 여주(麗州), 아산(牙山) 등이 이 시대에도 양반을 생각하게 하는 지명이다. 그런데 굳이 안동을 들먹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안동이라는 지명이 조선시대를 거슬러 양반문화(兩班文化)가 이상적으로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안동이라는 지명은 애써 하회(河回)마을을 들먹이지 않아도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안동이라는 지명이 내포하고 있는‘양반’이라는 생각은 안동지역을 벗어나도 마치 인격적으로 명품으로 느끼도록 하는 독특한 느낌을 준다. 이 사고는 지난날 이곳 안동이 양반골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안동양반이라니! 어디 지금도 양반이 존재하는 세상인가? 양반이라는 말은 유교(儒敎)를 국시(國是)로 삼아온 조선사회에서 지배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양반이라는 말이 있었을 테지만 조선시대야말로 진정한 양반의 시대였다. 양반과 상놈, 적서차별(嫡庶差別)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안동양반이라니! 그처럼 안동양반이라는 사고는 예로부터 안동이 유교문화의 고장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안동은 유교 문화의 꽃을 피운 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역이다. 조선은 국시(國是)를 유교로 삼았고 안동은 유교라는 국시를 따라 살아온 양반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고장이다. 지금도 안동에 가면 조선 시대를 만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경주에서 신라를 느끼듯!
안동은 유교 문화의 꽃이 핀 고장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안동에서 우리는 불교문화(佛敎文化)와 고래로부터 전래된 민속(民俗), 그리고 유교문화(儒敎文化)를 함께 볼 수 있다. 조선의 유교사회에서 불교는 억제해야할 대상, 혹은 제압하거나 유교와 비교해 억눌러야 하는 사상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는 말이 나왔다. 물론 그 바탕에는 불교가 고려(高麗)의 중심사상이었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안동지방의 유교문화를 깊숙이 살펴보면, 독특한 불교문화의 영향이 두껍게 드리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하게 안동이라는 고장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그 대표적인 예가 안동에 무수히 남아있는 불교문화재들이다. 이 불교문화 속에는 유교사회에서 요술(妖術)이나 치졸(稚拙)하다고 주장했던 비보풍수(裨補風水)가 숨어있음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비보풍수는 불교라는 색체를 지니고 있는데 이 역시 신라와 고려를 이어온 전기(前期)의 역사를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간(全其間)을 살펴보면 민초들의 사회와는 달리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양반사회에서 표면적으로 비보풍수는 도선(道詵)의 풍수비술이라 하여 배척당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선의 풍수비법이 불교라는 종교의 색체를 띄고 있어 유교 숭상의 조선과 어울리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유학자들은 비보풍수를 요술이니 비술이니 하며 배척하였지만 양반사회에서 비보풍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대단히 이율배반적이다.
비보풍수의 근원은 도선국사이고 그는 불교 승려였다. 표면적으로 불교의 색체를 지닌 비보풍수를 배척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사찰이 안동에 남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표면적으로 풍수가 불교의 색체를 지녔음을 무시함인가? 봉정사(鳳停寺)의 극락전(極樂展)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최고(最古)의 건축물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888번지에 있는 개목사(開目寺)의 본전인 원통전(圓通展)은 보물 제242호인 바,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시대에 현존 문화재로 보전되는 건물이 건립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뿐인가? 안동에는 우리나라의 전탑(塼塔)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벽돌로 쌓은 전탑이 안동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안동의 시가지 곳곳에 절터가 널린 듯 많은 것은 안동이 유교문화 이전에 불교가 뿌리 깊었던 고장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더불어 이 전탑은 단순히 종교 신앙에서 그치지 않고 비보풍수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도 무시할 수 없다.
봉정사 극락전처럼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이 있다는 사실 못지않게 불교신앙의 주요 대상인 탑의 양식이 독특한 전탑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탑문화의 주류인 석탑(石塔)이 아니라 다른 지방과 달리 전탑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안동의 불교신앙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독창성을 지녔다는 증거이다.
안동이라는 고장의 문화 접점에서 풍수지리는 유교와 불교의 틈에서 꽃을 피움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하회마을의 풍수림(風水林)이라 이야기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유교사회에서 풍수지리는 겉으로 보이는 음택풍수로 대별되는 견실함과 달리 일부 풍수이법은 매우 불안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유교사회에서 견실한 지위를 누린 풍수지리는 음택풍수이고 그 대표적인 불안한 지위가 바로 비보풍수이다. 비보풍수가 핍박을 받은 사례는 여러 가지 자료와 사실로도 증명이 되고 있다.
하회탈이 증명하듯 안동은 우리 민속과 양반문화의 접합점이다. 고래로 전해져온 민속문화와 불교문화, 유교문화가 뒤섞여 있거나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발전한 곳이 바로 안동이다. 이를 안동문화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 그 안동문화의 저변에는 비보풍수라는 유교사회에서 치졸한 문화로 치부했던 문화도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을 이끌어온 양반 문화의 깊숙한 저변에는 풍수지리라는 사상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풍수지리사상은 왕가(王家)와 왕실(王室), 혹은 양반의 전유물이 아니라 바로 민간 신앙에까지 깊게 뿌리내린 사상이었다.
양반골로 대변되는 안동의 문화 가운데 비보풍수로 대별되는 문화가 성진골(聖眞谷:일명 聖智谷)의 비보풍수 관련 전통이다. 성진골은 신라 때 성진도사라고 하는 승려가 성진사(聖進寺)라고 하는 절을 지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형상이 여성의 자궁 모양을 하고 있다는 풍수지리적 인식 때문에 공알산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공알산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성진골은 경주(慶州)의 여근곡(女根谷)과 흡사하게 생겼다. 이러한 점에서 경주 인근의 여근곡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더구나 음핵에 해당되는 공알바위가 있고 골짜기 아래 성재정(聖齋井)이라고 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서 아직도 식수로 사용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역시 경주의 여근곡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완벽하게 음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분석, 혹은 치부할 수 있다.
| 경주의 여근곡(女根谷) 전국적으로 이러한 지세는 많지 않지만 없지도 않다. 이러한 지세는 음란한 것으로 여겨져 비보풍수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유교사회에서 여인들의 생활상으로 드러나는 성향은 매도되거나 부정한 것으로 치부될 수 있었다.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여인은 정숙하고 행동거지는 밖으로 들어나지 않아야 했으며 행실의 정숙은 가문의 미덕이었다. 일정 지역의 여인들이 보이는 행실은 그 고장의 인상을 결정짓거나 지역의 특색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인들의 성향에 따라 가문이 치욕을 당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이기도 했다.
안동의 양반들은 성진골의 여근형국(女根形局) 때문에 안동부의 여성들이 바람이 많이 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안동의 지세에서 성진골만이 그러한 기운을 지녔다고 믿었단 말인가? 양반 마을에서 여인들의 행실이 문제가 된다면 치욕적이고 지역 전체적으로 부끄러운 일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특단의 비보가 필요했다.
근엄한 유학자들이었지만 선택은 비보풍수였다. 돌로 큰 남근석(男根石)을 3개나 깎아서 그 맞은편에 세웠는데, 이 남근석은 일제강점기 이후 사라져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지금은 개발로 인해 지형도 변화를 가져왓다. 안동 신세동 부근이 바로 이곳인데 이제는 완벽한 여근곡을 볼 수 없다.
남근석을 세우는 비보풍수는 단지 안동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거대한 남근석을 세운 것은 남근석의 양기를 통해서 여성의 음기를 다스릴 수 있다고 믿은 까닭이다. 이는 단순히 어느 한 곳, 한 고장만의 비보방식이 아니고 국가 전체적인 현상이며 다양하게 사용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와 같은 비보는 반복되고 있다.
| 제천 무암사의 남근석 남근석은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이 있다. 남근석은 자손을 바라는 희구의 목적으로 경배의 대상이지만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남근석은 여근곡이나 음기가 강한 곳의 비보풍수로 배치되거나 설치되엇다. |
풍수지리 가운데 땅의 기운이 지나치게 강하면 설기(洩氣)의 수법으로 약화시키고 지나치게 약하면 다양한 방법으로 돋우어서 지세를 보완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일을 특히 비보풍수라 한다. 따라서 성진골의 음기를 약화시키기 위해 남근석을 세운 것도 비보풍수의 한 가지 방법이다. 다른 고장에도 공알산이나 공알바위에 대하여 남근석을 세워서 비보한 역사가 적지 않다. 지역의 특색에 따라 여근바위, 남근바위, 공알산, 샘골, 여근곡, 남근곡 등의 이름을 지닌 곳에는 반드시 비보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남근바위를 세우거나 솟대, 혹은 장승을 세우고 때로는 탑이나 돌을 쌓아 두기도 한다.
남근석을 비보풍수로 다양하게 이용된 것은 사실이지만 안동의 성진골처럼 남근석을 3 개씩이나 깎아 세워서 비보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성진골의 음기가 강하다 여긴 것이지만 안동의 양반문화속에서도 비보풍수는 강세를 떨쳤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성진골의 음기가 지나치게 강하다고 생각했음인가? 남근석으로 부족했는지 안동에서는 하늘로 솟아 있는 많은 사물에 남근이라는 인위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 흔적이 보인다. 성진골 맞은편에 서 있는 전탑이나 당간지주, 기차역의 취수탑, 더 나아가 귀래정이라고 하는 정자까지 남근으로 해석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뾰족한 모든 것을 남근으로 해석함으로서 음기에 대항한다고 믿은 것이다. 장승이나, 촛대형상의 바위가 남근을 의미하한다고 믿으며, 자식을 얻기 위해 남근석이나 촛대바위에 기도하는 것은 이 뾰족한 사물이 양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전형적인 비보풍수의 한 형태이지만 조선시대에 유교문화를 표방하는 조선의 양반사회에서 비보풍수가 늘 환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유교문화 속에서 풍수지리는 음택과 양택이라는 거대한 뿌리를 형성하며 자리를 잡았다. 신라시대부터 자리를 잡은 풍수지리가 고려시대에 왕권강화와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조상을 모시고자 하는 유교사상이 극대화 되어 결국 조상숭배(祖上崇拜)의 정신에 도달하였고 이는 결국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는 풍수지리의 사상과 부합하여 음택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양택의 경우도 다르지 않아 매우 발전을 이루었는데 고려시대보다는 양택(陽宅)의 중요성이 음택(陰宅)에 밀린 감이 없지 않다.
역사를 더듬어 유교문화가 조선을 대표한다면 풍수지리의 적용 또한 조선 문화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민간의 사상으로 널리 펼쳐진 비보풍수가 사실은 양반들의 문화 속에도 자리하고 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2 조선풍수의 재검토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상의 경향은 그 속에 그 시대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으며, 현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즉 어떤 시대를 살펴보기 전에 당 시대 사회의 방향성을 부여하는 사상을 이해한다면 당시 현실에 보다 더 근접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전기를 따라 은연중으로 드러나는 사상뿐 아니라 그 국가와 사회가 처한 상황에서 드러난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는 바로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물줄기인 것이다.
한 시대의 사상은 단순히 따분한 학문이 아닌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종교는 그 시대의 역사를 대변해 주기도 한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조선시대의 뿌리 깊은 풍수사상을 살펴볼 당위성이 있다.
조선 사회는 유교를 국시로 삼았지만 풍수라는 사상을 무시하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임에 틀림없다. 또한 풍수를 논하자고 한다면 전대(前代)의 역사와 종교 사상을 무시하거나 백안시할 수 없음도 아이러니다.
조선은 불교를 배척했지만 공존하며 역사를 거슬러 온 풍수사상을 완벽하게 무시하거나 저버릴 수는 없었다. 역사상 풍수와 불교는 융합적인 문화형태로 교섭되어 사찰의 입지 및 기능, 사회공간적 이데올로기의 형성, 풍수의 도입 및 확산, 비보사탑설의 전개 등에서 영향을 주었다. 이에 비교하여 조선의 유학자들은 풍수지리의 사상에서 불교라는 색체를 배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비보풍수를 업수이 여겼다.
풍수지리와 불교는 신라(新羅) 하대에 이르러 중국으로부터 말려온 선종(禪宗)의 전래를 계기로 본격적인 교섭을 시작하였고, 나말려초(羅末麗初)에는 사회변혁을 이끄는 공간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걸쳐서는 왕권(王權)의 중앙집중 및 지방의 효율적인 통어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이념적 장치로 적극 활용되었다.
조선은 유교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건국 당시부터 불교 사상, 풍수지리를 배척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성(漢城)에 왕궁(王宮)을 건설하고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 왕궁의 좌향(坐向)등에서 이미 불교와 풍수지리의 사상을 거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조선시대에 와서 정치지배권에서의 불교와 풍수의 교섭은 쇠퇴되고 민간부문에서만 미약하게 유지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불교는 민간의 종교로 스며든 것처럼 보이지만 때때로 왕권과 교섭하였고 왕가의 내부에서도 그 맥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왕릉 근처에는 원찰(願刹)이 자리하고 있었고 왕비들은 물론이고 궁궐내부에서도 간혹 불교를 추종하는 인물들이 나타나고 때로는 사찰을 세우기도 한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한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이 불경(佛經)을 번역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조선전기의 불교는 풍수지리와 응결되어 있었으므로 불교적 색체가 가셔지지 않은 것이라 여기는 유학자들에게 좋은 공격의 근거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권력과 풍수지리가 결탁한 데에는 내적인 이유가 있다. 풍수지리의 핵심이론인 동기감응(同氣感應)이 갖는 선동성과 신비성, 그리고 혁명성이 가장 큰 원인이라 볼 수 있다. 동기감응 이론은 풍수지리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동기감응의 이론은 유학자들에게 조상을 숭배하면 발복한다는 당위성과 기대를 주었다.
인간과 자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아우르는 천지간에는 일정한 기가 충만하다. 이를 각각 천기(天氣), 지기(地氣), 인기(人氣)로 나누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피고 적용하는 것이 바로 풍수지리이다. 그 기를 매개로 인간과 자연이 감응하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감응한다는 게 풍수지리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중 하나인 동기감응 이론이다.
이 동기감응이야말로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풍수지리를 활용할 기회를 주었다. 특히 동기감응의 이론은 유교에서 강하기 주장하는 조상숭배의 정신과 부합되었다. 이 동기감응의 이론은 유교의 바탕인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과 결탁하여 발음풍수(發蔭風水)로 발전했음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풍수지리가 완벽하게 전대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신라와 고려를 이어 꽃피워진 풍수사상이 조선으로 오면 미세한 변화를 보인다. 고려의 왕건에게 받아들여진 풍수설은 대개 불교의 정신과 융합된 비보압승(裨補壓勝)으로 대표되는 양택풍수의 양상을 띄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려시대의 묘가 대부분 실전되고 있는 현실을 통하여서도 확인될 수 있다.
만약 고려시대에도 음택풍수가 발전하였다면 고려시대의 분묘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그토록 풍수지리가 성세를 이루었음에도 전해지는 음택은 그다지 많은 것이 아니다. 그러라 현존하여 전해지는 고려시대의 묘역중 상당수는 명당으로 조영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명당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음택보다는 양택을 중요시 한 것이다.
만약에 고려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음택풍수 의식이 일반화되어 있었다면, 묘지를 수호하는 의식도 상당히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러나 묘지 수호 의식은 조선시대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고려시대가 음택풍수에 치중하지 않은 이유는 불교사회였다는 점도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려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의 풍수에서 음택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려시대의 풍수와 조선시대의 풍수가 일정한 차이를 가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고려의 풍수는 궁궐을 짓거나 성을 쌓는 등의 양택 풍수가 일반화된 양상이라면 조선의 풍수는 양택풍수보다는 음택이 가일층 발전하여 묘지를 신봉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는 가히 풍수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이 경우에 있어서는 특히 음택풍수가 중심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음택풍수는 부모의 유골(遺骨)이 어떤 기운을 얻느냐에 따라서 후손들이 어떤 복락을 받느냐가 결정된다는 의식을 기본 골격으로 한다. 이를 조상숭배의 정신으로 승화, 혹은 변화시킨 것이 조선의 음택풍수이다.
조선시대 조정대신들 사이에선 "입신(立身)은 과거시험으로 하고, 출세는 왕릉풍수로 한다"고 했다. 왕이 승하하면 세자가 새로운 왕이 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선왕의 왕릉을 조성하는 일이다. 이에 세로운 왕은 왕릉 조영을 위해 풍수지리에 뛰어난 인재를 찾아 왕릉 수축을 하게 된다.
선왕과 신왕의 교체기에 새로 즉위한 왕에게 잘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왕릉공사였기 때문이다. 새로 즉위한 왕의 첫 번째 일거리가 왕릉조영이었으니 선왕의 무덤을 잘 선택하는 기술을 가진 대신에게 신왕이 큰 점수를 주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신왕이 즉위하면 이러한 왕릉수축과정에서 새로운 인재의 등용이 이루어지고 관직이 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아무튼 조선의 음택풍수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으며 고려의 양택풍수는 일본으로 전파되어 재난과 병마를 예방하는 방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조선은 풍수지리에 의거해 왕릉을 조성해왔다. 이는 왕권을 대대손손 누리려는 마음에서다. 유교로 입신하고 풍수로 출세한다는 공식이 성립된 것도 이에 기인한다. 즉 왕의 승하와 새로운 왕의 등극에서 풍수지리를 잘 알았던 인사들이 출세를 한 것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으며 왕릉 조영에 문제가 있으면 그 당시 왕릉 조영에 참가했던 많은 관리들이 위해(危害)를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왕릉풍수만큼이나 양반들도 개개 가문에서 음택풍수를 중시했다. 조선시대가 특히 음택풍수를 중심으로 하여 풍수의 논리를 발전시켜 나간 것은 가족제도, 가문의식의 발전과 일정한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라고 하겠다. 조선시대의 양반 사대부들은 개인의 삶이 아니라 가문의 삶을 살았으므로, 묘지를 중심으로 하여 선대의 음덕이 후손에게 미치는 것은 어떤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조선반도의 주산(主山)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서 큰 산맥 작은 산맥을 생성하여 태백이 되고 소백이 되며, 산머리가 흘러내려 그 지맥이 포옹하여 주는 핵심적인 땅이 영남일대이며, 여기에 또한 낙동강의 긴 흐름이 휘돌고 꺾여서 풍수의 형국을 형성하고 있는데, 바로 그 핵심적인 땅의 중앙은 안동(安東), 예안(禮安)이다. 이는 실로 영남에 많은 인재가 배출하여 눙히 국가의 대사를 책임 맡아 행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안동, 예안의 한 지역에 인재들이 무수하게 배출될 수 있었다는 이유가 된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보이는 일절이다. 영남(嶺南) 남인(南人)의 학맥을 잇는 사람으로써 이익은 능히 이러한 평가를 할 만 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많고 많은 영남의 지명중 이익은 굳이 왜 안동과 예안을 들먹였을까! 이는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안동은 당시에도 대단한 양반골이었고 많은 영유(名儒)와 정계에서 활동한 관료들을 배출한 고장이며 예안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익의 시선은 남다른 면에서 안동과 예안을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풍수의 맥에서 보아 안동과 예안의 인재들이 등용된 이유를 그러한 맥락에서 분석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이러한 사고와 평가, 혹은 인식이 비단 이익만의 시선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이러한 평가는 비단 이익의 의식 속에서만 살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는 일반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즉, 한성이라는 지역이서도 안동과 예안은 양반골이라는 인식이 강했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안동양반이라는 인식을 만들어 낸 이유는 아니었을까?
조선의 풍수는 고려시대와 달리 음택풍수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양반들은 풍수지리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많이 익혀 사용하였다. 양반골로 지칭되는 안동을 예로 든 것은 당시 양반의 사회상을 보여주고 대변될 수 있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3 비보풍수
풍수지리에는 '비보(裨補)'라는 개념이 있다. 풍수지리는 용도에 맞는 땅을 찾는 것이다. 단순한 해석으로만 적용한다면 풍수지리란 바람과 물을 다루는 것은 물론이고 총체적으로 자연을 용도에 맞게 활용한다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나 인지(認知)에 따라 살펴보면 자연도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자연의 조화라 해도 모자라거나 넘침이 인간의 욕심에 부합하지 않았다. 결국 이 모자라고 부족한 곳을 채우고 메우며 넘치는 곳은 억압하거나 백안시해야 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비보이며 억압풍수이고, 때로는 진압풍수(鎭壓風水)라는 개념이다.
비보풍수는 풍수적으로 모자라는 곳을 도와서 채워 준다는 뜻이다. 어떤 장소든지 100% 완전한 명당(明堂)은 없으며 지리적으로 허한 곳이 있거나 자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약점이 조금씩은 있기 마련이다. 이를 메우고자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 비보를 하게 되었는데 이미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비보풍수의 방법과 적용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방법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의외로 단순하거나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적지 않다. 터가 너무 강한 곳은 석탑이나 석상(石像) 같은 것을 세워서 강한 기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눌러 주고, 지기가 약한 곳은 땅을 돋우거나 나무를 심고, 때로는 물길을 돌리고 절을 지어 지기(地氣)를 보충하고 바람을 차단하여 보강하는 방법이다.
결국‘비보’란 지극히 인간적인 시선의 배려인 것이다. 풍수적인 형국론(形局論)에서 살펴 길국(吉局)으로서 갖추어내야 할 것 중 어떤 요소가 결핍되었거나 허약할 때 인공적으로 보완함으로써‘길한 형국’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 혹은 조상의 묘역을 해하거나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 인간의 노력으로 보완하는 총체적인 것이다.
비보 풍수는 풍수 본연의 이론에서 자연의 부족한 점을 찾아 인위적인 보안을 통해 삿된 것을 방어하고 모자람을 채우고자 함이다. 삿된 바람과 물을 방어하고 때로는 소리와 빛도 방어하는 방법이 사용되며 용맥(龍脈), 장풍(藏風), 득수(得水), 형국(形局) 등 주요부분에 적용된다. 특히 충(衝,冲)의 두려움을 방어하고자 하는 인식이 뚜렷하다. 비보풍수는 양택과 음택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는 지나치면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는 역효과도 발생한다
비보풍수는 음택과 양택이 갖추지 못한 흉(凶)의 보안 및 대체(代替)를 위해 사용하며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된다. 음택과 양택의 적용이 다르기는 하지만 용맥이 약하다면 새로 만들거나 보충하고 형태를 외양상 튼튼하도록 바꾸며 심지어 조산(造山)이라고 하는 가산(假山)을 새로 만들기도 한다.
골짜기가 이루어졌거나 바위 틈새가 있어 바람이 침범하는 지형이라면 인위적으로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를 쌓아 바람막이를 한다. 또 허한 부분에 숲을 만들어 이를 보완한다, 당시의 유학자들이 대단히 반대했을 이론이겠지만 더 나아가 지형의 나쁜 기운을 막고 길지를 바꾸기 위해 절을 건립 하거나 탑을 세우는 방법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비보 풍수는 긍극적으로 풍수적으로 살펴 어떤 지형이나 산세가 해를 입힐 정도로 부족하면 이를 보안하는 적극적은 방법이다. 이를 조선시대에는 술법으로 보거나 요술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 배경에는 비보풍수의 방법이 도선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가 불교승려였다는 점에서도 배척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에도 비보풍수는 오래도록 민간에서 유행되고 적용되었으므로 지금도 그 방법이 대부분 전해지고 있다.
비보풍수는 일체의 풍수적 단점을 풍수원리를 원용해 인위적으로 꿰마추며 인간에게 해가 없도록 고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경이나 적용측면, 그리고 지배계층의 인식이 시대마다 다르고 실질적인 적용도 달랐다.
고려 때는 비보가 얼마나 성했는지 신종(神宗) 원년에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이란 임시 관아까지 만들었다. 산천에 두루 풍수 술법을 보안해 그 지덕(地德)을 부활코자했다. 비보풍수는 빛을 발하고 고려시대의 전기간 동안 성행하였다. 때로는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왕권을 움직이고, 때로 천도의 주장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상황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주술적 의미까지 가미된다면 비보는 갖가지 기발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적용될 수 밖에 없다. 이를 염승풍수(念僧風水)라 한다.
조선과 고려의 풍수지리는 그 관점과 적용이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처럼 주술적으로 흐를 정도로 관아를 만들어 비보풍수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역사가 증명하는 바, 조선도 풍수지리를 배척하거나 적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선 역시 고려와 유사하게 과거제도를 이용하여 풍수에 관련된 인재를 등용하고 관청을 만들어 풍수를 국정에 반영하였다.
조선시대의 잡과(雜科)에는 역(譯), 의(醫), 음양(陰陽), 율과(律科)의 4과가 있었다. 이것은 사역원(司譯院), 전의감(典醫監), 관상감(觀象監), 형조(刑曹) 등 각 관서의 기술관원을 채용하기 위한 것으로 여기에는 초시(初試), 복시(覆試)의 두 단계가 있었다. 대체로 그 격이 문과나 무과에 비해서 낮았으며, 또 소요 인원이 적었으므로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가 있을 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 과목에 풍수지리의 경전인 “청오경(靑烏經)”, “금낭경(錦囊經)” 등이 시험과목으로 지적되었으며 이러한 가정에서 선발된 관원들이 궁궐 축조와 성벽축조, 왕릉 수축에 활용되었다.
조선시대의 풍수지리 활용은 이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 태조 이성계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조선 왕조 건립의 이대 지주로 삼았는데, 터를 잡음에 있어 풍수지리를 익히고 배운 서운관(書雲觀) 관원들로 하여 그 역할을 수행토록 하였다. 서운관의 관원들은 대외적으로 풍수지리에 관련된 업무를 전담하였다. 사실 이성계는 서운관보다는 풍수지리에 능통한 관원들을 잉용하여 따로 자문을 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조선시대의 풍수지리관련 시험과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음양과와 풍수지리영역에 출제되었던 이론 과목은 청오경, 금낭경(장경), 지리신법(地理新法), 명산론(名山論) 등이었다. 이처럼 풍수학인을 중용하였고 관청까지 두었지만 불교의 색체가 녹아있는 비보풍수만은 배척한 것이 조선풍수의 한 흐름이기도 했다.
4 비보풍수의 활용
가) 왕궁의 비보풍수
풍수에서 볼 때 북한산(北漢山)은 서울의 조산(祖山)이며 진산(鎭山)이다. 북한산은 삼각산(三角山)이라고도 불러왔는데, 이는 백운봉, 국망봉, 인수봉 의 세 봉우리가 솟아있어 부르는 이름이라고도 한다.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은 서울의 주산(主山)이 되고, 낙산(駱山)은 좌청룡(左靑龍)이 되어 동쪽을 막아주며, 인왕산(仁王山)은 우백호(右白虎)로 서쪽을, 남산(南山)은 안산(案山)으로 남주작(南朱雀)이 된다.
이렇듯 서울의 경복궁 부근은 북악산, 낙산, 인왕산, 남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름하여 현무, 청룡, 백호, 주작으로 이루어진 사신산(四神山)이 된다. 이 네 개의 산을 연결하여 도성을 쌓았으며, 도성 사이에 문을 설치하였다.
또한 네 개 산 외곽에는 북쪽으로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北漢山), 동쪽으로는 용마산(龍馬山), 서쪽으로는 덕양산(德陽山), 남쪽으로는 관악산(冠岳山)이 이중으로 서울을 둘러싸고 있다. 이를 다시 서울의 외사산(外四山)이라 부른다. 서울의 풍수형국을 이루는 이들 산줄기들을 보면, 오른쪽 가지인 인왕산의 맥은 서대문, 서소문, 남대문을 거쳐 다시 안산인 남산에 이어지며 광화문에 까지 이른다.
즉, 서울 내명당의 형국은 백호인 오른쪽 가지가 길고, 청룡인 왼쪽 가지가 짧은 형세를 하고 있는데, 이는 풍수가들이 이야기 하는 우선국(右旋局, 오른쪽으로 돎)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를 보안할 풍수 비법이 필요하게 되었다.이렇듯 산줄기가 반시계 방향으로 감는 모양을 하고 있는 우선국의 형국에 반하여, 내명당수인 청계천(淸溪川) 물은 동쪽으로 흘러 중량포에서 만나서 서쪽으로 흘러 한강에 흘러들게 되는 좌선국(左旋局)이 된다. 즉 산줄기와 물줄기가 태극모양으로 맞물려 도는 형상으로, 풍수에서는 대단한 길지에 속한다.
이와 같이 민족의 영산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북한산 보현봉(普賢峰)을 거쳐 북악산으로 들어온 땅의 기운(地氣)은 경복궁(景福宮)에 다다라서야 그 기운을 펼쳐 온 나라에 전하게 된다.
백두산에서 이어온 땅의 기운(地氣)은 북한산 보현봉을 거쳐 북악에 이르러 그 기를 모으니 그 혈처가 되는 곳이 바로 이 경복궁 자리이다. 물론 과장이기도 하였지만 얼마 전 만들어진 영화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 '에서는 경복궁 지하 어디에 큰 쇠말뚝을 박아 '기(氣)'를 끊고자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또한 과거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이 '기'의 맥을 끊기 위해 산의 맥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경복궁 아래에 높은 중앙청(中央廳)을 지어 기의 흐름을 차단하려 하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서울은 조선의 오랜 도읍답게 비교적 경복궁외에도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덕수궁(德壽宮) 등 궁궐과 여러 능들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경복궁은 법궁(法宮)으로서 외국인에게 우리나라의 문화를 소개할 때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 왕실은 궁궐을 지을 때부터 풍수지리를 적용하였다. 이 풍수지리의 이법에서 오행의 상생과 상극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주변의 사격(砂格)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이에 따라 대소신료들의 논쟁이 다분하게 일어났으며 이는 결국 풍수지리의 논쟁이었고 결정 또한 풍수지리의 이법으로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부터 궁궐에 크고 작은 화재가 자주 일어났는데 병향(丙向)은 오행으로 큰불을 상징하는 양화(陽火)인데다 궁궐 정면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관악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관악산의 화기를 한강이 차단해준다고는 하지만 워낙 강한 관악산의 획기가 방향에서 오는 오행의 기운을 업고 오기 때문에 역부족이라 수성(水性)이 강한 물짐승인 해태상을 대궐문 앞에 관악산을 바라보게 하여 세웠다.
서울의 모든 문에는 오행이 적용되었다. 경복궁 서쪽인 창의문(彰義門,자하문) 의(義)는 오행으로 금(金)이고 서쪽을 나타낸다. 창의(彰義)는 서쪽을 빛나게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리 지붕 위에 닭 조각이 있다. 이는 창의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 모양이기 때문에 지네의 천적인 닭을 조각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기 위한 풍수 비보책이다.
어느 궁궐을 막론하고 풍수지리의 사상에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금천(禁川,錦川)이라는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는 금천교(禁川橋)라는 다리를 설치하고 있다. 금천교 다리 이름은 궁궐마다 다른데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永濟橋)로, 창덕궁은 비단금자 금천교(錦川禁)로, 창경궁은 옥천교(玉川橋)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 궁궐 앞을 흐르는 명당수가 없어서 태종 대왕 때 북악산의 물을 끌어들여 도랑을 파고 이 금천을 만들었다고 한다. 궁궐의 물줄기는 한강 물줄기의 반대로 흘러야 하기 때문에 경복궁의 금천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경복궁을 벗어난 다음에는 경복궁 동쪽 궁궐 벽을 타고 동십자각 앞을 지나 남쪽에서 청계천에 합류하게 되어 있다. 영제교 앞뒤에는 사자를 닮은 4마리의 서수(瑞獸)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혹시 물길을 타고 궁성으로 침범할지 모르는 잡귀를 막아내고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비보풍수이다. 광화문 옆에 있는 서수는 뿔이 없는데 이놈들은 뿔이 한 개 씩 달려 있다. 임금이 계신 정전을 지키려고 더욱 무서운 놈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금천(禁川)은 임금이 계시는 성스러운 곳과 백성들이 사는 외부 세속 사회와의 경계선이다. 그래서 금천교를 지나면 임금이 계시는 곳이니 마음가짐을 단정하게 추스리라는 주문을 서수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왕릉에도 동일한 금천을 조성하고 금천교를 설치하고 있다.
나) 숭례문(崇禮門)
풍수지리의 이론은 대부분 조선시대 국가 정책에 받아들여진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건국시기부터 조선은 철저하게 풍수지리의 도움을 받거나 차용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의 풍수전개에서 비보풍수는 얼마간 배척을 받거나 멸시를 받아온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역사적인 사실이 증명하듯 왕실이나 정치 무대에서도 비보풍수는 대단히 효율적으로 이용되었다. 심지어 당파싸움에도 이용된 사례는 매우 흔하다.
비보풍수는 허한 곳을 보충하거나 강한 것을 누르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나무를 심거나 물길을 돌리고, 인공적으로 연못을 파는 것도 이러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한 가지 방법에 속한다.
한양에 적용된 비보풍수에서 숭례문(崇禮門)이 대표적인 비보풍수의 적용이다.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비보풍수가 더해진 것이 숭례문의 예이다. 지금은 도시화의 진행으로 볼 수 없지만 숭례문 앞에는 비보 용도로 파 놓았던 연못이 있었다. 이 연못이 바로 남지(南池)이다. 숭례문에서 서울역 쪽 방향에 판 연못이었다. 이 연못이 남아있었더라면 아름다운 경치를 뽐내는 명소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 연못 터가 메워지고 그 자리에는 '이 연못을 장원서(掌苑署)라는 부서에서 관리하였다'는 내용의 표석만 남아 있다. 연못은 물을 관리하거나 채우는 곳이다. 이 물은 불과 상극이며 제어하는 기능을 지닌다. 동양사상에서 음양오행설은 매우 중요한 이론이고 생활에 응용되어 왔다.
이 남지는 숭례문 밖의 화체산(火體山)에 해당하는 관악산(冠岳山)의 화기(火氣)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용도로 파 놓았던 것이다. 산의 모습이 뾰쪽뾰쪽하고 날카로운 모습의 바위로 되어 있으면 풍수에서는 이를 화체(火體)로 간주한다. 불꽃처럼 생긴 많은 산들은 불을 불러오는 것으로 보았으며 관악산은 화체로서 궁궐에 불을 불러올 것으로 믿었다.
물을 의미하는 수(水)는 불을 의미하는 화(火)와는 상극이다. 물로서 불을 억제하려는 비보풍수는 비단 숭례문만의 경우는 아니다. 아울러 관악산에는 개의 모습을 조각해 세우고 정상 가까운 곳에 우물을 팠으며 그것도 모자라 호압사(虎壓寺)를 세워 비보했다.
서울 관악산의 화기를 제압하기 위해 관악산 중턱의 샘에 구리로 만든 용을 집어넣었으며 연주대 봉우리에 방화부 9개를 묻었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단순히 전설을 넘어 조선 왕실의 비보퐁수 이용에 대해 말해주는 근간이다.
숭례문 화성체인 관악산을 향하고 있는 남대문에는 불을 의미하는 글씨를 넣어 남산의 화기에 맞불을 놓았다. 한자에는 각각 오행을 적용하여 풀 수 있는데 숭(崇)과 예(禮)란 글씨로는 오행중 화기를 의미한다 |
숭례문에도 화기진압을 위해 그 이름을 붙였다. 이름을 정함에 있어 방향만으로 따진다면 남대문이라거나 곤(坤)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야 맞을 것이다. 한자에는 각각 오행을 적용하여 풀 수 있는데 숭(崇)과 예(禮)란 글씨로는 오행중 화기다. 특히 숭(崇)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이다. 두 글자가 겹쳐지면 불탑 염(炎)이 된다. 단순한 열기나 불기운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이다. 이렇게 하여 관악산의 타오르는 화기를 누설 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화성체인 관악산을 향하고 있는 남대문에는 불을 의미하는 글씨를 넣어 남산의 화기에 맞불을 놓았다. 불은 맞불을 놓으면 양쪽에서 타들어가 더 이상 번지지 못하므로 이러한 특성에 맞게 글자로서 대응한 비보풍수의 전형적인 예이다.
다) 흥인지문(興仁之門)
한성을 둘러싼 성벽에서 내외로 출입하는 사대문의 이름은 유학의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따왔는데, 이에 따라 동서남북의 사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숙정문(肅靖門, 지(智)를 대신하여 정(靖)을 썼다)이다. 마지막 신(信)은 고종 때 한양의 중심이었던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에 쓰였다.
대한민국의 보물 제1호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1934년 일본이 '동대문'(東大門)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흥인지문'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1396년(태조 5) 창건되어 1453년(단종 1)에 수리되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869년(고종 6)에 새로 세웠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성문으로 국보 제1호인 숭례문과 비교하면 전체 모습과 규모는 비슷하되 화려함에 비해 웅장한 느낌은 덜하다. 특이하게 문 밖에 반달모양의 옹성(甕城)을 둘렀으며, 옹성 위에는 방어에 유리하게 여장(女墻)을 쌓았다. 아래층의 모서리 4기둥이 그대로 위층의 바깥기둥이 되는 합리적인 구조이며, 장식이 많고 섬세한 다포계 공포(包)형식은 조선 후기의 조형을 보여준다.
흥인지문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이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에 비해 빈약하다 하여, 이를 보강하기 위해 꾸불거리는 산맥의 모습을 한 '지'(之)라는 글자를 이름의 중간에 넣은 까닭에 다른 성문보다 1자(字)가 많은 4자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
서울의 풍수에서 볼 때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이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에 비해 빈약하다 하여, 이를 보강하기 위해 꾸불거리는 산맥의 모습을 한 '지'(之)라는 글자를 이름의 중간에 넣은 까닭에 다른 성문보다 1자(字)가 많은 4자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반달형의 옹성도 같은 이유로 문 밖에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 다포계 성문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아울러 인근에는 지기를 늘이고 지각을 길게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청계천의 토사를 치우는 역할로 동대문운동장 터에 가산을 쌓았다.
라) 구례 운조루(雲鳥樓)
앞산이 불꽃처럼 생긴 바위산이 포진해 있으면 화기(火氣)가 미치거나 그 바위의 생김에 따라서는 때로 강한 살기(殺氣)가 미친다고 여겼다. 이런 터의 대문 앞쪽에는 인공적으로 연못을 조성해 놓는 경우가 많았다. 영험한 '기도발'을 중시하는 불교 사찰 터의 앞에는 화체산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종교시설의 경우이고, 조선시대 일반 주택에서는 이러한 화체산이 바라다 보이는 장소를 되도록이면 피했다. 하지만 좌청룡 우백호나, 터를 감아 도는 냇물과 들판이 좋고, 집 뒤의 배산(背山)이 좋다면 앞에 화체산이 있더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주택 터를 잡는 경우가 있다. 물론 바위산에서 뿜어지는 특정한 기를 방어하거나 피하기 위해 비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구례의 '운조루(雲鳥樓)' 터가 바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운조루의 안산격인 앞산이 약간의 화기가 있는 바위산이다. 그래서 운조루에는 대문 앞에 네모진 형태의 연못이 있다. 축대를 쌓아서 인공적으로 조성한 '비보연못'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배치는 비보풍수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 속한다. 또 하나의 화재 예방 장치는 운조루 대문 앞을 흘러서 나가는 조그만 자연 수로(水路)이다. 이를 내당수(內堂水)라고 부른다. 물론 집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이 연못과 수로의 물을 직접 퍼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마) 명옥헌원림(鳴玉軒苑林)
담양에는 독수정원림(獨守亭園林)과 같은 원림이 몇 곳 있다. 이중 명옥헌원림(鳴玉軒苑林)은 자연 독보적이다. 명옥헌원림은 160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합격하였던 오희도(吳希道, 1583-1623)의 넷째아들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道藏谷)에 헌(軒)을 짓고 이를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 지었다. 오이정은 스스로 호(號를) 장계(藏溪)라 한바 장계정(藏溪亭)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따라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명옥헌(鳴玉軒)은 정자 앞에 연못이 파여 있고 둘레에 적송(赤松) 및 자미나무 등이 심어져 뛰어난 조경으로 알려졌으며, 장계정(藏溪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또는 뒤편에 도장사(道藏祠)라는 사당에 있으므로, 도장정(道藏亭)이라고도 부른다.
명옥헌원림은 주변의 자연경관을 차경(借景)으로 도입한 정사(亭舍)중심의 자연순응적인 전통정원양식이지만 전(前)과 후(後)의 조선시대 전통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지당부(池塘部)를 도입하였다.
전(前)의 지당부는 명옥헌의 북쪽에 위치하며 그 고저차는 약 6.3m이다. 동서너비 약 20m, 남북길이 약 40m 크기를 갖는 방지의 중심부는 원형의 섬이 있으며 주위에 약 20주의 자미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수령은 100여 년 정도이다. 명옥헌의 동쪽에 자리 잡은 지당(池塘)은 동서 16m, 남북 11m 크기이다. 이 지당은 1979년 여름에 조사 발굴된 것으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계류의 물을 끌어 채운 것으로 북과 서쪽에 자미나무가 심어져 있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정자로 실의 구성은 외부로 툇간을 돌리고 그 중앙에 실을 둔 중앙실형(中央室形)이다. 방에는 구들을 두었고 평천장을 하였다. 마루의 외곽에는 평난간을 두었다.
특히 이 정자부근에는 베롱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차단하는 배치를 지니고 있으며 지당의 둑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바람을 차단하는 비보풍수의 역할을 하도록 조성되었다.
바) 하회마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서깊은 전통마을인 하회(河回)마을은 100여년이 넘은 기와집들과 초가집들이 옛모습 그대로 사람들이 살아오고 있는 마을이다. 하회탈로 유명한 풍산 류씨가 살아온 전형적인 동성부락인 하회마을은 삼면이 낙동강으로 둘러쌓여 있어 마치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연화부수(蓮河浮水)의 지형이라 불리기도 하고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형상이라 불리기도 한다. 조선 전기 이후의 전통적 가옥촌과 함께 정신문화의 보존이라는 차원에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 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1984년 1월 민속보존마을로 지정되었다. 동쪽은 태백산의 지맥인 화산(321m)이 감싸고 있으며, 낙동강이 서·남·북 경계를 따라 마을 전체를 태극형으로 감싸 흐른다. 이는 풍수지리적으로 살펴 대단한 길지(吉地)로 임진왜란 때는 전화를 입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 연화부수형, 행주형(行舟形)이라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다
조선 전기에 이미 유씨들의 기반이 성립되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나 유씨 동족촌의 기틀이 마련된 것은 조선 중엽 이후 대유학자인 유운룡(柳雲龍), 유성룡(柳成龍) 형제 시대에 이룩되었다. 과거 신분제 사회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300~500년 된 130여 호(戶)의 유서 깊은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다. 하회마을의 대표적 가옥으로는 북촌택, 양진당, 충효당, 남촌택의 네 가옥을 들 수 있는데, 이들 가옥들은 ㅁ자형을 기본으로 하고 몸채의 한 편을 연장해 사랑채로 했다.
서북쪽으로는 울창한 노송림대가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어 삼신당나무로 삼고 있다. 강 건너의 부용대는 천연의 병풍과 같은 형태를 자아내며, 이 일대는 백사청송(白沙靑松)이 어울려 경승을 이룬다.
낙동강물이 굽이쳐 마을의 삼면을 감싸 둥글게 흐르다가 부용대를 부딪치고 마을 쪽으로 흘러 모래를 흐트러뜨리며 마을을 침범하므로 소나무를 심었다. 이 노송림 지대를 만송정(萬松亭)이라 부른다. 조선 선조중엽에 유운용이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휘돌아 흐르며 만들어 놓은 모래밭에 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가꾸었다고 하여 만송정 이라고 한다. 이 숲 맞은편에는 부용대가 있는데, 이곳에 오르면 하회마을을 한눈에 내려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 이 만송정은 장마철에 불어난 물에 의해 퇴적층으로 이루어진 둑이 무너지고 모래가 쓸려 내려가는 것을 방어하는 풍수림이지만, 더불어 맞은편의 부용대가 풍수적으로 음란하다는 치마바위(흔히 난의사, 현군사라 부른다)에 해당하기 때문에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 무실마을
“수곡동(무실마을)은 1560년경 학봉 김성일의 매부인 유성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남쪽에 있는 아기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긴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고 하여 무실로 이름지어졌다고…무실이 나중에 한자화되어 수곡으로 불리었으며…마을 앞에는 노송 20여그루로 이루어진 숲이 있는데, 이는 아기산의 맥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 지류에 닿아야 길하다는 풍수설에 따라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며, 개미가 서식하지 못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안동대 한양명 교수의 말이다.
아) 안동사찰
안동의 풍수적 ‘비보’를 말할 때, 입수처(入水處)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하는 노력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안동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점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은 와룡쪽에서 뻗어 내린 물길이 영남산의 그늘을 벗어나는 안동부의 남동쪽에 집중적으로 사찰을 건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길의 이쪽으로 법흥사, 용흥사, 법림사, 운흥사 등이 몰려있는 것이다. 물길의 건너편에 낙타사가 있고, 안동부의 서북쪽에 연비원이 있으며, 안동부의 남서쪽에 해룡사와 서악사가 자리잡고 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안동부의 동남쪽 부분에 사찰들이 여럿 몰려 있는 것은 ‘비보’의 기능을 하게 하기 위한 것이 분명하다. 도선의 풍수설이 사찰의 건립을 ‘비보압승’의 수단으로 쓰고 있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 안동부로 흘러드는 낙동강 물길의 입수구 부분에서는 특히 ‘비보’적 성격을 띄는 사찰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류증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준다.
물론 입수구나 출수구 근처, 또는 안동부의 개활한 남쪽지역을 흘러나가는 낙동강변에 ‘사찰’만이 ‘비보’적 차원에서 설립되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안동시내에 현존하는 옛날 사탑은 몇 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가지의 「안동부도」(안동부 지도)를 살펴보면 7~8기가 기록되어 있으니, 고대로 올라갈수록 많은 숫자를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고로(옛날 노인)들은 동쪽의 법흥사에서 서쪽의 서악사까지 사찰이 연접되어 흙을 밟지 않더라도 왕래할 수 있었다고 하니…어떤 까닭인가? 그것은 안동의 남방이 낙동강에 면해서 개활하여 아무 방위가 없었기에 이른바 ‘사탑방허지법식’(사탑으로 빈 곳을 방호하는 법칙)에 의하여 읍의 남쪽에 일직선으로 많은 사탑을 건립하여 읍기(읍 터)의 진호(진압과 방호)에 임했던 것이다. 더구나 법룡사의 벽간(벽 사이)에는 ‘진읍천년행길사’(천년동안 읍을 진압하는 좋은 사찰)로 자각(스스로 각인)한 판액까지 (걸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류증선의 보고가 과거의 안동에 영가지의 안동부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찰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증거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영가지에 표시되어 있는 사찰들만으로도 안동부의 남쪽 일원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은 충분히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 안동의 쑤
“‘임수’(쑤)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으로…영가지 권 5의 「임수조」에는 모두 22개의 ‘임수’가 소개…본부지역내 임수들은 대개 낙동강의 본(류와) 지류 가에 위치…특히 읍 동에서부터 낙동강을 향해 열려있는 광활한 남방으로는 숲이 에워싸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들 숲의 실제적 기능이 ‘법흥사 림’과 ‘상리 쑤’, ‘무장평 림’에서 드러나듯이 ‘방 수재’, 즉 ‘수재를 막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낙동강의 본류, 또는 지류 가에 위치하고 있는 숲들은 한결같이 마을의 서단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것의 풍수지리적 기능이 수구막이에 있으며, 실제적으로 ‘방수’(물막이)‘방풍’(바람막이)‘방사’(모래막이)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구비문학대계의 안동군 임동면 조항에 기록되어 있는 구절이다.
물가에 조성된 ‘쑤’는 현실적으로는 ‘방수’․‘방풍’․‘방사’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그런 현실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 하에서만 조형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풍수적 기능이 우선되 되는 ‘쑤’가 현실적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보다 많으며, 수곡마을의 ‘쑤’나 안동부의 낙동강 가에 조성된 ‘쑤’ 같은 것들은 풍수적 기능을 주 목적으로 하여 조성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
차) 안동 존당 조산
조산으로 예를 들면, 안동의 옛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는 성내조산(城內造山)·견항조산(犬項造山) 등 11개소에 무려 22기의 조산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가운데 속현이었던 일직과 풍산의 조산 7개를 제외하면 9개 지역 15개의 조산이 읍내에 존재하고 있었다. 현재 안동 지역에서는 풍산읍 오미리의 조산당 등의 조산이 발견된다. 안동의 조산은 비보풍수로서의 성격과 마을 신앙처로서의 성격이 복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모은루 서쪽, 언적리 남쪽. 안동부의 양기가 ‘행주형’(배가 항해하는 형국)이므로 이 조산은 배를 묶은 섬 모양으로 지어져 있으며, 쇠를 묻어서 기운을 왕성하게 하였다. 옛날에 안동부의 어떤 관리가 쇠를 절취할 속셈으로 조산을 파괴하였다가 백주대낮에 하늘이 어두워지고 커다란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으므로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철은 금속이기 때문에 이것을 흙 속에 묻으면 ‘토생금’(흙은 쇠를 생성한다)의 ‘5행상생’(오행이 서로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맞아 ‘생기’의 운행을 왕성하게 하는 풍수의 법술이다. (그러나 이것은 ‘금생수’, 그러니까 ‘쇠가 물을 생성한다’는 ‘오행상생론’과 관계가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존당조산’은 안동부의 전체 형국이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과 관계가 있다. 풍수의 ‘형국론’은 형상이 갖고 있는 특성 속에 주술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해한다. ‘형상’은 ‘성질’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배 모양’을 하고 있는 안동은 실제의 ‘배’처럼 떠다닐 수 있는 것이며, ‘배’가 안정되지 않는다면 삶터로서는 부적절하다는 의식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존당조산’의 주된 기능은 배를 묶어두기 위한 것이다. ‘배’는 떠다니는 것이므로, 정박하지 않으면 삶터로서는 적당하지 않다. ‘존당조산’은 ‘배’를 묶어두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섬’의 모양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 ‘섬’ 모양의 ‘조산’에 배가 묶여서 안정된 삶터로 전환되게 하고자 하는 주술적 장치인 것이다.
돛대를 만들어 세운 것도 바로 안동부를 ‘배의 형상’으로 보고, 배의 안정을 위해서는 돛대가 필요한 것처럼, 안동의 안정을 위해 유감주술적 차원에서 배치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점에 대한 류증선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안동 시내 남문의 역전 5층탑과 남지의 중간에 2개의 석주가 있었다. 그것은…(큰 기둥)을 세운 가석으로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안동읍내의 지형이 ‘행주형’(움직이는 배)이기에 건읍(읍의 건립) 당시부터 배는 돛대가 없으면 불안정하므로 여기에 철장(쇠 돛대)을 세워서 읍을 진호했다. 당시 이용한 ‘대가’(초석과 시렁)이 곧 이것이다. 그러나 ‘세구년심’하여(세월이 오래되어) ‘철장’이 부패하였기로 큰 기둥으로 바꾸어서 부도하면(썩어 넘어지면) 대체하였으나, 1921년도 목장(나무돛대)이 부절한(썩어 꺽어짐)한 이후는 방치해 버렸다.”
이러한 쇠돛대는 청주에서도 발견된다. 청주에서도 배의 형상인 탓에 돛대로 철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안동에서도 아마 현재의 청주시내 한가운데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철주가 세워졌다가, 부식되어 버린 다음에는 나무 기둥으로 바꾸어 세운 것이라고 할 터이다.
배의 형국에 관계되는 풍수는 여러군데에서 그 예가 발견된다. 물길을 안고있는 마을은 거의 대부분 배의 형국이라고 말하여지는 것이다. 앞의 바위신앙 이야기 속에서 언급하였던 와룡 가구동의 선돌도 풍수의 시대에는 원시적 신앙성이 변질되어 돛대 형상으로 말하여지기도 하였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가구 들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그 형국이 선주형(배 형상)으로 배가 앞으로 나가는 곳에 배의 돛대와 같이 큰 돌을 세워서 배가 앞으로 순항해야 된다고 하여 세웠다고 한다. 또 배의 형국에는 배에 구멍이 나면 배가 침몰한다고 하여 큰 우물도 파는 것을 삼갔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으며…”
안동문화연구 4집에 실려있는 권진량의 말이다.
타)광양 광양읍 성북마을 비보숲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칠성리 성북마을에 있는 인공으로 조성된 숲이다. 지형(지세)을 풍수적인 조화를 위해 인위적으로 조경한 숲으로서, 마을의 서북쪽에 있다. 1528년(중종 23)에 마을의 서북쪽이 허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 곳에 나무를 심어서 칠성이라 하였다. 현재 칠성리 당산과 연습림 서편 '홀아비 정자나무' 두 그루만 보존되고 있다.
카) 박문수 묘
천안시 북면 은석산에 자리잡은 박문수의 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중 대표적인 설이 현재 독립기념관의 터에 자리잡았다는 설이다. 전설에 따르면 박문수의 묘는 애초에 독립기념관의 터에 잡았으나 후일 묘지를 이장하여야 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어 지금의 은석산으로 바꾸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비보풍수에 관한 설이다. 박문수의 묘가 자리한 은석산의 중턱은 제법 높은 곳으로 박문수가 살아 생전에 신후지지로 잡아놓은 곳이다. 이 신후지지터는 물형론에 비추어 장군대좌형의 지세로 판단되었다. 문제는 산세였다. 자연적인 얼개로 보아 장군대좌형이엇지만 안산과 조산이 병졸모앙의 자연얼개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이에 비보풍수가 동원되었다. 자연얼개로서의 사격이 부족한 상황에서 산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사람을 동원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즉, 묘역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시장을 개설함으로서 자연에서 부족한 얼개를 채웠다. 자연얼개에서 부족한 것을 시장개설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채운 비보풍수의 한 예이다.
파) 이천 소일마을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에는 소일마을이라는 곳이 있다. 백사면 내촌리에 영면한지 130여년 후 고손자의 가봉녀(加捧女)에 의거 수목장(樹木葬) 이라는 미명하(美名下)에 파헤쳐저 사라진 하옥대감 김좌근(金左根)의 묘터는 문화류씨에서 여산송씨네로 옮겨간 강당(講堂)이 있던 곳이다. 여산송씨네는 광해군 때 문화류씨네 사위가 되면서 내촌리에서 누대를 살다가 고종 때 김병기의 세도에 눌려 내촌리를 내어주곤 떠났다.
숙종 때 이천부사가 발행한 여산송씨네 호구단자에 보면 주소가 우곡리(牛谷里)로 나와 있다. 우곡리는 내촌리의 본래 자연마을 이름인 ‘소일’을 한자화 하면서 생겨난 리명(里名)이다. 소일은 안소일과 바깥소일 두 땀으로 되고 있었는데 조선말 바깥소일이 사라지고 안소일만이 남으니 1915년 2월 5일자로 안소일을 내촌(內村)리로 명명하고 우곡리는 아랫마을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소일마을의 비보숲 목에 해당하는 지점에 나무를 심어 비보하고 있다. |
과거 바깥소일과 안소일을 구분짓는 곳은 안소일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마을은 마치 호리병 모양을 지니고 있으며 소일마을이 말해주듯 입구가 마치 구유 모양을 지니고 있다. 이곳에는 비보풍수림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비보풍수림은 마을의 수구를 막는 역할과 더불어 구유의 형태를 이루었으며, 바람의 진입을 차단하는 풍수림의 역할을 한다.
하)아산 외암마을
이 마을의 유래는 조선시대 중엽 명종(1534~1567)때에 장사랑이던 이정 일가가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서 400여년이 넘는 내력을 자랑하고 있다. 본래 이웃역말[시흥역]이 있어서 말을 먹이던 곳이라 하여 오양골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외암마을은 예안 이씨의 집성촌으로 60여 가구 1백70여 명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곳이다. 마을 주변 논에서 벼를 수확하고 집 텃밭에 채소를 가꾸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은 초가집이 주를 이루지만 멋들어진 한옥도 20여 채 있다. 참판댁, 감찰댁, 참봉댁 등 지낸 벼슬의 이름을 딴 가옥들이다. 이중 건제고택은 외암 이간(李柬)이 출생한 곳이다. 외암리마을의 초입부터 커다란 장승들이 찾는이를 반겨주며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비보풍수로 조성한 소나무숲과 아담한 정자가 있어 편안한 마음을 들게 한다.외암민속마을에서는 무엇보다도 나즈막한 돌담장이 인상적인데 마을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돌담장에 둘러쌓인 느낌을 주며 집집이 쌓인 담장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5,300미터나 된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 마을의 집들은 대개 100년에서 200년씩 된 집들이다.
외암마을은 예안 이씨 중심으로 구선된 마을로, 마을 앞쪽으로 넓은 농경지를 두고 뒤로는 산이 막아주는 사이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다. 외암리로 들어서려면 개천 하나를 건너야 한다. 마을 뒤쪽에 자리한 설화산 계곡물과 강당골에서 흘러온 물줄기와 합수해 제법 큰 개천을 이루었다. 이른바 ‘배산임수’. 풍수지리학상 외암마을은 최고의 명당자리에 터를 잡았다.
동구에 수구막이 기능도 겸하는 마을숲은 큰비가 내리면 강당골과 설라리에서 흘러내려 온 두 개울물이 합하여 넘실댄다 하니, 이곳 반계(磐係)는 풍수에서 말하는 마을의 수구(水口)가 된다.
외암마을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물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집집마다 물길에 둘러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 물길은 외암마을에서 두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하나는 자연적인 물의 흐름이다. 다른 하나는 인공적인 물의 흐름이다.
인공적인 물의 흐름은 이 마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미을 상부에서 인위적으로 물길을 내어 마을을 통과하도록 조성한 이 물길은 마을 안의 여러집을 통과하면서 생활용수로도 쓰이지만 곡수로 흐르며 마을에 정원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 인공수로를 풍수에서 '염승(厭勝)'이라고 한다. 전통 오행(五行)사상에서 화(火), 물(水)은 서로 상극이다. 이 마을에서 주산인 설화산(雪火山)의 발음이 불을 상징하는 '화산(火山)'과 같다. 이 때문에 옛 사람들은 마을에 그 '화'의 기운이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을내부에 화와 상극하는 '물(水)'을 끌어들여 '화'의 기를 제압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외암리 마을에서는 자연적인 건축요소를 활용하는데 있어 하나는 그대로 둠으로서 자연을 살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것을 인위적으로 이용함으로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려 하였던 것이다.
5. 비보풍수의 억압
가) 조선의 불교
조선 시대의 불교는 고려 말기의 불폐(佛弊)로 인해 조선 시대에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이 강조되어 많은 법난을 겪었다. 이에 따라 한창 번성하고 있던 불교의 모든 종단이 위축 일로를 걷게 되어, 마침내 5교양종이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세종(世宗) 6년(1424)에 7종을 폐합하여 선교양종으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왕명에 의한 것으로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摠南宗)을 선종으로,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합하여 교종으로 폐합하고, 흥천사(興天寺)를 선종도회소(禪宗都會所)로, 흥덕사(興德寺)를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로 삼았다.
조선의 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에서도 많은 고승이 나타났는데 무학(無學) 자초(自超, 1327∼1405)를 비롯하여 호불론(護佛論)의 하나인 현정론(顯正論)을 제시한 함허(涵虛), 기화(己和, 1376∼1433) 등이 있다. 명종(明宗)때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도움으로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는 불교 부흥의 꿈을 실현시키려 했으니, 그는 판선종사(判禪宗師)가 되어 도승법(度僧法)과 승과(僧科)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과 사명대사 유정(惟政, 1544∼1610)이 등용되어 각각 선교 양종의 판사(判事)가 되었다. 이와 같이 억불 정책 속에서도 조선의 불교는 인재를 발굴하여 계속 법맥(法脈)을 유지시키며 발전시켰다.
조선 초기의 배불정책은 크게 2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하나는 불교세력의 인적, 물적 기반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고려 말기에는 사원·승려의 증가와 아울러 그들이 소유하는 토지와 노비의 확대로 불교의 물적·인적 기반이 팽창되었으며, 그 기반은 권문세족과의 결탁에 의해 국가적인 비호를 받으면서 더욱 확대되어갔다.
그 결과 중소지주와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불교세력과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고, 나아가 국가 재정에도 심각한 영향을 초래했다. 고려 말기의 사회·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교세력의 물적·인적 기반을 축소하는 조치가 필수적이었고, 이에 1388년(우왕 14)에 과전법을 제정하면서 승려에게는 수조지의 지급을 중단하고 이제까지 면세전이던 사사전에도 수세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후 조선시대에는 1402년(태종 2), 1406년, 1424년(세종 6) 3차례에 걸쳐 불교의 종단과 사찰을 정리하면서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를 국가에서 몰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사전개혁이 이루어진 뒤에도 약 4만~5만 결에 달하던 사원의 수조지가 약 8,000결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10만에 가까운 사원노비가 국가에 몰수되었다. 또한 고려 말기부터 시행되기 시작한 도첩제(度牒制)를 한층 더 강화하여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베[布]를 바치도록 함으로써 승려가 늘어나는 것을 방지했다.
배불정책 가운데 또 하나는 불교가 담당하던 상제례(喪祭禮)를 유교식으로 바꿈으로써 불교의 사회적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민간에서는 물론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불교의 종교적 기능은 커다란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배불정책을 추진하던 조선도 이 종교적 기능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교적 예제에 따르는 왕조례(王朝禮)와 사서례(士庶禮)를 정비하고 시행함으로써 불교의 종교적 기능을 약화시키려는 조치는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러한 조치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시행된 것은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보급이었다.
나) 최호원의 예
서기 1485년(성종16년) 병조참지 최호원이 극성(棘城) 지방으로부터 돌아와서 아홉 가지 일을 진언하였다. 그 가운데 네 번째 항은 도선국사의 비보풍수를 살리자는 주장이었다. 이와 같은 도선의 비보 풍수론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최호원에 의해 공식적으로는 처음 주장한 일이라 조정에서도 논란을 일으킨다. 결국 최호원은 유배를 가야할 처지가 되었다. 최호원이 올린 도선풍수의 활용론을 전문은 다음과 같다.
"황해도는 악병이 있는데, 북도는 봉산·황주, 남도는 문화·풍천이 더욱 심하며 그 사이에 안악·신천은 이 병이 없습니다. 신이 가만히 산천 형세를 살펴보니, 안악·신천은 모두 토산(土山)으로서 형세가 단정하고 두터우며, 지롱(支壟)이 빙 두르고 산천이 둘러 쌓였으니 악질이 나지 아니함이 당연합니다. 반면 황주와 봉산은 석산이 높게 솟아서 모두 염정·독화의 형상이며, 지롱이 나누어지고 수파가 거두지 아니하여 모두 귀겁(鬼劫)의 모양이므로, 산천에 독기가 없을 수 없어 질병과 여귀가 생김은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산고수려하여 길흉의 반응이 매우 빠릅니다. 도선이 삼천비보를 설치하고, 또 경축진양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보한 곳의 절이나 탑, 그리고 못과 숲을 거의 다 허물어뜨려서 없어졌으니, 산천의 독기가 흘러 모여서 병이 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신은 의심하건대 악질이 유행하는 것은 비록 전쟁에 죽은 외로운 넋의 억울함이 맺힌 까닭이라고 하나, 또한 산천의 독기가 흘러 모여서 화를 빚은 소치로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청컨대 도선의 산천비보하는 글에 의거하여 진양(鎭禳)하는 법을 밝히소서. 대구부사를 지낸 정3품 당상관이 임금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당장에 최호원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와 논의가 잇따랐다. 최호원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그로부터 3일 뒤인 성종 16년 1월 8일 도선 풍수학을 장려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다. 상소 전문은 다음과 같다.“신은 학술이 거칠고 견문이 고루합니다. 성품이 본디 민첩하여 잡서 보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시종(侍從)의 인연이 되어 세조 임금께 알아주심을 받아 술학에 정통하도록 신에게 허락하시었고, 신에게 여러 글의 수찬을 맡기시는 한편 낮에는 날마다 세 번씩 접견하시니, 은혜와 사랑이 더욱 높았습니다. 이순지에게 명해서 신에게 천문·역법을 가르치게 하여 술수의 일을 모두 신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 전하(성종)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신에게 천문예습(天文隸習)을 맡기셨습니다. 지난해(1484년)에 당상관에 승직시켜 신에게 관상감에 벼슬하기를 명하여 삼학취재(三學取才)의 일을 맡게 하였으며, 무릇 음양 술수·택지·택일 등의 일을 모두 저에게 자문하셨습니다. 저도 이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서 잠시도 마음속에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릇 지나간 산천의 형세를 모두 살펴보고 다른 날 국가의 쓰임에 대비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께서 황해도에 악병이 유행함을 걱정하시어 신하에게 명하여 교서를 따로 짓게 하고, 신을 헌관(獻官)으로 정하여 극성 지방에 보내서 여제( 祭)를 행하도록 하시었습니다. 이는 나쁜 병을 없애고 백성을 편히 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이니, 신이 향(香)을 받은 뒤로부터 먹어도 입맛이 없고 잠을 자도 자리가 편치 못하였습니다. 가면서 산천의 형세를 보고 악병의 근원을 찾아보았는데, 아마 산천의 독기가 여신과 더불어 서로 부채질한 소치인가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도선의 글을 상고해 비보지설을 다시 밝히려고 하였습니다. 도선은 식견이 얕은 속사의 무리가 아니고 바로 신과 통한 밝고 지혜로운 중입니다. 송도·한양 두 서울 터를 미리 정하였고, 군현의 산천을 비보한 곳은 자못 영험이 있었습니다. 신은 듣건대 추부(秋夫)의 술법이 병을 낫게 할 수 있고, 진군(眞君)의 부적이 백성을 구제할 수 있다고 하는데, 도선의 비보설만이 어찌 백성에게 보탬이 없겠습니까? 신의 학술이 본디 요격궤사(擾激詭邪)하여 백성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명을 받아 배운 것을 가지고 가슴에 쌓은 바를 펴려고 한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비보를 하면 산천의 독기가 저절로 거두어지고, 여제를 지내면 귀신의 억울함이 또한 사라져서 악병이 멈춰지고 백성이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지금 도선이 비보했던 시설이 허물어지고 철거되어 거의 다하였음을 보고 감히 배운 바로써 단자(單子)를 써서 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듣건대 홍문관에서 신의 말을 허탄하고 망령스럽다고 탄핵하자, 신의 벼슬을 파면하라고 명하시니, 심장과 간장이 함께 찢어지는 듯하여 몸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일(天日)의 밝음을 다시 보고 어리석은 마음을 만의 하나라도 아뢰게 되겠습니까?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허물을 보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어짊을 안다고 하였고, 온전하기를 구하다가 훼방을 당하는 것은 어진 사람이 용서하는 바인데, 만약 지금 분변하지 아니하면 천년 후에 누가 신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이는 신이 성명(聖明)한 조정에서 밝히지 않을 수 없는 바입니다. 역대의 훌륭한 시대에도 모두 술수를 공부하였던 선비가 있었습니다. 여재는 [삼원총록]을 편찬하였고, 호순신은 [지리별집]을 지었는데, 모두 유신(儒臣)으로서 술업을 겸임하였으나 당시에 잘못이라고 아니하였고, 후세에 높여서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만약 술수를 쓰지 아니한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그만둘 수 없는 것이라면 홍문관의 논박은 마땅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국초에 정승 하륜은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으로서 나라의 원훈(元勳)이었습니다. 겸하여 그는 술수학에 능통하여 여러 학의 임무를 맡아서 산천의 높고 낮은 데를 오르내리며 답사하여 드디어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고, 숭례문 밖에 못을 파고 흥인문 안에 산을 만들었는데, 모두 도선의 비보술을 썼으나 당시에 괴이히 여기지 아니하였고, 후세에도 다른 의논이 없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음으로 생각하건대 술수의 말을 역대에서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지금은 괴이하게 여기고, 술수의 선비를 역대에서는 모두 배척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논박하니 무엇 때문입니까? 신이 경연에서 사표의 임무를 가졌으면서 감히 비보의 말을 하였다면 홍문관의 배척하는 의논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이미 술수의 임무를 신에게 맡겼는데, 신이 만약 부끄러워하여 하지 아니하면 이는 불충이며, 알면서 말하지 않으면 이는 곧지 못한 것입니다. 신이 본 바의 길흉을 도선의 글에서 질정하려고 한 것은 바로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지극한 정성입니다. 제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재주를 파는 꾀가 아니며, 불교를 숭상하는 뜻이 아닙니다. 신과 같은 자는 형창(螢窓)의 끝 재주이고, 초모(草茅)의 천한 몸으로서 지위가 이미 높고 벼슬이 이미 나타났는데, 다시 무엇을 요구하여 스스로 재주를 팔고자 하겠습니까? 다만 뒤에 오는 선비가 신의 배척 당함을 들으면 누가 즐겨 낮고 더러운 재주를 배워서 유신의 논박에 맞서려고 하겠습니까? 신은 두렵건대 술수학이 장차 전하지 아니하고, 드디어 끊어질까 염려됩니다. 세조 대왕께서 문신 중에 나이가 젊은 무리를 뽑아서 술수의 이름을 나누어 칠학을 설치하였으나, 마침내 한 사람도 부지런히 배워서 재주를 이룩한 자가 없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모두 영달을 바라고 구하는 것으로만 마음을 삼고 술수의 이름을 부끄럽게 여기는 때문입니다. 신의 이 글은 복직을 바라는 것이 아니며, 그 재주의 능함을 스스로 자랑함도 아닙니다. 오지기 어리석은 마음속을 드러내어서 신총(宸聰)에 상달하려고 할 따름입니다.”최호원은 자신의 풍수를 도선의 풍수임을 분명히 하고 도선의 비보 풍수로서 황해도 일대에 드는 질병과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또한 그가 조정, 특히 홍문관에서 자신을 파면하라는 요구에 맞서 다시 한 번 비보풍수를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해야 하는 까닭을 상소하였다
최호원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지극한 정성"이며 도선의 비보풍수학이 더 이상 계승되지 못할까 염려한 것이기에 자신의 벼슬자리를 연연해서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비록 선비출신이지만 풍수학인으로서 입장을 분명히 한 셈이다. 최호원이 도선의 비보풍수술을 장려해달라는 상소를 올린 그 이튿날, 즉 1월 9일부터 다음달인 2월 1일까지 홍문관을 비롯한 대신들은 최호원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와 논의로 조정은 시끄러워진다. 1월 9일자 홍문관에서 최호원을 처벌해야한다는 상소 가운데 핵심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최근 최호원에게 병조참지를 제수하였는데, 최호원은 비록 유과(儒科)의 출신이라 하더라도 본래 방기(方技)를 익혀서 청론(淸論)에 용납되지 못하였는데, 한 번 제목(除目)이 나오자 유식한 선비가 놀라지 아니하는 이가 없습니다.(중략) 이제 듣건대 최호원이 도선의 비보술을 올려서 무릇 고려 조의 탑표(塔表) 등의 물건을 모두 다시 세우려고 하였다 하니, 성명(聖明)한 조정에서 이같은 요망한 말을 전하께 올리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신 등은 마음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최호원이 비록 아무리 체통이 없는 자라 하더라도 문자를 대강 아는데, 어찌 이 술법의 요망함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이는 그 술법을 팔아서 임금의 은혜를 바라는 꾀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사헌부에서는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직첩을 모두 뺏은 후 유배 3천리에 처할 것'을 아뢴다. 성종 임금은 이에 대해 당시 대신들과 논의를 한다. 이때 정창손, 노사신 등과 같은 일부 대신들이 '최호원이 비록 그가 유자일지라도 직책상 풍수술에 관한 상소를 올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여 최호원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도선의 비보설을 복고시키자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당시 대신들의 주장들은 분분하여 대부분의 대신들의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들의 주장에서 도선의 비보풍수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도선의 주장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은 영의정에 오른 사람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최호원은 또한 사리를 알 만한 사람인데 도선의 말을 믿고 현혹되어 상소를 하여 뭇사람을 현혹시켰으므로 요사스럽고 올바르지 못합니다. 진실로 선비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요망한 글을 지은 것이 아니고, 단지 도선의 술수를 믿고 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서와 요언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여 죄를 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당대를 이어 최고의 권력을 지녔던 한명회(韓明澮)와 이극배(李克培)의 주장에서도 그들의 비보풍수에 대한 주장이 나타난다.
“국가에서 제학(諸學)의 잡술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호원은 요망한 말을 믿고 현혹되어 거듭 밝히기를 계청하였으니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으나, 다만 율에 비추어 보아 과중합니다.”왕실과 연관이 있어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심회와 윤호(尹壕) 또한 자신의 주장에서 비보풍수를 요술로 지칭하고 있다.
“최호원이 요망한 말을 계달하였으니 죄가 진실로 중합니다. 그러나 업으로 삼고 있는 바에 의하여 백성을 위해서 해를 없애려고 한 것에 불과합니다. 곤장 1백 대와 유배 3천리는 너무 과중한 듯합니다.”
반드시 반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사신(盧思愼)의 주장은 완곡하지는 않아도 최호원의 비보풍수를 이해하려고 한 듯하다
“최호원은 단지 도선의 비보설을 글을 거듭 밝히려고 하였을 뿐이고, 현재 전하여 쓰지는 않아 한 사람도 그에게 현혹된 일이 없으니, 죄에 대한 율이 합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반드시 그럴까? 후인들이 문장가, 혹은 대정치가라고 추종하거나 칭송하는 당대의 거우와 석학들도 정치 논리에 따라, 혹은 당대의 국시에 따라 최호원을 핍박하고 결과적으로 비보풍수를 업수이여겼다. 서거정의 말이 그렇다.
“참위서는 으레 모두 정도에 어그러진 것이므로, 도선의 비보설은 황당하고 괴이함이 더욱 심합니다. 고려가 삼경(三京)·삼소(三蘇)라는 말에 현혹되어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대중을 동원한 것이 거의 쉬는 해가 없었으나, 화란과 패망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그런 글을 얻는다면 오히려 불살라야 마땅할 것인데, 하물며 하나하나 존숭하고 장황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최호원은 선비로서 요사스러운 의논을 주장했으니 진실로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호원은 유독 경서의 학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술수를 자기의 임무로 여겼으니, 그가 망령되게 술수를 논한 죄는 다른 유사에 비할 때 마땅히 가볍게 해야 합니다. 요망한 말로 대중을 현혹시킨 율에 처함은 과중한 듯하니, 낮추어 가벼운 법에 따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느 누가 대세를 저버리겠는가? 허종과 이파 또한 거들었다.
“최호원이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서 위로는 성상의 총명을 속이고, 아래로는 대중의 듣는 바를 현혹시켰으므로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대신들이 최효원을 업수이여긴 듯하다. 결국 비보풍수를 술수로 규정한 듯한데 손순효(孫舜孝), 박성손, 권정, 이유인의 의견이 그렇다.
“최호원은 한갓 풍수를 업으로 삼아 대체를 알지 못하고서 정도에 어그러진 말을 가지고 신총에 아뢰었으니, 그의 죄와 이 율문은 서로 맞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임금을 섬기는 데 의리가 없었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권찬은 완벽하게 풍수지리에서 비보풍수를 잡술로 매도하였다.
“최호원은 과거 급제출신이면서도 음양 잡술을 자기의 임무로 여겨 망령되게 도선의 비보설을 끌어내어 위로 천청을 번독하였으니 죄가 진실로 큽니다. 다행히도 성상의 은덕을 입어 파직되기만 하였는데도 또한 징계되지 않고 번독하여 상소하여서 기어코 반드시 믿게 하려 하였으니, 이 율에 의해 죄를 과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합니다.”
이숭원, 김종직, 이칙(李則)은 비보풍수를 현혹이라 본 듯하다
“최호원이 이미 비보설을 가지고 글을 올렸으니, 이는 온 나라를 현혹시킨 것입니다. 지금 요사스러운 말을 가지고 세 사람 이상의 대중을 현혹시킨 율에 해당시키는 것은 적당하지 못합니다. 최호원의 마음은 오직 자기의 그 잡술을 팔아 진출하여서 임용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사헌부에서 추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였고, 조율이 또한 합당하게 되지 못하였으니, 다시 추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어서 조율을 고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어세겸, 이경동, 강자평 또한 자신의 의견에서 최호원을 몰아 세우며 도선의 비보풍수를 방술로 규정지은 듯하다
“최호원은 본래 풍수를 업으로 삼아 스스로 소견을 가지고 위로 천총에 아뢴 것입니다. 그의 본의가 당초부터 고의로 요사스러운 말을 하여 대중을 현혹되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도선의 비보설은 정도에 어그러짐이 막심합니다. 만일 그 방술을 따르기로 한다면, 반드시 아무 땅 아무 방위에는 마땅히 절과 탑을 세워야 하고, 아무 산은 파버려야 하며, 아무 내[水]는 막아버려야만 될 것입니다. 오활하고 괴이한 말들이 어지럽게 일어나 무릇 국가를 유지하는 방법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게 되면 인의와 같이 일정 불변한 도리를 어떻게 여기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는 나라 일을 하는 사람이 마땅히 통렬하게 끊어야 할 바입니다. 최호원은 유신으로서 그런 말을 배척하여 제거하지 못하고, 도리어 스스로 숭상하고 믿어서 누차 진계하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이세좌는 최호원의 주장을 요사스러운 말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견이라는 말로 최호원의 주장을 흐리고 있는 바다
“최호원은 유학 출신이므로 사정(邪正)의 구분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감히 요사스러운 말로 성명(聖明)을 모독하였습니다. 따라서 사헌부에서 아뢴 대로 해야합니다. 그러나 단지 스스로 의견을 올렸을 뿐이고, 전용하여 대중을 현혹시키지는 않았으니 그 율이 합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박숭질은 최호원을 술사로 보았던 듯하다.
“최호원은 술사로 자처하니 그의 말을 깊이 책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허탄하고 망령된 말을 가지고 위로 성총을 번거롭게 하였으므로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사헌부에서 아뢴대로 하소서.”이에 성종 임금은 직첩을 빼앗고 유배시키는 것으로 매듭을 짓는다. 최호원이 주장한 비보를 하고자 하는 풍수지리설이 문제는 아니었다. 최호원이 유자로서 승려인 도선을 종사로 삼았던 것이 대신들의 미움을 산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최호원을 처벌할 생각은 없었다. 7개월 후인 성종 16년 9월 그를 복직시킨다. 사실 누구라도 비보풍수를 모를 리 없고 한성의 비보를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취한 것을 대신들이나 성종이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사실 최호원이 비보풍수설을 주장하다가 수난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 일이 아니다. 그보다 10년 전의 일이다. 그가 대구 부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비보풍수책으로 물길을 바꾸었다가 파면을 당한다. 성종 6년 서기 1465년 왕조실록의 한 대목이다."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대구 부사 최호원은 바로 농사철을 당하여, 혹 훈련을 빙자하며 군대를 발동하여 제방을 쌓고, 혹 속전 징수한다고 칭탁하여 삼실(마사), 개가죽, 나무, 쇠, 호미, 쟁기, 솥 등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이 없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탐학하고 잔혹함이 막심합니다. 청컨대 그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같은 주장에 상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의 주장대로라면 최호원은 본래 풍수를 업으로 하여, 그 이롭고 해로운 말로써 사람을 고혹하더니 이제 군대를 발동하여 방천한 것도 또한 풍수술의 시킴을 당한 것이다. 방천을 하여 물길을 돌렸다는 것은 비보 풍수술 가운데 하나이다. 최호원의 파면은 도선의 비보풍수가 결정적으로 패배를 상징하는 한 단면이다. 도선의 비보풍수는 조선의 몰락 때까지 왕가나 사대부 유학자들에 의해서 철저히 배척된다. 사실 내면으로는 양반가문에서도 비보풍수를 신봉한 흔적이 적지 않으니 이 또한 우습고도 이율배반적인 일이다.
정치와 양반가에서 이처럼 설왕설래가 있음에도 민간에서는 여전히 도선의 비보풍수가 행해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민간에서는 그것이 도선의 비보풍수인 줄도 모르고 단순한 기층신앙으로서 여기고 행하기도 하여 지금은 민속학자들에게 연구거리만을 제공하는 실정에 이르고 있다.
6 맺음말
신라시대의 승려출신이었던 도선국사는 부족한 땅의 기운을 찾아서 보완하는 비보풍수의 대가였다. 이러한 풍수는 고려 시대에 그대로 전수되어 고려시대 풍수의 중추적인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로 넘어가면서 우리나라 풍수는 비보풍수보다는 이기론을 중심으로 한 풍수 이론을 따르게 되었다.
풍수하면 바로 떠올리는 것이 묏자리이다. 소위 죽은 조상의 묏자리를 언제 어디에 자리 잡아야 하는지, 또 그 방향은 어느 쪽을 향해야 하는지 등과 관련된 어려움에 직면해서 떠 올리는 것이 풍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은 조선시대의 음택풍수에 기인하는 바 매우 크다.
극단적으로 고려의 풍수가 전대를 거슬러온 자생풍수와 불교문화의 결합이라 한다면 조선의 풍수는 음택풍수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의 조상숭배와 중국풍수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음택풍수의 결합이라 볼 수도 있다.
자생풍수는 풍수가 한반도의 자연환경 특성을 반영하여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온 점을 강조한 표현이다. 이에 반해 중국의 이론풍수는 한국풍수 역사상 조선 전기부터 중국에서 수입되어 현재까지 유행하게 되는 것으로 고려시대까지의 자생풍수와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자생풍수와 중국 이론풍수라는 구분은 시기적으로 볼 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풍수의 특징을 대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고려시대 풍수의 내용이 조선시대 유행하고 있었던 중국의 이론풍수와 구별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과연 그 내용이 무엇이었을까를 구체적으로 정리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고려 이전부터 이 땅에 사용되었고 적용되었던 비보풍수가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유교사회에서 불교의 잔재로 남아있던 비보풍수를 배척하는 듯 보이지만 유교학자들마저도 비보풍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이율배반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위이지만 민간에 알려져 이어온 풍수이론의 활용이라는 측면과 유교를 국시로 삼은 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음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간(全其間)에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양반사회에서 표면적으로 비보풍수는 도선의 풍수비술이라 하여 배척하였지만 이는 도선의 풍수비법이 불교라는 종교의 색체를 띄고 있어 유교 숭상의 조선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이라 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 유학자들은 비보풍수를 요술이니 비술이니 하며 배척하였지만 양반사회에서 비보풍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당시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던 듯 하다.
'기타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새해부터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다보니... (1) | 2026.05.15 |
|---|---|
| 조선시대 대동여지도와 현대의 지도... (0) | 2026.05.14 |
| 대전 성심당(聖心堂) 케익부띠끄 본점 대현공(大玄空) 풀이 (0) | 2026.05.12 |
| 대현공 삼결을 얻은 이후로... (0) | 2026.05.11 |
| 서적에 따라 2원8운 수운(水運)과 산운(山運) 계산법이 서로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0) | 2026.05.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