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마파의 기초 사가행강의
<2005.12.30> - 첫째날
제17대 까르마파 우겐틴레도제 설하심
時間:2005年12月30日~2006年1月3日
지점 :안도 바라나시 사르나트 까규파 지혜금강대학
번역: 석 설오
먼저 해도큰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과 여러불자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여러분 모두가 항상 길상하고 만사형통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무阿彌陀佛! 이번에 여러분들이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이곳까지 오셔서 이렇게 수승한 인연을 맺게되니 저 자신 너무도 기쁩니다.
오늘은 실수행의 법을 전수하는 첫째날입니다. 정식으로 가르침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먼저 저의 생각을 좀 말씀드리고 내일부터 정행의 가르침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正行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대부분 직접 중국어로 강의를 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오늘부터 바로 중국어로 강의를 해야하겠지만 현재 나의 중국어 실력이 부족한데다 더구나 중국사람들앞에서 준비를 잘하지 않고는 제가 긴장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티벳말로 여러분들에게 저의 견해를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오늘 아주 수승한 성지에 함께 모였습니다. 이곳은 교주이신 석가모니불께서 인간세상에서 처음으로 설법을 하신 초전법륜 성지-녹야원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처음 법문을 하셨을 때 그 당시 와서 법을 들은 사람은 겨우 다섯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수백명의 불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가피력이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더 흥성했고 세상에 널리 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불법이 더욱 더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배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불법에 이미 신심이 있는 불제자뿐만 아니라 불법을 신앙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부처님 경전가운데에 설하고 있는 일체중생들을 해치지 않는 자비사상의 실천에 매료되어 점차 불법에 대해 신심과 환희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불법을 신앙하기 시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 부처님의 제자를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무량한 일체중생들을 차별없이 모두 이롭게하기 위하여 법을 설하셨기 때문입니다.
동양에는 과거에도 많은 불교종파와 전승이 있었고 지금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도의 대승불법이 일찍이 전해진 곳이 바로 중국입니다. 이것은 매우 수승하고 소중한 역사입니다.
불법이 인도에서 생겨났으나 시절의 변천을 따라서 인도에서는 불교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불법의 가르침이 다른 나라에 전해져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불법이 크게 발전하여 이미 중화문화의 한 부분이 되어 실로 한족 문화의 소중한 보배가 되었습니다.
옛말에 道高魔盛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법이 성행할수록 마장도 더욱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중국에도 불법이 흥성할 때에 많은 마장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역대 조사님들의 큰 용기와 큰 지혜로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정법의 맥을 유지해왔습니다.
저도 두 차레 중국에 가서 많은 사원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당시에 수행이나 견해에 관해 깊은 대화를 가질 기회는 없었지만 다만 사찰을 순례하고 불상과 경전 탑들을 참배하고 스님들을 만남으로서 그 전승의 가피를 체험하고 매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매우 영광스럽고 뿌뜻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과거생의 인연소치로 말미암아 어려서부터 중국문화와 연결고리가 있었고 이와같은 연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으로 전해진 불법과 문화를 매우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이고 도반입니다. 우리가 석가모니부처님의 제가가 된 후에 만약 스물 네시간동안 항상 자신을 이롭게하고 남을 이롭게하는 자리이타의 동기와 수행하는 마음을 지키고 그 마음과 행위를 일생동안 관철할 수 있다면 정말 바람직한 일인 것입니다. 저 자신도 평소에 늘 이렇게 자신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할 것인가를 알기 전에 먼저 부처님의 견해와 수행에 대해서 관찰하고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는데에도 먼저 그 일에 대해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동시에 그 일에 대한 신심이 생겨야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또 신심도 없다면 그 일을 성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하여 철저하게 그 일을 잘 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불법을 배우는 것도 같습니다. 만약 좋은 성과를 얻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곧 진실로 불법이 어떻게 自利利他를 실천하는지 그 이치를 잘 이해하고 아울러 신심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불법이 진실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려면 먼저 법을 설한 교주이신 부처님께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불법승 삼보님께 귀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불법승삼보는 왜 귀의처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귀의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바로 부처님께서 갖추고 계신 공덕인 것입니다.
공덕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공덕있는 사람은 많이 있는데 부처님의 공덕만 특별히 다른 무엇이 있고 부처님의 공덕만이 특별히 소중하고 수승한 것인가고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두 가지 수승한 공덕을 지니고 계신데 그것은 바로 지혜와 자비입니다.
먼저 지혜의 공덕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큰 지혜라고 말하는 것은“일체법을 두루 다 아는 지혜(遍一切智)”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법을 다 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범부의 마음으로 추측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현상계의 물질이나 色法에 대해서도 습관에 젖어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습관적인 사고방식으로 어떤 것이 큰 지혜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면 물을 끊이게되면 물의 온도가 어느 정도에 도달하게 되면 물이 끓어 오릅니다. 그러나 만약 계속 불의 온도를 올리면 물이 말라버리게 됩니다. 범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버렸기 때문에 큰 지혜의 공덕에 대해서 듣더라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옛적에 法稱이나 陳那와 같은 논사들이 많은 사람들이 큰 지혜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을 고려해서 해석해서 말씀하시기를, 遍智란 해탈을 성취하고자하는 제자들에게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그들이 필요로하는 것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다 아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한발짝 더 나아가서 만약 遍智가 몸에 기생충이 몇 마리 있고 이 세상에 생명체가 얼마나 있고 사람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것을 가르킨다면 이러한 지혜는 우리가 귀의할만한 대상이 안된다라고 부연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러분들을 일깨워드려야겠습니다. 이상 큰 지혜에 대한 해석은 논사들이 신앙심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에게 방편으로 설한 것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러한 해석을 듣고 “어-- 부처님이라구 뭐든지 다 아시는 건 아니구나.”라고 이해한다면 제 마음이 굉장히 서글플 것입니다.
그럼 큰 지혜의 공덕을 갖춘 것만으로 부처님께서 진실한 귀의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2006년 1월 2일 까르마파 성하님께 감사의 공양을 올리고 있는 설오스님
그럼 오직 대지혜의 공덕만 갖춘 것으로 붓다께서 진실한 귀의처가 되기에 합당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인도에는 많은 티벳 학생들을 위한 학교가 있는데 요즈음 학생들이 과학에 매우 흥미를 느끼고 있어서 그 아이들은 부처님은 과학자처럼 총명하고 머리가 있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붓다는 큰 지혜를 갖춘 것만이 아닙니다. 더욱 더 찬탄할 만한 것은 붓다는 대자대비한 마음을 갖추고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아주 머리가 좋고 총명한 사람이 만약 타인을 이롭게하고 다른 이를 돕고자하는 마음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의 총명과 재능은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자나 의지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공덕은 다만 역사적으로나 위인전에 기재되어 있는 붓다의 대지혜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수행하고 있는 모든 법이 부처님께서 우리를 이롭게하고 도와주기 위해서 대자비한 마음으로 친히 설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가장 먼저 보리심을 일으키시고 그 후에 무량겁동안 보살도를 행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최후에 불도를 성취하셨습니다. 성불하신 후 최초에 대원을 세운 바대로 법륜을 굴리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께서는 오로지 중생들을 이롭게 하겠다는 대비심, 그 한 마음을 계속 유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유한 후에 우리는 부처님에 대하여 깊이 있게 알게 되고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하신 분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발짝 더 나아가서 자비로운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자신을 이롭게 하고 지혜를 증장케 하는 법문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도와줄 수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불법을 수행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불법이 청정하고 정확한 법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 중에 누군가가 “불법이 확실히 좋기는 하지만 수행을 하거나 안하거나 별상관은 없겠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불법은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을 하는가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동안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게 되어 있고 또한 많은 잘못을 범함으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자신을 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사회, 심지어는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와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가 오직 불법을 수행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만약 질문사항이 있으면 내일 두 번째 시간에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비록 중생들마다 깊고 낮은 느낌의 차이는 있지만 고통을 여위고 행복을 얻고자하는 마음은 똑 같습니다. 사람은 유난히 고통을 떠나고 어떠한 행복을 얻고자하는 강렬한 느낌이 있지만 비교해보면 많은 곤충들은 아마 그렇게 강렬한 느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중생들이 끊임없이 행복을 구하고자 노력하고 끊임없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직접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출생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곧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복을 얻으려고 생각하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만족할 만한 행복을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대에도 만족한 사람은 없었고 현재에도 “내가 만족스럽다. 이젠 됐다.”라고 말하고 안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21세기에 처해있는 우리는 옛날과는 달리 마치 마귀처럼 예측할 수 없는 다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전을 생각해보면 약간의 자연 재해외에는 인위적인 재앙은 비교적 적었습니다. 현재는 과도기에 있는 시기입니다. 인류가 끊임없이 거대한 고통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미 세계의 멸망위기까지 영향을 미치기 되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정확하고 좋은 이상과 소망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일찍이 만족을 얻은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도대체행복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는 것인가를 묻고 사유하고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항상 밖에서만 행복을 찾는다면 행복은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고 마음도 만족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른 바 만족이라는 것이 밖에서 찾은 것으로 보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심으로부터 생겨나는 일종의 만족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자신의 마음으로 돌이키고 안으로 찾고 안으로 관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으로 관찰할 때 우리는 자신의 많은 괴로움, 많은 잘잘못과 영원히 만족하지 못함등의 문제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사실상 일어난 원인은 바로 우리의 나쁜 마음인 탐심, 진심, 자만심, 질투심,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고 이모든 과실의 주요인은 바로 무지와 무명인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모두 행복한 결과를 바라고 나쁜 결과는 원치 않습니다. 果위에 우리는 취하고 버릴 줄은 알면서 因위에서 우리는 자연스레이 선하지 못한 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것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모르는가하면 나쁜 因으로는 영원히 선한 과보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마음속에 원하는 것과 실제의 행동은 완전히 상반되어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고 정신없이 계속해서 악업을 짓는 일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트북을 사용하고 계신 까르마바
무명이란 마음속에 있는 욕구가 만족을 얻지 못하고 실현되지 못함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무명 속에 있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불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저는 불법이 다만 일종의 견해나 학설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불법은 우리의 무명을 없애주고 복덕이 증장되게 할 수 있는 심오한 지식이요, 아주 수승한 방편법인 것입니다.
범어로는 불법을 다르마(Dhama)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하나는 허물을 고친다는 뜻이고, 둘째는 구원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변화를 통해서 우리들을 고통 속에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변한다”라고 형용한 것은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청부지 어린아이가 학교를 가서 차차 글자를 알기 시작하고 더 많은 지식을 배움으로서 앞날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아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에서 철이 들기 시작하고 심지어 타인을 이롭게하고 지도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는 것이 바로 변화의 힘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각자 사람마다 본래 공덕과 지혜를 갖추고 있는데 다만 어떻게 운용해야할 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을 수행하고 배움으로서 본래 구족한 공덕과 지혜를 분명하게 펴고 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공덕과 지혜는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것이지 불법의 수행한 후에 비로서 만들어진 새로운 물건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대승의 가르침에서는 특별히 慈心、悲心과 菩提心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본래 구족하고 있는 것이지 불법이 우리에게 새롭게 慈心과 悲心의 종자를 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 불법을 수행하는 것이 우리자신의 마음과 일생동안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불교를 배울 아무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불법과 우리자신의 생활이 그토록 연결되어 관계가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 우리의 慈心과 悲心이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위대하게 아직 완전히 개발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자비의 종자나 혹은 사랑하는 마음의 원소는 확실히 모든 사람마다 갖추고 있고 심지어는 곤충과 같은 미물에게도 있습니다.
불법의 수행은 바로 우리자신이 본래 구족하고 있는 慈愛종자를 개발해내는 방법이어서 우리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불법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도 아니고 혹은 한편의 화려한 문장도 아닙니다. 불법의 배워야 할 것이고 배우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불법은 또한 실천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일종의 지식으로 광대한 이익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의 헛된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과 자신의 마음과 긴밀히 연관되어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쓸데없는 공허한 말만 해서는 아무 이익도 없습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입니다. 자비를 수행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렇지만 이 시대에 실천하기에는 좀 어려울 것같다구요.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머리 속이 온통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상업적인 경쟁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해서 조금도 들어 갈 틈이 없고 자비를 들어갈 틈새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전혀 그렇치않습니다. 아마 확실히 우리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손해하려는 마음이 조금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선량한 마음을 본래 구족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느 한 가족이 모여서 한 끼 식사를 즐겁게하고 노래하고 아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방송이나 신문매체에 보도가 되지 않고 누구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느 날 부부가 싸움을 심하게 하고 심지어 법정에 까지 가게되면 신문매체에서 흥미를 가지고 반드시 보도를 할 것입니다. 이 예에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화합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보도꺼리가 않됩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싸우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참을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자비심은 이 시대에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사유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에게 탐진치(貪嗔痴)의 마음은 없어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자비심과 사랑이 없다면 그는 생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날 끝)
까마바법회를 주관한 대만스님들 (존자님과 회의하고 있다.)
까르마파 사가행강의 둘째날
오늘은 정식수행부분으로 들어가서 하사도의 수행차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가행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대부분 밀교수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다라공양, 금강살타수행, 귀의대배등 다 밀교수행과 관계된 수행인데 만다라공양등은 네 가지 不共加行이고 사람 몸 받기 어렵다라든가 죽음이무상함을 사유하는 것은 共加行입니다. 이 不共加行과 共加行 두 가지는 명칭도 다르고 의미도 다릅니다.
오늘은 주로 일반사람들의 수행차제(道次第加行),혹은 下士道의 수행차제법에 대해 말씀드릴 것인데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음이 무상함을 사유하는 등 네 가지 共加行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행수행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귀의의 의미를 알고 귀의계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귀의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불교도인가 불교도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근거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근거는 귀의를 했는가 안했는가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제자로서 귀의의 의미와 종류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계속해서 귀의를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는 귀의의 因과 緣입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경전과 후대에 조사스님들이 저술한 논장 가운데에서 설한 가장 중요한 因與緣이 두 가지가 있는데 공포심과 신심입니다.
공포심 때문에 귀의를 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무서워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고통입니다. 누가 무서워하는가 하면 바로 자신입니다. 두려운 것은 윤회의 고통입니다. 苦에는 총괄적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苦苦、壞苦와 行苦입니다.
여기에서 주로 두려워할 것은 행고(行苦)를 가르킵니다. 왜 주로 行苦를 두려워하는가하면 苦苦는 불제자나 사람뿐만 아니라 축생이나 곤충들까지도 苦苦에 대해 느끼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래서 苦苦의 공포는 진정한 공포롤 볼 수 없습니다.
壞苦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괴멸해 가는 고통에 대해서 느끼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상을 관하는 관법수행을 통해서 곧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로 인식해야하는 것은 行苦입니다. 우리는 모든 업과 번뇌를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모두 고통이고 苦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업과 번뇌를 통해서 생겨난 모든 有爲法이 모두 고통이라는 것을 관찰했을 때 이 점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귀의를 하려고 생각한다면 이것을 비로소 진실하고 이익이 되는 힘이 있는 귀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원력을 가져야합니다. 또한 누가 나를 도와서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누가 나를 구해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구원해줄 수 있는 분에게 신심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신심으로 인해서 귀의하는 것입니다.(因信心而歸依)
여기에서 우리는 가장 먼저 어떤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하면 바로 현재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는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히 중국사람들이 미신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한 신도가 달람살라로 나를 보러 왔습니다. “지혜롭고 판단력있는 신심을 가지는 것은 물론 좋지만 비록 미신이라고 나쁘게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미시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하고 내 생각을 물었습니다.
중국어에서 迷信 혹은 迷路라는 뜻이 헷갈리고 확실히 알지못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미신에 대해 해석하여 말하기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귀신같은 것인데 어쨌든 근거없는 신심을 미신이라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불법의 삼보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삼보님께 신심을 낼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신심이 상근기자의 지혜있는 큰 신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미신이라고 치부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불법승 삼보님이 본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억지로 지어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보님는 진실하고 정확한 귀의처입니다. 왜냐하면 삼보님께 귀의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또한 진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이유인지 모르고 삼보님에 때해서 신심을 내는 것도 아주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신심을 유지해야할 것입니다.다만 한발짝 더 나아가서 우리는 지혜와 판단력을 길러야 합니다. 철저하게 모든 의심을 끊어야 합니다. 이렇게하면 미신이 곧 해탈하여 正遍智의 果位를 성취하는 종자가 될 것입니다.
둘째는 귀의의 대상입니다: 귀의의 대상은 불법승 삼보님입니다.
먼저 불보, 붓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의 의미에는 증장한다, 발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티베트어에서는 붓다를 의역해서“상게”라 했습니다. 이 가운데 “게”는 곧 증장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다 덮혀있는 없장을 소멸한다는 뜻으로 “상”을 덧붙힌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분이 부처인가를 알려면 먼저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그들의 교주는 무시이래로부터 본래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관점에서는 교주이신 석가무니불이 본래 성불하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범부이셨고 성불하고자하는 원력을 가지고 차제를 거쳐서 수행하여 불도를 성취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과정은 범부의 지위에서 차제로 수행하여 성인의 지위에 오르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도 마찬가지로 성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성불의 의미는 마음 속에 번뇌와 여러 가지 習氣의 장애를 없애는 것입니다. 만약 한 물건이 우리에게 본래 있다면, 우리의 본질의 일부라면 이 물건을 없애버린다면 바로 자신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호랑이 몸에 얼룩무늬를 없앤다면 곧 호랑이를 없애버리는 것과 같은 뜻인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는 그렇치 않습니다. 번뇌는 우리 본질의 일부분이 아닙니다. 평소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번뇌가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자비심과 사랑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금방 태어난 아기가 사랑과 관심으로 보살피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번뇌는 우리 본질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업장을 소멸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제도 말씀드린바대로 어떤 사람은 모든 업장을 없애고 모든 공덕을 갖추는 것이 실제로 불가사의하고 실현불가능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것을 밖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외부에 물질은 한계가 있어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심을 돌아보면 우리는 마음의 힘이 한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이러한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든 업장을 끊고 모든 공덕을 갖출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이 무량무변하다는 관점은 불교에만 있는 견해가 아닙니다. 특히 과학이나 심리학에서도 모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법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법보는 성자의 마음가운데 구비되어 있는 道諦와 滅諦를 말합니다. 도제(道諦)는 탐욕을 없애는 방법이고 탐욕을 없애고 욕망을 여윈 것을 멸제(滅諦)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가르침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각종 경전이나 부처님의 말씀을 적어둔 문자들은 다 법을 대표하는 것이니 법보로서 존중해야 합니다.
법보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부처님께 귀의했더라도 부처님께서 우리를 윤회에서 바로 구원해서 해탈하게 하시지는 못합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그러한 능력을 갖추셨더라면 윤회계가 이미 텅 비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신 후 열반에 드시고는 나머지는 우리 자신의 일인 것입니다. 스스로 해탈도와 해탈 법문을 잘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많은 제자와 많은 사원을 가지고 불사를 크게 하신 한 큰스님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많은 사람들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와서 스님께 묻고 조그만 일까지도 다 큰스님께서 신경을 쓰고 처리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매일 사람도 일도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스님을 모시던 사람들은 보고 걱정이 되어 큰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이렇게 바쁘고 일이 많으시니 장차 불사가 더 커지면 번거로운 일들이 갈수록 많아 질 텐데 쾐찮으시겠습니까?” 큰스님께서 그 말을 듣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상 아직은 괜찮네만 만약 어느 날 정말로 힘들고 안되겠다고 느껴지면 내가 주무랑마봉이 있는 산으로 가면되걸세.” 그래서 큰 스님은 정말로 주무랑마봉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주무랑마봉이 워낙 유명하고 좋은 산이다보니 등산오는 사람도 많고 주변환경이 좋다보니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큰 스님께이것저것을 물었습니다. 결국 큰스님은 할 수 없이 달나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달나라에도 외국인들이 갈수록 많이가서 상황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아는 사람만 찾아왔는데 지금은 모르는 사람들까지 찾아오겠으니 결국 전세계 사람들이 달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스님은 생각을 내어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승은 밖에 어느 곳에도 있지 않고 그대들의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러니 자신에게 있는 문제들을 자기 마음에 물어보면 된다.” 이렇게 큰 스님께서 말씀하신 후 큰스님 귓전이 훨씬 청정하고 조용해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비유하고자하는 것은 비록 부처님께서 이미 열반에 드셨지만 우리가 일부러 부처를 다시 찾으려고 할 필요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이미 소중한 가르침을 보이셨습니다. 이 법이 바로 부처님 자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법을 보는 자는 바로 부처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불법을 들을 때 바로 부처님의 현신 설법을 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법보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변론을 하고 있는 라마들
이어서 승보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범어로는 ‘상가’라 하고 티베트어로는 ‘겐둔’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선을 향한 마음이 끊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승보의 표준정의는 이미 성자의 과위를 증득한 사람을 가르킵니다. 네 명의 비구가 모여있으면 승단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부처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시기를 네 명의 비구가 모인 곳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이 부처의 공덕을 갖추고있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승보에 대하여 우리는 공경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승보’란 우리가 수행하는 길에서 함께하는 도반을 말합니다. 세속생활은 물론 출세간의 불법에서도 친구는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중국의 손자병법에도 전쟁때에도 전우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생 가운데 우리는 많은 좋은 벗들을 의지해야 하는데 하물며 정변지의 불과를 증득하기 위하여 세세생생 끊임없이 노력해야하는 수행의 길에서 우리는 더우 더 좋은 벗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善友인지 惡友인지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만약 우리 곁에 있는 친구가 성자라 하더라도 만약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청정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아무런 이익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옆에 나쁜 친구가 있더라도 만약 우리가 언제든지 방일하지 않고 정념(正念)과 正知를 잘 지킨다면 그의 나쁜 습관이 자신에게 오염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거기에서 오히려 어떤 공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계셨던 때에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탁발을 하러 한 집에 가셨는데 그 집주인이 귀찮게 했다고 생각이 되어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욕적인 말투로 당신들은 거지같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미소만 띠고 서 있다고 욕을 하였습니다. 그 집주인이 계속해서 욕을 하였으나 부처님의 아무 반응도 얻지 못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실컷 욕을 하고 난후 화풀이도 할만큼 했고 화도 풀리고 해서 그 다음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 있었습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미소를 띠시고 물었습니다. “아직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지요?”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도 욕을 할 만큼 다 했소.” 이 때 부처님께서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물건을 하나 주었는데 그 사람이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티베트 사람같으면 상대방이 받기를 원하던 안원하던 간에 억지로 떠 안겼을 것입니다.(대중이 한 바탕 웃다.)
이 주인은 대답하였습니다. “만약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그냥 가져오겠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방금 나에게 많은 말을 하고 욕을 했지만 내가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니 도로 가져가시지요!”
이상 간단하게 삼보의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계속해서 설명할 것은 왜 삼보님은 우리가 귀의할 만한 대상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을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본생담에 과거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해치려고 미친 코끼리를 풀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미친 코끼리를 조복 받으셨습니다. 동물조차도 부처님께 공경심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이미 안팎의 공포를 없앤 분입니다.
둘째, 지혜로서 다른 중생들을 도와서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은 모든 공포에서 벗어났지만 만약 타인을 돕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것은 마치 두 팔이 없는 어머니와 같아서 자기 아들이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구할 방도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각종 선교방편을 구비하시고 중생들을 잘 조복하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면 당시 인도에는 알굴리마라라는 극악무도한 살인자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조복하지 못했는데 부처님께서는 말씀 몇마디로 긔 마음을 바뀌게 하여 그를 선한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셋째, 멀고 가까움이 없는 평등한 대비심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선교방편을 자신과 친한 사람만을 위해서 쓰고 원수나 적은 죽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일체중생에 대한 자비와 사랑은 멀고 가깝다거나 친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당시에 제바달다와 같이 시종일관 부처님과 경쟁하려고 했던 그가 어느 날 약을 먹고 소화를 시키지 못해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을 부처님께서 아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만약 내가 친 자식인 라후라와 제바달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똑같아서 조금도 분별이 없다면 제바달다의 병이 금방 나을 것이다.”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으로 해서 제바달다의 병은 그 자리에서 좋아졌습니다. 이 故事는 부처님의 대비심이 평등하여 私心이 없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거나 이익이되지 않거나 간에 다 도움을 주시는 부처님은 친한 이나 원수거나를 막론하고 다 대비심으로 대하시고 심지어는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나 도움을 주든 주지 않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보시는 분입니다.
부처님의 일대기에 부처님은 국왕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내시면서도 동시에 천한 거지나 천민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을 도와주는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러한 모습들 모두가 칭송하고 존경할 만한 것입니다.
이상 몇 가지는 주로 불보(佛寶)의 공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불보의 공덕은 이와같이 수승하고 불가사의합니다. 법보와 승보의 공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래서 삼보님은 우리의 귀의의 대상이 될 만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첫날 귀의의 이익에 대해서 해설을 하고 둘째 날은 귀의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내일 귀의계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인연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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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응답)
대만 제자의 질문: 어떻게 하면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어느 경전에서 주로 보리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요?
법왕 까르마파 답변: 내일과 모레 보리심계율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에 더욱 상세히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어느 경전에서 보리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사실상 모든 대승경전에서는 모두 보리심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전에서는 직접적으로 보리심이라는 단어를 거론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리심의 인(因), 혹 보리심의 과(果), 菩提心의 道, 보리심의 地를 수행하는 방법과 보리심의 공덕등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은 기본적으로 보리심을 여위지 않습니다. 특히 대승의 가르침은 주로 보리심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질문하신 분도 대승경전들을 많이 보시면 좋겠습니다.
까마바 사가행강의 셋째날
보드가야에서 종을 치고 계신 까마바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귀의의 분류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귀의계를 전수하겠습니다. 이곳에 중국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니라 많은 외국친구들도 귀의를 하고 싶어해서 통역을 몇 사람 더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 귀의라는 고유명사를 쓰던 안쓰던 간에 사실상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미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귀의의 뜻은 곧 서로 의지하곻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서부터 의지한 것이 곧 귀의입니다. 귀의의 본질면에서 볼때 우리는 매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에서 구경의 구원자는 자신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근원적인 고통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만 소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학자들이 처음부터 자신의 힘만 의지하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고통을 소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의지하고 귀의할 대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대상은 큰 능력을 구비해야 하고 진실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불,법,승 삼보님을 귀의의 대상으로 삼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귀의의 주요한 의미는 상호간에 서로 보살피고 신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사람이든지 삼보님을 굳게 믿고 구호자로 삼고자하는 마음만 있다면 귀의계를 받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왜 스승님앞에서 귀의계를 받아야만 하는가하면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계를 주시는 스승님의 우리의 참괴(慚愧)의 의지처입니다.
만약 우리가 혼자서만 귀의하겠다하고 귀의계를 받는다면 우리가 귀의계를 어겼을 때에다만 자신만이 마음을 낸 것이기 때문에 소홀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스승님 앞에서 귀의계를 받았다면 스승님께서 인도하시고 우리 눈앞에 한 사람의 증인이 있으므로해서 스스로 더욱 조심하고 성실하게 귀의계를 잘지키고 범하지 말 것을 경계하게 됩니다. 귀의계를 범했다하더라도 더욱 더 주의하고 동시에 이 귀의계를 더욱 더 소중히 여기게 됩니다.
비록 여기에서 불법승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귀의를 하지만 원만한 해탈의 과위를 증득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중에 한 가지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면 중병이 걸린 환자를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의사도 필요하고 약도 필요하고 또한 간호사의 보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원만한 불과를 증득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의사와 같은 부처님과 약과 같은 법과 간호사와 같은 승가의 보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2006년 1월 까마바성하의 사가행 강의를 듣고 있는 불자들
여기에서 사보가 아니고 삼보님이기에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말년에 출가한 한 노스님이 계셨습니다. 한 여신도가 그 스님을 신심으로 모셔서 베 두필을 공양올리고 법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설법을 잘 할 줄 몰라서 혼잣말로 말하기를..“무지하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구나.”하고 “무지가 고통이다”라는 말만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이때에 여신도는 이 말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무명으로 인해서 고통이 생겨나는 것임을 깨달아서 그 여신도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한 좀도둑이 신도가 스님에게 베 두필을 공양올린 것을 보고 몰래 노스님 뒤를 따라갔습니다. 집에 당도하여 스님이 집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뒤쫓아가서 베 두필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습니다. 노스님은 매우 놀라고 두려운 소리로 “나는 밖에는 못나가니 당신이 창문으로 받아가시오.”하였습니다. 도둑놈은 곧 한 손을 창문으로 들어밀었습니다. 노스님은 이어서 말하기를 “신도가 나에게 공양할때는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린 것이니 당신도 두 손으로 받아가야 하오!”
그래서 도둑놈은 두 손을 창문 안으로 내밀었습니다. 이때에 노스님을 얼른 끈으로 도둑의 두 손을 묶어서 기둥에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집밖으로 나와서 몽둥이를 들고 말했습니다. “나를 따라서 귀의를 하거라!” 한 구절 귀의문을 따라할 때마다 몽둥이로 모질게 두들겨팼습니다. 전부 세 번 귀의를 하고 세 번을 실컷 두들겨 패고는 도둑을 놓아 주었습니다. 도둑은 너무 아파서 일어나기도 어려워 간신히 다리를 절면서 돌아갔습니다. 도중에 한 사람을 만나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도둑이 말했습니다. “사실 나는 도둑인데 오늘 나보다 더 큰 도둑을 만나서 귀의문을 한 마디 따라할 때 마다 죽도록 얻어맞고 오는 길입니다.” 이어서 또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신통도 하시지요. 삼귀의만 말씀하셨기 망정이지 사귀의를 말씀하셨더라면 저는 아마 죽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 도둑은 부처님께 신심을 내어서 후에 축가하여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이후 까마바 성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의계를 설하셨고 한국불자들도 까마바 성하의 정식 귀의제자가 되어 법명도 받았습니다.
네 번째는 귀의의 배워야 할 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개별적으로 배워야 할 것 중에 버려야 할 세 가지입니다.
첫째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서 세간의 신들에게 귀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함으로서 중생들을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함으로서 나쁜 친구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마땅히 지켜야 할 세 가지는
첫째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서 불상의 작은 조각이라도 마치 부처님을 대하듯 공경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둘째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함으로서 경전에 글자 한자라도 법을 대하듯 공경하고 받들어야 합니다.
셋째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함으로서 스님들의 법의 한 조각이라도 공경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그 다음 공통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첫째 설사 생명의 위험과 이익의 유혹을 받더라도 삼보님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어떠한 필요에 의해서라도 다만 삼보님께 귀의하고 다른 외도들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언제 어디서든 삼보님께 공양올리는 것을 끊이지 말아야 합니다.
네째 자신은 물론 다른 이가 귀의하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다섯째 어떤 방향을 가든지 그 방향에 계신 불보살님께 절을 하고 예경해야 합니다.
까마바 사가행강의 세째날 질의응답
대만불자 질문: 법왕님께 여쭙니다. 어떤 분을 근본상사라고 하는지요? 모든 까마까규파의 제자들은 다 까마바를 근본상사로 모시는데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까마바 답변: 이른바 근본상사라 하는 것은 주로 마하무드라를 수행할 때 우리 마음의 자성자리를 이끌어 보여주신 분이 바로 우리의 근본상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까규파에서는 나의 마음자리를 가르쳐주신 분은 모두 곧 나의 근본상사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까규파의 모든 사람들의 근본상사가 다 까마바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까규파의 전승에서 볼 때 특히 강창까규파의 전승에서는 까마바가 아주 중요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대만불자 질문: 법왕님께 여쭙니다. 귀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익숙하게 적응도 되지 않았느데도 귀의를 할 수 있습니까?
까마바 답변: 일반적으로 귀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보님의 공덕을 알고 귀의하는 것, 삼보님의 차별을 알고 귀의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몇 가지 방식을 갖추어야 원만한 귀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방식을 모른다하더라도 귀의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경전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 곧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입니다. 법을 생각하는 것이 곧 부처님 가르침인 법보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승가를 생각하는 것이 곧 승보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불법승 삼보님의 공덕을 생각하는 즉시 귀의계를 얻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만불자 질문: 법왕님을 저의 근본상사로 모시고 싶은데요. 저는 정토신앙을 하고있는데 제가 법왕님께 귀의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정토수행을 할 수 있는지요?
까마바 답변: 일반적으로 말해서 귀의한다는 것은 저에게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삼보님께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은 큰 스님을 만날 때마다 다시 한번 더 귀의하는 풍속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약 저에게 귀의했기 때문에 정토수행을 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안좋은 일입니다. 저도 갈도록 정토수행에 신심이 나서 그 법을 수행하고 싶은 생각이 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이고 저도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과거에 수행한대로 앞으로도 그렇게 계속해서 노력하여 수행하시면 됩니다.
대만불자 질문: 법왕님께 여쭙니다. 저희들이 구루요가를 수행할 때에 상응해야 하는 구루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요? 만약 제가 이미 구루를 만났다면 수행을 할 때에 어떤 때는 자신의 구루의 모습이고 어떤 때는 까마바님의 모습이 정수리에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저의 근본상사는 까마바이시기도 하고 저의 구루 넨빠린포체 이시기도 한 것인지요? 저는 까마바와 전승조사님들의 심성이 같다고 보는데 이렇게 관상하면 맞는지요?
까마바 답변: 구루요가는 상사상응법(上師相應法)이라 하는 상응한다는 것은 외적인 모습이 상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상게넨빠린포체와 나를 억지로 섞어 놓는다면 매우 이상할 것입니다. 구루와 상응하고 구루가 마음에 들어왔다는 것은 구루의 공덕이 우리의 마음에 녹아든 것을 의미합니다. 번뇌장과 소지장이 일어날 때에 타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대치하여 두 가지 장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을 구루와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루가 갖추고 있는 가장 큰 공덕은 바로 번뇌를 항복받고 자신의 마음을 조복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공덕이 자신의 마음에서 생길 수 있다면 곧 구루와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고 하고 구루의 가피가 마음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루를 억지로 우리의 마음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넨빠린포체의 모습과 나의 모습을 하나로 섞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보기에도 이상할 것입니다!
까르마파 사가행강의 넷째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는 귀의에 대하여 말씀드렸고 오늘은 이어서 보리심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느끼기에 왜 계속 보리심과 귀의에 대해서만 말하고 사가행과 스승님께 기도하는 수행에 대해서는 언급도하지 않는가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차제대로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차제대로 수행하고 어떤 사람은 초월적이고 건너뛰는 방식으로 해탈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차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비교적 실질적이라고 느껴집니다.
(이하는 까르마파성하께서 직접 중국어로 법문하신 내용입니다.)
대승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아닌가는 보리심수행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보리심을 발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떠한 선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대승법에 속하지 않습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계단을 오르듯이 기초부터 천천히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가 없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차제로 훈련을 해야하기 때문에 보리심수행은 기초와 근본이 여법한가 여법하지 않은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리심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어떤 것이 여법한 것이고 어떤 것이 여법하지 않은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갸파의 네 가지 집착을 여위라는 구결에 “만약 이 생에 집착하는 이는 수행자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볼 때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진정코 여법한 수행인 것입니다. 모든 불법의 수행은 삼승(三乘)으로 귀결되는데 이 삼승가운데 가장 먼저 소승을 수행해야 합니다. 소승수행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출리심으로 기초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출리심도 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대승의 수행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출리심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서너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습니다. 당시에 너무 어려서 자기 부모이름조차 몰랐을 때이니 출리심이 무엇인지를 알 리가 없었습니다.
출리심은 이생에 대한 탐착을 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출리심, 즉 이생에 대한 탐착을 끊는 한계나 표준이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티베트불교에서는 세간의 명예나 이익 손해에 관한 여덟가지 법을 포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인(因)이 무엇인가하면 그것은 바로 윤회계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생을 포기하는 연(緣)이 무엇인가하면 그것은 이 생에 대한 허물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과 연의 두 부분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만약 이 둘을 갖추지 않는다면 이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을 포기했는가의 표준을 어디에 두는가하면 세간의 여덟가지 법에 대하여 혐오감과 반감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생을 포기한 징조는 무엇인가하면 바로 세간의 여덟가지 법을 아무리 배워도 배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까르마바성하께서 농담으로..아마 저는 배우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세간의 여덟가지 법, 즉 世間八法은 利(이익)、衰(손해)、譽(명예)、毀(훼방)、稱(칭찬)、譏(비방)、苦(괴로움)、樂(즐거움)을 가르킵니다. 곧 눈앞에 일시적인 이익과 손해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거나 괴롭게하는 느낌등의 여덟가지 상황을 말합니다.
일반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표준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간법에 의지해 살면서 세속에서 일을하게되면 세간의 여덟가지 법에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고 세간 팔법(世間八法)과 상관없는 일을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일을 하거나 말을 한다거나 꿈을 꾸는 등의 일이 모두 세간 팔법(世間八法)과 관련된 일이니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냥 잠이나 자버려야 되겠습니까?(웃음)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속사람들은 절대로 법답게 살 수가 없는 것일까요? 이 점에 대해서 우리 모두 생각해보고 저 또한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세간팔법을 끊어 없애려면 다만 이론적으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세간팔법의 문제의 관건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맹목적인 집착이라고 제가 이름을 붙였습니다. 맹목적인 집착의 의미가 무엇인가하면 그것은 좋고 나쁘고를 막론하고 일종의 완고하고 완강한 습관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한 사람이 어떤 때는 불법에 대하여 환희심을 내고 수행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수행을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으로 생각하거나 편안한 레저활동 정도로 생각하여 마음을 안마하는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간법에 떨어져서 여전히 세간법이 실제적이고 맞다고 확고하고 뿌리깊게 느낍니다. 일단 세간법에 초점을 맞추게되면 정법 위에 힘을 쓰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상황은 긴장을 푸는 것입니다. 긴장을 풀고 느슨한 생활을 하게 되는 데에는 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체적인 긴장을 풀기위해 산책을 하거나 태극권을 한다든지 요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마음의 긴장을 푸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선정을 닦아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참선을 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오히려 더 피곤해서 쉬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몇 년을 수행해도 전과 다름없이 똑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아래 암에 걸린 환자와 같이 암세포가 온 몸에 퍼졌다하더라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 세간법 위에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도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를 한 가지 들자면 우리가 평소에 하루종일 일을 하다가 저녁에 집에 와서는 꿈 속에서조차도 계속해서 일을하는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하루종일 수행을 했다하더라도 밤에 법과 수행에 관계된 꿈을 꾸는 일은 아주 적습니다.
쟘곤공툴린포체, 까르마파와 까루린포체(까규몬람에서)
이것은 우리가 수행을 안마정도로만 생각하기때문이지요. 안마하는 일 따위는 밤에 꿈에서까지 나타나지는 않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집착은 수행의 진전을 막을 뿐만 아니라 조용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을 세간법 위에 얽어매게 됩니다. 이러한 맹목적인 집착이 우리로 하여금 세간법에 대해 일종에 수요를 느끼게 하여 갈수록 간절하게 필요로 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더욱 실질적이고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게 만듭니다.
후에 우리는 망령된 마음으로 불법을 가지고 없어서는 안된다고 느끼는 것들을 얻고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점차 불법이 독약이 되어 수행까지 망치게되니 이것은 매우 안타깝고 애석한 일입니다.
어쩌면 제가 이 자리에서 애석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제가 세간팔법에 떨어졌다면 그것이 정말 큰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텔레비전의 광고와 같습니다.
TV에서 텔런트가 오토바이를 타고 멋지게 공중으로 날아오릅니다. 그러나 사실상 오토바이가 날아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타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연출을 하는가하면 반드시 그 까닭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음에 광고를 볼때는 아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고가 매일 나오고 광고가 반복해서 나오고 끊임없이 나오면 우리는 훈습이 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습관이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오토바이를 사고 싶게 되고 마음 속에 그 오토바이를 타고 멋지게 하늘을 나르던 그 텔런트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 영상에 이끌려서 어느새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믿게되어 생각을 바로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습관화될수록 감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맹목적인 집착을 일으켜서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맹목적으로 가고 얻고자합니다.
그래서 강포바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여법하게 불법을 수행하지 않으면 불법을 수행하는 것이 오히려 삼악도에 떨어지는 인(因)이 된다.”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중해야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주로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간의 칭찬이나 비방등의 상황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세간법에 대한 완고하고도 완강한 강렬한 집착을 없애지 못한다면 우리의 수행에는 언제나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승을 수행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날 어느 불자께서 보리심에 대하여 물었는데 오늘은 바로 보리심을 발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리심을 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구결도 많이 있습니다. 발보리심은 입으로만 발할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보리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구결은 많이 있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광행파(廣行派)에서 전해져 내려 온 인과칠결「因果七訣」과
두 번째는 심견파(深見派)의 자타교환법「自他交換法」입니다.
인과칠결「因果七訣」의 수행방법에는 두 가지 다른 전승이 있는데, 하나는 까담파 아띠샤존자님의 전승에서 내려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디공까규파의 전승에서 수행해 온 것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까담파 전승의 인과칠결「因果七訣」입니다.
1. 어머니인 줄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인 줄 아는 것이 어렵다는 것일까요? 자신의 이생의 부모를 아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어머니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보리심을 발하고 난 후에 일체중생이 모두 마치 자신의 친어머니와 같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하면 일체중생이 모두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윤회를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윤회를 알수있는가 하면, 예를 들자면 금방 태어난 아기가 태어나면 그는 각지(覺知)하는 심식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한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은 전인(前因)을 의지해서 생겨납니다. 인(因)이 없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다른 부류의 인(因)을 연유해서 생겨나지도 않습니다. 조물주에 의해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이 심식은 연속적인 순인(順因)을 연유하여 같은 부류의 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적인 사유를 통해서 우리는 같은 부류의 전심식(前心識)과 각지(覺知)가 하나 하나가 줄이어서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존재함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심의 연속성을 통해서 윤회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유방법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심식이 같은 부류의 전인(前因)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거나 어떠한 다른 외적인 인연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언제든지 수시로 생겨나거나 존재할 수 있거나 혹은 전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에 많은 정확하고도 딱 맞는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내생에 환생할 곳을 예언하고 정말로 그가말한대로 그곳에서 출생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전생의 일들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윤회는 이미 과학자들의 연구와 주의를 기울이는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아직까지는 실제임을 증명할 방법은 없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완전히 윤회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윤회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야합니다. 만약 윤회가 정말로 존재하는데 우리가 무지해서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차 큰 잘못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도를 바꾸어 윤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생과 내생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시작도 없이 끊임없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매번 생을 받을 때마다 우린 부모가 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중생들은 부모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작도 없는 윤회계에서 세세생생을 더해가며 우리의 부모는 셀 수도없이 많습니다.
다른 방향에서 말하자면 세간에 부모를 우리는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낳아주신 부모요, 둘째는 길러주신 부모요, 셋째는 우리를 이익케하는 부모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속에서 말하는 부모는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입니다. 만약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면 길러주신 부모를 부모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중국에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가 낳아주신 은혜보다 더 크다는 말이 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이익을 주는 부모는 여러분들도 잘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많은 티베트라마들이 외국으로 불법을 널리 전하러 갈 때 많은 시주자들의 도움을 받게됩니다. 시간이 흐름에따라 그들은 시주자들을 부모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익을 주는 부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꼭 낳아주신 부모만이 아니라 세속에서 우리를 돌보아주시는 분을 부모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넓게 보아서 서로 의지가 되고 직접 간접적으로 이익을 주는 친구들을 모두 부모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지금 가사를 입고 있는데 제가 태어나자마자 가사를 입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가사는 많은 중생들의 노력을 합하여 천을 만들고 재단하여 깁고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세상에 모든 물건은 다 그렇습니다.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여 이익케 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도움이 되는 중생들을 모두 부모라 불러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긍정적인 면에서만 말한 것이라구요. 맞습니다. 확실히 이 세상에는 많은 부정적인 부분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는 서로 해치고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강도질하고 하는 나쁜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이와 같이 부정적인 면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되며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를 말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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