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연구자료! 같은 이름과 동일한 사주를 가진 이부영 전 의원과 베이징올릭픽 조직위 부위원장 리푸룽(이부영)...
2004년 9월 제3차 아시아정당 국제회의(ICAPP)에서 있었던 일로...
공식적으로 정치인의 사주 생년월일시가 명확하게 밝혀진 그리 많지 않은 사례이므로 소개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공부하시는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뉴스기사 ]
제3차 아시아정당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베이징에 온 열린우리당 이부영(아래사진) 의장은 3일 숙소인 베이징호텔에서 그와 한자 이름, 생년월일이 같은 리푸룽중국 국가체육총국 부국장 겸 베이징올림픽 조직위 부위원장과 만나 ‘사주’가완전히 일치함을 확인해 화제를 모았다.
이 의장은 99년 중국을 방문했을 때 쩡칭훙 부주석의 주선으로 리 부국장을 처음알게 된 뒤,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때 방한한 리 부국장을 한차례 더 만났으며이번이 세 번째 대면이다.
그 동안 한자 이름(李富榮)과 생년월일이 같다고만 알고 있던 두 사람은 이번에“확실히 확인해 보자”는 리 부국장의 제안으로 태어난 시간까지 일치한다는 걸알게 됐다. 이 의장이 먼저 “나는 42년 9월26일(음력 8월17일) 새벽 5시 서울종로에서 태어났다”고 하자, 리 부국장은 “나는 같은 날 새벽 4시 상하이에서태어났으나, 중국과 한국 사이의 시차가 1시간 나는 걸 감안하면 같은 시간에 태어난 것”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의장도 “참으로 기이한인연”이라며 “같은 운명을 하늘이 둘로 쪼개 나눠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의장은 리 부국장에게 아테네 올림픽에서 중국이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을축하하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한국선수단을 위한 협력을 당부하기도 했다. 리부국장은 70년대 초 미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친선경기를 펼친 ‘핑퐁외교’의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출처 : https://news.v.daum.net/v/20040905111526401?f=o
[ 이부영 전 의원의 생애 ]
1942년 경기도 포천군(현 포천시)에서 태어났다. 서울특별시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용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였다. 1974년 동료 기자들과 함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결성하여 유신 체제에 맞서 언론 자유를 수호하자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였다가 1975년 해직되었다. 그리고 긴급조치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7년간 복역하였다. 출소 후에도 재야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1986년 5.3 인천 사태 주도 혐의로 체포되어 1988년 2월까지 복역하였다. 복역 중이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교도관으로부터 전달받고[1] 휴지에 관련 사실을 작성하여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명동성당에서 이를 폭로하게 하였다.[2]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가지 않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에 흡수 합당되어 한나라당이 되자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9년 당시 한나라당 원내총무였던 이부영은 폐암으로 죽은 제정구 의원의 영결식 때 "제정구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때문에 억장이 터져 DJ암으로 죽었다."라는 극언을 퍼부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한나라당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회창의 압승으로 끝났고, 이후 선대위 부위원장을 맡아 이회창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결국 한나라당의 집권이 좌절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 때, 당선된 노무현을 향해서는 김대중 정권의 연장 선상에 있다는 것만 집중적으로 지적했을 뿐 큰 비난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참여정부 출범 전후로는 한나라당 내의 개혁소장파를 규합해 노무현 대통령과 개혁성으로 겨뤄보겠다는 발언을 하는 등 점차 참여정부 성향에 가까워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03년 9월 김부겸, 안영근, 김영춘, 이우재 등과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독수리 5형제라 불렸고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3] 이듬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에는 본회의장에서 끌려나가며 격분한 목소리로 "이거 놔! 이거 쿠데타야!"라고 외쳤으며, 기자들에게도 "이건 완전히 쿠데타예요! 쿠데타…!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의원총회에서 탄핵을 가결했다는 거예요!"라면서 탄핵 주도세력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러나 1달 후 열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는데,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김충환 후보에 패배.
2007년 12월 6일에 JU그룹으로부터 서해자원탐사, 방문판매업 개정 등의 청탁을 받고 2억여원의 돈을 받은 혐의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과 2억 1,070만원의 추징금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으나, 2008년 6월 고법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아 풀려났다.
2010년 사면복권을 받고 2012년에 강동갑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강동구청장 출신 신동우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 선거이력 ]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
49,646 (38.51%) |
당선(1위) |
초선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
42,872 (39.90%) |
당선(1위) |
재선[4]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
52,147 (52.51%) |
당선(1위) |
3선[5]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
50,693 (43.37%) |
낙선(2위) |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
57,909 (47.46%) |
낙선(2위) |
출처 : https://namu.wiki/w/%EC%9D%B4%EB%B6%80%EC%9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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