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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그림자 놀이 ~ 자기자신과의 싸움이 아닌 자기자신을 잘 조절하는게 중요합니다.

by 예경 2020. 5. 21.

 

 

그림자 놀이 ~ 자기자신과의 싸움이 아닌 자기자신을 잘 조절하는게 중요합니다.

 

 

※ 아래의 링크글을 읽으신 후, 이어서 읽으시면 좀 더 이해하기 편합니다.

    평생동안 끊임없이 도둑맞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http://cafe.daum.net/yeseowon/VcYq/156

 

 

"사람은 자기자신과의 싸움이 제일 힘들다."
"자기자신을 이길 수 있어야 진정한 강자다."

 

세상에는 이러한 얘기들을 많이 하고 다들 동의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참 어려운 일이고...
자기자신과 싸워 이기는 사람들은 왠만해서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위인전에 나오는 훌륭한 사람이나 성인들이나 가능한 것처럼 얘기를 합니다...


말이라는 것은 표현단어 하나가 다름으로 인해 전달되어지는 의미를 상당히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즉, 자기자신과 싸워서 이긴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자기자신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바꾸게 되면은 전혀 틀린 얘기가 됩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훌륭하다고 인식되고 위대한 성인이었다고 전해지는 분들은...
사실 자기자신을 잘 다스린 분들이지 자기자신과의 에고와 싸워서 이긴 분들이 아닙니다.

 

 

 

 

자동차를 육체와 에고로 비유하면 에고는 운전대 핸들에 해당됩니다.
여러분들은 자동차 핸들이 운전자 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하는 것을 보신적 있으신가요?

핸들은 운전자의 지시에 따라 자동차 바퀴가 좌우로 움직이도록 하는 역할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의식대로 에고의 바램대로 살아가는 분들은...
운전자의 지시를 제대로 안받고 핸들이 자기맘데로 돌아가게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럼 에고가 핸들이라고 했는데 "운전자"는 무엇일까요?
이미 일찍이 큰 스님이셨던 대행스님은 이를 "주인공"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모든 자동차안에 운전자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될 때...
그것이 의식의 각성이 일어나는 순간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얘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육체도 자동차와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해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우리가 외출할 때 자동차에 탄 후, 자동차 안에서 핸들과 악셀을 밟으며 원하는 목적지까지 컨트롤하지...
내가 자동차가 되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육체를 지닌 우리들은 육체와 에고 그 자체가 바로 우리자신, 운전자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에고라는 것은 버려야하고 에고는 없어야 한다고 알고있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운전자에게 있어 자동차의 핸들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구이듯이,

에고 역시도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없애고 버리겠나요?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위에서 에고는 자동차 핸들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자기자신을 이긴다 죽인다라는 얘기는 에고와 싸워 이기고 에고와 싸워 죽이는 그런 얘기가 되고

이건 차의 핸들을 뽑아버리고 운전하고 가겠다고 하는것과 똑같습니다.

 

운전을 해보신 분들은 당연히 아시겠지만, 운전자가 핸들없이 운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운전자는 핸들을 잘 사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핸들에 해당하는 에고를 죽이게 되면 의욕도 없고 재미도 없는 무감각한 인간이 되는데...
그럼 뭐하러 사나요? 차라리 자살하는게 낫지 않겠나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에고는 자동차의 운전대 핸들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싸울 이유도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현재의식으로 해야할 것은 자신을 잘 다스리고 늘 협의(함께 의논함)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에고를 버리고 하고싶은 것을 참고 어려운 것을 이겨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싶은 것을 해도 될만하게 조절하는 것이 우리가 해나가야할 일이지
하고싶은 것을 참는 것이 자기자신을 이기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고싶은 것을 굳이 욕망이라고 표현하자면 마음공부를 한다고 말씀하시는 수행자 분들은...
욕망이라는 것이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며 욕망은 버려야하고 욕망을 넘어서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사실 욕망이라는 것은...

조절해서 현실화 시키면 되는 것이지, 참으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기름기가 많아 몸에 나쁘다고 해서 짜장면을 먹고싶은 것을 참는 것도 욕망을 참는 것이 될까요?
어느순간 짜장면이 먹고싶은 것도 욕망인가요?

 

먹고싶으면 적당히 먹고 먹고싶은 것을 먹었으니 그만큼 운동을 해주면...
육체적인 건강에 해당하는 부분도 해결되고 짜장면을 먹는 정신적인 욕망충족되는데 문제될게 아무것도 없지 않나요?

 

이세상의 모든 욕망이 그와 같습니다...

단 문제는, 적당히 조절하는 것이 안되서 문제가 될 뿐입니다.

 

욕망이 잘못되고 나쁜게 아니라

욕망을 버리는 것이 마음공부가 아니고
욕망을 이루는 것에 있어 적당히 할줄 아는 것
배우기 위해서 마음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적당히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자 함이

마음공부의 핵심사항이고 목표욕망을 버리고 욕심을 끊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욕망이라는 것을 풀어서 써보면 바라는 마음인데 바라는 마음 자체가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리고 또 한가지...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불만과 고통은 남과 비교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각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갖고 온 업력이 틀린데 어떻게 남과 비교한다는 엄청난 바보 같은 발상을 하고 살아갈 수 있나요?

 

이 말을 듣고 깨닫는 사람은, 일리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그러고 마는 것이고...
다시 현실로 돌아가 옆집사람이건 회사동료건 같은 형제든

모든 생활수준이나 살아가면서 다 똑같이 살아갈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는데,
심지어 사람이 아닌 개들 한테도 각각의 팔자라는 업력이 있습니다.

 

부자집에서 호강하는 개

들판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개

길거리에 버려지고 학대받는 개
개장수에게 잡혀 보신탕으로 팔리는 개

 

한낱 미물이라 불리는 개조차도 이렇게 팔자가 다르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업력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우주의 섭리인데...
비교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겠습니까?

 

비교하는 것 자체가 "아프리카에 가서 원주민을 상대로 한국말로 소통하려는 것"과 똑같습니다.
"왜 저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한국말을 못하는 것인가요?"라는 식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 사회이기 때문에 남을 신경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남에 대하여 서로간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살아갈 필요는 있지만...
비교라는 것은 정말 너무도 하지 말아야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내 마음이 편하고자 비교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나 편하자고 비교하지 말아야 겠다는게 아니라,

애시당초 처음부터 비교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굳이 억지로 비교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비교가 될 수 없고 성립조차 될 수 없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서 서로간의 사이에 서로 틀린 장단점을 갖고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에고라는 것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에고가 필요한 것이지...
에고를 죽이고 누르면 사람이 아무런 의욕도 욕망도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다 조절조화에 달려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것을 일찍이 예로부터 가르쳐온 학문이...
그러한 것을 학문으로 가르쳐 온 것이 사서삼경의 중용(中庸)입니다.

중용은 모든 마음의 근본적인 조절능력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용을 올바르게 이해하시고 깨우치신 분은 이미 수행의 90%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중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부하셨다면, 담배가 사람에게 해로운지 아닌지를 스스로 아주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하기나름이다."를 깨우치는 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담배가 좋으면 피세요.
하지만 적당히 피시면됩니다.
문제는 적당히가 문제지 담배가 문제가 아니겠죠?

 

뭐든지 적당히 하도록 하는 능력을 키우기위해 하는 것이 정신수련이고 마음수련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담배가 좋으냐 나쁘냐 할 얘기가 필요없지 않나요? ^^

 

사람들은 아편(모르핀)이 나쁜거라고 하는데, 질병으로 통증이 심한 분들에게 많이 쓰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시죠?
그런데 왜 아편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하죠?
적당히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모든 것의 문제는 조절능력에 달린 것이지 해당사항에 해당하는 각각의 것들이 나쁜게 아닙니다.

 

 

 

 

적당히가 안되니까 적당히 할 때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 계율(戒律)입니다.

여러 종교에서 계율이라고 하면서 전해지는 그것이죠...

 

그런데 파계(破戒)라고 하여 계율을 깨뜨리는 것에도 몇 종류가 있다는 것 아시나요?

 

계율을 어겨서 파계...
계율을 지키지 못하겠다 하여 파계...

계율이 필요없는 상태에 이르러서 파계...

 

수련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계율을 잘 시키고 살아가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보통 생각하는데...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은 마치 학교의 모범생과 같습니다.

 

학교의 모범생이 사회에 나가면 모두 돈 잘벌고 성공하여 행복하게 살아가나요?

그렇게 사회가 교과서적인 매뉴얼 대로 행동하여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이미 다 성공하고 다들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죠...

 

사실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은 수행이 초급, 중급, 고급단계가 있으면 중급단계를 쳐줄까 말까하는 단계입니다.

 

초급단계는, 계율조차 지키지 못하는 상태
초급과 중급사이는, 계율을 지켰다 못지켰다 하는 상태
중급단계는, 계율을 잘 지키고 사는 상태
고급단계는, 계율이 필요없는 상태

 

 

실제 수행자에게 있어 깨달음의 척도와 깨달음의 깊이는,

조절능력이 얼마나 뛰어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높이 수련이 된 사람들은...
술을마셔도 상관없고, 나이트 놀러가도 상관없고, 뭘해도 상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적당히 하라고 하는데 그 적당히란 어느정도를 말할까요?

"자신의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을 정도"를 적당히라고 말합니다...

단, 불편한 마음을 드는데도 무시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는 스스로 비추어 봤을 때, 자신의 마음이 불편한지 아닌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자기자신의 마음상태의 불편여부와 힘듬여부를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관념으로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어도 참아야 된다라는 부분이 아직까지 많이 있기에...

그 불편함과 힘듬이 자신의 삶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익숙해져 무감각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참아서 해결하려고 한다던가, 괜찮은 척해서는 자기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됩니다.

도리어 중장기적으로 지속적인 피해가 생길 뿐입니다.

 

 

 

 

정신수련의 결과물중 하나는,

의식세계에서 무엇이든지 적당히 알아서 할수있는 조절능력을 얻게 됩니다.

즉, 의식세계에서 자동으로 알아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도록 조절해주는 셀프컨트롤(Self Control) 능력을 얻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적당히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참는다던지 무언가 지나치게 하고서 후회를 한다던지 하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수련은 모든 업종에 있는 현대인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내가 조절가능하면 마음의 불편함이 없고,

내가 조절불가능하면 마음의 불편함이 옵니다.

 

이를 옛분들은 불편함이 없을 때를 '선'이라고 보고, 불편함이 있을 때를 '악'이라고 보셨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자신을 이기는 분이 아닌 자기자신을 이기고 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이기는 것이 진정한 강자라는 그런 것에서 이제는 벗어나셔서
모두들 자기자신을 잘 조절해 나아가는 분이 되십시요...

 

바로 그러한 조절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마음공부이고 수행이라는 것의 최종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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