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칼럼

설오스님의 금강살타 수행 이야기

by 예경 2020. 9. 18.

 

 

설오스님의 금강살타 수행 이야기

 

  

 

설오스님(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불교 수행中)

 

귀의(歸依)

 

법회를 거행하는 티베트 사원에 참석하게 되면 법사는 제일 먼저 귀의의 중요성과 함께 순수한 보리심(菩提心)에 대한 가르침을 설한다.

 

귀의(歸依)란 불교도와 비불교도, 곧 내도(內道)와 외도(外道)를 구분짓는 관건이다. 어린아이가 무서운 개한테 쫓기어 어머니 품안으로 달려오듯이, 불법승 삼보님만이 두렵고 엄청난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주실 수 있다는 확실한 신뢰를 갖고 몸과 마음을 다바쳐 완전히 의지하라는 것이다.

 

물론 삼귀의는 우리 나라 불자들도 기본적으로 하지만, 티베트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다. 티베트 사람들은 차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에 '귀의금강상사 . 귀의불 . 귀의법 . 귀의승'이라는 귀의문을 간절히 외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운세가 안 좋다고 느끼거나 가정이나 사업상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큰스님을 찾아 뵙고 해결책을 상의하는데, 그때 큰스님은 그에게 귀의문을 많이 외우는 기도를 하라고 일러주시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귀의문을 외우며 기도하는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으며, 부처님께서는 수발타라라는 제자의 귀의와 도를 깨달은 인연을 설하시어 이를 증명하셨다.


수발타라는 집이 빈곤한데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 없이 외롭게 살다가, 괴로움이 극도에 달하자 석가모니 부처님께로 나아가 출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가 찾아갔을 때 공교롭게도 부처님께서는 외출중이셨고, 여러 큰비구들은 그가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과거 인연을 관하여 보았으나 팔만 겁 동안 선근을 심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두터운 업장에 낙담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수발타라는 괴로움이 극에 달해서 성 밖으로 달려나가 막 자살을 하려고 하였다. 그 순간 부처님께서 나타나시더니 그에게 까닭을 물으셨다.

 

수발타라는 울면서 자초지종을 고하였고, 부처님께서는 그를 제자로 받아주셨다. 그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깊이 명상하여 7일만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나중에 제자들이 그 연유를 여쭈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단지 팔만 겁 동안의 인연만 알고 팔만 겁 이전에 일찍이 그가 선근을 심은 것을 몰랐기 때문이니라. 팔만 겁 이전, 그는 가난하여 나무를 해다 팔면서 살았다. 하루는 산에서 호랑이를 만났는데, 도망칠 곳이 없자 그는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갔느니라. 호랑이는 나무둥치를 물어뜯고 흔들어 나무가 부러지려 하였으나 누구하나 구해줄 사람이 없었느니라. 그토록 다급한 상황 속에서 문득 '대각자이신 부처님은 자비력이 있어 능히 모든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쳐 그는 크게 외쳤느니라.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저를 구해주옵소서!'
그런데 놀랍게도 호랑이가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소리를 듣더니 멀찍이 도망을 쳤고, 그는 무사하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느니라. 그리고 바로 그때 그가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을 외우며 깨달음의 바른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연이 성숙되어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이다."

 

여러 제자들은 부처님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찬탄하였다.

 

이와 같은 전통 기도법을 이어받아 티베트 사람들은 귀의를 수행과 기도의 일환으로 중요시하고 있으며, 귀의의 철저한 생활화를 통하여 불교도와 외도의 구분을 분명히 짓고 있다. 그리고 티베트불교 수행에 입문하게 되면 제일 먼저 귀의 대예배 10만 번을 하여야 한다. 귀의의 대상을 묘사한 탕카(티베트의 탱화)를 앞에 모셔 놓고 오체투지를 하면서 입으로는 귀의문을 외우고, 마음으로는 '육도의 중생들이 다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면서, 모두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삼보께 귀의를 하는 것을 관상한다.

 

이때는 불법승 삼보와 함께 삼근본(三根本)을 귀의의 대상으로 삼는데, 삼근본은 다음과 같다.
① 가피의 근본 : 자신에게 법을 전수해 준 스승과 그 법을 전수해 온 전승조사들.
② 성취의 근본 : 그 법의 수호본존이신 각 파(派)의 본존들
③ 외호(外護)의 근본 : 남녀 호법신인 '타카 . 타키니', 자량(資糧)을 구족하게 하신 재신(財神)들.

 

이렇게 오체투지를 하며 간절히 삼보님과 삼근본을 향해 진정코 귀의하여 신심이 생겨났을 때라야 비로소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이루게끔 하는 불법의 수행에 입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 삼보에 귀의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윤회의 고통을 뼛속 깊이 느끼고 깨달아, '윤회계를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마음가짐을 염리심(厭離心), 또는 출리심(出離心)이라고 한다.

 

윤회의 세계가 고통을 본질로 삼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염리심, 곧 두려운 마음을 내게 된다는 것이며, 그 염리심이 불법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간절한 염리심과 함께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생겨났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귀의가 이루어지고 수행에 입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티베트불교에서는 '염리심은 도(道)의 시작이요, 수행자의 머리'라 칭하고 있다.

 

발보리심(發菩提心)

 

"염리심을 수행자의 머리라고 한다면 보리심(菩提心)은 수행자의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은 일체 중생을 해탈케 하는 데 있다."

 

나의 구루(영적인 스승)는 항상 이렇게 깨우쳐 주셨다. 이 말씀은 '나' 혼자만의 해탈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모두 해탈케 하겠다'는 깨달음의 마음을 발하라는 것이다. 곧 과거생에 나의 부모가 아니었던 중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나의 부모이자 가장 은혜로운 어머니라는 생각으로 보리심을 발하라는 것이다. 용수보살은 {보행왕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지구의 흙을 다 부수어 노간주나무 씨앗만한 크기의 환을 만든다 해도 한 사람이 무수한 삶을 되풀이하며 인연 맺었던 어머니의 숫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온 우주에 가득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머니와 같은 중생들이 윤회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어찌 방관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티베트불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일체중생과 더불어 해탈하는 최상의 보리심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수행의 목표로 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보리심은 깨달음의 전제이자 뿌리이며, 고갈되지 않는 보물이다. 보리심을 발하는 데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양치는 목자와 같은 발심이다. 양치는 목자는 양들을 다 앞에 보내고 자신은 맨 뒤에 따라가듯이, 일체 중생을 다 성불시킨 후에 자신이 성불하겠다는 발심이다.

둘째는 뱃사공과 같은 발심이다. 뱃사공이 손님을 모두 배에 싣고 함께 강을 건너듯이, 중생과 내가 함께 성불하고자 하는 발심이다.

셋째는 왕과 같은 발심이다. 항상 자신을 만 백성의 위에 놓는 왕과 같이, 내가 먼저 성불한 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심이다.

 

구루는 이 가운데 목자와 같은 발심을 가장 수승한 보리심이라고 설하신다. 하지만 수행성취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생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행을 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라는 경고를 잊지 않으신다. 그것은 마치 두 팔이 없는 어머니가 물에 빠진 아기를 보고 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아서, 함께 죽을 뿐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력보살의 환생자가 아닌 보통 근기를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비와 방편, 공성(空性)과 지혜의 두 팔이 자라날 수 있게끔 먼저 고요한 곳에서 수행을 하여 힘을 얻도록 지도하고 있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행에 앞서 반드시 보리심을 일으키고 자라나게 하는 기도를 한다.

"보리심의 보배를 일으키지 못한 자는 일어나게 하시고, 이미 일으킨 자는 더욱더 자라나게 하소서."

 

아울러 '일체 중생을 모두 성불시키기 위해 더욱 열심히 정진 수행하여 성불하겠다'는 보리심을 굳건히 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에 부딪쳤을 대 보리심을 발한 것과 같은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영적 스승의 구루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모든 이익과 기쁨을 남에게 주고, 모든 손실과 고통을 자기 자신이 취하라."

 

실로 거의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자비이지만, 이 글귀 속에 보리심의 내용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병원에서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환자의 고통과 병을 대신 받는다는 것! 결코 상상조차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불하기를 바란다면 이 가르침대로 수행을 해야만 한다. 티베트불교에는 보리심을 증장시키기 위해 자비심을 기르는 구체적인 수행방편이 많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널리 쓰여지는 수행법이 '통렌 수행'이다.

 

통렌 수행은 호흡에 맞추어 행하여 진다. 숨을 내쉴 때는 밝고 흰빛이 나의 몸에서 나와 삼악도에 있는 고통받는 중생들은 물론 육도에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비추되, 그들이 그 빛으로 인하여 행복하고 편안해진다고 관상한다. 또 숨을 들이마실 때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이 검은빛으로 나에게 다 들어와서 내가 그들의 고통을 대신 받는다고 관상한다. 이렇게 매일 21번 정도 수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원한다.

'모든 중생들의 고통은 내가 대신 다 받고, 행복과 기쁨만이 그들에게 충만하여지이다.'

 

달라이라마는 티베트 명절 법문에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세생생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행복을 얻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다면, 자신만을 위했던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이야말로 그 방법을 바꿀 때가 아닐까?"

 

진정 자비야말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을 실현시켜 주는 보배이며, 그 축복의 빛은 온 우주에 두루 미치는 것이다. 소걀린포체({티베트의 지혜}의 저자)는 말씀하셨다.
"자비는 동정보다 훨씬 위대하고 고귀하다. 동정은 두려움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건방진 우월감에 젖은 듯한 느낌이 배어 있기도 하다. 자비심을 기르면 중생들 대부분이 비슷한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중생을 섬기게 된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어느 누구보다 우월하지 않음도 알게 된다. 따라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첫 반응은 단순한 동정이기보다는 자비심이어야 한다. 그를 존중해야 하며 감사의 마음까지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우리에게 자비심이라는 거룩한 선물을 준 것이고, 영적인 깨달음에 가장 필요한 자질이 계발되도록 도와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비의 보리심에는 상대적 보리심과 절대적 보리심이 있다. 성불의 경계인 구경각(九竟覺 :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게 되면 공성을 체득하게 되고, 그 공성(空性)의 텅 빈 우주로부터 자비심은 저절로 넘쳐 나온다. 한낮의 태양이 만물을 두루 비추듯이 온 법계에 두루 미치는 자비, 곧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동체대비(同體大悲)에서 우러나온 자비가 절대적 보리심이다. 반면 중생들이 부처의 본래면목을 회복하고자 육바라밀 등의 자비행을 실천하여 보리심을 단련해 가는 것은 상대적 보리심이다.

 

다람살라에는 손과 발이 문드러지고 코가 없는 문둥병 환자와 거지들이 가족 단위로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면 그 문둥병 환자나 거지들에게 동전과 먹을 것을 준비하여 나누어주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

 

발보리심과 함께 수행의 전제가 되는 마음이 사무량심이다. 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체법에 자성(自性)이 없음을 깨달아 공성을 증득해야 하는데, 그러한 공성(空性)과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리심을 증장시켜야 하는데, 이 보리심은 사무량심을 통해서 증장되는 것이다. 사무량심은 자(慈) . 비(悲) . 희(喜) . 사(捨)의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다. 이 넷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자심(慈心) : 고통은 크게 없으나 행복을 얻지 못한 중생들을 자애하는 마음.
비심(悲心) : 병이나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
희심(喜心) : 이미 행복을 갖춘 중생들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고 그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
사심(捨心) : 일체 중생 누구에게나 불평등한 마음을 버리고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

 

사무량심을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자심(慈心)을 냄으로써 다른 이를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듯, 자애로운 마음은 자연히 중생들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마음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심(悲心)을 냄으로써 중생들을 해치는 직접적인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희심(喜心)을 냄으로써 중생들을 질투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사심(捨心)을 냄으로써 중생들을 일체 중생들에 대하여 애착하거나 싫어함이 없이 평등한 마음을 성취하게 된다.

 

이상의 사무량심은 곧 청정심으로, 성불에 이르게 하는 복덕을 가장 빠르게 쌓는 길이라고 한다. 아울러 티베트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식으로 사무량심을 익혀야 보리심을 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첫째, 중생들이 다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낸다.
둘째, 중생들을 다 행복하게 해주어야겠다고 맹세한다.
셋째, 중생들이 다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넷째, 중생들이 다 행복할 수 있도록 가호를 내려 달라고 부처님 전에 간청을 한다.

 

이와 같이 티베트불교에서는 자 . 비 . 희 . 사의 무한히 넓은 마음을 하나씩 깊이 새기면서, 그 마음을 반복하여 일으킬 때 진정한 보리심이 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생기차제와 원만차제

 

티베트불교 수행은 크게 생기차제(生起次弟)와 원만차제(圓滿次弟)의 두 단계로 구분짓고 있다. 차제는 행법(行法)이라는 뜻이며, 이 두 차제는 모두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방편이다.

 

생기차제는 본존불에 대한 관상과 진언을 통하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인(因)을 심게 하는 수행이요, 원만차제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자리에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하게 해주는 수행이다. 이 둘을 우리식으로 풀이하면, 원만차제는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 가장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는 돈오(頓悟)의 수행법이요, 생기차제는 한 단계 한 단계씩 깨달음을 이루어가는 점수(漸修)의 수행법과 비슷하다.

 

원만차제는 중생과 부처가 둘인 상대적인 경계를 인정하지 않고, 일체 유정이 다 본래 부처라는 지견으로 수행한다. 곧 방편을 빌리지 않고 본연의 절대적 진리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다. 근기가 아주 수승한 사람은 생기차제의 수행을 거칠 필요 없이 직접 원만차제의 수행을 하게 된다. 따라서 제자의 근기를 성숙시키고, 그 후에 자성의 본모습을 인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생기차제의 수행을 거치되, 먼저 업장부터 정화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불보살의 관상을 통하여 부처의 색신(色身)을 성취하고, 마지막으로 공성(空性)의 수행을 통해 부처의 법신을 성취하게 된다.

 

이 생기차제법에 따라 , 대부분의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과 특히 상응하는 본존불을 정하여 진언을 외우고 관상을 한다. 먼저 공성진언인 '옴 숴바와 수다살바 달마 숴바하 수다함'을 하여 공성을 견고히 관상한 다음, 본존의 모습을 생각으로 일으킨다. 일단 본존을 일으킨 후에는 자신이 관상으로 지은 부처가 아닌 무시 이래의 본래 부처라는 확신을 확고하게 갖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공성을 수행하여 견고한 기초 위에 본존을 생기해야 하기 때문에, 공성의 수행은 본존요가(본존불을 이루는 수행)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존요가를 오직 생기차제라고만 보기보다는 원만차제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밀교의 원만차제 수행 가운데에서도 공통적으로 본존요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불교 안에는 각 파(派)마다 고유한 전승을 가진 수행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공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수행이 본존요가이다. 시방에 본래 있는 불보살을 본존불인 지혜존(智慧尊 : 관상의 대상이 되고 자신에게 성취와 가피를 내려 주는 본존불)으로 모시고, 자신의 몸을 수행의 대상으로 정한 불보살과 똑같은 모습으로 관상하는 것을 삼마야존(三摩耶尊 : 계율존이라 번역되며, 범부인 중생이 수행의 방편으로 자신을 본존불로 관상했을 때의 본존불)이라 부른다.

 

본존 만트라를 모시고 삼마야존을 선명히 관상하여 자신이 진실로 본존불과 똑같은 부처라는 확신과 신심이 확고해졌을 때 지혜존인 본존불과 상응할 수 있게 되고, 그의 가피를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혜존과 삼마야존이 잘 상응하여 가피가 충만해졌을 때 자타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공성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단계를 원만차제의 단계라 한다. 이를테면 한 가지 수행 안에 생기차제와 원만차제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원만차제 수행만을 할 때는 고요하면서도 지극히 또렷한 광명의 상태로 생기차제를 대신한다.

 

원만차제 수행을 대표하는 법으로 '마하무드라'라 불리우는 까규파(닝마파, 겔룩파, 샤캬파와 함께 티베트불교의 대표적인 4개 종파 가운데 하나)의 대수인(大手印) 수행과 '마하무디'라고 불리우는 닝마파의 대원만 수행을 들 수 있다. 이 두 수행은 모두 지관(止觀)수행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국의 참선법과 흡사한 면이 많이 있다.

 

금강살타(Vajrasattva ; 金剛薩唾) 수행

 

금강살타(金剛薩唾)는 업장이 다 소멸되었을 때 회복하게 되는 본래의 청정한 부처님으로, 그분을 의지하여 닦는 금강살타 수행은 생기차제의 대표적인 수행이다. 이 수행은 티베트불교의 각 파에서 필수로 하고 있는 정화수행법으로, 기초적인 네 가지 수행[四加行] 중에서 귀의 대예배를 한 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많은 성취자들이 강조하는 금강살타 수행은 수행의 시작이자 구경(究竟)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수행자는 먼저 자신의 업장을 청정히 하여 오독번뇌(五毒煩惱 : 탐욕 . 분노 . 어리석음 . 교만 . 의심)로 물들여진 법기(法器)를 완전히 정화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법수(法水)가 담겨지게 되어 성불에 이를 수가 있다. 그래서 업장 소멸을 위한 수행으로서 금강살타가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업장이 다 소멸되면 본연의 불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구경의 금강살타라고 말하여진다. 많은 사람들은 번잡한 관상과 만트라를 모셔야 하는 생기차제 수행보다는 그대로 자성의 본모습을 관조하는, 언뜻 보기에 무척 간단하게 느껴지는 원만차제 수행만을 하기 원한다. 그러나 황달에 걸린 환자의 눈에는 흰그릇도 누렇게 보이는 법이다. 그런 환자에게는 그릇이 흰색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황달을 고쳐 스스로 흰 것을 희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본래 부처이지만 무시 이래로 지어온 업장에 가리워져 자신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 업장을 정화하여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생기차제 수행이요, 그 중에서 가장 수승하고 효율적인 수행이 바로 금강살타 수행이라는 것이다.


금강살타 수행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수행자는 먼저 자신의 머리 위 30센티미터 정도 거리 위에 연화대가 있고, 그 연화대와 자신의 범혈(梵穴 : 정수리)이 연꽃 줄기 같은 대롱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관상한다.

 

② 연화대에는 일륜과 월륜이라는, 달과 해를 겹쳐 놓은 것 같은 방석이 놓여져 있고, 방석 위에 금강살타께서 앉아 계신다고 관상한다. 금강살타께서는 흰 색의 몸을 하고 계신데, 마치 설산에 햇빛이 비추었을 때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볼 수 없을 만큼 빛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지혜의 상징인 금강저(金剛杵)를 쥔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자비의 상징인 요령을 든 왼손은 허리에 대고 계신 모습이다.

 

③ 이때 금강살타의 가슴 중앙 부분에 흰색의 '훔'자가 나타났다고 관상하고, 그 주위를 금강살타 만트라가 한 글자씩 동그랗게 에워싼 채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형상을 떠올린다. 그리고 '훔'자와 만트라의 각 글자에서 빛이 나오고, 감로가 흘러나온다고 관상한다.

 

④ 이윽고 만트라에서 나온 감로는 범혈과 연결된 대롱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그리고 자신이 세세생생 지어온 무명 업장들을 씻어내며 석탄 같은 검은 물이 되어 각 털구멍으로 빠져나간다고 생각한다. 또 병이 있는 사람은 감로에 의해 병의 장애가 피고름의 모양으로 빠져나간다고 생각하고, 사업이나 공부 등의 장애가 있는 사람은 나쁜 업장이 전갈이나 독거미 등 독충의 모습을 하고 항문 쪽으로 빠져나간다고 관상한다.

 

⑤ 초보자로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관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금강살타의 모습 . 만트라 . 감로가 흘러나오는 모습 등을 잠깐잠깐 떠올리며 금강살타 만트라를 원하는 만큼 외운다.

 

금강살타 만트라는 그 음절이 백개라 하여 일명 '백자명진언(百字明眞言)'이라고 불린다. 불보살님들의 모든 만트라가 이 백자명에서 파생되어 나갔기 때문에, 이 진언을 수지독송하게 되면 모든 불보살의 심주(心呪)를 모시는 것과 같아서 가피의 힘도 그만큼 크다고 한다.

 

금강살타 만트라를 한글로 표기하면 아래와 같다.

 

옴 벤자 싸또싸마야 마누 빠라야
벤쟈 싸또띠노빠
티타디또 메바와
쑤또쇼 메바와
아누라또 메바와
쑤뽀쇼 메바와
싸르와 씨띠 메빠야차
싸르와 깔마 쑤짜메
찌땀 씨리얌 꾸루훔
하하하하호
바가완 싸르와 타타가따
벤자 마메무짜 벤자 바하와
마하 싸마야 싸또아

 

⑥ 금강살타 만트라를 다 외우고 나면 '옴 벤자 싸또 훔' 이라는 보궐진언(망상 등으로 수행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을 보충하는 진언)을 108번 염송한다.

 

⑦ 그리고 나서 금강살타를 향해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는 기도를 올린다. 그런 뒤 금강살타께서 "너의 업장이 이제 모두 청정해졌느니라"라고 기쁘게 말씀하셨다고 관상하고, 금강살타께서 빛으로 화하여 자신과 하나가 되는 모습으로 회향되는 것을 떠올린다.

 

⑧ 마지막으로 수행자는 잠시 동안 명상을 하고 기도를 마친다.

 

수행자가 수행 과정에서 계율을 범한 것 등의 모든 허물을 정화시켜 주는 데도 금강살타 수행은 가장 효율적이라고 한다. 물론 자신의 허물을 간절히 뉘우치고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강한 결심이 전제가 된 상태라야 효과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금강살타 만트라는 자신의 업장뿐만 아니라 죽은 영혼의 업장을 정화시켜 주기 위해서도 사용되며, 특히 수행 중에 오는 장애나 병 등을 막아준다고 한다. 또한 수행 중에 여법(如法)하지 못했던 부분이나, 내용을 빠뜨렸거나 산란했던 부분들을 보궐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모든 수행을 하고 난 뒤에는 마지막으로 반드시 이 만트라를 7번 내지 21번 염하여 보궐진언을 대신하기도 한다.

 

나는 인도 따시종 사원에 있으면서 한국 스님들이나 많은 외국인들이 기초 수행의 단계, 특히 금강살타 수행을 할 때, 실제로든 꿈으로든 자신들의 업장이 많이 정화되는 것을 느끼고 기뻐하는 경험담들을 많이 들었다. 이제 금강살타 수행에 얽힌 짧은 일화 하나를 소개하며 이번 호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따시종에서 근래의 최고 성취자로 꼽는 독댄(무문관 수행자로써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을 가리킴) 암잠은 일생 동안 금강살타 수행을 위주로 정진을 하셨다. 그는 무문관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자신의 몸 하나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벼랑 위 좁은 동굴에서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보리 가루만 먹으며 6년 동안 백자명진언을 1백만 독씩 1백 번을 하였다. 이후 그는 깊은 삼매를 성취하여 잠을 조복받고 무문관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음은 물론 마침내 최고의 수행성취를 하였다.

 

암잠은 1988년 86세를 일기로 열반하였는데, 다비를 하였을 때 150여 과의 오색 사리와 함께 심장과 혀가 불에 타지 않고 싱싱하게 남는 이적을 보여, 후세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현재 따시종의 티베트 스님들은 무문관을 하기에 앞서, 백자명진언을 100만 독하고 나서야 무문관에 들어가는 것을 불문율로 하고 있다.

 

 

▶ 출처 문헌 - 월간『법공양』 2546년 5월호
 

 

출처 : http://www.tibetan-museum.org/coding/sub4/sub4.asp?bseq=7&cat=-1&sk=&sv=&yy=&page=1&mode=view&aseq=858#.W-K-G15RdhE

 

 

 


 

 

구루요가

 

 

  티벳불교 수행의 진수는 구루요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루요가란 참된 스승을 찾아서 스승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진리의 가르침대로 따라 사는 것이다. 즉 구루의 본성과 하나가 되기 위한 수행법으로 이 수행을 통해서 스승의 깨달은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계합되는 방법을 얻게 되는 것이다. 티벳의 많은 성취자들은 현재 자신이 많은 제자들의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위대한 스승들의 제자로 남아 있다. 그들은 그러한 스승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통해서 구경의 성취에 오른다. 구루요가도 기초 사가행중에 한 부분이지만 티베트 불교 수행의 핵심이라 할 수있다. 구루에 대한 진정한 신심과 헌신이 마음에서 일어나 스승의 존재가 부처의 화현이라 믿어지고 모든 불보살님의 존재와 위신력을 한 몸에 구족하신 분이라고 저절로 마음에서 깨달아 질 때 내 안에 있는 자신인 법신의 구루와 대면케 되는 것이다. 즉 외적인 스승의 존재에 대한 신심과 헌신의 마음이 생겨났을 때 내 안에 본래 구족한 스승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소걀린포체는 말씀하셨다.

 

우리의 불성은 능동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를 가르켜 일깨우고 진리로 되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인 스승의 모습으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여 미혹에 빠지려는 순간 자신의 참된 모습과 영광스런 광명의 길로 되돌리기 위해 애쓴다. 우리가 오랫동안 수많은 삶을 통해서 진리를 염원하고 갈망해왔을 때 우리의 업장이 충분히 정화되었을 때 우리와 언제나 함께 있었던 내적인 스승이 어느 날 갑자기 외적인 스승의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 외적인 스승은 다름 아닌 자신의 내적인 스승이 몸과 목소리를 얻어 밖으로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그 어떤 사람보다 사랑하는 스승, 인간의 형상과 목소리를 지닌 우리의 외적인 스승은 바로 우리 자신의 내적 진리의 신비가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인도에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왔을 때 잠자는 성자, 즉 슬리핑 라마로 불리워지는 닝마파의 최고성취자이신 민링틴진린포체를 찾아뵈었다. 제가 언제쯤 구루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여쭈었더니 머지않아 네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스승을 만날 것인데 그 분이 곧 너의 구루이다 하셨다. 그 당시 나는 그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나는 전생의 구루인 듯 느껴지는 세속의 나이로 일곱살되신 까루린포체의 환생자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그 분을 뵙자마자 마치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나의 온 영혼이 눈물로써 환희하고 모든 것을 다 바치고자하는 헌신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났다. 그래서 두달간 린포체의 법회를 오직 헌신과 환희심으로 모시고 다녔는 데 그 때에 무한한 가피의 힘이 내게 새로운 영적인 세계를 체험케 해주었고 현재 티베트 불교 수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도록 가호하심을 체험하고는 비로소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티벳에서는 모든 깨달음의 근원을 스승이라고 여긴다. 스승은 부처의 화현으로서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나투신 존재로 인간의 얼굴을 한 절대자이며 자신이 원한다면 모든 붓다와 깨달은 존재들과 대화하도록 만들어 주는 매개체이며, 모든 붓다가 지니고 있는 지혜의 결정체이며, 언제나 자신을 향하고 있는 붓다의 자비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현현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부처님의 자비와 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지만, 미혹 때문에 우리는 부처와 직접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스승을 직접 만날 수 있다. 스승은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함께 살고 숨쉬고 말하고 행동한다.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이 마음에서 생겨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불의 문턱에 이른 것이다. 근대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셨던 딩고켄체린포체께서 말씀하셨다.


  헌신이야말로 道의 정수이다. 만일 우리가 오직 구루만을 마음에 두고 열정적으로 헌신한다면, 무슨일이 일어나든 그것을 스승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헌신하는 마음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구루에 대한 헌신이 모든 생각에 스며들면, 무슨일이 일어나든지 그가 보살피고 있으리라고 믿게 된다. 자기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구루를 지향하게 되고 상스럽    고 음흉한 모든 생각이 헌신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때 모든 것은 마치 하늘에서 매듭이 풀려나듯 저절로 그 절대적인 본성 가운데에서 풀려나게 되리라.


티베트 사람들이 늘 하는 이야기 중에 혼자 열심히 노력 정진하는 사람이 이 생에 성취를 할 수 있을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으나 구루에 대한 온전한 헌신을 내는 사람은 금생에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 있다. <열렬한 헌신의 햇살이 스승의 눈덮인 산 위에서 빛날 때, 축복의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 제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다>고 말한다. 그러한 축북의 물줄기 속에는 각 파의 전승에서 그 수행을 성취하시고 전수하신 전승조사들의 가피도 또한 포함된다. 티베트의 스승들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스승의 제자로서 남아 있으면서 항상 스승에게 가피를 청하는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 들의 머리 위에는 스승들의 전승이 황금의 염주가 되어 가피의 물줄기를 쏟아 내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스승을 정수리에 관상하고 아래와 같이 기도한다.

 

  모든 불보살님을 한 몸에 구족하신 근본상사시여!!

  신구의 삼문을 다 바쳐서 간절히 기원하옵나니

  자신의 본래면목을 인지케하시고

  금생에 성불할 수 있도록 가피하소서.

 


아울러 항상 <아버지시여!! 당신과 같이 될 수 있도록 가피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구루에 대해 온전한 신심과 헌신의 마음을 일으키기란 말처럼 쉽지는 않다. 살아 숨쉬는 어느 한 존재를 부처의 존재로 인식하고 헌신의 마음을 일으키려면 그 만큼 그 사람이 정화되어 있고 충분히 준비되어 있을 때 구루와의 만남과 계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헌신이란 어떤 것인가. 맹목적이고 지각없는 숭배가 아닌 경건한 마음에 뿌리를 둔 명쾌하면서도 지성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백한 내적인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승이 내 자신의 존재 안에 깨달음과 지혜의 마음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될 때 터질 듯한 감사의 물결이 파도처럼 일어나 헌신이라는 말로 스승을 향해 흘러갈 것이다. 딜고켄제 린포체는 말했다.


  처음에 이러한 헌신은 자연스럽거나 자발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스승의 뛰어난 점, 특히 그의 자비롭고 자상함을 기억해야 한다. 믿음, 스승에 대한 존중, 그리고 그를 향한 헌신을 반복함으로써 그의 이름이 언급되거나 그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만 해도 우리의 모든 일상적 행위가 멈춰질 때가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를 부처 자체로 보게 될 것이다.


 스승을 인간이 아닌 부처로서 보게되면 가장 온전한 가피를 얻게 되는 것이다. 티벳불교에서는 말한다. 스승을 부처로 대하면 부처의 축복을 얻게되고, 스승을 인간으로 대하면 인간의 축복을 얻게 된다고. 스승을 부처로 대하기만하면 부처의 지혜로 충만한 스승의 마음이 그대로 자신에게 흘러들어올 것이라는 것이다. 스승에게 헌신의 마음을 낼수록 가르침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열리게 되고 마음이 열릴수록 그 가르침이 마음과 정신을 꿰뚫어 완벽한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기가 쉬워진다고 말한다.

 

  제자의 마음을 정화시켜 헌신의 마음을 일으켜 스승님과 계합하고 뜻이 상응케 하는 방편수행이 구루요가이다. 닝마파의 현존하시는 성취자이신 쟈달린포체께서는 제자들에게 구루요가 만트라만 천만독씩 하도록 하신다. 천주교 신자가 많은 아르헨티나에서 온 한 청년이 그 린포체의 제자가 되어 구루요가 만트라를 백만독씩 열 번해야 한다며 두문불출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까규파의 성취자인 나로바께서 나란다대학의 승정의 위치를 사임하고 구루 틸로빠를 찾아 나섰다. 그는 먼저 헤루까 만트라를 칠십만번 하고 나서 간절히 구루를 만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길을 떠났다. 도중에 많은 어려움과 강도와 거렁뱅이들에 시달리면서 몇 년을 헤메었으나 결국 구루와의 만남은 기약이 없게 되자 자신이 얼마나 박복하고 업장이 두터운가를 한탄하면서 자살을 결심한다. 벼랑에서 몸을 강물로 던졌을 때 띨로빠가 나타나 구해주신다. 나로바가 띨로빠임을 알고 원망을하니, 띨로바께서 <네가 나를 찾아 나선 그 순간부터 나는 너를 잠시도 떠난 적이 없다. 다만 네가 네 아상에 가려서 나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네가 도중에 만났던 거지와 강도들이 다 나의 화신이였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 나로바는 띨로바에게서 열세차례에 걸친 아상을 없애는 혹독한 시련을 거친 후 수행을 성취하여 까규파의 주 수행법인 <나로바 육성취법>을 남긴다. 지금도 까규파의 무문관에서는 이 수행법을 위주로 전수하고 있다.

 

  나는 대만에서 티벳불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우연히 나로바 육성취법에 대한 서적을 몇권 발견했다. 본래부터 기공이나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터 인지라 몸과 마음을 함께 닦는 논리 정연하고 구체적인 수행법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이 수행법이 아직도 전수되고 있는지 실제로 성취자가 존재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매일 나름대로 열심히 책도 보고 기도도 하면서 이 수행을 전수하는 도량과 성취자와 인연만 된다면 이 한 생을 다 바쳐서라도 그 수행을 해보고자 합니다라고 간절히 염했다. 나로바 육성취법을 전수해 주실 구루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실한 기대도 없이 인도에 있는 티벳의 임시정부 소재지인 다람살라로 갔다.

 

티벳불교 도서관에서 티벳어 연수를 하던 중 따시종에 위치한 까규파의 전통수행도량인 캄바카 사원을 방문케되었는 데 그 곳의 책임자이신 도종린포체를 통해서 나로바 육성취법을 전수하는 무문관이 그 도량 내에 시설되어 있고 성취자이신 독덴 암틴께서 지도를 해주신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귀가 번쩍 뜨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선지식을 뵙게 해달라고 청을 드렸다. 그러나 지금 무문관 중이시라며 좀처럼 쉽게 뵙기가 어려운 듯했다. 한 달 남짓 후에 이 사원에 제일 큰 행사인 파드마삼바바의 기도법회와 함께 라마댄싱이 열렸다. 그 때에 성취자이신 독댄 암틴께서도 밖으로 나오셔서 라마댄싱을 참관하시면서 손에는 티벳사람들이 거의 매일 손에 들고 돌리는 만트라와 경전이 든 마니륜이라는 통을 돌리고 계셨다.

 

마을 사람들 중에 하나가 저 분이 무문관을 지도하시는 성취자이시고 지금 행사 중에 비가 오지 못하도록 진언을 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다른 티벳인과는 달리 유난히 피부가 희고 빛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누구에게나 유쾌한 느낌을 주는 힘찬 모습은 칠십 노인이라 믿기 어려웠다. 뵙기를 청해서 처소로 찾아뵈었다. 너무도 누추한 좁은 방에 낮으막한 나무의자 놓고 두 사람과 통역 한사람 앉으니 방안이 가득찼다. 암틴은 꾀좨좨한 어깨 런링에 흰치마를 걸치신 모습이 첫 눈에 우리 시골집 할아버지를 방불케 했다. 밖에서 가사에 법복을 다 갖추신 여법한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나는 그 곳에 오게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무 것도 모르지만 나로바 육성취법을 수행하기를 원한다고 말씀드렸다.

 

의외로 수월케 법에 이르는 차제가 있는 데 먼저 네가지 기초수행을 십만번씩 다 마치고 본존 관정을 거쳐서 무문관을 하고 나면 나로육법을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업장이 두터운 나는 법을 주실 수 있다는 말씀과 그 예비단계에 대한 말씀을 듣긴 했지만 왠지 좀 싱거웠다. 티벳의 성취자라면 좀더 신비롭고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어떤 비범함이 있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기초수행에 대한 법을 청하기를 차일피일 미루고 다른 사원에 혹시 더 좋은 환경과 선지식이 있는 지를 찾아다녔다. 마침 한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세라부링이라는 마을에 다른 까규파 사원이 있는 데 비구니들을 위한 무문관이 시설되어 있고 나로육법도 전수하고 있다고 했다. 그 곳에서 티베트 비구니 스님들 무문관을 지도하신다는 밍귤린포체를 찾아뵈었다.

 

이제 겨우 스물한살의 나이와는 달리 태산같이 묵중하고 말씀을 하실 때는 강물처럼 부드럽고 자상하셨다. 그야말로 비범하신 환생자요 연꽃 속에 보석같이 빛나는 모습이셨다. 나는 두 생각도 없이 그곳으로 옮겨와 수행코저 한다는 말씀드렸다. 린포체께서는 캄바카사원에는 독댄이라는 성취자들이 아주 훌륭하시고 보배로운 존재라면서 그 곳에서 수행하기를 권하셨다. 나는 막무가내로 그 곳으로 옮겨와서 린포체를 모시고 수행하고 싶다며 받아주시기를 청했다. 린포체께서는 더 이상 말리지를 않으셨다. 그 곳에서 수행할 수 있는 외국인을 위한 집 한 채를 예약해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따시종으로 돌아왔다.

 

  산 어귀에 이르렀을 때 이웃집에 사는 외국인 여자가 무덤에서 금방 일어난 듯한 창백한 얼굴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는 당신에게 아주 나쁜 소식을 알려주어야만 한다고 했다. 내가 거주하고 있던 집이 불에 다 타버렸다는 것이였다. 나는 순간 멍청해졌다. 아침에 멀쩡하던 집이 몇 시간 나갔다 온 사이에 다 타버리다니.... 믿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많은 인도 사람들과 몇 명의 라마들이 타다 남은 물건들을 쌓아놓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함께 나간 도반스님은 자신의 돈지갑부터 찾았다. 적어도 이삼년간 공부하고자 준비해온 전재산을 방안에 두고 나갔던 것이었다. 백 불 짜리 육십 여장이나 넣어놓았던 전대는 다 타버리고 허리끈부분만 약간 남아있었다.

 

물건을 챙겨놓았던 이십 여개나 되는 가방들과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준비했던 오리털 파카와 슬리핑백 등산화등이 불에 타다 말은 찌꺼기만 남아있었다. 불을 꺼준 마을 사람들에게 사례를 해서 돌려보내고 도반스님과 둘만 남았다. 우선 옆에 있는 겨우 한사람 살 수 있는 작은 토굴로 쓸 수 있는 짐만 옮겼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려하니 이불이 다 타버리고 없었다. 서글프고 처량한 마음에 말문이 막혔다. 얼마나 두터운 업장이 있길레 이역 만리 낯선 인도 땅까지 와서 남의 집까지 다 태워먹는단 말인가! 아직까지 이 따시종 마을에서 그렇게 큰 화재는 없었다한다. 아르헨티나 사람이 겨울철에 와서 수행하기 위해서 지어놓은 집이 여름에는 비어있으므로 잠시 빌려들어 갔던 것인데 남의 집에 불을 내어 훼손을 시켜놓았으니 고쳐주어야 했다.

 

마침 라마가 슬리핑백과 담요 하나를 들고 왔다. 영국 비구니스님 하나가 T셔츠 두 개도 갖다 주었다. 잠을 청하고 누웠으나 눈 앞에 불길이 활활 타는 영상과 함께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만감이 교차하고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어지럽혔다. 부처님께서 제행이 무상하다하셨던가! 아침까지 멀쩡하고 많은 인도인들과 티베트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좋은 물건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지금은 이불하나 헌 옷가지를 얻어 입어야하는 신세가 되다니.... 먼저 남의 집을 태웠으니 수리를 해주어야 했다. 일단 세라부링으로 거처를 옮기고저 했던 계획을 미루고 화재의 뒷수습을 하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밤새 뜬 눈으로 새우고는 아침에 독댄 암틴을 찾아뵈었다. 내게 남아있던 딸러 이천오백불중에서 이천불을 봉투에 넣어 올리고는 말씀드렸다. <제가 업장이 두터워 법을 구하러왔다가는 불만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잿더미를 보고 모든 것이 무상함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방황하고 분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제가 업장이 두텁고 근기가 약해서 법을 받기 어렵다면 더 많은 공양을 준비해 올리고 참회기도를 하고저 하오니 빠른 시일내에 수행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해 주십시요.>했다. 암틴노장님께서 만면에 자상한 미소를 띠우시며 너희가 이미 火供으로써 많은 공양물을 불 속에 태워 올렸으니 그보다 많은 공양이 어찌 필요하겠느냐하시며 다음날부터 법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다음날부터 한편으로는 불에 탄 집을 티베트사람들의 도움으로 보수하면서 한편으로는 구루 암틴으로 부터 기초수행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둡고 좁은 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구루께서 한 마디 한 마디 윤회의 고통에 대해 세세히 일러주시고 염리심을 일으켜서 마음이 법을 향해 성숙해져야 한다고 노파심절하게 말씀하실 때마다 가슴깊은 곳에서부터 무한한 환희와 감동이 용솟음쳤다. 인도의 오월은 그야말로 숨조차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더웠다. 게다가 따시종은 물이 부족하여 몸 안에 수분이 부족해서 오는 풍토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줌소태에 걸린다. 그 무더운 인도에서의 첫 여름을 구루 암틴의 좁은 방에서 가르침을 받으면서 비록 풍토병과 탈수로 고생하긴 했지만 오체투지 십만번을 환희심과 간절함으로 마칠 수가 있었다. 그 사이에 육개월만 돌아보고 대만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마음이 어느 새 사라지고 더 이상 방황하고 헐덕이는 마음을 쉬고 내생을 위해 이생을 포기하고 수행만을 위해 매진하기로 마음이 굳혀져 갔다.

 

  어느 날 구루의 좁은 방에서 대만에서 온 제자 두 사람과 놀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것은 <미라레바 십만송>이라는 책을 놓고 제자가 마음대로 책을 펼치면 스승님께서 읽어주시면서 인연도 보고 때에 맞는 법문도 해주시는 놀이였다. 때마침 내가 들어가니 나한테도 책을 주며 펼쳐 보라 했다. 내가 임의로 펼쳐서 스승님께 드리니 구루와 통역자이신 라마가 박장대소하며 너무도 딱 맞는 구절이라 하시며 즐거워 하셨다. 나는 영문을 몰라 통역을 청하니 그 대목은 미라레바와 두 번째 수제자인 레충바에 얽힌 고사였다. 레충바는 스승 미라레바를 떠나 인도로 법을 구하러 떠났다. 인도에서 많은 스승들을 만나 논리학등 많은 학문을 익히고 많은 서적들을 구해 돌아왔다. 내심 스승이신 미라레바는 무식한데 자신이 더욱 박식해진 것을 은근히 자만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물을 길러 가지고 오는 데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

 

아마 스승님께서 공양을 짓고 있는가 보다 생각하고 들어가니 미라레바는 레충바가 인도에서 가져온 서적들을 다 태우고 있었다. 레충바가 미친 듯이 분노하여 항의를 하니 미라레바는 너무나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시면서 이 책들을 다 보려면 네가 죽을 때까지 보아야 함으로 나는 네가 죽었다 생각하고 너를 위해 이 책들을 다 태우는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는 레충바의 헐덕이는 마음을 쉬도록 해주기 위해서 많은 신통력을 보이시는 대목이었다. 그 내용과 나에게 일어난 화재가 같은 상황이라면서 너무도 즐거워하셨다. 나는 불이 난 덕분에 헐덕하는 마음을 쉬고 법으로 마음이 향하게 되어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스승님께서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시면서 정색을 하시고는<한 번 더 태울까?> 하고 물으셨다. 그 말씀은 순간 나를 멍하게 했다. 그렇다면 그 화재는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 날 이후 어쩌면 그 사건은 스승님께서 나를 법으로 인도하시고저 자비로 내리신 가장 큰 가피 일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신심을 갖게 되었다. 구루께서는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다 스승님께서 나를 성불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가피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따시종에 찾아 오는 다른 나라의 외국인들이 가끔 부러운 눈으로 내게 묻곤 한다. 외국인으로서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티베트 불교 수행에 깊이 들어 올 수 있었느냐고... 나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로케트나 원자탄이 빨리 멀리 날 수 있는 것은 꽁무니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라고... 티벳불교에서 구루의 존재는 그 제자에게 있어 가피의 근본인 부처요 가장 자애로운 의지처인 아버지시며 모든 번뇌와 장애를 없애어 성취를 내리시는 수호본존이며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져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현장스님의 염불선 이야기에서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다.

 

고향을 생각하고 어머니를 생각할 때 인간은 안온함을 느끼듯이 그러한 자연의 품에 안길 때 평안함을 얻게 된다. 번뇌의 인간이 침묵의 대자연 속에서 평안을 느끼듯이 내면의 공을 체험하고 침묵의 공간을 간직한 선지식의 존재는 우리를 근원적인 평안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청정승보는 번뇌와 죄업으로 오염된 중생들에게 최상의 복전이요, 으뜸가는 보배라고 부르는 것이다. 침묵의 공간을 성취한 선지식은 끝없는 자비의 파동으로 중생의 번뇌를 흡수하는 자석과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내면의 공성을 체득하여 태양과 같은 자비와 지혜광명을 구족하신 구루께서는 끝없는 자비와 방편으로서 제자의 번뇌를 정화하여 불과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한 구루를 만났을 때 제자는 다만 신심으로 고무되어 수행만 하면 되는 것이다.

 

소걀린포체는 말씀하신다. ꡒ스승을 만나기란 그리 어렵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을 참으로 믿고 따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르침 또는 스승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본질적인 것은 자기 자신 안에서 통찰력을 발견하고 그 가르침과 스승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따르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어떠한 어려움과 좌절, 모순과 결함에 직면하더라도 굴복하지 말고 자기 자신의 유치한 감정에 속지 말고 자신의 선택을 위하여 그 길을 끝까지 따르는 인내, 지혜, 용기, 겸양을 길러야 한다. 더더구나 조급하게 굴어 진리와 멀어져서도 않된다. 빨리 가고자 하다가 도달치 못하는 사람들이 흔히 있다.

 

티베트에서는 물론 역대의 불교선종사에서 기록에 남은 많은 성취자들이 오랜 시간동안 스승 곁에서 헌신의 마음으로 시봉을 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도의 위대한 스승 사라하는 말했다.

 

  마음 속에 스승의 말씀이 들어 간 사람은 손 안에 보물처럼 진리를 보리라.



출처 : http://www.tibetan-museum.org/coding/sub4/sub4.asp?bseq=7&cat=-1&sk=&sv=&yy=&page=1&mode=view&aseq=594#.W-LDhF5Rdh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