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風水)는 신기한 게 아니다
글: 유용(劉墉)
나는 아주 유명한 밀종(密宗)의 대사를 알고 있다. 그는 기를 보고 운을 고쳐주는데 능할 뿐아니라, 풍수도 볼 줄 안다. 많은 사람들은 온갖 방법으로 그를 집안으로 청해서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대사가 한 마디를 하면, 바로 금방 인테리어한 것도 다 뜯어내고 새로 하곤 한다. 심지어 대문을 봉쇄하고, 억지로 옆문을 정문으로 쓰기도 한다. 듣기로 대사의 지시에 따른 후 사람들은 모두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대사가 비록 신이라 하더라도, 하루는 내가 그와 한담을 나누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나서는 그에 대한 인상이 많이 깍였다.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국의 아주 부자들이 모여사는 동네에 가보았는데, 그곳의 호화주택은 모두 하나같이 풍수가 좋다는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럴 수가. 너무나 황당하지 않은가? 미국인들이 풍수를 알겠는가? 그저 그 지역은 돈이 많으니 집을 멋있게 지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곳의 풍수가 좋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얼마를 지난 후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나도 초청을 받아 한 호화주택을 가보았다. 집의 설계나 국면이 모조리 중국의 풍수에 들어맞았다. 나는 호기심에 주인에게 물어봤다. 혹시 중국설계사가 만들지 않았느냐고? 집주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후에 분석하여 들려주었다:
"이 문은 원래 거실까지 직접 통했었다. 그런데 거실 뒤에 침실이 있어서 설계사는 너무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밀성을 위하여, 문을 들어서는 곳에 병풍을 두었다." 그리고 또 말했다: "봐라. 뒤에 있는 몇 그루의 나무는 원래 없던 것이다. 그저 전봇대가 하나 있었다. 설계사는 하나만 서 있으면 보기에 불편하니, 곁에 몇 그루의 삼나무를 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서재를 가리키며 말한다: "원래 서탁이 여기 있었다. 설계사는 매번 누군가 들어올 때마다 내가 고개를 돌려야 하니, 불편하다고 저쪽으로 바꿔놓았다. 바로 바깥의 빛이 왼쪽에서 들어오니 글을 쓰는데 가려지지 않았다. 곁에는 원래 작은 문이 있었는데, 설계사는 필요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두 문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사람들이 드나들면 마음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나를 데리고 전체 집을 한바퀴 둘러보게 했다. 나는 그 설계사의 말이 모두 중국의 풍수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풍수를 아는 것인가? 아니면 풍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그저 설계를 통해서 사람들이 편하게 느끼는 집을 만드려고 했는데, 풍수에 맞은 것인가.
예를 들어보자, 중국인들이 자주 말하는 "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는 언뜻 듣기에 아주 현묘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일이다. 즉, "왼쪽에 물이 있고, 오른쪽에 길이 있고, 앞에는 넒은 광장이 있고, 뒤에는 산이 있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곳에 살고 싶지 않겠는가? 특히 고대에 왼쪽에 물이 있으면 물을 마실 수 있고, 오른 쪽에 길이 있으면 드나들 수 있다. 앞에는 한 눈에 들어오는 광장이 있으면, 적이 쳐들어올 때, 우리는 화살을 쏘아서 적을 죽일 수 있다. 정말 상대할 수 없게 되면, 뒤쪽의 산으로 숨어들면 된다.
이론이 깊이있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설프게 알고서 한 두마디 '풍수설'을 듣고는 그것을 앞세우는 것이다.
나의 친구중에 최근 그가 순조롭지 못한데, 이유를 집을 잘 못 샀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인은 그가 거주하는 그 건물의 정면에 길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옥(箭屋)이다. 화살이 심장을 뚫는 격이다(一箭穿心). 나는 당초에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 친구는 자책했다.
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십오층에 사는데 앞에 길이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만일 농업시대라면 네가 땅을 다진 단층집에 살고 있는데, 바깥에 한 줄의 도로가 곧게 뻗어 있다면, 한밤중에 누군가 마차를 몰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다가 잘 보이지 않아서, 너의 집으로 뛰어들 수 있을지 모르고, 너를 압사시킬 지 모른다. 그래서 그때는 이런 집이 흉한 집이라고 했다. 또 밤에 마차를 모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길이 있는 벽에 거울을 걸어두어, 말의 등을 반사시킬 수 있다. 과연 말을 모는 사람이 반사된 등광을 보고는 속도를 늦추고 말고삐를 당겨서 큰 화를 면하곤 했다. 이런 일이 많았다. 그래서 거울을 걸면 구사피흉(驅邪避凶)할 수 있다고 미신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너는 고궁에 가보라? 총통부를 봐라. 그 앞에는 모두 큰 길이 있다. 제왕은 얼마나 풍수를 따졌는가? 그들이 어찌 이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그 이치는 간단하다. 그들의 앞에는 광장이 있다. 마차를 몰고 달려오더라도, 멈출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황궁은 모두 높아서, 앞에 계단이 있다, 마차를 몰고 쳐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 길이 있던 없든 엄마나 큰 길이 있든, 앞쪽이 넓기만 하면, 집이 높기만 하면 아예 신경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강조했다. "거꾸로 네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전천심(一箭穿心)만 생각한다면 이렇게 봐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저렇게 봐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나쁜 심정이 바로 나쁜 풍수를 형성시킨다."
과연 그는 그 말을 듣고난 후 더 이상 마음쓰지 않게 되었고, 갈수록 일이 잘 풀렸다.
'복있는 사람이 복있는 집에 산다(福人福宅)". 고인들이 이미 말한 바 있다. 마음이 즐거운 것이 겉으로 나타나는 풍수보다 더 중요하다. 바로 이때문에, 마찬가지의 집이지만, 앞의 주인은 편안하게 살지만, 다음번 주인은 순조롭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풍수가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잘 유지보수하지 않으면, 그 안은 더럽고 어지러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병을 얻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풍수를 지니고 있어도, 집이 오래되면 역시 무너진다. 만일 사람을 압사시키면, 그것도 좋은 풍수라고 할 수 있을까?
유지보수를 얘기하자면, 주의할 것이 있다. 만일 풍수쟁이가 당신 집으로 갔을 때, 수돗물에 물이 새면 아마도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안됩니다. 이렇게 되면 재물이 샙니다." 그는 아마도 말을 잘 할 것이다. 물은 돈이 필요하고, 물방울이 계속 새면, 당연히 재물이 새는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가서 생각해보면, 수도꼭지가 좋지 않으면, 일찌감치 갈았어야 한다. 왜 갈지 않았는가? 당신이 게을러서 놔두었거나, 그것을 처리할 정신이 ㅇ벗는 것이다. 잘못하고 있는 것이니 쇠약해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풍수쟁이가 이렇게 얘기하면,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말이 정말 맞구나. 나는 최근에 재물을 잃었는데, 순조롭지 않은데..."
그 풍수쟁이가 정말로 정확한가?
마찬가지 이치로, 당신의 집안에 있는 화초를 잘 가꾸지 않아서, 황무지가 되면, 당신의 집 계단의 벽돌이 흔들리고 있다면, 너의 집을 드나드는 길의 가로등의 절반이 꺼져 있다면. 이 경우, 풍수가 좋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혹은 풍수를 나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악순환이다. 네가 더 쇠약해질 수록 너는 더더욱 집을 돌보지 않는다. 갈수록 질서가 없어지고, 더욱 순조롭지 못하게 된다.
만일 풍수쟁이를 불러서, 너에게 나무를 십게 하고, 풀을 자르게 하고, 계단을 수리하게 하고, 등을 갈게 한다면, 네가 매일 집을 드나들 때, 더욱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정신을 차릴 것이고, 운도 좋아질 것이다. 너는 곳곳을 다니면서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모조리 풍수쟁이가 잘 지적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양택(陽宅)"을 얘기하였으니, 다시 "음택(陰宅)"을 얘기해보자.
선거때가 되면, 후보자의 부모 내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의 풍수까지 얘기거리로 등장한다. 어떤 사람은 당선을 위하여 특별히 묘를 손보고 길을 닦는다. 죽은 사람을 잘 묻기만 하면, 후세인들이 그저 누워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풍수쟁이들이 음택을 설계할 때 이렇게 물을 것이다: "돈을 원합니까, 관직을 원합니까" 그 뜻은 돈을 벌기를 원하는지, 승진을 원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삼춘백설귀청총(三春白雪歸靑塚)
만리황하요흑산(萬里黃河繞黑山)과
가련무정하변골(可憐無情河邊骨)
유시심규몽리인(猶是深閨夢裏人)의 후손들은 다 알고 있을까?
독일 나치의 수용소에서 독사하거나 시신을 불태워지거나 만인총에 던져진 사람들은 모두 후손이 없거나, 후손들이 모두 운명이 좋다면, 만인총의 풍수가 아주 좋다는 말인가?
결국은 사람들이 인과관계를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다. 돈을 번 사람들은 하나같이 조상묘를 잘 수리한다. 사람들은 그 호화로운 음택을 보고, 거기에 새겨진 이름을 보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라. 여기에 새겨진 사람이 유명인이 아닌가? 그가 얼마나 운이 좋고, 돈을 벌었는가? 이는 모두 조상묘를 잘 둔 덕이다."
정말 조상묘의 음덕이 그를 도운 것일까? 견식있는 고인들은 이미 이런 말을 했다.
매산원불위친모(買山原不爲親謀)
지위공명이록구(只爲功名利祿求)
수지인간호풍수(須知人間好風水)
부재산두재심두(不在山頭在心頭)
산을 사는 것은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공명과 이록을 구하기 위함이다.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좋은 풍수는
산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그 묘소를 수리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묘소안에 묻힌 것이 그의 할아버지이면, 그의 할머니는 아직 살아있단 말인가?
만일 살아있다면, 그가 죽은 사람을 모시는 동시에,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효도를 다하고 있는 것인가? 혹시 할머니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면, 아마도 죽은 할아버지를 찾아본 횟수가 살아있는 할머니를 본 횟수보다 많을 것이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3740
중국에 도대체 몇 개의 용맥(龍脈)이 있는가?
작자: 미상
중국역사상 최소한 24개의 왕조가 탄생했다. 만일 매 왕조마다 1개의 용맥이 있다고 계산한다면, 중국에 최소한 24개의 용맥이 존재하는 것이다. 황제(黃帝)의 용맥은 중원황하유역이다; 대우(大禹)의 용맥은 지금의 사천(四川) 문천현(汶川縣)의 구룡산(九龍山)이다; 상탕(商湯)의 용맥은 황하유역이다; 주(周)왕조의 용맥은 기산(岐山)이다; 진(秦)왕조의 용맥은 함양(咸陽)이다; 한(漢)왕조의 용맥은 패현(沛縣)이다; 서진(西晋)의 용맥은 하내(河內)이다; 수(隋)왕조의 용맥은 홍농(弘農)이다; 당(唐)왕조의 용맥은 장안, 농서, 태원이다; 송왕조의 용매은 개봉, 공의, 낙양일대이다; 원왕조의 용맥은 내몽고초원이다; 명왕조의 용맥은 안휘 봉양이다; 청왕조의 용맥은 동북이다. 당연이 이들은 모두 대체적인 범위이고, 기실 용맥의 구체적인 위치는 확정하기 어렵다. 이는 용의 활동범위가 항상 변화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용맥은 모두 산과 물을 따라서 나타난다.
풍수가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의 대용맥은 현재 서진(西進)과 동출(東出)의 상태에 있다. 서진방향은 황하유역이고 화산지구는 큰 용이 물을 마시고 나가는 곳이다; 동진방향은 장강유역이다. 황산지구가 큰 용이 물을 마시고 나가는 곳이다. 이 두 지역은 이후 중국의 새로운 대용맥을 형성할 것이다.
중국 용맥의 시조는 곤륜산이다. 곤륜산의 왼쪽(서북쪽)은 천산산맥, 기련산산맥, 음산산맥이 있다. 북쪽으로는 알타이산이 있으며 그에 수반하는 것은 하란산, 대소흥안령, 장백산이 있다. 곤륜산의 우측(서북, 서남쪽)에는 당고랍산, 히말라야산, 횡단산등의 산맥이 있다. 곤륜산용맥은 상술한 남북산맥의 중간에 끼어 있고, 계속 동쪽으로 휘황찬란한 모습을 드러낸다. 용의 주맥은 섬서성의 서안시(고도 장안)로 가고, 다시 동으로 중원(하남)으로 가며, 동시에 북향, 남향, 동향, 서향의 갈래가 있어 우물정(井)자모양의 곤륜산맥체계가 갖추어진다.
곤륜산은 중원에 온 후, 동쪽으로는 육반산, 진령이 있고, 북쪽으로는 무산, 설봉산, 무이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령이 있다. 여기에 오악이 있다: 북악 항산, 동악 태산, 서악 화산, 중악 숭산, 남악 형산. 그리고 동쪽의 황산과 대만의 옥산(해발4000미터), 서남의 아미산이 있다. 이들 거세무쌍, 거세문명의 크고 작은 산맥, 크고 작은 용맥이 중화거룡도를 형성한다. 즉 큰 용, 중간 용과 작은 용이 혼합된 와룡도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방의 민감한 정치가는 중국을 한 때 잠자는 용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그 말은 맞다. 그러나 풍수학적으로 말하자면 그 말은 틀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1개가 아니고, 한 무리의 크고작은 와룡이기 때문이다. 40여년전,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중화민족은 선진에서 낙후로 향했다. 현재는 이미 여러 용들이 깨어나서, 중화민족은 부흥할 것이다. 낙후에서 선진으로 향할 것이다.
당연히 강하(江河)는 용의 맥락(脈絡)이다. 물은 용의 혈액이다. 중국에는 삼대하류가 있다. 즉 황하, 장강과 주강(珠江)이 그것이다. 삼대하류중 황하와 장강은 같이 청장고원에서 발원한다. 청해성의 파안객랍산은 황하의 발원지이고 티벳자치구에 위치한 당고랍산은 장강의 발원지이다. 황하, 장강과 주강은 모두 동쪽으로 흐른다. 각각 발해, 동해와 남해로 흘러들어간다. 황하는 전체길이가 5400여킬로미터로, 청해, 사천, 섬서와 산동을 거쳐 발해로 들어간다; 9개성과 자치구를 지난다. 장강은 전체 길이가 6300여킬로미터로, 청해, 사천, 운남, 귀주, 호남, 호북, 강소와 상해를 거쳐 동해로 들어간다. 8개성,직할시를 거친다. 주강은 운귀고원에서 발원하여,귀주, 광서장족자치구와 광동성을 지난다. 광주시를 지나면서 비옥한 주강델타를 형성하고, 남해로 흘러들어간다. 3대하류는 대용맥의 방향과 합하여 흐른다. 그리하여 대지에 산환수포(山環水抱)의 국면을 형성한다.
3대하류이외에 동북에는 흑룡강, 송화강, 요하, 압록강, 도문강, 넌강이 있고, 서북에는 타림강, 어얼치스강, 야루장부강, 란창강, 누강이 있고, 동부지구에는 회하, 해하등이 있다.
그외에 각성, 각지는 모두 자신의 강이 있다. 예를 들어, 호남의 상강, 사천의 가릉강, 광서의 옹강, 홍수하 등등이 그것이다. 전국에는 강하의 물(용의 혈액)을 조절하는 2000여개의 호수가 있다. 이들 천연의 담수호는 강하의 급류를 조정하고, 물이 크고 작게 굽이쳐서 흐르게 하여 산환수포의 작용으르 한다. 예를 들어, 파양호는 강서성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최대의 담수호이다.장강이 이곳에 오면 크게 굽이치며 물을 파양호로 보낸다. 강서의 풍수지리는 전국최고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의 삼대재자지향(三大才子之鄕)의 하나가 된다(강소, 호북, 강서). 호북, 호남의 중간에 위치한 동정호는 장강 중류의 구비치는 지점이다. 그리하여 호남은 인령지걸하여 인재를 많이 배출한다. 호남의 지형도를 보면, 호남은 용봉정상(龍鳳呈祥)의 형국이다. 용이라 함은 신화의 대웅산을 용꼬리로 하여, 연원-누저-영향-소산을 지나며, 용머리는 연수이다. 소산은 용의 칠촌위치에 있다. 악록산은 용의 발이다. 봉이라 함은 남악이 꼬리이고, 쌍봉-상향을 지나며 봉의 머리는 용의 머리인 연수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증국번의 고향은 봉의 목과 봉의 등이 만나는 곳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여걸이 많이 나왔다. 이중 대웅산용맥이 가장 귀하고, 그 조산인 구룡지는 해발 1622미터로 높이 호남의 동부,북부,남부,서부의 대부분 지역을 커버한다. 구룡지의 꼭대기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주위는 9개의 산등성이가 있는데, 산등성이마다 샘이 하나씩 있다. 1970년대말에는 샘물이 솟아났었다. 지금은 이미 사라졌다.
산은 용의 세이고, 물은 용의 피이다. 그러므로 용맥은 산수를 떠날 수가 없다. 자고이래로, 산환수포의 땅은 모두 풍수길지이다. 풍수학을 따지지 않고, 용맥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이런 산과물이 좋은 환경에서 성장한다면, 생활은 조화롭고 즐거울 것이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4169
삼협댐과 용맥풍수(龍脈風水)의 비밀
글: 김언(金言)
최근 대륙의 네티즌들들은 대련(對聯)의 형식으로 멋진 문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상반년항역(上半年抗疫), 전구항공(全球抗共): 하반년항홍(下半年抗洪), 전년항궁(全年抗窮), 노역결합(澇疫結合)"
상반년에는 우한폐렴과 싸우고, 전세계는 중공과 싸운다; 하반기에는 홍수와 까우고 일년내내 가난과 싸운다. 홍수와 역병의 결합
"대반개중국포수(大半個中國泡水), 중남해집체잠수(中南海集體潛水), 수중노월(水中憦月)"
중국의 절반은 홍수를 당하고, 중남해의 고관은 집단적으로 잠수탄다. 물속의 달건지기.
양고군고(糧庫軍庫) 고고도공(庫庫掏空); 역구재구(疫區災區) 구구소사(區區小事) 자생자멸(自生自滅)"
양식창고 군대창고 창고마다 텅텅 비었고, 역병구역, 재난구역은 자잘한 작은 일로 취급한다. 스스로살고 스스로 죽을 수밖에
육온외가일온(六穩外加一穩) 온정권(穩政權); 육보외가일보(六保外加一保), 보핵심(保核心) 기수이진(氣數已盡)
여섯가지 안정 외에 하나의 안정을 더해야 한다. 정권안정. 여섯가지 보장외에 하나의 보장을 더 해야 한다. 핵심(핵심은 시진핑을 의미함)보장. 목숨은 이미 다하였다.
6월부터 전면적으로 장마가 내리면서, 중국남방은 역사상 최악의 폭우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강이 범람한다. '수만금산(水漫金山)'이 현실로 나타나고, 도시에서 바다를 보는 것같은 광경이 벌어진다. 농촌에는 애타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장강유역은 곳곳에서 위급하다고 소리친다. 많은 농지, 마을은 물에 잠겼고, 제방, 주택, 도로, 교량은 무너져 버렸다. 안휘는 통곡하고, 강서는 눈물흘리며, 광서는 울부짖고, 귀주는 신음한다.
현재 홍수피해는 이미 호북, 호남, 강소, 중경등 27개 성시로 번져, 4,522.3만명의 이재민을 냈다. 142명이 사망실종되고, 3.5만개의 가옥이 파손되었다. 직접적인 경제손실만 1,169.5억위안에 달한다. 그래서 '만년에 한번오는 홍수도 막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삼협공정은 다시 한번 사람들이 주목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아래에서는 중국전통문화의 각도에서 여러 사람의 말과 서로 다른 견해를 종합하여, 최근 대륙에서 수재가 빈발하는 원인에 대하여 좀더 알아보고 분석해보기로 한다.
삼협댐은 용맥을 잘랐고, 중국 내지 세계의 풍수를 파괴했다.
삼협댐은 당금 세계최대의 수력발전소이다. 또한 중국에서 유사이래 최대의 공정프로젝트이다. 삼협댐은 투자가 거대할 뿐아니라, 남겨진 문제도 아주 많다. 특히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삼협공정이 중국에서 불러온 논쟁 역시 전대미문이라는 것이다. 2009년 완공식때 호대희공(好大喜功)의 중고에서 단 한명의 당 및 국가지도자들도 행사현장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중공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것이다.
중국고대의 과학자들은 눈을 들어 천문(天文)을 보고 고개를 숙여 지리(地理)를 보았다. 근취제신(近取諸身), 원취제물(遠取諸物)하여 오천년에 걸친 탐색과 실천, 귀납과 깨달음으로 세계에 유명한 '동방풍수학'이 형성되었다.
중국풍수이론의 핵심은 천, 지, 인 삼자의 합일을 중시한다. 즉, 천시, 지리, 인화를 중시한다. 용맥(龍脈)이 통하면, 국운(國運)이 흥한다. 용맥이 막히면, 국운이 쇠한다. 전통 중의학에서는 "통자불통(通者不痛), 통자불통(痛者不通)"이라는 말이 있다. 강하(江河)는 대지의 혈맥이다. 강하를 끊고, 막으면 대지는 혈전(血栓) 환자처럼 나이가 들어가면서 혈관은 점점 노화하고 막히게 된다. 결국은 '심근경색', '뇌경색' 혹은 '뇌색전'으로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삼협댐을 건설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풍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나서서 반대했다. 그들은 기문풍수(奇門風水)의 지기학설(地氣學說)로 보면, 장강이남은 경문(景門)에 속한다. 지기가 남으로 옮겨온 후 중국경제발전은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래서 장강은 하나의 용맥이고, 심지어 황하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극력 보호해야 한다.
삼협댐은 장강의 흐름을 막아버렸다. 마치 사람이 허리를 잘리거나, 혹은 용이 담장에 깔린 것과 같다. 꼼짝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 산과 물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음양이 균형을 이루는 형태가 중단되면, 풍수의 기운이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중국의 장기적인 추세와 지속적인 발전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사실상, 삼협댐의 건설은 확실히 중국 그리고 세계의 풍수를 바꾸어 놓았다. 자연, 기후에 영향을 주었을 뿐아니라, 경제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
민간의 반대목소리 이외에 저명한 수리전문가인 황완리(黃萬里) 선생도 여러번 중앙지도자들에게 글을 올려 삼협댐의 위험을 얘기했었다. 현대과학의 각도에서, 왜 삼협공정을 영원히 해서는 안되는지를 진술했다. 하물며 당시 14건의 항목별논증보고서중에서 5개의 보고서는 전문가팀이 서명을 거부했다. 그래도 여전히 정치공정이 착수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햇, 당시 전인대에서 삼협댐에 대해 표결할 때, 2천여명의 대표중에서 몇명이 지질, 수리공학, 댐측면의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었던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중국의 인민대표대회제도는 '활화석(活化石)' 션지란(申紀蘭)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며, 그저 찬성표만 던지는 거수기이다. 이는 기실 국가에 대한 독직이고, 인민에 대한 범죄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당시의 반대표수와 기권표수는 841표에 달하였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민주제도방면의 결함이 가져온 제도의 악과(惡果)는 중화민족의 명맥, 기운, 자손천추만대의 안위가 걸린 삼협댐의 표결에서 충분히 드러났다. 결국 14억 중국인은 중국 소수이익집단에 인질로 잡혀버린 것이다.
남수북조(南水北調)는 하늘이 정한 풍수국면에 위배되고, 자연생태환경을 파괴하는 것이다.
5천억위안의 거액을 투입하여, 세계가 주목한 남수북조공정은 마찬가지로 사상유례없는 거대한 건설프로젝트이다. 관방의 표현에 따르면 '공재당대(功在當代), 이재천추(利在千秋)" 공로는 현재에 있지만, 이익은 천추마내에 걸쳐 있다고 한다. 북방의 가뭄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선(東線)과 중선(中線)이 모두 완공되고 물을 보내기 시작했지만, 마찬가지로 중국의 각 중요의사결정자, 건설자, 책임자와 지휘자들중에 나서서 자신의 공로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어떤 학자는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전체 남수복조공정의 의사결정과 실시는 그저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식의 결정이었다. 최소한의 자연원리 과학원리도 무시했다. 백성을 괴롭히며, 돈만 쓰고, 나라와 국민들에게 해악을 끼치며, 자손의 살 길을 막는 공정이다.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다.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 또한 이렇게 말한다. "복명왈상(復命曰常), 지상왈명(知常曰明), 부지상(不知常), 망작흉(妄作凶)!" 중국의 산하형세는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다. 이는 일종의 자연지리상태이다. 일종의 대자연이다. <열자>, <회남자>등 고적에 따르면, 공공(共工)이 전욱(顓頊)과 제위(帝位)를 놓고 다투다가, 일시의 화를 참지 못하고 머리로 불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다. 그리하여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끊겼다. 이때부터 화하대지는 하늘이 서북으로 기울고, 동남의 땅이 함몰된다. 백천(百川)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흐르고, 산이 하나 서 있으면, 강이 하나 흐른다. 산맥이 이렇게 흐르면, 강물도 그렇게 흐른다. 이런 지리산천형세는 사람의 사지, 오관, 오장, 육부의 배치 그리고 혈액의 순환과 같다. 모두 천지간의 조물주가 교묘하게 안배한 것이다.
그래서 큰 산하의 길과 기맥을 따라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역행하려 해서는 안된다. 대자연의 흐름과 거꾸로 가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렇지 않고 이런 안배를 파괴하면, 이런 '대자연'을 파괴하면, 이런 '상(常)'을 파괴하면, 그것은 '망작(妄作)'이 된다. '대흉(大凶)'이 된다. 결국 '대자연'의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기승풍즉산(氣乘風則散), 계수즉지(界水則止)" 풍수는 '형(形)'과 '기(氣)'로 나뉜다. "봉유여이손부족(奉有餘而損不足)" 오행상생상극의 이치에 따라, 기로 말하자면, 남방은 병정화(丙丁火)이고, 북방은 임계수(壬癸水)이다. 큰강 큰하(河)는 동남방향으로 흐른다. 이수제화(以水濟火)하고 이형제기(以形濟氣)한다. 이것이 바로 수화기제(水火旣濟)이다. 이런 선천적인 자연국면은 아주 조화롭고 합리적이다. '길무불리(吉無不利)"하다. 그런데, 남수복조는 이 국면을 파괴하는 것이다. 남방은 병정화로 현제 불을 끌 물이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북방은 임계수인데 다시 북방으로 물을 가져온다. 이는 노자가 말한 "봉유여이손부족" 즉 남는데 주고, 모자라는데 빼앗는 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일찌기 <삼협댐은 장강을 목졸라죽인다>는 글에서 지진, 가뭄과 수재의 3가지 방면에서 예를 들어 삼협댐과 남수복조는 장강유역, 내지 전국점위의 새태균형에 위해를 가져온다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다시 재론하지는 않겠다.
강하는 죄가 없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모택도은 친히 형강분홍(荊江分洪)공정을 심사비준한다. 1953년 2월, 모택동은 "장강함"을 타고, 한구(漢口)에서 남경(南京)으로 간다. 거기서 장강유역계획, 삼협공정과 남수북조등 문제에 대하여 장강수리위원회 주임인 임일산(林一山)과 3일간 토론한다. 임일산은 장강의 여러 지류에 댐을 건설하는 계획을 말한다. 모택동은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지류의 댐을 모두 합치면 삼협의 댐 하나를 상대할 수 있는가? 그러자 임일산은 상대가 안됩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모택도은 삼협구를 가리키면서 '왜 이곳를 막아서 삼협댐을 만들지 않는 것인가? 어떤가?"라고 묻는다. 이때부터 중국정부는 삼협댐건설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1956년 7월, 모태공은 무한으로 가서 장강유람을 한다. 그리고 "절단무산운우(截斷巫山雲雨), 고협출평호(高峽出平湖)"라는 식수를 쓴다. 그가 삼협에 댐을 막아서, 산하를 개조할 망상을 한 것이다.
1958년 1월, 모택동은 직접 남녕회의를 주재한다. 그리고 삼협댐을 의사일정에 올린다. 회의기간동안 즉시 적극적으로 추진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임일산과 즉시 추진하는데 반대하는 이예(李銳)가 격렬하게 논쟁을 벌인다. 모택동은 두 사람의 말을 들은 후, 최종적으로 이예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리고 삼협댐에 대하여, '충분히 신뢰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충분히 논증한다"는 방침을 정한다. 그리고 주은래에게 이 일을 주관하도록 위임한다.
같은 해 3월 하순, 중공중앙은 성도회의를 소집하여, 주은래가 삼협을 고찰한 최종보고를 듣는다. 그리고 <중공중앙의 삼협수리시스템과 장강유역계획에 관한 의견>을 통과시키고, 전기준비와 각종관련업무를 적극적으로 진행하기로 한다.
1958년 여름, 모택동은 다시 임일산을 무한으로 불러 장강의 니사(泥沙, 진흙모래)문제에 대하여 보고를 받는다. 즉, 삼협댐의 수명문제이다. 임일산은 이렇게 보고한다. 삼협에 유입되는 진흙모래는 연간 5억톤이다. 삼협 위에 다른 댐을 건설하지 않는다면 삼협댐의 사용수명은 400년이 될 것이고, 최소한 200년은 될 것이다.
모택동은 한참을 생각한 후, 임일산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건 백년대계가 아니라, 천년대계이다. 겨우 2백년이라니 너무 아쉽다." 그후 중소분쟁으로 소련에서 전문가들이 철수한다. 그후 다시 3년 '대기근'이 닥치고 '문혁'이 일어나면서 삼협댐계획은 방치된다.
1969년 9월, 중공 호북성 혁명위원회 부주임 장체학(張體學)은 모택동이 시찰왔을 때, 정식으로 삼협댐건설을 건의한다.그러나,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는 삼협댐건설을 생각하지 않는다.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다만 최종적으로는 삼협댐의 전기공정. 즉 갈주패수리사업을 승인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6.4'사태의 학생의 선혈을 밟고 올라선 강택민은 다시 총리를 맡고 있던 이붕과 결탁하여,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한다. 그리하여 삼협댐의안을 적극 추진한다. 그리고 1992년 전인대를 통과시키고, 1994년 12월 14일 저식 착공하며, 2009년 완공한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하나님이 지상에서 원죄의 낙인이 찍힌 인류를 보고, 도덕이 타락하고, 인심히 나빠지며 세간의 폭력과 죄악이 더 이상 심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을 본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며 대홍수로 세간의 악인을 죽이고자 한다. 동시에 하나님은 사람들 중에서 노아라는 의로운 사람이 있다는 것도 발견하고, 그에게 방주를 만들게 해서 그의 부부, 3명아들과 며느리를 신세대의 인류의 씨로 보존시킨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금년 4월 20일, 시진핑은 자신의 '용흥지지(龍興之地)인 진령을 사람들이 침범하여 용기(龍氣)가 누설되는 것을 보고 전후로 6회나 '중요지시'를 내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 친히 현지로 가서 별장철거를 집행한다. 그리고 재삼강조한다. '진령은 중화민족의 조맥이다. 진령에 위법건축물을 지은 교훈을 받아들여 깊이 반성하고, 경종을 울려야 하며, 진령의 생태를 보호하는 호위무사가 되어야 한다. 절대로 전철을 밟아서는 안되고, 역사에 악명을 남겨서는 안된다"
기실, 중국이 삼협댐을 만든 진정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목적은 바로 장강이라는 중국에 유일하게 남은 최대용맥을 잘라버리고 다시 남수복조를 통해 남방의 용기 용혈을 북경으로 가져간다. 그렇게 하여 목숨이 다한 대홍룡(大紅龍)의 목숨을 부지시키려 한 것이다. 몇년전 중공은 다시 한번 목숨을 연장하기 위하여 '천년대계'인 웅안신구(雄安新區)를 내놓았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7091
낙양(洛陽): 중국고대의 풍수길지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중국고대에 이런 풍수길지가 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가운데 있는데, 수나라때, 25리 범위내에서 동시에 두 개의 도성, 두 명의 황제가 있었던 적이 있다.
고고학자인 허굉(許宏)은 일찌기 글을 써서 낙하하도(洛河河道)의 변천을 상세히 기술한 바 있다: 전체 낙양분지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이하(伊河), 낙하(洛河)의 두 강이 분지를 가로지른다. "십삼조고도(十三朝故都)"인 낙양에는 5대 도읍유적지가 남아 있다. 그것은 30여킬로미터에 이르는 분지의 중심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차례로 동주왕성(東周王城), 수당낙양성(隋唐洛陽城), 한위낙양성(漢魏洛陽城), 이리두(二里頭)유적지, 언사상성(偃師商城)이다. 화하문명 복심지구의 다섯개의 명주라고 불린다.
한위낙양성은 서주(西周) 성주성(成周城)에서 서한 유방이 최초로 수도로 정하고, 동한의 광무제가 수도로 정했으며, 조위가 도읍으로 삼고, 서진(西晉)도 도읍으로 삼는다. 북위효문제가 천도한 후에 확장해서 규모가 최대에 이른다. 궁성(宮城), 내성(內城)과 외곽성(外廓城)의 3중으로 구성되어 있고 면적은 100평방킬로미터이다. 서한 장안성의 2.6배이고, 수당장안성의 1.5배에 이른다. 고대 중국최대의 도성이었다.
동위,서위시기에 이곳은 쟁탈의 주전쟁터가 된다. 상방이 여러번 주인을 바꾸고, 점차 파괴된다. 수양제는 북으로 망산(邙山) 취운봉(翠雲峰), 남으로 이궐(伊闕)을 중축선으로 하는 낙하(洛河)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성을 만든다. 주변의 산천이 도성을 공위(拱衛)하여 성은 마치 하늘의 자미궁(紫微宮)같았다.
낙양성이 세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나라말기에 천하대란이 일어난다. 각지의 반란군은 크고 작은 것을 합쳐서 100개 정도에 이른다. 참가한 인원수도 수백만에 달한다. 618년, 와강군(瓦崗軍)의 이밀(李密)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위(魏)라 하고 자칭 위공(魏公)이 되고, 도성을 한위낙양성으로 한다.
619년, 왕세충(王世充)이 국호를 정(鄭)으로 바꾸고 국도를 낙양으로 삼는다. 두 황제는 서로 겨우 25리가 떨어져 있었다.
당나라 무덕원년 구월, 왕세충은 정예병마 2만여명을 뽑고, 말2천필을 동원하여 통제거(通濟渠) 남쪽에 주둔한다. 통제거 위에 3개의 다리를 설치하여, 와강군과 결전에 대비한다.
이밀은 군대를 이끌고 금용성(金墉城)을 나가 응전한다. 언사에 군영을 차린다. 왕세충의 군대는 망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저녁에 계곡에 잠복하고, 다음날 새벽, 부대를 동원하여 돌격한다. 이밀의 군대가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먼저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이밀의 군대는 패배하고, 부장인 배인기(裴仁基), 조군언(祖君彦)등 수십명이 포로로 잡힌다. 왕세충은 언사를 포위공격하고, 와강군의 언사 수비장수 정정(鄭頲)의 사병은 암중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와강군은 장수 수십명이 포로로 잡히고, 진지략(陳智略), 장동인(張童仁), 선웅신(單雄信)등이 투항한다. 이밀과 왕백당(王伯當), 가윤보(賈閏甫)는 잔여부대 2만명을 이글고 관중으로 들어가, 당(唐)에 투항한다. 나머지 장수와 주현의 수령들 예를 들어 이공일(李公逸),배행엄(裴行儼), 나사신(羅士信), 주법명(周法明), 정교금(程咬金), 진숙보(秦叔寶), 두재간(杜才干), 서원랑(徐圓朗), 주문거(周文擧), 왕당인(王當仁), 유흑달(劉黑闥)등은 나중에 대부분 당(唐) 혹은 두건덕(竇建德)에게 간다. 위징(魏徵)은 하북으로 가서 잠시 두건덕에게 의탁하였다가 나중에 서세적(徐世勣, 나중에 이씨성을 하사받아 李世勣이 되었다가, 이세민의 이름의 세자를 피휘하여 李勣이 된다), 장선상(張善相), 장량(張亮)등과 함께 당에 투항한다.
그후 당군의 이세민은 왕세충, 두건덕과 하락지구에서 격전을 벌이며, 이 전투에서 당나라 통일패업의 기반을 다진다. 당나라 정관연간에 이르러, 한위낙양성을 폐한다. 그리하여 25리를 사이에 두고 두개의 도성이 있던 역사는 끝이 난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6316
진시황릉: 역대제왕릉은 남향인데, 왜 진시황릉은 동향일까?
글: 남몽도주(藍夢島主)
진시황 영정은 육국을 휩쓸고, 천하를 통일하여 화하의 대통일을 완성한다. 그는 중국 최초로 황제를 칭한 군주이다. 그리고 고대에 가장 명실상부한 천고일제(千古一帝)이기도 하다.
진시황과 같이 역사의 정상에 선 인물에 대하여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어, 생부(生父)의 수수께끼, 사인(死因)의 수수께끼, 전위(傳位)의 수수께끼등등. 그중 진시황릉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가장 많고, 가장 신비하다. 예를 들어, 진시황릉의 특이한 방향과 같은 것이다.
진시황릉은 섬서성 서안시 임동구의 성동쪽 5천미터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여산을 의지하고, 북으로는 위수를 이웃하고 있다. 아주 뛰어난 풍수의 길지이다. 다만, 진시황릉의 조향(朝向)은 풍수에 부합하지 않는다. 죄서향동(坐西向東) 즉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대 고고학에 따르면, 일찌기 원시사회때, 중국의 원주민들은 좌북조남(坐北朝南) 즉 북에서 남으로 향하도록 촌락과 집을 지었다. 이렇게 하면 채광에 유리하고 바람을 피하는데도 유리하다. 그리고 중국고대인들의 풍수학의 이념에도 들어맞았다. 이천년동안의 봉건왕조사를 살펴보면, 역대왕조의 제왕릉은 대부분 좌북조향이다. 일르 통해 사후에도 여전히 지고무상의 제왕의 존엄을 누리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생전에 구오지존(九五之尊)의 자리에 있었고, 사후에도 여전히 군림천하(君臨天下)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시황릉은 도대체 왜 좌북조남이 아니라, 좌서조동으로 만들었을까?
일찌기 영정이 진왕으로 있을 때, 이미 거대한 능침의 건설공사를 시작한다. 그래서 먼저 확실한 것은 좌서향동의 능침방향은 바로 진시황의 뜻이라는 것이다. 진시황이 통상적인 방식과 달리 이렇게 선택한 구체적인 원인을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만일 부당하거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지적해주기 바란다.
원인 하나:
모두 알고 있다시피, 진시황은 신선을 찾아서 장생불사의 도리를 깨치고자 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는 심지어 어의 서복을 파견하여 불사의 비방을 찾게 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죽을 때까지 그 소원은 이루지 못한다.
고대인들은 신선은 동쪽에 산다고 믿었다. 진시황릉이 좌서향동을 한 원인중 하나는 바로 그가 자신의 사후에도 동영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신선을 만나 천국선경에 이르고 싶어 했고, 살아 있을 때 이루지 못한 바램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원일 둘:
사마천의 <홍문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항왕(項王), 항백(項伯)은 동향(東向)으로 앉괴 아부(亞父)는 서향(西向)으로 앉았다. 아부는 범증(范增)이다. 패공(沛公)은 북향으로 앉고, 장량(張良)은 서향으로 시립해 있었다." 이를 보면, 홍문연때, 주인인 항우와 연장자인 항백은 모두 서쪽에서 동쪽을 보고 앉는다.
진나라때,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것이 존귀한 자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된다. 섬서성 경내에서 발견된 917개의 진나라 묘장 중에서, 대다수는 동서방향으로 놓여 있다.
진시황은 죽기 전에 천하의 주인이었다. 죽은 후에도 존귀한 자리를 유지한다. 그래서 그의 능침은 서에서 동으로 향한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주인이자 제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원인 셋:
진시황은 13살때 부친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는다. 22살때 정식으로 친정을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장기적 안목과 웅심을 지닌 군주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큰 그림을 그린다. 기원전230년에서 기원전221년까지 10년동안, 진시황은 전후로 한, 조, 위, 초, 연, 제의 육국을 멸망시켰고, 39살때 천하통일의 천고대업을 완성한다. 한족을 주체로 하는 중앙집권의 강대한 국가인 진왕조를 건립한다. 이는 중국본토의 광활한 영토를 확립한 것이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진시황은 생전에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쌓았고, 죽어서도 여전히 천하를 오시했다. 이를 통해 대진제국이 천추만대 영원히 존속하기를 바랐다. 지리적 위치로 보면, 진나라는 전국칠웅중에서 가장 서쪽에 있다. 진시황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사후에 서방을 점거하고 멀리 동방육국을 바라본다. 그렇겍 자신의 왕국 자신의 천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진시황릉이 제왕묘장의 통상적인 법칙을 어기고 좌서조동을 취한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이다. 거기에는 진시황의 바램과 이상이 들어 있다. 동시에 그의 천고제왕으로서의 패주야심도 들어 있다.
당연히 이것은 모두 필자의 추측이다. 진시황릉이 왜 동향인지에 진정한 원인은 아마도 그만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출처 : https://shanghaicrab.tistory.com/16156642
한 홍콩 풍수가의 죽음
글: 허여(許茹)
해외중문매체 대기원의 보도에 따르면, 3월 30일 장쩌민을 띄우는데 열심이던 홍콩의 풍수가 정궈창(鄭國强)이 광동 자오칭(肇慶)에서 풍수를 보다가 산사태에 묻혀서 생매장 되었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장쩌민의 어용풍수가중의 한 명이라는 정궈창은 생전에 장쩌민의 명수(命水)가 좋다는 글을 싣는 등, 장저민을 도와 홍콩에서 사악한 사상풍수국(蛇狀風水局)을 펼쳐, "홍콩(香港)"을 "사항(死港)"으로 만드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번에 죽음을 맞이한 것도 그것과 관련이 없지 않다는 소문이다.
오술(五術)중 하나인 상술(相術)중에서 상지지술(相地之術)인 "풍수술"은 중국에서 자고이래로 있어왔고, 옛날에는 "감여술(堪輿術)"이라고 불렀다. 주로 궁전선택, 마을부지선택, 묘지건설등의 방법과 원칙으로 쓰였다. 전해지기로 풍수의 창시자는 구천현녀(九天玄女)라고 한다. 비교적 완성된 풍수학은 전국시대에 시작한다. 이는 중국에서 역사가 유구한 하나의 현술(玄術)이다. 민간에서 풍수를 믿는 사람은 풍수가를 '풍수선생'이라고 부르고, 속칭으로는 '음양선생'이라고 부른다.
고대인들은 풍수가의 작용을 대천행사(代天行事)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엄격한 심성이 요구되고, 반드시 덕행을 중시했다. 명나라때의 태극종사 진인 장삼풍(張三豊)은 <장삼풍전집>의 <감여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로지 하늘만이 선악을 뒤집을 수 있고, 오로지 땅만이 선악을 실을 수 있다. 오로지 선사(仙師)만이 천지에 선악을 매장할 수 있다. 하늘은 사사로이 뒤집지 않고, 땅은 사사로이 싣지 않으며, 선사도 사사로운 은원은 없다. 사람에게 사사로운 욕심이 생기면 이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 땅의 이치는 하늘의 이치이다. 하늘의 이치가 있으면 인간의 욕심을 없어야 한다. 그래서 이 도는 총명하고 정직한 성인현사(聖人賢士)만이 말할 수 있다." 즉, 풍수의 도에 정통하려면 반드시 '총명하고 정직'한 성인현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에 덕행을 갖추고, 진정으로 수준있는 풍수가들은 모두 일정한 공능을 갖추었다. 심지어 산림 속을 날아서 오갔다. 그래서 그들을 "지선(地仙)"이라 불렀다. 그들은 '수련'을 거쳐 사부의 진전을 이어받는다. 그들은 천명에 따라 행하고, 명리를 따지지 않고, 돈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이 찍어주는 땅은 일반적으로 왕조의 흥망성쇠와 관련이 있고, 역사의 변천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왕왕 땅 하나를 찍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국면을 펼치는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일부 강호술사들이 풍수의 겉껍질을 약간 배운 다음 풍수의 기치를 내걸고 사회에서 먹고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이 진정한 풍수가와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수련하지 않고, 그저 보통사람들보다 약간 더 기교적이고 기술적인 방법을 알고, '형(形)'을 볼 줄 알며, 이전 사람들의 경험으로 얻은 풍수지식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보통백성에 있어서, 그들의 이런 능력만으로도 충분하다. 통상적이 상황하에서, 방원백리내에 반드시 이인(異人)이 있고, 혹은 풍수를 알거나 혹은 역리(易理)를 알거나, 혹은 산괘(算卦)를 알거나, 혹은 수완(水碗)을 본다.
비록 고대의 대다수 강호술사들은 풍수의 요체를 알지 못했지만, 고대의 전체 도덕기준은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랐다. 사람들은 덕을 쌓거나, 최소한 덕을 쌓으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에게 천시지리(天時地理)에 순응하도록 하고, 몇 대의 사람들이 덕을 쌓아야 비로소 좋은 지혈(地穴)을 찾아서 후손에게 복을 내리게 한다는 등등의 도리를 알았다. 그리고 명리를 추구하는 풍수가들은 혹은 쉽게 부체(附體)하거나, 혹은 요란하게 떠들면서 사기를 쳤다. 그렇게 하여 진정한 풍수가의 명성을 파괴시킨다. 그러나 만일 하늘을 거스르는 나쁜 짓을 하면, 마찬가지로 그 보응을 받았다. 근현대에 이르러, 전체 사회도덕이 쇠락하면서, 소위 풍수가들도 도에서 점점 멀어졌고, 술수를 더욱 중시하고, 덕행을 경시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하여 나쁜 짓을 하고서도 알지 못한다.
대기원의 보도에 따르면, 예전에 홍콩 신공항을 지을 때 홍콩영국정부는 중국공산당이 제안한 서구전해(西九塡海, 서구의 바다를 매립하는 것)의 조건을 받아들인다. 서구전해구는 중국공산당이 고의로 설계한 풍수국이다. 아무런 이유없이 삼각형의 독사머리가 바다로 머리를 내밀게 한 것이다. 이외에 풍수술수에 빠진 장쩌민은 홍콩의 주권회복이후, 대서산(大嶼山, Lantau Island)의 봉황령(鳳凰嶺)에 음독한 풍수조치를 취한다. 심경간림(心經簡林). 이런 여러가지 풍수조치를 통하여 홍콩을 사항으로 만들고자 했다. 정궈창은 거기에 참가한 풍수가중 한 명이다. 홍콩의 주권회복후 음풍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활력을 점점 잃어가는데, 이런 것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의문의 여지없이 풍수가로서 술수에 정통하면서 도덕의 의리는 잘 모르고, 오히려 조주위학(助紂爲虐)한다면, 억의 응보를 받는 최후는 천리일 것이다. 풍수가 정궈창의 죽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과응보의 이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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