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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칼럼

천지팔양신주경 해석(天地八陽神呪經 解釋)

by 예경 2020. 6. 20.

 

 

 

천지팔양신주경 해석(天地八陽神呪經 解釋)


천지팔양신주경이란 천지의 도리와 인생사의 모든 진리의 근본을 설명하여 살아가는 동안에 부딪히게 되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신비한 비밀경전이다. 본 경전이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은 승가에서 그다지 높이 평가하여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위경이라고 배척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는 출가승들의 삶이 세속생활을 영위하는 재가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본 경의 깊은 뜻을 깨닫는다면 본 경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본인이 말법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본 경전을 해석하여 그 대의를 밝힘으로써 세간사를 영위하는데서 부딪히게 되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고 또한 불도의 올바른 뜻을 널리 펴고자 하니, 혹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천지팔양신주경은 위경인데 그런 경전을 해석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그러면 위경은 무엇이고 진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선 불교 경전을 살펴보면, 경전에 한문으로 된 원문은 석가세존께서 직접 번역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석가세존께서 사십구년간 설하신 법문을 아난존자께서 경전으로 만들어내신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그대로 말해도 득도하지 못한 사람이 말하면 세존의 뜻에 어긋나는 법인데 과연 아난존자께서 만드신 경전 전체가 세존의 뜻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할 수가 있을까? 백보 양보해서 일치한다고 하자. 대가지를 다듬어서 경전을 만들던 시대인지라 그 후로 내려오면서 오랜 세월을 걸쳐 수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사본되어서 내려온 것도 사실인데 그렇게 하는 가운데에는 빠뜨린 구절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오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양보해서 모두 다 옳다고 보자. 인도말로 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함에 있어서 인도와 중국은 나라가 다르며 따라서 풍속과 문물이 다르고 한데 인도말의 뜻 그대로를 한문으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전 무결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세존의 뜻과는 다르게 변질될 우려가 있지 않은가? 또 세존의 말씀을 한문으로 번역하고자 하면 세존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투철하게 알아야 옳게 번역되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번역하는 사람의 도력이 세존과 동일하거나 그 보다 높아야 세존의 뜻에 어긋남이 없는데 만약에 도력이 세존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번역했다고 한다면 세존의 뜻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경전은 세존의 뜻과는 점점 거리가 먼 다른 방향으로 끌려가게 되고 말법시대의 불법은 세존의 뜻하신 바의 정법과는 멀어지고 그릇된 법이 성행하게 되는 큰 원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문으로 된 원문은 세존께서 직접 번역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번역되고 또한 사본해서 내려오는 것이니 세존의 뜻에 어긋나게 번역된 것이 있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원문이 진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면 세존께서 진리에 어긋난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번역이 잘못된 것이니 원문의 문구에 진리를 갖다 맞추려고 하지 말고 원문을 진리에 맞도록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종종 진리를 원문에 맞추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본다. 이것은 큰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설령 세존께서 설법하신 것이라고 하더라도 중생을 개오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설하신 것에 불과한 부분이 대부분이다. 방편으로 법륜을 굴리는 소식인데 참된 뜻을 모르고 방편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도깨비 굴로 찾아드는 격이다. 방편설의 말밖에 참된 뜻이 깊이 잠복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방편설 뒤에는 참뜻이 숨어 있고 또 문자에 있어서도 문자 밖에 따로 참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말과 문자 그대로라면 닦을 것도 없고 구차스럽게 고생하여 가면서 수도를 하고 깨치기 위해서 일생을 허송세월할 필요도 없다. 설법이나 듣고 책이나 읽으면 되지 수도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말과 문자 밖에 참뜻이 숨어 있으니 그것을 알아내려고 수도하는 것이 아닌가!

 

팔만대장경도 선지식의 설법도 그 모두가 방편임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不離文字 不立文字라고 하지 않았던가! 경전의 뜻을 진리에 의거하지 않고 문자대로 해석하면 세존의 뜻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옛날 어느 어리석은 선비가 신발을 사려 가기 위해 노끈으로 자기의 발길이를 재었다. 신발 가게에 가서 신발을 고르려고 노끈을 찾으니 노끈이 없었다. 잊어버리고 집에 두고 온 것이었다. 선비가 신발 가게 주인에게 말하기를 내 발길이를 잰 노끈을 집에 두고 와서 신발을 살 수가 없습니다. 집에 가서 발길이를 잰 노끈을 가지고 다시 신발을 사러 오겠다고 하였다. 자기 자신의 발로 직접 신어보면 그것이 가장 정확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발길이를 잰 노끈에 얽매여서 자기 자신의 발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위경이니 진경이니 따지면서 문구에 얽매여서 진리를 문구에 갖다 맞추려고 하는 무리들과 이 어리석은 선비와 다른 점이 어디에 있겠는가? 문구에 얽매여서 위경 진경 논쟁이나 하고 있는 분류들은 이 글의 진리를 거듭거듭 새겨 읽으면서 본 경전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보기 바라는 바이다. 이에 본인이 대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본 경전의 대의를 간단하게 해석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天地란 온누리, 즉 우주전체를 말한다. 하늘에는 일월성진이 있어서 빛과 열기를 뿜고 비를 내리게 해서 만물을 성숙시키고 땅에는 그 빛과 열기와 비를 받아들여서 만물을 배양하고 육성하여 결실을 맺게 한다. 천지의 운행에는 일체의 사사로움이나 편혐됨이 없이 그 법칙이 엄숙하고 엄격하여서 우주의 진리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우주전체가 장엄불국토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본 경전에서 이처럼 엄숙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천지의 도리를 설법하겠다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과 소멸, 춘하추동 사계절이 돌고 도는 일체의 진리와 이 우주의 주인공은 누구이며, 누가 언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이 우주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이 우주와 우리 인생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하는 우주와 인생에 관한 일체의 진리를 설하겠다는 것이다.


八陽이란 온누리의 주인공인 인생의 거래사에 관하여 명백하게 설하겠다는 말이다.  우리 인생의 뿌리는 무엇이며, 인생은 어디로 부터 무엇을 하려고 왔으며, 부귀빈천이 서로 바뀌어 변하고 생로병사가 끝없이 반복되어 가는 일체 진리를 명확하게 밝히어 남김없이 설하겠다는 것이다.

 

神呪란 신령스러운 가르침과 그 가르침으로 부터 생기는 불가사의한 위신력을 말한다. 이는 일체 세상사에서 온갖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하는 모든 중생들의 전도된 마음을 바로 잡아줌으로써 온갖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위신력을 부여하여 줄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들을 부처지견에 들게 하는 신령스러운 주문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의 근원과 인생의 뿌리와 그 운행에 관한 일체의 진리를 남김없이 설법함으로써 중생들이 진리를 알고 깨달아서 이제까지 잘못되어 온 일체의 전도된 마음을 제도한다면 작게는 세간사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이 해결되고 궁극적으로는 성불되어지는 신령스러운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經이란 중생지견을 여의고 부처지견에 들도록 가르치신 부처님의 말씀이란 것이다.

 

 

4. 청법과 설법의식


聞如是하니 이러히 들었다.


부처님께서 천지팔양신주경 설하신 말씀을 이러히 들었다는 말이다. 다른 경에서는 如是我聞으로 되어 있는데 본 경에서는 聞如是라고 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금강경에서 無我法에 통달한 사람이 진실한 보살이라고 하였다. 내가 없다는 진리를 통달한 사람이 진실로 진리를 깨달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본 경전에서 내가 생략된 것은 내라고 하는 我相을 완전히 여읜 無心 無我의 경지에서 세존의 설법을 듣고 전한다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見而不見 聞亦不聞 坐不知坐 行不知行하는 禪定三昧에서 무아경지에 드니 실로 청법할 사람도 설법할 사람도 없는 경지이다. 하지만 중생을 제도하자니 부득이 방편으로 청법보살께서는 진리를 청하고 세존께서는 진리를 설하여 불법을 선양하는 한 편의 연극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는 無說이요 제석천왕은 無聞이니 無說이 眞說이요 無聞이 眞聞인 것이다. 無說無聞이 바로 眞說般若며, 無心이 眞心인 경지임을 알아야 한다.

 

一時에 佛이 在毘耶達摩城寥廓宅中하사
한 때 부처님께서 비야국 달마성의 텅 비고 끝없이 넓은 집안에 계시었다.


여기서 한 때라 하면 천지팔양경을 설하시던 그 때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시간과 공간을 염두에 둔 한 때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세간법을 초월한 한 때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없다는 진리를 깨우친 무아의 경지에서는 시간과 공간 따위의 티끌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생견지에서는 생하고 멸함이 있으니 당연히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아경지에서는 생멸이 없어 불생불멸하고 여여부동하여 항상 불변이니 현재가 있을 수 없고 과거 미래가 있을 수 없다. 변해서 돌아가야 시간과 공간이 있을 것인데 여여부동하여 변하지 않으니 적멸할 뿐이다. 따라서 여기서 한 때란 시공간을 초월한 무아의 경지에서의 한 때인 것이다.


佛이란 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이란 우주의 진리를 남김없이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화광동진하여 파사입정하시면서도 항상 무아의 지견에 머무시는 분을 말한다. 항상 무아지견에서 일체의 집착을 여읜 무주무착의 경지에 있으니 망상과 보리가 둘이 아니요 무명과 열반이 둘이 아닌 곧 하나의 경지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지옥 한 복판에 있어도 지옥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삼천대천 세계가 바로 장엄불국토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경지에 계시니 비록 중생견지에서 몸이 비야국 달마성의 어느 집안에 계시는 것과 같이 보이더라도, 그 머무시는 모습이 텅 비어 끝없이 넓은 허공중에 계시는 것과도 같았다. 흡사 유마거사의 좁은 방안에 8만 4천 유순인 사자좌 3만 2천개를 들여 놓아도 일체의 방해됨이 없었다는 것과 같을 것이며, 수미산을 겨자씨 안에 넣어도 더하고 덜함이 없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十方이 相隨하고 四衆이 圍繞러시니
시방의 보살들이 따라 모시고 사부대중이 빙 둘러싸니


시방의 보살들이 따라 모시고 사부대중들이 둘러 쌓다고 하니 이 법회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가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보살들이란 上求菩提 下化衆生하여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큰 원을 세워서 自他一時成佛道 皆共衆生成佛道를 위하여 불철주야로 애를 쓰시는 분이다. 시방의 보살들이 이와 같은 큰 서원을 이루기 위하여 이 법회에 모였으니 이 법문이 얼마나 귀중한 법문인가를 명심하여야만 할 것이다. 사부대중이란 불도를 닦는 모든 대중을 말하며, 이들도 성불하기 위하여 이 법좌에 모여든 것이다.

 

爾時에 無碍菩薩이 在大衆中하사 卽從座起하여 合掌向佛하고 而白佛言하사대
이 때 무애보살이 대중 가운데 계시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하시었다.

 

무애란 일체에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무아법에 통달하여 내가 비어 없음을 확연히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삼계와 육취와 증애와 생사기몰과 동정 등 이 모든 것이 공상이요 적멸상이란 것을 확연히 요달하여 일체에 주착하지 않으니 거림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경허스님이 해인사에 있을 때 길가는 초동들에게 지게 막대기로 자신을 제일 많이 때리는 아이에게 돈을 주겠다고 하였다. 초동들은 신바람이 나서 경허 스님을 실컷 두들겨 댔다. 스님께서는 맞을 적마다 "나는 안 맞았다. 나는 안 맞았다."고 외쳤다. 그러자 초동들은 왜 거짓말 하세요. 돈을 안 줄려고 우리들을 속이고 있는 순 땡초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나는 한 대도 맞은 일이 없다고 할 뿐이었다. 어느 객승이“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모두 공이요, 현상의 진성도 공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도 미혹됨도 성스러움도 평범함도 베풂도 받음도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지 스님이 담배를 피우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담뱃대로 객승의 머리를 때렸다. 그러자 그 젊은 객승이 화를 냈다. 그러자 주지 스님이“일체가 다 공이라면서 화를 내느냐? 그리고 그 화는 어디서 온 것이냐?"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애경지는 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요 직접 계정혜의 삼학을 통해서 체험함으로서 증득하지 않고서는 안되는 미묘한 진리인 것이다.


世尊이시여 此閻浮提衆生이 遞代相生하야 無始以來로 相續不斷호되
세존이시여, 이 염부제 중생이 대를 이어 서로 생겨나서 무시이래로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았거늘

 

염부제 중생이 무시이래로 상속부단하였다는 본 구절이 우주의 근원과 인생의 뿌리에 관하여 은유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 중생이 무시이래로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우주와 더불어 중생이 함께 존재하였다는 의미이며, 중생들이 생로병사의 삶을 살아가며 죽는 것 같이 보여도 실은 윤회를 반복하여 불생불멸하다는 의미이다. 왜 대를 이어가면서 상속하는 것일까? 이는 윤회의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이다. 윤회의 법륜이 굴려가기 때문에 항상 새롭고 좋은 것이다. 만약에 윤회의 법륜이 구르지 않는다면 삼라만상은 썩어 없어져 버릴 것이다. 아무리 짜운 바다물도 밀물과 썰물의 운동을 하지 않으면 썩어버리는 법이다. 한 번은 밀려오고 한 번은 썰려가면서 온갖 찌꺼기가 정화되어,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 번식 폭풍우가 불고 태풍이 치고 홍수가 나야 온갖 찌꺼기가 씻겨 내려가서 온 국토가 정화되는 법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는 것이 진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지위가 높아지면 어느 시점에서는 떨어지는 운동을 하게 되어있다. 그래야만 윤회의 법륜이 끝없이 구르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나는 저 지위에 오르면, 저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올라가면 내려오는 운동을 하고 내려가면 올라가는 운동을 하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에 날로 좋고 날로 새로운 것이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라고 하듯이 변화가 없는 삶은 죽은 삶이며 생명력을 상실한 삶이기 때문에 윤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주의 철칙이다. 아무리 좋은 경치도 계속 보고 있으면 실증이 나서, 그 보다도 못한 곳이라도 먼 곳을 여행하고 싶응 것이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옛날 한 학인이 사서삼경과 시전, 서전을 통달하고도 의심이 남아 스승에게 물었다.

 

태고에 누가 있었습니까? 복희 신농씨가 있었다.
그 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천황씨가 있었다.
그럼 그 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반고씨가 있었다.
그럼 그 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나도 모르겠다.
그러면 인생의 뿌리를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학인은 그 해답을 찾아서 불교에 귀의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또 어느 종교에서는 절대자가 7일만에 우주를 창조하고 남자의 갈비뼈를 가지고 여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절대자가 어디에서 부터 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이, 스스로 존재한다고 한다. 존재하여야 할 공간도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남자의 갈비뼈를 떼어내면 여자는 고사하고 남자도 죽어버리는 법이다. 본 경전에서는 중생들이 처음없는 처음부터 존재하여 끊임없이 상속한다고 하여 인생의 근원과 우주의 뿌리에 관하여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생은 누군가 절대자가 있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본래로 부터 존재하여 끊임없이 상속한다고 하였다. 본 구절에서 어느 특정의 절대자에 의한 창조와 종말이 진리가 아님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 진리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어디로 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부터 구족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견성성불하여 도솔천에 가서 이제는 사바세계에 오지 않겠다고 하는가 하면, 또 혹자는 번뇌 망상과 무명을 영원히 끊어 없애서 해탈하겠다고 한다.


깨달아서 이 세상과는 다른 별천지에 가겠다는 것은 외도와 사도이며, 이 사바세계에 오지 않겠다는 것은 불교의 진리와도 어긋날 뿐 아니라 최후의 한 중생까지도 제도하라고 하신 세존의 부촉에도 어긋나며, 그렇게 한다면 불교의 진리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번뇌 망상과 무명을 영원히 끊어 없애서 해탈하겠다고 하지만, 실은 번뇌 망상과 무명을 끊어 없애버릴 수도 없거니와 또 끊어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번뇌 망상과 무명을 끊어 없애려고 하면 끊어 없애려는 생각이 역시 번뇌 망상이며 무명인 것이다. 끊어 없애려고 하면 번뇌 망상과 무명이 늘어날 뿐 끊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옛 조사들의 말에 성문들은 언제나 번뇌 망상과 무명을 끊어 없애려고 하지만 끊어 없애려는 그 마음이 도적인 줄 모르더라고 하셨으니 끊어 없애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억지로 끊어 없앴다고 하면, 이는 단멸에 떨어지는 것으로 일체의 법륜은 구르지 못하고 모두 정지되어 불법도 없고 부처도 중생도 있을 수가 없어서 온누리의 운용은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는 사람은 모든 법에 있어서 단멸과 단멸상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불도를 깨닫고 보면 번뇌가 곧 보리요, 무명이 곧 열반인 것이다. 억지로 끊어 없애려 하지 말고 번뇌 망상과 무명에 주착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번뇌 망상과 무명을 싫어하지 말고 번뇌 망상과 무명 가운데 있으면서 번뇌 망상과 무명에 주착하지 않으면 번뇌 망상과 무명을 길이 여의게 되는 것이다.


有識者少하고 無智者多하며 念佛者少하고 求神者多하며
유식한 이는 적고 지혜 없는 이가 많으며 염불하는 이는 적고 잡신을 구하는 이가 많으며

 

사찰의 선방앞에는 "入此門內 莫存知解"라는 말이 있다. 알음알이로 헤알려서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세속에서 말하는 알음알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持戒者少하고 破戒者多하며 精進者少하고 懈怠者多하며
계행을 지니는 이는 적으며 계행을 파괴하는 이가 많으며 정진하는 이는 적고 해태하는 이가 많으며

 

살생 투도 음행 음주 망어 등의 오중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중생지견의 지계이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청정한 마음을 간직함이 진정한 대승지견의 지계인 것이다. 국청사에서 수백명의 대중을 모아 놓고 지계에 대하여 설하고 있는데 한산과 습득이 웃으면서 마음이 청정하면 계가 온전하고 마음이 어두우면 곧 파계인데 따로 무슨 계가 있는가 한 것과도 같은 것이다. 치부하기 위해 활동하고 출세하기 위해 노력하고 생활하기 위해 근실하게 일을 하는 것은 중생지견의 정진이다. 오직 원각을 성취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일체심을 놓아버리고 마음을 쉬는 공부를 부지런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대승지견의 정진인 것이다.


智慧者少하고 愚癡者多하며 長壽者少하고 短命者多하며
지혜있는 이는 적고 우치한 이가 많으며 장수하는 이는 적고 단명한 이가 많으며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고 어떻게 연구를 하면 좋은 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또 어떻게 공부를 하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가 있다는 등의 일체의 알음알이를 짜내는 것은 중생지견의 지혜이다. 일체의 망념을 여의고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본래의 지혜 그대로를 간직해서 유지함이 진정한 대승지견의 지혜인 것이다.

 

禪定者少하고 散亂者多하며 富貴者少하고 貧賤者多하며
선정하는 이는 적고 산란한 이가 많으며 부귀하는 이는 적고 빈천한 이가 많으며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바짝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중생지견의 선정이다.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이 안정되어 어떠한 경계에 직면하더라도 당황하거나 흩어지는 일이 없이 적멸경을 유지함이 진정한 대승지견의 선정인 것이다.

 

溫柔者少하고 剛强者多하며 興盛者少하고 惇獨者多하며
온유한 이는 적고 강강한 이가 많으며 흥성한 이는 적고 외로운 이가 많으며

 

괴로움을 능히 견디어 내어서 이를 극복하고 참지 못할 욕됨을 능히 참는 것은 중생지견의 인욕이다. 원각을 성취하고자 수도하는 데 있어서 일체의 마를 능히 물리치는 것이 진정한 대승지견의 인욕인 것이다.

 

正直者少하고 曲諂者多하며 淸愼者少하고 貪濁者多하며
정직한 이는 적고 아첨하는 이가 많으며 청정하고 삼가하는 이는 적고 탐하고 혼탁한 이가 많으며

 

원리 원칙에 따라 거짓을 행하지 않는 것은 중생지견의 정직이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들이 수도하는데 있어서 부딪히게 되는 일체의 난관을 뛰어 넘을 수 있게 훌륭한 방편을 사용하는 것이 진정한 대승지견의 정직인 것이다.

 

布施者少하고   者多하며 信實者少하고 虛妄者多하야
보시하는 이는 적고 간탐하고 인색한 이가 많으며 미덥고 실다운 이는 적고 허망한 이가 많아서

 

재물로 하는 보시, 육신을 받쳐 하는 보시, 생명을 받쳐 하는 보시 등이 있으나 이는 모두 유루보시로서 중생지견의 보시다. 중생들의 마음을 일깨워서 불법을 닦게 하고 대승법문에 들어 구경 원각을 성취하게 해서 自他一時成佛道하고자 교화하는 보시가 진정한 대승지견의 보시인 것이다.

 

致使世俗으로 淺薄하야 官法이  毒하며 賦役이 煩重하고 百姓이 窮苦하야 所求難得은 良由信邪倒見하야 獲如是苦일새
이 세상을 천박하게 하고 국법이 혹독하게 되고 부역이 번거럽고 백성이 궁핍하여지고 구하는 바가 얻기 어려운 것은 진실로 삿된 것을 믿어 소견이 뒤집힌 때문에 이와 같은 고통을 얻게 된다.

 

일심이 청정하면 일국토가 청정하고  일국토가 청정하면 온 세계가 청정하고 온세계가 청정하면 온누리가 청정하다. 일심이 망념되면 일체가 세간의 오염이요 예토가 아닌 곳이 없다. 청정한 이에게는 일체가 보옥으로 보이고 망념된 사람에게는 일체가 진개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토와 예토가 본래로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가 중생심으로 분별하여 만들어 내어서 갈라 놓은데 불과하다. 本無求處에 何煩惱며 本無貪處에 何住着고! 一念我執하면 萬法起요 無夢無想이면 卽解脫이라. 울보라는 별명을 가진 노파가 있었는데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날이 개면 날이 갠다고 울었다. 큰 딸은 짚신장수한테 시집갔고, 작은 딸은 우산장수한테 시집갔는데 날이 개면 작은 딸네 우산이 안 팔릴까 봐 걱정이고, 비가 오면 큰 딸네 짚신이 안 팔릴까 봐 걱정이 되어서 우는 것이었다. 하루는 어느 스님이 그럼 비가 오면 작은 딸네 우산이 잘 팔려서 좋고, 날이 개면 큰 딸네 짚신이 잘 팔려서 좋다고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그 후 울보 할머니는 비가 오든 날이 개든 항상 웃고 살았다고 한다.

唯願世尊은 爲諸邪見衆生하여 說其正見之法하사 令得悟解하야 免於衆苦케하소서
원하옵건데 세존께서는 모든 사견 중생들을 위하시어 바른 소견의 법을 설하시어 이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어서 여러가지 괴로움을 면하게 해 주시옵소서

 

어떤 것이 사견인가? 뒤바뀐 생각이 사견이다. 본래로 만법이 불생불멸이요 기몰도 없고, 밉고 곱고, 좋고 나쁘고, 깨끗하고 더럽고, 은혜롭고 원망스럽고, 푸르고 붉고가 없어서 적멸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고 죽고, 일어나고 없어지고, 밉고 곱고, 좋고 나쁜 것들이 진실로 있는 것 같이 보고 생각하고 집착한다. 그리하여 본래없는 생사기몰, 증애, 선악, 삼대계와 육취를 중생들 스스로가 뒤바뀐 생각으로 만들어 내어서 이것이 참된 생각이요, 참된 마음이라고 믿고 스스로 분별심에 끝없이 끄달려서 고해에서 한없이 헤매고 있으면서도 여기에서 뛰쳐나오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뒤바뀐 생각이며 중생심인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바른지견인가? 일체 만법이 본래로 공적적멸하여 생사기몰과 변화가 있을 수도 없고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인 것이다. 왜냐하면 무수한 생각들이 일어났다가는 없어지고 없어졌다가는 다시 일어나고 계속해서 반복하면 어느 것을 걷어잡고서 일어났다고 정해서 말할 수가 없고, 또 어느 것을 걷어잡고서 없어졌다고 정해서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생각이 일어난 것도 아니요 없어진 것도 아니라 이 모두가 공의 연속에 지나지 않아서 그대로 공상이요 적멸한 모습이다. 이와 같이 알고 행하는 것이 바른지견인 것이다.

 

세존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중생들이 정법을 깨닫고 고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일만 부처가 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여도 인연이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어디까지나 삶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고 우리 자신의 마음가짐과 노력여하에 따라서 불도도 깨치고 고해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법이다. 그럼 어떤 자세로 수행하고 스승을 받드려야 하는지를 비유로 설명하겠으니 명심하여 주기 바란다.


요즘은 대중집회가 많이 개최되어 법거래가 무슨 농담 따먹기 비슷하게 변질되어 진진함을 찾아볼 수 없으나, 옛날에는 남의 제자가 되어 청법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진진함이 있었다. 소림사에서 구년 면벽수도하고 있는 달마대사를 혜가가 찾아 갔다. 뒤에서 삼배를 올리고 제자로 삼아주기를 애원하였으나, 대사께서는 묵묵부답이다. 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고, 혜가는 눈을 맞으며, 몇 날을 서서 제자로 삼아 주기를 간청하였다. 지친 혜가는 추위와 굶주림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대사께서 혜가를 안으로 옮겨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혜가가 깨어났다.

 

대사께서 혜가에게 물었다. “눈 속에서 어떤 연고로 나를 찾아 헤매었는가?” 혜가가 대답했다.“저를 제자로 삼아 주십시오.” 대사께서 다그쳤다. “옛날 사람들은 진리를 구하여 목숨을 버렸거늘, 요즘 사람들은 입으로는 도를 구한다고 요란스럽게 떠들어 대지만, 구도자의 진진함을 찾아볼 수 없어. 신심을 보여라.” 이에 혜가는 칼로 자신의 팔을 짤라 대사께 바쳤다. 그러자 대사께서 혜가를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우리 수행자들이 어떠한 자세로 스승을 구할 것이며, 청법할 것인가를 웅변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가슴속 깊이 새겨두길 바란다.

 

고려때 가마솥을 아홉 번이나 옮겼다는 九鼎선사가 있다. 선사께서는 비단 장수를 하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노스님의 크나큰 덕에 감탄하여 자신도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자 스님의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노스님께서는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다하겠냐고 물었고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비단 장수가 대답하였다. 그러자 노스님께서는 무지무지하게 큰 가마솥을 옮겨 달아라고 하였다. 청년이 힘겹게 흙을 퍼와서 거기에다 짚을 섞어 이기고 커다란 솥을 걸어 달았다. 스님께서는 수고는 했다만 이 곳에는 솥이 필요 없으니 다시 떼어내어 다른 곳에 옮겨 달아라고 하셨다. 기껏 다시 옮겨 달자 스님께서는 안 되겠다며 다시 헐어서 다른 곳에 옮겨 달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9번이나 허물어뜨리고 이쪽 저쪽으로 옮겨 달게 하였다. 그래도 청년이 묵묵히 시킨대로 따르니 그제서야 노스님께서는 제자로 받아 주었다. 그리고는 솥을 아홉 번이나 고쳐 달며 인욕을 견디어 냈다는 뜻으로 구정이란 법명을 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불도에 입문하여 한 스승의 진정한 법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에 대한 믿음과 인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옛날 저명한 검술가의 아들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검술 실력이 그다지 성에 차지 않아, 검도에 정통하지 못하면 부자지간의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아들은 수소문하여 명검객을 만났다. 명검객이 물었다.

 

"나와 함께 검을 배우겠느냐? 내가 요구하는 것을 네가 만족시키기 어려울 텐데….”

청년이 끝까지 버티면서 물었다. "만약 제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몇 년이면 명검사가 되겠습니까?”
"한 십 년은 걸리겠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이 말했다. "제 아버님은 연로하셔서 제가 모셔야만 합니다. 만약 제가 더욱 열심히 배운다면 얼마 만에 배울 수 있겠습니까?”
"음… 한 삼십 년을 걸리겠다.”
"아까는 십 년이라 하셨고 지금은 또 삼십 년이라 하시니… 어떤 고생이라도 좋으니, 빠른 시일 내에 검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명검사는 처음과 똑같은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 칠십 년은 배워야겠구나.”

 

이처럼 우리 불도를 닦는 학인들도 불도가 무슨 정해진 과정만 거치면 수료하는 그런 단기강좌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진리에는 한도 없고 끝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닦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만 무한한 도력이 생기고 법력이 생기는 법이다. 스승을 만나서 몇마디 귀동냥한 것을 가지고 도인인냥 행세하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佛言善哉善哉라 無碍菩薩이여 汝大慈悲로 爲諸邪見衆生하야 問於如來正見之法의 不可思議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고도 착하구나 무애보살이여 그대는 대자비로 모든 사견 중생들을 위하여 여래의 불가사의한 바른지견의 법을 묻는구나.

 

왜 대자비라고 하였는가? 중생지견에서 사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함이 있고 작위가 있는 유위지경에서의 자요 또 중생지견에서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도 생사관에 입각한 유위지경의 비인 것이다. 그런데 대승지견에서의 사랑은 함이 없고 아무런 생각에도 주착함이 없는 무위지경의 사랑이라 대자이시고, 또 불쌍하게 생각하시는 것도 함이 없는 무위지경의 것이라 대비이다. 더구나 중생들을 바른지견으로 인도하여 皆共衆生成佛道 自他一時成佛道하기 위하여 대승의 법을 물으니 세존께서 중생견지의 자비가 아니고 대승견지의 대자비심으로 묻는구나 라고 하였다.

 

왜 불가사의라고 하였는가? 법화경에 대통지승여래불이 십겁동안 도량에 앉아 있어도 불법이 나타나지 않아서 불도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아미타불을 보려고 십억국토를 다 찾아 헤매어도 찾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불법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고 적멸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바른법은 십억국토를 다 찾아 헤매어도 없지만 찾지 않으면 삼천대천세계 어느 곳에도 없지 않은 곳이 없고, 아무리 펼쳐 보아도 티끌 한 점이 없고 먼지 한 점이 없이 텅비어 아무런 흔적도 없고 고요하고 적적하고 청정할 뿐이다. 하지만, 여래의 바른법은 일체의 전도된 마음을 바로 잡아서 중생들을 해탈시켜 열반으로 인도하는 신비로운 지혜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래의 바른 법을 탐진치 삼독심을 가지고 접하면 삼독심이 계정혜 삼학문으로 변하고, 번뇌망상을 가지고 접하면 번뇌망상이 해탈지견으로 변할 것이고, 지옥경지에서 접하면 지옥경지가 연화대로 변할 것이며, 무명심으로 접하면 무명심이 반야지로 변하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汝等은 諦聽하고 善思念之하라. 吾當爲汝하여 分別解說天地八陽之經하리라.
너희들은 자세히 듣고 들은 바를 잘 생각하고 생각하여라. 내 그대들을 위하여 천지팔양경을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무애보살이 청법 대중과 후세 중생들을 개오시키기 위하여 지극히 정중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대승의 바른지견을 청법하니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잘 듣고 생각하라고 하시며, 설법하셨다. 어떻게 하여야 잘 듣고 잘 생각한다는 것인가. 하루는 한 대학 교수가 찾아와서 남은 선사에게 선(禪)에 대한 질문을 하자, 남은 선사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했다. 그런데 손님의 찻잔에 물이 넘치는데도 차를 계속 따르는 것이 아닌가! 찻물이 넘치는 것을 보다 못한 대학 교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선사님, 찻물이 가득 찼는데, 왜 자꾸 부으십니까?” 그러자 남은이 조용히 "그대는 이 찻잔처럼 속에다 자신의 관념만을 가득 채우고 있구려. 관념을 먼저 비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그대에게 선(禪)을 말할 수 있겠소?" 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 일체의 사량을 여읜 무심경지에서 법을 설할 것이니 대중들도 그리 알고 잘 듣고 생각하라는 말이다. 일체 중생들이 낙동강의 모래알 수보다도 더욱 많은 다겁다생을 통해서 뒤바뀐 생각으로 집착하여 왔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온 몸에 꽉 배여서 그 알음알이를 그냥 두고서는 무슨 말을 들어도 거기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고 아무리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들어갈 자리가 없이 알음알이 때문에 튕겨서 나오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아무리 들어봐야 건성으로 듣게 되니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세존의 말씀은 한 마디도 빠짐없이 바르게 들어야 잘 듣는 것인데 그렇게 하자면 먼저 온 몸에 꽉 차 있는 알음알이를 그냥 두어서는 안되며 이를 쫓아내지 않고서는 되지 않는 일이다.


알음알이를 쫓아내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쫓아내려고 애를 쓰면 알음알이가 늘어날 뿐 별 무효과인 것이다. 그러니 쫓아내려고 하지 말고 좋은 생각도 나쁜 생각도 안다는 생각도 모른다는 생각도, 일체의 사량 분별심을 모두 다 놓아 버린 무심경지에서 세존의 말씀을 들어라는 것이다. 세존께서는 중생들의 마음을 꿰뚫어서 잘 알기 때문에, 잘 들어라고 각별히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선지식의 설법을 들을 때, 그런 것은 나도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선지식들의 설법을 경시하거나 교만한 마음을 내어서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 중생들은 선지식께서 말하는 말 밖의 참 뜻을 전혀 모르면서 건성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며 특히 말 재주에 능통한 사람일수록 이런 병이 더욱 심한 것이다. 선지식들은 중생들의 이런 병을 고치기 위해 있는 것을 없다고 해서 있다는 데 집착하고 있는 중생의 병을 고치기도 하고 또 없는 것을 있다고 해서 없다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중생들의 병을 고치기도 하는 것이다.


此經은 過去諸佛이 已說하시고 未來諸佛이 當說하시며 現在諸佛이 今說하시나니라.
이 경은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고,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마땅히 말씀하실 것이며,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제 설하시나니라.

 

삼세제불이라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생제도를 위하여 방편으로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디까지나 불법의 근본은 동체평등인 것이다. 일체 중생이 동체평등한데 부처에 무슨 차별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三世諸佛一體同인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한 마디 일러보라. 낙동강 모래수보다 더욱 많은 부처와 보살들이 있다고 하는데 참으로 있는 것인가? 있다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만약에 없다고 하면 어찌해서 없는가?


세존께서 사바세계에 태어난 것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오신 날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성은 비여서 형체가 없음으로 오고 가고 할 수가 없고 불생불멸이요 여여부동한 것이며, 사대로 이루어진 세존의 몸도 태어난 것 같이 보이나 몸 역시 본래로 공적적멸한 빈 모습이요 공상인지라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닌 것이다. 다만 중생들이 법을 알지 못해서 온 것 같이 보고 가는 것 같이 생각하고 집착할 뿐이지 진실로 오고 가고 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로 부터 일체법이 불생불멸이라 나고 죽고 가고 오고 함이 없다. 다만 중생들을 개오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낳다 죽었다 왔다 갔다 하는 데에 불과한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관도 방편으로 법륜을 굴리는 소식인데 참된 뜻을 모르고 방편설 그대로를 받아드린다면 도깨비 굴로 찾아드는 격이다. 방편설의 말 밖에 참 뜻이 깊이 잠복해 있음을 알아내어야 되는 것이다. 

 

옛날 어느 스님이 출타했다가 절에 돌아와 보니 어떤 객승이 와서 주승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승이 묻기를 스님은 언제부터 불도를 닦아왔느냐?고 하였다. 객승이 위음왕불 때부터 수도했다고 하니 주승이 그러면 나의 손자뻘 밖에 되지 않으니 저 쪽에 내려 앉으라고 했다. 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수도하여 온 사람이 어떻게 해서 손자뻘 밖에 되지 않을까? 그러면 주승은 도대체 얼마나 오래 수도하여 왔기에 그럴까?

 

夫天地之間에 爲人이 最勝最上하야 貴於一切萬物하나니
대저 천지간에 사람이 가장 수승하며 가장 높으며 일체 만물보다 귀하나니

 

사람은 불성을 갖추고 있어, 견성성불한다면 부처가 되어 우주의 주인공, 창조주, 그리고 조물주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천지지간에 최승최상이라고 하였다. 천지지간이라고 하였지만, 천지는 둘이 아닌 바로 하나인 것이다. 그럼 여기서 어묵동정을 여의고 일러보라.

 

1. 여러 청법 대중들은 하늘과 땅이 붙어 있는데 어느 사이로 왔는가?
2. 우주는 어떻게 해서 창조되었으며 과연 우주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3. 우주의 주인공을 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볼 수가 있는가?
4. 우주의 길이는 몇 자나 되며 넓이는 얼마나 되고 높이는 몇 치나 되고 무게는 몇 척이나 되는가?
5. 인생은 本來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6. 인생은 왜 生老病死를 면할 수가 없는가?
7. 우주와 나와는 어떠한 관계인가?
8. 인류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9. 지구는 왜 한시도 쉬지 않고 돌고 있는가? 법을 몰라서 돌고 있는가 알고서도 돌고 있는가?
10. 보통 말을 할 때 차이가 크면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하는데 하늘과 땅과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하늘의 높이는 몇 자나 되며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하늘이고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땅인고? 또 만약 하늘과 땅이 같다고 하면 어찌해서 같은가?
11. 일월성진과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이 어찌해서 생겼으며 무엇으로 이루졌으며 또 언제부터 생겼으며 언제 없어지게 되는가?

 

人者는 正也며 眞也라
사람이란 바르고 참된 것이니라

 

어떤 것이 바르고 어떤 것이 참된 것인가. 전도된 중생지견을 여의고 부처지견에 드는 것을 바르다고 하며, 부처지견에서 보살도를 행함을 참되다고 한다. 여기서 사람이란 무아법을 통달한 진인을 말하며, 무아법에 통달한 진인은 항상 무심경지에서 일체에 무주무착하니 일체가 바르지 않고 참되지 않은 것이 없다.


心無虛妄하야 身行正眞이니 左 爲正이요 右 爲眞이라.
마음에는 허망함이 없고 몸으로는 바르고 참된 것을 행하니, 왼쪽으로 뻗친 획은 바름을 의미하며 오른쪽으로 그은 획은 참됨을 의미한다.

 

마음에 허망함이 없다는 것은 일체 전도된 망상심을 여의었다는 것이고, 전도된 망상심을 여의고 부처지견에서 무주무착하니 일체가 바르고 참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후세중생들이 무시 이래로 나와 남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등 일체 분별심 때문에 해탈하지 못한다. 그러나 원수를 대하기를 마치 자기 부모를 대하듯이 하고, 나와 남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마음이 없으면, 곧 일체 모든 병은 뿌리채로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실은 본래로 동체평등하여 미워함과 사랑함이 없는 것이며 나와 남도 없는 것이다. 다만 중생들이 자기에게 따르면 좋아하고 자기에게 거슬리면 미워하는 환된 마음을 일으켜서 자기 스스로가 조작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후세중생들이 불도를 성취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애착심으로서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 가슴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이러한 환된 마음으로는 동체평등한 진리에 부합되기는 하늘에 별을 따기 보다도 어려운 것이다. 부처님께서 또 다시 "말세중생들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을 여의지 못하면 비록 다겁을 통해서 근고 수도를 한다고 하여도 단지 유위행을 할 뿐이요 끝내는 일체의 성과인 불도를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법의 말세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에 있어서 나를 그릇되게 알고서 열반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며 증득함이 있고 깨달음이 있다는 마음으로는 성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강조하셨다.

 

정법은 무엇이며 또 정법의 말세는 무엇인가? 불도를 닦아서 견성성불하고 난 다음에 다른 일체 중생들도 견성성불하도록 교화하는 것이 바로 정법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학인들이 사상을 여의지 못하고 유위행만을 하고 있으니 정법의 말세라는 것이다. 사리가 이와 같으니 우리 학인들도 사상을 여의고 불지견에 들어서 고행수도를 쌓아서 반드시 견성성불하여야 할 것이며, 견성성불한 연후에는 일체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받쳐야 할 것이다.

 

常行正眞할새 故名爲人이니라. 是知하라. 人能弘道하며 道以潤身하나니 依道依人하면 皆成聖道하리라.
항상 바르고 참된 것을 행하기에 이름하여 사람(진인)이라 하느니라. 이러히 알라. 사람은 능히 도를 넓히며, 도는 몸을 윤택하게 하나니, 도에 의지하고 사람(선지식)에 의지하면 다 성현의 도를 이루리라.

 

중생들이 뒤바뀐 생각으로 희노애락과 생로병사가 있는 것 같이 생각하고 집착하여 끌려 다니면서 인생이 참으로 허망한 것이고 무상하고 허무하다고만 느껴 왔는데, 모든 것을 원각경지에서 보면 마치 꿈꾸는 사람이 꿈을 꾸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본래 일체가 無去無來亦無住로 조금도 변함이 없는 적멸상이요 공상임을 증득하게 된다. 모든 것을 이와 같이 올바르게 보고 올바르게 생각하니 일체가 진여가 아닌 것이 없고 일체의 행이 항상 참되고 바르다. 그리고 항상 무명속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거기에 주착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가 맑고 밝아서 자성자리가 뚜렷하니 언제 어떠한 경계에서도 맑고 밝은 지혜를 간직하고 바르고 참된 행를 하는 것이다. 雨中看好月이요 火中生蓮하는 소식을 깨달아서 아는 경지이니 이것이 곧 보리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항상 머물러 있는 사람이 진인이며 참다운 선지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지식이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권도와 방편을 총동원해서 일체의 유위법을 굴려서 무상정등정각의 무위법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니, 그 행적이 일정할 수가 없다. 

 

때로는 청정한 자비심으로 고결한 위치에서 설법을 하기도 하고, 또는 주색에 탐닉하여서 추악한 꼴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기를 일부러 절에 가져와서 구워 먹기도 하고,  지나가는 행인과 시비를 걸기도 하는데, 선지식의 이러한 두 측면을 보고 순행하는데 대해서는 흠모하는 생각을 내고 역행하는 것을 보고는 자칫하면 스승을 경멸하고 교만한 생각을 일으키기 쉬우나, 이러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선지식이 티끌의 오염계에 들어가 거기에 끄달리는 모양을 보이나 이는 화광동진해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방편으로 행하는 것이지, 마음은 항상 坐不知坐 行不知行하는 무심하고 청정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유마경에 말하기를 비록 처가 있으나 항상 범행을 닦고 또 권속을 거느리고 있으나 항상 마음으로 멀리 여읜다고 하였다. 또 온갖 허물을 보인다는 것도 사바세계에 들어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온갖 허물을 보이는데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몇 가지 방편사를 살펴보자.


경허 스님께서 제자이신 만공스님과 길을 걷다가 단청이 퇴색하였으니 단청불사를 위해 마을 사람들에게 시주 좀 권선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 스님은 집집마다 들러 단청불사에 시주하라고 전하였다. 곧 얼마간의 돈이 모아지니 경허스님께서는 주막에 들러 술을 시켜 건하게 마셨다. 만공스님께서 "부처님을 팔아서 시주금으로 술을 마시다니 말이 됩니까?" 라고 하니 경허스님께서 취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을 가르키며 "단청이 별건가 이 이상 어떻게 더 단청불사를 한단 말인가!" 하였다.

 

어느날 객승이 혜월스님께 찾아와서 참선을 하려고 하였다. 스님께서 객승에게 묻기를 "참선해서 무엇하려고 하느냐?" 하니 객승이 "부처가 되려고 참선합니다." 하였다. 다시 "그럼 참선은 앉아서 하는가 서서 하는가?" 하고 묻자, "앉아서 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스님께서 "그 놈의 부처는 다리 병신인 모양이지 앉아만 있게." 하였다. 객승이 묻기를 "좌선은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까?"스님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앉아 있는 것이지 부처가 되는 일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옛날 어느 선사가 밭을 가는데 호미 끝에 지렁이가 맞아 죽었다. 제자가 말하기를 "선사님 불도에는 살생은 금물인데 스님께서 살생을 하여도 됩니까?" 스승이 말하기를 "너가 하면 살생이지만 내가 하면 살생이 아니니라." 진정 이 말이 무슨 뜻인가? 그러니 마땅히 알라고 하셨다. 무아법을 통달한 진인만이 도를 넓힐 수 있으며, 도는 몸을 윤택하게 한다고 하였다.


비유하자면, 어떤 그릇 속에 종이 있어, 종의 소리가 그릇 밖으로 울려 나오는 것과도 같다고 하겠다. 종이 아무리 그릇 속에 있어도 종이 있으니 소리가 울려 나오고, 소리가 울려나니 종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종 소리는 종을 여의지 않았으며, 종은 종 소리로 인하여 종의 존재를 알게 되니,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로서 不二라는 것이다. 그러면 종 소리는 종에서 왔는가? 아니면 종을 치는 채에서 왔는가?

 

본 바탕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같이 청정법신으로 본래면목인 영지 자성이 있으면 그의 권속으로 반드시 환된 중생심이 있어 망상경계의 유위법을 굴리게 되는 것이다. 이 법신진체가 온누리의 주인공이요 만상의 왕이며, 일체 유위법을 권속으로 거느리고 있어 실로 천상천하유아독존처요 무상대법왕인 것이다.

 

그리고 일체 유위법은 마치 법신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서 법신의 심부름 작용을 하는 권속인 것이다. 그래서 법신이 없으면 그의 그림자도 존재할 수가 없고, 주인공이 없으면 그의 권속들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신이 없으면 삼천대천세계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법신이 있기에 권속들도, 그의 작용도 존재하여서 삼천대천세계를 운용하는 법륜을 자유자재로 굴려 장엄 법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6. 팔양경의 공덕과 위신력

 

夫次無碍菩薩이여 一切衆生이 旣得人身하야 不能修福하고 背眞向僞하야 造種種惡業이라가 命將欲終에 沈淪苦海하야 受種種罪하나니
또 무애보살이여, 일체 중생이 이미 사람의 몸을 얻었으면서 능히 복을 닦지 못하고 참됨을 등지고 거짓을 향해서 가지가지 악업을 짓다가 목숨이 장차 마치려고 할 때 고해에 빠져서 가지가지 죄를 받나니


사람이 왜 착한 일을 하지 않고 나쁜 일을 하는가? 이는 진정으로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나쁜 일을 한다면 언제가는 그 과보를 반드시 받는다고 확신한다면 나쁜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입으로는 인과응보를 말하지만 그 법칙이 얼마나 엄숙하고 한 점의 착오가 없는지를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하면 손해를 본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손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회 반복하는 긴 시간을 통해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 흔히들 말하기를 잘되면 내 탓이요,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한다. 실패하면 반드시 누군가를 원망하고 탓하는 것이 습관화된 듯한 느낌이다. 이번에 누구 때문에 손해를 보았고, 이번에 누구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남을 원망하거나 탓할 이유가 없다.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마지막 판단과 결정은 자기자신이 한 것이고, 긴 세월의 인과응보의 진리관에서 본다면 전생의 언제가 자기자신이 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힌 과보로써 받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손재수가 생겼다면, 전생에 그 사람에게 진 빚을 이제야 갚게 되었다고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항상 즐거운 삶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런 이유없이 손해본 재물은 반드시 언제가는 이자까지 합쳐서 되돌아오는 법이다. 돈에도 눈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는 돈도 인과응보의 진리에 따라 돌고 돈다는 뜻일 것이다. 만약에 진실로 인과응보의 진리가 없다면 이 우주에는 진리도 없고 법칙도 없어 우주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 우주의 운행에 한점의 오차도 없이 영원한 것은 그 법칙에 한 점의 사사로움이 없고 엄격하기 때문이다. 온 천하를 속여도 자기자신을 속일 수 없듯이 인과응보의 과보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진리를 확신하고 착한 일이란 착한 일을 찾아다니면서 한다면 언제가 그 공덕을 받게 되어 살아서는 소원성취하고 죽으면 곧 바로 극락에 태어나 무한한 복덕을 누리게 될 것이다.


若聞此經하고 信心不逆하면 卽得解脫諸罪之難하야 出於苦海하며 善神이 加護하야 無諸障碍하고 延年益壽하야 而無橫夭하나니
만일 이 경을 듣고 믿는 마음으로 거슬리지 아니하면 곧 모든 죄의 고난을 해탈하고 고해에서 뛰어나오게 되며, 선신이 가호하여 모든 장애가 없어지며 장수하게 되어 요절하는 일이 없어리라.

 

初發心時 便正覺이란 말이 있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모두 다 허망한 것이고 실다운 것이 아닌 일장춘몽과도 같은 것이구나. 이러한 거짓되고 환상과도 같은 꿈노름에 속아서 울고 웃고 온갖 집착과 탐착을 하면서 아귀다툼을 하여 왔구나. 이제는 이 꿈같은 애착을 모두 놓아 버리고 우주의 근원과 인생의 뿌리를 찾아 고행수도를 하여야겠구나. 이와 같이 처음으로 올바른 지견을 내었을 때가 문득 바른 깨달음인 것이다. 그러나 일체처 일체시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고 조금도 의심없이 무주무착의 무위행을 하기 위해서는 한없는 수도를 쌓아야만 한다. 이 경을 듣고 초발심을 내어 자신의 업보를 진정으로 참회한다면 전생의 업보가 마른 풀이 불 타듯이 흔적조차 없어져서 소멸될 것이다.

 

전생의 업보를 참회한다고 하면 흔히들 十方의 부처님들의 명호앞에 머리를 조아려서 절하고 애절한 마음으로 이제까지의 망념된 전과를 뉘우치고 다시는 망념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다짐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참회는 중생지견에서 하는 참회로써, 망념으로서 망념을 참회하는 것이라 마치 꿈을 꾸면서 꿈가운데서 참회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꿈 가운데서 아무리 참회해 본들 역시 꿈인 것이다. 결국 꿈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꿈 가운데에서 저지른 온갖 일들이 꿈을 깨고 나면 아무런 일이 없는 것과도 같이 중생살이가 마치 꿈놀음과도 같은 것이니 오직 원각을 성취하여 꿈놀음 같은 중생살이를 끝내어 불지견에 드는 것이야말로 대승경지에서의 참된 참회인 것이다. 꿈을 꾸면서 꿈 가운데에서 아무리 참회해 보아도 역시 꿈놀음이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회는 못 되는 것이다.


대승 경지에서의 참된 참회의 길은 망심으로 저지른 일을 원각을 성취해서 길이 여의는 것이요, 이와 같이 하여서 앞으로도 망념된 일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참회란 천수경에서 말하듯이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罪亡心滅兩俱空  是則名爲眞懺悔인 것이다. 즉 죄라는 것은 본래 자성이 없는 것으로 실다운 것이 아니며 허망한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만약에 참선 수도를 많이 하여 허망한 중생심인 탐진치 삼독심을 계정혜 삼학문으로 녹여 없앤다면 죄라는 허깨비같은 망상도 없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살이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음을 확실히 깨달아 죄와 중생심이 허망한 공상임을 알아서 生也一片 浮雲起요 死也一片 浮雲沒인데 本無求處 何煩惱며 本無貪處 何住着고 하는 경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以信力故로 獲如是福이어늘 何況有人이 盡能書寫하고 受持讀誦하며 如法修行가 其功德은 不可稱이며 不可量이며 無有邊際하야 命終之後에  得成佛하리라
믿는 힘으로 이와 같은 복을 받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있어 능히 뻬겨쓰고 인쇄하며 독송하고 법답게 수행한다면 어떠하겠는가. 그 공덕은 무어라 말할 수 없고 헤알릴 수 없어서 끝이 없나니 목숨이 마친 뒤에는 아울러 성불하리라.

 

법답게 수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수행한다는 것인가?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 일체심을 놓아버린 무심경지에 들어서 부처님이나 선지식들의 설법도 듣고, 무심경지에 들어서 수행도 한다는 말이다. 즉 내가 이제까지 완전히 뒤바뀐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대오각성해서 무심경지에 들어서 수도하는 것이 법답게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원각을 성취할 수가 있다. 그리고 "목숨을 마친 뒤에는 아울러 성불하리라."는 구절을 법계에서 문자대로 해석하여 말할 수 없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본다. 위없는 최상의 깨달음에 도달한 부처의 경지를 뜻하는 열반의 의미가 와전되어 온 누리의 진리를 깨친 사람인 선지식이 죽으면 열반에 들었다고 하여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몸이 있고 없음에 따라 유여열반 무여열반으로 구분지어 자기의 수행으로 고통 세계의 원인인 번뇌를 끊었으나 아직도 과거의 업보로 받은 신체가 멸하지 못한 것을 유여일반이라 하고, 고통의 과보인 현재의 신체까지 멸해 없어진 것을 무여열반이라고 하여 신체가 멸하지 않았을 경우 아직 끝까지 궁구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 결과 법계에서는 육신을 경시하는 풍조가 팽배하여 심지어 어느 노스님이 자기 상좌에게 "이제 열반에 들고 싶으니 나의 목을 매어 죽여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러나,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타일시성불도가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며 이상인데, 육신 없이 어떻게 진리를 구하여 수도할 수 있으며, 또 중생들을 교화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불교에서 도가 높으신 선지식을 보고 살아있는 부처라 하여 생불이라고 칭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육신이 없는 죽은 부처는 과거불이며, 앞으로 내세할 부처는 미래불로서 우리 일반 중생들과는 상관이 없으며,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우리들을 교화시켜 주시는 분은 육신을 가지고 계시는 현재불인 것이다.


바로 이 현재불이야말로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주의 모든 진리를 깨달아 그 깨달은 바를 몸소 실행하면서 일체 중생들을 교화시켜 주시는 일체처에 걸림이 없는 무심도인인 것이다. 바로 이 무심도인이, 우리들이 진정으로 공경하고 신명을 바쳐 섬겨야 되는 선지식인 것이다. 그래서 사십이장경에서 "과거불인 일체제불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무심의 경계를 깨달아 수용한 한 분의 현재불인 무심도인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더없이 수승한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던가! 금강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이는 곧 보살이 아니다. 내가 없는 진리를 통달한 사람이 참된 보살인 것이다" 그래서 命終之後에서 命이란 육신적인 목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아적이고 상대적인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하는 마음을 말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명종지후란 소아적이고 상대적인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리고 일체가 동체평등하다는 진리를 증득한 무아경지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한 경지가 되어야 비로소 아울러 성불한다는 뜻이다. 금강경에서도 "離一切諸相이 卽名諸佛"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佛告無碍菩薩摩詞薩하사대 若有衆生이 信邪倒見하야 卽被邪魔外道와  魅  과 鳥鳴百怪와 諸惡鬼神이 競來惱亂하야 與其橫病호되 惡腫惡 惡悟로 受其痛苦하야 無有休息이라도
부처님께서 무애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중생이 삿된 것을 믿고 소견이 전도되면 곧 사마와 외도와 이매망량과 악한 새의 울음과 백가지 괴물과 온갖 악한 귀신이 다투어 쫓아와서 어지럽게 괴롭히며 횡악의 병을 주어 나쁜 종기와 모진 창병으로 쉴새없이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중생들이 전도된 삶에서 받게 되는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遇善知識하야 爲讀此經三遍하면 是諸惡鬼가 皆悉消滅하야 病則除愈하야 身强力足하나니 讀經功德으로 獲如是福하나니라
선지식을 만나서 이 경을 세 번만 읽으면 이 모든 악귀가 다 소멸되고 병은 낫게 되어 몸은 강하여져서 힘이 생기나니 경을 읽은 공덕으로 이와 같은 복을 얻으리라.

 

왜 선지식인가? 똑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는데 뱀이 마시면 독이 되듯이, 똑 같은 말이라도 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말의 의미와 파장은 천지와도 같은 차이가 있다. 선지식들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그 중생이 처해 있는 근기와 형편에 따라 방편으로 법륜을 굴리는 것이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방편설을 절대화하기 때문이다.

 

원각경에서도 "말세중생들이 사상을 여의지 못하고 여래의 말씀이나 행한 바를 전해 듣고서 그대로를 자기의 수행으로 삼지만 끝내 불도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직 사상을 여의지 못한 사람은 장애를 법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부처도 나와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기거나 나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고 하는 자아존대에 빠져서 뽐내고 거만하고 안하무인식으로 행동하게 되는 법이다.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는 실속이 없고 자기의 살림살이라고는 한푼어치도 없으면서 여래와 역대 선사들의 어록이나 기억해 두었다가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서 아는 알음알이를 가지고 마치 자기 스스로 깨우쳐 증득한 것인양 생각하고 부처님이나 선사들의 흉내나 내고 사구게나 어록의 구절 등을 외워 가지고 자기가 가장 불법을 잘 아는 체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입부처는 될지언정 끝내 원각은 성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옛 조사스님들이 한결같이 차라리 일자 무식꾼이 될지언정 문자를 희롱하는 문자승은 되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을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불도를 성취하여 원각에 들고자 하는 마음과 후세 중생들을 모두 깨우쳐서 다 같이 성불도를 이루겠다는 마음으로 불도를 닦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일체에 있어서 정지견을 가진 선지식을 구하여 스승으로 삼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도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에게 "어떤 것이 보살행인가?"물으니, 문수보살께서는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 일 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그 얼마만큼 선지식의 존재가 위대한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선지식은 중생제도를 위하여 온갖 방편을 사용하기 때문에 외부의 모습에 얽매여서 스승을 찾으면 안된다.

 

옛날 국청사 부근에 새로 부임한 지사가 병으로 누워 죽게 되었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수소문하여 국청사의 풍간선사를 모시어 병이 나게 되었다. 지사가 이 고을에 존경할만한 성자가 있냐고 묻자 선사께서 말하기를 "있긴 하오나 지사가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청사 부엌에 가면 한산과 습득이라는 초라한 두 젊은이가 있는데 한산은 문수요, 습득은 보현이지만, 겉 모습만 보고 사람을 저울질하려다가는 성인을 친견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인조때 판서를 지낸 당대 대문장가인 이식이란 분이 "세상만물이 모두 네 스승이니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버리면 이 절에도 너의 스승이 계시니 그 분에게 청해서 배우도록 하라"고 하신 노승의 유언에 따라 절에서 잡일이나 하는 부목승을 스승으로 모시고 부목승으로 부터 학문을 전수 받아 천하의 대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진리를 찾아 스승을 구할 때에도 절대로 相에 얽매여서는 아니된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옛날 어느 대사찰의 조실로서 천하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대선지식이라는 스님이 무위법과 유위법의 관계를 확실히 모르고 제자들에게 설법하기를 "일월성신과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이 모두 나로 부터 나왔느니라"고 하였다. 제자가 "일월성신과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이 스님으로 부터 나왔다면, 스님은 어디로 부터 나왔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이에 답할 바를 몰라 쩔쩔매는 모습을 본 제자들은 그 스님이 선지식이 아니라 도깨비라 하여 모두 절에서 떠나버리고 선지식도 행방불명이 된 일이 있다고 한다.


방편을 써도 법의 뿌리를 알고 해야지, 법의 뿌리를 모르면서 다른 선지식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따라서 흉내나 낸다는 것은 도깨비 놀음이지 방편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선지식이라고 하지 않고 정지견을 가진 선지식을 구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정지견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스승으로 삼으면 스승은 마구니요 그의 제자는 마구니의 자손이 되어서 세속에서 말하는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말 것이니 눈 밝은 선지식을 기어코 만나야 할 것이다.

 

정지견을 가진 선지식이란 삼학을 닦아서 체험을 통하여 원각을 증득하여 선지식으로 부터 인가를 받으신 분을 말한다. 이는 무위법인 영지를 확실히 증득하고, 나아가서 일체 유위법의 뿌리를 분명하게 체득하고, 무위법과 유위법의 관계를 확실히 알고, 무위법과 유위법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는 지혜를 가지고, 아상을 여읜 무심경지라야 하며, 천칠백 화두를 모두 타파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先經文 後藥方文이라는 말이 있다. 만병의 근원은 마음에서 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의 평온을 찾지 않고서는 백약이 무효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올바른 진리로 이제까지 삐뚤어지고 전도된 마음을 바로 잡아, 이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고 자승자박이니, 다른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할 필요가 없는 것임을 굳게 인식시켜야 한다. 만약 이 진리를 굳게 믿어 원수를 대하기를 마치 자기 부모를 대하듯이 하고, 나와 남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마음이 없으면, 곧 일체 모든 병은 뿌리채로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사를 미워하고 열반을 좋아하거나 진여를 좋아하고 망심을 미워하거나 하는 증애심이 남아 있는 한 이것이 병이 되어서 원각을 성취할 수가 없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증애심에서 초월한다면, 그만 그대로가 원각경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병은 있을 수가 없는 법이다.

 

선조때 아직 代도 잇지 못한 3대 독자 김진사가 갑자기 병석에 누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 명의의 백약도 소용없어 집안은 온통 초상분위기였다. 일찍 과부가 된 증조모, 조모, 모친과 딸 자식 하나 없는 젊은 부인은 한숨만 쉴 뿐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다. 법도 있는 사대부 집안에 무당, 점쟁이를 불러들이지 않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명점쟁이 홍판수를 불러들여 살릴 방도를 물었다. 홍판수의 말에 김진사의 죽음은 증조부가 형조당상벼슬 다닐 때 술에 취하여 부질없는 노염과 객기로 서리를 곤장쳐 죽였는데, 그 때 억울하게 죽은 서리의 원혼이 명부에 호소해서 그 보복으로 3대가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3대 독자도 이제 죽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니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니 홍판수가 인정에 못 이겨 점을 쳐 주었다. 홍판수가 갑자기 사색이 되어 말을 하였다. "주인 양반은 살려낼 방도가 있으나 소인은 원귀의 노염을 사서 죽게 될 것입니다. 이것 역시 저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분수 모르는 적선을 하려고 하니 댁에게 후일 소인의 후손이나 잘 보살펴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원귀를 이기려면 크게 인덕을 쌓은 영웅대인에게 생사를 위임하면, 그런 인물에겐 귀신도 범하지 못하니 살아 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영웅대인을 알려 주어 목숨을 부지하게 하였으나 자신은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힘있는 대인은 비록 원귀를 쫓을 수 있을 수는 있으나, 원귀를 달래어 제도할 수 없어 언제가는 다른 형태의 업보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식은 능히 원귀에게 자신이 당한 일들의 인과업보 진리를 설명하여 가르침으로써 모든 원한을 풀어서 제도시키므로 다시는 또 다른 형태의 죄없는 업보도 받지 않는 것이다.

 

若有衆生이 多於淫欲하며 瞋 愚癡하며  貪嫉妬라도 若見此經하고 信敬供養하며 卽讀此經三遍하면 愚癡等惡이  皆除滅하며 慈悲喜捨로 得佛法分이니라
어떤 중생이 음욕과 성내고 어리석고 간탐하고 질투가 많더라도 이 경전을 보고 신심으로 공경하고 공양하며 이 경전을 세 번만 읽게 되면 어리석음 등의 악이 아울러 다 없어지고 자비희사심으로 불법의 마땅히 하여야 할 본분을 얻으리라

 

일체의 전도된 마음을 바로 잡아 탐착과 애욕심과 분별심을 여의고 정지견에 들어선다면 자비희사심으로  불도를 성취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연나라 사람이 연나라에서 태어나 초나라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늘그막에 연나라로 돌아가다가 진나라를 지나게 되었다. 같이 가던 사람이 그를 속여 어느 성을 가리키며, "저것이 연나라의 성이오"라고 하니 그 사람이 얼굴빛이 슬프게 변했다. 그 사람이 사당을 가리키며, "이것이 당신 마을의 사당이오."라고 하니 길게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 집을 가리키며, "이것이 당신 조상들이 살던 집이오."라고 하니 곧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또 언덕을 가리키며, "이것이 당신 조상의 무덤이오."라고 하니 통곡을 금치 못하였다. 이에 놀린 사람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내가 그대를 속인 것이오, 여기는 진나라요.” 그 사람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마침내 연나라에 도착해서 진짜 연나라의 성과 사당을 보고, 진짜 조상들의 살던 집과 무덤을 보았으나 슬픈 마음이 훨씬 덜했다고 한다.


옛날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렸는데, 이웃집 아들을 의심했다. 그의 걸음걸이를 보아도 얼굴을 보아도 말씨를 들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다. 모든 동작과 태도가 도끼를 훔친 듯했다. 얼마 후, 그가 골짜기를 파다가 그 도끼를 찾았다. 다음날 다시 이웃집 아들을 보니, 동작이나 태도가 아무리 보아도 도끼를 훔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귀엽고 앙쯩스러워 보였다. 이와 같이 일체가 유심조작인 것이지 슬픔과 기쁨과 증애에 무슨 실체가 있고 실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夫次無碍菩薩이여 若善男子善女人이 興有爲法하되 先讀此經三遍하고
다시 무애보살이여,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유위법을 행할 때에도 먼저 이 경을 세 번 읽고 나서 하라.

 

유위법을 행한다는 것은 집을 짓고 사업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서 길러 키우는 등의 일체의 세간사를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일체의 세간사를 영위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전생의 업보가 나타나서 무한한 고통을 받을 수가 있고, 또한 이러한 일을 하는데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에서도 법도를 어긋나게 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원한을 지을 수가 있다. 그래서 먼저 본 경을 세 번 읽는다는 것은 자신이 알면서 혹은 모르는 가운데 지을 수 있는 모든 잘못을 시정하고 마음을 정화시키고 나서 대사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체의 잘못을 시정하고 정화된 마음에서 대사를 수행하면 아무런 해가 없이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어 무한한 복을 누리게 된다.


築墻動土하며 安立家宅하되 南堂北堂과 東序西序와 廚舍客屋과 門戶井 와   庫藏과 六畜欄 하면 日遊月殺과 將軍太歲와 黃幡豹尾와 五土地神과 靑龍白虎와 朱雀玄武와 六甲禁諱와 十二諸神과 土尉伏龍과 一切鬼魅가 皆悉隱藏하야 遠 他方하고 形消影滅하야 不敢爲害하며 甚大吉利하야 得福無量하리라
담을 쌓고 흙일을 할 것이며 가택을 건립하되 남쪽과 북쪽의 본채와 동쪽과 서쪽의 담과 부엌과 객실과 문창과 우물이며 방아와 곳간과 가축의 우리와 난간과 뒷간을 세워라. 그러면 일유신과 월살귀며 장군태세와 황번표미와 오방의 토지신과 청룡백호와 주작현무와 육갑금휘와 십이제신과 토위복룡과 일체귀매 등이 다 숨어 들어가서 멀리 타방으로 물러가며 형상도 사라지고 그림자 조차 없어져서 감히 해치지 못하며 크게 길하고 이로워서 한량없는 복을 얻게 되리라


본 경전을 독송하고 나서 공사일을 한다면 얻게 되는 위신력과 가피력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善男子야 興功之後에 堂舍永安하고 屋宅이 牢固하며 富貴吉昌하야 不求自得하며 若欲遠行從軍커나 仕宦興生하면 甚得宜利하야 門興人貴하며 百子千孫으로 父慈子孝하며 男忠女貞하며 兄恭弟順하고 夫妻和睦하며 信義篤親하고 所願成就하리라
선남자야 공을 세운 뒤에 집이 편안하고 방이 견고하며 부귀하고 길하고 창성하여 구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얻게 되리라. 만일 멀리 나가서 군인이 되거나 벼슬하거나 장사하거나 이익을 많이 얻고 문호가 흥성하여 사람이 귀하게 되며 백자천손으로 부모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하고 남자는 충성하고 여자는 정조가 있고 형은 우애하고 동생은 공경하며 부부는 화목하여 신의가 돈독하므로 소원을 성취하리라.

 

본 경전을 읽으면 중생들의 전도된 마음이 바로 잡힘으로 얻어지게 되는 가족간의 위신력을 설명하고 있다.

 

若有衆生이 忽被縣官拘繫하야 盜賊牽挽이라도 暫讀此經三遍하면 卽得解脫하리라
만일 어떤 중생이 문득 관청에 체포되거나 도적에게 붙잡히더라도 이 경을 잠깐 세 번만 읽으면 곧 풀러나게 되리라

 

본 경전의 관청 관련 사건에 대한 가피력을 설명하고 있다.

 

若有善男子와 善女人이 受持讀誦하고 爲他人하야 書寫天地八陽經者는 設入水火라도 不被焚漂하고 或在山澤이라도 虎狼이 屛跡하야 不敢搏 하며 善神이 衛護하야 成無上道하리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천지팔양경을 쓰고 간행하는 사람은 설사 물과 불에 들어 가더라도 타거나 떠내려가지 않을 것이며 혹 산이나 못에 있을지라도 호랑이나 이리가 자취를 감추고 감히 물고 가지 못하며 선신이 호위해서 무상도를 이루리라.

 

관세음보살을 한 번이라도 부른 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 무슨 뜻인가? 불교신자 가운데 관세음보살을 한 번쯤 부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불에 타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하는 등 많은 재앙을 당하고 있다.  이는 문자대로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는 뜻이 아니고 자신이 관세음보살이 되었을 때라는 의미이다. 즉 고행수도를 하여 대자비심으로 가득 찬 관세음보살이 되었다면 이미 내가 없는 무아법을 통달하였는데 불에 탈 내가 어디에 있으며, 물에 빠질 내가 어디에 있으며, 생과 사가 본래로 없다는 뜻이다.

 

세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내가 비었음을 확연하게 알면 나를 헐뜯을 이도 없으며, 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설법을 하는 사람은 아직 내라는 생각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만약 내가 비어서 모습이 없고 모습이 없으니 나를 헐뜯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 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아서 알게 된다면 비록 누군가가 나를 헐뜯는다고 하여도 구업만 지을 뿐이지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듯 이 경을 읽는다는 것도 단순히 건성으로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상을 여읜 완전히 무심경지에서 경을 읽고 경의 뜻을 깨달아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을 만나서 세 번을 읽는다면 모든 전생의 업보가 소멸되어 무한한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하였다. 무심경지에서 경을 읽고 수도하고 유위행을 행한다면, 이는 이미 유위행이 아닌 무위행을 하는 것이 될 것이며 천상천하의 모든 선신들이 즐거워서 기꺼히 옹호하니 하는 일에는 일체의 걸림이 없고 궁극에 가서는 불도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옛날 중국의 어느 황제가 불로장수하기 위하여 온 천하에 명령을 내려 불로장수 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하루는 어느 대신이 자기가 불로장수의 비법을 가지고 있는 도인을 안다고 하였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 그 도인을 모셔 오라고 하였다. 몇 달이 지나 심부름을 간 사신이 돌아와서, 그 도인을 수소문하여 찾아 갔더니 이미 죽고 없더라고 하였다. 황제는 대신을 불러 불로장수 비법을 가지고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인데, 그 도인이 죽고 없으니, 이는 분명 너가 황제를 능멸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하면서 그 대신을 극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느 대신이 비유를 들어 말하기를 "전하 그 대신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계산을 귀신과 같이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임종에 달하여, 자신의 계산 비법을 정리하여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자식은 비법을 읽어보고도 비법을 이해하지 못하여 계산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옆에 살던 어느 사람이 그 소문을 듣고 비법책을 읽어 이해하여 계산을 귀신같이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불로장수의 비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우리가 확인할 수 없지만, 불로장수의 비법을 가지고 있던 도인이 죽었다고 하여 비법 자체가 없었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저 대신을 극형에 처한다는 것은 무고한 신하를 참하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됩니다"라고 하여 대신의 생명을 구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모든 귀중한 것을 우리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을려고 하지 않고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고 스스로 그 존재 가치마저도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나 않는지 깊이 반성하여야 할 것이다.


若復有人이 多於妄語綺語와 惡口兩舌이라도 若能受持讀誦此經하면 永除四過하고 得四無碍辯하야 而成佛道하며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거짓말과 발림말과 악한말과 이간질하는 말이 많더라도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네가지 허물이 길이 없어지고 네가지 걸림없는 변재를 얻어서 불도를 이룰 것이며

 

천수경에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罪亡心滅兩俱空  是則名爲眞懺悔라는 말이 있다. 죄라는 것은 본래 자성이 없는 것으로 실다운 것이 아니며 허망한 마음인 중생심에 따라 일어나는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만약에 참선 수도를 많이 하여 허망한 중생심인 탐진치 삼독심을 계정혜 삼학문으로 녹인다면 죄라는 허깨비같은 망상에 주착하지 않을 것이며, 망상의 본질을 깨닫게 되니 일체의 망상도 일시에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중생살이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음을 확실히 깨달아 죄와 중생심이 허망한 공상임을 알아서 生也一片 浮雲起요 死也一片 浮雲沒인데 本無求處 何煩惱며 本無貪處 何住着고 하는 경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생은 한 편의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죽는 것은 한 편의 뜬 구름이 없어지는 것과 같은 허망한 것으로 부귀빈천과 희노애락이 한낱 꿈노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허망한 것을 참된 것으로 알고 집착하고 있는 것이 중생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그릇된 생각을 놓아버린 깨달은 경지에 들면, 본래부터 구할 것도 없고 탐할 것도 없으며 번뇌와 주착함도 없는 청정한 자리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청정한 실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역시 집착이 된다. 청정한 실상이라는 생각도 놓아 버려야 참된 청정한 실상이다. 이와 같이 망상을 없애고 참된 것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차별관을 초월한 행을 하는 것을 참된 참회라고 할 것이며 올바른 수행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일체의 번뇌 망상이 산더미같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하고는 상관없이 대자유대자재의 무애해탈 경지가 될 것이고 이것이 바로 불도를 성취한 것이다.


若善男子善女人等이 父母有罪하야 臨終之日에 當墮地獄하야 受無量苦라도 其子卽爲讀誦此經七遍하면 父母卽離地獄하고 而生天上하야 見佛聞法하고 悟無生忍하야 以成佛道하리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부모가 죄를 지어 임종하는 날에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게 되었더라도 그 자식이 이 경을 일곱 번 읽으면 그 부모가 곧 지옥을 여의고 천상에서 태어나서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들어 무생법인을 깨달아서 불도를 이루리라.

 

진실로 무심경지에서 본 경을 읽어 듣게 한다면 들은 사람의 마음이 정화되어져 일체의 전도된 망상에서 벗어나니, 가는 곳마다 장엄 불국토가 아닐 수 없다. 무심경지에서 본 경을 독경하는 소리를 들으면 삿된 지견에 떨어지는 일이 없고 지혜가 맑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옛날 어느 선지식이 고해에서 신음하고 있는 물고기 천마리에게 십이인연법을 설해 주었는데, 물고기 천마리가 십이인연법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맑아져서 그 날로 천상에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다. 또 선지식에게 절을 삼배만 하면 악행을 해서 꼭 지옥에 떨어질 중생이라도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또한 집안에 선지식이 나면 구족이 천상에 태어난다는 말도 있다. 친척들은 자연히 선지식을 만나고 접촉하는 기회가 많으니 만나고 접촉하게 되어 자연히 지혜가 맑아지게 되고 또 지혜가 맑아지게 되니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지옥에 있어도 그 곳이 곧 극락이 되고 중생들은 극락에 있어도 그 곳이 곧 지옥이 되고 고해라는 것이다. 그리고 수미산보다도 높은 중생들의 업보가 삼천년에 한 번 스쳐지나가는 부처님의 가사자락에 의하여 마멸된다고 한다. 무심경지에서 진심으로 본 경을 독송하는 곳은 선지식이 항상 거처하는 곳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알고 일체 의혹이 없어야 할 것이다.


佛告無碍菩薩하사대 毘婆尸佛時에 有優婆塞優婆夷하야 心不信邪하고 敬崇佛法하며 書寫此經하야 受持讀誦하되 須作卽作하고 一無所聞하며 以正信故로 兼行布施하되 平等供養하고 得無漏身으로 成菩提道하니
부처님이 무애보살께 말씀하셨다. 비바시 부처님때에 우바새 우바이가 있었는데 마음으로 삿된 것을 믿지 않고 불법을 공경하여 이 경을 쓰고  인쇄하여 수지독송하며 할 일은 곧 하고 하나도 들은 것이 없으나 바른 믿음으로 보시를 행하고 평등하게 공양하여 무루신을 얻어서 보리도를 이루었으니

 

우바새란 비록 몸의 신출가는 하지 않았으나 마음의 출가를 하여 반드시 견성성불하고 말리라는 초발심을 내어서 불도를 닦는 선남자를 말하며, 우바이란 비록 몸의 신출가는 하지 않았으나 마음의 출가를 하여 반드시 견성성불하고 말리라는 초발심을 내어서 불도를 닦는 선여인을 말한다. 이 구절은 세존께서 불도를 성취하여 견성성불하는 것은 몸의 출가를 한 비구, 비구니에게 한정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 모두가 진실로 불도를 닦으면 견성성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중요한 부분이다. 부디 나는 불도를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중도에서 포기하는 일이 없이 이 글을 깊이 믿어 고행정진하기를 바라고도 바라는 바이다.


대승진리에 들어가서 불도를 닦는 사람들이 수행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혹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티끌의 오염계에 들어가 거기에 끄달리는 모양을 보이나 이는 방편으로 유위법을 굴리는 것이지 마음은 항상 坐不知坐 行不知行하는 무심하고 청정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行不知行 見而不見 聞亦不聞한 무심경지에서 들어니 한 마디도 들은 바가 없는 것이다. 내라고 하는 생각을 완전히 여의고 사상을 여읜 경지에서 들어니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사상을 완전히 여읜 경지에서 내라고 하는 생각 없이 설법을 하시었기 때문에 사십구년동안이나 설법을 하시고도 한마디도 설법하신 일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옛날 노승이 한 젊은 스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는데 비가 내려 땅이 몹시 질었다. 두 사람은 어느 모퉁이에서 심한 진흙탕 길을 건너다가 고운 비단옷을 입은 한 어여쁜 여인이 길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노승이 그 여인을 안아서 진흙탕 길을 건네 주었다. 노승과 같이 가던 그 젊은 스님은 민망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어느 절에서 자게 되었을 때, 젊은 스님이 말했다. "우리처럼 출가한 승려는 여색(女色)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며, 특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은 위험합니다. 그런데 스님은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노승이 "뭐라고? 그 여인 말인가? 나는 일찌감치 내려 놓았는데, 그대는 아직도 안고 있는가?"라고 하였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듯이 일본에서는 홍법대사도 글을 쓸 때 잘못 쓸 수 있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홍법대사는 유명하신 고승이었다. 홍법대사가 너무나도 존경을 받으니, 일부 유생들이 시기를 하여 홍법대사를 골려 주기 위하여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홍법대사를 초청하였다. 술이 건하게 취하자, "중놈이 술을 먹고 고기를 먹다니 완전히 땡초가 아닌가" 하면서 한 유생이 홍법대사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홍법대사는 "나는 술과 고기를 먹은 적도 없으며,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하였다. 유생이 말하기를 "나 혼자 있었으면 내가 거짓말한다고 하겠구나. 여기 많은 유생들이 증인으로 있는데도 중으로서 거짓말을 서슴치 않고 하느냐"고 하였다. 시비가 가려지지 않자 모두들 입에 손을 넣어 먹은 것을 토해 보자고 하였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유생들의 배에서는 먹었던 고기와 술이 토해 나왔는데 홍법대사 배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유생들이 홍법대사에게 머리를 쪼아리고 사죄하였다. 이와 같이 먹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것이 무주무착의 바른 행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학인들도 사상을 여의고 무심경지에 들어서 고행수도를 쌓아야 견성성불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를 믿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기도하여 복을 빌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믿는 것은 작은 믿음이며 삿된 믿음인 것이다. 바른 믿음이란 내 자신도 불성을 가진 존재로서 견성성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며 큰 믿음인 것이다. 이와 같은 바르고 큰 믿음으로 수행하면 견성성불하여 불도를 이룬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루신을 얻는다는 것은 견성하여 자성을 증득한다는 말이다.

 

號曰普光如來應正等覺이라 劫名은 大滿이요 國號는 無邊이며 但是人民이 行菩薩道하되 無所得法하니라
그 이름이 보광여래응정등각이었다. 그 겁의 이름은 대만이요 국호는 무변이며 인민은 다만 보살도를 행하였지만 얻은 법이 없었느니라.

 

보살과 후세 중생들이, 일체의 생각에 집착하면 중생이요 일체의 집착을 놓아 버리면 깨달음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닦아 익히면 원각을 성취하게 된다. 원각을 성취하여 원각 경지에서 보면, 그 자리는 본래로 영지가 구족해 있는 일체 구족처인지라 새삼스럽게 닦아 익힐 것이 없고 성취할 것도 없는 것이다. 행사 선사가 희천 선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희천이 조계산에서 왔다고 하니 행원이 거기서 무엇을 배웠는가 하고 물었다. 조계산에 들어가기 전에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하자 그런데 무엇 하러 조계산에 들어갔는가 하고 다시 물었다. "만약 조계산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제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하고 희천이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깨닫고 나면, 본래 구존되어 새삼스레 닦아서 성취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각 경지에서 두루 비추어 보면 백천만억 아승지 항하수와 같이 많은 불세계가 마치 헛꽃이 어지러히 일어났다가 어지러히 없어지는 것과 같은 허망한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모든 차별상이 어제 밤의 꿈과 같아서 본래로 공상이요 적멸상인 것이다. 따라서 원각을 증득한다고 하여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고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는 법이다.

 

한 객승이 조주선사에게 "한 가지 물건도 지니고 오지 않았는데, 어떻습니까?"하고 물었다. 조주가 "내려놓아라."고 하자 객승이 "한 가지 물건도 없는 저에게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조주가 "내려놓지 않으려면 가져가거라."고 하자 질문하던 객승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보살도를 행하지만 얻은 법이 없었다는 것은 無住相 보시와 행을 한다는 뜻이다.


옛날 중국 양무제는 佛心天子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불교발전을 위해 헌신한 왕으로 수 많은 절을 세우고 불탑을 쌓고 승려도 양성해 가히 보살의 화신이란 말을 들었다. 이러한 양무제인지라 그는 늘 법의를 걸치고 채식만 하며 도 높은 스님이 계신다면 곧 청하여 법문 듣기를 즐겨하였다. 하루는 멀리 인도에서 훌륭한 스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달마대사를 궁중으로 모시어 자기의 공덕을 크게 자랑하며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과인이 즉위한 이래 천 곳에 절을 짓고 천개의 탑을 쌓았으며 또 십만의 스님을 양성하였소, 과연 이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달마대사께서는 아예 공덕이라고 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제까지 왕이 만나 본 고승대덕들은 한결같이 최고의 찬사만 했는데 인도에서 온 중이 무뚝뚝하게 공덕이 없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내가 지은 불사가 공덕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것이 공덕이요. 대사께서 말하기를 참 공덕은 절과 탑을 쌓았다는 그 생각을 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도 마음에 두지 않는 무심 경지에 도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양무제는 이런 무례한 중을 그냥 두면 천하에 자신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나라도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무사를 시키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야겠다고 계획하였다. 이러한 양무제의 신심이란 무엇이었으며, 선행이란 무엇이었던가? 자신의 아상에 사로잡힌 위선이 아니었던가! 相에 취하여 짓는 복덕은 천상낙은 받을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다시 악취에 떨어지는 법이다.


復次無碍菩薩이여 此天地八陽經이 行閻浮提하면 在在處處에 有八菩薩과 諸梵天王과 一切明靈이 圍繞此經하고 香華供養하야 如佛無異니라
다시 부애보살이여 이 천지팔양경이 염부제에 행하면 곳곳마다 팔보살과 모든 범천왕과 일체의 밝은 신령이 이 경을 둘러싸고 향과 꽃으로 공양하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여 조금도 다름이 없느니라.

 

천지팔양경이 염부제에 행한다는 말은 천지팔양경의 진리가 널리 익혀져, 모든 대중들이 진리에 따라 수행하여 생을 영위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세계가 바로 청정 불국토이며, 모든 선신들이 수호하여 공양하기를 부처님이 계시는 듯이 한다는 말이다.

 

 

7. 대승의 지혜관

 

佛告無碍菩薩摩詞薩하사대 若善男子 善女人等이 爲諸衆生하야 講說此經하면 深達實相하야 得甚深理하되 卽知身心이 佛身法心이라
부처님이 무애보살 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들이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 경을 강론하면 실상을 깊이 통달하여 심히 깊은 이치를 얻나니 이 몸과 마음이 곧 부처이며 법의 핵심임을 아느니라.

 

실상을 깊이 통달한다는 말은 일체의 허상과 실상을 동시에 증득하여, 실상과 허상의 관계까지도 확연히 깨달아서 알았다는 말이다. 반야심경에 諸法空相이라고 하였고 금강경에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라고 하였다. 여기서 空相과 非相이 허상이라면 실상은 여여부동하여 일체에 치우치거나 차별함이 없는 동체평등한 眞空 자성을 말한다. 진공 자성과 공상 비상을 통달하게 되면 이 둘의 관계가 진실로 미묘한 不二의 관계에 있다는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되고 어떠한 경계에서도 무주무착하는 무애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즉 應無所住而生其心하는 動中靜과 靜中動의 무심경지를 견지하게 된다.

 

이러한 경지가 되면 바로 이 육신 자체가 부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중생심에서 차별상과 탐착심을 가지기 때문에 이 육신은 사대로 이루어진 색신에 지나지 않지만, 일체의 차별상과 탐착심이 없다면 마치 허공에 새가 날아가도 그 흔적이 없듯이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도 일체의 티끌이 없는 청정 법신과 둘이 아닌 경지가 되어 이 몸 자체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이 곧 부처이며 법의 핵심이기 때문에 진실로 우리들의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불가능이란 없는 것이다. 精神一到 何事不成인 것이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비하하여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될 수 없다고 할뿐이다.


옛날 위대한 장수가 자기보다 실력이 열 배는 더 센 적과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분명히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부하들은 회의적이었다. 부대를 이끌고 전진하던 중, 한 사찰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사찰에 참배한 뒤, 동전을 던져 만약 앞면이 나오면 우리가 이긴다는 표시이고, 그렇지 않으면 진다는 표시이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신의 손에 달려 있다." 장수가 말에서 내려 부처님 앞에서 묵묵히 기도한 다음, 몸을 돌려 부하들이 보는 가운데 동전을 던졌다. 동전의 앞면이 나왔다. 그러자 부하들의 사기가 올라 곧 바로 결전을 벌였다. 승리를 거둔 다음에, 그의 부하 한 사람이 말했다. "누구도 신이 내린 운명을 거역할 수 없나 봅니다.!" 장수가 말했다. "과연 그럴까?" 그러면서 자기가 점을 칠 때 던졌던 동전을 보여 주는데, 양쪽이 모두 앞면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법이다.
 
所以能知卽知慧니
이러한 까닭을 능히 아는 것이 곧 지혜니

 

이 몸이 바로 부처이며, 자성이 법의 핵심이고 이 둘이 不二의 관계임을 깨달아서 아는 것이 올바른 지혜라는 것이다. 이는 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알음알이로 헤아려서 되는 것도 아니며 계정혜 삼학문에 들어서 각고의 수도를 통해서만 증득할 수 있는 참으로 미묘한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유마대사께서 불이법문을 설하실 때 묵언으로 설하실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眼常見種種無盡色하되 色卽是空이요 空卽是色이라 受想行識도 亦空하나니 卽是妙色身如來며
눈으로 항상 갖가지 무진한 색을 보지만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 수상행식도 또한 공하나니 이는 곧 묘색신여래며

 

눈으로 무진색을 보되 一無所見하며 無所得法하는 경계에서 일체를 올바르게 본다는 것이다. 이는 무진색을 보되 본 바에 주착하지 않으면서 본다는 뜻이다. 즉 見而不見의 경지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서 보니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 공허한 환상이며, 공허한 환상이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참답지 않고 변화무상해 보이는 공허한 환상이, 이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동체평등의 경지에서 보면 그만 그대로 고요적적한 적멸상인 것이다.


그리고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공하다는 사실도 확연히 알았다는 말이다. 색이란 모든 모습, 즉 일체의 형상을 말하며, 수상행식이란 외부경계에 인하여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으로 그 자취가 남아 있는 일체의 명상을 말한다. 중생들은 이 형상과 명상을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지만, 무주무착하는 무심경지에서는 이 형상과 명상이 공허한 환상임을 확연히 알았다는 것이다. 즉 오온은 자성이 없어 실다운 것이 아니며 인연화합에 따라 무상하게 이합집산하는 허망한 것임을 알았다는 뜻이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일체에 주착하지 않게 된다. 일체에 주착하지 않고 일체를 보는 경지가 묘색신여래의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색신을 보아도 본 것이 아니며, 설사 본다고 하여도 일체의 차별상과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색신 자체가 부처경계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눈 자체가 묘색신여래인 것이다.
 
耳常聞種種無盡聲호되 聲卽是空이요 空卽是聲이라 卽是妙音聲如來며
귀로는 항상 갖가지 무진한 소리를 듣지만 소리가 곧 공이요 공이 곧 소리이니 이는 곧 묘음성여래며

 

귀로는 항상 가지가지 한없이 많은 소리를 듣되 一無所聞하며 無所得法하는 경계에서 일체를 올바르게 듣는다는 것이다. 이는 무진한 소리를 듣되 들은 바에 주착하지 않으면서 듣는다는 뜻이다. 즉 聞亦不聞의 경지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서 소리를 들으니 중생들이 참된 소리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소리가 참된 것이 아니며 공허한 환된 소리이며, 공허한 환된 소리가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소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참답지 않고 변화무상해 보이는 공허한 환된 소리들이, 이 소리에 집착하지 않고 동체평등의 경지에서 들으면 그만 그대로 고요적적한 적멸상인 것이다. 소리 또한 외부경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일체의 마음 작용의 자취를 말한다. 중생들은 이 자취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지만, 무주무착하는 무심경지에서는 이 자취들이 공허한 환된 것임을 확연히 알았다는 것이다. 즉 이들 자취는 자성이 없어 실다운 것이 아니며 인연화합에 따라 무상하게 이합집산하는 허망한 것임을 알았다는 뜻이다. 이들 온갖 소리가 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일체에 주착하지 않게 된다. 일체에 주착하지 않고 일체의 소리를 듣는 경지가 묘음성여래의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모든 소리를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니며, 설사 듣는다고 하여도 일체의 차별상과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음성 자체가 부처경계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귀 자체가 묘음성여래인 것이다.
 
鼻常 種種無盡香호되 香卽是空이요 空卽是香이라 卽是香積如來며
코로는 항상 갖가지 무진한 냄새를 맡지만 냄새가 곧 공이요 공이 곧 냄새이니 이는 곧 향적여래며

 

코로는 항상 가지가지 한없이 많은 냄새를 맡되 一無所 하며 無所得法하는 경계에서 일체를 올바르게 맡는다는 것이다. 이는 무진한 냄새를 맡되 맡은 바에 주착하지 않으면서 맡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서 냄새를 맡으니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냄새가 참된 것이 아니며 공허한 환된 것이며, 공허한 환된 것이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냄새들인 것이다. 그러나 참답지 않고 변화무상해 보이는 공허한 환된 냄새들이, 이 냄새에 집착하지 않고 동체평등의 경지에서 맡으면 그만 그대로 고요적적한 적멸상인 것이다. 이들 온갖 냄새가 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일체에 주착하지 않게 된다. 일체에 주착하지 않고 일체의 냄새를 맡는 경지가 향적여래의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모든 냄새를 맡아도 맡은 것이 아니며, 설사 맡는다고 하여도 일체의 차별상과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냄새 자체가 부처경계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코 자체가 향적여래인 것이다.
 
舌常了種種無盡味호되 味卽是空이요 空卽是味라 卽是法喜如來며
혀로는 항상 갖가지 무진한 맛을 보지만 맛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맛이니 이는 곧 법희여래며


혀로는 항상 가지가지 한없이 많은 맛을 보되 一無所聞하며 無所得法하는 경계에서 일체를 올바르게 맛본다는 것이다. 이는 무진한 맛을 보되 본 바에 주착하지 않으면서 본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서 맛을 보니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맛이 참된 것이 아니며 공허한 환된 것이며, 공허한 환된 것이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맛인 것이다. 그러나 참답지 않고 변화무상해 보이는 공허한 환된 맛들이, 이 맛에 집착하지 않고 동체평등의 경지에서 맛을 보면 그만 그대로 고요적적한 적멸상인 것이다. 이들 온갖 맛이 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일체에 주착하지 않게 된다. 일체에 주착하지 않고 일체의 맛을 보는 경지가 법희여래의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모든 맛을 보아도 본 것이 아니며, 설사 본다고 하여도 일체의 차별상과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맛 자체가 부처경계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혀 자체가 법희여래인 것이다.


身常覺種種無盡觸호되 觸卽是空이요 空卽是觸이라 卽是智勝如來며
몸으로는 항상 갖가지 무진한 감촉을 느끼지만 감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감촉이니 이는 곧 지승여래며

 

몸으로는 항상 가지가지 한없이 많은 촉감을 느끼되 一無所聞하며 無所得法하는 경계에서 일체를 올바르게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무진한 촉감을 느끼되 느낀 바에 주착하지 않으면서 느낀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서 감촉을 느끼니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감촉이 참된 것이 아니며 공허한 환된 것이며, 공허한 환된 것이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감촉인 것이다. 그러나 참답지 않고 변화무상해 보이는 공허한 환된 감촉들이, 이 감촉에 집착하지 않고 동체평등의 경지에서 느끼면 그만 그대로 고요적적한 적멸상인 것이다. 이들 온갖 감촉이 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일체에 주착하지 않게 된다.  일체에 주착하지 않고 일체의 감촉을 느끼는 경지가 지승여래의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모든 감촉을 느껴도 느낀 것이 아니며, 설사 느낀다고 하여도 일체의 차별상과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감촉 자체가 부처경계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몸 자체가 지승여래인 것이다.
 
意常思想分別種種無盡法호되 法卽是空이요 空卽是法이라 卽是法明如來니라
뜻으로는 항상 갖가지 무진한 법을 생각하며 분별하지만 법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법이니 이는 곧 법명여래니라.
 
뜻으로는 항상 가지가지 한없이 많은 법을 생각하고 분별하되 一無所聞하며 無所得法하는 경계에서 일체를 올바르게 생각하고 분별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진한 법을 생각하고 분별하되 생각하고 분별한 바에 주착하지 않으면서 생각하고 분별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서 법을 생각하고 분별하니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법이 참된 것이 아니며 공허한 환된 것이며, 공허한 환된 것이 중생들이 참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하고 있는 법인 것이다. 그러나 참답지 않고 변화무상해 보이는 공허한 환된 법들이, 이 법에 집착하지 않고 동체평등의 경지에서 생각하고 분별하면 그만 그대로 고요적적한 적멸상인 것이다. 이들 온갖 법이 공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일체에 주착하지 않게 된다. 일체에 주착하지 않고 일체의 법을 생각하고 분별하는 경지가 법명여래의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모든 법을 생각하고 분별하여도 생각하고 분별한 것이 아니며, 설사 생각하고 분별한다고 하여도 일체의 차별상과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법 자체가 부처경계와 차별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뜻 자체가 법명여래인 것이다. 몸 자체가 부처라는 사실을 열거하여가면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불교진리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다.
 
善男子야  此六根이 顯現호되 人皆口常說其善語하야 善法常轉하면 卽成聖道나 說其邪語하야 惡法常轉하면 卽墮地獄하나니 善男子야 善惡之理를 不得不信가
선남자야, 이 육근이 뚜렷하게 나타나되 사람이 모두 입으로 항상 착한 말을 설하여 항상 착한 법을 굴리면 곧 성인의 도를 이룰 것이나 삿된 말을 설하여 항상 악한 법을 굴리면 곧 지옥에 떨어지나니 선남자야 착하고 악한 이치는 믿지 않을 수 없느니라.

 

부처경지에서의 육근현현이 있고 중생경지에서의 육근현현이 있다.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것을 할 수 없다. 바늘로 찔러도 아픈 줄을 모르고 불로 태워도 뜨거운 줄을 모르는 것이다. 즉, 육신 그 자체는 아무런 작용도 인식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이지만 자성이 묘하게 이용하여 작용도 하고 인식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육근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眞空妙用을 말한다. 즉 자성은 비어서 아무런 모습도 일체의 자취도 없지만, 일체의 경계에 접하여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을 묘하게 이용하여 작용한다는 말이다. 자성의 묘한 작용은 진실로 一無所聞하며 無所得法하는 경지이며, 見而不見 聞亦不聞 坐不知坐 行不知行하는 완전한 무애경지이기 때문에 일체의 티끌과도 같은 흔적이 없다. 이와 같이 一無所聞하며 無所得法하는 경지에서 육근현현하는 것이 부처경지에서의 육근현현인 것이다. 하지만 일체를 분별하여 차별상으로 보아서 집착하는 중생경지에서는 육근작용에 의한 환된 자취인 색성향미촉법의 육진의 티끌이 남고, 이에 따라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육식의 알음알이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육근의 작용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과도 같이 보이는 것은 일체의 분별과 차별상에서의 육근현현으로 중생경지에서의 육근현현인 것이다.

 

항상 착한 말을 설하며 항상 착한 법을 굴린다는 것은 一無所聞하며 無所得法한 부처경지, 즉 완전히 무심경지에서 법을 설하고 법을 운용한다는 것이다. 석가세존께서 49년간 설법하시고도 한 마디도 설법한 적이 없다고 한 경지가 바로 이 경지인 것이다. 無說이 眞說이며 無聞이 眞聞인 것이다. 이렇게 하면 불도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삿된 말을 설하고 악한 법을 굴린다는 것은 일체를 분별하고 차별하여 집착하는 중생지견에서 법을 설하고 법을 운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바른 법이 운용된다는 것은 일체의 주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삿된 법이 운용된다는 것은 일체에 집착하여 차별상과 분별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번뇌 망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번뇌 망상 자체가 바로 보리인 것이다.


학인이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자 어느 선사께서 밥을 가져오면 먹고 차를 가져오면 마시고, 가자면 가고 오자면 오고 이렇게도 열심히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느냐고 꾸중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금강경에서 세존께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손을 씻으니, 수보리존자가 "참으로 희유하나이다 세존이시여"라고 감탄사를 하였다고 한다. 늘 행하는 일상사인데 무엇이 그렇게 희유했다는 것인가? 그리고 또 어느날 세존께서 법좌에 오르시니, 문수보살께서 퇴를 치시며 "법왕의 법을 잘 관했으리라. 법왕의 법은 이러하나니라"고 다시 퇴를 치니 세존께서 법좌에서 내려왔다는 설화도 있다. 이렇듯 자성자리에서의 일체행은 무정설법을 하고 있는 것이다.


善男子야 人之身心이 是佛法器며 亦是十二部大經券也어늘 無始已來로 轉讀不盡하야 不損毫毛하나니
선남자야, 사람의 몸과 마음이 불법의 그릇이며 또한 십이부의 대장경이거늘 무시이래로 전하여 읽으나 다하지 못하며 터럭만치라도 손상되지 아니하나니

 

五慾煩惱가 卽菩提데 何期勞心播古紙이며 十億國土의 法性界가 日用心中에 處處開인 것이다. 재물욕, 색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다섯 욕심에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중생계가 바로 깨달음의 길이며, 석가세존께서 가르치신 진리인 것이다. 즉 육근 육진 육식의 중생들의 삶 가운데서도 일체 주착하지 않는 무애경지에 들면 이것이 바로 깨달은 부처의 경지요 주착하게 되면 중생들의 꿈 노름인 것이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이란 헌 종이조각을 헛되이 읽고 있는가! 도가 경전 속에 있는 것도 아니요 부처님 말씀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생들의 오욕 가운데 있는 것이며, 오욕 번뇌속에 있으면서도 無住無着의 무위행을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실된 부처의 경지인 것이다.


온 우주 전체는 진리의 세계이며 이는 날마다 생활하는 마음 가운데에 있는 것으로 이러한 일상의 생활을 벗어나서는 진리도 없고 부처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진리가 이러하니 일상의 생활을 벗어난 외부의 별천지에서 진리를 구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처음없는 처음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이렇듯 진리를 설하고 행하여 왔지만, 그 진리에는 한계가 없고 끝이 없으며 터럭만치도 손상된 적도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끝없는 끝까지 영원할 것이다. 한계가 없고 끝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 진리를 다 깨우쳐 끝맞쳤다고 할 수 없고 또 도력에 있어서도 수도를 완성했다고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석가세존뿐만 아니라 삼세제불께서도 지금도 어디에선가 수도를 쌓고 있다고 확신하는 바이다. 진리가 이러하니, 수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나는 이쯤하여 도를 깨우쳐 마쳤다고 자만하거나, 도인인체 하지 말고 영원히 수도를 쌓아야 할 것이다.
 
如來藏經은 唯識心見性者之所能知요 非諸聲聞凡夫의 所能知也니라
여래의 장경은 오직 마음을 알고 성품을 본 자만이 능히 알 바이며 모든 성문이나 범부가 능히 알 바가 아니니라.
 
불교의 심오한 진리는 오직 중생심을 알고 자성을 본 자만이 능히 알 바이며 모든 성문이나 범부가 능히 알 바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문이나 연각을 스승으로 삼으면 구경 소승의 깨달음 밖에는 얻지 못하게 되는 까닭에 성문이나 연각을 스승으로 삼으면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에 照見五蘊皆空하여 度一切苦厄한다고 하였으며 諸法空相이기 때문에 불생불멸 무고집멸도라고 하였다. 이러한 경지가 되어야 遠離顚倒夢想하여 구경 열반에 들며, 아뇩다라삼먁보리를 얻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대승의 올바른 법인데도 불구하고 고집멸도의 사제법문을 깨친 성문은 고집멸도가 실다운 것이라고 집착하고,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에 이르기까지의 십이인연법을 깨친 연각은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가 실다운 것이라고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중생지견의 전도된 마음을 여의지 못하는 것이다. 실은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인 것이다. 즉, 고집멸도와 십이인연법 등의 일체 유위법은 자성이 없어 참다운 것이 아니며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허망한 것이다. 일체 유위법의 성품을 이와 같이 깨우쳐 알면 곧 성불한다는 것이다.
 
善男子야 讀誦此經하야 深解眞理하면 卽知身心이 是佛法器어니와 若醉迷不醒하면 不了自心이 是佛法根本하고 流浪諸趣하야 墮於惡道하고 永沈苦海하야 不聞佛法名字하리라
선남자야 이 경을 독송하여 진리를 깊이 알게 되면 곧 몸과 마음이 불법의 그릇임을 알거니와 만일 취한 듯 미해서 깨닫지 못하면 자기의 마음이 불법의 근본임을 알지 못하고 육취중생계를 유량하면서 악도에 떨어져서 길이 고해에 잠기어 불법의 이름도 듣지 못하리라.

 

이 경을 읽고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깊이 깨닫는다는 것은 一無所聞하고 無所得法한 무애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무애경지에서 수도를 쌓아서 견성성불하게 되면, 오욕번뇌의 근원인 육근 육식이 바로 불법이며, 이를 떠나서는 불법도 진리도 없음을 알게 된다. 즉 이몸과 마음이 불법의 핵심임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불법을 알지 못하여 일체 알음알이를 가지고 분별하고 꿈과 같은 환상을 참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동체평등한 진리의 세계에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이 불법의 핵심임을 알지 못하여 외부에서 진리를 찾고 외부의 우상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불법의 근본은 동체평등이며 불도의 대본은 무주무착인 것이다.


六趣衆生은 自作業인데 隨緣起沒은 亦妙用인 것이며, 二乘難免生死海데 更待何時作佛身가 천, 인,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 등 여섯 취향을 갖은 중생의 삶은 자기 스스로 지은 업보에 따라 스스로의 마음으로 조작하여 만든 것이지 환경에 그런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연에 따라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은 생겨난 그것이 없어지고 없어진 그것이 다시 생겨나는 묘한 작용인 것이다. 중생들은 인연에 얽매이어 인연에 따라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도에 통달한 사람은 인연에 주착하지 않을 뿐 인연을 끊어 없애는 것은 아니다. 즉 중생들은 인연법에 끌려 굴리어 다니고 깨달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인연법을 굴리며 외부의 경계에 응하여 무애행을 할 따름이다.

 

부처님께 절이나 하고 공양이나 올리고 복이나 빌고 하는 기복불교와 자기 혼자만 고집멸도의 사제법문이나 십이인연법을 깨치는 성문 연각 등의 이승불교로는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 해탈할 수 없으니 이승불교만 하여서는 어느 세월을 기다려서 성불하겠는가? 이승불교로는 성불할 수 없으니 대승도리를 깨달아서 성불하도록 수도하여야 되는 것이다.

 

또 생사를 벗어난다고 하니 마치 본래부터 있는 생사를 수도를 통하여 벗어나는 것과 같이 생각하겠지만 본래로 생사가 없는 것이다. 본래로 생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생들이 뒤바뀐 생각으로 생사가 있는 것 같이 보고 생사에 집착함으로써 생사 윤회의 고통을 끝없이 반복할 뿐이다. 만약에 본래 생사가 없다는 것을 깨쳐서 확연히 알게 되면 헛되이 생사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생사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깨달음으로써 원래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새로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인과법과 윤회법에도 맞지 않을 뿐아니라 법계는 법칙성도 없어지고 일대 혼란이 생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참되게 죽었으면 다시 태어나지 말고 참되게 태어났다면 죽지 말아야 하는 법인데 거짓되게 죽고 거짓되게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난 그것이 다시 죽고 죽은 그것이 다시 태어나는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이 법계에는 무시이래로 물 한방울도 더하고 덜함이 없이 원래로 있던 그것이 돌고 돌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과응보의 법칙과 인연법과 윤회법이 한 줌의 어긋남도 없이 엄연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래부터 있는 그것이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생사가 없이 如如한 것이다.
 
爾時에 五百天子가 在大衆中하야 聞佛所說하고 得法眼淨하야 皆大歡喜하며 卽發無等等阿 多羅三  三菩提心하니라
이 때에 대중 가운데 있던 오백천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법안이 깨끗하여져 모두 크게 환희하였으며, 곧 견줄바 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느니라.
 
부처님께서는 無說이 眞說인 경지에서 설하셨고 오백천자들은 無聞이 眞聞인 경지에서 청법한 것이다. 법안이 깨끗해졌다는 것은 一無所聞하고 無所得法한 무심경지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이 무심경이 곧 진심 자성자리이다. 자성자리란 변함없는 여여부동한 것인데 망상 경계에 쏠려서 잠깐 진심인 자성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자성자체가 미해진 것은 아니다. 비록 하늘에 구름이 덮였다고 해서 태양과 달빛마저도 어두워진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중생들이 태양과 달빛이 어두워졌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이제까지 완전히 뒤바뀐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대오각성해서 무심경지에 들어서 수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원각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바뀐 생각으로는 알음알이를 늘리려면 모르되 원각을 성취할 수는 없다. 망상 경계의 뒤바뀐 생각으로 심오하고 현묘한 일체 불법의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이는 목을 끊고서 살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생로병사와 기몰과 거래와 동정과 부귀빈천과 삼독오욕과 여덟가지의 모진 풍파와 희로애락의 마음에 끝없이 끄달려서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분주하고 번거로워서 잠시 잠간도 쉴 사이없이 고해에서 신음하면서도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 것이 세간법이요 중생심인 것이다. 그러나 문득 한 생각을 돌이켜서 내가 이제까지 뒤바뀐 생각에 끄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한 생각을 바로하면 일체 세간의 오염에서 벗어나게 되고 동시에 청정한 경지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오염된 더러운 마음을 버리려고 하거나 청정한 마음을 구하고자 하면 오염이 늘어날 뿐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분별심을 놓아서 초월한 마음이 한 티끌도 없는 참으로 깨끗한 법안인 것이며, 한 점의 분별심도 없는 자성자리 그대로가 바로 무등등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인 것이다.

 

 

 

 

 

8. 세간의 생사영위법문

 

無碍菩薩이 復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人之在世에 生死爲重이나 生不擇日하고 時至卽生하며 死不擇日하고 時至卽死어늘 何因殯葬하야 卽問良辰吉日하고 然始殯葬호되 殯葬之後에 還有妨害하며 貧窮者多하고 滅門者不少니까 唯願世尊이시여 爲諸邪見無知衆生하사 說其因緣하사 令得正見하고 除其顚倒소서
무애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하시었다. 세존이시여,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가는 동안에 나고 죽는 것이 대사이거늘 태어날 때 날을 가리지 않고 때가 되면 태어나고, 죽을 때에도 날을 가리지 않고 때가 이르면 곧 죽는데, 어찌하여 장사지내는 일에는 좋은 때와 길한 날을 묻으며, 이렇게 하여 장사를 지내면서도 장례를 지낸 뒤에는 오히려 방해가 있어 빈궁한 자가 많고 멸문한 자 또한 적지 않나이까? 원하옵건데 세존이시여, 모든 삿된 소견의 무지한 중생을 위하여 그 인연을 말씀하시여 정견을 얻게 하여 그 전도됨을 제거하여 주시옵소서

 

사람들은 생사를 분별하여 생을 좋아하고 죽는 것을 슬퍼하지만, 실은 생사가 하나이며 본래 생사가 없이 여여한 것이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분별하였을 뿐이다. 한 부호가 선애 스님에게 휘호를 부탁했다. 스님께서 "祖死 父死 子死 孫死"라고 써 주었다. 부호가 "좋은 구절을 써 달랬더니, 어찌 저렇게 심한 장난을 하십니까?" 라고 불평하니, 선사께서 "만일 당신의 아들이 당신보다 먼저 죽으면 당신은 얼마나 비통할 것이며, 당신의 손자가 당신 아들 보다 먼저 죽으면 당신네 부자는 또 얼마나 비통하겠소! 당신의 가족이 내가 쓴 순서대로 죽는다면, 그것은 천수를 다 누리는 것이요, 한 가정의 참된 복이 아니겠소?"라고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생과 사에도 기쁨과 복이 깃들어져 있는 것이다. 삿된 소견의 무지한 중생이란, 날날이 좋은 날이요 달달이 좋은 달인데 분별하여 좋은 날과 나쁜 날을 가리어 집착하니 삿된 소견의 무지한 중생이라고 한 것이다.
 
佛言善哉善哉라 善男子야 汝實甚能問於衆生의 生死之事와 殯葬之法하니 汝等諦聽하라 當爲汝說智慧之理와 大道之法하리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갸륵하고 갸륵하도다. 선남자야, 너희가 실로 심오한 중생의 나고 죽는 일과 장례 지내는 법을 능히 묻는구나. 너희들은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지혜로운 이치와 대도의 법을 설하리라.

 

중생들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무명 때문이다. 그런데 무명이란 것이 무슨 실체가 있고 바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중생들 스스로가 뒤바뀐 생각을 함으로써 어두워졌을 뿐이다. 중생들이 뒤바뀐 생각에만 집착하지 않으면 무명은 사라지고 청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무명은 실체가 없고 근본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꿈을 꿀 때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착한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하고 산에도 올라가고 강물에도 들어가는 등 별의별 일들이 많았으나 꿈을 깨고 보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무명 중생들도 이와 같이 생로병사와 성주괴공과 부귀빈천과 희노애락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삼독 오욕에 들어서 한없는 욕망을 채우려고 견디기 어려운 팔풍 재난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렇게 하기를 다겁다생을 통해서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어 항상 분주하고 번거롭고 바삐 날뛰어서 몸과 마음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끝없이 방황하고 있다. 이는 마치 꿈꾸는 사람이 꿈을 꿀 때 어지러히 행동하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다가 꿈을 깨고 나서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과 같이 중생들도 무명에서 깨어나서 원각경지에 들어서 무명하던 때를 돌이켜 보면 모든 지난 일들이 꿈과 같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인생살이를 대몽이라 하여서 누가 이 대몽을 타파하느냐에 따라서 중생과 깨달은 사람으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일체 중생들은 본래로 無生이라서 불생불멸한 것인데 중생들이 망념된 생각으로 생멸이 있는 것 같이 보고 생각하고 집착해서 스스로 생사윤회에 끄달려서 다닐 뿐이다. 이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요 누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승자박인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꿈을 꿈인줄 알고 뒤바뀐 생각을 그릇된 생각인줄 알면 거기에 주착하지 않게 되고 주착하지 않으면 대각한 사람이 된다. 이렇게 되면 뒤바뀐 생각에 끄달려서 생사에 윤전하는 일이 없다. 또 몸도 마음도 적멸상이기 때문에 본래로 생사를 받을 몸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생사의 윤회에서 길이 벗어나서 불생불멸의 대자재처에 들어서 안심입명할 것이다. 이는 지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생사를 없애려고 불도를 닦고 노력해서 비로소 생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에는 뒤바뀐 생각으로 생사가 있는 것 같이 보고 생각하고 집착해 왔는데 불도를 닦고 공부를 하여서 본래로 생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무애보살께서는 본래로 생사가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알지만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와 같이 심오한 진리를 물으니 한없이 기쁘고도 즐거워서 기꺼히 진리를 설하겠노라고 하셨다.
 
夫天地廣大淸하며 日月廣長明하며 時年善善美하야 實無有異니라
대저 천지는 넓고 크게 맑으며 일월은 넓고 길이 밝아서 세월이 갸륵하고 훌륭하고 아름다워 실로 다름이 없느니라.
 
廣이란 넓다는 것이다. 얼마나 넓으며 어떻게 넓다는 것인가? 무변대해는 강물이나 시냇물이나 계곡물이나 깨끗한 물이나 더러운 물을 막론하고 아무런 차별함도 없고 조금도 꺼리낌이 없이 모든 물을 다 받아 들여서 하나같이 정화하고 포용한다. 천지 또한 범부나 외도나 사도나 선신이나 악신이나 마귀나 할 것 없이 육취 중생들을 하나같이 아무런 차별함도 없고 조금도 꺼리낌없이 모두를 다 받아 들여서 그들의 근기에 따라서 거기에 알맞는 온갖 방편과 권도와 갖은 비유를 들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중생지견을 여의고 불지견에 들도록 항상 무정설법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넓음을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넓음이라  도저히 사량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고 또 말로서도 표현할 수 없는 끝이 없는 무한한 넓음을 뜻함이요  넓다는 생각마저도 끊어진 그러한 넓음을 말함이다.

 

大란 크다는 뜻인데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크다는 것인가. 마치 무변허공과도 같이 일월성신과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부나 외도나 사도나 선신이나 악신이나 마귀나 할 것 없이 육취 중생들을 하나같이 아무런 차별함도 없고 조금도 꺼리낌없이 모두를 다 받아 들여서 그들을 포용하는 한량없는 큼인 것이다.

 

淸이란 깨끗함을 말하는데 일체의 분별심과 차별심이 없고 사사로움이 없는 그런 깨끗함인 것이다. 長이란 길다는 것인데 일체의 사사로움이나 삿됨이 없이 공평무사하니 시작없는 시작으로 부터 끝없는 끝까지 영원하다는 뜻이다. 明이란 밝다는 것인데 일월의 운행이 전혀 사사로움이 없이 그리고 일체의 차별없이 만물을 똑같이 비추어주는 그러한 공평무사한 밝음이란 뜻이다.

 

천지일월이 사사로움이 없이 공명정대하니 시간의 흐름에 어떠한 차별도 구별도 없이 항상 언제나 좋고 좋으며 아름다운 것이다. 다만 미한 중생들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집착하여 차별할 따름이다. 하늘도 똑같은 하늘이며, 땅도 똑같은 땅이며, 태양도 똑같은 태양이며, 달도 똑같은 달인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에 차별이 있을 뿐이다. 십오야 밝은 달은 똑같은 것이지만 술 잘먹는 사람은 달을 보고 흥을 돋구고, 시인은 달빛을 보고 시상을 떠올리며 시를 짓는데, 백리 타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달빛을 보고 고향산천과 부모 처자 생각에 눈물을 지는 것이다. 달빛은 똑같이 비추건만 다만 중생들의 인연업보와 그 그릇에 따라 그 달빛을 달리 받을 뿐이다. 雨寶益生 滿虛空 衆生隨器 得利益인 것이다.

 

善男子야 人王菩薩이 甚大慈悲하야 愍念衆生하되 皆如赤子하며 下爲人主하여 作民父母하되 順於俗人하야 敎民俗法하며 遺作曆日하야 頒下天下하야 令知時節이어늘 爲有滿平成收開除之字와 執危破殺之文이라  
선남자야 인왕보살이 매우 자비하여 중생들을 불쌍히 생각하되 모두를 강보에 쌓인 아이처럼 여겨서 중생계에 하강하여 군주가 되어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세속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백성에게 세속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책력을 지어서 천하에 반포하여 시절을 알게 하였다. 만평성수개제라는 글자와 집위파살이라는 문장이 있다.

 

인왕보살이 자신은 이미 중생계를 여의어서면서도 화광동진하여 화하중생하시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속인들의 삶에 순종하여, 세간사를 살아가는 법 가운데서 진리를 가르치고 있음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즉 중생계에서 중생들과 같이 울고 웃으며 싸우고 화해하는 가운데서 중생을 제도하시는 분이 진정한 스승인 것이다. 어느날 길에서 원효대사를 만나 대안대사께서 "원효스님 저기 주막에 가서 목이나 축이고 가시지요" 하였다. 원효대사께서 묵묵부답에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저기가 술집이라는 것을 가르쳐만 주어도 지옥에 떨어진다는 계율에 얽메여서 그럴 것이다고 생각한 대안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원효스님 이러면 계율에 걸리고 저렇게 하면 삿된 것이라고 한다면 중생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으며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면 스님은 부처만 상대하시고 중생은 제도하지 않으시려고 하십니까. 부처는 스님께서 제도하지 않아도 이미 제도되신 분들입니다." 이 말에 원효대사께서 계율에 얽매이어 진정으로 중생제도를 하지 못하고 있었던 자신을 반성하고 주막에 가서 목을 축였다고 한다. 인왕보살께서 세속법을 가르치면서 시절을 알도록 역법을 제정하여 반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생제도의 방편으로 중생계의 삶을 풍족하게 하고, 화평하게 하며, 성취시키고, 수확을 거두고, 개화시키며, 다스리는 글자와 위태로운 것을 잡아 살을 없애는 문장도 만들었다.  

 

愚人은 依字信用하야 無不免其凶禍하며 又使邪師로 壓鎭說是道非하야  求邪神하며 拜餓鬼하야 却招殃自受苦하나니 如是人輩는 反天時하고 逆地理하야 背日月之光明하고 常投暗室하며 違正道之廣路하야 恒尋邪逕이라 顚倒之甚也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글자에 의지하여 흉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믿으며, 또는 삿된 스승으로 하여 옳고 그름을 말함을 누르고 부질없이 삿된 신을 구하며, 아귀에게 절을 함으로써 도리어 재앙을 초래하여 스스로 고통을 받나니라. 이와 같은 사람들은 천시를 위반하고 지리를 거역하며 일월의 광명을 등지고 항상 어두운 집에 빠져 있으며 정도의 넓은 길을 어기고 항상 삿된 길을 찾는 것이니 전도됨이 심하니라.
 
진리란 문자를 여의어서도 아니 되지만 문자에 얽매여서도 아니 되는 법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를 믿고 의지하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은 세존께서 가르치신 경전을 통해서 진리의 길에 들어가지만 문자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도 같이 진리를 가리키는 안내사와 방편문에 지나지 않지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방편사에 지나지 않는 문자를 믿고 의지하여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하게 하고 문자를 절대시하니, 스스로 재앙을 초래하여 고충을 받는 형국이라 실로 가련하고 불쌍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사람은 천시와 지리와 일월광명을 등진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천지는 광대청하며 일월은 광장명하며 시년이 선선미하야 실로 차별이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문자에 얽메여서 차별상을 지으니 천시와 지리에 어긋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체에 분별하여 주착하면 고해중생계이며, 일체 분별심과 차별상을 짓지 않고 무주무착하면 무애자재하는 해탈경지인 것이다. 一無所聞하고 無所得法한 경지에서는 신심이 佛身이며 法心인데 삿된 소견에서 무지하여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외부에서 절대자를 찾으니 진실로 불쌍하고 가련하지 않을 수 없다. 精神一到하면 何事不成이라. 우리 스스로가 가장 맑고 총명한 신(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부정하여 외부의 거짓된 신을 믿고 찬양하닌 진리에서는 점점 멀어지게 되어 전도됨이 극심하여 구제불능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이 헤알릴 수 없이 많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善男子야 産時에 讀誦此經三遍하면 兒則易生하고 甚大吉利하며 聰明利智하고 福德具足하며 而不中夭니라 死時에 讀誦此經三遍하면 一無妨害하고 得福無量하리라
선남자야, 해산할 때에 이 경을 세 번만 독송하면 아이가 쉽게 나오고 크게 길하고 이익되어서 총명하고 영리하고 지혜롭고 복덕이 구족하며 중간에 요사하지 않느니라. 죽을 때에도 이 경을 세 번만 독송하면 하나도 방해됨이 없고 한량없는 복을 얻으리라.
 
출산할 때나 죽을 때 본 경을 독송하면 얻게 되는 위신력을 설명하고 있다.
 
善男子야 日日好日이며 月月好月이며 年年好年이며 實無間隔이니 但辦卽須殯葬하고 殯葬之日에 讀誦此經七遍하면 甚大吉利하야 獲福無量하고 門榮人貴하고 延年益壽하며 命終之日에  得成聖하리라
선남자야, 나날이 좋은 날이며 다달이 좋은 달이며 해마다 좋은 해니 실로 간격이 없느니라. 다만 판단해서 곧 장사를 지내고 장례를 지내는 날에 이 경을 일곱 번만 독송하면 크게 길하고 이익되어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이며 문호가 영화롭고 사람이 귀하게 되며 장수하고 목숨이 다할 때에는 아울러 성인이 될 것이니라.
 
천지가 광대청하여 한점의 사사로움이나 삿됨이 없고 일월이 광장명하여 공평무사하니 실로 좋지 않은 곳이 없고 좋지 않은 때가 없으니, 삼천대천세계가 장엄 불국토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 순간의 간격도 없이 좋은 때인 것이니, 스스로 판단하여 장례를 치르면서 본 경을 무심경지에서 독송하여 이 경의 진리에 따라 영가 중생들을 천도하고 뭇 중생들을 제도한다면 한량없는 유루복을 얻을 뿐만 아니라, 무루공덕도 얻게 되어 무아법에 통달하여 불도를 이룰 것이다. 즉 견성성불하게 된다는 말이다.
 
善男子야 殯葬之地를 莫問東西南北安穩之處니 人之愛樂은 鬼神愛樂이라 卽讀此經三遍하고 便以修營하며 安置墓田하면 永無災障하고 家富人興하야 甚大吉利하리라
선남자야, 장례를 지내는 곳에 동서남북의 안온한 자리를 묻지 말라. 사람이 애착하고 즐거워하면 귀신도 애착하고 즐거워하나니라. 이 경을 세 번만 읽고 문득 수선하고 건축하여 묘를 안치하면 영원히 재앙이 없어지고 집이 부하며 사람이 흥하여 크게 길리하리라.
 
동서남북의 안온한 자리를 묻지 말라고 하였는데 본래부터 동서남북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편의상 차별관에 입각하여 동서남북을 구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진리에는 실다운 동서남북이 없는 것이다. 무슨 기점이 있어야 그 기점을 기준으로 삼아서 동과 서, 남과 북을 구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 우주는 텅비어서 안과 밖이 없으며, 끝간데가 없어서 어느 기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본래로 동서남북이 없는데 다만 중생들의 전도된 마음에서 동서남북을 구분지어 좋고 나쁘고를 차별하는 것이다.


최근에 좁은 땅덩어리에서 명당을 찾아서 호화분묘하는 것이 사회문제가 되어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대체로 명당을 찾는 경우는 묘자리 하나 잘 써서 자손들이 잘 되기 위해서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호화분묘를 하는 것은 출세한 사람이 자기를 과시하고도 싶고 더욱 잘되기 위한 과욕의 표현이라고도 보고 싶다. 그럼 과연 묘자리 하나 잘 써서, 호화 분묘함으로써 자손들이 출세하게 되는 것일까? 풍수란 하늘의 뜻을 땅이 집행하는 법칙을 설명한 것이다. 땅의 도리는 인륜에 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풍수의 요체는 자연스럽게 풍수의 윤리성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 한 풍수가가 있어 쉽게 출세하기 위하여 자기 부모의 목을 베어 가지고 다니면서 명당을 보면 묻곤 하였는데, 출세되지 않아서 추적하여 보면, 항상 자기 부모 목을 묻을 때마다 지나가는 길손이 그 모습을 몰래 보고 그 자리가 명당임을 알고 풍수가의 아버지 목을 다른 곳에 묻어버리고 자기 부모님의 시신을 모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 풍수가는 평생을 자기 부모목을 가지고 다니면서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고 한다. 어떻게 쉽게 무위도식하면서 자기가 출세하기 위하여 자기 부모의 목을 베어서 가지고 다니는 사람한데 명당이 돌아갈 수 있겠는가! 되지 않을 법이다.


마음만 바로 가지면 자기도 모르게 묻은 곳마다 명당이 되는 법인데, 나쁜 마음을 먹으면 자기가 아무리 풍수를 잘 본다고 하더라도 그 명당이 자기 것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즉, 孝子孝婦受福生天이요, 不孝子不免地獄苦인 법이다. 그리고 人之愛樂은 鬼神愛樂이라. 죽은 사람들의 생태도 산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사람도 자기 그릇에 따라 궁궐같은 집에 혼자 살게 되면 불안하여 지낼 수가 없으나, 조그만 집에서는 안심하고 잘 지낼 수 있는가 하면, 조그만 집에는 갑갑해서 살 수 없으나, 큰 집이 좋은 사람이 있듯이 귀신도 자기 그릇에 따라 맞는 자리가 있는 법이다. 자기에게 맞는 자리가 명당자리인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가난한 집에 태어나도 자기 분수에 따라 천하의 갑부가 될 수 있고, 아무리 부잣집에 태어나 많은 재산을 상속받는다고 하여도 자기 분수에 따라 하루 아침에 알거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분수와 후손들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명당도 변하고 땅의 기운도 바뀌는 것이다.


또 출세하면 자기 부모의 묘를 호화판으로 장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物有本末하고 事有終始라.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순서를 무시하고 자기 부모만을 호화판으로 하니, 웃대의 선조들이 화를 낼 것은 뻔한 이치요, 편안하게 땅속에 누워있는데 아무 예고도 없이 무단으로 강제철거하여 새 집을 지으니, 누워있던 귀신도 놀라서 병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돈을 좀 벌었다고 묘를 강제철거시켜 호화분묘를 하거나 강제이주시켜 명당에 옮긴 후, 알 수 없는 화를 초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 없이 들려오는 것이다.

 

옛날 어사 박문수가 바람이 매우 거세게 부는 겨울날 경주 어느 고을을 지나게 되었다. 그 때 마침 어느 중늙은이가 혼자서 묘자리를 파고 있었다. 어사 박문수도 팔도를 다니면서 들은 풍월도 있고 풍수에는 약간의 견해도 있었던지라, 묘 주변의 풍수를 한 번 살펴보았다. 묘자리를 살펴 본 박문수는 깜짝 놀랐다. 완전히 팔풍받이에 묘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문수가 별 일도 없어 소일 삼아 중늙은이 곁에 가서 말을 걸자, 중늙은이가 자기 혼자서는 힘에 부치니 관을 옮기는데 도와달라면서 도움을 청하였다. 팔풍받이에 묘를 쓰면서 혼자서 일을 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박문수가 묘 일이 끝날 때까지 도와 주고 나서는 누가 이 곳에 묘를 쓰라고 하였는지 물었다. 중늙은이가 그 고을의 지관이 시켜서 하였다면서 지관의 집을 가르켜 주었다. 박문수가 그 지관을 혼내어 주려고 찾아가서는 물었다. 당신이 소위 지관이라고 하면서 저 집안과 무슨 원한이 있어서 바로 팔풍받이에 묘를 쓰게 하였냐고 물었다. 지관이 말하기를 "당신 선무당같은 소리하지 마시오. 그 자리는 보통 사람이 묘를 쓰면 팔풍받이로써 자자손손 해를 당하지만, 묘를 쓸 때 어사또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천하의 명당으로 바뀌는 자리요." 하였다. 박문수가 혼자서 생각하기를 "천하의 명인이로다. 거기 그 시각에 내가 지나가다가 도와줄 것까지 알았다니. 그리고 명당이란 고정불변한 지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바뀌는 것이구나. 역시 천지지간에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옛 말이 거짓은 아니구나." 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사람이나 귀신들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장소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것은 아니니, 명당을 써서 자신의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노력하는 가운데 정성을 다한다는 자세를 갖는 주체적인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삶의 주체는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백보 양보해서 명당이 있다고 하더라도, 요즘같이 변화무상한 세상에 언제 地氣가 끊어져 버릴지 알 수 없고 큰 도로가 나고 저수지가 만들어지고 홍수가 나고 해서 명당도 변화무상하게 변하여 가는 것이니, 영원히 그 명당만을 믿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병법에서도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고 하여 하늘의 때와 지형지리의 형국보다도 인화단결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장례치를 때 본 경을 세 번 독송하라는 것은 죽은 사람도 본질적으로 우리와 동일한 생명체로서, 언제가는 제도받아 불도를 성취하여야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은 영가에게도 불법의 진수를 설명하여 제도해 주라는 뜻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생명체가 죽으면, 산 생명체를 교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 생명체에 대한 교화의 한 방편으로 천도법문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죽은 생명도, 언젠가는 윤회하여 산 생명체로 탄생할 것이기 때문에, 산 생명과 마찬가지로 중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석가세존을 가리켜 삼계 대도사, 사생 자부, 인천의 스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교에서 사십구제를 지내고, 죽은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죽은 자에 대한 애틋한 연민의 정과 사모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들이 살아 생전 이루지 못한 원한과 집착 등의 미혹한 전도된 마음을 위로하여 바로 잡아주고 교화시켜서 편안한 마음으로 보다 나은 길을 찾아가도록 하고자 하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미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귀신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산 자와 교감하므로 얼마만큼 정성을 기울여 위로하여 주고 추모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爾時에 世尊이 欲重宣此義하사 而說偈言하사대 營生善善日이며 休殯好好時라 生死讀誦經하면 甚得大吉利니라 月月善明月이요 年年大好年이라 讀經卽殯葬하면 榮華萬代昌이니라
이 때에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삶을 영위하는데 날마다 좋은 날이며 죽어 빈장함에 때마다 좋은 때라. 나고 죽음에 이 경을 독송하면 크게 길리하리라. 다달이 좋고 밝은 달이요 해마다 좋은 해니 이 경을 읽고 장사 지내면 영화가 만대에 창성하리라.
 
앞에서 거듭해서 설명했지만 천지가 광대청하여 한 점의 사사로움이나 삿됨이 없고 일월이 광장명하여 공평무사하니 실로 좋지 않은 곳이 없고 좋지 않은 때가 없으니, 한 순간의 간격도 없이 좋은 때라고 하였다. 다만 중생심에서 분별하고 탐착하니 좋고 나쁘고의 차별상이 있는 것이다. 만약 무심경지에서 본 경을 독송하여 본 경의 진리를 깨우쳐 안다면 일체에 무주무착하니 완전한 무애경지가 될 것이고 무생법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爾時衆中에 七萬七千人이 聞佛所說하고 心開意解하야 捨邪歸正하며 得佛法分하고 永斷疑惑하고 皆發阿 多羅三 三菩提心하니라
이 때에 대중 가운데 칠만칠천인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리어 삿됨을 버리고 바른데 돌아왔으며 불법의 분을 얻어서 의혹을 영원히 끊고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느니라.
 
이러한 말씀을 누차 들으니 이제까지 미혹하여 분별하고 차별하던 탐착심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일체를 올바르게 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아상으로 굳게 닫쳐 있던 마음이 열리어지니, 진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무심경지에 법을 설하니 칠만칠천인이 一無所聞하고 無所得法한 경지에 도달하여 이제까지 잘못되었던 전도심을 여의게 되니 정법안장에 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불법의 마땅한 본분을 얻어서 의혹이 영원히 끊어지게 되니 모두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9. 결혼에 대하여

 

無碍菩薩이 復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一切凡夫가 皆以婚 로 爲親호되 先問相宜하고 後取吉日하야 然始成親이나 成親之後에 富貴偕老者少하고 貧窮生離死別者多하니 一種信邪로 如何而有差別이닛고 唯願世尊이시여 爲決衆疑하소서
무애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어, 일체 범부들은 모든 남녀들이 혼인함으로써 부부가 되어 화친하게 되지만 먼저 서로가 혼인하여도 좋은지를 물은 다음에 길일을 택해서 결혼함으로써 비로소 부부가 되어 화친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다음에 부귀하게 늙는 자는 적고 빈궁하고 살아서 이별하고 죽어서 이별하는 자가 많나이다. 일종의 삿된 믿음으로 어찌하여 이러한 차별이 있나이까? 원컨대 세존께서는 대중의 의심을 해결해 주시옵소서.
 
일종의 삿된 믿음이라는 것은 본래로 부귀빈천과 생노병사와 밉고 곱고가 없는데, 굳이 이러한 것들이 참으로 있는 것 같이 묻으니 삿된 믿음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또한 이런 행복과 불행이 모두 자기자신이 저질런 업보인데, 즉 자업자득이고 자승자박인 것을 마치 외부의 다른 원인 때문에 그러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듯이 생각하니 삿된 믿음인 것이다. 무애보살께서는 이러한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인 줄 알면서도 화광동진하여 하화중생을 하기 위한 훌륭한 방편으로 거짓되게 물은 것이다. 이는 일체가 환상이며 몸도 마음도 중생심으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중생제도를 위하여 환된 중생지혜로써 또 환된 몸과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환된 무명을 여의는 수행을 한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佛言하사되 善男子야 汝等諦聽하라 當爲汝說하리라 夫天陽地陰하고 月陰日陽하며 水陰火陽하며 男陽女陰이니 天地氣合하야 一切草木이 生焉하고 日月이 交運하야 四時八節이 明焉하고 水火相承하야 一切萬物이 熟焉하고 男女允諧하야 子孫이 興焉하나니 皆是天地常道라 自然之理며 世諦之法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희들은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희를 위하여 설법하리라. 대저 하늘은 양이요 땅은 음이며, 해는 양이요 달은 음이며, 불은 양이요 물은 음이며,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니,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합하여 온갖 초목이 생기고 일월이 서로 교운하여 사시와 팔절이 분명하고 물과 불이 서로 서로 이어서 일체 만물이 성숙하며 남녀가 서로 화해서 자손이 생기나니 이는 다 천지의 떳떳한 도며 자연의 이치며 세상의 법이니라.


음양의 조화와 화합을 통하여 일체가 번성하고 창성하여지는 법이다. 이 엄연한 진리를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는가!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고, 도에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만 못한 법이다. 천지의 도리와 세간사의 진리를 설하였으니 깊이 새겨두길 바란다.
 
善男子야 愚人은 無智하야 信其邪師하며 卜問望吉하야 而不修善하고 造種種惡業이라가 命終之後에 復得人身者는 如指甲上土하고 墮於地獄커나 作餓鬼蓄生者는 如大地土니라
선남자야,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가 없어서 삿된 선생을 믿어서 점을 치고 길함을 바라면서 착한 것은 닦지 않고 가지가지 악업을 짓다가 목숨이 마친 뒤에 다시 사람의 몸을 얻는 자는 손톱 위에 붙은 흙과 같고 지옥에 떨어져서 아귀와 축생의 몸을 받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으니라.
 
살아가는 가운데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에 부딪히면 기적이나 신비라는 말로 설명하면서, 그 내면에 숨겨져 있는 인과율 등의 법칙성을 찾아보기 위한 진지한 사색이 결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한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바로 나의 가장 긴요한 문제로 부각되었을 때, 가령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난을 당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고통을 받을 경우, 정상적인 마음가짐으로 "운이 없다"는 팔자소관이나 "천벌 받았다"는 절대적인 존재의 알 수 없는 의지로 돌려버린다면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을까? 이 밖에도 불합리해 보이는 것이 수 없이 많은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혹자는 부자집에, 건강하게 태어나 편안하게 부귀영화를 누리는가 하면, 혹자는 빈곤한 집안에 몸도 허약하게 혹은 불구로 태어나 형극의 아픈 삶을 살아가는가 하면, 혹자는 머리가 영민하여 일생을 타인의 존경을 받아가면서 살아가는가 하면 혹자는 우둔하여 항상 남의 비웃음을 받아가면서 살아간다.


만약에 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불편부당하고 평등하여야만 할 것이고, 모든 것을 창조한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있다면 모든 생명을 강보에 싸인 어린애를 돌보듯 모두 다 한결같이 사랑하여야만 하는 것인데, 왜 이러한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일까? 하여튼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곤경에 처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가를 모르고, 또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결단을 내려야 할 경우 무엇가에 의지하고 싶은 감정이 우러나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 같다. 이러한 감정때문에 종종 자신의 인생에 결정되어진 운명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운명을 점을 쳐서 점괘에 따라 판단하고 결정하는 등, 자신이 삶의 주체가 아니고 결정된 틀에 맞추어 살아가는 존재로 생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동양에 한정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동양의 정신세계를 미신이라고 질책하고 동양의 정신세계를 타파하고자 하는 기독교에서조차 곳곳에서 운명론자적인 말들이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적으로 말해서 전생의 업보에 의해서던지, 기독교적으로 말해서 신의 뜻을 이루려하심이던 간에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져 있다면 점을 봐서 인생의 대사를 결정하는데 조언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천지이치를 깨우친 사람은 점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공자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들이 미혹하기 때문에 점을 치는 듯하나, 운명이 결정되어 변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인생은 정해진 각본에 따라 수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라면 조금은 서글퍼진다. 그러나 동양의 점철학의 근본은  天有不測風雨요 人有朝夕禍福이며 萬相이 不如心相인 것이다. 즉 하늘에는 예측할 수 없는 비와 바람이 있고 사람에게는 아침 저녁으로 화와 복이 변화무상하게 닥치는 것으로, 관상, 수상, 사주팔자 등 모든 상이 마음 씀씀이보다 못하는 것이니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올바르게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인과응보의 엄격한 법칙성을 말하고 있는 불교에서도 無有定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즉 일정하게 정하여진 법이 없는 것을 최고최상의 지혜라고 말한다. 비록 우리 인생이 인연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할지라도 수 많은 생을 윤회하여 살아오는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인연을 맺어 왔기 때문에 어느 인연이 닥칠까는 지금 현재의 나의 마음 상태와 행동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것이며, 또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전생의 업장도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생의 업보에 얽매이지 말고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주체적인 삶을 살도록 설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자기자신이 수동적인 삶을 산다면, 전생의 업에 의하여 주어진 삶을 살게 되겠지만,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얼마든지 주체적으로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니, 萬相이 不如心相이라는 말을 깊이 새겨서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행수도하여 진리를 깨우치려고는 하지 않고 점을 쳐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지옥고를 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善男子야 復得人身하야 正信修善者는 如指甲上土하고 信邪造惡業者는 如大地土니라
선남자야, 다시 사람의 몸을 얻어서 바로 믿고 선을 닦는 자는 손톱 위에 붙은 흙과 같고 삿됨을 믿어 악업을 짓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으니라.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이며, 二乘難免 生死海대 更待何時作佛身인 것이다. 사람의 몸을 받기도 어려우며, 사람의 몸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바른 진리를 만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것이다. 사리가 이러하니, 지금 이 글을 보는 순간이 바른 진리를 접하고 있는 것이니, 부디 이 글을 믿고 수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善男子야 欲結婚親인댄 莫問水火相剋과 胞胎相壓과 年命不同하고 唯看祿命書하야 卽知福德多少하야 以爲眷屬하고 呼迎之日에 卽讀此經三遍하야 而以成禮하면 此乃善善相仍하고 明明相屬하야 門高人貴하고 子孫興盛하며 聰明利智하고 多才多藝하며 孝敬相承하고 甚大吉利하야 而不中夭하며 福德具足하고 皆成佛道하리라
선남자야, 혼인을 하려 할 때에도 수화상극과 포태상압과 나이와 명이 같지 않음을 묻지 말고 오직 녹명서를 보아서 곧 복덕의 많고 적음을 알아서 권속을 삼아라. 불러 맞아 들이는 날에는 이 경을 세 번 읽어서 성례하게 되면 옳고 좋은 일이 서로 잇고 밝음과 밝음이 서로 붙어서 문호가 높아지고 사람이 귀하게 되며 자손이 흥성하고 총명하고 지혜가 영리하여 재주와 예술이 많으며 효도와 공경이 서로 잇고 크게 길리해서 중도에 요사치 아니하며 복덕이 구족해서 모두 불도를 이루리라.
 
혼례를 할 때에도 본 경을 무심경지에서 읽어 진리를 설한다면 한없는 복덕을 누리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복이 어디 먼 별천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깨달아 순리대로 사는데 있으며, 더욱이 진리를 깨우쳐 일체처 일체시에 무주무착하는 무심경지에 들었다면 완전히 무상법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時에 有八菩薩하니 承佛威信하야 得大總持하며 常處人間하야 和光同塵하고 破邪立正하며 度四生處八解호되 而不自異하니 其名曰跋陀羅菩薩漏盡和며 羅隣渴菩薩漏盡和며  目兜菩薩漏盡和며 那羅達菩薩漏盡和며 須彌深菩薩漏盡和며 因抵達菩薩漏盡和며 和輪調菩薩漏盡和며 無緣觀菩薩漏盡和니라
이 때에 팔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입어 대총지를 얻으며 항상 인간에 처해서 화광동진하면 파사입정하여 사생을 제도하여 팔해에 처하게 하되 스스로 달리하지 않았나니라. 그 이름이 발타라보살누진화며 나린갈보살누진화며 교목도보살누진화며 나라달보살누진화며 수미심보살누진화며 인저달보살누진화며 화륜조보살누진화며 무연관보살누진화니라.
 
총지란 총관장이란 뜻으로, 무위법과 일체 유위법을 총관장해서 유지한다는 뜻이다. 대총지란 영지와 보리와 열반과 일체의 진리와 모든 중생심과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권속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 아니라 일체의 바라밀행과 대자대비한 마음과 모든 덕과 윤리를 갖추어 온누리를 꿰뚫어서 알고 무슨 일이나 못하는 일이 없는 전지전능한 신령스러운 지혜의 구족처이라는 말이다. 팔보살께서는 항상 이와 같은 경지에 머무름없이 머무시니 대총지를 얻었다고 한 것이다. 이들 보살께서는 이러한 무애자재처에 있으면서 화광동진 파사입정하여 사생의 중생들을 제도하여 고해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시면서도 스스로는 사생의 중생들과 일체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세존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내가 비었음을 확연하게 알면 나를 헐뜯을 이도 없으며, 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설법을 하는 사람은 아직 내라는 생각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즉 팔보살께서 내라는 생각을 완전히 여읜 무심경지에서 하화중생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是八菩薩이 俱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我等이 於諸佛所에 受得陀羅尼神呪하오니 而今說之하야 擁護受持讀誦天地八陽經者하야 永無恐怖케하며 使一切不善之物로 不得侵損讀經法師니이다
이 팔보살이 동시에 부처님께 말씀하시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다라니신주를 받아서 얻었는데 이제 설명하여 천지팔양경을 수지독송하는 자를 옹호해서 공포가 영원히 없게 하겠으며 일체의 착하지 않은 것들이 독경 법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겠나이다.
 
다라니란 총지와도 같은 뜻으로, 무위법과 일체 유위법을 총관장해서 유지한다는 말이다. 다라니신주란 영지와 보리와 열반과 일체의 진리와 모든 중생심과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권속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 아니라 일체의 바라밀행과 대자대비한 마음과 모든 덕과 윤리를 갖추어 온누리를 꿰뚫어서 알고 무슨 일이나 못하는 일이 없는 전지전능한 신령스럽고도 지혜로운 주문이라는 뜻이다.
 
卽於佛前에 而說呪曰

그리고 곧 부처님 앞에서 말했다.

 

阿去尼 尼去尼 阿毘羅 曼隸 曼多隸

아거니 니거니 아비라 만예 만다예

 

世尊이시어 若有不善子가 欲來惱法師라도 聞我說此呪하면 頭破作七分하야 如阿梨樹枝니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착하지 못한 자가 쫓아와서 법사를 괴롭히려 할때에 제가 말한 이 주문을 들으면 머리를 일곱 쪽으로 부수어 아리수 나무가지와 같이 하겠나이다.
 
이 다라니신주의 위신력과 가피력을 설명하고 있다.

 

10. 팔양경 명칭에 대하여

 

爾時에 無邊身菩薩이 卽從座起하야 前白佛言하사대 世尊이시여 云何名爲天地八陽經이닛고 惟願世尊은 爲諸聽衆하사 解說其義하사 令得覺悟하야 速達心本하고 入佛知見하야 永斷疑悔케하소서佛言하사대 善哉善哉라 善男子야 汝等은 諦聽하라 吾今爲汝하야 分別解說天地八陽之經하리라
이 때에 무변신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께 사뢰었다.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이름을 천지팔양경이라 하나이까? 원하옵건대 세존께서는 모든 청중을 위하여 그 뜻을 해설하여서 깨달음을 얻게 하여 속히 마음의 근본을 통달하고 불지견에 들어 의심과 뉘우침을 영원히 끊게 하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갸륵하고 갸륵하도다. 선남자야, 너희들은 자세히 들으라.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해 천지팔양경을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무변이란 한없이 넓고 다함이 없어 안과 밖이 없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무아법에 통달하여 일체의 분별과 차별상이 없으며, 아무런 주착함이 없기 때문에 한계가 없고 텅비어서 무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무주무착의 경지에서 하화중생을 위한 방편으로 세존께 물은 것이다. 그리고 세존께서 이 경의 뜻을 설할 때도 완전히 무심경지에서 설할 것이니, 청법대중들도 무심경지에서 세존의 설법을 듣는다면 견성성불하여 의심과 뉘우침을 영원히 여의게 된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설법을 허락하시며 경청할 것을 당부하시었다.
 
天者는 陽也요 地者는 陰也며 八者는 分別也요 陽者는 明解也니 明解大乘無爲之理하야 了能分別八識因緣이 空無所得이니라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며 팔은 분별이고 양은 바른 헤아림이니, 대승의 무위의 이치를 바르게 헤아려 알아서 팔식인연이 공하여 얻을 바가 없음을 분별하여 능히 요달한다는 뜻이니라.
 
천지의 조화란 음양의 조화이며, 음양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교운하는 가운데 온갖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음양의 조화와 변화를 겪어가면서 사람들은 가지가지 분별하고 차별상을 지어서 자기나름의 판단과 해석을 하여 온갖 집착과 탐착심을 일으키게 되니 별의별 일들이 펼쳐져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이 모든 것이 환상이요 꿈노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구나. 내가 이제까지 환상에 취해서 살아왔구나. 이런 생각에 한 생각을 돌이키니 대승의 무위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 즉 환된 몸과 마음으로 환된 중생지견을 가지고 환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문득 온갖 환을 여의고 견성성불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니 팔식 인연이 공하여 얻을 바가 없음을 요달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실체가 있어야 얻을 것이 있는데 일체가 환된 망상심에서 스스로 집착하여 만들 것이기 때문에 집착심만 버리고 나면 환상은 스스로 사라져서 없는 것이다. 그래서 팔식 인연이 공하여 얻을 바가 없는 것이다. 즉 꿈속에서는 온갖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꿈을 깨고 나면 아무런 일이 없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마치 눈병 있는 사람이 공중에 꽃이 있는 것 같이 보고 또 하늘에 다른 달이 있는 것 같이 보는 것 같다고 하겠다. 꽃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서 꽃밭에 꽃이 있는 것이지 공중에 꽃이 있을 수가 없다. 또 공중에는 태양도 하나요 달도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다른 달이 있는 것 같이 보는 것은 무명 때문이다. 공중의 헛꽃은 본래로 어디에서 오고 또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비록 허공에서 헛꽃으로 보이는 많은 헛꽃들이 허공에서 없어진다고 하여도 없어진 곳을 정해서 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눈병 때문에 본래로 없는 헛꽃을 있는 것 같이 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로 그런 꽃이 생기지 않았으니 없어질 것도 없는데 하물며 없어진 곳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눈병만 없으면 다른 달도 헛꽃도 없을 것이니 모든 허물은 눈병, 다시 말해서 중생들의 뒤바뀐 생각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팔식인연이 허공에 있는 헛꽃에 지나지 않아서 진실로 얻을 바가 없는 것이다.
 
又云八識은 爲經하고 陽明은 爲緯니 經緯相投하야 以成經敎라 故로 名八陽經이니라
또 팔식이 날이 되고 양명이 씨가 되어 경과 위가 서로 맺어 경교를 이룸으로 팔양경이라고 이름하느니라.

 

팔식으로 일체를 분별하고 차별하면서 중생지견의 알음알이로 헤아려서 해석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온갖 진리가 다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모두가 진공묘용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비유하면, 깨끗한 여의주에서 오색 찬란한 빛이 일어나고 비추는 방향에 따라서 각각 다른 빛이 일어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를 보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깨끗하고 맑은 구슬이 있기에 오색은 구슬에 비치는 광선의 반사 작용으로 비치게 되는 영상인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그릇 알고 마치 맑은 구슬안에 실제로 오색이 들어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자성의 청정한 성품이 있음으로 해서 그의 그림자격으로 있게 되는 환된 마음이 각각 업과 연에 따라서 천차만별한 몸을 나투며, 부귀빈천과 증애은원과 희노애락 등 각각 다른 마음을 나투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은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청정한 자성안에 존재하는 것인 줄 알고 변화무상하고 유동적인 것이 원각경지인 줄 그릇되게 알아서 자기의 환신과 환심이 곧 자성의 모습으로 착각하여 거짓되게 집착하고 있다. 이러한 천변만화하는 작용에 집착하지 않으며, 천변만화하는 작용 그대로 훌륭한 가르침인 것이며 이러한 일체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바로 팔양경인 것이다.
 
八者는 是八識이니 六根이 是六識이요 含藏識과 阿賴耶識이 是名八識이니라 明了分別八識根源이 空無所有하면
팔은 팔식이니 육근인 육식과 함장식과 아뢰야식을 이름하여 팔식이라 하느니라. 팔식의 근원이 공하여 있는 바가 없음을 명확하게 분별하여 요달하면 
 
萬法은 唯心이요 恰似夢인 것이다. 즉 일체가 팔식 인연으로 일어나는 유심조작인 것으로 꿈과 같고 환상과도 같아서 실체가 없는 것이다. 또 화엄경에서 말하기를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惟心造라 했다. 만약 사람이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삼계와 육취와 증애 선악 생사 기몰 동정과 삼라만상이 중생심으로서 모두 만들어낸 것이지, 본래로 그런 것이 없고 모두가 공상이요 적멸상이다는 진리를 직접 체험을 통하여 깨닫아서 알아야 하며 그렇게 알 것 같으면 곧 부처라는 것이다. 만약 중생들이 일체 유위법이 적멸상이라고 인정한다면 생사 기몰 동정이 있다고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팔식의 근원이 공하여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卽知兩眼은 是光明天이니 光明天中에 卽現日月光明世尊이며 兩耳는 是聲聞天이니 聲聞天中에 卽現無量聲如來며 兩鼻는 是佛香天이니 佛香天中에 卽現香積如來며 口舌은 是法味天이니 法味天中에 卽現法喜如來며 身은 是盧舍那天이니 盧舍那天中에 卽現成就盧舍那佛과 盧舍那鏡像佛과 盧舍那光明佛이며
두 눈이 곧 광명천이니 광명천중에 곧 일월광명세존이 나타난 것이며, 두귀는 성문천이니 성문천중에 곧 무량성여래가 나타난 것이며, 코는 불향천이니 불향천중에 곧 향적여래가 나타난 것이며, 입과 혀는 법미천이니 법미천중에 곧 법희여래가 나타난 것이며, 몸은 노사나천이니 노사나천중에 곧 노사나불과 노사나경상불과 노사나광명불을 성취하여 나타난 것이며,


일체 만법이 적멸상이라고 하는 경지에서 일체처 일체시에 집착하지 않는 경계이니 육근이 텅비어서 한량이 없는 무변신의 경지가 되는 것이며 육근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온갖 작용들이 부처의 경계와 일체 차별이 없는 무애작용이 되는 것이다. 즉, 一無所聞하고 無所得法한 경지에서는 身心 그 자체가 佛身과 法心이 되는 경계이니 팔식작용 그 자체가 무주무착한 여래의 경계인 것이다. 다음의 사항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하나하나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한 것이다. 팔식근원이 空無所有한 경지에서 두 눈이 곧 광명천이며, 두 눈의 작용은 광명천중에 곧 일월광명세존이 나타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무위행인 것이다. 여기서 "현"이라고 하였으니 문자에 얽매여서 마치 무슨 모습이 있어서 모습이 나타난 것 같이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아무런 모습없는 모습이 일월광명세존이기 때문에 나타날려고 하여도 나타날 것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현"이란 두눈의 작용이 일월광명세존과 같은 무위행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뜻이지 결코 무슨 모습이나 자취가 나타났다는 것은 아니다. 본래로 없었던 일월광명세존이 새로 생겨서 나타난 것이 아니고, 다만 일월광명세존의 무위행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空無所有한 경지에서 비로소 일월광명세존의 무위행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두 귀의 경계가 곧 성문천이며 두 귀의 작용은 성문천중에 곧 무량성여래가 나타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무위작용인 것이다. 코의 경계는 곧 불향천이며 코의 작용은 불향천중에 곧 향적여래가 나타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무위작용인 것이다. 입과 혀의 경계는 곧 법미천이니 입과 혀의 작용은 법미천중에 곧 법희여래가 나타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무위작용인 것이다. 몸의 경계는 곧 노사나천이니 몸의 작용은 노사나천중에 곧 노사나불과 노사나경상불과 노사나광명불을 성취하여 나타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무위작용인 것이다.


意는 是無分別天이니 無分別天中에 卽現不動如來大光明佛이며 心은 是法界天이니 法界天中에 卽現空王如來며 含藏識天에 演出阿那含經과 大般涅槃經이며 阿賴耶識天에 演出大智度論經과 瑜伽論經이니라
뜻은 무분별천이니 무분별천중에 곧 부동여래대광명불이 나타난 것이며, 마음은 법계천이니 법계천중에 곧 공왕여래가 나타난 것이며, 함장식천에 아나함경과 대반열반경을 연출하며 아뢰야식천에 대지도론경과 유가론경을 연출한 것이니라.
 
뜻의 경계는 곧 무분별천이며 뜻의 작용은 무분별천중에 곧 부동여래대광명불이 나타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무위작용인 것이다. 중생심의 경계는 곧 법계천이며 중생심의 작용은 법계천중에 곧 공왕여래가 나타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무위작용인 것이다. 중생심의 작용도 집착하지 않는 무주무착의 경지에서 한다면 무위행이 되겠지만, 중생견지에서 분별하고 집착한다면 유위행이 되는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칠식의 중생지견에서 작용한다면 칠식의 분별작용인 함장식천에서는 소승적인 아나함경과 대반열반경을 연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팔식의 분별작용인 아뢰야식천에서는 대지도론경과 유가론경을 연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팔만대장경과 역대 선지식들의 백천의 어록과 천경만론과 금언옥설이 모두 원각으로 인도하는 안내부요 방편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善男子야 佛卽是法이며 法卽是佛이니 合爲一相하야 卽現大通智勝如來니라
선남자야 불은 곧 법이고 법은 곧 불이니 합하여 일상이 되어서 곧 대통지승여래가 나타난 것이니라.
 
부처의 경지란 일체의 명상이 끊어진 자리이기 때문에 이름이 붙을 수도 없으나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공적인 것이다. 이러한 부처의 경지가 무위법이고 주인공이라면 일체법은 유위법이요 권속인 것이다. 본 바탕이 있으니 그림자가 있고 주인이 있으니 권속이 있는 것과 같이, 무위법과 유위법은 본래로 양립해서 각각 독립된 존재로서 동시에 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무위법이 있으니 유위법이 존재하고 유위법이 있으니 무위법의 존재도 확연해지고 또 무위법을 치장하게 되는 것으로, 무위법과 유위법은 서로가 따로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고 공생공사하는 공동운명체로서 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는 분명히 둘이면서도 하나요 하나이면서도 둘인지라 갈라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서 不二인데 이와 같은 불이의 경계를 도저히 말로서 딱 잘라서 단정지을 수가 없다. 그러니 묵언으로서 불이법문을 설할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본래로 불법의 근본은 동체평등하며, 공적한 면으로서 보나 서로와의 관계에서 보나 불가분으로 부처경계와 유위법을 不二라고는 하지만, 청정한 본원각성과 허망한 티끌경계인 유위법을 곧 하나라고는 단정지을 수 없고, 또 혼동해서도 안되는 참으로 미묘한 不二인 것이다. 그러나 각경지에서는 그러한 차별상이 있을 수가 없고 동체평등하여서 不二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공상이라는 자취가 남아 있는 이상은 결코 하나는 아닌 것이다. 공상의 자취가 영원히 사라져야만 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리요달이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리요달하면 佛과 法이 一相이 되어서 곧 대통지승여래의 경지가 되는 것이다.

 

 

11. 결언

 

佛說此經時에 一切大地가 六種震動하고 光照天地하야 無有邊際하고 浩浩蕩蕩하야 而無所名이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실 때에 대지가 육종으로 진동하며 광명이 천지에 비치어 가이 없었으며 호호탕탕해서 이름할 수가 없었다.
 
세존께서 무아경지에서 설하는 바 없이 설하시고, 청법대중들도 무심경지에서 듣는 바 없이 들으니 실로 청정도량의 장엄한 법회가 아닐 수 없다. 일심이 청정하며 일국토가 청정하고, 일국토가 청정하면 삼천대천세계 법계가 청정한 것이다. 일체의 차별상과 분별심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진리를 설하니 그 장엄함을 언설로 표현할 수 없고 온누리가 실로 장엄불국토를 이루고 있지만 이름지을 수 없는 것이다. 의상조사 법성게에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라 하여, 무위법과 유위법 모두가 변하지 않는 부동체라 본래로 공적적멸한 것이며, 자성자리는 무엇이라 이름 지을 수 없고 또한 비어서 모습이 없으니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도단 심행처멸한 자리로 말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갈 바가 없어 일체의 자취가 없는 자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경계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실로 놀라운 법좌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一切幽冥은 皆悉明朗하고 一切地獄은  皆消滅하며 一切罪人은 俱得離苦니라
일체의 유명은 다 명랑하고 일체의 지옥은 다 소멸하여 일체의 죄인은 함께 고통을 여의었다.

 

선지식이 지옥에 있어도 지옥이 극락으로 변하고 중생이 극락에 있으면 극락이 지옥으로 변하는 실로 놀라운 소식이다.
 
爾時에 大衆之衆에 八萬八千菩薩이 一時成佛하니 號曰空王如來應正等覺이라 劫名은 離垢요 國號는 無邊이니 一切人民이 皆行菩薩六波羅蜜호되 無有彼此하며 證無諍三昧하야 逮無所得하고
이 때 대중 가운데 팔만팔천보살이 일시에 성불하니 이름은 공왕여래응정등각이었다. 겁의 이름은 이구요 국호는 무변이니 일체의 인민이 모두 보살의 육바라밀을 행하되 피차가 없음으로 무쟁삼매를 증득하여 무소득에 미치며 
 
후세중생들이 무시 이래로 나와 남을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일체 분별심 때문에 해탈하지 못한다. 그러나 원수를 대하기를 마치 자기부모를 대하듯이 하고, 나와 남을 미워하고 사랑하는 두 마음이 없으면, 곧 일체 모든 병은 뿌리채로 없어지게 되어 해탈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약 참된 내가 비어서 모습이 없고 모습이 없으니 나를 헐뜯을 사람도 없을 것이다고 하는 사실을 확연히 알게 된다면 비록 누군가가 나를 헐뜯는다고 하여도 구업만 지을 뿐이지 아무 소용이 없다. 마치 누워서 하늘을 보고 침을 뱉는 격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동체평등한 진리에 계합한다면 피차의 차별관은 없어지게 되고 무쟁삼매를 증득하게 될 것이다. 환의 티끌인 몸과 마음을 여의면 상대도 없어지게 된다. 실은 일체 유위법이 본래로 부터 공상이요 적멸한 모습이기 때문에 상대가 없는 것이다. 다만 중생심에서 모든 것을 차별상으로 보기 때문에 너다 나다 밉다 곱다 밝다 어둡다 깨끗하다 더럽다는 등의 상대가 있게 되고 환은 환을 낳아서 끝없는 환상 놀음에 끌러 다니게 되는 것이다. 만약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일체가 공상이요 적멸상이어서, 불생불멸하고 동체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차별상이 있을 수가 없고 상대도 없고 상대할 것도 없다. 대가 끊어져서 절대가 되어 상대할 바가 없으면 곧 청정 원각이요, 상적광토며 무생법락경인 것이다. 모든 보살이 이러한 일체의 집착을 여읜 경지에서 보살도를 행하니 무소득하는 것이다. 보살과 후세 중생들이, 일체의 생각에 집착하면 중생이요 일체의 집착을 놓아 버리면 깨달음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닦아 익히면 원각을 성취하게 된다. 원각을 성취하여 원각 경지에서 보면, 그 자리는 본래로 영지가 구족해 있는 일체 구족처인지라 새삼스럽게 닦아 익힐 것이 없고 성취할 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각을 증득한다고 하여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고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본래 그대로가 여여부동한 것이다.
 
六萬六千比丘比丘尼와 優婆塞와 優婆夷는 得大總持하야 入不二法門하고 無數天龍夜叉와 乾 婆와 阿修羅와 迦樓羅와 緊那羅와 摩 羅伽와 人非人等은 得法眼淨하야 行菩薩道하니라
육만육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는 대총지를 얻어서 불이법문에 들고 무수한 천룡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인비인 등은 법안이 청정하여져서 보살도를 행하였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란 불도를 닦는 사부대중들을 말한다. 四部大衆은 有佛緣인데 一悟直入 無爲地라. 불법의 근본은 동체평등한 것으로 본래로 승속의 차별없이 사부대중 누구나 올바른 정지견을 가진 스승을 만나서 각고수도하면 견성성불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고 하는 차별은 본래로 없는 것이다. 단지 중생들이 전도된 마음에서 분별하여 차별하는 것이다. 대총지란 영지와 보리와 열반과 일체의 진리와 모든 중생심과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권속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 아니라 일체의 바라밀행과 대자대비한 마음과 모든 덕과 윤리를 갖추어 온누리를 꿰뚫어서 알고 무슨 일이나 못하는 일이 없는 전지전능한 신령스러운 지혜의 구족처이라는 말이다. 대총지를 얻게 되니 불이법문에 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득대총지"이라고 하여서 得하였다고 하니 무슨 얻을 것이 있고 또 얻었다고 알겠지만 실은 문자 그대로 얻었다고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득대총지"는 모든 진리를 분명히 알았다는 뜻이지, 결코 얻었다는 뜻이 아니다. 얻음이 있으면 분명히 띠끌이다. 대총지를  얻었다면 이는 대총지가 아니라 띠끌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대총지를 얻은 것이 되지만, 문자 밖의 참된 뜻으로 볼 때 얻은 것이 아니고 진리를 증득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장들도 법안이 청정하여져서 보살도를 행하였다.
 
善男子야 若復有人이 得官登位之日과 及新入宅之時에 暫讀此經三遍하면 甚大吉利하야 善神이 加護하고 延年益壽하야 福德具足하나니
선남자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벼슬의 지위에 오르는 날과 새로운 집에 들어갈 때 잠깐이라도 이 경을 세 번 읽으면 선신이 옹호하고 장수하게 되며 복덕이 구족하나니, 
 
일체의 세간사를 영위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전생의 업보가 나타나서 무한한 고통을 받을 수가 있고, 또한 세간사를 영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법도를 어긋나게 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원한을 지을 수도 있다. 더구나 벼슬을 한다든지 새로 집을 사게 되면 많은 질시와 시기를 받을 수 있고 자신도 모르게 원한을 살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서 먼저 본 경을 세 번 읽는다는 것은 자신이 알면서 혹은 모르는 가운데 일으킬 수 있는 모든 잘못을 시정하고 마음을 정화시키고 나서 대사를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체의 잘못을 시정하고 정화된 마음에서 대사를 수행하면 아무런 해가 없이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어 무한한 복을 누리게 되고 선신의 가호도 있다는 것이다.
 
善男子야 若讀此經一遍하면 如讀一切經一遍이요 若寫一卷하면 如寫一切經一部라 其功德은 不可稱不可量하며 等虛空하야 無有邊際하야 成聖道果니라
선남자야, 만일 이 경 한 편을 읽으면 일체의 경을 한 번 읽음과 같으며, 만일 한 권을 쓰게 되면 일체 경전을 한 번 쓴 것과 같으니라. 그 공덕은 불가칭 불가량이며 허공과 같아서 가이 없으니 성도의 과를 이루리라.
 
진실로 본 경을 읽고 수도한다면, 본 경에 팔만대장경의 골수와 일체 불법의 진리의 진수가 응축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짧은 경전에 이토록 광범위한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놀라울 뿐이다. 진정으로 본 경을 무심경지에서 읽고 사본한다면 그 공덕은 한량이 없을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불도를 성취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남음이 있다.
 
復次無邊身菩薩摩詞薩이여 若有衆生이 不信正法하야 常生邪見이라가 忽聞此經하고 卽生誹謗하되 言非佛說하면 是人은 現世에 得白癩病하야 惡瘡濃血이 遍體交流하며 醒燥臭穢를 人皆憎嫉타가 命終之日에 卽墮阿鼻無間地獄하야 上火徹下하고 下火徹上하며 鐵槍鐵叉는 遍體穿穴하며 融銅灌口에 筋骨이 爛壞하야 一日一夜에 萬死萬生으로 受大苦痛하야 無有休息이니 謗斯經故로 獲罪如是니라
다시 무변신보살마하살이여, 만일 어떤 중생이 정법을 믿지 않고 항상 사견을 내다가 문득 이 경을 듣고 비방을 하여 불설이 아니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현세에서 백문동병을 얻어 나쁜 창병으로 얽힌 피가 온몸에 철철 흐르며 더러운 냄새를 풍기어 사람들이 미워하게 되며 목숨이 마치는 날에 곧 아비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위불이 아래로 뻗치고 아래불이 위로 사무치며 쇠창과 쇠방망이가 온몸에 구멍을 뚫으며 구리 녹인 물을 입에다 부어 힘쭐과 뼈가 문들어져서 하루날 하루밤에 만번 죽고 만번 살아나는 큰 고통을 쉴새없이 받나니, 이 경을 비방하여 이러한 죄를 받느니라.
 
본 경을 비방하였을 때 받게 되는 과보를 말하고 있다. 진실로 정법을 비방한 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대중이 진리의 길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며, 호법성현들의 진노함이 한량없기 때문이다. 경에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있어서 거룩한 도를 닦아서 뭇 사람들을 교화시켜서 백천만억의 아라한과와 벽지불과를 성취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있어서 원각의 무애법문을 듣고서 이에 따라 일찰나간만 닦아 익히는 것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이는 일찰나간만이라 해도 원각에 들 수 있는 대승법문이기 때문에 소승과 따위는 비할 바가 못되니 모름지기 대승법문에 들어서 닦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그러니 하잘 것 없는 소승과 따위에 집착하지 말고 대승법문에 들어서 원각을 성취해야 한다. 만약에 원각을 성취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승법문에 들어야 되지 소승과 따위에 집착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리가 이러하니 아예 소승과 따위에는 거들떠 보지도 말고 오직 대승과만을 얻기 위해서 수도하는 것이 정법이라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법의 진수를 가르치고 있는 본 경을 비난하여 대중들이 본 경을 공부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 죄가 얼마나 크겠는가!


佛爲罪人하사 而說偈言하사대 身是自然身이요 五體自然足이며 長乃自然長이요 老則自然老며 生乃自然生이요 死則自然死라 求長不得長이요 求短不得短이니라 苦樂汝自當하고 邪正由汝己라 欲作有爲功인댄 讀經莫問師하라 千千萬萬歲에 得道轉法輪이니라
부처님께서 죄인을 위하사 게송을 말씀하셨다. 몸은 자연의 몸이니 오체가 자연히 구족하여 크는 것도 자연히 크고 늙는 것도 자연히 늙으며 나는 것도 자연히 나고 죽는 것도 자연히 죽으며 길고자 해도 길 수 없고 짧으려 해도 짧을 수 없다. 고와 낙은 네가 스스로 당하고 삿되고 바름도 너로 말미암아 있다. 유위 공덕 짓고자 하면 이 경을 읽을 것이요 스승에게 묻지 말라, 천천 만만세에 도를 얻어 법륜을 굴리게 될 것이다.
 
몸과 오체는 자연스레 본래로 구족되어져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하여 작위적으로 창조되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부디 이 진리를 굳게 믿어 절대자에 의한 창조설 따위를 운운하는 사교에 현혹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자연 그대로 구비되어져 있었지만 음양의 조화에 따라 그 운동이 천변만화할 뿐이다. 왜 그런 운동이 잠시 잠깐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것인가? 잠시 잠깐이라도 운동하지 않으며 일체가 썩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짠 바다물이라도 조수의 운동을 거듭하지 않으면 썩게 마련이다. 이렇게 잠시 잠깐도 쉬지 않고 법륜을 굴리니 날날이 새롭고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이 운동이 조금도 사심이 없고 불편부당하게 운행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 다만 중생들의 전도된 마음 때문에 자업자득과 자승자박에 의하여 천차만별한 변화상을 보일 따름이다. 이 경을 읽고 스승에게 묻지 말라는 것은, 이 경의 진리에 따라 행할 것이며 삿된 스승을 찾아가서 점이나 치고 궃이나 하는 것을 삼가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영원히 도를 얻어 법륜을 굴리게 된다는 것이다. 중생들은 인연에 얽매이어 인연에 따라 행동하며 인연에 따라 일어났다가 없어지지만 도에 통달한 사람은 인연에 주착하지 않고 행동한다. 즉 도를 통했다고 인연을 끊어 없애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인연에 얽메이지 않을 뿐이다. 즉 중생들은 인연법에 끌려 굴리어 다니고 깨달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 인연법을 굴리며 외부의 경계에 응하여 무애행을 할 따름이다.
 
佛說此經已하시니 一切大衆이 得未曾有하야 心明意淨에 歡喜踊躍하며 皆見諸相非相하고 入佛知見하고 悟佛知見하야 無入無悟하고 無知無見하고 不得一法이 卽涅槃樂하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말씀하시니 일체 대중이 미증유한 진리를 얻어서 마음이 밝고 뜻이 깨끗하여 기뻐서 날뛰며 모든 형상이 형상 아님을 보고서 부처지견에 들어 부처지견을 깨달았지만 들어감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으며 하나도 얻음이 없는 것이 곧 열반의 기쁨이다. 若以色見我 音聲以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니라. 나의 모습을 보고 부처라고 하거나 나의 음성을 듣고 부처라고 하는 사람은 邪道를 행하는 것으로 부처를 볼 수 없다. 즉 성불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외부적인 形相이나 名相에 집착하여 부처를 구하는 사람은 결코 부처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라.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니라. 성현이 되어야 비로소 성현을 알아볼 수 있는 법인데, 여래를 본다는 것은 자신이 부처지견을 깨우쳐 부처지견에 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깨우쳤다든가 들어갔다는 자취가 있으면 이는 깨우친 것이 아니고 들어간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경지이니 무지무견이며 한 법도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이미 얻은 것이 있고 본 것이 있으면 이는 티끌 경계이지 청정한 열반경계가 아닌 것이다. 이로써 본 경의 강론을 마치고자 하니 부디 이 글을 믿고 고행수도를 쌓아서 견성성불하고 그 연후에는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찔러 울고 있는 가련한 중생들을 제도하여 다 함께 성불하기를 바라고도 바랄 뿐이다.
 


 

 

제 3 부  법성게 소개
혜월당 법성게 소개
의상조사의 법성게
海東禪院 家風
혜월당 법성게 소개

 

(본문)
一切萬法(일체만법)은 寂滅相(적멸상)인데 靈鷲山頭(영취산두)에는 白雲飛(백운비)라
二乘難免(이승난면) 生死海(생사해)대 更待何時(갱대하시) 作佛身(작불신)고
三千大界(삼천대계)가 是莊嚴(시장엄)인데 萬法(만법)은 唯心(유심)이요 恰似夢(흡사몽)이라
四部大衆(사부대중)은 有佛緣(유불연)인데 一悟直入(일오직입) 無爲地(무위지)라
五欲煩惱(오욕번뇌)가 卽菩提(즉보리)데 何期勞心(하기노심) 播古紙(파고지)요
六趣衆生(육취중생)은 自作業(자작업)인데 隨緣起沒(수연기몰)은 亦妙用(역묘용)이라
七寶布施(칠보보시)는 有漏福(유루복)인데 觀心一法(관심일법)은 無漏德(무루덕)이라
八萬藏經(팔만장경)은 如來財(여래재)대 修心見性(수심견성)은 衆生寶(중생보)라
九天虛空(구천허공)은 無碍心(무애심)인데 空空大空(공공대공)은 平等心(평등심)이요
十億國土(십억국토) 法性界(법성계) 日用心中(일용심중) 處處開(처처개)라

 

< 강론 >
일체 만법, 즉 외부적으로는 일월성진과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을 말하는 형상과 내부적으로 생각의 자취가 남아 이름의 모습을 띠는 명상 등 중생심으로 집착하여 생기는 일체의 모습들이 변하지 않는 고요하고 적적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시시각각 한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는데 어떻게 해서 적멸상인가 ?  아무리 변해  돌아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제자리 왔다가는 돌고 하는 식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변하는 것이 아니고 고요하고 적적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또 보는 견지가 아주 높고 원대하다면, 모든 중생들의 삶이 제자리에서 우글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처경지에 이르면 무애경지이기 때문에 변화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만 그대로 如如한 모습이 될 것이다.

 

영취산은 석가세존께서 수도하여 득도하신 곳으로 청정법신인 본래면목을 상징하며, 백운은 뜬 구름으로 참다운 것이 아니라 허깨비와 같은 거짓된 모습으로 환상을 의미한다. 영취산 위에 백운이 날린다는 것은 본 바탕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같이 청정법신인 본래면목이 있으며 그의 권속으로 반드시 환된 중생심이 있어 망상경계를 이루어 간다는 것이다. 즉 眞妄二心本來俱有 雖假緣合 互相不生이라. 眞妄二心은 본래로 양립되어서 존재하며, 다만 인연화합으로 이합집산이 무상한 것 같이 보일 따름이다. 엄연히 眞妄二心은 본래로부터 양립되어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서로를 낳지 못하는 법이다.


또 眞是眞妄不生 妄是妄眞不生이라. 진심 자성은 진심일뿐 망심인 중생심을 낳지 못하고, 망심은 망심일뿐 진심을 낳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바늘이 가는데 실이 따라 가듯이, 형체와 그의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하듯이, 진심과 망심이 동시에 각각 독립되어 존재한다. 그러나 망심은 진심을 여윈 것도 아니며,  진심은 바탕이 되고 망심은 작용을 함으로써 진심의 존재가치도 나투게 되고 진심자체를 치장하고 장엄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에 진심만 있고 망심이 없으면 진심의 존재가치도 상실되고 아무 작용도 할 수 없으니 진심이 있은들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또 만약 진심이 없다면 망심은 존재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진심과 망심은 서로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공생공사하는 공동의 운명체로서 이것을 무슨 수로 서로 갈라놓을 수가 없으니 不二라는 것이다.

 

二乘이란 부처님께 절이나 하고 공양이나 올리고 복이나 빌고 하는 기복불교와 자기 혼자만 고집멸도의 사제법문이나 십이인연법을 깨치는 성문 연각 등의 소승불교를 말한다. 이런 이승불교로는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 해탈할 수 없으니 이승불교만 하여서는 어느 세월을 기다려서 성불하겠는가? 이승불교로는 성불할 수 없으니 대승도리를 깨달아서 성불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또 생사를 벗어난다고 하니 마치 본래부터 있는 생사를 벗어나는 것과 같이 생각되겠지만, 본래로 생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생들이 뒤바뀐 생각으로 생사가 있는 것 같이 보고 생사에 집착함으로써 생사 윤회의 고통을 끝없이 반복할 따름이다. 그렇지 않고 깨달음으로써 원래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새로이 생긴다면 그것은 인과법과 윤회법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법계는 법칙성도 없어지고 일대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三千大千世界, 즉 온누리의 법계가 엄격한 법칙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형성되며, 법칙의 적용이 엄연하며 철저하여 그 모습이 엄숙하고 위엄이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일체의 유위법은 중생심의 전도된 마음으로 만들어 내어, 좋고 나쁘고 밉고 곱고에 집착하는 데 지나지 않아서 마치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다. 그러니 꿈 노름을 하지 말고 우주의 진리를 깨쳐서 실다운 생을 영위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四部大衆, 즉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의 불도를 닦는 모든 대중들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는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옳은 스승을 만나 열심히 불도를 닦는다면 한 번 크게 깨달아서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五欲, 즉 재욕, 색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의 다섯 욕심에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움을 겪는 중생계가 바로 깨달음의 길인 것이다. 즉 중생노름 가운데 주착하지 않는 무애경지에 들면 이것이 바로 깨달은 부처의 경지요, 주착하게 되면 중생들의 꿈 노름인 것이다. 그런데 팔만대장경이란 헌 종이조각을 헛되이 읽고 있는가! 도가 경전 속에 있는 것도 아니요 부처님 말씀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중생들의 오욕 가운데 있는 것이다. 오욕 번뇌속에 있으면서도 무주무착의 무위행을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실된 부처의 경지인 것이다.

 

六趣,  즉 천, 인,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 등 여섯 취향을 갖는 중생의 삶은 자기 스스로 지은 업보에 따라 스스로의 마음으로 조작하여 만든 것이지 환경에 그런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인연에 따라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은 생겨난 그것이 없어지고, 없어진 그것이 다시 생겨나는 묘한 작용이더라.

 

七寶의 보배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적선한 것은 착한 일을 한 마치의 복을 받으면 없어지는 유한한 것이고 영원한 것은 아니지만 중생들이 성불하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한 공덕은 새지 않는 영원한 복덕이 되는 것이다. 八萬의 무수히 많은 경전들은 석가여래의 소득이지 우리들 자신의 것은 아니며 우리들이 직접 수도하여 견성성불한 것만이 우리들 자신의 보배인 것이다.

 

九天虛空, 즉 무변허공은 자성과 불가분인 것이다. 자성이란 일체를 인식하고 응하지만 끌려가거나 치우치지 않고 어떠한 경계에도 무주무착하는 무애경지이며, 모든 지혜와 자비심을 묘하게 갖추고 있는 진공인 것이다. 이러한 자성자리에는 일체의 차별과 분별이 없는 그런 평등한 것이다.

 

十億國土, 즉 온 우주 전체는 진리의 세계이며 이는 날마다 생활하는 마음가운데에 있는 것으로, 이러한 일상의 생활을 벗어나서는 진리도 없고 부처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진리가 이러하니 일상의 생활을 벗어난 외부의 별천지에서 진리를 구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 본문 >
如如不動(여여부동)에 照而常寂(조이상적)하고 兀兀廻光(올올회광)에 寂而常照(적이상조)로다.
觀心一法(관심일법)이 總攝諸行(총섭제행)인데 幻知幻離(환지환리) 卽是覺(즉시각)이라.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인데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 一切(일체) 唯心造(유심조)라.
諸法從(제법종) 本來(본래) 常自寂滅相(상자적멸상)
常寂光土(상적광토)가 無生法樂(무생법락)이요.
我不知我(아부지아) 因無明(인무명)인데 我知我(아지아) 卽是見性(즉시견성)이라.
空理了達(공리요달)에 一切放下着(일체방하착)하니 卽是覺(즉시각)이요.
了知一切法(요지일체법)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本來로 너도 비였고 나 또한 비였는지라 무엇을 貪着하고 또 무엇을 놓는다 하는고

 

< 강론 >
자성은 비여서 형체가 없음으로 오고 가고 함이 없이 그만 그대로 변화하지 않는 부동한 가운데서 온갖 경계에 응하지만 주착하지 않는 것이다. 견성할려고 마음을 살피는 한 법이 모든 착한 행을 다 겸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 유위법이 환된 것이라는 것을 확연히 깨쳐 알면 환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 경지가 바로 깨달은 경지이다.마음에 머무르는 바 없이 한 생각을 내고 한 생각을 내어서 작용을 하되 거기에 주착하지 않음이 참된 부처경지이며 참된 자성 자리인 것이다. 온 누리의 진리의 세계를 살펴보니 중생계 모두가 각기 마음에서 집착하여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더라.일체 유위법이 본래로부터 변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고 적적한 모습이며, 항상 적멸한 경계인 자성자리는 나는 것도 아니며 죽는 것도 아닌 생사가 본래로 없는 자리이다. 내가 참된 나인 자성을 모르는 것은 무명때문인데 내가 나의 주인공인 자성을 알 것 같으면 견성인 것이다. 일체의 형상과 명상이 空相이라는 空의 이치를 통달하여 모든 중생계가 환상임을 알고 집착을 놓아버린 무주무착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깨달음이다. 일체 유위법인 형상과 명상에는 자성이 없어 참다운 것이 아닌 허망한 것이며, 법성을 이와 같이 알 것 같으면 노사나불을 보는 것이다. 본래로 너나 내나 자성은 진공으로 비여서 형체가 없으며 몸 역시 본래로 공적적멸한 빈 모습이요 공상으로 참된 것이 아닌 환상과 같은 것인데 무엇이 실답게 있다고 집착하고 또 놓는다고 하겠는가 ?

 

< 본문 >
空寂(공적)이 空寂아니라 靈智(영지)가 空寂이요 虛空이 虛空아니라 般若가 虛空이라
若無靈智(약무영지)면 斷滅空(단멸공)이요 若無般若(약무반야)면 斷滅寂(단멸적)이라
一切의 分別을 놓아버리면 그대로가 菩提(보리)로다.
오늘의 行이 因이 되어서 來日의 열매를 맺는도다.
天地를 뛰어넘는 한 길이 있으니 空理에 了達해서 一切 放下着함이로다.
내라는 한 생각은 萬法을 세우고 한 생각에 머물지 아니함이 부처니라.
凡所有相(범소유상)이 皆是虛妄(개시허망)이라
若見諸相非相(약견제상비상)이면 卽見如來(즉견여래)니라

 

< 강론 >
비어서 적적한 것이 비어서 적적한 것이 아니라 영지가 비어서 적적한 것이다. 이 신령스런 지혜는 일체에 주착하지 않기 때문에 고요하고 적적한 것이다. 허공이 허공 아니라 반야의 지혜인 자성이 허공인 것이다. 본래 허공도 비었고 자성도 비었으니, 빈 것을 둘로 갈라 놓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반야가 허공이고 허공이 곧 반야인 것이다. 이는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니면서 또한 하나가 아님도 아니다. 만약에 이러한 영지가 없다면 한번 없어지면 영영 다시는 생하지 않는 아무 것도 없는 단멸에 떨어질 것이다. 만약에 자성이 없다면 고요하고 적적하다는 것조차 끊어 없어져 버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연법과 윤회법도 없어져 우주는 그 날로 끝장이 날 것이다. 그러니 일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은 하되 모든 분별심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면 그대로 깨닫음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행이 원인이 되어서 내일의 결실을 가져오는 것이므로, 나도 부처와 같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성불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오늘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수도하여야 할 것이다. 중생경지를 뛰어넘어 부처가 될 수 있는 한 길이 있으니, 그것은 色卽是空이라는 空理에 통달하여 일체의 집착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대한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면 오만가지 망상이 줄을 이어 나오고, 나라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모습은 자성이 없어 실다운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이니 모든 모습을 非相으로 본다면 곧 부처의 경지이다.

 

< 본문 >
若以色見我(약이색견아) 音聲以求我(음성이구아)
是人行邪道(시인행사도)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라
無住는 萬行의 大本이요 萬行은 無住의 大用이라
生也一片浮雲起(생야일편부운기)요 死也一片浮雲沒(사야일편부운몰)인데
本無求處(본무구처)에 何煩惱(하번뇌)며 本無貪處(본무탐처)에 何住着(하주착)고
無爲精舍(무위정사)에 人影絶(인영절)하니 野牛一聲(야우일성)에 虛空裂(허공열)이라
茫茫無際(망망무제) 大虛鏡(대허경)인데 無根樹影(무근수영)은 九萬里(구만리)라
雖顯三大界(수현삼대계)나 不免轉法輪(불면전법륜)이요
如何是我 主人公가 非身非心非佛者로다
諸法從本來(제법종본래) 不生亦不滅(불생역불멸)
應觀衆生界(응관중생계) 一切(일체) 唯心作(유심작)이라 

 

< 강론 >
나의 모습을 보고 부처라고 하거나 나의 음성을 듣고 부처라고 하는 사람은 邪道를 행하는 것으로 부처를 볼 수 없다. 즉 성불할 수 없다는 뜻이다. 無住 즉 일체 경계에 응하여 행하되 집착하지 않는 것이 모든 行의 근간이 되며 모든 行은 無住의 대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無住의 참뜻을 깨쳐 모든 경계에 있어서 見而不見 聞赤不聞 行不知行 坐不知坐의 無住無着이 된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경지인 것이다. 生은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死는 뜬 구름이 없어지는 것과 같은 허망한 것으로 부귀공명과 희노애락이 한낱 꿈노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허망한 것을 참된 것으로 알고 집착하고 있는 것이 중생심이다. 그러나 자성자리에는 이와 같이 그릇된 생각을 놓아버린 본래부터 구할 것도 없고 탐할 것도 없으며 번뇌와 주착함도 없는 자리이다. 그렇지만 만약에 청정한 실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역시 집착이 된다. 청정한 실상이라는 생각도 놓아 버려야 참된 청정한 실상이다. 그래서 佛法의 根本은 同體平等이요 佛道의 大本은 無住無着이라고 하는 것이다.


無爲精舍란 함이 없는 수행자의 집이라는 뜻으로 자성을 의미한다. 이 자성안에는 일체 망상과 잡된 생각들이 없지만 외부의 경계에 응하여 무위행을 할 뿐인데 법계에서는 자성안에 일체만물이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으로 잘못 알고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음을 본다. 구체적으로 비유하면 깨끗한 여의주에서 오색 찬란한 빛이 일어나고 비추는 방향에 따라서 각각 다른 빛이 일어나면, 어리석은 무리들은 깨끗하고 맑은 구슬이 있기에 오색은 구슬에 비치는 광선의 반사작용으로 비치게 되는 영상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그릇 알고 마치 맑고 구슬안에 실제로 오색이 들어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자성의 청정한 성품이 있음으로 해서 그의 그림자격으로 있게 되는 환된 마음이 각각 업과 연에 따라서 천차만별한 몸과 마음을 나투는 것인데도 어리석은 중생들은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청정한 자성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릇되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변화가 무상하고 유동적인 것이 원각경지인 줄 그릇되게 알아서, 자기의 환신과 환심이 곧 자성의 모습인양 알고 있다.

 

들소가 운다는 것을 자성을 가진 주인이 움직이니 거짓된 환상이 부셔져 없어지더라는 뜻이다. 망망무제는 비고 비어서 무변허공과 같이 한계가 없는 자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성이란 한없이 크고 빈 거울과도 같이 모든 것을 환히 비추고 다 알고 있으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근수란 자성이 비고 비어서 뿌리 박을 곳 없는 나무와 같으며 그 자성의 그림자와 같은 환영들이 온 누리에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탐진치의 삼독심에 의한 욕계, 색계, 무색계를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윤회법을 쉬지 않고 돌리기 위하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것이 참된 나의 주인공인가 몸도 마음(중생심)도 부처도 아닌 것이다. 그러면 참된 나란 무엇인가 ? 만법이 본래로 새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있는 그것이 없어졌다가 생겨나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다. 만약에 새로 생겨나고 있는 것이 없어지게 되면 단멸에 떨어지게 될 것이며 일체법의 운용이 정지되게 될 것이다. 일체 중생 세계가 모두 마음의 조작이더라.

 

< 본문 >
千經萬論(천경만론)이 案內夫(안내부)요 金言玉說(금언옥설)은 方便婦(방편부)라
黃金雖貴(황금수귀)나 不免輪廻(불면윤회)요 道光不見(도광불견)이나 能破六趣(능파육취)로다
至道는 默言(묵언)이요 無心은 곧 涅槃(열반)이라
妄心不除(망심부제) 眞不求(진부구)라
無相을 體로 하고 無生에 安住하여
無染(무염)한 生活을 하면 그대로가 無上菩提요 無碍解脫(무애해탈)이로다.

 

< 강론 >
무수히 많은 경전과 논서들이 부처의 길을 안내하는 안내사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리 좋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부처의 길로 이끌어 주는 방편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문자밖의 참뜻을 알도록 수도하여야 한다. 황금이 제 아무리 귀하고 하늘을 찌르는 위력을 가졌다고 해도 윤회를 면할 수 없고 불도의 빛은 비록 보이지 않으나 능히 육취를 부수어 버린다. 그러니 헛되이 부귀공명에 집착하지 말고 고행수도를 하여 불도를 성취하도록 하여라. 지극한 도인 자성은 묵언이요, 주착하지 않기 때문에 있으면서도 없는 무심한 경지이며 이것이 곧 깨달은 경지이다. 망상심이라고 버려야겠다, 진심이라고 구하여야겠다는 분별심을 갖지 말고 일체에 주착하지 않도록 하여야 이것이 진실된 부처경지이다.  무상인 자성을 본 바탕으로 하고 생사에 얽매이지 않으며, 망상에 물 들지 않는 생활을 하면 그대로가 최고 최상의 깨달음이며 일체에 구애받지 않는 해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을 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며 남의 글을 보아서 되는 것도 아니며 직접 계정혜의 삼학문을 닦음으로써 증득하여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을 읽고 진정으로 발심한 사람이 있다면, 기나긴 성불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도반이 되었으면 한다.

 

 

출처 : 미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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